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왕립 마법학교 강당은 돌로 지은 네모난 방이었다. 천장이 높았다. 서까래가 아니라 돌 아치였다. 루엔은 들어서자마자 아치 수부터 셌다. 열한 개.
셀 수 있는 건 그뿐이었다. 사람은 너무 많고 너무 움직였다.
신입생은 앞쪽 긴 의자에 앉았다. 마흔세 명. 루엔이 두 번 셌다. 두 번 다 마흔셋이었다. 대부분 열한 살에서 열세 살. 옷깃마다 가문 문장이 있었다. 문장이 없는 옷깃은 몇 되지 않았다. 루엔 옷깃엔 하르트 가문의 작은 방패가 있었다. 어머니가 떠나기 전 사흘 밤을 들여 다시 수놓은 것이었다.
강당 한가운데 넓고 얕은 나무 대야가 놓여 있었다. 옆에 금을 새긴 막대가 서 있었다.
루엔은 그걸 알아보았다. 여섯 살 가을, 오스윈 오두막 앞마당. 같은 것이었다. 대야는 더 크고 막대는 더 길었다.
“추천생 등록을 시작한다.”
단 위에 늙은 사람이 앉아 있었다. 키가 작았다. 어깨가 넓고 단단했다. 머리는 벗어졌고 흰 눈썹이 짙었다. 회색 옷에 은실로 왕관 무늬 하나. 탑의 색이 아니었다.
옆자리 아이가 속삭였다.
“교장이야. 마그누스 할베르크. 일곱 고리래. 왕실 사람이라 어느 탑 편도 안 든대.”
루엔은 일곱 고리라는 말보다 왕실 사람이라는 말을 먼저 적었다.
*
등록은 이름 순이 아니었다. 추천서가 들어온 순서였다.
한 명씩 대야 앞에 섰다. 교관이 「쏟아서 드는 말」 일곱 마디를 일러 주었다. 아이가 따라 읊고, 대야의 물이 솟아올랐다. 교관이 막대에 대어 마디를 읽었다. 그러고는 아이 등 뒤로 돌아가 두 어깨뼈 사이에 손바닥을 댔다.
“열다섯. 고리 하나.”
“열여섯. 고리 하나.”
“열셋. 고리 하나.”
물이 솟을 때마다 번쩍였다. 윙 소리가 났다. 물기둥이 떨려 대야 밖으로 물이 튀었다. 앞줄 아이들 신발이 젖었다.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물을 들면 원래 그랬다.
열한 번째 아이가 나섰다.
또래보다 머리 하나가 컸다. 붉은 기 도는 금빛 머리를 짧게 잘랐다. 눈썹이 짙었다. 붉은 옷깃에 불꽃 문장.
“디트마르 페르난.”
강당이 조용해졌다. 적색탑 페르난 가문. 모두 아는 이름인 듯했다.
루엔도 아는 이름이었다. 두 해 전 가을, 순회 마법사 셀빈이 성에 들러 한 말이 있었다. 산적 틈에 적색탑 전쟁 마법사가 섞였다고. 페르난 장로 부대에서 달아난 자라고. 루엔은 그 이름을 수첩에 적어 두었다. 그 페르난이 이 페르난인지는 적혀 있지 않았다.
디트마르가 일곱 마디를 읊었다. 목소리가 강당 끝까지 울렸다.
물이 솟았다. 번쩍, 하는 빛에 몇 아이가 눈을 가렸다. 뜨거운 김이 앞줄까지 왔다. 물기둥이 막대 위쪽 금을 넘어갔다.
“스물다섯.”
교관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교관이 등 뒤에 손바닥을 댔다.
“고리 둘.”
강당이 웅성거렸다. 감탄이었다. 디트마르가 돌아서며 신입생 의자를 훑어보았다. 누구도 그 눈과 오래 마주치지 않았다.
