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곱셈을 덧셈으로 바꾸는 표.
루엔은 그 생각을 사흘 동안 밀랍판에만 적었다. 말로 꺼내기 전에 칸 수부터 셈했다.
수마다 짝이 되는 값을 하나씩 정해 적어 둔다. 열의 값은 하나. 백의 값은 둘. 천의 값은 셋. 열을 두 번 곱하면 백이고, 하나에 하나를 더하면 둘이다. 곱하면 값이 더해진다.
그러면 큰 두 수를 곱할 때 곱하지 않아도 된다. 두 수의 값을 표에서 찾아 더하고, 더한 값의 주인을 표에서 거꾸로 찾으면 된다. 곱셈 하나가 덧셈 하나와 표 찾기 세 번이 된다.
문제는 그 사이의 수들이었다. 천과 만 사이, 천일, 천이, 천삼. 그 값을 일곱 자리까지.
셈하는 길은 있었다. 두 번 곱해 열이 되는 수를 찾으면 그 값은 반이다. 셋에 셋을 곱하면 아홉이니, 그 수는 셋보다 조금 크다. 그 수를 다시 두 번 곱해 그 수가 되는 수를 찾으면 반의 반. 그렇게 쪼개 내려가면서 사이 값들을 맞춰 나간다. 길은 곧았다. 다만 길었다.
루엔은 밀랍판 맨 아래에 적었다. 천부터 만까지. 구천 칸. 한 칸에 모래시계 두 번쯤. 혼자 날마다 하면 여섯 해. 두 사람이 따로 셈하면 그 두 배. 다만 뼈대 칸을 먼저 세우면 사이 칸은 앞 칸과의 차이로 채울 수 있다. 차이가 고르게 줄어드는지 보면서.
그 아래 한 줄을 더 적었다. 사람이 필요함.
*
도서관 뒤에 작은 방이 하나 있었다. 옛날 책을 꿰매던 방이라고 오드리크가 말했다. 제본하는 사람이 떠난 뒤 스무 해 동안 비어 있었다.
“무엇에 쓰려나.”
“표를 만들려고 합니다. 여럿이 오래 셈할 방이 필요합니다.”
“얼마나 오래.”
“두 해쯤입니다.”
오드리크가 속삭였다. “자네가 두 해쯤이라고 하면 두 해가 조금 넘겠군.”
루엔은 부정하지 않았다. 오드리크가 열쇠를 내주었다. 녹이 슬어 있었다. 루엔이 기름을 먹여 돌렸다. 문이 열리자 먼지 냄새와 오래된 아교 냄새가 났다. 창이 하나, 긴 탁자가 하나.
*
식당 문 옆에 종이를 붙였다.
셈을 오래 할 사람을 찾음. 서기가 되고 싶은 사람. 삯은 없음. 칸마다 셈한 사람 이름이 남음.
사흘 동안 아무도 오지 않았다. 나흘째에 둘. 이레째엔 여섯이 되었다.
여섯은 서로 닮지 않았다. 그릇은 열둘인데 셈판을 누구보다 빨리 미는 아이. 그릇은 넉넉한데 집에 돈이 없어 학비를 필경 일로 버는 아이. 가장 나이 많은 학생은 열여섯이었다. 셈이 느렸다. 대신 한 번 적은 숫자를 좀처럼 고치지 않았다. 가장 어린 학생은 올가을 들어온 열한 살이었다. 손가락이 벌써 잉크투성이였다.
“서기가 되려면 셈 잘하는 걸 보여 줘야 해.” 가장 어린 학생이 말했다. “마법사 학교에서 서기 일을 배우는 데는 여기밖에 없어.”
루엔은 조건을 하나만 말했다.
“같은 칸을 두 사람이 따로 셈합니다. 서로 보지 않고. 다 하면 맞댑니다. 같으면 둘이 칸 옆에 이름을 적습니다. 셈한 사람, 검산한 사람. 다르면 둘 다 처음부터 다시 합니다.”
“누가 틀렸는지 보고 틀린 쪽만 다시 하면 되잖아.” 셈판 빠른 아이가 말했다.
“누가 틀렸는지 보려면 한 사람 셈을 다른 사람이 들여다봐야 합니다. 들여다보면 같은 데서 같이 틀립니다.”
여섯이 서로를 보았다. 가장 나이 많은 학생이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
복도에서 웃음소리가 났다. 푸른 옷깃들이었다. 청색탑 쪽 윗반 학생들.
