登入소문은 학교 담을 넘었다.
겨루기 날로부터 열흘 뒤, 테오가 장터에서 돌아와 말했다.
“빵 사는데 빵집 아저씨가 묻더라. 그 말 없이 불 끄는 애가 너희 학교냐고.”
“불을 끈 적은 없습니다.”
“불덩이를 미끄러뜨렸잖아.”
“미끄러진 불은 저쪽에서 터졌습니다. 꺼진 게 아닙니다.”
“아저씨한텐 그렇다고 했어. 그랬더니 아저씨가 그럼 더 무섭다고.”
루엔은 수첩에 적었다. 소문이 번지는 동안 붙은 말: 불을 끈다. 붙은 까닭: 모름.
말은 셀수록 늘었다. 무영창 소년. 빛을 먹는 아이. 말 한마디로 파이어볼을 돌려보낸 아이. 사일런스를 먹는 아이. 루엔은 그것들을 들어온 날짜와 함께 적었다. 날마다 한두 줄씩 늘었다. 하나도 루엔이 한 말은 아니었다.
*
복도에서 교관 둘이 루엔을 불러 세웠다.
윗반 영창 실습을 맡은 교관들이었다. 한 사람은 키가 크고 한 사람은 턱수염이 있었다. 둘 다 얼굴이 딱딱했다.
“주머니를 비워라.”
“무엇을 찾으십니까.”
“빛을 먹는 돌.” 턱수염 교관이 말했다. “마법을 쓰면 빛이 나는 게 이치다. 빛이 안 난다면 누가 빛을 먹었다는 거지. 남쪽 어디서 그런 돌을 판다는 소문이 있다.”
루엔은 잠깐 그 말을 셈했다. 이치에 안 맞는 말은 아니었다. 빛이 나야 하는데 안 난다면, 무언가 먹었다고 보는 게 교관들이 아는 세상에선 가장 가까운 답이었다.
루엔은 주머니를 비웠다.
분필 한 토막. 세 칸 계량 숟가락. 1동화짜리 영수증 한 묶음. 끈으로 묶었는데 손가락 두 마디 두께였다. 그리고 가죽 돈주머니.
키 큰 교관이 계량 숟가락을 들었다. 세 칸의 작은 숟가락을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이건.”
“소금이랑 설탕을 잽니다.”
“왜.”
“아프면 물에 타서 먹습니다. 비율이 틀리면 안 됩니다.”
교관이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턱수염 교관이 영수증 묶음을 풀었다. 한 장씩 넘겼다. 빵 한 덩이, 동화 한 닢. 초 두 자루, 동화 두 닢. 분필 한 상자, 동화 세 닢. 장마다 날짜, 물건, 값, 그리고 가게 주인의 도장이나 손도장.
넘길수록 교관 얼굴이 굳었다.
“이게 다 뭐냐.”
“쓴 돈마다 받은 영수증입니다.”
“동화 한 닢에 영수증을 주는 가게가 어디 있나.”
“없어서 제가 써 가서 도장을 받았습니다.”
두 교관이 서로를 보았다. 키 큰 교관이 영수증 한 장을 빛에 비춰 보았다. 숫자 옆에 루엔의 글자가 있었다. 둥근 글자, 매듭 같은 글자, 꺾인 글자. 이 세계 막대와 갈래 기호가 아닌 것.
“이건 암호냐.”
“숫자입니다. 제 고향 산수 교실에서 씁니다.”
“숫자를 왜 이렇게 쓰지.”
“이렇게 쓰면 끝자리가 틀렸을 때 바로 보입니다.”
교관들은 대답이 오히려 더 수상하다는 얼굴이었다. 턱수염 교관이 돈주머니를 열었다. 은화 몇 닢과 동화, 그리고 매듭이 하나 더 지어진 작은 주머니. 그 속에서 금화 한 닢이 나왔다.
교관이 금화를 손바닥에 올렸다. 손을 위아래로 두어 번 흔들었다. 눈썹이 모였다.
“이 금화, 가볍군.”
루엔이 눈을 들었다.
“알아채셨습니까.”
“내가 스무 해 급료를 금화로 받았다.” 교관이 금화 테두리를 엄지로 쓸었다. “이건 깎였어. 보리알 두어 톨은 빠졌겠군.”
“세 톨입니다.”
교관이 루엔을 보았다. 루엔은 수첩을 펴서 한 줄을 적었다. 왕도에서 깎인 금화를 알아챈 사람: 하나. 윗반 교관, 턱수염. 손으로 흔들어서.
