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오렐이 찾은 구절은 경전 맨 앞 권이 아니라 맨 뒤 권에 있었다.
아무도 읽지 않는 권이었다. 성전의 기둥 수와 휘장 길이, 제단에 바칠 기름의 양을 적은 권. 사제가 되려면 한 번은 베껴야 하지만, 베낀 다음엔 아무도 다시 펴지 않는 권.
「주 앞에 나아가는 자는 흐르는 물에 손을 씻고 나아가라. 씻지 않은 손으로 제단을 만지지 말라.」
오렐은 그 대목을 교구 도서실 사본 세 권에서 찾아 대조했다. 세 권 모두 같았다. 글자 하나 다르지 않았다.
“기둥 수를 적은 권이라서 아무도 안 읽었습니다.” 오렐이 루엔에게 말했다. 목소리가 들떠 있었다. “하르트 학생 같은 분이 읽었어야 하는 권입니다. 숫자가 많거든요.”
*
사제회의는 봄 축일 사흘 전에 열렸다.
교구장과 늙은 사제 여섯, 그리고 오렐. 긴 탁자 둘레에 앉았다. 루엔은 문 옆 벽에 붙어 섰다. 교구장이 허락한 자리였다. 「셈을 맡은 학생. 묻는 것에만 답할 것.」
오렐이 구절을 읽었다.
한동안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첫 번째로 입을 연 사람은 교구장 왼쪽의 늙은 사제였다. 머리카락이 한 올도 없었다. 목소리는 가늘었지만 또렷했다.
“앞 구절을 읽어 보게.”
오렐이 읽었다. 「제사장은 성소에 들 때 옷을 갈아입고…」
“그렇지. 이건 제사장 이야기일세. 성소에 드는 제사장. 골목 아낙이 부엌에서 기도할 때 이야기가 아니야.”
루엔은 그 사제를 다시 보았다. 앞 구절을 외우고 있었다. 아무도 안 읽는 권을.
오렐은 흔들리지 않았다.
“같은 권 열두째 장입니다.” 오렐이 다른 쪽을 폈다. “「너희 집의 식탁이 곧 제단이요, 너희 각 사람이 그 제단 앞의 제사장이라.」 이 권은 앞에서는 성전의 제사장을 말하고, 열두째 장에서는 모든 집을 제단이라 부릅니다. 집이 제단이면 식탁 앞에서 기도하는 사람이 제사장입니다.”
늙은 사제가 눈을 가늘게 떴다. 다른 사제가 사본을 끌어당겨 열두째 장을 찾았다. 찾아서 손가락으로 짚고, 옆 사제에게 밀어 주었다. 사본이 탁자를 한 바퀴 돌았다.
두 번째 물음은 탁자 맞은편에서 나왔다.
“물은 살갗 구멍을 열어 악한 기운을 들인다. 이건 우리가 이백 년 가르친 것일세. 그 가르침을 뒤집자는 건가.”
“뒤집지 않습니다.” 오렐이 말했다. “그 가르침은 성 바르톨의 주석에 있습니다. 뜨거운 물에 온몸을 담그는 목욕을 두고 한 말입니다. 주석 원문에 ‘뜨거운 물’과 ‘온몸’이 적혀 있습니다. 이 구절은 흐르는 물과 손입니다. 찬물이고, 손입니다.”
탁자가 조용해졌다. 늙은 사제 하나가 헛기침을 했다. 주석 원문을 펴 볼 필요는 없어 보였다. 다들 알고 있었다. 알면서 이백 년 동안 온몸과 손을 한데 묶어 가르쳤을 뿐이었다.
세 번째 물음은 다시 머리 없는 사제였다.
“흐르는 물. 골목 아낙이 어디서 흐르는 물을 구하나. 강에 가서 씻으라고? 저 학생이 강물이 가장 더럽다고 했다던데.”
모두가 루엔을 보았다.
교구장이 턱짓을 했다. 답하라는 뜻이었다.
*
루엔은 벽에서 한 걸음 나왔다.
“물통을 발로 기울이면 됩니다. 손을 안 대고 물이 흘러나오게. 저희 영지 우물가마다 있습니다. 발 대야라고 부릅니다. 흐르는 물이 됩니다.”
“물은.”
“물은 모래 물통으로 거릅니다.”