“마법사가 서기 노릇이냐.”
“학교가 필경방이 됐네.”
루엔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뒤에서 여섯 가운데 둘이 멈췄다. 그릇이 작은 아이와 가장 어린 아이였다. 루엔이 돌아보자 둘은 다시 걸었다. 얼굴이 붉었다.
방에 들어와 루엔이 말했다.
“청색탑 배는 바다에서 곱셈을 가장 많이 합니다. 별 높이, 배 빠르기, 간 거리. 이 표가 다 되면 그분들이 제일 먼저 필요할 겁니다.”
“그럼 그때 웃어 주지 뭐.” 가장 어린 학생이 중얼거렸다.
“웃지 마시고, 칸 수를 세어 보시라고 하십시오.”
그릇이 작은 아이가 팔짱을 꼈다.
“그 표가 다 되면 정말 곱셈이 덧셈이 돼? 난 아직 못 믿겠어.”
루엔은 밀랍판에 세 줄을 적었다. 열, 하나. 백, 둘. 천, 셋.
“백 곱하기 천은 얼마입니까.”
“십만.”
“백의 값 둘, 천의 값 셋. 더하면 다섯. 값이 다섯인 수는 열을 다섯 번 곱한 수입니다. 십만.”
“그건 열, 백, 천이니까 되지. 삼천칠백 곱하기 이천사백은.”
“삼천칠백의 값과 이천사백의 값을 찾아 더합니다. 더한 값의 앞자리는 몇 자리 수인지 알려 주고, 뒷자리는 표에서 거꾸로 찾습니다. 지금은 그 칸들이 비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채우실 칸입니다.”
그릇이 작은 아이는 한참 밀랍판을 보았다. 그러고는 셈판을 꺼내 삼천칠백 곱하기 이천사백을 밀기 시작했다. 셈판으로 모래시계 반 번이 걸렸다. 팔백팔십팔만.
“표가 있으면?”
“덧셈 하나에 표 찾기 셋. 손가락으로 짚는 동안입니다.”
아이는 셈판을 내려놓았다. 믿는 얼굴은 아니었다. 해 보고 싶은 얼굴이었다.
*
그 가을 기숙사 복도의 물시계가 문제였다.
사람 키만 한 옹기 통이었다. 해 질 녘에 물을 가득 채우면 바닥 구멍으로 밤새 물이 빠졌다. 물 위에 뜬 나무 막대가 내려가며 통 벽의 금을 지나갔다. 금은 고르게 그어져 있었다. 막대가 맨 아래 금에 닿으면 사감이 기상 종을 쳤다.
종이 날마다 늦었다.
처음엔 아무도 몰랐다. 겨울이 다가와 해가 늦게 뜨자 알았다. 종이 울릴 때 창밖이 이미 훤했다. 첫 강의에 늦는 학생이 늘었다. 오이겐 교수는 걸음을 멈추고 늦게 들어오는 학생 수를 공책에 적었다.
루엔은 사흘 밤을 잠을 줄여 물시계 옆에 앉았다. 모래시계를 뒤집을 때마다 막대가 지난 금을 적었다.
처음엔 빨랐다. 모래시계 한 번에 금 하나 반. 새벽엔 느렸다. 모래시계 한 번에 금 반 개가 안 됐다.
물은 높을 때 세게 밀려 나가고 낮을 때 약하게 나간다. 고르게 그은 금으로는 밤의 앞은 빨리 가고 뒤는 느리게 갔다.
금을 다시 그을 수도 있었다. 위쪽은 넓게, 아래쪽은 좁게. 그러면 날마다 금을 읽는 사람이 헷갈렸다. 루엔은 통을 바꾸기로 했다.
물이 낮아질수록 약하게 빠진다면, 아래로 갈수록 통을 좁히면 된다. 좁은 데선 조금만 빠져도 물이 많이 내려간다. 셈을 하니 모양이 나왔다. 물 높이가 넷에서 하나로 줄 때 통 넓이는 반으로 줄어야 했다. 위는 넓고 아래로 갈수록 천천히 좁아지는 통.
강가 옹기장이에게 그림을 가져갔다. 높이마다 너비를 적은 그림이었다. 옹기장이는 그림을 보고 한참 웃다가, 그 모양대로 흙을 올렸다. 가마에 두 번 넣었다. 첫 통은 금이 가서 버렸다.
새 통을 복도에 들인 날 밤, 루엔은 한 번 더 모래시계 옆에 앉았다. 막대가 금을 지나는 사이가 처음부터 끝까지 같았다.