“뭘 적는 거냐.”
“아버지께서 몇 사람이 알아채는지 세어 오라고 하셨습니다.”
두 교관은 영수증 묶음과 수첩과 가벼운 금화를 번갈아 보았다. 빛을 먹는 돌은 없었다. 대신 설명하기 더 어려운 것들이 있었다.
키 큰 교관이 물건을 루엔 손에 도로 쥐여 주었다.
“가라.”
루엔이 몇 걸음 가자 뒤에서 턱수염 교관이 낮게 말하는 게 들렸다.
“돌을 찾으러 왔다가 장부를 찾았군.”
“영수증이 더 수상해.”
“그러게.”
*
봄 축복 의식은 대성당에서 열렸다.
해마다 봄이면 왕도 모든 교구가 한 곳에 모였다. 씨 뿌리기 전, 땅과 사람에게 복을 비는 날. 왕립 마법학교 학생들도 줄지어 갔다. 신입생은 맨 뒤였다.
대성당은 루엔이 본 가장 큰 건물이었다. 들어서자마자 기둥을 셌다. 한쪽에 열여섯, 모두 서른둘. 천장이 너무 높아 끝이 어둑했다. 저 높이는 마법 없이 올린 게 아니라고 했다. 황색탑이 백 년에 걸쳐 올린 것이라고.
사람이 가득했다. 루엔은 맨 뒤 기둥 옆에 섰다.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테오가 까치발을 했다.
종이 울렸다.
제단 옆 높은 설교대에 한 사람이 올라섰다.
멀어서 얼굴은 작게 보였다. 키가 컸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은빛 흰 머리. 흰 옷에 가장자리만 금실.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있었다.
“백색탑주시다.” 앞줄에서 누가 속삭였다. “카시미르 알바 대사제님.”
설교대의 사람이 두 손을 펼쳤다.
빛이 났다.
손바닥에서 시작해 설교대 전체로, 제단으로, 앞쪽 기둥들로. 희고 눈부신 빛. 대성당 안의 그림자가 한꺼번에 뒤로 밀려났다. 사람들이 숨을 들이켰다. 앞줄부터 무릎을 꿇었다. 우는 사람도 있었다.
루엔은 눈을 가늘게 떴다. 눈이 아팠다. 그래도 눈을 돌리지 않았다.
빛은 깜빡이지 않았다. 셀빈의 라이트나 오스윈의 라이트처럼 떨리지도 않았다. 고르고 크고 오래 갔다. 쉰 해 넘게 마법을 한 사람의 손이었다. 그 손은 아주 곱게 흘리고 있었다.
흘리고 있었다.
*
카시미르 알바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런데 대성당 끝, 맨 뒤 기둥까지 또렷이 왔다.
“이 빛은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드린 말을 받으시고 하늘이 내려 주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고개를 숙였다.
“말은 기도입니다. 영창은 마법사의 기도입니다. 요즘 왕도에 말 없이 마법을 부린다는 이야기가 돈다지요.”
맨 뒤 신입생 줄이 조금 흔들렸다. 몇이 루엔 쪽을 곁눈질했다. 테오가 까치발을 내렸다.
“말 없는 마법은 믿음 없는 기도와 같습니다. 무엇이 일어날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빛은 내려오지 않습니다. 빛이 없는 마법이 누구에게서 온 것인지, 우리는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카시미르는 루엔 쪽을 보지 않았다. 누구도 짚지 않았다. 대성당을 가득 채운 사람들 가운데 맨 뒤 기둥 옆 아이 하나가 보일 리 없었다. 짚지 않아도 되었다. 말은 이미 모두에게 갔다.
루엔은 듣고 있었다. 그리고 재고 있었다.
*
겨우내 루엔은 라이트를 쟀었다.
실습장에서 신입생들이 첫 고리 라이트를 켤 때, 옆에 촛불을 세웠다. 벽에 손을 대고, 라이트 쪽 그림자와 촛불 쪽 그림자가 똑같이 짙어지는 자리를 찾았다. 빛은 멀어질수록 약해진다. 거리가 두 배면 넷으로 나뉘어 약해진다. 그러니 그림자가 같아지는 두 거리를 재면 밝기를 견줄 수 있었다.
신입생 라이트 하나는 촛불 두 자루쯤이었다.