오스윈이 탑에서 스무 해 동안 잰 가장 높은 값이 스물여섯이었다. 루엔은 그걸 알았다. 스물다섯은 천 명 가운데 하나 나올까 말까 한 그릇이었다.
*
스물여덟 번째는 여자아이였다.
검은 머리를 뒤로 단단히 땋았다. 허리띠에 가죽 주머니가 두 개 달려 있었다. 하나는 돈주머니 같았고, 하나는 길쭉했다. 걸을 때 길쭉한 주머니 속에서 나무 막대들이 달그락거렸다.
“클라리사 보움.”
누군가 「상단 딸」이라고 속삭였다.
물은 열넷에서 섰다. 교관이 「고리 하나」라고 말했다. 여자아이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자리로 돌아갔다. 앉자마자 손바닥만 한 장부를 꺼내 무언가를 적었다.
루엔은 그 손을 보았다. 방금 제 값을 적는 손이었다. 여기서 제 값을 적는 사람은 루엔 말고 그 아이 하나였다.
*
루엔은 서른한 번째였다.
“루엔 하르트. 북부 하르트령. 추천인 오스윈 마로.”
교관이 추천서를 묶은 끈을 풀었다. 색이 바랜 푸른 끈 한 토막이었다. 오스윈이 선반의 잘린 끈 묶음에서 풀어 쓴 것. 교관은 끈을 손가락에 감은 채 편지를 읽다가 잠깐 멈췄다. 이름 부분을 한 번 더 보았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편지를 단 위로 올려 보내고 대야를 가리켰다.
루엔은 대야 앞에 섰다.
일곱 마디를 읊었다. 탑의 말 그대로. 부을 때는 제 수를 떠올렸다. 여섯 살 때는 몰랐던 것들. 매듭 자리를 닫는 둘레. 쉼 없이.
물이 솟았다.
번쩍임이 없었다. 윙 소리도, 김도 없었다. 물기둥이 조용히 올라가 떨리지 않고 섰다. 대야 밖으로 한 방울도 튀지 않았다.
아홉.
교관이 막대를 읽었다. 두 번 읽었다.
“아홉.”
뒷줄에서 누군가 웃었다. 그 웃음이 옆으로 번졌다. 크지는 않았다. 열한 살 아이들이 참다가 새는 웃음이었다. 지금까지 가장 작은 값은 열하나였다.
“아홉이래.”
“북부 촌구석에서 왔다더니.”
디트마르는 웃지 않았다. 팔짱을 끼고 대야를 보고 있었다.
교관이 루엔 등 뒤로 돌아갔다. 손바닥이 어깨뼈 사이에 닿았다.
교관의 손이 멈췄다. 떼었다가 다시 댔다.
“… 고리 둘.”
웃음이 끊겼다.
한꺼번에 끊기지는 않았다. 앞줄부터 뒷줄로, 물결이 지나가듯 조용해졌다. 대신 다른 소리가 올라왔다.
“둘?”
“아홉짜리가?”
“잘못 짚은 거 아냐?”
교관이 세 번째로 손을 댔다.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다.”
*
단 위에서 의자 끄는 소리가 났다.
교장이 일어나 있었다. 계단을 내려왔다. 서두르지 않았다. 대야 앞까지 와서 먼저 대야 둘레를 보았다. 루엔 앞 아이들 차례에 튄 물로 돌바닥이 젖어 있었다. 대야 가장자리는 루엔 차례 동안 젖은 자리가 늘지 않았다.
교장이 루엔을 내려다보았다. 키 차이가 많이 나지 않았다. 교장이 작았다. 교장 손에 편지 한 장이 들려 있었다. 오스윈의 추천서였다. 맨 아래 몇 줄에 엄지가 얹혀 있었다. 흘리는 것, 내가 잰 바로는 없음. 나머지는 내가 잴 수 없었으니 직접 재 보시오.
“효율이 몇이냐.”
강당이 다시 조용해졌다. 무슨 말인지 모르는 아이가 대부분이었다.