루엔은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탁자에 펼쳤다. 글자가 거의 없는 그림이었다.
통 하나. 통 안에 층이 다섯. 층마다 무늬가 달랐다. 굵은 점, 가는 점, 까만 칠, 다시 가는 점, 굵은 점. 층 옆에는 글자 대신 손가락 그림이 있었다. 손가락 마디마다 가로 금.
“글 모르는 분도 보시게 그렸습니다. 맨 아래 자갈, 손가락 네 마디. 그 위 굵은 모래 세 마디. 숯 두 마디. 고운 모래 여섯 마디. 맨 위 자갈 두 마디. 맨 위 자갈은 물을 부을 때 모래가 파이지 않게 누르는 것입니다.”
“왜 여섯인가.” 머리 없는 사제가 물었다. “고운 모래가. 다섯이면 안 되나.”
루엔은 그 물음이 반가웠다.
“다섯이면 물이 빨리 빠집니다. 빨리 빠지면 덜 걸러집니다. 일곱이면 물 한 동이 거르는 데 아침나절이 다 갑니다. 아낙들이 기다리다 그냥 마십니다. 여섯에서 한 동이에 모래시계 한 번입니다. 영지에서 스무 통을 달리 채워 보고 정했습니다.”
“스무 통.”
“예. 기록이 있습니다.”
늙은 사제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그림을 제 앞으로 당겨 한참 보았다. 손가락 마디 금을 세는 것 같았다.
*
마지막 물음은 교구장이 했다.
“얼마나 씻어야 씻은 것이냐. 물 한 번 끼얹고 기도하는 자와, 반 시간 문지르는 자가 같으냐.”
오렐이 루엔을 보았다. 이건 둘이 미리 셈해 둔 것이었다.
오렐이 품에서 작은 것을 꺼내 탁자 한가운데 놓았다.
손가락만 한 모래시계였다. 나무 틀에 유리 두 알. 안에 모래가 조금.
“스무 알입니다.”
사제들이 몸을 숙였다.
오렐이 모래시계를 뒤집었다. 모래가 가늘게 흘렀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모두 모래를 보았다. 루엔은 속으로 셌다. 하나, 둘.
스물에서 모래가 끝났다.
“이만큼 문지르면 손에 붙은 것이 떨어집니다.” 오렐이 말했다. “손바닥, 손등, 손가락 사이, 손톱 밑. 모래가 다 떨어지면 기도합니다.”
모래시계 이름은 유리 공방에서 붙었다. 루엔이 처음 주문하러 갔을 때 공방 주인이 물었다. 모래를 몇 알 넣으면 되느냐고. 루엔은 알이 아니라 박자라고, 스무 박자라고 했다. 주인은 알아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틀에 「스무 알」이라고 새겨 왔다. 고치려다 말았다. 셈이 맞으면 이름은 틀려도 됐다.
교구장이 모래시계를 집어 들었다. 다시 뒤집었다. 이번엔 자기 입술로 세었다. 스물. 모래가 끝났다.
교구장은 모래시계를 내려놓았다.
“경전에 있는 일이다.”
두 번째였다. 그 한 마디로 됐다.
*
사제회의는 세 가지를 정했다.
하나. 봄 축일부터, 교구의 모든 기도는 흐르는 물에 손을 씻은 뒤에 한다. 스무 알 모래시계가 다 떨어질 때까지. 이름은 「기도 전 정결」.
둘. 교구가 집집마다 모래 물통 그림을 나눠 준다. 통은 목수 조합에 맡긴다.
셋. 성 에르멘 우물은 축일에 다시 축복한다. 다만 축복받은 성수는 의식에만 쓴다. 마시는 물이 아니다. 두레박 손잡이는 「정결 기간이 끝날 때까지」 오렐 바스 사제가 보관한다.
셋째를 읽으며 교구장은 오렐을 보지 않았다. 오렐도 교구장을 보지 않았다. 정결 기간이 언제 끝나는지는 셋째 줄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았다.
*
셋째 줄 때문에 화가 난 사람이 하나 있었다.
양조장 주인 홀거가 이튿날 기숙사 앞에 왔다. 목소리가 사감실 창까지 울렸다.
“학생! 성수를 못 마시게 됐다며! 그럼 내 맥주는 뭘로 빚어!”
“큰 시장 우물 물로 빚으시면 됩니다.”
