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텔레포트는 넷째 고리 마법 가운데 가장 인기가 많았다. 그리고 가장 많이 다치는 마법이었다.
실습장 모래판 한쪽에서 다른 쪽까지. 서른 걸음. 넷째 고리를 쌓은 학생들이 줄을 서서 차례로 사라졌다가 건너편에 나타났다. 나타나는 순간 대개 휘청거렸다. 무릎을 꿇는 학생도 있었다. 한 학생은 도착하자마자 모래판에 코를 박았다.
“도착할 때 멈춘다고 생각하지 마라.” 텔레포트 교관이 외쳤다. “떠날 때 서 있던 그대로 도착한다고 생각해라. 무릎을 풀어라!”
교관은 황색탑에서 스무 해를 일한 사람이었다. 짐과 사람을 옮기는 일. 오른손 새끼손가락이 없었다. 누가 물으면 「먼 데를 너무 자주 갔다」고만 했다.
“멀리 갈수록 도착이 사납다.” 교관이 말했다. “몇 리를 가면 옆으로 튄다. 백 리를 넘으면 다리가 부러진다. 탑에선 이걸 마나 난류라고 부른다. 먼 길엔 마나가 거칠게 흐르는 데가 있어서, 그걸 지나오면 몸이 흔들린다는 거지. 그래서 먼 텔레포트는 여섯째 고리 넘은 사람만 한다. 너희는 서른 걸음이다. 서른 걸음엔 난류가 없다.”
루엔은 서른 걸음을 건넜다. 휘청거리지 않았다. 떠날 때 무릎을 미리 풀고 있었다.
교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르트. 다음 학기엔 백 걸음.”
“몇 리를 가 보고 싶습니다.”
교관이 루엔을 돌아보았다. 없는 새끼손가락 자리를 엄지로 문질렀다.
“몇 리.”
“성 밖 북쪽 언덕까지. 사천삼백 걸음입니다. 세 리 조금 넘습니다.”
“왜.”
“서른 걸음엔 난류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백 리엔 다리가 부러진다고 하셨습니다. 그 사이 어디서부터 생기는지 알고 싶습니다.”
교관은 한참 루엔을 내려다보았다.
“세 리면 발목은 안 부러진다.” 그가 말했다. “넘어지는 건 네 몫이다.”
*
루엔의 그릇으로 세 리 텔레포트는 하루에 세 번이 한계였다. 네 번째엔 가슴의 고리가 바닥을 긁었다.
그래서 테오를 불렀다.
“내가 왜 언덕까지 걸어가야 되는데.”
“도착하는 자리를 봐 줄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저는 도착하는 순간 제 발을 못 봅니다.”
“그럼 너는 한 번에 가고 나는 한 시간을 걷고.”
“모래시계 두 번 반입니다. 한 시간이 안 됩니다.”
테오는 투덜거리면서 분필 한 통을 챙겼다.
북쪽 언덕 꼭대기엔 풀이 짧고 흙이 단단한 평평한 자리가 있었다. 테오가 거기 분필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한가운데 가위표. 루엔이 떠나기 전에 그 자리를 원시로 보고 좌표를 잡아 두었다.
학교 뒤뜰에서 루엔은 무릎을 풀었다.
영창.
세상이 접혔다가 펴졌다.
언덕의 바람이 얼굴에 닿았다. 발바닥에 단단한 흙. 그리고 그 순간, 몸이 옆으로 끌렸다. 누가 소매를 살짝 잡아당긴 것처럼. 왼쪽 발이 저절로 한 걸음 옆으로 나갔다. 반 발짝.
루엔은 섰다. 넘어지지 않았다.
테오가 쪼그려 앉아 루엔의 발을 보았다. 가위표에서 오른발은 딱 한가운데. 왼발은 옆으로 반 발짝 밀려 있었다.
“빗나갔네.” 테오가 말했다.
“빗나간 게 아닙니다. 도착은 맞았습니다. 도착한 다음에 밀렸습니다.”
“그게 그거지.”
“다릅니다. 표시해 주십시오.”
테오가 밀려난 왼발 끝에 분필 금을 그었다. 루엔은 그 방향을 보았다. 해 뜨는 쪽이었다.
*
돌아오는 길은 걸었다. 그릇을 아껴야 했다.
이튿날 다시 했다. 학교에서 언덕으로. 반 발짝. 해 뜨는 쪽.
사흘째. 반 발짝. 해 뜨는 쪽.
