LOGIN“빨간 덧문 집 옆에 옆집이요. 아니, 옆에 옆에 옆집.”
아이가 울면서 말했다. 성문 앞이었다. 동생이 열이 난다고 했다. 설사를 하고 얼굴이 잿빛이라고.
눈이 녹기 시작한 지 이레째였다. 루엔은 아홉 살 생일을 나흘 앞두고 있었다.
마르타가 아이를 따라 내려갔다. 한참 뒤에 혼자 돌아왔다.
“빨간 덧문 집이 둘이더라고요. 개울 아래쪽에 하나, 방앗간 쪽에 하나.” 마르타가 숨을 몰아쉬었다. “엉뚱한 데 가서 문을 두드렸어요.”
잿빛열은 해마다 왔다. 원래 그랬다. 그리고 올해는 그 원래가 어디서 시작했는지부터 헷갈렸다.
*
그날 저녁 가렛 방에 셋이 모였다. 가렛, 루엔, 그리고 숲에서 내려온 오스윈. 오스윈이 성에 내려온 것은 처음이었다.
루엔은 밀랍판을 폈다. 지난봄에 적어 둔 것이었다. 어느 집에서 앓았는지. 그때는 번호가 없어서 이렇게 적혀 있었다. 대장간 아래 셋째 집. 토빈네 앞집. 굴뚝 없는 집 중 개울 쪽.
“열아홉 집이 앓았습니다. 그중 열넷이 아래 우물 물을 먹는 집입니다.”
노르벡에는 우물이 둘이었다. 광장 우물과 아래 우물. 아래 우물은 마을 아래쪽 집들 한가운데, 길옆 도랑 곁에 있었다.
“도랑에는 요강을 비웁니다.” 루엔이 말했다. “눈이 녹으면 도랑물이 넘칩니다. 아래 우물은 돌 테두리가 무릎 높이도 안 됩니다.”
가렛이 오스윈을 보았다.
오스윈은 한참 말이 없다가 입을 열었다.
“고인 물은 썩네. 썩은 물이 스민 우물은 탑에서도 안 쓰네.” 오스윈이 말했다. “나는 해안에서 둑 일을 오래 했네. 큰물 지나간 마을엔 꼭 병이 돌았어. 까닭은 몰랐지만.”
“까닭을 모르셔도 막을 수는 있습니다.” 루엔이 말했다. “물이 섞이는 길을 끊으면 됩니다.”
가렛은 밀랍판을 오래 보았다. 그러고는 짧게 말했다.
“몇 가지냐.”
“다섯 가지입니다.”
*
첫째. 아래 우물 둘레에 돌을 허리 높이까지 쌓는다. 뚜껑을 덮는다. 도랑은 우물에서 떼어 돌린다.
브란과 석공 벤노가 이틀 만에 쌓았다. 벤노는 루엔이 말한 높이보다 한 켜를 더 쌓았다. “허리는 사람마다 다르니께.”
둘째. 요강을 길이나 도랑에 비우지 않는다.
셋째. 그럼 어디에 비우느냐. 마을 아래쪽, 우물들보다 낮은 땅에 구덩이를 파고 널빤지로 둘러 뒷간을 만든다. 여럿이 같이 쓰는 뒷간.
“우물에서 몇 걸음이냐.” 가렛이 물었다.
루엔이 아버지를 보았다. 아버지가 먼저 걸음 수를 물었다.
“백스무 걸음 넘게입니다. 아래쪽으로.”
“누구 걸음으로.”
“아버지 걸음으로 하겠습니다. 제 걸음이면 더 가까워집니다.”
가렛이 직접 걸었다. 백스물세 걸음 자리에 말뚝을 박았다.
요강 일은 첫날부터 말썽이었다. 밤중에 뒷간까지 백 걸음 넘게 걷고 싶은 사람은 없었다. 이튿날 아침 도랑에 또 누런 물이 흘렀다.
가렛은 누구 집인지 묻지 않았다. 대신 기사 둘을 새벽마다 도랑길에 세웠다. 창도 들리지 않고, 그냥 서 있게만 했다.
사흘 뒤 도랑물이 맑아졌다.
“벌을 안 주셨습니다.” 루엔이 말했다.
“보는 사람이 있으면 벌이 필요 없다.” 가렛이 말했다. “네 창문 밑 기사들한테 배웠다.”
*
넷째가 번호였다.
