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천 판은 경비대 초소 마당에서 던졌다.
탁자 다섯을 내놓았다. 탁자마다 경비병 넷. 둘이 던지고 둘이 셌다. 주사위는 경비대 창고에서 꺼낸 것이었다. 병사들이 쉬는 날 굴리던 나무 주사위. 모서리가 닳아 둥글었다.
루엔은 던지기 전에 주사위부터 굴려 보았다. 한 알에 백스무 번씩. 여섯이 스물하나, 열여덟, 스물. 다른 눈들도 그 언저리였다. 치우친 데가 없었다.
“주사위도 재냐.” 호스가 물었다.
“판마다 같은 주사위인지부터 알아야 합니다. 주사위가 다르면 판이 다릅니다.”
호스가 코로 숨을 뿜었다. 휜 코라 소리가 한쪽으로 났다.
마당 가장자리에 널빤지를 세웠다. 테오가 숯으로 금을 그었다. 손님이 이긴 판은 왼쪽, 주인이 이긴 판은 오른쪽. 다섯 판마다 가로로 그어 묶었다.
클라리사도 와 있었다. 누가 부른 게 아니었다. 장터에서 소문을 들었다고 했다.
“숯은 번지잖아.” 클라리사가 산가지 주머니를 열었다. “나는 따로 셀게. 둘이 다르면 다시 세.”
테오가 숯 묻은 손을 들어 보였다.
“나 못 믿어?”
“너도 못 믿고 나도 못 믿어. 그러니까 둘이 세는 거야.”
루엔은 그 말을 받아 적고 싶었다. 참았다.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
첫날 아침, 경비병들은 신이 나 있었다.
서른여섯에 스물넷. 셋에 둘. 아직 그렇게 믿는 병사가 더 많았다. 여섯 여섯이 나올 때마다 탁자마다 고함이 났다.
백 판째에서 테오가 왼쪽 금을 셌다.
“손님 쉰셋.”
마당이 들썩였다. 누군가 루엔 쪽을 보며 초소 벽을 가리켰다. 걸레질하는 시늉을 했다.
“백 판은 흔들립니다.” 루엔이 말했다. 목소리가 크지 않았다. 아무도 듣지 않았다.
이백 판. 손님 아흔일곱.
삼백 판. 손님 백마흔넷.
고함이 조금씩 줄었다. 해가 기울자 병사들 팔이 무거워졌다. 스물네 번을 던지고 또 스물네 번. 한 판에 모래시계 한 줌. 첫날이 저물 때 사백열 판이었다. 손님 백아흔아홉.
그날 밤 초소 경비병 하나가 루엔 옆에 앉았다. 드렉슬러 판에서 월급 두 닢을 잃었다던 병사였다.
“아까 네 말. 백 판은 흔들린다는 거.”
“예.”
“천 판은 안 흔들리냐.”
“덜 흔들립니다. 안 흔들리는 건 없습니다.”
병사는 한참 제 손바닥을 보았다. 주사위를 너무 많이 쥐어 벌게진 손이었다.
“그럼 난 운이 없어서 잃은 게 아니었나 보다.”
루엔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직 몰랐다.
*
이튿날 아침엔 디트마르가 초소 담 너머로 들여다보았다. 실습장 가는 길이라고 했다. 길이 초소를 지나지는 않았다.
“주사위 굴리는 데 마법은 안 쓰냐.”
“안 씁니다. 손으로 던지는 게 셈입니다.”
디트마르가 담을 넘어왔다. 빈 탁자에서 주사위 둘을 집더니 한 판을 달라고 했다. 첫 번째 던짐에 여섯과 여섯이 나왔다. 경비병들이 고함을 질렀다. 디트마르가 턱을 들었다.
“운도 셈하냐.”
“그 판은 천 판 가운데 하나입니다. 왼쪽 금 하나.”
테오가 숯으로 왼쪽에 금을 하나 그었다. 디트마르는 그 금을 한참 보다가 코웃음을 치고 담을 넘어갔다. 넘어가면서 한 번 돌아보았다.
그날 해가 한가운데 떴을 때 천 판이 끝났다.
테오가 숯 금을 셌다. 클라리사가 산가지를 셌다. 둘이 서로를 보았다.
“사백여든여섯.”
“사백여든여섯.”
같았다.
호스가 가슴 갑옷 안쪽에서 종이를 꺼냈다. 이틀 동안 한 번도 꺼내지 않은 종이였다. 봉한 밀랍을 엄지로 깼다. 읽었다. 소리 내어.