테오는 금을 그을 때마다 앞의 금 옆에 나란히 그었다. 닷새째가 되자 가위표 동쪽에 짧은 분필 금이 다섯 개 나란히 섰다. 거의 한 자리에.
“이상하네.” 테오가 금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바람이 부는 날도 있었고 안 부는 날도 있었는데.”
“바람은 서쪽에서 불었습니다. 밀린 건 동쪽입니다.”
“그럼 바람 때문은 아니고.”
“예.”
테오가 루엔의 신발을 보았다. 그리고 루엔의 다리를 보았다. 위아래로.
“너 발이 삐뚤어진 거 아냐? 왼쪽 다리가 조금 짧다든지.”
루엔은 그 가능성을 셈해 보았다. 나쁜 물음이 아니었다. 몸이 한쪽으로 쏠리는 사람은 있다.
“내일 반대로 서서 해 보겠습니다.”
*
엿새째, 루엔은 학교 뒤뜰에서 등을 언덕 쪽으로 돌리고 섰다. 남쪽을 보고. 언덕에 도착하면 가위표 위에서 남쪽을 보고 서 있게 된다. 몸의 왼쪽과 오른쪽이 어제와 뒤바뀐다.
다리가 짧아서 밀리는 거라면, 이번엔 반대쪽으로 밀려야 했다.
영창.
언덕의 바람. 흙. 끌림.
이번엔 오른발이 옆으로 나갔다. 반 발짝.
테오가 금을 그으려고 쪼그려 앉았다가, 분필을 든 채로 멈췄다.
오른발이 밀려난 쪽은 어제 왼발이 밀려난 쪽과 같았다. 가위표 동쪽. 테오가 그어 둔 다섯 개의 금 바로 옆.
테오가 고개를 들었다. 루엔의 얼굴을 보고, 해를 보고, 금을 보았다.
“… 네 몸 쪽이 아니네.”
루엔은 대답하지 않았다. 테오가 먼저 말하게 두었다.
“네가 어디를 보고 서든, 밀리는 건 해 뜨는 쪽이야. 네 왼쪽 오른쪽이 아니라.” 테오가 분필 끝으로 땅을 톡톡 쳤다. “땅 쪽이야. 땅이 정한 쪽.”
“예.”
“알고 있었어?”
“지금 알았습니다. 테오가 먼저 말했습니다.”
테오는 한참 분필 금을 내려다보았다. 여섯 번째 금을 그었다. 다른 금들보다 조금 더 굵게.
“이거 내가 알아낸 걸로 적어라.”
루엔은 수첩을 폈다. 적었다. 「밀리는 쪽은 몸이 아니라 땅 쪽 방향. — 테오 마일스. 여름.」
*
이레째엔 디트마르가 따라왔다.
테오가 식당에서 떠든 탓이었다. 해 뜨는 쪽을 자기가 찾았다고. 디트마르는 코웃음을 치더니 이튿날 아침 학교 뒤뜰에 나와 있었다.
“네 그릇이 작아서 흔들리는 거겠지. 내가 해 보면 안 밀린다.”
“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루엔이 말했다. “다른 사람이 해도 같은 쪽으로 밀리는지 저도 알고 싶었습니다.”
디트마르가 말문이 막힌 얼굴을 했다. 싸우러 왔는데 부탁을 받은 얼굴이었다.
디트마르의 영창은 길고 번쩍였다. 그가 사라졌다.
모래시계 두 번 반 뒤, 언덕에서 거울 빛이 세 번 깜빡였다. 테오와 미리 정해 둔 신호였다. 「도착, 밀림, 크게.」
해 질 녘에 걸어 돌아온 테오가 전했다.
“가위표에 딱 떨어지더니 옆으로 반 발짝 밀리고, 무릎을 안 풀어서 그대로 엉덩방아. 해 뜨는 쪽으로.”
디트마르는 저녁 식탁에 오지 않았다. 대신 루엔의 표 맨 아래에 누가 적었는지 모를 한 줄이 늘어 있었다. 글씨가 크고 반듯했다.
「디트마르 페르난. 같은 쪽. 그릇 크기와 상관없음.」
*
그다음엔 거꾸로 해 보았다.
언덕에서 학교로. 북쪽에서 남쪽으로 가는 길.
도착한 곳은 학교 뒤뜰 돌 벤치 앞이었다. 이번엔 클라리사가 금을 그었다. 테오는 언덕에서 걸어오는 중이었다.
