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가을 학기 첫날, 클라리사가 기숙사 문 앞에 서 있었다.
“아버지가 너 보재.”
“언제입니까.”
“오늘. 해 지기 전.” 클라리사가 손바닥만 한 장부를 폈다. “아버지 하루는 칸이 꽉 찼어. 네 칸은 해 지기 전 모래시계 한 번. 늦으면 다음 칸 손님이 들어와.”
루엔은 그 장부를 보았다. 칸마다 시각과 이름이 적혀 있었다. 모래시계 반 번짜리 칸도 있었다.
“저보다 짧은 칸이 있군요.”
“그 사람은 소금 값만 물으러 와.”
클라리사가 가고 나서 테오가 루엔 책상을 들여다보았다. 쇠잔 옆에 쇠 되가 놓여 있었다. 잔보다 스물네 배쯤 커 보였다. 실은 마흔여덟 배였다.
“여름 동안 잔이 새끼를 쳤냐.”
“잔 마흔여덟이 되 하나입니다.”
“그걸 왜 들고 왔어. 기숙사에서 곡식 팔 거야?”
“누가 대 보자고 하면 대 보려고 들고 왔습니다.”
“누가 그러는데.”
루엔은 창밖을 보았다. 강가 창고 거리 쪽이었다.
“방금 한 사람 생겼습니다.”
*
보움 상단은 강가 창고 거리에 있었다.
돌로 지은 긴 건물이었다. 문을 열자 양털 냄새와 소금에 절인 생선 냄새가 한꺼번에 왔다. 루엔은 그 냄새를 알았다. 한 해 전 열엿새 동안 맡은 냄새였다.
넓은 방에 셈판이 줄지어 있었다. 스무 개가 넘었다. 판마다 서기가 하나씩 붙어 조약돌을 밀었다. 딸깍, 딸깍. 빗소리 같았다.
안쪽 방에서 아달베르트 보움이 일어섰다.
몸집이 작았다. 루엔보다 머리 하나 클까 말까. 대신 단단했다. 검은 머리에 흰 줄이 섞였다. 귀 뒤에 산가지 하나가 펜처럼 꽂혀 있었다.
“하르트 도련님.” 목소리가 빨랐다. “작년 여름 우리 강배에 짐 무게 종이를 내미신 분이지요. 선장이 그 종이를 아직 가지고 있습니다. 배 저울에 안 올리고 삯을 받은 건 처음이라서.”
“양털 상단이 보움 상단이었습니까.”
“양털도 보움이고 소금도 보움이지요. 앉으십시오. 모래시계를 뒤집었습니다.”
책상 위 모래시계가 이미 흐르고 있었다.
*
아달베르트가 궤짝을 열었다. 쇠 되 셋이 나왔다.
“여름에 로센 지점 사람이 노르벡 장터 이야기를 가져왔습니다. 쇠 되, 깎기 막대, 통 표. 그래서 사람을 보내 광장 되를 재 오게 했지요. 지름, 깊이. 그걸로 여기 대장간에서 셋을 두드렸습니다.”
“재 오게 하셨습니까. 물로 대 보지 않고.”
아달베르트가 눈썹을 올렸다.
“재 온 치수대로 두드리면 같은 되가 되지 않습니까.”
“되는 부피입니다. 지름이 손톱만큼 어긋나면 부피는 그보다 더 어긋납니다.”
아달베르트의 손가락이 책상 위에서 움직였다. 산가지 몇 개가 줄을 지었다가 흩어졌다. 모래시계 모래가 한 줌도 안 떨어진 사이였다.
“지름이 백에 하나 크면 바닥 넓이는 백에 둘 남짓 크군요. 깊이까지 어긋나면 셋.”
루엔은 잠깐 말을 잊었다. 맞았다. 셈판도 없이.
“예. 셋입니다.”
“우리 서기들은 그걸 한나절 걸려 셈하지요. 저는 서른 해를 했습니다.” 아달베르트가 산가지를 쓸어 모았다. “그래서 되를 사람한테 재 오게 하면 안 된다는 것까지는 몰랐습니다. 셈은 빨라도 모르는 건 모르는 겁니다.”
루엔은 짐에서 제 쇠 되를 꺼냈다. “이건 노르벡 광장 되와 물로 번갈아 대 본 것입니다. 쇠잔 마흔여덟. 두 번.”
