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제가 졌습니다.”
루엔이 눈금 막대를 내려놓았다.
재단사가 매듭 끈을 감으며 웃었다. 로센 쪽 고을을 도는 늙은 재단사였다. 해마다 여름이면 성에 와서 아이들 옷을 새로 지었다. 아이들은 해마다 자랐다.
재단사는 루엔 어깨부터 손목까지를 매듭 끈으로 쟀다. 끈에는 매듭이 줄지어 있었다. 루엔은 그걸 보고 제 눈금 막대로 한 번 더 쟀다. 손가락 마디마다 금을 그은 막대였다.
차이는 보리알 한 톨 너비였다.
루엔은 매듭 끈을 빌려 매듭 사이를 하나씩 막대에 대 보았다. 고르지 않을 줄 알았다. 손으로 맨 매듭이었으니까.
고랐다. 스무 매듭이 전부. 제 막대의 금보다 고른 곳도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매셨습니까.”
“삼십 년 했습니다.” 재단사가 끈을 주머니에 넣었다. “도련님 막대는 몇 해 되셨소.”
“이태 되었습니다.”
“그럼 스물여덟 해 뒤에 다시 겨뤄 봅시다.”
루엔은 수첩에 재단사 이름을 적었다. 원래 그렇다 쪽이 아니었다. 새로 만든 쪽에 적었다. 제가 진 사람들.
*
개울 다리는 해마다 봄에 떠내려갔다.
통나무 둘을 걸치고 널을 깐 다리였다. 눈 녹은 물이 불면 통나무가 들려 떠내려갔다. 여름이면 다시 걸었다. 원래 그랬다.
그 다리가 로센으로 가는 길이었다. 다리가 없는 달에는 수레가 개울을 건너지 못했다. 사람은 여울 돌을 밟고 건넜다. 해마다 누군가 빠졌다.
“돌다리를 놓으려면 황색탑을 불러야 한다.” 가렛이 말했다. “한 번 물어본 적이 있다. 네가 태어나기 전에. 금화 열두 닢이라더군. 마법사 둘에 이레.”
금화 열두 닢이면 기사 여섯의 한 해 삯이었다. 가렛은 그 값을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루엔은 성의 목수를 찾아갔다. 두 살 때 나무 블록 열두 개를 깎아 준 사람이었다. 그 뒤로 머리가 희끗해졌다.
루엔이 막대기 넷을 끈으로 묶어 네모를 만들었다. 한쪽 모서리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네모가 옆으로 기울며 납작해졌다.
막대기 셋으로 세모를 만들었다. 모서리를 눌렀다. 세모는 그대로였다.
“세모는 안 찌그러집니다. 막대 길이가 그대로면 모양도 그대로입니다. 그러니 세모를 줄지어 이으면—”
“다리가 되지요.” 목수가 먼저 말했다.
루엔이 목수를 보았다. 목수가 천장을 가리켰다. 목공소 지붕을 받친 나무들이 세모로 짜여 있었다.
“지붕은 원래 세모로 짓습니다, 도련님. 제 할아버지 적부터요. 네모로 지으면 눈 오는 해에 주저앉지요.” 목수가 말했다. “다만 지붕을 옆으로 눕혀 개울에 걸 생각은 못 해 봤습니다.”
“지붕을 눕히면 다리입니다.”
목수가 한참 웃었다. 그러고는 먹줄을 꺼냈다.
*
개울 폭은 스물두 걸음이었다. 가렛 걸음으로.
목수와 루엔은 한 달 동안 목공소 바닥에 틀을 그렸다. 루엔이 막대마다 받는 힘을 셈했다. 어떤 막대는 누르는 힘을 받고, 어떤 막대는 당기는 힘을 받았다. 당기는 막대는 가늘어도 되었다. 누르는 막대는 굵어야 했다. 목수는 그걸 듣고 나무를 골랐다. 누르는 자리엔 참나무, 당기는 자리엔 물푸레나무.
“물푸레는 휘기는 해도 잘 안 끊어집니다.” 목수가 말했다. “도끼 자루로 쓰는 까닭이지요.”
루엔은 그 말을 셈에 넣었다.
양쪽 둑에 돌로 받침을 쌓았다. 벤노가 쌓았다. 받침 위에 세모 틀 두 줄을 나란히 세우고, 사이에 널을 깔았다. 이음매마다 브란이 쇠띠를 둘렀다.
