登入번개가 휘었다.
기사들 한가운데로 곧게 오던 흰빛이, 성문 앞 열 걸음에서 꺾였다. 쇠막대 끝으로. 쇠막대를 타고 땅으로.
소리는 그다음에 왔다. 셀 틈이 없었다.
*
해가 뜨자 하늘이 맑았다. 구름 한 점 없었다.
루엔은 성문 누대 위에 섰다. 발밑에 물 두 동이. 옆에 오스윈. 오스윈은 새벽에 숲에서 내려왔다. 가렛과 한 약속에는 없는 일이었다. 아무도 묻지 않았다.
“그릇은 얼마나 남겨 둘 건가.” 오스윈이 물었다.
“안 남깁니다. 오늘은 다 씁니다.”
“다 쓰면 쓰러지네.”
“압니다. 끝나고 쓰러지겠습니다.”
성문 밖에는 가렛과 기사 여덟이 말 위에 있었다. 갑옷이 햇빛에 번쩍였다. 성문 양옆에 쇠막대 둘이 서 있었다. 기사들은 막대에서 다섯 걸음 넘게 떨어져 섰다. 어젯밤 루엔이 말한 대로.
성벽 위에는 활 든 병사들. 그 끝에 코넬이 있었다. 가렛이 그 자리에 세웠다. 코넬은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성 안마당에 모여 있었다. 핌이 손자를 안고 있었다. 앨드릭이 사람들 사이를 돌며 무어라 속삭였다.
해가 동쪽 벽을 다 넘었을 때, 세모 다리 너머에 그림자들이 나타났다.
*
서른넷. 루엔은 두 번 셌다.
말 탄 자가 여섯. 나머지는 걸었다. 창, 도끼, 활. 그리고 수레 하나. 섶을 산처럼 싣고 젖은 가죽을 덮었다. 그 뒤에 몸을 숨기고 밀면서 오는 자들.
그리고 맨 뒤에 한 사람. 말도 없이 걸었다. 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았다.
산적들이 세모 다리를 건넜다. 다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루엔은 그게 조금 분했다.
수레가 성문 쪽 오르막을 오르기 시작했다. 섶 수레를 성문에 대고 불을 지를 셈이었다. 화살이 수레 가죽에 박혔다. 뚫지 못했다.
루엔은 물 한 동이 앞에 손을 내렸다.
두 고리가 열렸다. 물이 동이에서 일어났다. 누대 앞 허공에 얇게 펴졌다. 방패만 한 넓이, 손톱 두 개 두께. 가운데가 조금 두꺼웠다.
수레까지 아흔 걸음 남짓. 해 모으는 점을 아흔 걸음 밖에 두려면 물을 아주 얇게 펴야 했다. 가운데를 조금만 부풀려야 했다. 셈은 어젯밤에 끝냈다. 소수를 세기 전에.
햇빛이 물막을 지나 한 점으로 모였다. 수레 앞머리, 젖은 가죽이 덮지 못한 마른 섶 끝에.
마르타의 서른을 한 번.
연기가 올랐다.
두 번. 섶에서 불이 일었다. 마른 섶이 한꺼번에 탔다. 수레를 밀던 자들이 소리를 지르며 흩어졌다.
“누구냐! 누가 불을 놨어!”
산적들이 성벽을 올려다보았다. 불화살을 찾았다. 번쩍임을 찾았다. 없었다. 누대 위에는 늙은이 하나와 아이 하나, 물동이 둘뿐이었다. 물막은 햇빛 속에서 거의 보이지 않았다.
수레는 오르막 한가운데서 탔다.
*
말 탄 자 여섯이 달려 나왔다. 불타는 수레를 비껴 성문 쪽으로. 길이 곧았다. 말들이 같은 빠르기로 오르막을 달렸다.
