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로센 상인은 약속을 지켰다.
다음 장날, 수레에 소나무 통 하나가 실려 왔다. 쇠띠 세 줄. 로센 장터 한가운데 걸려 있던 되였다. 네 살 가을, 세금 날 광장에서 본 그 되와 같은 모양이었다. 조금 더 낡았을 뿐.
루엔은 로센 되에 물을 채웠다. 쇠잔으로 한 잔씩 퍼냈다.
쉰세 잔. 그리고 잔 바닥에 조금.
그 조금을 다시 쟀다. 쇠잔 반의 반.
루엔은 셈을 적었다. 로센 되 열이면 쇠 되 열하나 하고 쇠잔 넉 잔 반.
여덟 해 전 광장에서 핌이 보리를 잃은 그 「조금」이었다. 쇠잔 넉 잔 반. 이제 이름이 생겼다.
“이걸 재려고 여덟 해를 기다렸소?” 상인이 물었다.
“기다린 건 되입니다. 제가 기다린 건 아닙니다.”
상인은 바꾸는 줄이 붙은 표를 받아 들고 로센으로 돌아갔다.
사흘 뒤 루엔은 코넬의 말 뒤에 타고 로센 장터에 갔다. 세어 보기로 한 것이 있었다.
로센 장터에서 루엔 글자를 쓰는 사람은 넷이었다. 노르벡 교실에서 배우고 시집간 여자. 그 여자에게 배운 아이 둘. 그리고 하나 더.
곡물상 도르크였다. 배가 조금 더 나왔고, 목소리는 여전히 좋았다. 그의 장부는 옛 글자로 적혀 있었다. 다만 줄마다 맨 끝자리 하나만 루엔 글자였다.
“끝자리만 이렇게 적으면 틀린 게 바로 보여서.” 도르크가 장부를 덮으며 말했다. 루엔 쪽은 보지 않았다. “배운 건 아니오. 보다 보니 알게 된 거지.”
루엔은 수첩의 「한 사람 이상」에 줄을 긋고 적었다. 넷. 그 아래 작게. 도르크 — 끝자리만.
*
그 주에 토빈이 성으로 올라왔다. 모자를 손에 쥐고 있었다.
“나리. 올봄 물이 방앗간 문턱까지 왔습니다.”
가렛이 고개를 들었다. 기사장도 들었다. 기사 여덟 가운데 가장 나이 많은 사람이었다. 루엔의 도착 표에서 늘 첫 금 안에 들던 이름.
“둑은.”
“둑은 안 넘었습니다. 문턱만.” 토빈이 모자를 돌렸다. “그런데 방앗간 문턱이 둑 꼭대기보다 한 뼘밖에 안 낮거든요. 한 뼘만 더 왔으면 둑을 넘었을 겁니다.”
강은 노르벡 아래를 지나 남쪽으로 흘렀다. 마을을 가로지른 개울이 방앗간 물레를 돌리고 그 강으로 들어갔다. 강둑엔 흙을 쌓은 옛 둑이 있었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 쌓았다고 했다.
“옛 둑은 얼마나 높게 쌓았습니까.” 루엔이 물었다.
기사장이 대답했다. “옛날 가장 큰 물 자국보다 한 뼘. 우리 쪽 둑은 다 그렇게 쌓는다. 로센도 그렇고.”
“그 물 자국은 어디 있습니까.”
“방앗간 옛 벽에.”
토빈이 헛기침을 했다.
“그 벽은 스무 해 전에 새로 쌓았습니다. 제 아버지가요.”
방 안이 조용해졌다.
한 뼘은 있었다. 한 뼘을 어디서부터 재는지는 없었다.
*
이튿날 루엔은 방앗간으로 내려갔다.
방앗간 앞, 물레 굴대를 받치는 돌기둥이 강물에 발을 담그고 서 있었다. 네모난 통돌이었다. 물이 늘 닿는 아랫단은 이끼로 까맸다. 루엔은 그 기둥을 골랐다. 방앗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안 움직일 돌이었다.
