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미련 없는 아내의 퇴장법: Chapter 1 - Chapter 10

30 Chapters

제1화

남가희는 붉어진 얼굴로 몸을 일으켜 속옷을 챙겨 입었다.“교수님, 저... 임신이 가능할까요?”가희는 불안한 눈으로 세면대 앞에 선 남자를 바라봤다.윤주환은 허리를 조금 숙인 채 손을 씻고 있었다. 길고 반듯한 손가락 위로 물줄기가 흘렀고, 소매 아래로 드러난 팔뚝에는 힘줄이 은근히 도드라져 있었다.주환의 시선이 가희에게 닿았다.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검은 눈에는 담담한 냉기가 배어 있었다.“부부관계가 원만하지 않았습니까?”가희의 얼굴이 귀까지 붉어졌다.입술을 깨문 끝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네... 한 번뿐이었어요.”“한 번?”“왜, 왜요? 문제가 있나요?”가희는 치맛자락을 쥐며 속으로 계속 되뇌었다.‘의사한테는 환자가 다 똑같아. 아무것도 이상할 거 없어.’하지만 주환의 길고 반듯한 손가락이 눈에 들어오자 조금 전 진료 화면이 떠올랐고, 호흡이 괜히 흐트러졌다.가희는 딴생각을 떨쳐 내려고 일부러 시선을 돌렸다.주환 앞에 놓인 진료기록지가 보였다. 글씨는 놀라울 만큼 정갈했다. 흔히 떠올리는 알아보기 힘든 필체와는 달리 선이 또렷하고 단정했다.“기초 체력이 많이 약합니다. 조기 진통 위험도 있고요. 아이를 유지하고 싶다면 입원해서 경과를 봐야 합니다. 보호자에게 바로 연락하는 게 좋겠습니다.”가희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임신 기간 내내 조심했다. 유산 위험이 있다는 말을 들은 뒤로는 처방받은 주사도 빠뜨리지 않았고, 최근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어렵게 유명한 전문의 진료까지 잡았다.그런데 설마 아이를 잃을 위험이 있을 줄은 몰랐다.가희는 치맛자락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교수님, 아이만 낳을 수 있다면 뭐든 할게요.”결혼한 지 3년.부원우는 ‘아이를 좋아하지 않는다’라는 말 하나로 결혼 후 단 한 번도 가희를 안지 않았다.이번 임신은 술에 취했던 밤에 벌어진 뜻밖의 일이었다.가희는 원우가 아이를 원하지 않을까 봐 두려웠다.그래서 처음으로 남편 뜻을 거슬렀다.원우가 M국으로 반년짜리 출장을 떠난 틈을
Read more

제2화

“나은이는 아빠랑 엄마가 같이 살았으면 좋겠어!”나은이 원우의 다리에 매달렸다.딸의 달콤한 목소리에 원우의 마음이 금세 풀렸다.조금 전까지 남아 있던 망설임도 깨끗이 사라졌다.원우는 한 팔로 나은을 안아 들고, 다른 팔로 정희의 어깨를 감쌌다.“너도 너무 착해서 문제야. 이번에 돌아가면 나은이 생일 파티에서 둘 다 공식적으로 소개할 거야.”정희는 원우에게 몸을 기대며 눈 깊숙이 만족스러운 기색을 감췄다. 겉으로는 걱정스러운 척 물었다.“그럼 가희 뱃속에 있는 아이는?”원우의 입가에 비웃음이 번졌다.“걔가 나한테 얼마나 집착하는데. 다른 남자 아이를 뱃속에 두고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지금쯤이면 이미 없앴겠지.”가희가 그런 치욕을 견딜 수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남의 아이를 끝까지 낳을 배짱도 없다고 믿었다....가희가 눈을 떴을 때는 중환자실로 옮겨진 뒤였다.본능적으로 배부터 내려다봤다.배가 여전히 둥글게 부풀어 있는 걸 확인하자 가슴을 짓누르던 불안이 조금 가라앉았다.‘아이... 아직 살아있어.’그때 간호사 두 명이 병실로 들어왔다.작게 나누는 대화에는 감탄이 가득했다.“윤주환 교수님 진짜 대단하지 않아? 남가희 산모님 상태가 그렇게 위험했는데 산모님이랑 아기 둘 다 살렸잖아.”“윤주환 교수님은 업계에서도 손꼽히는 분이잖아. 그 산모님도 운이 좋았지...”“쉿, 교수님 회진 오신다.”대화가 뚝 끊겼다.주환은 연배가 있는 의사 몇 명과 함께 병실에 들어왔다.주변을 압도하는 분위기 때문인지 다른 의료진은 자연스럽게 주환의 뒤에 섰다.가희의 몸에는 여러 모니터 선이 연결돼 있었다.조금만 움직여도 가슴과 배 곳곳에서 잔잔한 통증이 번졌다.가희가 눈을 들었다가 주환의 차분하고 서늘한 눈과 마주쳤다.가희는 눈을 몇 번 깜빡이며 도움을 청하듯 바라봤다.주환은 가희를 한 번 본 뒤 뒤쪽 의료진에게 말했다.“환자분은 수술 후 이제 막 깨어났습니다. 안정이 필요하니 다들 나가 주세요.”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여럿
Read more