이튿날 기상 종이 울렸을 때 창밖은 아직 잿빛이었다. 해가 막 지붕에 걸렸다.
오이겐 교수의 공책에서 늦은 학생 칸이 비었다.
사감은 새 통 앞에서 오래 서 있었다. 통을 두드려 보고, 막대를 들어 보고, 루엔을 보았다.
“통 값은 누가 냈느냐.”
“제가 냈습니다. 동화 열여덟 닢입니다. 첫 통 깨진 값까지. 영수증이 있습니다.”
루엔이 영수증을 내밀었다. 옹기장이의 손도장이 찍혀 있었다. 사감은 영수증을 받아 들고 한참 보다가 제 앞치마 주머니에 넣었다.
“학교 살림에서 돌려주마. 다음부턴 먼저 말해라.”
“먼저 말씀드리면 고쳐도 되는지 오래 걸립니다.”
“그러니까 먼저 말하라는 거다.”
그 주에 루엔에게 별명이 붙었다. 「그 시계 아이」. 테오가 식당에서 처음 들었다고 했다. 루엔은 수첩 소문 칸에 적었다. 그 시계 아이. 붙은 까닭: 물시계. 틀린 곳: 물시계는 시계가 아니라 통입니다.
“그걸 왜 적어.” 테오가 물었다.
“별명이 틀렸습니다.”
“별명은 원래 틀려.”
루엔은 그 말은 적지 않았다.
*
한 달이 지났다.
여섯이 맞댄 칸을 다 모았다. 루엔은 탁자 위에 종이를 쌓았다. 이름이 두 개 붙은 칸, 그리고 다시 해야 할 칸.
다시 해야 할 칸이 사백열둘이었다.
한 달 동안 셈한 칸의 반이 넘었다.
방이 조용했다. 가장 어린 학생이 탁자에 이마를 댔다. 그릇이 작은 아이는 펜을 내려놓고 창밖을 보았다. 이튿날 아침, 둘이 루엔을 찾아왔다.
“그만할래.” 그릇이 작은 아이가 말했다. “한 달 했는데 반이 틀렸어. 우린 서기감이 아닌가 봐.”
가장 어린 학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루엔은 말리지 않았다. 대신 하나를 청했다.
“하루만 기다려 주십시오. 틀린 칸을 다 보고 가십시오.”
그날 밤 루엔은 사백열두 칸을 전부 다시 보았다. 누가 틀렸는지가 아니라 어디서 틀렸는지를 보았다. 그리고 벽에 붙였다. 네 무더기로.
받아올림에서 틀린 칸. 백아흔.
자리가 밀려 틀린 칸. 백여섯.
맞게 셈하고 옮겨 적다 틀린 칸. 아흔여덟.
그리고 마지막 무더기. 열여덟.
아침에 여섯이 방에 들어왔을 때 루엔은 마지막 무더기 앞에 서 있었다.
“이 열여덟 칸은 두 분 값이 서로 맞았습니다. 그런데 앞뒤 칸과의 차이가 고르지 않았습니다. 두 분이 똑같이 틀린 겁니다. 제가 알려 드린 셈법이 틀렸기 때문입니다. 쪼개 내려갈 때 끝자리를 하나 덜 가져가는 법을 제가 적어 드렸습니다.”
방이 조용했다.
“열여덟은 제 몫입니다. 나머지 셋은 고칠 수 있습니다. 받아올림은 칸 위에 작은 점을 찍으면 줄어듭니다. 자리 밀림은 줄 친 종이를 쓰면 줄어듭니다. 옮겨 적기는 옮긴 뒤 한 번 거꾸로 읽으면 줄어듭니다.”
그만두겠다던 둘이 벽을 보았다. 오래.
가장 어린 학생이 마지막 무더기로 걸어가 맨 위 종이를 떼어 들었다. 루엔의 셈법이 적힌 종이였다. 거기에 루엔 글씨로 작게 적혀 있었다. 틀림 — 루엔 하르트.
“너도 틀려?”
“자주 틀립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따로 셈합니다. 셋이면 더 좋습니다.”
가장 어린 학생이 종이를 도로 붙였다. 그리고 제 자리에 앉아 펜을 들었다.
그릇이 작은 아이가 한숨을 쉬었다. 앉았다.
그날 오후 복도의 푸른 옷깃들이 또 웃었다. 방 안에서는 아무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사각, 사각. 펜 끝이 종이를 긁는 소리만 났다.