브란이 끌을 빌려주었다. 루엔은 기둥 강 쪽 면에 곧은 금을 세로로 그었다. 그리고 가로 눈금. 벤노의 매듭 끈으로 뼘마다 굵은 금, 마디마다 가는 금. 물이 가장 낮을 때보다 아래에서 시작해, 사람 키보다 높은 데까지.
“숫자는 안 새기십니까.” 토빈이 물었다.
“아직 없습니다.”
“금은 있는데 숫자가 없어요?”
“어디가 영인지 모릅니다. 영을 모르면 숫자를 붙일 수 없습니다.”
토빈이 눈을 끔벅였다. 루엔은 토빈에게 가죽 장부를 내밀었다.
“날마다 해 뜰 때 물이 닿은 금을 적어 주십시오. 아래에서 몇째 금인지. 한 해 동안.”
“한 해.”
“한 해 동안 적은 걸 다 더해서 날수로 나누면 이 강의 보통 높이가 나옵니다. 그걸 영으로 삼겠습니다. 둑도, 문턱도, 우물 테두리도 그 영에서 잽니다. 그러면 스무 해 뒤에 벽을 새로 쌓아도 한 뼘이 어디서부터인지 남습니다.”
토빈은 장부를 받았다. 방앗삯 장부를 펠릭스가 루엔 글자로 바꿔 준 뒤로 토빈도 숫자 열 개는 쓸 줄 알았다.
토빈의 아들이 기둥 아래 물가에 쪼그리고 앉아 첫 값을 읽었다. 스물세째 금. 토빈이 장부 첫 칸에 적었다. 날짜, 그리고 스물셋. 글씨가 크고 조금 기울었다.
“이것만 하면 됩니까.”
“이것만 하시면 됩니다. 한 해 동안 날마다.”
“날마다가 어렵지요.” 토빈이 웃었다. “숫자는 쉬운데.”
*
그날 저녁, 기사들이 식탁에서 그 이야기를 했다.
“기둥에 금 긋고 한 해를 적어서 뭐 하게. 결국 둑을 한 뼘 더 쌓자는 얘기 아니냐.” 기사장이 말했다. 웃음이 섞여 있었다. 나쁜 웃음은 아니었다.
“아직 모릅니다. 한 뼘일 수도, 두 뼘일 수도, 지금 둑으로 넉넉할 수도 있습니다.”
“더 쌓게 되면. 둑은 한 뼘 높이면 밑도 넓혀야 한다. 흙이 한 뼘 몫으로 끝나지 않지.”
맞는 말이었다. 둑은 세모꼴로 쌓는다. 높이를 조금 올리면 밑이 넓어지고, 흙은 높인 것보다 훨씬 더 든다.
“한 뼘 높이려고 돈을 두 배 쓰냐.” 기사장이 말했다. 다른 기사들이 웃었다.
“그래서 한 뼘이 맞는지부터 재자는 겁니다. 두 배를 쓰기 전에 한 해를 씁니다.”
기사장이 웃음을 멈췄다. 코넬이 옆에서 거들었다.
“한 해 재는 데는 돈이 안 듭니다. 토빈 아저씨가 해 뜰 때 한 번 내려다보는 값뿐이에요.”
“그 한 번이 삼백예순 번이지.” 기사장이 말했다.
“삼백예순다섯 번입니다.” 루엔이 말했다. 기사들이 또 웃었다. 이번엔 기사장도 따라 웃었다.
가렛은 빵을 뜯고 있었다. 뜯던 손을 멈추지 않고 말했다.
“한 해는 재 봐라. 돈은 그다음이다.”
*
방앗간 옆에는 오래된 나무 망루가 있었다. 옛날 나룻배를 지키던 망루였다. 꼭대기에 올라가면 강 건너가 보였다.