그리고 그 라이트의 빛은 전부 흘린 것이었다. 루엔의 라이트는 흘리지 않았고, 그래서 빛이 없었다. 여섯 살 때 오스윈의 오두막에서 알아낸 것이었다. 빛이 곧 새는 것이었다.
루엔은 맨 뒤 기둥에 등을 대고 손을 들었다. 손 그림자가 대성당 바닥에 떨어졌다. 설교대에서 여기까지 몇 걸음인지 셌다. 들어올 때 기둥 사이를 걸음으로 쟀다. 기둥 서른둘, 사이마다 여덟 걸음 조금 넘게.
그림자는 짙었다. 가까이에서 촛불 몇 자루를 대야 이만큼 짙어질지 셈했다.
거칠었다. 눈이 부셔서 그림자 가장자리가 흐렸다. 몇 할이 틀려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래도 수는 나왔다.
촛불 이천 자루 안팎. 신입생 라이트로 치면 천 개쯤.
천 개 몫의 흘림이, 지금 이 설교대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의식은 종이 두 번 울릴 때까지 간다고 했다. 백색탑은 아침마다 대성당에서 새벽 기도를 드린다고 했다. 날마다. 해마다. 몇백 년째.
루엔은 수첩을 폈다. 맨 뒷장, 「모르는 것」.
첫 줄. 샌 마나는 어디로 가나. 여섯 살 겨울.
그 아래로 줄이 셋 더 있었다. 땅은 얼마나 큰가. 번개를 쓰던 사람은 왜 끝까지 세어 보고 갔나. 레어가 해마다 하나씩 빈다.
루엔은 첫 줄 바로 밑, 비워 둔 틈에 작게 적었다.
신성광: 신입생 라이트 천 개쯤(거칠다, 몇 할 틀릴 수 있음). 날마다 흘림. 이만큼이 날마다 어디로 가나.
손이 잠깐 멈췄다. 그러고는 한 줄을 더 적었다.
저 빛을 나누면 무슨 색이 나올까.
적어 놓고 보니 그건 나중 일이었다. 지금 루엔에게는 유리 조각 하나와 맨 뒤 기둥 자리뿐이었다. 설교대까지 기둥 열여섯 칸이 있었고, 그 사이에 무릎 꿇은 사람이 가득했다. 루엔은 그 줄 옆에 작게 적었다. 나중.
*
의식이 끝나고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대성당 계단에서 늙은 여자가 옆 사람에게 말했다.
“저 빛을 쬐면 무릎이 덜 쑤셔. 해마다 그래.”
루엔은 걸음을 멈추고 그 여자의 무릎을 보았다. 무엇을 셈해야 할지 몰랐다. 재 본 적 없는 것이었다.
테오가 루엔 팔을 잡아끌었다.
“또 뭐 적으려고.”
“적을 게 없습니다. 잴 수 있는 게 없습니다.”
“그게 제일 이상하다, 너한테는.”
학교로 올라가는 언덕길에서 테오가 다시 물었다.
“아까 뭐 적었어. 기둥 옆에서.”
“설교대 빛이 신입생 라이트 몇 개 몫인지 적었습니다.”
“몇 개인데.”
“천 개쯤입니다.”
테오가 걸음을 멈췄다.
“천 개면 많은 거야?”
“우리 학년이 마흔세 명입니다. 마흔세 명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스물세 번씩 켜야 천 개가 조금 안 됩니다.”
“… 그걸 한 사람이?”
“예. 그리고 날마다 합니다.”
테오는 한참 말없이 걸었다. 언덕 중턱에서 입을 열었다.
“그 빛이 다 새는 거라면서. 네 말로는.”
“예.”
“그럼 그 새는 게 다 어디 가는데.”
루엔은 수첩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여섯 해 동안 아무도 묻지 않았던 물음을, 테오가 한 번 듣고 물었다.
“모릅니다. 맨 뒷장 첫 줄에 적혀 있습니다.”
“맨 뒷장?”
“모르는 것을 적는 장입니다.”
테오가 루엔 수첩을 흘끔 보았다. 달라고 하지는 않았다.
“그 장, 요즘 빨리 늘지 않냐.”
루엔은 대답하지 않았다. 언덕 위에서 한 번 돌아보았다. 대성당 첨탑이 저녁 해를 받고 있었다. 설교대의 빛은 꺼진 지 오래인데도, 눈 안쪽에 남은 빛이 아직 다 사라지지 않았다.