루엔은 거짓말을 고르지 않았다.
“모릅니다.”
“모른다.”
“재는 법을 아직 못 찾았습니다. 부은 것 가운데 얼마가 물을 들고 얼마가 흘러 나가는지 따로 재야 하는데, 흘러 나간 것을 담을 그릇이 없습니다.”
“그럼 무엇을 아느냐.”
“제 쪽은 흘러 나간 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까지 압니다. 빛도, 소리도, 열도 없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과 없는 것은 다르니, 없다고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교장은 잠깐 말이 없었다. 흰 눈썹 아래 눈이 루엔의 손을 보았다. 쇠잔을 쥔 손이었다. 긴장하면 품에서 꺼내 쥐는 버릇이 생겼다는 걸 루엔은 그때 알았다.
“흘리는 게 없다면.” 교장이 말했다. “아홉은 아홉이 아니겠군.”
교장은 그 말만 하고 돌아섰다. 단 위로 올라가 등록부에 무언가를 적었다. 길게.
“다음.”
*
등록이 끝나고 강당을 나서는데 누가 앞을 막았다.
디트마르였다. 가까이서 보니 루엔보다 머리 하나 반이 컸다.
“아홉에 고리 둘. 몇 살에 둘째를 쌓았냐.”
“여덟 살입니다.”
“나는 열 살.” 디트마르가 턱을 들었다. “그릇이 작으면 빨리 차겠지.”
“예. 작은 그릇은 빨리 찹니다.”
디트마르가 눈을 가늘게 떴다. 비꼰 말이 비꼰 말로 돌아오지 않자 어디를 쳐야 할지 모르는 얼굴이었다.
“그 번쩍이지 않는 거. 어떻게 한 거냐.”
“원을 닫았습니다.”
“원은 누구나 닫아.”
“누구나 닫는다고 생각합니다.”
디트마르는 한참 루엔을 보다가 비켜섰다. 지나가는 루엔 뒤에서 말했다.
“다음에 제대로 보자.”
루엔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대답했다.
“다음이 언제입니까.”
뒤에서 대답이 없었다.
*
기숙사 방은 삼층 끝이었다.
침대 둘, 책상 둘, 옷궤 둘. 창은 하나였다. 동쪽 벽, 한쪽 구석에 치우쳐 있었다.
먼저 온 아이가 한쪽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마른 몸에 주근깨. 갈색 곱슬머리가 제멋대로 뻗었다. 물려 입은 듯 소매가 손목 위로 짧았다. 옷깃 문장은 실이 몇 군데 풀려 있었다.
“테오 마일스. 너 아까 그 아홉이지.”
“루엔 하르트입니다.”
“알아. 다 알아.” 테오가 웃었다. 웃음이 많은 얼굴이었다. “방은 반씩 쓰자. 대충. 네가 저쪽, 내가 이쪽.”
루엔은 방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옷궤에서 끈을 꺼냈다.
“대충이 뭔지 알려 주겠다는 거야?”
루엔은 대답 대신 방 가운데 바닥에 끈을 반듯하게 폈다. 벽에서 벽까지, 정확히 절반. 그러고는 창을 보았다.
창은 테오 쪽으로 치우쳐 있었다. 아침 해가 들면 햇빛 네모가 바닥을 가로질러 천천히 움직일 것이었다. 동쪽 창이니 오전 내내.
“햇빛이 한쪽에만 듭니다.”
“그래서?”
“방은 반인데 햇빛은 반이 아닙니다.”
루엔은 창틀 높이와 너비를 쟀다. 해 뜨는 방향은 오늘 아침 나루에서 본 자리를 적어 두었다. 밀랍판에 해가 뜨고 나서 한낮까지 햇빛 네모가 지나갈 자리를 그렸다. 시간마다 한 칸. 그 넓이를 셈했다.