반 발짝. 해 지는 쪽이었다.
“반대네.” 클라리사가 말했다. “갈 때는 동쪽, 올 때는 서쪽.”
“예.”
“그러면 서쪽으로 가면?”
루엔은 학교 서쪽 담장 밖, 세 리 떨어진 방앗간 언덕을 골랐다. 테오가 이번엔 서쪽으로 걸었다. 걸으며 무어라 투덜거리는 소리가 담장 너머까지 들렸다.
서쪽으로 가니 밀리는 건 북쪽이었다. 폭은 북쪽으로 갔을 때와 비슷했다. 다만 발이 땅에 닿을 때 조금 무거웠다. 누가 어깨를 아래로 살짝 누른 것처럼.
루엔은 밤마다 표를 채웠다. 떠난 곳, 도착한 곳, 가는 쪽, 거리, 밀린 쪽, 밀린 폭. 밀린 폭은 테오의 금과 제 발 크기로 쟀다. 반 발짝, 반 발짝 조금 넘게, 반 발짝이 조금 안 되게.
그리고 한 번, 서른 걸음 실습장에서도 해 보았다. 발끝에 아주 가는 분필 금을 긋고. 밀리지 않았다. 적어도 눈에 보일 만큼은.
서른 걸음은 영. 세 리는 반 발짝. 교관 말로는 백 리는 다리가 부러진다.
루엔은 표의 맨 아래에 줄을 긋고 적었다.
「가는 쪽이 정해지면 밀리는 쪽도 정해진다. 멀수록 세다. 제멋대로가 아니다.」
거기서 펜이 멈췄다.
난류는 제멋대로 흐르는 것이었다. 강물의 소용돌이처럼. 제멋대로 흐르는 것에 부딪혔다면, 어떤 날은 동쪽으로, 어떤 날은 서쪽으로 밀려야 했다. 여섯 번 다 같은 쪽으로 밀리는 난류는 난류가 아니었다.
그러면 무엇인가.
루엔은 그 줄 아래를 비워 두었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적는다. 그런데 이번엔 「모름」이라고도 적지 않았다. 아직 모른다고 말할 만큼도 몰랐다. 모름을 적으려면 무엇을 모르는지는 알아야 했다.
*
교관에게 표를 보였다.
교관은 한참 보았다. 없는 새끼손가락 자리를 엄지로 문질렀다.
“황색탑에도 이런 게 있다.” 그가 말했다. “먼 길을 오간 기록. 누가 어디서 어디로 가서 어느 쪽으로 튀었는지. 난 거기 스무 해 있었지만 제대로 들여다본 사람은 하나뿐이었다. 기록을 적은 사람.”
“누구입니까.”
“여섯째 고리 마법사다. 황색탑에서 제일 먼 데를 가는 사람.” 교관이 표를 돌려주었다. “그 사람도 제멋대로가 아니라고 했지. 그러다 탑 어른들한테 난류가 제멋대로가 아니면 뭐냐고 핀잔을 듣고 입을 닫았다.”
교관은 문 쪽으로 가다가 돌아보았다.
“하르트. 그 표 버리지 마라.”
루엔은 표를 버려 본 적이 없었다. 동화 한 닢짜리 영수증도 여덟 살 때 것부터 묶어 두고 있었다. 그래도 고개를 숙여 대답했다. 그 말은 표를 두고 한 말이 아니라, 표를 적는 사람을 두고 한 말 같았다.
*
기숙사로 돌아오는 길에 테오가 물었다.
“그래서, 왜 해 뜨는 쪽이야?”
“모릅니다.”
“너도 모르는 게 있어?”
“많습니다.”
테오가 걸음을 멈췄다.
“몇 개?”
루엔은 수첩 맨 뒷장을 떠올렸다. 「모르는 것」 칸. 여섯 살 때 첫 줄을 적었다. 샌 마나는 어디로 가나.
“오늘로 여덟입니다. 여덟 번째는 아직 못 적었습니다.”
“왜.”
“뭘 모르는지 아직 모릅니다.”
테오가 한참 루엔을 보더니, 고개를 저으며 먼저 걸었다. 몇 걸음 가서 뒤도 안 돌아보고 말했다.
“그거 알게 되면 나한테 제일 먼저 말해. 해 뜨는 쪽은 내가 찾았으니까.”
“예. 그렇게 적어 두었습니다.”