제3화

가희는 그날 통화에 더 이상 마음을 쓰지 않았다.애초에 모욕당하러 가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지금 몸 상태로는 병원 밖으로 나가는 것 자체가 위험했다.하지만 부원우가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잔인하게 굴 줄은 몰랐다.가희가 병원 복도를 천천히 걷고 병실로 돌아와 쉬려던 때였다.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들이 한꺼번에 병실로 들어왔다.맨 앞에 선 사람은 원우의 비서 손민식이었다.“손 비서, 이게 무슨 뜻이에요?”“대표님께서 나은 양 생일 파티에 모셔 오라고 하셨습니다.”가희의 시선이 날카롭게 변했다.“부원우는 이런 방식으로 사람을 초대하는 거예요?”민식은 턱을 살짝 들었다.말투에는 평소처럼 은근한 깔봄이 묻어 있었다.“사모님, 괜히 힘 빼지 마시고 얌전히 따라오시는 게 좋습니다. 대표님 마음속에서 사모님 비중은 나은 아가씨 머리카락 한 가닥만도 못하니까요.”결국 손민식이 이렇게까지 나오는 것도 부원우가 암묵적으로 허락했기 때문일 것이다.가희는 입술을 다물었다가 말했다.“갈게요. 대신 설마 병원복 차림으로 파티에 오라고 하는 건 아니겠죠?”민식은 가희를 위아래로 훑었다.지금 몸 상태라면 별다른 일을 꾸미기도 어렵다고 판단했는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3분 드리겠습니다. 시간이 되면 병실로 다시 들어오겠습니다.”민식은 경호원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문이 닫히자 가희는 곧바로 베개 아래에 숨겨 둔 핸드폰을 꺼냈다.지아에게 보낼 구조 요청 문자를 빠르게 작성했다.너무 다급했던 탓에 수신인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서아에게 보내야 할 문자는 엉뚱한 번호로 전송됐다....정확히 3분 뒤, 민식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가시죠, 사모님.”가희가 도망치기라도 할까 봐 이동하는 내내 경호원들이 빈틈없이 주변을 막았다.그렇게 벨로아호텔까지 끌려갔다.연회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이름난 재계 인사들이 가득했다.가희의 시선은 원하지 않아도 사람들 한가운데에 선 오늘의 주인공인 세 식구에게 향했다.부원우는 흰색 맞춤 정장을 입고 있었다.
Read more