아달베르트는 한참 두 종류의 되를 보았다. 그러고는 귀 뒤의 산가지를 뽑아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대 보십시오.”
물을 길어 왔다. 루엔의 되에 채워 셋에 차례로 부었다. 깎기 막대로 깎았다.
첫째는 넘쳤다. 쇠잔 반 잔.
둘째는 모자랐다. 쇠잔 한 잔.
셋째는 맞았다. 끝까지.
“셋 중 하나.” 아달베르트가 산가지를 탁 내려놓았다. “그런데도 저는 벌써 장부를 전부 이 되로 바꿨습니다.”
“왜 바꾸셨습니까.”
아달베르트가 웃었다. 클라리사와 같은 웃음이었다. 셈이 맞았을 때의 웃음.
“우리 상단은 열네 영지에서 곡식을 삽니다. 되가 열넷이지요. 서기들이 되를 바꿔 셈할 때마다 끝자리를 버립니다. 수북이 담느냐 깎느냐로 날마다 다툽니다. 지난해 그렇게 흘린 걸 모아 셈해 봤습니다. 사고판 곡식 값 백에 셋이 넘었습니다. 은화로 백사십 닢.”
“백에 셋.”
“바다 건너 소금 배 한 척이 가라앉아도 백에 셋은 안 잃습니다. 그걸 해마다 되로 잃고 있었지요. 원래 그렇다면서.”
루엔은 수첩을 폈다. 그리고 원래 그렇다 쪽이 아니라 고친 것 쪽에 적었다. 아달베르트 보움. 되 열넷 → 하나. 백에 셋.
*
그 가을에 왕도 상인 조합 세 곳이 보움을 따랐다. 곡물 조합, 소금 조합, 기름 조합.
보움 상단이 바꾼 뒤로 보움과 거래하는 가게들이 셈이 편해졌다. 편해지니 따라 바꿨다. 조합은 대장간마다 복사본을 두드리게 했다.
복사본이 스무 개를 넘었을 때 문제가 났다. 같은 가게에서 산 보리가 조합 창고 되로는 한 되, 가게 되로는 한 되 조금 모자랐다. 다툼이 늘었다. 되를 하나로 바꾼 까닭이 다툼을 줄이려는 것이었는데.
아달베르트가 다시 루엔을 불렀다. 이번엔 조합 회관이었다.
탁자 위에 쇠 되 스물세 개가 늘어서 있었다.
루엔은 하나씩 물을 부었다. 루엔의 되를 원본 삼아. 한나절이 걸렸다. 조합 사람들이 둘러서서 쇠잔을 셌다. 클라리사가 산가지로 받아 적었다.
열여섯째 되에서 클라리사가 산가지를 멈췄다.
“다시 부어.”
“넘쳤습니다. 쇠잔 반의 반.”
“네가 깎을 때 막대가 기울었어. 오른쪽 끝이 떴어. 봤어.”
루엔은 되를 비우고 다시 채웠다. 이번엔 막대 양 끝을 되 테두리에 손가락으로 눌러 붙이고 깎았다. 부었다.
맞았다. 끝까지.
“제가 틀렸습니다.”
클라리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열여섯째 줄의 산가지를 옮겨 놓고 다음 되를 기다렸다. 입꼬리만 조금 올라가 있었다.
맞은 것 아홉. 넘친 것 여섯. 모자란 것 여덟.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이오.” 곡물 조합장이 물었다. “다 녹여서 다시 두드리오?”
“맞은 아홉에 도장을 찍으십시오. 나머지는 두드려 고친 다음 다시 대 보고 찍으십시오. 도장 없는 되로는 사고팔지 않기로 조합이 정하시면 됩니다.”
“도장은 누가 찍소.”
“조합이 찍으십시오. 제가 찍으면 제가 없을 때 아무도 못 찍습니다.”
조합장들이 서로를 보았다. 소금 조합장이 먼저 말했다.
“그럼 도장에 하르트 방패를 새기지. 되 이름이 하르트 되니까.”
“방패는 안 됩니다.”
“왜.”
“이 되가 맞는 건 저희 집안이 맞아서가 아닙니다. 대 본 사람들이 대 봐서 맞는 겁니다. 조합 표를 새기시고, 옆에 그해 표시를 넣으십시오. 올해 도장이 찍힌 되는 올해 대 본 되입니다. 내년에 안 대 보면 도장이 한 해 묵습니다. 묵은 도장은 보면 압니다.”