다 놓은 날, 가렛이 말을 타고 건넜다. 기사 둘이 뒤따랐다. 다리가 조금 울렸다. 기울지 않았다.
그다음엔 브란이 수레를 끌고 건넜다. 수레에는 대장간 모루를 실었다. 목수가 다리 밑에 엎드려 틀을 올려다보았다. 가장 가운데 이음매가 손톱 두께만큼 내려앉았다가, 수레가 지나가자 돌아왔다.
“돌아왔습니다.” 목수가 다리 밑에서 소리쳤다. “제자리로 돌아왔어요!”
오스윈은 둑에서 그걸 보았다.
“황색탑이 들으면,” 오스윈이 말했다. “금화 열두 닢 치 얼굴을 하겠군.”
마을 사람들은 그 다리를 「세모 다리」라고 불렀다. 이듬해 봄, 눈 녹은 물이 널 밑까지 찼다. 다리는 떠내려가지 않았다.
*
그해 여름, 오스윈이 매직 미사일을 가르쳤다.
“첫 고리 마법일세. 마나로 된 화살이 과녁을 쫓아가지.”
오스윈이 쏘았다. 푸르스름한 빛 화살이 윙 소리를 내며 날아갔다. 개울 위에 던진 나무껍질을 향해. 껍질은 물살에 떠내려가고 있었다. 화살이 껍질 뒤를 쫓았다. 껍질이 앞으로 가면 화살이 꺾여 따라갔다. 두 번 꺾이고 세 번째에 껍질 바로 뒤 물에 박혔다.
“움직이는 건 잘 안 맞네.” 오스윈이 말했다. “쫓아가는 동안 과녁이 또 가니까. 탑에서도 가까이서 쏘라고 가르치지.”
루엔은 세모 다리 난간에 섰다. 위쪽에서 떠내려오는 껍질을 보았다.
개울물은 여기서 곧고 고르게 흘렀다. 껍질도 같은 빠르기로 왔다. 루엔은 맥박으로 쟀다. 껍질이 한 맥박에 반 걸음. 제 화살은 한 맥박에 열 걸음 남짓.
껍질까지 서른 걸음이면, 화살은 세 맥박 걸린다. 세 맥박이면 껍질은 한 걸음 반을 더 간다.
그러니 껍질이 아니라, 껍질이 한 걸음 반 뒤에 있을 자리를 쏜다.
쏘았다.
빛이 없었다. 소리도 없었다. 물 위 공기가 한 줄로 일렁였다. 여름 한낮 길 위의 아지랑이처럼. 껍질에서 조금 모자란 자리에 물이 튀었다.
루엔은 모래에 세모를 그렸다. 제가 선 곳, 껍질이 있던 곳, 껍질이 갈 곳. 앞으로 겨눈 만큼 화살 길도 길어졌다. 그만큼 늦게 닿았다. 첫 셈이 모자랐다. 세모 두 변의 비를 맞추면 되었다.
두 번째는 껍질 한가운데를 맞혔다. 껍질이 두 쪽으로 갈라져 떠내려갔다.
오스윈이 한참 말이 없었다.
“쫓아가지 않았군.”
“갈 곳에 먼저 가 있었습니다.”
“과녁이 꺾으면.”
“그건 아직 못 합니다.” 루엔이 말했다. “곧게, 같은 빠르기로 오는 것만 됩니다.”
*
가을에 셀빈이 왔다. 네 해 만이었다.
얼굴이 더 그을려 있었다. 루엔을 보고 웃었다. “몇 걸음 도련님. 키가 컸구먼.” 그러다 웃음을 거두고 가렛에게 먼저 말했다.
“남쪽 고개 너머에 산적이 들었습니다, 나리. 로센령 끝 마을 둘이 털렸습니다. 서른이 넘는다더군요. 그리고 그중에 마법사가 하나 있습니다.”
“마법사.”
“번개를 씁니다. 마을 성문 빗장을 쇠째 녹였답니다.” 셀빈이 목소리를 낮췄다. “하겐 로스라더군요. 이름을 들으니 알겠습니다. 적색탑에서 저보다 여섯 해 아래였습니다. 전쟁 마법사단으로 갔지요. 페르난 장로 부대로. 이태 전에 부대에서 달아났다는 말이 돌았습니다.”
“잘하던 자였나.”
“잘했습니다.” 셀빈이 짧게 말했다. “셋째 고리를 스물도 안 돼 쌓았지요. 라이트닝 볼트를 그 나이에 제대로 쓰는 사람은 드뭅니다.”