지도는 너무 많은 걸 그리고 있었다.막료 천막 벽에 걸린 베스트리아 동부 지도였다. 황색탑 측량사들이 그린 것. 산은 산 모양으로, 숲은 나무 모양으로, 강은 굽이굽이 그대로. 마을마다 교회 첨탑이 그려져 있었다. 아름다운 지도였다.그런데 루엔이 알고 싶은 건 하나였다. 어디가 끊기면 안 되는가.산 모양도, 나무 모양도, 강 굽이도 그걸 가리고 있었다.루엔은 새 종이를 폈다. 그리고 점을 찍었다.본진. 창고 마을. 왕도. 여섯 영지의 곡식 창고. 역참 열두 곳. 여울 셋. 모두 점 하나씩.그다음 점과 점 사이에 선을 그었다. 수레가 다니는 길이면 선 하나. 다리가 있으면 선 위에 짧은 가로줄. 거리도 산 높이도 그리지 않았다. 이어져 있는지 아닌지만.마흔한 개의 점과 예순 개 남짓의 선이 남았다.테오가 어깨 너머로 보았다.“이게 지도야? 거미줄 같은데.”“지도에서 필요 없는 걸 다 뺀 겁니다.”“뭐가 필요 없는데.”“어디로 이어졌는지 빼고 전부 다.”*루엔은 선을 하나씩 손가락으로 가렸다.선 하나를 가리고, 본진에서 출발해 점을 따라가 보았다. 모든 점에 닿으면, 그 선은 끊겨도 괜찮은 선이었다. 돌아가는 길이 있었다. 닿지 못하는 점이 생기면, 그 선은 끊기면 안 되는 선이었다.예순 번을 가렸다.대부분은 괜찮았다. 길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어서, 하나를 끊으면 옆으로 돌아가면 되었다. 멀어지긴 했지만 닿았다.세 선만 달랐다.메를 강 중류의 돌다리. 창고 마을로 들어가는 지류 위 나무다리. 그리고 왕도 동쪽 문 밖, 늪 사이로 난 둑길 위 다리.셋 중 하나만 끊겨도 점들이 두 덩이로 갈라졌다
재무대신 발터 크로이츠는 숫자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루엔은 그걸 첫눈에 알았다. 왕궁 재무실 벽에 장부가 천장까지 꽂혀 있었다. 등마다 해가 적혀 있었고, 해마다 빠진 권이 없었다. 탁자 위 셈판은 알이 반들반들 닳아 있었다. 크로이츠는 쉰 남짓, 머리가 희고 손가락이 가늘었다. 루엔이 들어서자 일어나지 않고 셈판 알을 마저 튕겼다. 한 줄을 다 셈하고서야 고개를 들었다.“앉으시오. 폐하께서 곧 오시오.”왕 레지날드 2세는 정말 곧 왔다. 이번에도 작은 금테만 둘렀다. 앉자마자 본론을 꺼냈다.“봄 싸움 돈이 모자란다.”크로이츠가 장부 한 권을 펼쳤다. 숫자가 빼곡했다. 옛 셈, 금화와 은화와 동화가 스물과 열둘로 얽힌 셈이었다. 그러나 줄이 반듯했고, 끝자리가 맞았다. 루엔은 곁눈으로 합계 셋을 속으로 셈해 보았다. 다 맞았다.“가을 싸움과 겨울 대치에 든 돈이 옛 금화로 만 사천 닢.” 크로이츠가 말했다. “봄에 레오폴트 장군이 국경 성채를 되찾으려면 삯군과 공성 기구를 더 들여야 하오. 새 금화로 이천 닢이 더 있어야 하오. 세금은 가을에 걷히오. 그때까지 빌려야 하오.”왕이 루엔을 보았다.“하르트 상단이 빌려줄 수 있나.”*루엔은 대답하기 전에 수첩을 폈다.클라리사가 어젯밤 적어 준 숫자가 있었다. 하르트 상단이 제 것으로 가진 금과 은, 창고의 물건, 받을 삯. 새 금화로 치면 삼천이백 닢 남짓. 보움 상단과 왕도 상인 조합 둘이 나눠 댄 몫까지 넣은 것이었다.“빌려드릴 수 있습니다.” 루엔이 말했다. “삼백이십 닢까지.”크로이츠의 손가락이 셈판 위에서 멈췄다.“이천이라 했소.”