앓는 집을 찾아가려면 집을 불러야 했다. 루엔은 다섯 살 여름에 집을 센 적이 있었다. 개울 위쪽부터 일흔한 채. 그 순서 그대로 문설주에 숯으로 번호를 적었다. 펠릭스가 루엔 글자로 적고, 그 아래 옛 글자로도 적었다.
일곱 번째 집에서 막혔다.
아낙이 문 앞을 막아섰다. 두 팔을 벌리고.
“일곱은 안 돼요.”
“일곱 번째 집입니다.”
“일곱은 궂은 수예요. 이 고장 사람은 다 알아요. 일곱째 날엔 씨도 안 뿌려요. 우리 집에 일곱을 달면 올봄에 누가 죽어요.”
루엔은 아낙의 얼굴을 보았다. 농담이 아니었다.
“그럼 일곱을 빼고 여덟으로 가면 셈이 틀립니다. 일흔한 채가 일흔두 채가 됩니다.”
“그건 도련님 사정이고요.”
뒤에서 펠릭스가 헛기침을 했다. 루엔은 잠깐 생각했다. 번호는 문에 달려고 만드는 게 아니었다. 명부에 적어 찾으려고 만드는 것이었다.
“문에는 다른 걸 적겠습니다.”
“뭘요.”
“여섯 다음 집.”
아낙이 눈을 끔뻑였다. 여섯은 궂지 않았다. 다음도 궂지 않았다.
“… 그건 괜찮네요.”
그래서 일곱 번째 집 문설주엔 「여섯 다음 집」이라고 적혔다. 펠릭스가 적느라 옆 집보다 오래 걸렸다. 루엔의 명부에는 일곱이라고 적혔다.
마흔한 번째와 마흔두 번째 집 앞에서 한 번 더 막혔다.
두 아낙이 동시에 나왔다. 루엔이 다섯 살 때부터, 아니 그 전부터 우물 차례로 다투던 두 집이었다.
“왜 저 집이 마흔하나고 우리가 마흔둘이에요.”
“개울 위쪽부터 셌습니다. 저 댁이 한 집 위에 있습니다.”
“그럼 우물도 저 집이 먼저예요? 번호가 앞이라고?”
루엔은 두 집을 번갈아 보았다. 마흔하나, 마흔둘. 하나는 홀수, 하나는 짝수.
“날짜가 홀수인 날은 홀수 집이 먼저 긷습니다. 짝수인 날은 짝수 집이 먼저 긷습니다.”
두 아낙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가 동시에 닫았다. 한 달에 반은 제가 먼저였다. 반은 저 집이 먼저였다.
“… 서른하루 있는 달은요.” 마흔두 번째 집 아낙이 물었다.
“그달은 마흔한 번째 집이 하루 더 먼저입니다. 대신 서른 날 있는 달 다음 달 첫날은—”
“됐어요, 됐어.” 마흔한 번째 집 아낙이 손을 저었다. “그 정도면 됐어요.”
펠릭스가 명부 여백에 그 규칙을 적었다. 몇 해 묵은 다툼이 한 줄로 끝났다.
*
다섯째는 대야였다.
루엔이 그림을 그리고 브란이 만들었다. 나무 기둥 둘 사이에 물통을 매달았다. 통 밑에 끈을 달아 발판에 이었다. 발판을 밟으면 통이 기울어 물이 졸졸 흘렀다. 발을 떼면 통이 도로 섰다. 기둥에는 새 비누 한 덩이를 끈에 매달았다.
“손으로 통을 잡으면 더러운 손이 통에 닿습니다. 그러면 통이 더러워집니다.” 루엔이 말했다. “발로 밟으면 손은 씻을 때만 씁니다.”
발 대야는 두 우물가와 뒷간 앞에 섰다. 모두 넷.
사흘째 아침, 아래 우물가 대야 통이 비어 있었다.
염소였다. 서른여섯 번째 집 염소가 발판을 밟고 서서 흘러내리는 물을 받아 마시고 있었다. 머리를 통 밑에 들이밀고.
루엔은 염소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끈을 꺼냈다. 염소 앞다리 길이를 재고, 뒷다리로 섰을 때 입이 닿는 높이를 쟀다. 염소는 순순히 재어졌다. 물을 마시는 중이었으니까.
브란이 통을 한 뼘 반 높이 매달았다. 끈도 그만큼 늘였다. 사람 손은 닿았다. 염소 입은 안 닿았다.
염소 주인은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우물가에서 자랑하고 다녔다.
“우리 염소가 이 마을에서 제일 먼저 씻었소. 도련님이 치수까지 재 가셨다니까.”