오스윈이 먼저 쏘았다. 영창이 짧고 빨랐다. 푸른빛 화살 셋이 윙 소리를 내며 날아갔다. 앞선 말 탄 자를 쫓았다. 말이 달려 나가자 화살이 꺾여 따라갔다. 하나는 말꼬리 뒤 땅에 박혔다. 둘은 두 번째 말 탄 자의 방패를 쳤다.
루엔은 맥박을 셌다.
곧게. 같은 빠르기로. 흘러오는 나무껍질과 같았다. 다만 한 맥박에 세 걸음. 제 화살은 열 걸음 남짓. 앞선 자까지 쉰 걸음.
세모를 떠올렸다. 제가 선 곳, 말이 있는 곳, 말이 갈 곳.
쏘았다. 빛도 소리도 없이. 오르막 위 공기가 한 줄로 일렁였다.
앞선 자의 방패가 뒤로 젖혀졌다. 말 위에서 몸이 떨어져 나갔다. 말만 계속 달리다 성문 앞에서 멈췄다.
둘째. 셋째. 방패가 없는 자는 어깨를 맞았다. 둘이 더 떨어졌다.
넷째가 말머리를 꺾었다. 옆으로. 루엔의 화살이 그자가 있을 자리를 지나갔다. 그자는 거기 없었다.
꺾는 것은 못 맞혔다. 셈이 거기까지였다.
남은 셋이 말을 돌려 물러났다. 성벽 위에서 활이 쏟아졌다.
루엔은 가슴을 짚었다. 그릇 바닥이 보이기 시작했다.
*
그때 맨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왔다.
세모 다리 머리, 쇠막대 옆까지. 거기서 멈췄다. 성문에서 백오십 걸음쯤.
마른 사내였다. 멀어서 얼굴은 흐렸다. 머리가 반쯤 희어 보였다. 옷은 붉었는데 색이 바래 있었다.
사내가 영창을 시작했다.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낮고 고르고 빨랐다.
루엔은 셌다. 스물여덟 마디. 셋째 고리 마법치고는 짧았다. 오스윈이 옆에서 숨을 들이켰다.
“잘하는 자로군.”
흰빛.
사내의 손끝에서 성문 앞 기사들 쪽으로. 가렛이 있는 쪽으로. 곧게.
그리고 성문 앞 열 걸음에서 휘었다.
쇠막대 끝이 번쩍 빛났다. 흰빛이 막대를 타고 땅으로 꽂혔다. 막대 밑동의 풀이 한꺼번에 연기를 뿜었다. 소리가 성벽을 때렸다. 누대 돌이 떨었다. 안마당에서 아이들이 울었다.
기사들은 말 위에 그대로 있었다. 쇠막대에서 가장 가까운 기사의 머리카락이 투구 밖으로 곤두섰다. 그것뿐이었다.
막대 끝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사내가 멈췄다.
잠깐 뒤 다시 영창했다. 이번엔 겨눈 곳이 달랐다. 성벽 위. 아까 푸른 화살이 날아간 자리. 오스윈이 선 누대.
오스윈이 루엔 어깨를 잡아 끌었다.
흰빛이 성벽 위로 왔다. 누대 옆 쇠막대로 꺾였다. 막대 밑의 쇠사슬을 따라 성벽을 타고 내려가 땅으로. 사슬 이음매에서 불꽃이 튀었다.
누대 위 사람은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
사내는 세 번째 영창을 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돌렸다. 성문 앞 막대, 누대 옆 막대, 성벽 위 막대. 손가락이 짧게 움직였다. 세고 있었다.
루엔은 그걸 보았다. 저 사람도 센다.
산적 하나가 사내 쪽으로 소리쳤다.
“하겐! 번개가 휘어! 번개가 안 먹힌다고!”
사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 손을 들었다. 짧게, 두 번.
산적들이 물러나기 시작했다. 흩어지지 않았다. 다친 자를 끌고, 활 든 자가 맨 뒤에 섰다. 말 탄 자 셋이 양옆을 지켰다. 서른 명 남짓한 무리가 대열을 지어 세모 다리를 건넜다.