“그럼 성수 맥주가 아니잖아! 그 이름으로 값을 한 할 더 받았다고!”
루엔은 그 한 할을 셈해 보았다. 셈해 볼 필요는 없었지만 버릇이었다.
“일꾼분들이 이번 봄에 한 분도 안 앓으셨습니다.”
“그야 맥주만 마셔서—”
“솥에 끓여서입니다. 같은 우물 물을 끓이지 않고 마신 앞집들은 앓았습니다. 지도에 있습니다.”
홀거가 입을 다물었다. 통만 한 팔뚝으로 팔짱을 꼈다. 한참 기숙사 담장을 노려보았다.
“… 끓여서.”
“예.”
“그럼,” 홀거가 천천히 말했다. “‘끓인 물로 빚은 맥주, 일꾼 하나 안 앓음’이라고 써 붙이면, 값을 두 할 받아도 되겠네.”
루엔은 그 셈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수첩에 적었다. 「홀거: 셈이 빠름.」
*
남은 건 기도문이었다.
스무 알 동안 손을 씻고, 모래가 떨어지면 기도를 시작한다. 오렐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손을 씻는 동안에도 기도하고 싶어 했다. 모래가 떨어지는 순간 기도가 딱 끝나게.
“셈을 도와주십시오.”
둘은 오렐의 방에서 밤늦도록 음절을 셌다.
오렐이 짧은 기도문을 소리 내어 읽었다. 루엔은 박자를 짚었다. 한 박자에 두 음절 조금 넘게. 스무 박자면 마흔둘에서 마흔셋.
“마흔두 음절로 줄이십시오.”
오렐이 기도문을 고쳤다. 「주여」를 빼고 「당신이여」를 넣었다가, 한 음절이 늘어 다시 뺐다. 「깨끗한 손으로」를 「맑은 손으로」로 바꿨다. 두 음절이 줄었다. 한밤중까지 고쳤다.
마흔두 음절이 되었다.
오렐이 모래시계를 뒤집고 손을 대야에 담갔다. 문지르며 기도문을 외웠다.
모래가 끝났다.
기도는 끝나지 않았다. 마지막 두 음절이 남아 있었다.
오렐이 멈췄다. 루엔을 보았다.
“반 박자 깁니다.” 루엔이 말했다. “숨 쉬는 자리가 둘 있습니다. 거기서 반 박자씩 늘어납니다.”
“숨을 안 쉬면 되겠군요.”
“그러면 쓰러지십니다.”
다시 해 보았다. 또 반 박자. 한 번 더. 반 박자.
네 번째에 오렐은 마지막 두 음절을 아주 빨리 말했다. 한 음절처럼 붙여서.
모래와 기도가 같이 끝났다.
오렐이 젖은 손을 든 채 루엔을 보았다. 루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다. 다만 끝말이 이상하게 급했다. 기도가 아니라 누구를 부르다 만 소리 같았다.
“이상하게 들립니까.”
“조금 급하게 들립니다.”
오렐은 잠깐 생각했다. 그러고는 웃었다.
“급한 기도도 기도겠지요.”
*
축일 아침, 성당 입구에 발 대야 여섯 개가 섰다. 줄이 길었다. 한 사람마다 스무 알.
오렐이 입구 맨 앞에서 먼저 씻었다. 신도들이 그의 손을 보며 따라 문질렀다. 모래가 떨어지는 순간, 오렐의 입술에서 기도 끝말이 빠르게 튀어나왔다.
뒤에 선 아이 하나가 따라 했다. 끝말만, 빠르게. 그 뒤 아이도.
그 뒤로 아스테른 교구에서는 기도 끝말을 빨리 하는 게 정결 의식의 한 부분이 되었다. 아무도 까닭을 몰랐다. 음절 셈을 틀린 게 아니라, 숨 쉬는 자리를 셈에 넣지 않은 탓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둘뿐이었다.
그날 저녁 루엔은 수첩에 적었다.