끈 한쪽 끝을 창 쪽 벽 가운데서 조금 옮겼다. 다른 쪽 끝은 문 쪽 벽에서 반대로 조금. 끈이 비스듬해졌다. 바닥은 창 없는 쪽이 조금 넓어지고, 햇빛은 반씩 나뉘었다.
테오는 입을 벌린 채 끈을 보았다.
“… 너 이거 방금 다 셈한 거야?”
“오전 햇빛만 셈했습니다. 오후엔 해가 반대쪽이라 창으로 안 듭니다.”
“겨울엔?”
루엔이 멈췄다. 겨울엔 해가 낮게 떠서 햇빛 네모가 더 깊이 들어온다.
“겨울엔 다시 긋겠습니다.”
테오가 침대에 벌렁 누웠다. 천장을 보며 말했다.
“내가 대충이라고 한 게 잘못이었다.”
“선은 제가 그었으니 고르는 건 테오 님이 하십시오.”
“뭐?”
“자르는 쪽이 나중에 고릅니다. 저희 집 규칙입니다.”
테오가 고개를 들었다. 루엔을 보고, 비스듬한 끈을 보았다. 한참 망설이다가 창 쪽을 골랐다.
“햇빛은 반인데 바닥이 좁잖아. 난 햇빛이 좋아.”
“그렇게 고르실 줄 알았습니다.”
“그럼 왜 고르라고 했어.”
“알았어도 고르는 건 테오 님 몫입니다.”
테오가 베개를 던졌다. 빗나갔다. 루엔은 베개를 주워 테오 침대에 도로 놓고 제 책상으로 갔다. 품에서 쇠잔을 꺼내 책상 오른쪽 위 구석에 놓았다.
“그 잔은 뭐야.”
“계량잔입니다.”
“뭘 재는데.”
“다 잽니다.”
테오는 한참 루엔을 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날 밤 루엔은 창가에 섰다. 동쪽 창이었다. 북쪽 별은 보이지 않았다. 벽이 가렸다.
“지붕으로 나가면 다 보여.” 어둠 속에서 테오가 말했다. “나 벌써 두 번 나갔어. 사감한텐 비밀.”
루엔은 촛불을 켜고 수첩을 폈다. 오늘은 적을 것이 많았다. 맨 아래에 한 줄을 더했다.
테오 마일스: 지붕 두 번. 사감에게 비밀.
“야, 그걸 왜 적어.”
“비밀은 몇 번인지 알아야 지킬 수 있습니다.”
어둠 속에서 테오가 한참 말이 없다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이불 속에서 웃음소리가 샜다.
재무대신 발터 크로이츠는 숫자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루엔은 그걸 첫눈에 알았다. 왕궁 재무실 벽에 장부가 천장까지 꽂혀 있었다. 등마다 해가 적혀 있었고, 해마다 빠진 권이 없었다. 탁자 위 셈판은 알이 반들반들 닳아 있었다. 크로이츠는 쉰 남짓, 머리가 희고 손가락이 가늘었다. 루엔이 들어서자 일어나지 않고 셈판 알을 마저 튕겼다. 한 줄을 다 셈하고서야 고개를 들었다.“앉으시오. 폐하께서 곧 오시오.”왕 레지날드 2세는 정말 곧 왔다. 이번에도 작은 금테만 둘렀다. 앉자마자 본론을 꺼냈다.“봄 싸움 돈이 모자란다.”크로이츠가 장부 한 권을 펼쳤다. 숫자가 빼곡했다. 옛 셈, 금화와 은화와 동화가 스물과 열둘로 얽힌 셈이었다. 그러나 줄이 반듯했고, 끝자리가 맞았다. 루엔은 곁눈으로 합계 셋을 속으로 셈해 보았다. 다 맞았다.“가을 싸움과 겨울 대치에 든 돈이 옛 금화로 만 사천 닢.” 크로이츠가 말했다. “봄에 레오폴트 장군이 국경 성채를 되찾으려면 삯군과 공성 기구를 더 들여야 하오. 새 금화로 이천 닢이 더 있어야 하오. 세금은 가을에 걷히오. 그때까지 빌려야 하오.”왕이 루엔을 보았다.“하르트 상단이 빌려줄 수 있나.”*루엔은 대답하기 전에 수첩을 폈다.클라리사가 어젯밤 적어 준 숫자가 있었다. 하르트 상단이 제 것으로 가진 금과 은, 창고의 물건, 받을 삯. 새 금화로 치면 삼천이백 닢 남짓. 보움 상단과 왕도 상인 조합 둘이 나눠 댄 몫까지 넣은 것이었다.“빌려드릴 수 있습니다.” 루엔이 말했다. “삼백이십 닢까지.”크로이츠의 손가락이 셈판 위에서 멈췄다.“이천이라 했소.”