루엔이 물었다. “번개는 어디로 갑니까.”
셀빈이 루엔을 보았다. “겨눈 데로 가지. 그런데 쇠 입은 사람이 먼저 맞는다. 전쟁터에선 다 안다. 갑옷 입은 기사 곁에 서지 말라고.”
“겨눈 데보다 쇠가 먼저입니까.”
“가까우면.”
루엔은 그 말을 오래 붙들었다.
가렛이 셀빈에게 겨울까지 머물 수 있느냐고 물었다. 셀빈은 고개를 저었다.
“저는 곡식 말리는 마법사입니다, 나리. 번개 쓰는 자 앞에 서면 저는 쇠 입은 기사보다 먼저 맞습니다. 그걸 아는 게 제 재주지요.”
가렛은 더 붙잡지 않았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떠나기 전날 밤, 셀빈은 오두막에서 루엔의 라이트를 보았다. 빛 없는 재 구슬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말했다.
“이건 나한테 보여 줬다고 하지 마라.”
다섯 살 때 들은 말과 비슷했다. 이번엔 셀빈이 웃지 않았다.
*
“마흔 해 전 망루 윗단은 번개 맞아 무너졌지요.” 벤노가 말했다. “그래서 내가 다시 쌓은 거고.”
루엔은 브란에게 쇠막대를 부탁했다. 사람 키 두 배 길이. 끝은 뾰족하게. 망루 꼭대기에 세우고, 막대에 쇠사슬을 이어 망루 벽을 타고 내려 땅에 묻었다. 개울 쪽 늘 젖은 흙까지, 한 길 깊이로.
“번개를 불러들이는 거 아니오.” 브란이 사슬을 이으며 물었다.
“번개가 올 때, 갈 길을 정해 주는 겁니다. 돌을 지나지 말고 쇠를 타고 땅으로 가라고.”
이듬해 초여름, 한밤에 천둥비가 왔다.
루엔은 창가에 섰다. 번쩍일 때마다 셌다. 다섯. 셋. 하나.
그리고 셀 틈이 없었다.
흰빛과 소리가 한꺼번에 왔다. 망루 꼭대기 쇠막대 끝에서 불꽃이 튀었다. 쇠사슬을 따라 빛이 내려갔다. 성벽이 떨었다. 마르타가 비명을 질렀다.
아침에 루엔과 벤노가 망루에 올랐다. 쇠막대 끝이 녹아 뭉툭해져 있었다. 사슬 이음매 하나가 검게 그을렸다.
돌은 한 개도 빠지지 않았다.
벤노가 제 손으로 쌓은 윗단을 오래 쓰다듬었다. “마흔 해 만에 처음으로 맞고도 서 있네.”
그해 여름 브란은 쇠막대 열한 개를 더 만들었다. 성문 앞에 둘, 성문 누대에 하나, 성벽 위에 넷, 마을 광장과 세모 다리 머리에 넷. 전부 끝은 뾰족하게, 밑은 젖은 땅 깊이.
아이들은 막대를 번개 창이라고 불렀다. 한스는 막대 박는 일을 도맡았다. 창 닦는 것보다 낫다고 했다.
*
루엔이 열 살이 된 해 늦여름, 보리를 거둔 지 이레째 밤이었다.
정찰 나간 기사가 돌아왔다. 고개 너머에 불이 여럿. 서른 넘는 무리. 날이 밝으면 넘어온다.
성이 늦게까지 시끄러웠다. 마을 사람들이 곡식 자루를 지고 성으로 올라왔다. 기사들이 창을 벼렸다.
자정이 넘어 조용해졌다.
루엔은 방 벽에 등을 대고 앉아 있었다. 촛불은 꺼져 있었다. 입술만 움직였다.
문이 열렸다. 코넬이었다. 열다섯 살 형은 이제 목검 대신 진짜 칼을 차고 있었다. 오늘 밤 처음 받은 칼이었다.
코넬은 말없이 들어와 루엔 옆에 앉았다. 벽에 등을 댔다.
“뭐 세냐.”
“소수입니다.”
“몇까지 셌냐.”
“천을 넘었습니다.”
코넬이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에서 동생 얼굴을 보았다. 입술은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천하고 아흔일곱. 천백셋.
형은 그때 처음 알았다. 동생도 무서워한다는 걸. 무서우면 이렇게 센다는 걸. 천이 넘도록.
코넬은 일어나지 않았다.