「기도문 마흔두 음절. 숨 두 번. 반 박자 김. — 셈에서 숨을 빼먹음. 내 잘못.」
지도는 너무 많은 걸 그리고 있었다.막료 천막 벽에 걸린 베스트리아 동부 지도였다. 황색탑 측량사들이 그린 것. 산은 산 모양으로, 숲은 나무 모양으로, 강은 굽이굽이 그대로. 마을마다 교회 첨탑이 그려져 있었다. 아름다운 지도였다.그런데 루엔이 알고 싶은 건 하나였다. 어디가 끊기면 안 되는가.산 모양도, 나무 모양도, 강 굽이도 그걸 가리고 있었다.루엔은 새 종이를 폈다. 그리고 점을 찍었다.본진. 창고 마을. 왕도. 여섯 영지의 곡식 창고. 역참 열두 곳. 여울 셋. 모두 점 하나씩.그다음 점과 점 사이에 선을 그었다. 수레가 다니는 길이면 선 하나. 다리가 있으면 선 위에 짧은 가로줄. 거리도 산 높이도 그리지 않았다. 이어져 있는지 아닌지만.마흔한 개의 점과 예순 개 남짓의 선이 남았다.테오가 어깨 너머로 보았다.“이게 지도야? 거미줄 같은데.”“지도에서 필요 없는 걸 다 뺀 겁니다.”“뭐가 필요 없는데.”“어디로 이어졌는지 빼고 전부 다.”*루엔은 선을 하나씩 손가락으로 가렸다.선 하나를 가리고, 본진에서 출발해 점을 따라가 보았다. 모든 점에 닿으면, 그 선은 끊겨도 괜찮은 선이었다. 돌아가는 길이 있었다. 닿지 못하는 점이 생기면, 그 선은 끊기면 안 되는 선이었다.예순 번을 가렸다.대부분은 괜찮았다. 길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어서, 하나를 끊으면 옆으로 돌아가면 되었다. 멀어지긴 했지만 닿았다.세 선만 달랐다.메를 강 중류의 돌다리. 창고 마을로 들어가는 지류 위 나무다리. 그리고 왕도 동쪽 문 밖, 늪 사이로 난 둑길 위 다리.셋 중 하나만 끊겨도 점들이 두 덩이로 갈라졌다
재무대신 발터 크로이츠는 숫자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루엔은 그걸 첫눈에 알았다. 왕궁 재무실 벽에 장부가 천장까지 꽂혀 있었다. 등마다 해가 적혀 있었고, 해마다 빠진 권이 없었다. 탁자 위 셈판은 알이 반들반들 닳아 있었다. 크로이츠는 쉰 남짓, 머리가 희고 손가락이 가늘었다. 루엔이 들어서자 일어나지 않고 셈판 알을 마저 튕겼다. 한 줄을 다 셈하고서야 고개를 들었다.“앉으시오. 폐하께서 곧 오시오.”왕 레지날드 2세는 정말 곧 왔다. 이번에도 작은 금테만 둘렀다. 앉자마자 본론을 꺼냈다.“봄 싸움 돈이 모자란다.”크로이츠가 장부 한 권을 펼쳤다. 숫자가 빼곡했다. 옛 셈, 금화와 은화와 동화가 스물과 열둘로 얽힌 셈이었다. 그러나 줄이 반듯했고, 끝자리가 맞았다. 루엔은 곁눈으로 합계 셋을 속으로 셈해 보았다. 다 맞았다.“가을 싸움과 겨울 대치에 든 돈이 옛 금화로 만 사천 닢.” 크로이츠가 말했다. “봄에 레오폴트 장군이 국경 성채를 되찾으려면 삯군과 공성 기구를 더 들여야 하오. 새 금화로 이천 닢이 더 있어야 하오. 세금은 가을에 걷히오. 그때까지 빌려야 하오.”왕이 루엔을 보았다.“하르트 상단이 빌려줄 수 있나.”*루엔은 대답하기 전에 수첩을 폈다.클라리사가 어젯밤 적어 준 숫자가 있었다. 하르트 상단이 제 것으로 가진 금과 은, 창고의 물건, 받을 삯. 새 금화로 치면 삼천이백 닢 남짓. 보움 상단과 왕도 상인 조합 둘이 나눠 댄 몫까지 넣은 것이었다.“빌려드릴 수 있습니다.” 루엔이 말했다. “삼백이십 닢까지.”크로이츠의 손가락이 셈판 위에서 멈췄다.“이천이라 했소.”