그 모양을 보고 가렛이 말했다. 성문 앞에서, 뒤따르려는 기사들에게.
“쫓지 마라.”
“나리, 지금 치면—”
“들판에서 저자를 쫓으면, 쇠 입은 우리가 막대가 된다.”
기사들이 멈췄다.
하겐이라 불린 사내가 맨 마지막으로 다리를 건넜다. 건너기 전 한 번 뒤를 돌아보았다. 성벽 위를. 그 눈이 누대 위 오스윈에게서 멈췄다가, 옆으로 조금 옮겨 갔다.
물동이 앞의 아이에게.
아주 잠깐이었다. 사내는 돌아서 고개 너머로 사라졌다.
*
다친 사람이 일곱이었다. 화살에 셋, 떨어진 돌에 둘, 번개 소리에 놀라 뛰던 말에 차인 사람이 둘. 죽은 사람은 없었다.
산적은 둘이 남겨졌다. 말에서 떨어져 다리를 다친 자들. 가렛이 물었고, 한 사람이 대답했다.
“그 마법사는 삯으로 붙은 자요. 우리 사람 아니오. 옷깃에 무슨 문장을 뜯어낸 자국이 있었소.” 산적이 말했다. “번개를 쓰고 나면 왼손이 한참 떨렸소. 그래서 하루에 몇 번 못 썼지.”
루엔은 그 말을 들었다. 들으면서 무릎이 꺾였다.
누대 돌바닥이 가까워졌다. 오스윈의 손이 루엔 등을 받쳤다. 그릇이 비어 있었다. 바닥까지.
*
사흘을 앓았다.
열이 났다. 몸이 무거웠다. 그릇을 바닥까지 비운 몸이 원래 그렇다고 오스윈이 말했다. 사흘이면 찬다고.
루엔은 셈을 할 수 없었다. 서까래를 세다 열둘에서 잠들었다. 깨면 처음부터 셌다.
둘째 날 저녁, 베르타가 국을 들고 올라왔다.
직접 들고 왔다. 부엌데기 소녀를 시키지 않았다. 침대 곁에 앉아 한 숟가락씩 떠 넣었다.
닭고기 국이었다. 파가 들었다. 소금 간이 되어 있었다.
루엔은 두 숟가락을 먹고 물었다.
“소금은 몇 알입니까.”
“몰라요.”
베르타가 말했다. 국자를 들지 않았다. 목소리가 낮았다.
“저울 안 썼어요. 한 줌 그릇도 안 썼어요. 그냥 넣었어요. 대충.”
루엔은 베르타를 보았다. 서른 해 넘게 부엌을 지킨 손이 숟가락을 쥐고 있었다. 그 손이 조금 떨렸다.
한 숟가락을 더 먹었다.
맛있었다.
그날 밤 루엔은 열이 조금 내린 틈에 수첩을 폈다. 손이 떨려 글씨가 삐뚤었다. 베르타의 국을 적는 칸을 만들었다. 다섯 살 때부터 부엌 것은 늘 그렇게 적었다.
베르타의 닭고기 국.
소금: 재지 않음.
맛:
거기서 한참 멈췄다.
맛: 잴 수 없음.
루엔은 그 줄을 오래 보았다. 수첩에 처음 생긴 칸이었다.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원래 그런 것도 아니었다. 틀린 것도 아니었다.
지우지 않았다.
*
넷째 날, 루엔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가렛 방 탁자에 오스윈이 앉아 있었다. 종이를 펴고 펜을 들고. 탁자 위에 오두막에서 들고 온 종이 묶음이 있었다. 푸른 끈으로 묶여 있었다. 끈 끝이 잘려 있었다.
“앉게.” 오스윈이 말했다. “다 썼네. 들어 보게.”
가렛이 창가에 서 있었다. 엘리나와 펠릭스가 벽 쪽에. 코넬이 문간에.