지도는 너무 많은 걸 그리고 있었다.막료 천막 벽에 걸린 베스트리아 동부 지도였다. 황색탑 측량사들이 그린 것. 산은 산 모양으로, 숲은 나무 모양으로, 강은 굽이굽이 그대로. 마을마다 교회 첨탑이 그려져 있었다. 아름다운 지도였다.그런데 루엔이 알고 싶은 건 하나였다. 어디가 끊기면 안 되는가.산 모양도, 나무 모양도, 강 굽이도 그걸 가리고 있었다.루엔은 새 종이를 폈다. 그리고 점을 찍었다.본진. 창고 마을. 왕도. 여섯 영지의 곡식 창고. 역참 열두 곳. 여울 셋. 모두 점 하나씩.그다음 점과 점 사이에 선을 그었다. 수레가 다니는 길이면 선 하나. 다리가 있으면 선 위에 짧은 가로줄. 거리도 산 높이도 그리지 않았다. 이어져 있는지 아닌지만.마흔한 개의 점과 예순 개 남짓의 선이 남았다.테오가 어깨 너머로 보았다.“이게 지도야? 거미줄 같은데.”“지도에서 필요 없는 걸 다 뺀 겁니다.”“뭐가 필요 없는데.”“어디로 이어졌는지 빼고 전부 다.”*루엔은 선을 하나씩 손가락으로 가렸다.선 하나를 가리고, 본진에서 출발해 점을 따라가 보았다. 모든 점에 닿으면, 그 선은 끊겨도 괜찮은 선이었다. 돌아가는 길이 있었다. 닿지 못하는 점이 생기면, 그 선은 끊기면 안 되는 선이었다.예순 번을 가렸다.대부분은 괜찮았다. 길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어서, 하나를 끊으면 옆으로 돌아가면 되었다. 멀어지긴 했지만 닿았다.세 선만 달랐다.메를 강 중류의 돌다리. 창고 마을로 들어가는 지류 위 나무다리. 그리고 왕도 동쪽 문 밖, 늪 사이로 난 둑길 위 다리.셋 중 하나만 끊겨도 점들이 두 덩이로 갈라졌다
재무대신 발터 크로이츠는 숫자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루엔은 그걸 첫눈에 알았다. 왕궁 재무실 벽에 장부가 천장까지 꽂혀 있었다. 등마다 해가 적혀 있었고, 해마다 빠진 권이 없었다. 탁자 위 셈판은 알이 반들반들 닳아 있었다. 크로이츠는 쉰 남짓, 머리가 희고 손가락이 가늘었다. 루엔이 들어서자 일어나지 않고 셈판 알을 마저 튕겼다. 한 줄을 다 셈하고서야 고개를 들었다.“앉으시오. 폐하께서 곧 오시오.”왕 레지날드 2세는 정말 곧 왔다. 이번에도 작은 금테만 둘렀다. 앉자마자 본론을 꺼냈다.“봄 싸움 돈이 모자란다.”크로이츠가 장부 한 권을 펼쳤다. 숫자가 빼곡했다. 옛 셈, 금화와 은화와 동화가 스물과 열둘로 얽힌 셈이었다. 그러나 줄이 반듯했고, 끝자리가 맞았다. 루엔은 곁눈으로 합계 셋을 속으로 셈해 보았다. 다 맞았다.“가을 싸움과 겨울 대치에 든 돈이 옛 금화로 만 사천 닢.” 크로이츠가 말했다. “봄에 레오폴트 장군이 국경 성채를 되찾으려면 삯군과 공성 기구를 더 들여야 하오. 새 금화로 이천 닢이 더 있어야 하오. 세금은 가을에 걷히오. 그때까지 빌려야 하오.”왕이 루엔을 보았다.“하르트 상단이 빌려줄 수 있나.”*루엔은 대답하기 전에 수첩을 폈다.클라리사가 어젯밤 적어 준 숫자가 있었다. 하르트 상단이 제 것으로 가진 금과 은, 창고의 물건, 받을 삯. 새 금화로 치면 삼천이백 닢 남짓. 보움 상단과 왕도 상인 조합 둘이 나눠 댄 몫까지 넣은 것이었다.“빌려드릴 수 있습니다.” 루엔이 말했다. “삼백이십 닢까지.”크로이츠의 손가락이 셈판 위에서 멈췄다.“이천이라 했소.”
