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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Author: 꽃잎소녀
가희는 그날 통화에 더 이상 마음을 쓰지 않았다.

애초에 모욕당하러 가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지금 몸 상태로는 병원 밖으로 나가는 것 자체가 위험했다.

하지만 부원우가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잔인하게 굴 줄은 몰랐다.

가희가 병원 복도를 천천히 걷고 병실로 돌아와 쉬려던 때였다.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들이 한꺼번에 병실로 들어왔다.

맨 앞에 선 사람은 원우의 비서 손민식이었다.

“손 비서, 이게 무슨 뜻이에요?”

“대표님께서 나은 양 생일 파티에 모셔 오라고 하셨습니다.”

가희의 시선이 날카롭게 변했다.

“부원우는 이런 방식으로 사람을 초대하는 거예요?”

민식은 턱을 살짝 들었다.

말투에는 평소처럼 은근한 깔봄이 묻어 있었다.

“사모님, 괜히 힘 빼지 마시고 얌전히 따라오시는 게 좋습니다. 대표님 마음속에서 사모님 비중은 나은 아가씨 머리카락 한 가닥만도 못하니까요.”

결국 손민식이 이렇게까지 나오는 것도 부원우가 암묵적으로 허락했기 때문일 것이다.

가희는 입술을 다물었다가 말했다.

“갈게요. 대신 설마 병원복 차림으로 파티에 오라고 하는 건 아니겠죠?”

민식은 가희를 위아래로 훑었다.

지금 몸 상태라면 별다른 일을 꾸미기도 어렵다고 판단했는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3분 드리겠습니다. 시간이 되면 병실로 다시 들어오겠습니다.”

민식은 경호원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자 가희는 곧바로 베개 아래에 숨겨 둔 핸드폰을 꺼냈다.

지아에게 보낼 구조 요청 문자를 빠르게 작성했다.

너무 다급했던 탓에 수신인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

서아에게 보내야 할 문자는 엉뚱한 번호로 전송됐다.

...

정확히 3분 뒤, 민식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가시죠, 사모님.”

가희가 도망치기라도 할까 봐 이동하는 내내 경호원들이 빈틈없이 주변을 막았다.

그렇게 벨로아호텔까지 끌려갔다.

연회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이름난 재계 인사들이 가득했다.

가희의 시선은 원하지 않아도 사람들 한가운데에 선 오늘의 주인공인 세 식구에게 향했다.

부원우는 흰색 맞춤 정장을 입고 있었다.

사업 현장에서 보이던 냉혹한 기운은 보이지 않고, 잘생긴 얼굴에는 부드러운 웃음이 떠 있었다.

원우의 팔에는 인형처럼 예쁜 여자아이가 안겨 있었다.

아이의 눈매는 원우 옆에 선 정희와 무척 닮았다.

정희는 아이보리색 머메이드 드레스를 입고 긴 머리를 단정하게 올렸다.

온화하고 우아한 모습은 은은한 달빛을 연상시켰다.

정희는 원우에게 바짝 기대서 있었다.

누가 봐도 진짜 아내는 정희인 것처럼 친밀해 보였다.

“부 대표님도 대단하시네요. 이렇게 예쁜 아내와 딸을 여태 감춰두고 이제야 공개하시는 겁니까?”

주변에서 부러운 웃음과 농담이 터졌다.

원우는 다정한 눈으로 정희를 내려다봤다.

가희에게는 한 번도 들려준 적 없는 애정 어린 목소리였다.

“저는 당장이라도 세상에 다 알리고 싶었습니다. 아내가 조용히 지내고 싶어 해서 뜻을 존중했을 뿐입니다.”

“아빠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엄마랑 나은이야!”

3살 나은은 원우의 품에 안긴 채 턱을 높이 들었다.

어린아이 특유의 자랑스러운 표정이었다.

“나은아,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정희는 볼을 살짝 붉히면서도 행복한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눈앞에서 완벽한 가족처럼 웃는 세 사람을 보자 가희의 심장에 얼음장 같은 칼날이 파고드는 듯했다.

속에서 심한 메스꺼움이 치솟았다.

눈앞이 어두워졌고, 몸이 휘청이다 지나가던 직원과 부딪쳤다.

쨍그랑!

은색 트레이가 바닥에 떨어지고 와인잔이 깨졌다.

날카로운 파열음이 연회장의 웃음소리를 갈랐다.

사람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가희에게 쏠렸다.

원우의 웃는 얼굴이 굳었다.

성큼 다가온 원우는 가희의 팔을 거칠게 붙잡고 크게 부른 배를 노려봤다.

“왜 아직 아이를 안 지웠어?”

그날 통화를 전부 들었다면 아이가 자기 아이가 아니라는 것도 알았을 텐데.

그런데도 왜 그대로 두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가희는 원우가 이렇게 격하게 반응할 줄 몰랐다.

팔을 빼내려고 힘껏 버텼다.

“부원우, 이거 놔!”

“원우야!”

정희와 가희의 부모인 남영수 부부가 다급히 다가왔다.

정희는 원우의 팔에 매달렸다. 정교한 화장 아래로 긴장과 악의가 스쳐 갔다.

남영수는 손님들을 진정시키러 갔고, 어머니 장미애만 남았다.

가희를 보는 장미애의 눈에 적의가 가득했다.

“이 못된 계집애야. 오늘 일부러 난리 치러 온 거야?”

장미애가 손톱으로 가희의 팔을 세게 꼬집었다. 목소리를 낮춰 으름장을 놓았다.