강 건너 낮은 땅에 새 지붕들이 있었다.
루엔이 학교로 떠날 무렵엔 집 몇 채 뼈대뿐이던 마을이었다. 산적에게 털린 로센령 끝 마을 사람들이 그 전해 가을 강을 건너왔다. 가렛이 강 건너 빈 땅을 내주었다. 번개 창이 선 영지가 낫다고 했다.
새 마을은 강과 거의 같은 높이에 있었다. 둑이 없었다.
루엔은 이튿날 나룻배로 건너가 집을 셌다. 스물아홉 채. 문설주마다 숯으로 번호를 적었다. 노르벡 명부 뒤에 종이를 덧붙여 새 마을 칸을 만들었다. 집마다 사람 수, 그리고 어느 물을 긷는지.
일곱 번째 집 앞에서 아낙이 팔짱을 끼고 섰다.
“우리 집은 일곱은 안 받소.”
“압니다. 문설주엔 「여섯 다음 집」이라고 적겠습니다. 명부엔 칠번입니다.”
아낙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다 고개를 끄덕였다. 노르벡 쪽 소문을 들은 얼굴이었다.
물 칸은 셋이었다. 강물. 마을 위쪽 우물. 그리고 지난겨울 새로 판 아래쪽 우물. 아래 우물은 집들 한가운데, 빗물 도랑 곁에 있었다. 테두리는 나무 판자 몇 장. 돌담이 없었다.
루엔은 촌장을 찾아갔다. 로센에서 온 늙은 농부였다.
“아래 우물에 돌담을 허리 높이로 쌓으셔야 합니다. 도랑은 떼어서 돌리시고요. 눈 녹을 때 도랑물이 넘치면 우물로 들어갑니다.”
“노르벡 얘기는 들었소.” 촌장이 말했다. “가을걷이 끝나고 쌓지요. 지금은 손이 없소.”
루엔은 명부 여백에 적었다. 아래 우물: 돌담 없음. 가을걷이 뒤 쌓기로 함. 그리고 날짜를 적었다. 약속은 날짜와 함께 적어 두는 게 좋았다.
*
거울은 브란이 두드려 준 놋쇠 판 두 장이었다. 손바닥 셋만 한 크기. 가운데에 작은 구멍을 뚫었다. 구멍으로 건너편 망루를 겨누고, 비친 햇빛이 구멍 둘레에 만든 밝은 점을 손가락 끝에 맞추면 빛이 저쪽으로 갔다. 마법은 아니었다. 해와 놋쇠와 겨누는 법뿐이었다.
성 북쪽 망루와 방앗간 망루는 서로 보였다. 루엔은 종이에 표를 만들었다. 짧게와 길게를 둘, 셋씩 엮어 말 하나씩. 불. 물. 사람 필요. 다 됨. 다시 보내라.
코넬이 표를 들여다보았다.
“‘대충’도 넣어.”
“왜 넣습니까.”
“내가 쓸 거니까.”
루엔은 한참 형을 보다가 표 맨 아래에 적었다. 대충.
오후, 형이 방앗간 망루로 내려갔다. 루엔은 북쪽 망루에 섰다. 해가 서쪽으로 조금 기울어 있었다.
첫 빛은 방앗간 지붕에 떨어졌다. 망루가 아니라. 루엔은 거울을 내리고 손가락을 보았다. 밝은 점을 손가락 끝이 아니라 첫 마디에 맞추고 있었다. 한 마디 차이가 저 멀리서는 지붕 하나였다.
둘째 빛은 망루 난간에 닿았다. 난간 뒤에서 형이 팔을 흔들었다.
방앗간 망루에서 빛이 깜빡였다. 길게, 짧게, 길게. 짧게, 짧게.
루엔은 표를 보았다.
대충. 잘 지냄.