*
그래도 잿빛열은 왔다. 우물을 막기 전에 마신 물이 이미 있었다.
스무 번째 집에서 사람이 성으로 뛰어왔다. 핌의 손자였다. 문 위에 두 조각 막대가 걸린 집.
아이는 짚 위에 누워 있었다. 입술이 갈라졌다. 눈이 쑥 들어가 있었다. 핌이 옆에 앉아 아이 손을 쥐고 있었다.
“물을 줘도 다 쏟아요.” 핌의 며느리가 말했다. “먹는 대로 나와요.”
잿빛열에 죽는 아이는 열로 죽는 게 아니었다. 말라서 죽었다. 전생에 읽은 적이 있었다. 물만 주면 빠져나간다. 소금과 단것을 알맞게 섞은 물은 몸에 남는다.
알맞게. 그게 문제였다.
루엔은 품에서 숟가락을 꺼냈다. 이틀 전 브란이 만든 것이었다. 쇠로 두드린 긴 숟가락, 칸이 셋. 한쪽 끝의 큰 칸은 꿀, 가운데 칸은 설탕, 다른 끝의 작은 칸은 소금.
“설탕이 있는 집은 가운데 칸, 없는 집은 꿀 칸입니다. 꿀과 설탕은 한 숟가락에 단 정도가 다릅니다. 그래서 칸이 다릅니다.”
핌의 집에는 꿀이 조금 있었다.
루엔은 끓였다 식힌 물을 쇠잔으로 떠서 단지에 부었다. 스물네 잔. 쇠 되로 반 되. 꿀 칸을 깎아 여섯 번. 소금 칸을 깎아 한 번.
“한 줌으로 넣으면 안 됩니까.” 며느리가 물었다.
“한 줌은 날마다 두 배까지 다릅니다. 짜면 더 목이 마릅니다.” 루엔은 베르타의 한 줌을 떠올렸다. 이백열 알부터 사백 알. “칸을 깎아서 넣으십시오. 칸이 셈을 합니다.”
아이에게 조금씩 떠먹였다. 한 모금, 쉬고, 한 모금. 토하면 조금 쉬었다가 다시.
그날 밤 루엔은 성에 올라가지 않았다. 핌의 집 문간에 앉아 있었다. 명부를 폈다. 번호 옆에 앓는 사람 수를 적었다. 스물, 하나. 서른셋, 둘. 쉰둘, 하나.
새벽에 아이가 오줌을 쌌다. 며느리가 울었다. 핌이 웃었다. 이 빠진 입으로.
“오줌을 싸면 된 거라니께요. 도련님이 그러셨잖소.”
*
숟가락은 브란이 스무 개를 더 만들었다. 집집마다 앓는 사람이 있으면 하나씩 갔다. 명부에 번호와 날짜를 적고 내주고, 나으면 돌려받았다.
루엔은 세정도 썼다. 앓는 사람을 돌보는 사람들의 손에. 하지만 마법을 쓰는 사람은 루엔 하나였다. 대야는 넷이었고, 비누는 집집마다 있었다. 마법은 하루에 열 사람 남짓이 끝이었다.
“마법이 모자랍니다.” 루엔이 오스윈에게 말했다.
“그래서 대야를 만든 거 아닌가.”
“예. 마법이 없어도 되게 만드는 게 맞습니다.”
오스윈이 웃었다. 짧게. “탑에서 들으면 기절할 소리군.”
*
마을에 병이 돈 지 한 달이 넘었다.
잿빛열이 한풀 꺾이던 어느 새벽, 루엔은 명부를 들고 아래 우물 쪽으로 내려갔다. 안개가 개울을 덮고 있었다.
발 대야 앞에 누가 서 있었다.
키가 작고 마른 사람. 흰 옷 소매를 걷어 올리고 있었다. 발판을 밟고 흐르는 물에 두 손을 비비고 있었다. 끈에 매단 비누로. 손톱 밑까지.
앨드릭이었다.
루엔은 걸음을 멈췄다. 앨드릭도 멈췄다. 물이 계속 흘렀다.
둘은 잠깐 서로를 보았다.
루엔이 먼저 고개를 돌렸다. 안개 낀 개울을 보았다. 거기 무언가 셀 것이 있는 것처럼.
등 뒤에서 발판이 올라가는 소리가 났다. 물소리가 그쳤다. 발소리가 교회 쪽으로 멀어졌다.