첫 롱 텔레포트는 눈 녹는 날 아침에 했다.참호 뒤 빈터에 원진을 그렸다. 지름 열두 걸음. 테오가 말뚝과 끈으로 원을 잡고, 루엔이 안쪽 선을 그었다. 원진 가운데에 짐 상자 둘, 그 옆에 루엔과 테오.도착지는 왕도 아스테른, 루엔 공방 뒷마당이었다. 거기엔 클라리사가 같은 크기의 원을 그려 두었다. 사흘 전 편지로 보낸 그림대로.루엔은 보정표를 펼쳤다. 여기서 왕도까지의 거리, 두 곳의 위도, 오늘 해가 뜬 시각. 땅은 하루에 한 바퀴 돈다. 여기와 왕도는 도는 빠르기가 조금 다르다. 그 차이만큼 도착하는 몸을 미리 돌려 놓는다. 열여섯 살 겨울, 모래 자루 두 개로 보인 그 셈이었다.그때는 교장과 파비오가 루엔 식으로 걸었다. 루엔은 옆에서 보기만 했다. 여섯째 고리가 없었다.지금은 있었다.“무섭냐?” 테오가 물었다.“무섭지 않습니다. 셈을 세 번 했습니다.”“나는 무서운데.”“그럼 제 옷자락을 잡으십시오. 떨어지면 셈이 틀어집니다.”테오가 루엔 옷자락을 꽉 쥐었다.루엔은 걸었다.한 번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 발밑의 흙이 진창에서 마른 돌바닥으로 바뀌었다. 코끝의 냄새가 참호 연기에서 빵 굽는 냄새로 바뀌었다. 구스타프 분점이 두 골목 건너였다.짐 상자 둘이 발치에 그대로 서 있었다. 기울지도, 밀리지도 않았다.테오가 비틀거렸다. 루엔 옷자락을 놓지 않은 채 주저앉았다.“어, 어…… 됐어?”“됐습니다. 원 가운데서 손가락 한 마디 어긋났습니다.”뒷마당 문간에서 클라리사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원 끝에 분필로 적어 둔 작은 표를 가리켰다.&l
겨울은 링겐 고개 아래에서 멈췄다.마르케스군은 고개 발치의 국경 성채로 물러나 틀어박혔다. 가을 첫머리에 빼앗은 베스트리아 성채였다. 레오폴트는 그 앞 오 리 떨어진 곳에 참호를 파고 진을 쳤다. 눈이 무릎까지 쌓였다. 어느 쪽도 성채 벽까지 가지 않았다. 가 봐야 얼어붙은 밭에서 죽을 뿐이었다.대신 새벽마다 안개가 왔다.한겨울 두 달은 조용했다. 양쪽 다 눈 속에서 장작과 곡식을 세며 버텼다. 하르트 서기들의 겨울 셈대로, 말먹이가 가장 먼저 바닥을 보였다. 레오폴트는 말 절반을 뒤쪽 고을로 돌려보냈다. 마르케스 쪽 성채에서도 말 울음이 줄었다. 저쪽도 같은 셈을 한 것이었다.첫 안개는 겨울이 끝나 갈 무렵, 아직 눈이 녹기 전 어느 새벽에 왔다. 성채 쪽에서 하얀 김이 낮게 깔려 밀려왔다. 겨울 안개치고는 이상하게 따뜻했다. 앞 참호에 닿자 병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김이 뜨거웠다. 살갗에 닿으면 붉게 부어올랐다. 눈이 따가워 뜰 수 없었다. 김이 지나간 참호 바닥은 눈이 녹아 진창이 되었고, 해가 뜨기도 전에 다시 얼었다. 병사들 발이 진창째 얼어붙었다.사흘 동안 앞 참호에서 발가락을 잃은 병사가 열넷이었다.“적색탑 복합 술식이다.” 레오폴트가 말했다. 눈썹에 서리가 앉아 있었다. “불로 물을 끓이고 바람으로 민다. 옛날에 한 번 봤다. 그땐 이만큼 오래 가지 않았는데.”“교대를 합니다.” 루엔이 말했다. “가을 싸움 뒤로 적이 바꿨습니다. 번쩍임을 세어 보면, 밤을 셋으로 나눠 돌아가며 쏩니다. 한 번에 쏘는 사람은 열넷, 쉬는 사람이 스물여덟.”적도 셈을 했다. 사흘째 오후에 바닥나는 걸 겪은 사람들이었다. 이번엔 바닥나지 않게 나눠 쏘았다.*끓는 안개를 막으려면 같은 걸로 맞서야 했다.불과 물과 바람을 한꺼