“손님이 이기는 판, 사백예순에서 오백스물 사이. 가운데는 사백아흔둘.”
마당이 조용했다.
사백여든여섯은 사이에 있었다. 가운데에서 여섯 모자랐다.
호스는 종이를 한참 들고 있다가 루엔에게 돌려주었다. 벽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대신 경비병들이 했다. 첫날 걸레질 시늉을 하던 병사가 머쓱한 얼굴로 다가왔다.
“벽은 우리가 닦지.”
“내기에 지신 게 아닙니다. 벽을 닦으실 까닭이 없습니다.”
“까닭은 없어도 셋에 둘이라고 떠든 입이 있다.” 병사가 뒤통수를 긁었다. “서른여섯에 스물넷. 그거 내가 처음 퍼뜨린 셈이야.”
루엔은 그 병사를 보았다. 틀린 셈을 퍼뜨린 사람이 틀렸다고 먼저 말하는 건 드문 일이었다.
“그 셈은 그럴듯했습니다. 저도 한 번은 따라가 봐야 틀린 데가 보였습니다.”
병사가 웃었다. 그날 오후 초소 벽은 정말로 깨끗해졌다. 아무도 쓴 적 없는 벽이었다.
“그럼 네 말대로면.” 호스가 천천히 말했다. “드렉슬러 판은 조금 불리할 뿐이다. 우리 애들 월급을 다섯에 넷씩 털어 갈 판이 아니다.”
“예.”
“그런데 털렸다.”
“예. 월급날에만.”
호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부러진 코 위로 주름이 모였다.
“월급날 판은 이 판이 아니다.”
“이 주사위가 아닐 수 있습니다.”
*
그날 저녁 호스가 경비병 넷을 데리고 드렉슬러 도박장에 갔다. 루엔도 따라갔다. 호스가 허락했다. 셈한 사람이 봐야 한다고.
드렉슬러는 여느 날처럼 탁자 뒤에 서 있었다. 경비대장을 보고도 얼굴이 바뀌지 않았다. 흰 뼈 주사위를 손바닥에서 굴렸다.
“판을 보자.” 호스가 말했다.
“보시오.”
루엔이 주사위를 받아 굴렸다. 한 알에 백스무 번씩. 여섯이 스물, 열아홉. 고왔다.
“월급날에도 이 주사위입니까.”
드렉슬러가 루엔을 보았다. 처음으로 오래.
“주사위는 주사위요.”
호스가 탁자 뒤 서랍을 열었다. 드렉슬러가 막지 않았다. 서랍 안쪽, 천 주머니 하나가 있었다. 주머니 안에 흰 뼈 주사위 둘. 닳은 모서리까지 똑같았다.
루엔은 그 둘을 굴렸다. 한 알에 백스무 번씩.
여섯이 아홉. 그리고 열하나.
마당 탁자에서 굴린 주사위의 절반이 안 됐다. 대신 하나가 서른을 넘었다.
호스가 칼을 뽑았다. 주사위 하나를 탁자에 놓고 여섯 눈 쪽을 비스듬히 갈랐다. 뼈 안쪽에 까만 점이 박혀 있었다. 납이었다.
“무거운 쪽이 아래로 갑니다.” 루엔이 말했다. “여섯이 아래로 가면 하나가 위로 옵니다. 여섯이 덜 나오면 여섯 여섯은 훨씬 덜 나옵니다. 제 셈으로 스물네 번 던져 한 번이라도 나오는 판이 여섯에 하나가 조금 안 됩니다.”
“다섯에 넷을 잃겠군.” 호스가 말했다.
“예. 여쭤보신 대로입니다.”
*
드렉슬러는 끝까지 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평소 판은 셈대로요. 그 아이 셈이 맞았다지 않소.” 그가 말했다. “천에 여덟. 나도 알고 있었지. 스무 해 전에 아버지한테 배운 판이오. 그런데 천에 여덟으로는 가게 세도 못 내요. 큰돈이 걸리는 날만. 경비병 월급날만.”
“알면서 바꿨다.” 호스가 말했다.
“알아서 바꿨지. 몰랐으면 바꿀 줄도 몰랐겠지.”
호스는 판을 접게 했다. 탁자 셋을 마당에 내놓고, 허가 판을 떼어 갔다.
그러고는 루엔을 돌아보았다.
“월급날 잃은 거. 누가 얼마 잃었는지 적어 둔 게 있다 했지.”