제4화

“걔가 감히?”원우가 눈을 내리깔았다.경멸과 혐오를 숨기지 않았다.“뱃속 아이가 누구 씨인지 제가 어떻게 압니까? 제 딸은 나은 하나뿐입니다. 아무나 제 성을 받을 자격은 없습니다.”가희를 직접 다른 남자에게 보내 놓고도, 이제는 불륜 상대를 지키겠다고 사람들 앞에서 가희를 부정한 여자로 만들고 있었다.가희는 임신 7개월의 배를 안은 채 홀 중앙에 서 있었다.사냥꾼들에게 포위된 짐승처럼 사방에서 시선이 쏟아졌다.옆으로 늘어진 손을 꽉 쥐었다가 천천히 폈다.입가에는 차가운 웃음이 떠올랐다.“내가 자격이 없다고?”가희는 가방에서 작은 서류 케이스를 꺼냈다.“그럼 이 혼인관계증명서에 적힌 남자는 누구인데?”예전의 가희는 원우를 얼마나 좋아했을까?혼인신고를 마친 날부터 관련 서류 사본을 늘 지갑에 넣고 다녔다.모든 게 꿈처럼 느껴질 때마다 한 번씩 꺼내 보며 정말 좋아하는 남자와 부부가 됐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다.하지만 이제 그 증명은 기쁨이 아니라 원우를 찌르는 칼이 됐다.연회장이 크게 술렁였다.원우의 표정이 굳었다.그는 가희 손에 들린 서류를 거칠게 낚아채 찢어 버렸다.“남가희, 입 닥쳐!”이를 악문 목소리였다.“가희야, 괜한 생각 하지 마.”정희가 다가왔다.걱정하는 표정은 지나치게 완벽했다.정희는 가희에게 몸을 숙여 귓가 가까이 입술을 가져갔다.진한 향수 냄새와 함께 악독한 속삭임이 들렸다.“사실 그날 밤 원우는 네 방 바로 옆에 있었어. 나랑 계속 영상통화하고 있었거든. 우리 얌전하고 고고한 동생이 뒤로는 그렇게 대담한 줄 누가 알았겠어? 그 신음까지... 아직도 잊히질 않아.”가희의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목소리가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그 남자... 누구였어?”“원우가 거래처 사람 중에서 너한테 잘 어울릴 만한 남자를 직접 골라 줬지. 나이도 좀 있고 가정도 있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네가 만족했으면 된 거 아니니? 원우가 참 신경 많이 썼어.”정희는 일부러 원우의 이름을 반복했다.가희가 분노에
Read more

제5화

“아비도 모르는 애를 임신한 주제에 감히 내 딸이랑 손녀까지 해쳐? 뭐 해! 저 애 버릇 좀 제대로 고쳐 놔!”장미애는 눈에서 불이라도 뿜을 듯 화를 냈다.말이 떨어지자 경호원 몇 명이 가희에게 달려들었다.주먹과 발길질이 이어졌다.가희는 몸을 웅크린 채 두 팔로 배를 감쌌다. 온몸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몰려왔지만 머릿속에는 어머니 장미애가 조금 전 뱉은 말만 맴돌았다.‘아비도 모르는 애...’‘친엄마라면 정말 자기 딸에게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원우는 바닥에서 얻어맞는 가희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다 묘한 기분을 느꼈다.가희가 얌전히 뱃속 아이만 없앴다면, 3년 부부로 산 정을 봐서 법적인 아내 자리는 줄 수 없어도 밖에서 생활비를 대주며 살게 해 줄 생각 정도는 있었다.하지만 가희가 기어코 스스로 일을 키웠다고 여겼다.감히 자기 딸 나은을 건드렸으니까.원우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지금 나은이 앞에 무릎 꿇고 사과하면 오늘은 여기서 끝내 줄게.”가희의 입가로 피가 가느다랗게 흘렀다.비웃음과 고집이 섞인 눈으로 원우를 올려다봤다.“싫다면요? 부 대표님이 저를 죽이기라도 하게요?”원우는 가희의 눈을 보고 멈칫했다. 언제나 말 잘 듣고 얌전한 여자라고 생각했다.그런 가희에게서 이렇게 서늘한 증오와 모든 걸 건 사람의 용기가 드러날 줄은 몰랐다.독 묻은 바늘 같은 눈빛이 이상하게 가슴을 찔렀다.“죽여?”원우가 화가 극에 달해 웃었다.“그런 말로 날 협박할 수 있을 것 같아? 너도 너무 순진하네. 널 망가뜨릴 방법이 얼마나 많은데...”“아빠, 나은이 아파!”원우 품에 있던 나은이 불편한 듯 몸을 뒤틀었다.아이의 팔이 원우 목을 꽉 감았고, 울음 때문에 작은 얼굴이 새빨개졌다.언제 다가왔는지 정희가 나은의 등을 쓰다듬으며 다급하게 말했다.“우리 나은이 어디 다친 거 아니야?”“나은아, 괜찮아. 아빠가 병원 데려갈게.”원우는 가희에게 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나은을 안고 연회장을 빠르게 나갔다.이런 소동이 벌어진
Read more