첫 롱 텔레포트는 눈 녹는 날 아침에 했다.참호 뒤 빈터에 원진을 그렸다. 지름 열두 걸음. 테오가 말뚝과 끈으로 원을 잡고, 루엔이 안쪽 선을 그었다. 원진 가운데에 짐 상자 둘, 그 옆에 루엔과 테오.도착지는 왕도 아스테른, 루엔 공방 뒷마당이었다. 거기엔 클라리사가 같은 크기의 원을 그려 두었다. 사흘 전 편지로 보낸 그림대로.루엔은 보정표를 펼쳤다. 여기서 왕도까지의 거리, 두 곳의 위도, 오늘 해가 뜬 시각. 땅은 하루에 한 바퀴 돈다. 여기와 왕도는 도는 빠르기가 조금 다르다. 그 차이만큼 도착하는 몸을 미리 돌려 놓는다. 열여섯 살 겨울, 모래 자루 두 개로 보인 그 셈이었다.그때는 교장과 파비오가 루엔 식으로 걸었다. 루엔은 옆에서 보기만 했다. 여섯째 고리가 없었다.지금은 있었다.“무섭냐?” 테오가 물었다.“무섭지 않습니다. 셈을 세 번 했습니다.”“나는 무서운데.”“그럼 제 옷자락을 잡으십시오. 떨어지면 셈이 틀어집니다.”테오가 루엔 옷자락을 꽉 쥐었다.루엔은 걸었다.한 번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 발밑의 흙이 진창에서 마른 돌바닥으로 바뀌었다. 코끝의 냄새가 참호 연기에서 빵 굽는 냄새로 바뀌었다. 구스타프 분점이 두 골목 건너였다.짐 상자 둘이 발치에 그대로 서 있었다. 기울지도, 밀리지도 않았다.테오가 비틀거렸다. 루엔 옷자락을 놓지 않은 채 주저앉았다.“어, 어…… 됐어?”“됐습니다. 원 가운데서 손가락 한 마디 어긋났습니다.”뒷마당 문간에서 클라리사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원 끝에 분필로 적어 둔 작은 표를 가리켰다.&l
겨울은 링겐 고개 아래에서 멈췄다.마르케스군은 고개 발치의 국경 성채로 물러나 틀어박혔다. 가을 첫머리에 빼앗은 베스트리아 성채였다. 레오폴트는 그 앞 오 리 떨어진 곳에 참호를 파고 진을 쳤다. 눈이 무릎까지 쌓였다. 어느 쪽도 성채 벽까지 가지 않았다. 가 봐야 얼어붙은 밭에서 죽을 뿐이었다.대신 새벽마다 안개가 왔다.한겨울 두 달은 조용했다. 양쪽 다 눈 속에서 장작과 곡식을 세며 버텼다. 하르트 서기들의 겨울 셈대로, 말먹이가 가장 먼저 바닥을 보였다. 레오폴트는 말 절반을 뒤쪽 고을로 돌려보냈다. 마르케스 쪽 성채에서도 말 울음이 줄었다. 저쪽도 같은 셈을 한 것이었다.첫 안개는 겨울이 끝나 갈 무렵, 아직 눈이 녹기 전 어느 새벽에 왔다. 성채 쪽에서 하얀 김이 낮게 깔려 밀려왔다. 겨울 안개치고는 이상하게 따뜻했다. 앞 참호에 닿자 병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김이 뜨거웠다. 살갗에 닿으면 붉게 부어올랐다. 눈이 따가워 뜰 수 없었다. 김이 지나간 참호 바닥은 눈이 녹아 진창이 되었고, 해가 뜨기도 전에 다시 얼었다. 병사들 발이 진창째 얼어붙었다.사흘 동안 앞 참호에서 발가락을 잃은 병사가 열넷이었다.“적색탑 복합 술식이다.” 레오폴트가 말했다. 눈썹에 서리가 앉아 있었다. “불로 물을 끓이고 바람으로 민다. 옛날에 한 번 봤다. 그땐 이만큼 오래 가지 않았는데.”“교대를 합니다.” 루엔이 말했다. “가을 싸움 뒤로 적이 바꿨습니다. 번쩍임을 세어 보면, 밤을 셋으로 나눠 돌아가며 쏩니다. 한 번에 쏘는 사람은 열넷, 쉬는 사람이 스물여덟.”적도 셈을 했다. 사흘째 오후에 바닥나는 걸 겪은 사람들이었다. 이번엔 바닥나지 않게 나눠 쏘았다.*끓는 안개를 막으려면 같은 걸로 맞서야 했다.불과 물과 바람을 한꺼