“열두 분, 석 달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적었습니다. 제가 확인한 건 아닙니다.”
“그걸로 된다.” 호스가 드렉슬러를 보았다. “월급날 판에서 딴 거, 이 아이 종이대로 토해 내라. 나머지 병사들은 내일 초소로 와서 말해라. 거짓말하면 두 배로 물게 한다.”
드렉슬러는 루엔의 수첩을 내려다보았다. 이름, 날짜, 은화 몇 닢. 그 줄들을 한참 보다가 처음으로 한숨을 쉬었다.
“구경은 공짜라고 한 게 잘못이었군.”
금고도 열었다. 은화가 한 자루 있었다. 루엔은 몇 닢을 손바닥에 올려 흔들었다. 스무 해 급료를 금화로 받았다던 턱수염 교관이 그랬던 것처럼. 가벼웠다.
손으로는 거기까지였다. 루엔은 드렉슬러 탁자의 작은 저울을 빌렸다. 제 주머니의 은화 한 닢을 한쪽에, 금고의 은화 한 닢을 다른 쪽에. 금고 쪽이 떴다. 목에 건 기준 동전 주머니에서 보리알을 꺼내 얹었다. 여덟 톨에서 접시가 맞았다.
다섯 닢을 더 달았다. 일곱 톨, 여덟 톨, 여덟 톨, 아홉 톨, 여덟 톨. 한 사람 손에서 나온 것처럼 고르게 가벼웠다. 테두리도 깎인 자국이 없었다. 깎은 게 아니라 처음부터 덜 넣고 만든 은화였다.
“이건 어디서 났습니까.”
드렉슬러가 처음으로 입꼬리를 조금 올렸다.
“남쪽에서 흘러온 거요. 겉은 멀쩡한데 한 푼씩 가볍지. 니코라는 놈 솜씨라더군. 나도 받은 거요. 받은 걸로 거슬러 줬을 뿐이고.”
“누구한테 거슬러 주셨습니까.”
드렉슬러는 대답하지 않았다. 경비병 하나가 제 주머니를 뒤져 은화를 꺼냈다. 흔들었다. 얼굴이 붉어졌다.
루엔은 수첩 사람 이름 장에 한 줄을 적었다. 니코. 남쪽 위조꾼. 드렉슬러의 말. 본 사람 없음.
*
그 주에 가을 학기 마지막 강의가 있었다.
오이겐 두르 교수가 열네 걸음을 걷다 멈췄다.
“이 대목은 잠깐이면 된다.”
강의실 여기저기서 웃음이 샜다. 누군가 뒤쪽에서 종이 한 장을 앞으로 넘겼다. 종이는 줄을 따라 손에서 손으로 내려가 맨 앞줄에 닿았다. 맨 앞줄 학생이 어쩔 줄 몰라 하다 교수에게 내밀었다.
루엔은 그 종이를 알았다. 한 학기 동안 교수가 「잠깐이면 된다」고 할 때마다 모래시계를 뒤집어 적은 표였다. 스물아홉 번. 가장 짧은 게 한 번 반, 가장 긴 게 일곱 번. 고르게 나누면 세 번 반.
루엔이 테오에게 보여 준 표였다. 테오가 베꼈다. 누군가 또 베꼈다.
교수는 종이를 받아 한참 보았다. 열네 걸음을 걷는 대신 제자리에 서서.
강의실이 조용했다. 루엔은 이마가 조금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몇 할이나 뜨거운지는 재지 않았다.
교수가 고개를 들었다.
“일곱 번은 언제였나.”
루엔이 일어섰다. “스무째 번입니다. 거북 이야기를 다시 하셨을 때입니다.”
“그럼 그건 빼게. 그건 잠깐이 아니라 내가 좋아서 한 거니까.” 교수가 종이를 접어 공책 사이에 끼웠다. 그리고 걸음을 다시 시작했다. “다음 학기 첫 시간은 이렇게 말하지. 이 대목은 모래시계 세 번 반이면 된다.”
강의실이 웃음으로 무너졌다. 교수도 웃었다. 소리 없이.
강의가 끝나고 교수가 루엔을 불렀다.
“가장 짧은 게 한 번 반, 가장 긴 게 일곱이라고.”
“예.”
“그 사이에서 어떻게 흩어져 있는지도 적었나.”
“적었습니다.”
교수의 눈이 빛났다. 거북 이야기를 할 때의 눈이었다.
“오늘 밤 가져오게. 자는 걸 깨우진 않겠네.”