제6화

강하게 나가도 통하지 않자 정희는 태도를 바꿨다.한숨을 쉬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저랑 가희는 친자매예요. 예전부터 가희는 남자 문제로 조심성이 없었어요. 지금은 결혼한 상태인데도 밖에서 다른 남자를 만나 임신까지 했고요. 뱃속 아이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른다니까요.”가희가 정희를 바라봤다. 목소리에는 서늘한 비웃음이 실렸다.“남정희, 그런 말 하고 양심 안 찔려?”친언니라는 사람이 모르는 남자 앞에서 동생의 사생활에 관한 거짓말을 거리낌없이 퍼뜨리고 있었다.정희가 차갑게 웃었다.“내가 틀린 말 했어? 네 뱃속 아이가 밖에서 만난 남자의 애가 아닌 건 아니잖아.”가희의 안색이 더 하얘졌다. 내려간 속눈썹이 떨렸다.그때 주환의 무심한 목소리가 들렸다.“그래서요?”정희가 눈을 크게 뜨고 주환을 봤다.“네? 신경 안 쓰세요?”정희는 주환이 가희와 특별한 관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주환이 미간을 좁혔다.“제가 왜 그걸 신경 써야 합니까?”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을 상대하는 게 귀찮다는 표정이었다.정희는 이를 악물었다.“뭐 해! 남가희 데려와. 여기서 못 나가게 해!”경호원들에게 명령했다.주환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차가운 눈에 약간의 흥미가 비쳤다.“내 앞에서 이런 식으로 나오는 사람은 처음이네.”“윤주환... 교수님?”그때 옆에서 놀란 목소리가 들렸다.TY그룹과 거래하는 회사의 대표 이종수였다. 일이 생겨 다른 손님들보다 늦게까지 호텔에 남아 있던 사람이었다.이종수는 주환을 보자 말까지 더듬었다.과거 경울시로 출장을 갔을 때였다.정부청사 근처를 지나던 중, 멀리서 주환이 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당시 주환은 군더더기 없는 짙은 정장을 입고 가슴에는 공식 행사 배지를 달고 있었다.위엄 있는 어르신을 부축하며 여러 수행원과 함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이종수는 궁금해서 동행자에게 누군지 물었다.그때야 알았다.그 남자가 경울시 최상위 명문가 중 하나인 윤씨 집안의 둘째, 윤주환이라는 것을.윤
Read more

제7화

아르덴 힐스는 주환이 해명시에 머물 때 사용하는 저택이었다.검은색 대형 세단이 밤길을 조용히 달렸다.넓은 차 안에는 가죽 냄새와 옅은 시더우드 향이 섞여 있었다.가희는 뒷좌석에 얌전히 누워 있었다.머리 아래에는 부드러운 쿠션이 받쳐졌고, 몸은 여전히 주환의 큰 정장 재킷에 단단히 감싸여 있었다.주환은 바로 옆에 앉아 가희의 얼굴을 바라봤다.어두운 실내등 아래에서도 가희의 미간은 의식을 잃은 채 단단히 찌푸려져 있었다.큰 고통을 참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주환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이마에 붙은 젖은 머리카락을 치워 주려던 손가락이 차가운 피부에 닿기 직전 멈췄다.‘내가 지금 뭘 하는 거지?’주환은 손을 거뒀다. 미간이 더 깊어졌다.자기 행동이 뜻대로 통제되지 않는 느낌이 마음에 썩 들지 않았다.“미워... 다 미워...”의식을 잃은 가희가 흐릿한 잠꼬대를 했다.몸을 불안하게 움직이다 상처가 당겼는지 낮게 앓는 소리를 냈다.눈꼬리에 맺힌 눈물 한 방울이 창백한 볼을 타고 흘렀다.가희의 안색이 점점 더 하얘지는 걸 본 주환이 앞좌석 수행비서에게 말했다.“신재현 원장한테 산부인과와 외과 장비 챙겨서 아르덴 힐스로 오라고 해.”“네.”차는 산 중턱에 조성된 아르덴 힐스 단지로 조용히 들어갔다.울창한 숲 사이에 자리 잡은 저택 앞에서 멈췄다.불이 환하게 켜진 저택은 어둠 속에 웅크린 거대한 짐승처럼 고요했다.주환은 다시 가희를 안아 들고 안으로 향했다.해명시에서 가장 권위 있는 프라이빗 병원인 라비엔 메디컬센터의 원장 신재현은 이미 장비와 의료진을 데리고 저택 앞에 도착해 있었다.친구인 주환이 산모를 직접 안고 오는 모습을 보고 재현은 눈을 크게 떴다.하지만 바로 의사로서 긴장된 표정으로 바뀌었다.“장비부터 빨리 세팅해! 산모랑 아기 둘 다 무사하게 지켜야지!”주환의 표정이 황당하게 굳었다.그러나 품 안에 있는 가희의 체온이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재현의 오해를 풀 여유 따위는 없었다.곧바로 응급 처치가 시작됐
Read more