루엔은 명부를 폈다. 교회는 번호가 없었다. 셈에 넣을 집이 아니었다.
그해 봄, 노르벡 교회 사제는 앓지 않았다.
지도는 너무 많은 걸 그리고 있었다.막료 천막 벽에 걸린 베스트리아 동부 지도였다. 황색탑 측량사들이 그린 것. 산은 산 모양으로, 숲은 나무 모양으로, 강은 굽이굽이 그대로. 마을마다 교회 첨탑이 그려져 있었다. 아름다운 지도였다.그런데 루엔이 알고 싶은 건 하나였다. 어디가 끊기면 안 되는가.산 모양도, 나무 모양도, 강 굽이도 그걸 가리고 있었다.루엔은 새 종이를 폈다. 그리고 점을 찍었다.본진. 창고 마을. 왕도. 여섯 영지의 곡식 창고. 역참 열두 곳. 여울 셋. 모두 점 하나씩.그다음 점과 점 사이에 선을 그었다. 수레가 다니는 길이면 선 하나. 다리가 있으면 선 위에 짧은 가로줄. 거리도 산 높이도 그리지 않았다. 이어져 있는지 아닌지만.마흔한 개의 점과 예순 개 남짓의 선이 남았다.테오가 어깨 너머로 보았다.“이게 지도야? 거미줄 같은데.”“지도에서 필요 없는 걸 다 뺀 겁니다.”“뭐가 필요 없는데.”“어디로 이어졌는지 빼고 전부 다.”*루엔은 선을 하나씩 손가락으로 가렸다.선 하나를 가리고, 본진에서 출발해 점을 따라가 보았다. 모든 점에 닿으면, 그 선은 끊겨도 괜찮은 선이었다. 돌아가는 길이 있었다. 닿지 못하는 점이 생기면, 그 선은 끊기면 안 되는 선이었다.예순 번을 가렸다.대부분은 괜찮았다. 길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어서, 하나를 끊으면 옆으로 돌아가면 되었다. 멀어지긴 했지만 닿았다.세 선만 달랐다.메를 강 중류의 돌다리. 창고 마을로 들어가는 지류 위 나무다리. 그리고 왕도 동쪽 문 밖, 늪 사이로 난 둑길 위 다리.셋 중 하나만 끊겨도 점들이 두 덩이로 갈라졌다
재무대신 발터 크로이츠는 숫자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루엔은 그걸 첫눈에 알았다. 왕궁 재무실 벽에 장부가 천장까지 꽂혀 있었다. 등마다 해가 적혀 있었고, 해마다 빠진 권이 없었다. 탁자 위 셈판은 알이 반들반들 닳아 있었다. 크로이츠는 쉰 남짓, 머리가 희고 손가락이 가늘었다. 루엔이 들어서자 일어나지 않고 셈판 알을 마저 튕겼다. 한 줄을 다 셈하고서야 고개를 들었다.“앉으시오. 폐하께서 곧 오시오.”왕 레지날드 2세는 정말 곧 왔다. 이번에도 작은 금테만 둘렀다. 앉자마자 본론을 꺼냈다.“봄 싸움 돈이 모자란다.”크로이츠가 장부 한 권을 펼쳤다. 숫자가 빼곡했다. 옛 셈, 금화와 은화와 동화가 스물과 열둘로 얽힌 셈이었다. 그러나 줄이 반듯했고, 끝자리가 맞았다. 루엔은 곁눈으로 합계 셋을 속으로 셈해 보았다. 다 맞았다.“가을 싸움과 겨울 대치에 든 돈이 옛 금화로 만 사천 닢.” 크로이츠가 말했다. “봄에 레오폴트 장군이 국경 성채를 되찾으려면 삯군과 공성 기구를 더 들여야 하오. 새 금화로 이천 닢이 더 있어야 하오. 세금은 가을에 걷히오. 그때까지 빌려야 하오.”왕이 루엔을 보았다.“하르트 상단이 빌려줄 수 있나.”*루엔은 대답하기 전에 수첩을 폈다.클라리사가 어젯밤 적어 준 숫자가 있었다. 하르트 상단이 제 것으로 가진 금과 은, 창고의 물건, 받을 삯. 새 금화로 치면 삼천이백 닢 남짓. 보움 상단과 왕도 상인 조합 둘이 나눠 댄 몫까지 넣은 것이었다.“빌려드릴 수 있습니다.” 루엔이 말했다. “삼백이십 닢까지.”크로이츠의 손가락이 셈판 위에서 멈췄다.“이천이라 했소.”