소금 조합장이 턱을 문질렀다. 곡물 조합장이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원본은.” 아달베르트가 물었다. “도련님 되를 원본으로 쓰면, 도련님이 영지에 가실 때 들고 가시면 어쩝니까.”
“두고 가겠습니다. 궤짝에 넣고 열쇠를 둘로 하십시오. 보움 상단 하나, 곡물 조합 하나. 둘이 같이 와야 열립니다. 그리고 세 해마다 한 번, 이 되를 노르벡 광장 되에 다시 대 보십시오. 원본도 누가 대 봐야 원본입니다.”
“노르벡까지 되를 들고 가라고?”
“보움 강배가 해마다 올라가지 않습니까. 되 하나는 여섯 근 반입니다.”
아달베르트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짐 무게를 셈하는 상단 주인 앞에서 짐 무게로 답한 것이었다.
“그리고 해마다 한 번, 모든 되를 원본에 다시 대 보는 날을 정하십시오. 쇠도 닳고 찌그러집니다. 한 번 맞았다고 영영 맞지 않습니다.”
“무슨 날로.”
루엔은 잠깐 생각했다. 여섯 살 때 오스윈이 그릇을 재자고 한 날이 떠올랐다.
“가을 첫 보름입니다. 달이 밝아서 늦게까지 댈 수 있습니다.”
*
고칠 되를 두드린 대장장이들이 회관으로 불려 왔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가슴을 폈다. 팔뚝이 굵고 목소리가 컸다. 그의 되는 넘친 쪽이었다. 쇠잔 한 잔 반.
“내 되가 제일 후하오. 손님한테 그만큼 더 주는 되지. 그게 흠이오?”
조합 사람들이 웃었다. 곡물 조합의 늙은 상인 하나가 손을 들었다.
“그럼 그 되는 우리가 살 때만 쓰겠소. 후한 되로 사면 우리가 좋지.”
다른 상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라는 얼굴들이었다.
루엔이 말했다.
“파실 때도 쓰셔야 합니다.”
회관이 조용해졌다.
“살 때만 쓰는 되는 되가 아닙니다. 그건 한쪽만 이기는 막대입니다. 노르벡에서도 집사 막대가 그랬습니다.”
늙은 상인이 입을 다물었다. 대장장이가 루엔을 보았다가, 제 되를 보았다가, 말없이 되를 들고 나갔다.
사흘 뒤 그 되가 다시 왔다. 쇠잔 마흔여덟. 대장장이는 도장이 찍히는 걸 끝까지 보고 갔다. 가면서 한마디 했다.
“후한 건 내 손이지, 되가 아니오.”
아달베르트가 크게 웃었다. 루엔은 그 말을 수첩에 적었다. 대장장이 이름과 함께.
*
해 질 무렵, 아달베르트가 루엔을 상단 안쪽 방으로 데려갔다.
선반에 장부가 천장까지 있었다. 아달베르트가 한 권을 뽑아 펼쳤다. 칸마다 곱셈이었다. 되를 되로, 은화를 은화로, 무게를 무게로. 나라와 영지와 조폐소가 다 달랐다.
“서기 스무 명이 하루 종일 하는 일이 이겁니다. 곱하기. 곱하기. 곱하기.” 아달베르트가 장부를 두드렸다. “되를 하나로 바꿔서 조금 줄었습니다. 그래도 은화는 아직 여럿이지요. 곱셈이 상단의 절반을 먹습니다.”
루엔은 장부를 오래 보았다. 셈판 소리가 벽 너머에서 들렸다. 딸깍, 딸깍.
곱셈이 덧셈이 될 수 있다면.
생각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루엔은 아달베르트에게 인사하고 나오면서 벌써 셈하고 있었다. 칸이 몇 개 필요한지. 한 칸에 모래시계가 몇 번 드는지. 사람이 몇 필요한지.
클라리사가 문간에서 장부를 덮었다.
“모래시계 한 번이라고 했는데 세 번 넘었어.”
“다음 칸 손님은요.”
“아버지가 돌려보냈어.” 클라리사가 루엔을 흘끗 보았다. “처음이야.”