아침에 같은 식탁에서 빵을 먹은 사람이었다. 여기서 방앗간까지 걸어서 모래시계 한 번이 안 걸렸다.
루엔은 거울을 들었다. 길게, 짧게, 길게. 길게, 길게.
대충. 뜻을 밝히시오.
한참 뒤 빛이 왔다.
잘 지냄.
루엔은 표에 적었다. 첫 신호. 보낸 사람 코넬 하르트. 받은 말 두 개 가운데 하나는 뜻 없음.
*
형이 돌아왔을 때 루엔은 표에 한 줄을 더 적고 있었다.
“뭘 또 넣어.”
“짧게, 길게, 짧게.”
“그건 무슨 말인데.”
“새 마을. 해 지기 전. 전부 나와라.”
코넬이 창밖을 보았다. 강 건너 낮은 지붕들이 저녁 해에 붉었다.
“그런 걸 쓸 날이 오겠냐.”
“안 오면 좋습니다. 그래도 표에는 있어야 합니다.”
코넬은 대답 없이 제 거울을 닦았다. 소매로. 한 번, 두 번. 그리고 말했다.
“짧게, 길게, 짧게. 외웠다.”
*
학교로 떠나기 전날, 루엔은 방앗간에 갔다. 토빈이 장부를 보여 주었다. 서른한 날. 빠진 날이 없었다.
“하루도 빠지지 마십시오.”
“빠지면요.”
“빠졌다고 적으십시오. 빈칸이 틀린 숫자보다 낫습니다.”
토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방앗간 계단을 내려가다 무릎을 한 번 짚었다. 루엔이 보자 손을 흔들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날이 궂으면 좀 그래요.”
루엔은 수첩에 적었다. 방앗간 기둥: 한 해. 영점은 내년 여름. 그리고 작게. 토빈: 무릎.
그날 밤 짐에는 쇠 되 하나가 더 들어갔다.
브란이 광장 되를 본떠 새로 두드린 것이었다. 가렛이 광장 돌기둥 앞에서 두 되에 번갈아 물을 채우게 했다. 쇠잔 마흔여덟. 두 번 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았다. 대 보지 않은 복사는 복사가 아니라고, 가렛은 여전히 말했다.
여섯 근 반이었다. 루엔은 종이 묶음 둘을 뺐다. 백스무 근은 지켰다.
재무대신 발터 크로이츠는 숫자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루엔은 그걸 첫눈에 알았다. 왕궁 재무실 벽에 장부가 천장까지 꽂혀 있었다. 등마다 해가 적혀 있었고, 해마다 빠진 권이 없었다. 탁자 위 셈판은 알이 반들반들 닳아 있었다. 크로이츠는 쉰 남짓, 머리가 희고 손가락이 가늘었다. 루엔이 들어서자 일어나지 않고 셈판 알을 마저 튕겼다. 한 줄을 다 셈하고서야 고개를 들었다.“앉으시오. 폐하께서 곧 오시오.”왕 레지날드 2세는 정말 곧 왔다. 이번에도 작은 금테만 둘렀다. 앉자마자 본론을 꺼냈다.“봄 싸움 돈이 모자란다.”크로이츠가 장부 한 권을 펼쳤다. 숫자가 빼곡했다. 옛 셈, 금화와 은화와 동화가 스물과 열둘로 얽힌 셈이었다. 그러나 줄이 반듯했고, 끝자리가 맞았다. 루엔은 곁눈으로 합계 셋을 속으로 셈해 보았다. 다 맞았다.“가을 싸움과 겨울 대치에 든 돈이 옛 금화로 만 사천 닢.” 크로이츠가 말했다. “봄에 레오폴트 장군이 국경 성채를 되찾으려면 삯군과 공성 기구를 더 들여야 하오. 새 금화로 이천 닢이 더 있어야 하오. 세금은 가을에 걷히오. 그때까지 빌려야 하오.”왕이 루엔을 보았다.“하르트 상단이 빌려줄 수 있나.”*루엔은 대답하기 전에 수첩을 폈다.클라리사가 어젯밤 적어 준 숫자가 있었다. 하르트 상단이 제 것으로 가진 금과 은, 창고의 물건, 받을 삯. 새 금화로 치면 삼천이백 닢 남짓. 보움 상단과 왕도 상인 조합 둘이 나눠 댄 몫까지 넣은 것이었다.“빌려드릴 수 있습니다.” 루엔이 말했다. “삼백이십 닢까지.”크로이츠의 손가락이 셈판 위에서 멈췄다.“이천이라 했소.”