첫 롱 텔레포트는 눈 녹는 날 아침에 했다.참호 뒤 빈터에 원진을 그렸다. 지름 열두 걸음. 테오가 말뚝과 끈으로 원을 잡고, 루엔이 안쪽 선을 그었다. 원진 가운데에 짐 상자 둘, 그 옆에 루엔과 테오.도착지는 왕도 아스테른, 루엔 공방 뒷마당이었다. 거기엔 클라리사가 같은 크기의 원을 그려 두었다. 사흘 전 편지로 보낸 그림대로.루엔은 보정표를 펼쳤다. 여기서 왕도까지의 거리, 두 곳의 위도, 오늘 해가 뜬 시각. 땅은 하루에 한 바퀴 돈다. 여기와 왕도는 도는 빠르기가 조금 다르다. 그 차이만큼 도착하는 몸을 미리 돌려 놓는다. 열여섯 살 겨울, 모래 자루 두 개로 보인 그 셈이었다.그때는 교장과 파비오가 루엔 식으로 걸었다. 루엔은 옆에서 보기만 했다. 여섯째 고리가 없었다.지금은 있었다.“무섭냐?” 테오가 물었다.“무섭지 않습니다. 셈을 세 번 했습니다.”“나는 무서운데.”“그럼 제 옷자락을 잡으십시오. 떨어지면 셈이 틀어집니다.”테오가 루엔 옷자락을 꽉 쥐었다.루엔은 걸었다.한 번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 발밑의 흙이 진창에서 마른 돌바닥으로 바뀌었다. 코끝의 냄새가 참호 연기에서 빵 굽는 냄새로 바뀌었다. 구스타프 분점이 두 골목 건너였다.짐 상자 둘이 발치에 그대로 서 있었다. 기울지도, 밀리지도 않았다.테오가 비틀거렸다. 루엔 옷자락을 놓지 않은 채 주저앉았다.“어, 어…… 됐어?”“됐습니다. 원 가운데서 손가락 한 마디 어긋났습니다.”뒷마당 문간에서 클라리사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원 끝에 분필로 적어 둔 작은 표를 가리켰다.&l
겨울은 링겐 고개 아래에서 멈췄다.마르케스군은 고개 발치의 국경 성채로 물러나 틀어박혔다. 가을 첫머리에 빼앗은 베스트리아 성채였다. 레오폴트는 그 앞 오 리 떨어진 곳에 참호를 파고 진을 쳤다. 눈이 무릎까지 쌓였다. 어느 쪽도 성채 벽까지 가지 않았다. 가 봐야 얼어붙은 밭에서 죽을 뿐이었다.대신 새벽마다 안개가 왔다.한겨울 두 달은 조용했다. 양쪽 다 눈 속에서 장작과 곡식을 세며 버텼다. 하르트 서기들의 겨울 셈대로, 말먹이가 가장 먼저 바닥을 보였다. 레오폴트는 말 절반을 뒤쪽 고을로 돌려보냈다. 마르케스 쪽 성채에서도 말 울음이 줄었다. 저쪽도 같은 셈을 한 것이었다.첫 안개는 겨울이 끝나 갈 무렵, 아직 눈이 녹기 전 어느 새벽에 왔다. 성채 쪽에서 하얀 김이 낮게 깔려 밀려왔다. 겨울 안개치고는 이상하게 따뜻했다. 앞 참호에 닿자 병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김이 뜨거웠다. 살갗에 닿으면 붉게 부어올랐다. 눈이 따가워 뜰 수 없었다. 김이 지나간 참호 바닥은 눈이 녹아 진창이 되었고, 해가 뜨기도 전에 다시 얼었다. 병사들 발이 진창째 얼어붙었다.사흘 동안 앞 참호에서 발가락을 잃은 병사가 열넷이었다.“적색탑 복합 술식이다.” 레오폴트가 말했다. 눈썹에 서리가 앉아 있었다. “불로 물을 끓이고 바람으로 민다. 옛날에 한 번 봤다. 그땐 이만큼 오래 가지 않았는데.”“교대를 합니다.” 루엔이 말했다. “가을 싸움 뒤로 적이 바꿨습니다. 번쩍임을 세어 보면, 밤을 셋으로 나눠 돌아가며 쏩니다. 한 번에 쏘는 사람은 열넷, 쉬는 사람이 스물여덟.”적도 셈을 했다. 사흘째 오후에 바닥나는 걸 겪은 사람들이었다. 이번엔 바닥나지 않게 나눠 쏘았다.*끓는 안개를 막으려면 같은 걸로 맞서야 했다.불과 물과 바람을 한꺼