재무대신 발터 크로이츠는 숫자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루엔은 그걸 첫눈에 알았다. 왕궁 재무실 벽에 장부가 천장까지 꽂혀 있었다. 등마다 해가 적혀 있었고, 해마다 빠진 권이 없었다. 탁자 위 셈판은 알이 반들반들 닳아 있었다. 크로이츠는 쉰 남짓, 머리가 희고 손가락이 가늘었다. 루엔이 들어서자 일어나지 않고 셈판 알을 마저 튕겼다. 한 줄을 다 셈하고서야 고개를 들었다.“앉으시오. 폐하께서 곧 오시오.”왕 레지날드 2세는 정말 곧 왔다. 이번에도 작은 금테만 둘렀다. 앉자마자 본론을 꺼냈다.“봄 싸움 돈이 모자란다.”크로이츠가 장부 한 권을 펼쳤다. 숫자가 빼곡했다. 옛 셈, 금화와 은화와 동화가 스물과 열둘로 얽힌 셈이었다. 그러나 줄이 반듯했고, 끝자리가 맞았다. 루엔은 곁눈으로 합계 셋을 속으로 셈해 보았다. 다 맞았다.“가을 싸움과 겨울 대치에 든 돈이 옛 금화로 만 사천 닢.” 크로이츠가 말했다. “봄에 레오폴트 장군이 국경 성채를 되찾으려면 삯군과 공성 기구를 더 들여야 하오. 새 금화로 이천 닢이 더 있어야 하오. 세금은 가을에 걷히오. 그때까지 빌려야 하오.”왕이 루엔을 보았다.“하르트 상단이 빌려줄 수 있나.”*루엔은 대답하기 전에 수첩을 폈다.클라리사가 어젯밤 적어 준 숫자가 있었다. 하르트 상단이 제 것으로 가진 금과 은, 창고의 물건, 받을 삯. 새 금화로 치면 삼천이백 닢 남짓. 보움 상단과 왕도 상인 조합 둘이 나눠 댄 몫까지 넣은 것이었다.“빌려드릴 수 있습니다.” 루엔이 말했다. “삼백이십 닢까지.”크로이츠의 손가락이 셈판 위에서 멈췄다.“이천이라 했소.”
첫 롱 텔레포트는 눈 녹는 날 아침에 했다.참호 뒤 빈터에 원진을 그렸다. 지름 열두 걸음. 테오가 말뚝과 끈으로 원을 잡고, 루엔이 안쪽 선을 그었다. 원진 가운데에 짐 상자 둘, 그 옆에 루엔과 테오.도착지는 왕도 아스테른, 루엔 공방 뒷마당이었다. 거기엔 클라리사가 같은 크기의 원을 그려 두었다. 사흘 전 편지로 보낸 그림대로.루엔은 보정표를 펼쳤다. 여기서 왕도까지의 거리, 두 곳의 위도, 오늘 해가 뜬 시각. 땅은 하루에 한 바퀴 돈다. 여기와 왕도는 도는 빠르기가 조금 다르다. 그 차이만큼 도착하는 몸을 미리 돌려 놓는다. 열여섯 살 겨울, 모래 자루 두 개로 보인 그 셈이었다.그때는 교장과 파비오가 루엔 식으로 걸었다. 루엔은 옆에서 보기만 했다. 여섯째 고리가 없었다.지금은 있었다.“무섭냐?” 테오가 물었다.“무섭지 않습니다. 셈을 세 번 했습니다.”“나는 무서운데.”“그럼 제 옷자락을 잡으십시오. 떨어지면 셈이 틀어집니다.”테오가 루엔 옷자락을 꽉 쥐었다.루엔은 걸었다.한 번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 발밑의 흙이 진창에서 마른 돌바닥으로 바뀌었다. 코끝의 냄새가 참호 연기에서 빵 굽는 냄새로 바뀌었다. 구스타프 분점이 두 골목 건너였다.짐 상자 둘이 발치에 그대로 서 있었다. 기울지도, 밀리지도 않았다.테오가 비틀거렸다. 루엔 옷자락을 놓지 않은 채 주저앉았다.“어, 어…… 됐어?”“됐습니다. 원 가운데서 손가락 한 마디 어긋났습니다.”뒷마당 문간에서 클라리사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원 끝에 분필로 적어 둔 작은 표를 가리켰다.&l