첫 롱 텔레포트는 눈 녹는 날 아침에 했다.참호 뒤 빈터에 원진을 그렸다. 지름 열두 걸음. 테오가 말뚝과 끈으로 원을 잡고, 루엔이 안쪽 선을 그었다. 원진 가운데에 짐 상자 둘, 그 옆에 루엔과 테오.도착지는 왕도 아스테른, 루엔 공방 뒷마당이었다. 거기엔 클라리사가 같은 크기의 원을 그려 두었다. 사흘 전 편지로 보낸 그림대로.루엔은 보정표를 펼쳤다. 여기서 왕도까지의 거리, 두 곳의 위도, 오늘 해가 뜬 시각. 땅은 하루에 한 바퀴 돈다. 여기와 왕도는 도는 빠르기가 조금 다르다. 그 차이만큼 도착하는 몸을 미리 돌려 놓는다. 열여섯 살 겨울, 모래 자루 두 개로 보인 그 셈이었다.그때는 교장과 파비오가 루엔 식으로 걸었다. 루엔은 옆에서 보기만 했다. 여섯째 고리가 없었다.지금은 있었다.“무섭냐?” 테오가 물었다.“무섭지 않습니다. 셈을 세 번 했습니다.”“나는 무서운데.”“그럼 제 옷자락을 잡으십시오. 떨어지면 셈이 틀어집니다.”테오가 루엔 옷자락을 꽉 쥐었다.루엔은 걸었다.한 번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 발밑의 흙이 진창에서 마른 돌바닥으로 바뀌었다. 코끝의 냄새가 참호 연기에서 빵 굽는 냄새로 바뀌었다. 구스타프 분점이 두 골목 건너였다.짐 상자 둘이 발치에 그대로 서 있었다. 기울지도, 밀리지도 않았다.테오가 비틀거렸다. 루엔 옷자락을 놓지 않은 채 주저앉았다.“어, 어…… 됐어?”“됐습니다. 원 가운데서 손가락 한 마디 어긋났습니다.”뒷마당 문간에서 클라리사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원 끝에 분필로 적어 둔 작은 표를 가리켰다.&l
겨울은 링겐 고개 아래에서 멈췄다.마르케스군은 고개 발치의 국경 성채로 물러나 틀어박혔다. 가을 첫머리에 빼앗은 베스트리아 성채였다. 레오폴트는 그 앞 오 리 떨어진 곳에 참호를 파고 진을 쳤다. 눈이 무릎까지 쌓였다. 어느 쪽도 성채 벽까지 가지 않았다. 가 봐야 얼어붙은 밭에서 죽을 뿐이었다.대신 새벽마다 안개가 왔다.한겨울 두 달은 조용했다. 양쪽 다 눈 속에서 장작과 곡식을 세며 버텼다. 하르트 서기들의 겨울 셈대로, 말먹이가 가장 먼저 바닥을 보였다. 레오폴트는 말 절반을 뒤쪽 고을로 돌려보냈다. 마르케스 쪽 성채에서도 말 울음이 줄었다. 저쪽도 같은 셈을 한 것이었다.첫 안개는 겨울이 끝나 갈 무렵, 아직 눈이 녹기 전 어느 새벽에 왔다. 성채 쪽에서 하얀 김이 낮게 깔려 밀려왔다. 겨울 안개치고는 이상하게 따뜻했다. 앞 참호에 닿자 병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김이 뜨거웠다. 살갗에 닿으면 붉게 부어올랐다. 눈이 따가워 뜰 수 없었다. 