오스윈이 읽었다.
「왕립 마법학교 교장께. 북부 하르트령 기사 가렛 하르트의 둘째 아들, 루엔 하르트를 추천함. 나이 열. 내년 봄에 열하나.」
오스윈이 잠깐 루엔을 보았다.
「그릇 아홉. 고리 둘. 흘리는 것, 내가 잰 바로는 없음. 나머지는 내가 잴 수 없었으니 직접 재 보시오. 청색탑 마법사였던 오스윈 마로.」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왕립 마법학교.” 펠릭스가 작게 말했다. “왕도 아스테른.”
펠릭스의 손이 옷깃께에서 멈췄다. 그러고는 내려갔다. 루엔은 그걸 보았다. 묻지 않았다.
“그릇 아홉짜리가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까.” 가렛이 물었다.
“못 들어가네. 그래서 추천서가 있는 걸세.” 오스윈이 말했다. “열한 살부터 받네. 한 해 남았어.”
오스윈이 편지를 접었다. 종이 묶음에서 끈을 한 토막 풀어 편지를 묶었다. 푸른 끈이었다. 묶음은 끈이 한 토막 짧아졌다.
루엔은 그 끈을 보았다. 무엇을 묶던 끈인지 묻고 싶었다. 묻지 않았다. 아직은.
오스윈이 편지를 가렛에게 내밀었다.
가렛이 받았다. 한참 들고 있었다. 그러고는 루엔을 보았다.
“한 해 남았다.” 가렛이 말했다. “그동안 번개 창을 몇 개 더 박을 거냐.”
“더 안 박아도 됩니다.” 루엔이 말했다. “열둘 가운데 셋만 맞았습니다. 망루 것까지 쳐서요. 나머지 아홉은 아직 일을 안 했습니다.”
코넬이 문간에서 웃음을 터뜨렸다. 엘리나도 웃었다. 오스윈은 웃지 않았다. 창밖, 남쪽 고개 쪽을 보고 있었다.
루엔도 그쪽을 보았다. 사흘 전 한 사람이 넘어간 고개였다.
그 밤 루엔은 수첩 맨 뒷장을 폈다. 모르는 것.
하나. 샌 마나는 어디로 가나.
둘. 땅은 얼마나 큰가.
그 아래에 적었다.
셋. 번개를 쓰던 사람은 왜 끝까지 세어 보고 갔나.
지도는 너무 많은 걸 그리고 있었다.막료 천막 벽에 걸린 베스트리아 동부 지도였다. 황색탑 측량사들이 그린 것. 산은 산 모양으로, 숲은 나무 모양으로, 강은 굽이굽이 그대로. 마을마다 교회 첨탑이 그려져 있었다. 아름다운 지도였다.그런데 루엔이 알고 싶은 건 하나였다. 어디가 끊기면 안 되는가.산 모양도, 나무 모양도, 강 굽이도 그걸 가리고 있었다.루엔은 새 종이를 폈다. 그리고 점을 찍었다.본진. 창고 마을. 왕도. 여섯 영지의 곡식 창고. 역참 열두 곳. 여울 셋. 모두 점 하나씩.그다음 점과 점 사이에 선을 그었다. 수레가 다니는 길이면 선 하나. 다리가 있으면 선 위에 짧은 가로줄. 거리도 산 높이도 그리지 않았다. 