겨울은 링겐 고개 아래에서 멈췄다.마르케스군은 고개 발치의 국경 성채로 물러나 틀어박혔다. 가을 첫머리에 빼앗은 베스트리아 성채였다. 레오폴트는 그 앞 오 리 떨어진 곳에 참호를 파고 진을 쳤다. 눈이 무릎까지 쌓였다. 어느 쪽도 성채 벽까지 가지 않았다. 가 봐야 얼어붙은 밭에서 죽을 뿐이었다.대신 새벽마다 안개가 왔다.한겨울 두 달은 조용했다. 양쪽 다 눈 속에서 장작과 곡식을 세며 버텼다. 하르트 서기들의 겨울 셈대로, 말먹이가 가장 먼저 바닥을 보였다. 레오폴트는 말 절반을 뒤쪽 고을로 돌려보냈다. 마르케스 쪽 성채에서도 말 울음이 줄었다. 저쪽도 같은 셈을 한 것이었다.첫 안개는 겨울이 끝나 갈 무렵, 아직 눈이 녹기 전 어느 새벽에 왔다. 성채 쪽에서 하얀 김이 낮게 깔려 밀려왔다. 겨울 안개치고는 이상하게 따뜻했다. 앞 참호에 닿자 병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김이 뜨거웠다. 살갗에 닿으면 붉게 부어올랐다. 눈이 따가워 뜰 수 없었다. 김이 지나간 참호 바닥은 눈이 녹아 진창이 되었고, 해가 뜨기도 전에 다시 얼었다. 병사들 발이 진창째 얼어붙었다.사흘 동안 앞 참호에서 발가락을 잃은 병사가 열넷이었다.“적색탑 복합 술식이다.” 레오폴트가 말했다. 눈썹에 서리가 앉아 있었다. “불로 물을 끓이고 바람으로 민다. 옛날에 한 번 봤다. 그땐 이만큼 오래 가지 않았는데.”“교대를 합니다.” 루엔이 말했다. “가을 싸움 뒤로 적이 바꿨습니다. 번쩍임을 세어 보면, 밤을 셋으로 나눠 돌아가며 쏩니다. 한 번에 쏘는 사람은 열넷, 쉬는 사람이 스물여덟.”적도 셈을 했다. 사흘째 오후에 바닥나는 걸 겪은 사람들이었다. 이번엔 바닥나지 않게 나눠 쏘았다.*끓는 안개를 막으려면 같은 걸로 맞서야 했다.불과 물과 바람을 한꺼
요스트는 명령서를 두 번 읽었다.창고 마을은 본진에서 서쪽으로 반나절 거리였다. 메를 강 지류 가에 곡식 창고 여든 채가 줄지어 서 있었다. 여섯 영지에서 보낸 곡식, 말먹이, 화살 다발이 전부 여기 모였다. 요스트는 그 창고 열쇠를 쥔 창고지기였다. 하르트령에서 온 사람이었다. 쉰 살, 한쪽 다리를 조금 절었다.명령서는 새벽에 왔다. 본진에서 출발한 전령이 중간 역참에서 명령을 옮겨 적어 다음 전령에게 넘겼고, 그 전령이 요스트에게 가져왔다.「71번 창고를 열어 곡식 이백 자루를 본진 빵 굽는 곳으로 보낼 것. 레오폴트.」번호 옆에 작은 글자가 하나 더 붙어 있었다. 「71-9」.요스트는 입속으로 셈했다.앞자리 일곱에 둘을 곱하면 열넷. 뒷자리 하나를 더하면 열다섯. 열다섯을 열하나로 나누면 하나에 넷이 남는다.넷이어야 했다.명령서에는 아홉이 적혀 있었다.요스트는 열쇠 꾸러미를 허리에 도로 걸었다. 창고 문을 열지 않았다. 대신 마구간 소년을 불렀다.“본진으로 가라. 가장 빠른 말로. 루엔 도련님께 이 종이를 드려라. 끝자리가 안 맞는다고.”소년이 떠나고 얼마 안 되어, 빵 수레를 몰고 온 보급 기사가 창고 앞에 섰다. 동쪽 영지 사람이었다. 말에서 내리지도 않았다.“왜 안 여나. 장군님 명령이다.”“끝자리가 안 맞습니다.”“끝자리?” 기사가 명령서를 낚아채 보았다. 번호 옆 작은 글자를 한참 보다가 코웃음을 쳤다. “이 꼬랑지 말이냐. 이게 뭐라고.”“번호가 제대로 옮겨졌는지 보는 겁니다.”“번호는 71이라고 적혀 있다. 장군님 서명도 있다. 본진에선 병사들이 빵을 기다린다. 창고지기가 장