김이 지나간 참호 바닥은 눈이 녹아 진창이 되었고, 해가 뜨기도 전에 다시 얼었다. 병사들 발이 진창째 얼어붙었다.사흘 동안 앞 참호에서 발가락을 잃은 병사가 열넷이었다.“적색탑 복합 술식이다.” 레오폴트가 말했다. 눈썹에 서리가 앉아 있었다. “불로 물을 끓이고 바람으로 민다. 옛날에 한 번 봤다. 그땐 이만큼 오래 가지 않았는데.”“교대를 합니다.” 루엔이 말했다. “가을 싸움 뒤로 적이 바꿨습니다. 번쩍임을 세어 보면, 밤을 셋으로 나눠 돌아가며 쏩니다. 한 번에 쏘는 사람은 열넷, 쉬는 사람이 스물여덟.”적도 셈을 했다. 사흘째 오후에 바닥나는 걸 겪은 사람들이었다. 이번엔 바닥나지 않게 나눠 쏘았다.*끓는 안개를 막으려면 같은 걸로 맞서야 했다.불과 물과 바람을 한꺼
요스트는 명령서를 두 번 읽었다.창고 마을은 본진에서 서쪽으로 반나절 거리였다. 메를 강 지류 가에 곡식 창고 여든 채가 줄지어 서 있었다. 여섯 영지에서 보낸 곡식, 말먹이, 화살 다발이 전부 여기 모였다. 요스트는 그 창고 열쇠를 쥔 창고지기였다. 하르트령에서 온 사람이었다. 쉰 살, 한쪽 다리를 조금 절었다.명령서는 새벽에 왔다. 본진에서 출발한 전령이 중간 역참에서 명령을 옮겨 적어 다음 전령에게 넘겼고, 그 전령이 요스트에게 가져왔다.「71번 창고를 열어 곡식 이백 자루를 본진 빵 굽는 곳으로 보낼 것. 레오폴트.」번호 옆에 작은 글자가 하나 더 붙어 있었다. 「71-9」.요스트는 입속으로 셈했다.앞자리 일곱에 둘을 곱하면 열넷. 뒷자리 하나를 더하면 열다섯. 열다섯을 열하나로 나누면 하나에 넷이 남는다.넷이어야 했다.명령서에는 아홉이 적혀 있었다.요스트는 열쇠 꾸러미를 허리에 도로 걸었다. 창고 문을 열지 않았다. 대신 마구간 소년을 불렀다.“본진으로 가라. 가장 빠른 말로. 루엔 도련님께 이 종이를 드려라. 끝자리가 안 맞는다고.”소년이 떠나고 얼마 안 되어, 빵 수레를 몰고 온 보급 기사가 창고 앞에 섰다. 동쪽 영지 사람이었다. 말에서 내리지도 않았다.“왜 안 여나. 장군님 명령이다.”“끝자리가 안 맞습니다.”“끝자리?” 기사가 명령서를 낚아채 보았다. 번호 옆 작은 글자를 한참 보다가 코웃음을 쳤다. “이 꼬랑지 말이냐. 이게 뭐라고.”“번호가 제대로 옮겨졌는지 보는 겁니다.”“번호는 71이라고 적혀 있다. 장군님 서명도 있다. 본진에선 병사들이 빵을 기다린다. 창고지기가 장
마르케스 본대가 온 건 열흘 뒤였다.선봉 뒤로 깃발이 끝없이 이어졌다. 링겐 고개에서 내려오는 행렬이 이틀 동안 끊이지 않았다. 강 동쪽 둑 위에 천막이 들어찼다. 붉은 천막은 스무 채가 넘었다.“이만 넘는다.” 정찰대장이 보고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떨지 않으려고 애쓰는 목소리였다. “이만 오천쯤.”천막 안 사람들이 루엔을 보았다. 