제8화

SNS에 글을 올리자마자 지아에게서 톡 영상통화가 걸려 왔다.가희는 화면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고 바로 통화를 끊었다.안색은 초췌했고 아직 정상적인 호흡을 위한 산소줄까지 달고 있었다.이 모습을 보면 지아가 더 걱정할 게 뻔했다.[지금은 영상통화 못 받아. 무슨 일이야?][야, 너 대체 어디야??? 오늘 병원 갔더니 간호사가 퇴원했다고 하잖아. 설마 또 그 쓰레기 남편의 집으로 돌아간 거야?]가희가 의아하게 미간을 좁혔다. 손민식에게 끌려가기 전에 분명 지아에게 구조 요청 문자를 보냈다고 생각했다.가희는 문자 화면을 다시 열었다.맨 위에 있는 메시지의 수신인을 확인한 뒤 머릿속이 하얘졌다.수신인은... 주환이었다.가희는 열이 머리끝까지 확 올라오는 기분이었다.창백하던 볼이 부끄러움과 수치심에 붉어졌다.가희는 주환이 호텔에 나타난 게 완전히 우연이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자기가 직접 구조 요청을 보냈던 거라면 이야기가 달랐다.교수님에게 진 빚이 생각보다 훨씬 컸다.아까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했을 때 주환이 바로 답하지 않았던 이유도 이제야 이해됐다.이렇게 큰 은혜를 받아 놓고 밥 한 끼로 끝내려고 했다니.‘남가희, 진짜 양심 없었네.’가희는 톡으로 지아에게 무사하다고만 알렸다.현재 주환의 집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자기 평판은 이미 엉망이 됐다.괜히 주환까지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물론 그때 호텔에서 있었던 일로 주환의 평판에도 적지 않은 타격을 준 것 같기는 했다.“이젠 나도 몰라!”가희가 이를 악물었다.‘부원우한테 내 몫 받아 내면 교수님한테 정신적 피해 보상이라도 넉넉히 드리면 되지.’그렇게 자기합리화를 하고 나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그 뒤로 검사와 처치, 약 교체는 전부 간호사들이 담당했다.주환은 다시 가희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가희는 몇 번이나 물어보고 싶었지만 괜히 민망해 입을 열지 못했다.그렇게 일주일이 흘렀다.가희의 몸은 빠르게 회복됐다.이제 혼자 침대에서 내려와 걸을 수도 있
Read more