루엔은 벽의 열여덟 무더기 옆에 한 줄을 더 붙였다. 다시 한 달. 그리고 날짜.
재무대신 발터 크로이츠는 숫자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루엔은 그걸 첫눈에 알았다. 왕궁 재무실 벽에 장부가 천장까지 꽂혀 있었다. 등마다 해가 적혀 있었고, 해마다 빠진 권이 없었다. 탁자 위 셈판은 알이 반들반들 닳아 있었다. 크로이츠는 쉰 남짓, 머리가 희고 손가락이 가늘었다. 루엔이 들어서자 일어나지 않고 셈판 알을 마저 튕겼다. 한 줄을 다 셈하고서야 고개를 들었다.“앉으시오. 폐하께서 곧 오시오.”왕 레지날드 2세는 정말 곧 왔다. 이번에도 작은 금테만 둘렀다. 앉자마자 본론을 꺼냈다.“봄 싸움 돈이 모자란다.”크로이츠가 장부 한 권을 펼쳤다. 숫자가 빼곡했다. 옛 셈, 금화와 은화와 동화가 스물과 열둘로 얽힌 셈이었다. 그러나 줄이 반듯했고, 끝자리가 맞았다. 루엔은 곁눈으로 합계 셋을 속으로 셈해 보았다. 다 맞았다.“가을 싸움과 겨울 대치에 든 돈이 옛 금화로 만 사천 닢.” 크로이츠가 말했다. “봄에 레오폴트 장군이 국경 성채를 되찾으려면 삯군과 공성 기구를 더 들여야 하오. 새 금화로 이천 닢이 더 있어야 하오. 세금은 가을에 걷히오. 그때까지 빌려야 하오.”왕이 루엔을 보았다.“하르트 상단이 빌려줄 수 있나.”*루엔은 대답하기 전에 수첩을 폈다.클라리사가 어젯밤 적어 준 숫자가 있었다. 하르트 상단이 제 것으로 가진 금과 은, 창고의 물건, 받을 삯. 새 금화로 치면 삼천이백 닢 남짓. 보움 상단과 왕도 상인 조합 둘이 나눠 댄 몫까지 넣은 것이었다.“빌려드릴 수 있습니다.” 루엔이 말했다. “삼백이십 닢까지.”크로이츠의 손가락이 셈판 위에서 멈췄다.“이천이라 했소.”
첫 롱 텔레포트는 눈 녹는 날 아침에 했다.참호 뒤 빈터에 원진을 그렸다. 지름 열두 걸음. 테오가 말뚝과 끈으로 원을 잡고, 루엔이 안쪽 선을 그었다. 원진 가운데에 짐 상자 둘, 그 옆에 루엔과 테오.도착지는 왕도 아스테른, 루엔 공방 뒷마당이었다. 거기엔 클라리사가 같은 크기의 원을 그려 두었다. 사흘 전 편지로 보낸 그림대로.루엔은 보정표를 펼쳤다. 여기서 왕도까지의 거리, 두 곳의 위도, 오늘 해가 뜬 시각. 땅은 하루에 한 바퀴 돈다. 여기와 왕도는 도는 빠르기가 조금 다르다. 그 차이만큼 도착하는 몸을 미리 돌려 놓는다. 열여섯 살 겨울, 모래 자루 두 개로 보인 그 셈이었다.그때는 교장과 파비오가 루엔 식으로 걸었다. 루엔은 옆에서 보기만 했다. 여섯째 고리가 없었다.지금은 있었다.“무섭냐?” 테오가 물었다.“무섭지 않습니다. 셈을 세 번 했습니다.”“나는 무서운데.”“그럼 제 옷자락을 잡으십시오. 떨어지면 셈이 틀어집니다.”테오가 루엔 옷자락을 꽉 쥐었다.루엔은 걸었다.한 번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 발밑의 흙이 진창에서 마른 돌바닥으로 바뀌었다. 코끝의 냄새가 참호 연기에서 빵 굽는 냄새로 바뀌었다. 구스타프 분점이 두 골목 건너였다.짐 상자 둘이 발치에 그대로 서 있었다. 기울지도, 밀리지도 않았다.테오가 비틀거렸다. 루엔 옷자락을 놓지 않은 채 주저앉았다.“어, 어…… 됐어?”“됐습니다. 원 가운데서 손가락 한 마디 어긋났습니다.”뒷마당 문간에서 클라리사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원 끝에 분필로 적어 둔 작은 표를 가리켰다.&l