말도 하지 않았다. 칼을 무릎에 눕히고, 벽에 등을 기댄 채 앉아 있었다.
창밖이 파래질 때까지. 루엔의 입술이 멈출 때까지.
지도는 너무 많은 걸 그리고 있었다.막료 천막 벽에 걸린 베스트리아 동부 지도였다. 황색탑 측량사들이 그린 것. 산은 산 모양으로, 숲은 나무 모양으로, 강은 굽이굽이 그대로. 마을마다 교회 첨탑이 그려져 있었다. 아름다운 지도였다.그런데 루엔이 알고 싶은 건 하나였다. 어디가 끊기면 안 되는가.산 모양도, 나무 모양도, 강 굽이도 그걸 가리고 있었다.루엔은 새 종이를 폈다. 그리고 점을 찍었다.본진. 창고 마을. 왕도. 여섯 영지의 곡식 창고. 역참 열두 곳. 여울 셋. 모두 점 하나씩.그다음 점과 점 사이에 선을 그었다. 수레가 다니는 길이면 선 하나. 다리가 있으면 선 위에 짧은 가로줄. 거리도 산 높이도 그리지 않았다. 이어져 있는지 아닌지만.마흔한 개의 점과 예순 개 남짓의 선이 남았다.테오가 어깨 너머로 보았다.“이게 지도야? 거미줄 같은데.”“지도에서 필요 없는 걸 다 뺀 겁니다.”“뭐가 필요 없는데.”“어디로 이어졌는지 빼고 전부 다.”*루엔은 선을 하나씩 손가락으로 가렸다.선 하나를 가리고, 본진에서 출발해 점을 따라가 보았다. 모든 점에 닿으면, 그 선은 끊겨도 괜찮은 선이었다. 돌아가는 길이 있었다. 닿지 못하는 점이 생기면, 그 선은 끊기면 안 되는 선이었다.예순 번을 가렸다.대부분은 괜찮았다. 길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어서, 하나를 끊으면 옆으로 돌아가면 되었다. 멀어지긴 했지만 닿았다.세 선만 달랐다.메를 강 중류의 돌다리. 창고 마을로 들어가는 지류 위 나무다리. 그리고 왕도 동쪽 문 밖, 늪 사이로 난 둑길 위 다리.셋 중 하나만 끊겨도 점들이 두 덩이로 갈라졌다
재무대신 발터 크로이츠는 숫자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루엔은 그걸 첫눈에 알았다. 왕궁 재무실 벽에 장부가 천장까지 꽂혀 있었다. 등마다 해가 적혀 있었고, 해마다 빠진 권이 없었다. 탁자 위 셈판은 알이 반들반들 닳아 있었다. 크로이츠는 쉰 남짓, 머리가 희고 손가락이 가늘었다. 루엔이 들어서자 일어나지 않고 셈판 알을 마저 튕겼다. 한 줄을 다 셈하고서야 고개를 들었다.“앉으시오. 폐하께서 곧 오시오.”왕 레지날드 2세는 정말 곧 왔다. 이번에도 작은 금테만 둘렀다. 앉자마자 본론을 꺼냈다.“봄 싸움 돈이 모자란다.”크로이츠가 장부 한 권을 펼쳤다. 숫자가 빼곡했다. 옛 셈, 금화와 은화와 동화가 스물과 열둘로 얽힌 셈이었다. 그러나 줄이 반듯했고, 끝자리가 맞았다. 루엔은 곁눈으로 합계 셋을 속으로 셈해 보았다. 다 맞았다.“가을 싸움과 겨울 대치에 든 돈이 옛 금화로 만 사천 닢.” 크로이츠가 말했다. “봄에 레오폴트 장군이 국경 성채를 되찾으려면 삯군과 공성 기구를 더 들여야 하오. 새 금화로 이천 닢이 더 있어야 하오. 세금은 가을에 걷히오. 그때까지 빌려야 하오.”왕이 루엔을 보았다.“하르트 상단이 빌려줄 수 있나.”*루엔은 대답하기 전에 수첩을 폈다.클라리사가 어젯밤 적어 준 숫자가 있었다. 하르트 상단이 제 것으로 가진 금과 은, 창고의 물건, 받을 삯. 새 금화로 치면 삼천이백 닢 남짓. 보움 상단과 왕도 상인 조합 둘이 나눠 댄 몫까지 넣은 것이었다.“빌려드릴 수 있습니다.” 루엔이 말했다. “삼백이십 닢까지.”크로이츠의 손가락이 셈판 위에서 멈췄다.“이천이라 했소.”