테오가 옆에서 한숨을 쉬었다. 그날 밤 테오는 지붕에서 잤다.
지도는 너무 많은 걸 그리고 있었다.막료 천막 벽에 걸린 베스트리아 동부 지도였다. 황색탑 측량사들이 그린 것. 산은 산 모양으로, 숲은 나무 모양으로, 강은 굽이굽이 그대로. 마을마다 교회 첨탑이 그려져 있었다. 아름다운 지도였다.그런데 루엔이 알고 싶은 건 하나였다. 어디가 끊기면 안 되는가.산 모양도, 나무 모양도, 강 굽이도 그걸 가리고 있었다.루엔은 새 종이를 폈다. 그리고 점을 찍었다.본진. 창고 마을. 왕도. 여섯 영지의 곡식 창고. 역참 열두 곳. 여울 셋. 모두 점 하나씩.그다음 점과 점 사이에 선을 그었다. 수레가 다니는 길이면 선 하나. 다리가 있으면 선 위에 짧은 가로줄. 거리도 산 높이도 그리지 않았다. 이어져 있는지 아닌지만.마흔한 개의 점과 예순 개 남짓의 선이 남았다.테오가 어깨 너머로 보았다.“이게 지도야? 거미줄 같은데.”“지도에서 필요 없는 걸 다 뺀 겁니다.”“뭐가 필요 없는데.”“어디로 이어졌는지 빼고 전부 다.”*루엔은 선을 하나씩 손가락으로 가렸다.선 하나를 가리고, 본진에서 출발해 점을 따라가 보았다. 모든 점에 닿으면, 그 선은 끊겨도 괜찮은 선이었다. 돌아가는 길이 있었다. 닿지 못하는 점이 생기면, 그 선은 끊기면 안 되는 선이었다.예순 번을 가렸다.대부분은 괜찮았다. 길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어서, 하나를 끊으면 옆으로 돌아가면 되었다. 멀어지긴 했지만 닿았다.세 선만 달랐다.메를 강 중류의 돌다리. 창고 마을로 들어가는 지류 위 나무다리. 그리고 왕도 동쪽 문 밖, 늪 사이로 난 둑길 위 다리.셋 중 하나만 끊겨도 점들이 두 덩이로 갈라졌다
재무대신 발터 크로이츠는 숫자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루엔은 그걸 첫눈에 알았다. 왕궁 재무실 벽에 장부가 천장까지 꽂혀 있었다. 등마다 해가 적혀 있었고, 해마다 빠진 권이 없었다. 탁자 위 셈판은 알이 반들반들 닳아 있었다. 크로이츠는 쉰 남짓, 머리가 희고 손가락이 가늘었다. 루엔이 들어서자 일어나지 않고 셈판 알을 마저 튕겼다. 한 줄을 다 셈하고서야 고개를 들었다.“앉으시오. 폐하께서 곧 오시오.”왕 레지날드 2세는 정말 곧 왔다. 이번에도 작은 금테만 둘렀다. 앉자마자 본론을 꺼냈다.“봄 싸움 돈이 모자란다.”크로이츠가 장부 한 권을 펼쳤다. 숫자가 빼곡했다. 옛 셈, 금화와 은화와 동화가 스물과 열둘로 얽힌 셈이었다. 그러나 줄이 반듯했고, 끝자리가 맞았다. 루엔은 곁눈으로 합계 셋을 속으로 셈해 보았다. 다 맞았다.“가을 싸움과 겨울 대치에 든 돈이 옛 금화로 만 사천 닢.” 크로이츠가 말했다. “봄에 레오폴트 장군이 국경 성채를 되찾으려면 삯군과 공성 기구를 더 들여야 하오. 새 금화로 이천 닢이 더 있어야 하오. 세금은 가을에 걷히오. 그때까지 빌려야 하오.”왕이 루엔을 보았다.“하르트 상단이 빌려줄 수 있나.”*루엔은 대답하기 전에 수첩을 폈다.클라리사가 어젯밤 적어 준 숫자가 있었다. 하르트 상단이 제 것으로 가진 금과 은, 창고의 물건, 받을 삯. 새 금화로 치면 삼천이백 닢 남짓. 보움 상단과 왕도 상인 조합 둘이 나눠 댄 몫까지 넣은 것이었다.“빌려드릴 수 있습니다.” 루엔이 말했다. “삼백이십 닢까지.”크로이츠의 손가락이 셈판 위에서 멈췄다.“이천이라 했소.”