겨울은 링겐 고개 아래에서 멈췄다.마르케스군은 고개 발치의 국경 성채로 물러나 틀어박혔다. 가을 첫머리에 빼앗은 베스트리아 성채였다. 레오폴트는 그 앞 오 리 떨어진 곳에 참호를 파고 진을 쳤다. 눈이 무릎까지 쌓였다. 어느 쪽도 성채 벽까지 가지 않았다. 가 봐야 얼어붙은 밭에서 죽을 뿐이었다.대신 새벽마다 안개가 왔다.한겨울 두 달은 조용했다. 양쪽 다 눈 속에서 장작과 곡식을 세며 버텼다. 하르트 서기들의 겨울 셈대로, 말먹이가 가장 먼저 바닥을 보였다. 레오폴트는 말 절반을 뒤쪽 고을로 돌려보냈다. 마르케스 쪽 성채에서도 말 울음이 줄었다. 저쪽도 같은 셈을 한 것이었다.첫 안개는 겨울이 끝나 갈 무렵, 아직 눈이 녹기 전 어느 새벽에 왔다. 성채 쪽에서 하얀 김이 낮게 깔려 밀려왔다. 겨울 안개치고는 이상하게 따뜻했다. 앞 참호에 닿자 병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김이 뜨거웠다. 살갗에 닿으면 붉게 부어올랐다. 눈이 따가워 뜰 수 없었다. 김이 지나간 참호 바닥은 눈이 녹아 진창이 되었고, 해가 뜨기도 전에 다시 얼었다. 병사들 발이 진창째 얼어붙었다.사흘 동안 앞 참호에서 발가락을 잃은 병사가 열넷이었다.“적색탑 복합 술식이다.” 레오폴트가 말했다. 눈썹에 서리가 앉아 있었다. “불로 물을 끓이고 바람으로 민다. 옛날에 한 번 봤다. 그땐 이만큼 오래 가지 않았는데.”“교대를 합니다.” 루엔이 말했다. “가을 싸움 뒤로 적이 바꿨습니다. 번쩍임을 세어 보면, 밤을 셋으로 나눠 돌아가며 쏩니다. 한 번에 쏘는 사람은 열넷, 쉬는 사람이 스물여덟.”적도 셈을 했다. 사흘째 오후에 바닥나는 걸 겪은 사람들이었다. 이번엔 바닥나지 않게 나눠 쏘았다.*끓는 안개를 막으려면 같은 걸로 맞서야 했다.불과 물과 바람을 한꺼
요스트는 명령서를 두 번 읽었다.창고 마을은 본진에서 서쪽으로 반나절 거리였다. 메를 강 지류 가에 곡식 창고 여든 채가 줄지어 서 있었다. 여섯 영지에서 보낸 곡식, 말먹이, 화살 다발이 전부 여기 모였다. 요스트는 그 창고 열쇠를 쥔 창고지기였다. 하르트령에서 온 사람이었다. 쉰 살, 한쪽 다리를 조금 절었다.명령서는 새벽에 왔다. 본진에서 출발한 전령이 중간 역참에서 명령을 옮겨 적어 다음 전령에게 넘겼고, 그 전령이 요스트에게 가져왔다.「71번 창고를 열어 곡식 이백 자루를 본진 빵 굽는 곳으로 보낼 것. 레오폴트.」번호 옆에 작은 글자가 하나 더 붙어 있었다. 「71-9」.요스트는 입속으로 셈했다.앞자리 일곱에 둘을 곱하면 열넷. 뒷자리 하나를 더하면 열다섯. 열다섯을 열하나로 나누면 하나에 넷이 남는다.넷이어야 했다.명령서에는 아홉이 적혀 있었다.요스트는 열쇠 꾸러미를 허리에 도로 걸었다. 창고 문을 열지 않았다. 대신 마구간 소년을 불렀다.“본진으로 가라. 가장 빠른 말로. 루엔 도련님께 이 종이를 드려라. 끝자리가 안 맞는다고.”소년이 떠나고 얼마 안 되어, 빵 수레를 몰고 온 보급 기사가 창고 앞에 섰다. 동쪽 영지 사람이었다. 말에서 내리지도 않았다.“왜 안 여나. 장군님 명령이다.”“끝자리가 안 맞습니다.”“끝자리?” 기사가 명령서를 낚아채 보았다. 번호 옆 작은 글자를 한참 보다가 코웃음을 쳤다. “이 꼬랑지 말이냐. 이게 뭐라고.”“번호가 제대로 옮겨졌는지 보는 겁니다.”“번호는 71이라고 적혀 있다. 장군님 서명도 있다. 본진에선 병사들이 빵을 기다린다. 창고지기가 장