첫 롱 텔레포트는 눈 녹는 날 아침에 했다.참호 뒤 빈터에 원진을 그렸다. 지름 열두 걸음. 테오가 말뚝과 끈으로 원을 잡고, 루엔이 안쪽 선을 그었다. 원진 가운데에 짐 상자 둘, 그 옆에 루엔과 테오.도착지는 왕도 아스테른, 루엔 공방 뒷마당이었다. 거기엔 클라리사가 같은 크기의 원을 그려 두었다. 사흘 전 편지로 보낸 그림대로.루엔은 보정표를 펼쳤다. 여기서 왕도까지의 거리, 두 곳의 위도, 오늘 해가 뜬 시각. 땅은 하루에 한 바퀴 돈다. 여기와 왕도는 도는 빠르기가 조금 다르다. 그 차이만큼 도착하는 몸을 미리 돌려 놓는다. 열여섯 살 겨울, 모래 자루 두 개로 보인 그 셈이었다.그때는 교장과 파비오가 루엔 식으로 걸었다. 루엔은 옆에서 보기만 했다. 여섯째 고리가 없었다.지금은 있었다.“무섭냐?” 테오가 물었다.“무섭지 않습니다. 셈을 세 번 했습니다.”“나는 무서운데.”“그럼 제 옷자락을 잡으십시오. 떨어지면 셈이 틀어집니다.”테오가 루엔 옷자락을 꽉 쥐었다.루엔은 걸었다.한 번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 발밑의 흙이 진창에서 마른 돌바닥으로 바뀌었다. 코끝의 냄새가 참호 연기에서 빵 굽는 냄새로 바뀌었다. 구스타프 분점이 두 골목 건너였다.짐 상자 둘이 발치에 그대로 서 있었다. 기울지도, 밀리지도 않았다.테오가 비틀거렸다. 루엔 옷자락을 놓지 않은 채 주저앉았다.“어, 어…… 됐어?”“됐습니다. 원 가운데서 손가락 한 마디 어긋났습니다.”뒷마당 문간에서 클라리사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원 끝에 분필로 적어 둔 작은 표를 가리켰다.&l
겨울은 링겐 고개 아래에서 멈췄다.마르케스군은 고개 발치의 국경 성채로 물러나 틀어박혔다. 가을 첫머리에 빼앗은 베스트리아 성채였다. 레오폴트는 그 앞 오 리 떨어진 곳에 참호를 파고 진을 쳤다. 눈이 무릎까지 쌓였다. 어느 쪽도 성채 벽까지 가지 않았다. 가 봐야 얼어붙은 밭에서 죽을 뿐이었다.대신 새벽마다 안개가 왔다.한겨울 두 달은 조용했다. 양쪽 다 눈 속에서 장작과 곡식을 세며 버텼다. 하르트 서기들의 겨울 셈대로, 말먹이가 가장 먼저 바닥을 보였다. 레오폴트는 말 절반을 뒤쪽 고을로 돌려보냈다. 마르케스 쪽 성채에서도 말 울음이 줄었다. 저쪽도 같은 셈을 한 것이었다.첫 안개는 겨울이 끝나 갈 무렵, 아직 눈이 녹기 전 어느 새벽에 왔다. 성채 쪽에서 하얀 김이 낮게 깔려 밀려왔다. 겨울 안개치고는 이상하게 따뜻했다. 앞 참호에 닿자 병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김이 뜨거웠다. 살갗에 닿으면 붉게 부어올랐다. 눈이 따가워 뜰 수 없었다. 김이 지나간 참호 바닥은 눈이 녹아 진창이 되었고, 해가 뜨기도 전에 다시 얼었다. 병사들 발이 진창째 얼어붙었다.사흘 동안 앞 참호에서 발가락을 잃은 병사가 열넷이었다.“적색탑 복합 술식이다.” 레오폴트가 말했다. 눈썹에 서리가 앉아 있었다. “불로 물을 끓이고 바람으로 민다. 옛날에 한 번 봤다. 그땐 이만큼 오래 가지 않았는데.”“교대를 합니다.” 루엔이 말했다. “가을 싸움 뒤로 적이 바꿨습니다. 번쩍임을 세어 보면, 밤을 셋으로 나눠 돌아가며 쏩니다. 한 번에 쏘는 사람은 열넷, 쉬는 사람이 스물여덟.”적도 셈을 했다. 사흘째 오후에 바닥나는 걸 겪은 사람들이었다. 이번엔 바닥나지 않게 나눠 쏘았다.*끓는 안개를 막으려면 같은 걸로 맞서야 했다.불과 물과 바람을 한꺼