마르케스 본대가 온 건 열흘 뒤였다.선봉 뒤로 깃발이 끝없이 이어졌다. 링겐 고개에서 내려오는 행렬이 이틀 동안 끊이지 않았다. 강 동쪽 둑 위에 천막이 들어찼다. 붉은 천막은 스무 채가 넘었다.“이만 넘는다.” 정찰대장이 보고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떨지 않으려고 애쓰는 목소리였다. “이만 오천쯤.”천막 안 사람들이 루엔을 보았다. 귀족 회의에서 삼만이 한계라고 한 사람이었다.“이만 오천이면 셈 안입니다.” 루엔이 말했다. “강 아랫마을 곡식을 우리가 먼저 옮겼으니 오래 못 버팁니다. 문제는 마법사입니다.”“몇이오.”“어젯밤 번쩍임을 셌습니다. 쏜 자리가 마흔하나. 한 자리에 한 사람이면 마흔하나.”*싸움은 이튿날 새벽에 시작됐다.적은 쉬지 않고 쏘았다. 파이어볼이 선 앞까지 와서 떨어졌다. 선을 넘으려는 마법사는 궁수가 막았다. 방패벽 뒤에서 아군은 엎드려 버텼다. 적 보병이 여울을 건너려 했고, 아군 창병이 여울 끝에서 밀어냈다.루엔은 둔덕 위에서 한 가지만 했다.셌다.번쩍임 하나에 밀랍판에 금 하나.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한 시간이 지날 때마다 금을 묶어 따로 적었다. 이 세계의 한 시간, 낮을 열둘로 나눈 그 한 칸.첫날 번쩍임은 삼백열두 번이었다.시간마다 고르게. 스물다섯, 스물여섯, 스물넷. 해 질 녘까지 줄지 않았다.“하나도 안 줄었어.” 테오가 루엔 어깨 너머로 밀랍판을 보며 말했다. “저 사람들 지치지도 않나.”“오늘은 안 지칩니다. 그릇이 가득 찬 채로 왔습니다.”한낮이 지나자 루엔의 손목이
첫 불은 해가 진 직후에 왔다.강 건너 둑 위에서 붉은빛이 번쩍했다. 한 점. 그리고 둘, 셋. 빛이 먼저 오고, 한참 뒤에 소리가 왔다. 쿵. 둔덕 아래 밭에서 흙이 치솟았다. 불붙은 짚단이 사방으로 튀었다.“파이어볼이다!”앞줄 병사들이 방패를 들고 엎드렸다. 기사들이 말을 돌렸다. 둔덕 위 막료 자리에서 루엔은 엎드리지 않았다. 강 건너를 보고 있었다.번쩍.루엔은 셌다. 하나, 둘.쿵.“둘.” 루엔이 말했다. “구백 걸음 남짓.”옆에 엎드린 테오가 고개만 들었다. “뭐가?”“저 불을 쏜 사람까지.”*소리는 빛보다 느리다. 빛은 보는 즉시 오지만, 소리는 하나를 세는 동안 사백오십 걸음쯤을 온다. 루엔 걸음으로. 루엔은 이 셈을 요람에 누워 있을 때부터 했다. 번개가 치면 천둥까지 셌다.속으로는 다른 숫자가 함께 돌았다. 1초에 343미터. 이 세계에서는 쓸 데가 없는 숫자였다. 쓸 데가 있는 건 걸음이었다.적 마법사는 쏠 때마다 번쩍였다. 마나의 여덟 할이 빛과 소리와 열로 샜다. 이 세계에서 그걸 「마나의 위엄」이라 불렀다. 위엄은 멀리서도 보였다. 그리고 보이는 것은 셀 수 있었다.다만 한 사람이 세면 거리만 나왔다. 어느 쪽인지는 나오지 않았다.“테오. 둔덕 왼쪽 끝 참나무로 가십시오. 번쩍이면 세어서 적으십시오. 코넬 형은 오른쪽 끝 방앗간 터로.”“나도 세?” 코넬이 방패 밑에서 말했다.“형은 번개 셀 줄 압니다. 어릴 때 제가 가르쳤습니다.”“대충 기억나.”“대충이면 충분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