첫 롱 텔레포트는 눈 녹는 날 아침에 했다.참호 뒤 빈터에 원진을 그렸다. 지름 열두 걸음. 테오가 말뚝과 끈으로 원을 잡고, 루엔이 안쪽 선을 그었다. 원진 가운데에 짐 상자 둘, 그 옆에 루엔과 테오.도착지는 왕도 아스테른, 루엔 공방 뒷마당이었다. 거기엔 클라리사가 같은 크기의 원을 그려 두었다. 사흘 전 편지로 보낸 그림대로.루엔은 보정표를 펼쳤다. 여기서 왕도까지의 거리, 두 곳의 위도, 오늘 해가 뜬 시각. 땅은 하루에 한 바퀴 돈다. 여기와 왕도는 도는 빠르기가 조금 다르다. 그 차이만큼 도착하는 몸을 미리 돌려 놓는다. 열여섯 살 겨울, 모래 자루 두 개로 보인 그 셈이었다.그때는 교장과 파비오가 루엔 식으로 걸었다. 루엔은 옆에서 보기만 했다. 여섯째 고리가 없었다.지금은 있었다.“무섭냐?” 테오가 물었다.“무섭지 않습니다. 셈을 세 번 했습니다.”“나는 무서운데.”“그럼 제 옷자락을 잡으십시오. 떨어지면 셈이 틀어집니다.”테오가 루엔 옷자락을 꽉 쥐었다.루엔은 걸었다.한 번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 발밑의 흙이 진창에서 마른 돌바닥으로 바뀌었다. 코끝의 냄새가 참호 연기에서 빵 굽는 냄새로 바뀌었다. 구스타프 분점이 두 골목 건너였다.짐 상자 둘이 발치에 그대로 서 있었다. 기울지도, 밀리지도 않았다.테오가 비틀거렸다. 루엔 옷자락을 놓지 않은 채 주저앉았다.“어, 어…… 됐어?”“됐습니다. 원 가운데서 손가락 한 마디 어긋났습니다.”뒷마당 문간에서 클라리사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원 끝에 분필로 적어 둔 작은 표를 가리켰다.&l
겨울은 링겐 고개 아래에서 멈췄다.마르케스군은 고개 발치의 국경 성채로 물러나 틀어박혔다. 가을 첫머리에 빼앗은 베스트리아 성채였다. 레오폴트는 그 앞 오 리 떨어진 곳에 참호를 파고 진을 쳤다. 눈이 무릎까지 쌓였다. 어느 쪽도 성채 벽까지 가지 않았다. 가 봐야 얼어붙은 밭에서 죽을 뿐이었다.대신 새벽마다 안개가 왔다.한겨울 두 달은 조용했다. 양쪽 다 눈 속에서 장작과 곡식을 세며 버텼다. 하르트 서기들의 겨울 셈대로, 말먹이가 가장 먼저 바닥을 보였다. 레오폴트는 말 절반을 뒤쪽 고을로 돌려보냈다. 마르케스 쪽 성채에서도 말 울음이 줄었다. 저쪽도 같은 셈을 한 것이었다.첫 안개는 겨울이 끝나 갈 무렵, 아직 눈이 녹기 전 어느 새벽에 왔다. 성채 쪽에서 하얀 김이 낮게 깔려 밀려왔다. 겨울 안개치고는 이상하게 따뜻했다. 앞 참호에 닿자 병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김이 뜨거웠다. 살갗에 닿으면 붉게 부어올랐다. 눈이 따가워 뜰 수 없었다. 김이 지나간 참호 바닥은 눈이 녹아 진창이 되었고, 해가 뜨기도 전에 다시 얼었다. 병사들 발이 진창째 얼어붙었다.사흘 동안 앞 참호에서 발가락을 잃은 병사가 열넷이었다.“적색탑 복합 술식이다.” 레오폴트가 말했다. 눈썹에 서리가 앉아 있었다. “불로 물을 끓이고 바람으로 민다. 옛날에 한 번 봤다. 그땐 이만큼 오래 가지 않았는데.”“교대를 합니다.” 루엔이 말했다. “가을 싸움 뒤로 적이 바꿨습니다. 번쩍임을 세어 보면, 밤을 셋으로 나눠 돌아가며 쏩니다. 한 번에 쏘는 사람은 열넷, 쉬는 사람이 스물여덟.”적도 셈을 했다. 사흘째 오후에 바닥나는 걸 겪은 사람들이었다. 이번엔 바닥나지 않게 나눠 쏘았다.*끓는 안개를 막으려면 같은 걸로 맞서야 했다.불과 물과 바람을 한꺼