귀족 회의에서 삼만이 한계라고 한 사람이었다.“이만 오천이면 셈 안입니다.” 루엔이 말했다. “강 아랫마을 곡식을 우리가 먼저 옮겼으니 오래 못 버팁니다. 문제는 마법사입니다.”“몇이오.”“어젯밤 번쩍임을 셌습니다. 쏜 자리가 마흔하나. 한 자리에 한 사람이면 마흔하나.”*싸움은 이튿날 새벽에 시작됐다.적은 쉬지 않고 쏘았다. 파이어볼이 선 앞까지 와서 떨어졌다. 선을 넘으려는 마법사는 궁수가 막았다. 방패벽 뒤에서 아군은 엎드려 버텼다. 적 보병이 여울을 건너려 했고, 아군 창병이 여울 끝에서 밀어냈다.루엔은 둔덕 위에서 한 가지만 했다.셌다.번쩍임 하나에 밀랍판에 금 하나.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한 시간이 지날 때마다 금을 묶어 따로 적었다. 이 세계의 한 시간, 낮을 열둘로 나눈 그 한 칸.첫날 번쩍임은 삼백열두 번이었다.시간마다 고르게. 스물다섯, 스물여섯, 스물넷. 해 질 녘까지 줄지 않았다.“하나도 안 줄었어.” 테오가 루엔 어깨 너머로 밀랍판을 보며 말했다. “저 사람들 지치지도 않나.”“오늘은 안 지칩니다. 그릇이 가득 찬 채로 왔습니다.”한낮이 지나자 루엔의 손목이
첫 불은 해가 진 직후에 왔다.강 건너 둑 위에서 붉은빛이 번쩍했다. 한 점. 그리고 둘, 셋. 빛이 먼저 오고, 한참 뒤에 소리가 왔다. 쿵. 둔덕 아래 밭에서 흙이 치솟았다. 불붙은 짚단이 사방으로 튀었다.“파이어볼이다!”앞줄 병사들이 방패를 들고 엎드렸다. 기사들이 말을 돌렸다. 둔덕 위 막료 자리에서 루엔은 엎드리지 않았다. 강 건너를 보고 있었다.번쩍.루엔은 셌다. 하나, 둘.쿵.“둘.” 루엔이 말했다. “구백 걸음 남짓.”옆에 엎드린 테오가 고개만 들었다. “뭐가?”“저 불을 쏜 사람까지.”*소리는 빛보다 느리다. 빛은 보는 즉시 오지만, 소리는 하나를 세는 동안 사백오십 걸음쯤을 온다. 루엔 걸음으로. 루엔은 이 셈을 요람에 누워 있을 때부터 했다. 번개가 치면 천둥까지 셌다.속으로는 다른 숫자가 함께 돌았다. 1초에 343미터. 이 세계에서는 쓸 데가 없는 숫자였다. 쓸 데가 있는 건 걸음이었다.적 마법사는 쏠 때마다 번쩍였다. 마나의 여덟 할이 빛과 소리와 열로 샜다. 이 세계에서 그걸 「마나의 위엄」이라 불렀다. 위엄은 멀리서도 보였다. 그리고 보이는 것은 셀 수 있었다.다만 한 사람이 세면 거리만 나왔다. 어느 쪽인지는 나오지 않았다.“테오. 둔덕 왼쪽 끝 참나무로 가십시오. 번쩍이면 세어서 적으십시오. 코넬 형은 오른쪽 끝 방앗간 터로.”“나도 세?” 코넬이 방패 밑에서 말했다.“형은 번개 셀 줄 압니다. 어릴 때 제가 가르쳤습니다.”“대충 기억나.”“대충이면 충분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