첫 롱 텔레포트는 눈 녹는 날 아침에 했다.참호 뒤 빈터에 원진을 그렸다. 지름 열두 걸음. 테오가 말뚝과 끈으로 원을 잡고, 루엔이 안쪽 선을 그었다. 원진 가운데에 짐 상자 둘, 그 옆에 루엔과 테오.도착지는 왕도 아스테른, 루엔 공방 뒷마당이었다. 거기엔 클라리사가 같은 크기의 원을 그려 두었다. 사흘 전 편지로 보낸 그림대로.루엔은 보정표를 펼쳤다. 여기서 왕도까지의 거리, 두 곳의 위도, 오늘 해가 뜬 시각. 땅은 하루에 한 바퀴 돈다. 여기와 왕도는 도는 빠르기가 조금 다르다. 그 차이만큼 도착하는 몸을 미리 돌려 놓는다. 열여섯 살 겨울, 모래 자루 두 개로 보인 그 셈이었다.그때는 교장과 파비오가 루엔 식으로 걸었다. 루엔은 옆에서 보기만 했다. 여섯째 고리가 없었다.지금은 있었다.“무섭냐?” 테오가 물었다.“무섭지 않습니다. 셈을 세 번 했습니다.”“나는 무서운데.”“그럼 제 옷자락을 잡으십시오. 떨어지면 셈이 틀어집니다.”테오가 루엔 옷자락을 꽉 쥐었다.루엔은 걸었다.한 번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 발밑의 흙이 진창에서 마른 돌바닥으로 바뀌었다. 코끝의 냄새가 참호 연기에서 빵 굽는 냄새로 바뀌었다. 구스타프 분점이 두 골목 건너였다.짐 상자 둘이 발치에 그대로 서 있었다. 기울지도, 밀리지도 않았다.테오가 비틀거렸다. 루엔 옷자락을 놓지 않은 채 주저앉았다.“어, 어…… 됐어?”“됐습니다. 원 가운데서 손가락 한 마디 어긋났습니다.”뒷마당 문간에서 클라리사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원 끝에 분필로 적어 둔 작은 표를 가리켰다.&l
겨울은 링겐 고개 아래에서 멈췄다.마르케스군은 고개 발치의 국경 성채로 물러나 틀어박혔다. 가을 첫머리에 빼앗은 베스트리아 성채였다. 레오폴트는 그 앞 오 리 떨어진 곳에 참호를 파고 진을 쳤다. 눈이 무릎까지 쌓였다. 어느 쪽도 성채 벽까지 가지 않았다. 가 봐야 얼어붙은 밭에서 죽을 뿐이었다.대신 새벽마다 안개가 왔다.한겨울 두 달은 조용했다. 양쪽 다 눈 속에서 장작과 곡식을 세며 버텼다. 하르트 서기들의 겨울 셈대로, 말먹이가 가장 먼저 바닥을 보였다. 레오폴트는 말 절반을 뒤쪽 고을로 돌려보냈다. 마르케스 쪽 성채에서도 말 울음이 줄었다. 저쪽도 같은 셈을 한 것이었다.첫 안개는 겨울이 끝나 갈 무렵, 아직 눈이 녹기 전 어느 새벽에 왔다. 성채 쪽에서 하얀 김이 낮게 깔려 밀려왔다. 겨울 안개치고는 이상하게 따뜻했다. 앞 참호에 닿자 병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김이 뜨거웠다. 살갗에 닿으면 붉게 부어올랐다. 눈이 따가워 뜰 수 없었다. 김이 지나간 참호 바닥은 눈이 녹아 진창이 되었고, 해가 뜨기도 전에 다시 얼었다. 병사들 발이 진창째 얼어붙었다.사흘 동안 앞 참호에서 발가락을 잃은 병사가 열넷이었다.“적색탑 복합 술식이다.” 레오폴트가 말했다. 눈썹에 서리가 앉아 있었다. “불로 물을 끓이고 바람으로 민다. 옛날에 한 번 봤다. 그땐 이만큼 오래 가지 않았는데.”“교대를 합니다.” 루엔이 말했다. “가을 싸움 뒤로 적이 바꿨습니다. 번쩍임을 세어 보면, 밤을 셋으로 나눠 돌아가며 쏩니다. 한 번에 쏘는 사람은 열넷, 쉬는 사람이 스물여덟.”적도 셈을 했다. 사흘째 오후에 바닥나는 걸 겪은 사람들이었다. 이번엔 바닥나지 않게 나눠 쏘았다.*끓는 안개를 막으려면 같은 걸로 맞서야 했다.불과 물과 바람을 한꺼