요스트는 명령서를 두 번 읽었다.창고 마을은 본진에서 서쪽으로 반나절 거리였다. 메를 강 지류 가에 곡식 창고 여든 채가 줄지어 서 있었다. 여섯 영지에서 보낸 곡식, 말먹이, 화살 다발이 전부 여기 모였다. 요스트는 그 창고 열쇠를 쥔 창고지기였다. 하르트령에서 온 사람이었다. 쉰 살, 한쪽 다리를 조금 절었다.명령서는 새벽에 왔다. 본진에서 출발한 전령이 중간 역참에서 명령을 옮겨 적어 다음 전령에게 넘겼고, 그 전령이 요스트에게 가져왔다.「71번 창고를 열어 곡식 이백 자루를 본진 빵 굽는 곳으로 보낼 것. 레오폴트.」번호 옆에 작은 글자가 하나 더 붙어 있었다. 「71-9」.요스트는 입속으로 셈했다.앞자리 일곱에 둘을 곱하면 열넷. 뒷자리 하나를 더하면 열다섯. 열다섯을 열하나로 나누면 하나에 넷이 남는다.넷이어야 했다.명령서에는 아홉이 적혀 있었다.요스트는 열쇠 꾸러미를 허리에 도로 걸었다. 창고 문을 열지 않았다. 대신 마구간 소년을 불렀다.“본진으로 가라. 가장 빠른 말로. 루엔 도련님께 이 종이를 드려라. 끝자리가 안 맞는다고.”소년이 떠나고 얼마 안 되어, 빵 수레를 몰고 온 보급 기사가 창고 앞에 섰다. 동쪽 영지 사람이었다. 말에서 내리지도 않았다.“왜 안 여나. 장군님 명령이다.”“끝자리가 안 맞습니다.”“끝자리?” 기사가 명령서를 낚아채 보았다. 번호 옆 작은 글자를 한참 보다가 코웃음을 쳤다. “이 꼬랑지 말이냐. 이게 뭐라고.”“번호가 제대로 옮겨졌는지 보는 겁니다.”“번호는 71이라고 적혀 있다. 장군님 서명도 있다. 본진에선 병사들이 빵을 기다린다. 창고지기가 장
마르케스 본대가 온 건 열흘 뒤였다.선봉 뒤로 깃발이 끝없이 이어졌다. 링겐 고개에서 내려오는 행렬이 이틀 동안 끊이지 않았다. 강 동쪽 둑 위에 천막이 들어찼다. 붉은 천막은 스무 채가 넘었다.“이만 넘는다.” 정찰대장이 보고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떨지 않으려고 애쓰는 목소리였다. “이만 오천쯤.”천막 안 사람들이 루엔을 보았다. 귀족 회의에서 삼만이 한계라고 한 사람이었다.“이만 오천이면 셈 안입니다.” 루엔이 말했다. “강 아랫마을 곡식을 우리가 먼저 옮겼으니 오래 못 버팁니다. 문제는 마법사입니다.”“몇이오.”“어젯밤 번쩍임을 셌습니다. 쏜 자리가 마흔하나. 한 자리에 한 사람이면 마흔하나.”*싸움은 이튿날 새벽에 시작됐다.적은 쉬지 않고 쏘았다. 파이어볼이 선 앞까지 와서 떨어졌다. 선을 넘으려는 마법사는 궁수가 막았다. 방패벽 뒤에서 아군은 엎드려 버텼다. 적 보병이 여울을 건너려 했고, 아군 창병이 여울 끝에서 밀어냈다.루엔은 둔덕 위에서 한 가지만 했다.셌다.번쩍임 하나에 밀랍판에 금 하나.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한 시간이 지날 때마다 금을 묶어 따로 적었다. 이 세계의 한 시간, 낮을 열둘로 나눈 그 한 칸.첫날 번쩍임은 삼백열두 번이었다.시간마다 고르게. 스물다섯, 스물여섯, 스물넷. 해 질 녘까지 줄지 않았다.“하나도 안 줄었어.” 테오가 루엔 어깨 너머로 밀랍판을 보며 말했다. “저 사람들 지치지도 않나.”“오늘은 안 지칩니다. 그릇이 가득 찬 채로 왔습니다.”한낮이 지나자 루엔의 손목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