“오늘 나은이 생일이야. 여기서 소란 피우면 앞으로 나를 엄마라고 부를 생각도 하지 마.”

가희는 아픈 팔을 그대로 둔 채 어머니를 똑바로 바라봤다.

“엄마는 저를 딸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어요?”

“뭐?”

“엄마랑 아빠는 언니가 부원우랑 만나고 있다는 것도, 둘 사이에 아이가 있다는 것도 진작 알고 있었잖아요.”

“그런데 저한테는 숨겼어요. 제가 아무것도 모르고 그 남자랑 결혼하는 걸 그냥 지켜봤고요. 두 분은 정말 제 친부모 맞아요?”

예전에 정희가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임신했을 때였다.

정희는 아이 아버지가 누구인지 죽어도 말하지 않았고, 임신을 중단하게 되면 몸이 상한다며 매일 집에서 울었다.

체면이 깎일까 두렵다는 말도 했다.

부모는 매일 한숨만 쉬었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가희가 마음이 약해져 해외 연수 기회를 정희에게 양보했다.

그때 이미 원우는 사업가로 성공한 상태였다.

진실을 알고 있던 부모가 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동생인 자신이 원우와 결혼하도록 놔뒀는지, 지금까지도 이해하지 못했다.

만약 원우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가희도 굳이 자신이 지켜 온 자리까지 내려놓지는 않았을 텐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장미애의 눈에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가 금세 사라졌다.

“원우 같은 남자 아내 자리는 누구나 꿈꾸는 자리야. 네 언니가 해외에서 경력도 쌓고 제대로 자리 잡고 와야 원우의 부모도 인정해 줄 거 아니니?”

“안 그랬으면 네 언니까지 너처럼 시댁에서 들볶이며 시집살이했을 거야.”

가희가 멍해졌다.

“그러니까 저는... 언니가 돌아올 때까지 언니 대신 아내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었던 거예요?”

“말을 왜 그렇게 못되게 해? 너도 3년 동안 좋은 집에서 살면서 대표 사모님 대접은 받았잖아.”

장미애는 가희가 엄청난 은혜라도 입은 사람처럼 눈을 흘겼다.

기가 막혔다.

자신이 살아온 삶 자체가 우스운 농담 같았다.

두 사람은 목소리를 낮추고 있어 원우는 대화 내용을 듣지 못했다.

원우는 어느새 표정을 가라앉힌 채 단호하게 말했다.

“장모님, 여기는 제가 정리하겠습니다. 정희야, 너도 더 이상 신경 쓰지 마. 장모님이랑 나은이 챙겨. 이런 일 때문에 생일 파티 망치지 말고.”

“그래, 원우가 말대로 하자.”

정희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장미애를 데리고 자리를 옮겼다.

원우는 가희의 배를 바라봤다.

“왜 안 지웠냐고 물었어?”

가슴에 돌덩이가 걸린 것처럼 답답했다.

가희를 괴롭히려고 꾸민 일이었는데, 실제로 크게 부른 배를 보자 설명하기 어려운 불쾌감이 치솟았다.

가희가 되물었다.

“왜 지워야 하는데?”

3년 동안 쌓인 억울함과 절망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가희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목이 쉬어 갈라졌는데도 멈추지 않았다.

“부원우! 이게 당신이 원한 거잖아!”

연회장이 얼어붙은 듯 조용해졌다.

“나쁜 아줌마! 우리 아빠한테 소리 지르지 마!”

나은이 정희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손에는 귀여운 장난감 요술봉을 꼭 쥐고 있었다.

화가 난 얼굴로 가희에게 달려들었다.

가희는 본능적으로 몸을 옆으로 피했다.

그 바람에 나은이 발을 헛디뎠다.

작은 몸이 카펫 위로 넘어졌다.

곧바로 아이의 처절한 울음소리가 터졌다.

“나은아!”

원우의 표정이 확 변했다.

그는 망설임 없이 가희를 밀쳐 냈다.

가희는 그대로 바닥에 세게 넘어졌다.

배를 보호하려고 손부터 짚었는데 하필 깨진 유리 위였다.

날카로운 조각이 손바닥을 베었고 피가 금세 배어 나왔다.

원우는 나은을 조심스럽게 안아 들고 등을 다독였다.

그러다 가희를 바라보는 눈에는 살기까지 서렸다.

“나은이한테 무슨 일 생기면 너 가만 안 둬.”

정희는 나은이 크게 다치지 않은 걸 확인하고 안도했다.

그제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가희에게 손을 내밀었다.

목소리는 다정하고 가엾기까지 했다.

“가희야, 괜찮아? 얼른 일어나. 바닥에 유리 조각 많아...”

“치워.”

정희는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마치 철없는 동생을 이해해 주는 언니 같은 표정이었다.

“가희야, 네가 형부를 좋아한다고 말했으면 언니가 양보할 수도 있었어. 꼭 이렇게까지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줘야 했니?”

가희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정희를 봤다.

이번에는 확실히 보였다.

늘 상냥하고 배려 깊은 척하던 언니의 눈에 만족스러운 기색이 떠 있었다.

‘일부러였어.’

주변에서 웅성거림이 크게 번졌다.

“세상에, 동생이 형부를 노렸다는 거야?”

“배가 저렇게 불렀는데도 남의 남자를 넘봐? 너무 뻔뻔하잖아.”

“저 아이... 설마 부 대표 아이인 건 아니겠지?”

“...”

누군가 툭 던진 한마디에 주변이 기묘하게 조용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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