첫 롱 텔레포트는 눈 녹는 날 아침에 했다.참호 뒤 빈터에 원진을 그렸다. 지름 열두 걸음. 테오가 말뚝과 끈으로 원을 잡고, 루엔이 안쪽 선을 그었다. 원진 가운데에 짐 상자 둘, 그 옆에 루엔과 테오.도착지는 왕도 아스테른, 루엔 공방 뒷마당이었다. 거기엔 클라리사가 같은 크기의 원을 그려 두었다. 사흘 전 편지로 보낸 그림대로.루엔은 보정표를 펼쳤다. 여기서 왕도까지의 거리, 두 곳의 위도, 오늘 해가 뜬 시각. 땅은 하루에 한 바퀴 돈다. 여기와 왕도는 도는 빠르기가 조금 다르다. 그 차이만큼 도착하는 몸을 미리 돌려 놓는다. 열여섯 살 겨울, 모래 자루 두 개로 보인 그 셈이었다.그때는 교장과 파비오가 루엔 식으로 걸었다. 루엔은 옆에서 보기만 했다. 여섯째 고리가 없었다.지금은 있었다.“무섭냐?” 테오가 물었다.“무섭지 않습니다. 셈을 세 번 했습니다.”“나는 무서운데.”“그럼 제 옷자락을 잡으십시오. 떨어지면 셈이 틀어집니다.”테오가 루엔 옷자락을 꽉 쥐었다.루엔은 걸었다.한 번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 발밑의 흙이 진창에서 마른 돌바닥으로 바뀌었다. 코끝의 냄새가 참호 연기에서 빵 굽는 냄새로 바뀌었다. 구스타프 분점이 두 골목 건너였다.짐 상자 둘이 발치에 그대로 서 있었다. 기울지도, 밀리지도 않았다.테오가 비틀거렸다. 루엔 옷자락을 놓지 않은 채 주저앉았다.“어, 어…… 됐어?”“됐습니다. 원 가운데서 손가락 한 마디 어긋났습니다.”뒷마당 문간에서 클라리사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원 끝에 분필로 적어 둔 작은 표를 가리켰다.&l
겨울은 링겐 고개 아래에서 멈췄다.마르케스군은 고개 발치의 국경 성채로 물러나 틀어박혔다. 가을 첫머리에 빼앗은 베스트리아 성채였다. 레오폴트는 그 앞 오 리 떨어진 곳에 참호를 파고 진을 쳤다. 눈이 무릎까지 쌓였다. 어느 쪽도 성채 벽까지 가지 않았다. 가 봐야 얼어붙은 밭에서 죽을 뿐이었다.대신 새벽마다 안개가 왔다.한겨울 두 달은 조용했다. 양쪽 다 눈 속에서 장작과 곡식을 세며 버텼다. 하르트 서기들의 겨울 셈대로, 말먹이가 가장 먼저 바닥을 보였다. 레오폴트는 말 절반을 뒤쪽 고을로 돌려보냈다. 마르케스 쪽 성채에서도 말 울음이 줄었다. 저쪽도 같은 셈을 한 것이었다.첫 안개는 겨울이 끝나 갈 무렵, 아직 눈이 녹기 전 어느 새벽에 왔다. 성채 쪽에서 하얀 김이 낮게 깔려 밀려왔다. 겨울 안개치고는 이상하게 따뜻했다. 앞 참호에 닿자 병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김이 뜨거웠다. 살갗에 닿으면 붉게 부어올랐다. 눈이 따가워 뜰 수 없었다. 