요스트는 명령서를 두 번 읽었다.창고 마을은 본진에서 서쪽으로 반나절 거리였다. 메를 강 지류 가에 곡식 창고 여든 채가 줄지어 서 있었다. 여섯 영지에서 보낸 곡식, 말먹이, 화살 다발이 전부 여기 모였다. 요스트는 그 창고 열쇠를 쥔 창고지기였다. 하르트령에서 온 사람이었다. 쉰 살, 한쪽 다리를 조금 절었다.명령서는 새벽에 왔다. 본진에서 출발한 전령이 중간 역참에서 명령을 옮겨 적어 다음 전령에게 넘겼고, 그 전령이 요스트에게 가져왔다.「71번 창고를 열어 곡식 이백 자루를 본진 빵 굽는 곳으로 보낼 것. 레오폴트.」번호 옆에 작은 글자가 하나 더 붙어 있었다. 「71-9」.요스트는 입속으로 셈했다.앞자리 일곱에 둘을 곱하면 열넷. 뒷자리 하나를 더하면 열다섯. 열다섯을 열하나로 나누면 하나에 넷이 남는다.넷이어야 했다.명령서에는 아홉이 적혀 있었다.요스트는 열쇠 꾸러미를 허리에 도로 걸었다. 창고 문을 열지 않았다. 대신 마구간 소년을 불렀다.“본진으로 가라. 가장 빠른 말로. 루엔 도련님께 이 종이를 드려라. 끝자리가 안 맞는다고.”소년이 떠나고 얼마 안 되어, 빵 수레를 몰고 온 보급 기사가 창고 앞에 섰다. 동쪽 영지 사람이었다. 말에서 내리지도 않았다.“왜 안 여나. 장군님 명령이다.”“끝자리가 안 맞습니다.”“끝자리?” 기사가 명령서를 낚아채 보았다. 번호 옆 작은 글자를 한참 보다가 코웃음을 쳤다. “이 꼬랑지 말이냐. 이게 뭐라고.”“번호가 제대로 옮겨졌는지 보는 겁니다.”“번호는 71이라고 적혀 있다. 장군님 서명도 있다. 본진에선 병사들이 빵을 기다린다. 창고지기가 장
마르케스 본대가 온 건 열흘 뒤였다.선봉 뒤로 깃발이 끝없이 이어졌다. 링겐 고개에서 내려오는 행렬이 이틀 동안 끊이지 않았다. 강 동쪽 둑 위에 천막이 들어찼다. 붉은 천막은 스무 채가 넘었다.“이만 넘는다.” 정찰대장이 보고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떨지 않으려고 애쓰는 목소리였다. “이만 오천쯤.”천막 안 사람들이 루엔을 보았다. 귀족 회의에서 삼만이 한계라고 한 사람이었다.“이만 오천이면 셈 안입니다.” 루엔이 말했다. “강 아랫마을 곡식을 우리가 먼저 옮겼으니 오래 못 버팁니다. 문제는 마법사입니다.”“몇이오.”“어젯밤 번쩍임을 셌습니다. 쏜 자리가 마흔하나. 한 자리에 한 사람이면 마흔하나.”*싸움은 이튿날 새벽에 시작됐다.적은 쉬지 않고 쏘았다. 파이어볼이 선 앞까지 와서 떨어졌다. 선을 넘으려는 마법사는 궁수가 막았다. 방패벽 뒤에서 아군은 엎드려 버텼다. 적 보병이 여울을 건너려 했고, 아군 창병이 여울 끝에서 밀어냈다.루엔은 둔덕 위에서 한 가지만 했다.셌다.번쩍임 하나에 밀랍판에 금 하나.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한 시간이 지날 때마다 금을 묶어 따로 적었다. 이 세계의 한 시간, 낮을 열둘로 나눈 그 한 칸.첫날 번쩍임은 삼백열두 번이었다.시간마다 고르게. 스물다섯, 스물여섯, 스물넷. 해 질 녘까지 줄지 않았다.“하나도 안 줄었어.” 테오가 루엔 어깨 너머로 밀랍판을 보며 말했다. “저 사람들 지치지도 않나.”“오늘은 안 지칩니다. 그릇이 가득 찬 채로 왔습니다.”한낮이 지나자 루엔의 손목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