마르케스 본대가 온 건 열흘 뒤였다.선봉 뒤로 깃발이 끝없이 이어졌다. 링겐 고개에서 내려오는 행렬이 이틀 동안 끊이지 않았다. 강 동쪽 둑 위에 천막이 들어찼다. 붉은 천막은 스무 채가 넘었다.“이만 넘는다.” 정찰대장이 보고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떨지 않으려고 애쓰는 목소리였다. “이만 오천쯤.”천막 안 사람들이 루엔을 보았다. 귀족 회의에서 삼만이 한계라고 한 사람이었다.“이만 오천이면 셈 안입니다.” 루엔이 말했다. “강 아랫마을 곡식을 우리가 먼저 옮겼으니 오래 못 버팁니다. 문제는 마법사입니다.”“몇이오.”“어젯밤 번쩍임을 셌습니다. 쏜 자리가 마흔하나. 한 자리에 한 사람이면 마흔하나.”*싸움은 이튿날 새벽에 시작됐다.적은 쉬지 않고 쏘았다. 파이어볼이 선 앞까지 와서 떨어졌다. 선을 넘으려는 마법사는 궁수가 막았다. 방패벽 뒤에서 아군은 엎드려 버텼다. 적 보병이 여울을 건너려 했고, 아군 창병이 여울 끝에서 밀어냈다.루엔은 둔덕 위에서 한 가지만 했다.셌다.번쩍임 하나에 밀랍판에 금 하나.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한 시간이 지날 때마다 금을 묶어 따로 적었다. 이 세계의 한 시간, 낮을 열둘로 나눈 그 한 칸.첫날 번쩍임은 삼백열두 번이었다.시간마다 고르게. 스물다섯, 스물여섯, 스물넷. 해 질 녘까지 줄지 않았다.“하나도 안 줄었어.” 테오가 루엔 어깨 너머로 밀랍판을 보며 말했다. “저 사람들 지치지도 않나.”“오늘은 안 지칩니다. 그릇이 가득 찬 채로 왔습니다.”한낮이 지나자 루엔의 손목이
첫 불은 해가 진 직후에 왔다.강 건너 둑 위에서 붉은빛이 번쩍했다. 한 점. 그리고 둘, 셋. 빛이 먼저 오고, 한참 뒤에 소리가 왔다. 쿵. 둔덕 아래 밭에서 흙이 치솟았다. 불붙은 짚단이 사방으로 튀었다.“파이어볼이다!”앞줄 병사들이 방패를 들고 엎드렸다. 기사들이 말을 돌렸다. 둔덕 위 막료 자리에서 루엔은 엎드리지 않았다. 강 건너를 보고 있었다.번쩍.루엔은 셌다. 하나, 둘.쿵.“둘.” 루엔이 말했다. “구백 걸음 남짓.”옆에 엎드린 테오가 고개만 들었다. “뭐가?”“저 불을 쏜 사람까지.”*소리는 빛보다 느리다. 빛은 보는 즉시 오지만, 소리는 하나를 세는 동안 사백오십 걸음쯤을 온다. 루엔 걸음으로. 루엔은 이 셈을 요람에 누워 있을 때부터 했다. 번개가 치면 천둥까지 셌다.속으로는 다른 숫자가 함께 돌았다. 1초에 343미터. 이 세계에서는 쓸 데가 없는 숫자였다. 쓸 데가 있는 건 걸음이었다.적 마법사는 쏠 때마다 번쩍였다. 마나의 여덟 할이 빛과 소리와 열로 샜다. 이 세계에서 그걸 「마나의 위엄」이라 불렀다. 위엄은 멀리서도 보였다. 그리고 보이는 것은 셀 수 있었다.다만 한 사람이 세면 거리만 나왔다. 어느 쪽인지는 나오지 않았다.“테오. 둔덕 왼쪽 끝 참나무로 가십시오. 번쩍이면 세어서 적으십시오. 코넬 형은 오른쪽 끝 방앗간 터로.”“나도 세?” 코넬이 방패 밑에서 말했다.“형은 번개 셀 줄 압니다. 어릴 때 제가 가르쳤습니다.”“대충 기억나.”“대충이면 충분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