요스트는 명령서를 두 번 읽었다.창고 마을은 본진에서 서쪽으로 반나절 거리였다. 메를 강 지류 가에 곡식 창고 여든 채가 줄지어 서 있었다. 여섯 영지에서 보낸 곡식, 말먹이, 화살 다발이 전부 여기 모였다. 요스트는 그 창고 열쇠를 쥔 창고지기였다. 하르트령에서 온 사람이었다. 쉰 살, 한쪽 다리를 조금 절었다.명령서는 새벽에 왔다. 본진에서 출발한 전령이 중간 역참에서 명령을 옮겨 적어 다음 전령에게 넘겼고, 그 전령이 요스트에게 가져왔다.「71번 창고를 열어 곡식 이백 자루를 본진 빵 굽는 곳으로 보낼 것. 레오폴트.」번호 옆에 작은 글자가 하나 더 붙어 있었다. 「71-9」.요스트는 입속으로 셈했다.앞자리 일곱에 둘을 곱하면 열넷. 뒷자리 하나를 더하면 열다섯. 열다섯을 열하나로 나누면 하나에 넷이 남는다.넷이어야 했다.명령서에는 아홉이 적혀 있었다.요스트는 열쇠 꾸러미를 허리에 도로 걸었다. 창고 문을 열지 않았다. 대신 마구간 소년을 불렀다.“본진으로 가라. 가장 빠른 말로. 루엔 도련님께 이 종이를 드려라. 끝자리가 안 맞는다고.”소년이 떠나고 얼마 안 되어, 빵 수레를 몰고 온 보급 기사가 창고 앞에 섰다. 동쪽 영지 사람이었다. 말에서 내리지도 않았다.“왜 안 여나. 장군님 명령이다.”“끝자리가 안 맞습니다.”“끝자리?” 기사가 명령서를 낚아채 보았다. 번호 옆 작은 글자를 한참 보다가 코웃음을 쳤다. “이 꼬랑지 말이냐. 이게 뭐라고.”“번호가 제대로 옮겨졌는지 보는 겁니다.”“번호는 71이라고 적혀 있다. 장군님 서명도 있다. 본진에선 병사들이 빵을 기다린다. 창고지기가 장
마르케스 본대가 온 건 열흘 뒤였다.선봉 뒤로 깃발이 끝없이 이어졌다. 링겐 고개에서 내려오는 행렬이 이틀 동안 끊이지 않았다. 강 동쪽 둑 위에 천막이 들어찼다. 붉은 천막은 스무 채가 넘었다.“이만 넘는다.” 정찰대장이 보고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떨지 않으려고 애쓰는 목소리였다. “이만 오천쯤.”천막 안 사람들이 루엔을 보았다. 귀족 회의에서 삼만이 한계라고 한 사람이었다.“이만 오천이면 셈 안입니다.” 루엔이 말했다. “강 아랫마을 곡식을 우리가 먼저 옮겼으니 오래 못 버팁니다. 문제는 마법사입니다.”“몇이오.”“어젯밤 번쩍임을 셌습니다. 쏜 자리가 마흔하나. 한 자리에 한 사람이면 마흔하나.”*싸움은 이튿날 새벽에 시작됐다.적은 쉬지 않고 쏘았다. 파이어볼이 선 앞까지 와서 떨어졌다. 선을 넘으려는 마법사는 궁수가 막았다. 방패벽 뒤에서 아군은 엎드려 버텼다. 적 보병이 여울을 건너려 했고, 아군 창병이 여울 끝에서 밀어냈다.루엔은 둔덕 위에서 한 가지만 했다.셌다.번쩍임 하나에 밀랍판에 금 하나.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한 시간이 지날 때마다 금을 묶어 따로 적었다. 이 세계의 한 시간, 낮을 열둘로 나눈 그 한 칸.첫날 번쩍임은 삼백열두 번이었다.시간마다 고르게. 스물다섯, 스물여섯, 스물넷. 해 질 녘까지 줄지 않았다.“하나도 안 줄었어.” 테오가 루엔 어깨 너머로 밀랍판을 보며 말했다. “저 사람들 지치지도 않나.”“오늘은 안 지칩니다. 그릇이 가득 찬 채로 왔습니다.”한낮이 지나자 루엔의 손목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