이어져 있는지 아닌지만.마흔한 개의 점과 예순 개 남짓의 선이 남았다.테오가 어깨 너머로 보았다.“이게 지도야? 거미줄 같은데.”“지도에서 필요 없는 걸 다 뺀 겁니다.”“뭐가 필요 없는데.”“어디로 이어졌는지 빼고 전부 다.”*루엔은 선을 하나씩 손가락으로 가렸다.선 하나를 가리고, 본진에서 출발해 점을 따라가 보았다. 모든 점에 닿으면, 그 선은 끊겨도 괜찮은 선이었다. 돌아가는 길이 있었다. 닿지 못하는 점이 생기면, 그 선은 끊기면 안 되는 선이었다.예순 번을 가렸다.대부분은 괜찮았다. 길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어서, 하나를 끊으면 옆으로 돌아가면 되었다. 멀어지긴 했지만 닿았다.세 선만 달랐다.메를 강 중류의 돌다리. 창고 마을로 들어가는 지류 위 나무다리. 그리고 왕도 동쪽 문 밖, 늪 사이로 난 둑길 위 다리.셋 중 하나만 끊겨도 점들이 두 덩이로 갈라졌다
재무대신 발터 크로이츠는 숫자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루엔은 그걸 첫눈에 알았다. 왕궁 재무실 벽에 장부가 천장까지 꽂혀 있었다. 등마다 해가 적혀 있었고, 해마다 빠진 권이 없었다. 탁자 위 셈판은 알이 반들반들 닳아 있었다. 크로이츠는 쉰 남짓, 머리가 희고 손가락이 가늘었다. 루엔이 들어서자 일어나지 않고 셈판 알을 마저 튕겼다. 한 줄을 다 셈하고서야 고개를 들었다.“앉으시오. 폐하께서 곧 오시오.”왕 레지날드 2세는 정말 곧 왔다. 이번에도 작은 금테만 둘렀다. 앉자마자 본론을 꺼냈다.“봄 싸움 돈이 모자란다.”크로이츠가 장부 한 권을 펼쳤다. 숫자가 빼곡했다. 옛 셈, 금화와 은화와 동화가 스물과 열둘로 얽힌 셈이었다. 그러나 줄이 반듯했고, 끝자리가 맞았다. 루엔은 곁눈으로 합계 셋을 속으로 셈해 보았다. 다 맞았다.“가을 싸움과 겨울 대치에 든 돈이 옛 금화로 만 사천 닢.” 크로이츠가 말했다. “봄에 레오폴트 장군이 국경 성채를 되찾으려면 삯군과 공성 기구를 더 들여야 하오. 새 금화로 이천 닢이 더 있어야 하오. 세금은 가을에 걷히오. 그때까지 빌려야 하오.”왕이 루엔을 보았다.“하르트 상단이 빌려줄 수 있나.”*루엔은 대답하기 전에 수첩을 폈다.클라리사가 어젯밤 적어 준 숫자가 있었다. 하르트 상단이 제 것으로 가진 금과 은, 창고의 물건, 받을 삯. 새 금화로 치면 삼천이백 닢 남짓. 보움 상단과 왕도 상인 조합 둘이 나눠 댄 몫까지 넣은 것이었다.“빌려드릴 수 있습니다.” 루엔이 말했다. “삼백이십 닢까지.”크로이츠의 손가락이 셈판 위에서 멈췄다.“이천이라 했소.”