제9화

가희는 원래 깔끔한 성격이었다.며칠 전 몸을 일으키지 못할 때도 매일 물수건으로 몸을 닦아야 마음이 편했다.집주인이 없다고 인사도 없이 나가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일단 방으로 돌아와 샤워부터 했다.방 안에 다른 사람이 없었기에 속옷을 갖춰 입지 않고 얇은 홈웨어만 걸친 채 욕실에서 나왔다.임신 후기에 들어선 뒤 가희는 가슴이 자주 붓고 아팠다.속옷도 편한 제품만 겨우 입을 수 있었다.이번 일은 너무 갑작스러웠다.간호사들이 갈아입을 옷까지 챙겨주기는 했지만 속옷만큼은 계속 불편했다.그렇다고 일일이 새로 사 달라고 부탁하는 것도 미안해 참고 있었다.압박에서 벗어나자 몸도 마음도 한결 편해졌다.가희는 수건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닦으며 욕실 밖으로 걸어 나왔다.걸음을 옮길 때마다 얇은 옷 아래 풍만해진 가슴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그때 누군가의 뜨거운 시선이 자기 몸 위에 머무는 느낌이 들었다.가희가 고개를 들었다.주환의 깊은 눈과 정면으로 마주쳤다.“교... 교수님!”가희의 얼굴이 귀까지 빨개졌다.반사적으로 욕실 안으로 돌아가려다가 너무 급하게 움직인 탓에 발이 미끄러졌다.몸이 뒤로 넘어갔다.허리에 단단한 팔이 감겼다.가희의 몸은 그대로 따뜻하고 단단한 품 안으로 부딪쳤다.부드러운 가슴이 주환의 몸에 눌리며 민망할 정도로 형태가 드러났다.“왜 피해요?”머리 위에서 낮고 깊은 목소리가 들렸다.가희는 얼굴이 타들어 갈 것 같았다.이마를 주환의 가슴에 박다시피 한 채 도저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피한 거 아니에요. 그냥... 제가 교수님께 좀 실례한 것 같아서요.”“뭐가 실례라는 겁니까?”“저... 속옷을 안 입어서요...”말하고 나자 어디 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었다.민망해서 그대로 사라지고 싶은 기분이었다.굳이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하지만 남의 집에서 이런 차림으로 돌아다닌 걸 제대로 설명하지 않으면 오히려 더 이상한 오해를 살 것 같았다.고민 끝에 솔직하게 말한 것이다.공기가 잠깐 멎은 듯 조용해졌다.
Read more

제10화

그 말에 가희는 완전히 굳어 버렸다.다시 어색한 침묵이 이어질 것 같던 때, 주환이 손목시계를 확인했다.“옷 갈아입어요. 감기 걸리면 안 됩니다. 저는 병원 진료가 있어서 이제 나가 봐야 합니다.”주환은 문 쪽으로 걸어갔다.그러다 발을 멈추고 가희를 돌아봤다.말투에는 평소보다 조금 강한 기색이 섞여 있었다.“다녀와서 할 말이 있으니까 제가 돌아오기 전에는 여기서 나가지 말고 기다려요.”문이 닫혔다.가희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욕실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진짜 창피해 죽겠어!”문밖에서 주환은 바로 떠나지 않았다.방 안에서 들려오는 가희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입가에 알아보기 힘들 만큼 옅은 웃음이 걸렸다.‘결혼한 여자라고 하기엔 너무 순진한데.’...방 안.이번에 가희는 욕실에서 나온 뒤 제대로 옷을 갖춰 입었다.편하다는 이유로 속옷을 생략하는 일은 두 번 다시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소파에 앉아 한참을 진정하고서야 얼굴의 열기가 조금 내려갔다.그때 지아에게서 전화가 왔다.“지아야, 무슨 일이야?”[이 답답한 인간아! 원우가 자기 혼외자 생일 파티에서 그렇게 너에게 망신 줬다며? 왜 나한테 한마디도 안 했어!]지아의 목소리는 다급하면서도 화가 잔뜩 나 있었다.원우가 관련 소식을 철저하게 막아 둔 탓에, 업계 지인이 몰래 알려 주지 않았다면 지아도 끝까지 모르고 지나갈 뻔했다.가희는 씁쓸하게 웃었다.“걱정 마. 나도 마냥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어. 저쪽도 얻은 건 별로 없어.”[안 돼. 그래도 못 믿겠어. 그 배로 자꾸 돌아다니면 어떡해. 지금 어디야? 내가 바로 갈게.]전화기 너머에서 자동차 시동이 걸리는 소리가 들렸다.가희는 어쩔 수 없이 사실대로 말했다.“내 산전 진료 담당하는 산부인과 의사 집에 있어.”[뭐?]지아가 당황했다.[어느 병원이 환자를 의사 집까지 데려가서 돌봐 줘? 설마 장기 떼 가는 이상한 불법 병원 아니지? 안 되겠다. 내가 직접 가 봐야 마음 놓이겠어. 얼른 주소 보내!]가희가
Read more
PREV
123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