요스트는 명령서를 두 번 읽었다.창고 마을은 본진에서 서쪽으로 반나절 거리였다. 메를 강 지류 가에 곡식 창고 여든 채가 줄지어 서 있었다. 여섯 영지에서 보낸 곡식, 말먹이, 화살 다발이 전부 여기 모였다. 요스트는 그 창고 열쇠를 쥔 창고지기였다. 하르트령에서 온 사람이었다. 쉰 살, 한쪽 다리를 조금 절었다.명령서는 새벽에 왔다. 본진에서 출발한 전령이 중간 역참에서 명령을 옮겨 적어 다음 전령에게 넘겼고, 그 전령이 요스트에게 가져왔다.「71번 창고를 열어 곡식 이백 자루를 본진 빵 굽는 곳으로 보낼 것. 레오폴트.」번호 옆에 작은 글자가 하나 더 붙어 있었다. 「71-9」.요스트는 입속으로 셈했다.앞자리 일곱에 둘을 곱하면 열넷. 뒷자리 하나를 더하면 열다섯. 열다섯을 열하나로 나누면 하나에 넷이 남는다.넷이어야 했다.명령서에는 아홉이 적혀 있었다.요스트는 열쇠 꾸러미를 허리에 도로 걸었다. 창고 문을 열지 않았다. 대신 마구간 소년을 불렀다.“본진으로 가라. 가장 빠른 말로. 루엔 도련님께 이 종이를 드려라. 끝자리가 안 맞는다고.”소년이 떠나고 얼마 안 되어, 빵 수레를 몰고 온 보급 기사가 창고 앞에 섰다. 동쪽 영지 사람이었다. 말에서 내리지도 않았다.“왜 안 여나. 장군님 명령이다.”“끝자리가 안 맞습니다.”“끝자리?” 기사가 명령서를 낚아채 보았다. 번호 옆 작은 글자를 한참 보다가 코웃음을 쳤다. “이 꼬랑지 말이냐. 이게 뭐라고.”“번호가 제대로 옮겨졌는지 보는 겁니다.”“번호는 71이라고 적혀 있다. 장군님 서명도 있다. 본진에선 병사들이 빵을 기다린다. 창고지기가 장
마르케스 본대가 온 건 열흘 뒤였다.선봉 뒤로 깃발이 끝없이 이어졌다. 링겐 고개에서 내려오는 행렬이 이틀 동안 끊이지 않았다. 강 동쪽 둑 위에 천막이 들어찼다. 붉은 천막은 스무 채가 넘었다.“이만 넘는다.” 정찰대장이 보고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떨지 않으려고 애쓰는 목소리였다. “이만 오천쯤.”천막 안 사람들이 루엔을 보았다. 귀족 회의에서 삼만이 한계라고 한 사람이었다.“이만 오천이면 셈 안입니다.” 루엔이 말했다. “강 아랫마을 곡식을 우리가 먼저 옮겼으니 오래 못 버팁니다. 문제는 마법사입니다.”“몇이오.”“어젯밤 번쩍임을 셌습니다. 쏜 자리가 마흔하나. 한 자리에 한 사람이면 마흔하나.”*싸움은 이튿날 새벽에 시작됐다.적은 쉬지 않고 쏘았다. 파이어볼이 선 앞까지 와서 떨어졌다. 선을 넘으려는 마법사는 궁수가 막았다. 방패벽 뒤에서 아군은 엎드려 버텼다. 적 보병이 여울을 건너려 했고, 아군 창병이 여울 끝에서 밀어냈다.루엔은 둔덕 위에서 한 가지만 했다.셌다.번쩍임 하나에 밀랍판에 금 하나.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한 시간이 지날 때마다 금을 묶어 따로 적었다. 이 세계의 한 시간, 낮을 열둘로 나눈 그 한 칸.첫날 번쩍임은 삼백열두 번이었다.시간마다 고르게. 스물다섯, 스물여섯, 스물넷. 해 질 녘까지 줄지 않았다.“하나도 안 줄었어.” 테오가 루엔 어깨 너머로 밀랍판을 보며 말했다. “저 사람들 지치지도 않나.”“오늘은 안 지칩니다. 그릇이 가득 찬 채로 왔습니다.”한낮이 지나자 루엔의 손목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