김이 지나간 참호 바닥은 눈이 녹아 진창이 되었고, 해가 뜨기도 전에 다시 얼었다. 병사들 발이 진창째 얼어붙었다.사흘 동안 앞 참호에서 발가락을 잃은 병사가 열넷이었다.“적색탑 복합 술식이다.” 레오폴트가 말했다. 눈썹에 서리가 앉아 있었다. “불로 물을 끓이고 바람으로 민다. 옛날에 한 번 봤다. 그땐 이만큼 오래 가지 않았는데.”“교대를 합니다.” 루엔이 말했다. “가을 싸움 뒤로 적이 바꿨습니다. 번쩍임을 세어 보면, 밤을 셋으로 나눠 돌아가며 쏩니다. 한 번에 쏘는 사람은 열넷, 쉬는 사람이 스물여덟.”적도 셈을 했다. 사흘째 오후에 바닥나는 걸 겪은 사람들이었다. 이번엔 바닥나지 않게 나눠 쏘았다.*끓는 안개를 막으려면 같은 걸로 맞서야 했다.불과 물과 바람을 한꺼
요스트는 명령서를 두 번 읽었다.창고 마을은 본진에서 서쪽으로 반나절 거리였다. 메를 강 지류 가에 곡식 창고 여든 채가 줄지어 서 있었다. 여섯 영지에서 보낸 곡식, 말먹이, 화살 다발이 전부 여기 모였다. 요스트는 그 창고 열쇠를 쥔 창고지기였다. 하르트령에서 온 사람이었다. 쉰 살, 한쪽 다리를 조금 절었다.명령서는 새벽에 왔다. 본진에서 출발한 전령이 중간 역참에서 명령을 옮겨 적어 다음 전령에게 넘겼고, 그 전령이 요스트에게 가져왔다.「71번 창고를 열어 곡식 이백 자루를 본진 빵 굽는 곳으로 보낼 것. 레오폴트.」번호 옆에 작은 글자가 하나 더 붙어 있었다. 「71-9」.요스트는 입속으로 셈했다.앞자리 일곱에 둘을 곱하면 열넷. 뒷자리 하나를 더하면 열다섯. 열다섯을 열하나로 나누면 하나에 넷이 남는다.넷이어야 했다.명령서에는 아홉이 적혀 있었다.요스트는 열쇠 꾸러미를 허리에 도로 걸었다. 창고 문을 열지 않았다. 대신 마구간 소년을 불렀다.“본진으로 가라. 가장 빠른 말로. 루엔 도련님께 이 종이를 드려라. 끝자리가 안 맞는다고.”소년이 떠나고 얼마 안 되어, 빵 수레를 몰고 온 보급 기사가 창고 앞에 섰다. 동쪽 영지 사람이었다. 말에서 내리지도 않았다.“왜 안 여나. 장군님 명령이다.”“끝자리가 안 맞습니다.”“끝자리?” 기사가 명령서를 낚아채 보았다. 번호 옆 작은 글자를 한참 보다가 코웃음을 쳤다. “이 꼬랑지 말이냐. 이게 뭐라고.”“번호가 제대로 옮겨졌는지 보는 겁니다.”“번호는 71이라고 적혀 있다. 장군님 서명도 있다. 본진에선 병사들이 빵을 기다린다. 창고지기가 장
마르케스 본대가 온 건 열흘 뒤였다.선봉 뒤로 깃발이 끝없이 이어졌다. 링겐 고개에서 내려오는 행렬이 이틀 동안 끊이지 않았다. 강 동쪽 둑 위에 천막이 들어찼다. 붉은 천막은 스무 채가 넘었다.“이만 넘는다.” 정찰대장이 보고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떨지 않으려고 애쓰는 목소리였다. “이만 오천쯤.”천막 안 사람들이 루엔을 보았다. 