요스트는 명령서를 두 번 읽었다.창고 마을은 본진에서 서쪽으로 반나절 거리였다. 메를 강 지류 가에 곡식 창고 여든 채가 줄지어 서 있었다. 여섯 영지에서 보낸 곡식, 말먹이, 화살 다발이 전부 여기 모였다. 요스트는 그 창고 열쇠를 쥔 창고지기였다. 하르트령에서 온 사람이었다. 쉰 살, 한쪽 다리를 조금 절었다.명령서는 새벽에 왔다. 본진에서 출발한 전령이 중간 역참에서 명령을 옮겨 적어 다음 전령에게 넘겼고, 그 전령이 요스트에게 가져왔다.「71번 창고를 열어 곡식 이백 자루를 본진 빵 굽는 곳으로 보낼 것. 레오폴트.」번호 옆에 작은 글자가 하나 더 붙어 있었다. 「71-9」.요스트는 입속으로 셈했다.앞자리 일곱에 둘을 곱하면 열넷. 뒷자리 하나를 더하면 열다섯. 열다섯을 열하나로 나누면 하나에 넷이 남는다.넷이어야 했다.명령서에는 아홉이 적혀 있었다.요스트는 열쇠 꾸러미를 허리에 도로 걸었다. 창고 문을 열지 않았다. 대신 마구간 소년을 불렀다.“본진으로 가라. 가장 빠른 말로. 루엔 도련님께 이 종이를 드려라. 끝자리가 안 맞는다고.”소년이 떠나고 얼마 안 되어, 빵 수레를 몰고 온 보급 기사가 창고 앞에 섰다. 동쪽 영지 사람이었다. 말에서 내리지도 않았다.“왜 안 여나. 장군님 명령이다.”“끝자리가 안 맞습니다.”“끝자리?” 기사가 명령서를 낚아채 보았다. 번호 옆 작은 글자를 한참 보다가 코웃음을 쳤다. “이 꼬랑지 말이냐. 이게 뭐라고.”“번호가 제대로 옮겨졌는지 보는 겁니다.”“번호는 71이라고 적혀 있다. 장군님 서명도 있다. 본진에선 병사들이 빵을 기다린다. 창고지기가 장
마르케스 본대가 온 건 열흘 뒤였다.선봉 뒤로 깃발이 끝없이 이어졌다. 링겐 고개에서 내려오는 행렬이 이틀 동안 끊이지 않았다. 강 동쪽 둑 위에 천막이 들어찼다. 붉은 천막은 스무 채가 넘었다.“이만 넘는다.” 정찰대장이 보고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떨지 않으려고 애쓰는 목소리였다. “이만 오천쯤.”천막 안 사람들이 루엔을 보았다. 귀족 회의에서 삼만이 한계라고 한 사람이었다.“이만 오천이면 셈 안입니다.” 루엔이 말했다. “강 아랫마을 곡식을 우리가 먼저 옮겼으니 오래 못 버팁니다. 문제는 마법사입니다.”“몇이오.”“어젯밤 번쩍임을 셌습니다. 쏜 자리가 마흔하나. 한 자리에 한 사람이면 마흔하나.”*싸움은 이튿날 새벽에 시작됐다.적은 쉬지 않고 쏘았다. 파이어볼이 선 앞까지 와서 떨어졌다. 선을 넘으려는 마법사는 궁수가 막았다. 방패벽 뒤에서 아군은 엎드려 버텼다. 적 보병이 여울을 건너려 했고, 아군 창병이 여울 끝에서 밀어냈다.루엔은 둔덕 위에서 한 가지만 했다.셌다.번쩍임 하나에 밀랍판에 금 하나.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한 시간이 지날 때마다 금을 묶어 따로 적었다. 이 세계의 한 시간, 낮을 열둘로 나눈 그 한 칸.첫날 번쩍임은 삼백열두 번이었다.시간마다 고르게. 스물다섯, 스물여섯, 스물넷. 해 질 녘까지 줄지 않았다.“하나도 안 줄었어.” 테오가 루엔 어깨 너머로 밀랍판을 보며 말했다. “저 사람들 지치지도 않나.”“오늘은 안 지칩니다. 그릇이 가득 찬 채로 왔습니다.”한낮이 지나자 루엔의 손목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