첫 롱 텔레포트는 눈 녹는 날 아침에 했다.참호 뒤 빈터에 원진을 그렸다. 지름 열두 걸음. 테오가 말뚝과 끈으로 원을 잡고, 루엔이 안쪽 선을 그었다. 원진 가운데에 짐 상자 둘, 그 옆에 루엔과 테오.도착지는 왕도 아스테른, 루엔 공방 뒷마당이었다. 거기엔 클라리사가 같은 크기의 원을 그려 두었다. 사흘 전 편지로 보낸 그림대로.루엔은 보정표를 펼쳤다. 여기서 왕도까지의 거리, 두 곳의 위도, 오늘 해가 뜬 시각. 땅은 하루에 한 바퀴 돈다. 여기와 왕도는 도는 빠르기가 조금 다르다. 그 차이만큼 도착하는 몸을 미리 돌려 놓는다. 열여섯 살 겨울, 모래 자루 두 개로 보인 그 셈이었다.그때는 교장과 파비오가 루엔 식으로 걸었다. 루엔은 옆에서 보기만 했다. 여섯째 고리가 없었다.지금은 있었다.“무섭냐?” 테오가 물었다.“무섭지 않습니다. 셈을 세 번 했습니다.”“나는 무서운데.”“그럼 제 옷자락을 잡으십시오. 떨어지면 셈이 틀어집니다.”테오가 루엔 옷자락을 꽉 쥐었다.루엔은 걸었다.한 번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 발밑의 흙이 진창에서 마른 돌바닥으로 바뀌었다. 코끝의 냄새가 참호 연기에서 빵 굽는 냄새로 바뀌었다. 구스타프 분점이 두 골목 건너였다.짐 상자 둘이 발치에 그대로 서 있었다. 기울지도, 밀리지도 않았다.테오가 비틀거렸다. 루엔 옷자락을 놓지 않은 채 주저앉았다.“어, 어…… 됐어?”“됐습니다. 원 가운데서 손가락 한 마디 어긋났습니다.”뒷마당 문간에서 클라리사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원 끝에 분필로 적어 둔 작은 표를 가리켰다.&l
겨울은 링겐 고개 아래에서 멈췄다.마르케스군은 고개 발치의 국경 성채로 물러나 틀어박혔다. 가을 첫머리에 빼앗은 베스트리아 성채였다. 레오폴트는 그 앞 오 리 떨어진 곳에 참호를 파고 진을 쳤다. 눈이 무릎까지 쌓였다. 어느 쪽도 성채 벽까지 가지 않았다. 가 봐야 얼어붙은 밭에서 죽을 뿐이었다.대신 새벽마다 안개가 왔다.한겨울 두 달은 조용했다. 양쪽 다 눈 속에서 장작과 곡식을 세며 버텼다. 하르트 서기들의 겨울 셈대로, 말먹이가 가장 먼저 바닥을 보였다. 레오폴트는 말 절반을 뒤쪽 고을로 돌려보냈다. 마르케스 쪽 성채에서도 말 울음이 줄었다. 저쪽도 같은 셈을 한 것이었다.첫 안개는 겨울이 끝나 갈 무렵, 아직 눈이 녹기 전 어느 새벽에 왔다. 성채 쪽에서 하얀 김이 낮게 깔려 밀려왔다. 겨울 안개치고는 이상하게 따뜻했다. 앞 참호에 닿자 병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김이 뜨거웠다. 살갗에 닿으면 붉게 부어올랐다. 눈이 따가워 뜰 수 없었다. 김이 지나간 참호 바닥은 눈이 녹아 진창이 되었고, 해가 뜨기도 전에 다시 얼었다. 병사들 발이 진창째 얼어붙었다.사흘 동안 앞 참호에서 발가락을 잃은 병사가 열넷이었다.“적색탑 복합 술식이다.” 레오폴트가 말했다. 눈썹에 서리가 앉아 있었다. “불로 물을 끓이고 바람으로 민다. 옛날에 한 번 봤다. 그땐 이만큼 오래 가지 않았는데.”“교대를 합니다.” 루엔이 말했다. “가을 싸움 뒤로 적이 바꿨습니다. 번쩍임을 세어 보면, 밤을 셋으로 나눠 돌아가며 쏩니다. 한 번에 쏘는 사람은 열넷, 쉬는 사람이 스물여덟.”적도 셈을 했다. 사흘째 오후에 바닥나는 걸 겪은 사람들이었다. 이번엔 바닥나지 않게 나눠 쏘았다.*끓는 안개를 막으려면 같은 걸로 맞서야 했다.불과 물과 바람을 한꺼