귀족 회의에서 삼만이 한계라고 한 사람이었다.“이만 오천이면 셈 안입니다.” 루엔이 말했다. “강 아랫마을 곡식을 우리가 먼저 옮겼으니 오래 못 버팁니다. 문제는 마법사입니다.”“몇이오.”“어젯밤 번쩍임을 셌습니다. 쏜 자리가 마흔하나. 한 자리에 한 사람이면 마흔하나.”*싸움은 이튿날 새벽에 시작됐다.적은 쉬지 않고 쏘았다. 파이어볼이 선 앞까지 와서 떨어졌다. 선을 넘으려는 마법사는 궁수가 막았다. 방패벽 뒤에서 아군은 엎드려 버텼다. 적 보병이 여울을 건너려 했고, 아군 창병이 여울 끝에서 밀어냈다.루엔은 둔덕 위에서 한 가지만 했다.셌다.번쩍임 하나에 밀랍판에 금 하나.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한 시간이 지날 때마다 금을 묶어 따로 적었다. 이 세계의 한 시간, 낮을 열둘로 나눈 그 한 칸.첫날 번쩍임은 삼백열두 번이었다.시간마다 고르게. 스물다섯, 스물여섯, 스물넷. 해 질 녘까지 줄지 않았다.“하나도 안 줄었어.” 테오가 루엔 어깨 너머로 밀랍판을 보며 말했다. “저 사람들 지치지도 않나.”“오늘은 안 지칩니다. 그릇이 가득 찬 채로 왔습니다.”한낮이 지나자 루엔의 손목이
첫 불은 해가 진 직후에 왔다.강 건너 둑 위에서 붉은빛이 번쩍했다. 한 점. 그리고 둘, 셋. 빛이 먼저 오고, 한참 뒤에 소리가 왔다. 쿵. 둔덕 아래 밭에서 흙이 치솟았다. 불붙은 짚단이 사방으로 튀었다.“파이어볼이다!”앞줄 병사들이 방패를 들고 엎드렸다. 기사들이 말을 돌렸다. 둔덕 위 막료 자리에서 루엔은 엎드리지 않았다. 강 건너를 보고 있었다.번쩍.루엔은 셌다. 하나, 둘.쿵.“둘.” 루엔이 말했다. “구백 걸음 남짓.”옆에 엎드린 테오가 고개만 들었다. “뭐가?”“저 불을 쏜 사람까지.”*소리는 빛보다 느리다. 빛은 보는 즉시 오지만, 소리는 하나를 세는 동안 사백오십 걸음쯤을 온다. 루엔 걸음으로. 루엔은 이 셈을 요람에 누워 있을 때부터 했다. 번개가 치면 천둥까지 셌다.속으로는 다른 숫자가 함께 돌았다. 1초에 343미터. 이 세계에서는 쓸 데가 없는 숫자였다. 쓸 데가 있는 건 걸음이었다.적 마법사는 쏠 때마다 번쩍였다. 마나의 여덟 할이 빛과 소리와 열로 샜다. 이 세계에서 그걸 「마나의 위엄」이라 불렀다. 위엄은 멀리서도 보였다. 그리고 보이는 것은 셀 수 있었다.다만 한 사람이 세면 거리만 나왔다. 어느 쪽인지는 나오지 않았다.“테오. 둔덕 왼쪽 끝 참나무로 가십시오. 번쩍이면 세어서 적으십시오. 코넬 형은 오른쪽 끝 방앗간 터로.”“나도 세?” 코넬이 방패 밑에서 말했다.“형은 번개 셀 줄 압니다. 어릴 때 제가 가르쳤습니다.”“대충 기억나.”“대충이면 충분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