요스트는 명령서를 두 번 읽었다.창고 마을은 본진에서 서쪽으로 반나절 거리였다. 메를 강 지류 가에 곡식 창고 여든 채가 줄지어 서 있었다. 여섯 영지에서 보낸 곡식, 말먹이, 화살 다발이 전부 여기 모였다. 요스트는 그 창고 열쇠를 쥔 창고지기였다. 하르트령에서 온 사람이었다. 쉰 살, 한쪽 다리를 조금 절었다.명령서는 새벽에 왔다. 본진에서 출발한 전령이 중간 역참에서 명령을 옮겨 적어 다음 전령에게 넘겼고, 그 전령이 요스트에게 가져왔다.「71번 창고를 열어 곡식 이백 자루를 본진 빵 굽는 곳으로 보낼 것. 레오폴트.」번호 옆에 작은 글자가 하나 더 붙어 있었다. 「71-9」.요스트는 입속으로 셈했다.앞자리 일곱에 둘을 곱하면 열넷. 뒷자리 하나를 더하면 열다섯. 열다섯을 열하나로 나누면 하나에 넷이 남는다.넷이어야 했다.명령서에는 아홉이 적혀 있었다.요스트는 열쇠 꾸러미를 허리에 도로 걸었다. 창고 문을 열지 않았다. 대신 마구간 소년을 불렀다.“본진으로 가라. 가장 빠른 말로. 루엔 도련님께 이 종이를 드려라. 끝자리가 안 맞는다고.”소년이 떠나고 얼마 안 되어, 빵 수레를 몰고 온 보급 기사가 창고 앞에 섰다. 동쪽 영지 사람이었다. 말에서 내리지도 않았다.“왜 안 여나. 장군님 명령이다.”“끝자리가 안 맞습니다.”“끝자리?” 기사가 명령서를 낚아채 보았다. 번호 옆 작은 글자를 한참 보다가 코웃음을 쳤다. “이 꼬랑지 말이냐. 이게 뭐라고.”“번호가 제대로 옮겨졌는지 보는 겁니다.”“번호는 71이라고 적혀 있다. 장군님 서명도 있다. 본진에선 병사들이 빵을 기다린다. 창고지기가 장
마르케스 본대가 온 건 열흘 뒤였다.선봉 뒤로 깃발이 끝없이 이어졌다. 링겐 고개에서 내려오는 행렬이 이틀 동안 끊이지 않았다. 강 동쪽 둑 위에 천막이 들어찼다. 붉은 천막은 스무 채가 넘었다.“이만 넘는다.” 정찰대장이 보고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떨지 않으려고 애쓰는 목소리였다. “이만 오천쯤.”천막 안 사람들이 루엔을 보았다. 귀족 회의에서 삼만이 한계라고 한 사람이었다.“이만 오천이면 셈 안입니다.” 루엔이 말했다. “강 아랫마을 곡식을 우리가 먼저 옮겼으니 오래 못 버팁니다. 문제는 마법사입니다.”“몇이오.”“어젯밤 번쩍임을 셌습니다. 쏜 자리가 마흔하나. 한 자리에 한 사람이면 마흔하나.”*싸움은 이튿날 새벽에 시작됐다.적은 쉬지 않고 쏘았다. 파이어볼이 선 앞까지 와서 떨어졌다. 선을 넘으려는 마법사는 궁수가 막았다. 방패벽 뒤에서 아군은 엎드려 버텼다. 적 보병이 여울을 건너려 했고, 아군 창병이 여울 끝에서 밀어냈다.루엔은 둔덕 위에서 한 가지만 했다.셌다.번쩍임 하나에 밀랍판에 금 하나.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한 시간이 지날 때마다 금을 묶어 따로 적었다. 이 세계의 한 시간, 낮을 열둘로 나눈 그 한 칸.첫날 번쩍임은 삼백열두 번이었다.시간마다 고르게. 스물다섯, 스물여섯, 스물넷. 해 질 녘까지 줄지 않았다.“하나도 안 줄었어.” 테오가 루엔 어깨 너머로 밀랍판을 보며 말했다. “저 사람들 지치지도 않나.”“오늘은 안 지칩니다. 그릇이 가득 찬 채로 왔습니다.”한낮이 지나자 루엔의 손목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