요스트는 명령서를 두 번 읽었다.창고 마을은 본진에서 서쪽으로 반나절 거리였다. 메를 강 지류 가에 곡식 창고 여든 채가 줄지어 서 있었다. 여섯 영지에서 보낸 곡식, 말먹이, 화살 다발이 전부 여기 모였다. 요스트는 그 창고 열쇠를 쥔 창고지기였다. 하르트령에서 온 사람이었다. 쉰 살, 한쪽 다리를 조금 절었다.명령서는 새벽에 왔다. 본진에서 출발한 전령이 중간 역참에서 명령을 옮겨 적어 다음 전령에게 넘겼고, 그 전령이 요스트에게 가져왔다.「71번 창고를 열어 곡식 이백 자루를 본진 빵 굽는 곳으로 보낼 것. 레오폴트.」번호 옆에 작은 글자가 하나 더 붙어 있었다. 「71-9」.요스트는 입속으로 셈했다.앞자리 일곱에 둘을 곱하면 열넷. 뒷자리 하나를 더하면 열다섯. 열다섯을 열하나로 나누면 하나에 넷이 남는다.넷이어야 했다.명령서에는 아홉이 적혀 있었다.요스트는 열쇠 꾸러미를 허리에 도로 걸었다. 창고 문을 열지 않았다. 대신 마구간 소년을 불렀다.“본진으로 가라. 가장 빠른 말로. 루엔 도련님께 이 종이를 드려라. 끝자리가 안 맞는다고.”소년이 떠나고 얼마 안 되어, 빵 수레를 몰고 온 보급 기사가 창고 앞에 섰다. 동쪽 영지 사람이었다. 말에서 내리지도 않았다.“왜 안 여나. 장군님 명령이다.”“끝자리가 안 맞습니다.”“끝자리?” 기사가 명령서를 낚아채 보았다. 번호 옆 작은 글자를 한참 보다가 코웃음을 쳤다. “이 꼬랑지 말이냐. 이게 뭐라고.”“번호가 제대로 옮겨졌는지 보는 겁니다.”“번호는 71이라고 적혀 있다. 장군님 서명도 있다. 본진에선 병사들이 빵을 기다린다. 창고지기가 장
마르케스 본대가 온 건 열흘 뒤였다.선봉 뒤로 깃발이 끝없이 이어졌다. 링겐 고개에서 내려오는 행렬이 이틀 동안 끊이지 않았다. 강 동쪽 둑 위에 천막이 들어찼다. 붉은 천막은 스무 채가 넘었다.“이만 넘는다.” 정찰대장이 보고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떨지 않으려고 애쓰는 목소리였다. “이만 오천쯤.”천막 안 사람들이 루엔을 보았다. 귀족 회의에서 삼만이 한계라고 한 사람이었다.“이만 오천이면 셈 안입니다.” 루엔이 말했다. “강 아랫마을 곡식을 우리가 먼저 옮겼으니 오래 못 버팁니다. 문제는 마법사입니다.”“몇이오.”“어젯밤 번쩍임을 셌습니다. 쏜 자리가 마흔하나. 한 자리에 한 사람이면 마흔하나.”*싸움은 이튿날 새벽에 시작됐다.적은 쉬지 않고 쏘았다. 파이어볼이 선 앞까지 와서 떨어졌다. 선을 넘으려는 마법사는 궁수가 막았다. 방패벽 뒤에서 아군은 엎드려 버텼다. 적 보병이 여울을 건너려 했고, 아군 창병이 여울 끝에서 밀어냈다.루엔은 둔덕 위에서 한 가지만 했다.셌다.번쩍임 하나에 밀랍판에 금 하나.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한 시간이 지날 때마다 금을 묶어 따로 적었다. 이 세계의 한 시간, 낮을 열둘로 나눈 그 한 칸.첫날 번쩍임은 삼백열두 번이었다.시간마다 고르게. 스물다섯, 스물여섯, 스물넷. 해 질 녘까지 줄지 않았다.“하나도 안 줄었어.” 테오가 루엔 어깨 너머로 밀랍판을 보며 말했다. “저 사람들 지치지도 않나.”“오늘은 안 지칩니다. 그릇이 가득 찬 채로 왔습니다.”한낮이 지나자 루엔의 손목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