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2화

Author: 꽃잎소녀
“나은이는 아빠랑 엄마가 같이 살았으면 좋겠어!”

나은이 원우의 다리에 매달렸다.

딸의 달콤한 목소리에 원우의 마음이 금세 풀렸다.

조금 전까지 남아 있던 망설임도 깨끗이 사라졌다.

원우는 한 팔로 나은을 안아 들고, 다른 팔로 정희의 어깨를 감쌌다.

“너도 너무 착해서 문제야. 이번에 돌아가면 나은이 생일 파티에서 둘 다 공식적으로 소개할 거야.”

정희는 원우에게 몸을 기대며 눈 깊숙이 만족스러운 기색을 감췄다. 겉으로는 걱정스러운 척 물었다.

“그럼 가희 뱃속에 있는 아이는?”

원우의 입가에 비웃음이 번졌다.

“걔가 나한테 얼마나 집착하는데. 다른 남자 아이를 뱃속에 두고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지금쯤이면 이미 없앴겠지.”

가희가 그런 치욕을 견딜 수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남의 아이를 끝까지 낳을 배짱도 없다고 믿었다.

...

가희가 눈을 떴을 때는 중환자실로 옮겨진 뒤였다.

본능적으로 배부터 내려다봤다.

배가 여전히 둥글게 부풀어 있는 걸 확인하자 가슴을 짓누르던 불안이 조금 가라앉았다.

‘아이... 아직 살아있어.’

그때 간호사 두 명이 병실로 들어왔다.

작게 나누는 대화에는 감탄이 가득했다.

“윤주환 교수님 진짜 대단하지 않아? 남가희 산모님 상태가 그렇게 위험했는데 산모님이랑 아기 둘 다 살렸잖아.”

“윤주환 교수님은 업계에서도 손꼽히는 분이잖아. 그 산모님도 운이 좋았지...”

“쉿, 교수님 회진 오신다.”

대화가 뚝 끊겼다.

주환은 연배가 있는 의사 몇 명과 함께 병실에 들어왔다.

주변을 압도하는 분위기 때문인지 다른 의료진은 자연스럽게 주환의 뒤에 섰다.

가희의 몸에는 여러 모니터 선이 연결돼 있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가슴과 배 곳곳에서 잔잔한 통증이 번졌다.

가희가 눈을 들었다가 주환의 차분하고 서늘한 눈과 마주쳤다.

가희는 눈을 몇 번 깜빡이며 도움을 청하듯 바라봤다.

주환은 가희를 한 번 본 뒤 뒤쪽 의료진에게 말했다.

“환자분은 수술 후 이제 막 깨어났습니다. 안정이 필요하니 다들 나가 주세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여럿이 한꺼번에 들어왔던 의료진은 말없이 병실을 빠져나갔고, 문까지 닫아 줬다.

“말해 보세요. 무슨 일입니까?”

주환이 셔츠 목 부분을 가볍게 정리했다.

말투는 여전히 담담했다.

가희는 목이 너무 아파 말하기 힘들었다.

침대 옆 핸드폰을 집어 글자를 입력한 뒤 주환에게 내밀었다.

[교수님, 제가 아이 낳을 수 있게 도와주세요.]

주환이 화면을 보더니 미묘하게 눈썹을 올렸다.

“저를 고용하겠다는 겁니까?”

마스크를 쓰고 있어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에는 희미한 비꼼이 묻어 있었다.

가희는 다급히 다시 입력했다.

[아니에요! 부탁드리는 거예요. 제발 이 아이를 낳을 수 있게 도와주세요. 아이만 무사히 낳을 수 있다면 제가 할 수 있는 건 뭐든 할게요.]

“저한테 빌 필요 없습니다. 의사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니까요.”

주환의 날카로운 시선이 가희에게 머물렀다.

“물론 진료비를 정상적으로 낸다는 전제에서요.”

속사정을 들킨 것 같아 가희의 볼이 붉어졌다.

맞았다.

지금 가희에게는 돈이 거의 없었다.

원우는 엄청난 자산가였지만, 가희에게 돈을 쥐여 주는 일은 없었다.

원우는 늘 말했다.

“먹고 입고 사는 건 집에서 다 해결되는데 네가 돈이 왜 필요해?”

그래서 지금 이혼한다 해도, 원우 성격이라면 가희를 빈손으로 내보낼 게 뻔했다.

‘싫어.’

‘왜 내가 그래야 해?’

그녀는 3년 동안 원우의 식사부터 옷, 집안일까지 챙기느라 학업과 커리어를 포기했다.

그런데 끝에 남는 게 상처뿐이라니.

이혼하더라도 자기 몫은 반드시 돌려받을 생각이었다.

“병원비는 반드시 갚을게요.”

가희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연약해 보이는 몸과 달리 눈빛은 고집스럽게 단단했다.

주환의 눈이 조금 가라앉았다.

문득 7개월 전, 누군가에게 약을 먹은 뒤 자신의 방으로 들어왔던 여자가 떠올랐다.

처음인 게 분명할 만큼 힘들어하면서도 이를 악물고 소리 한 번 제대로 내지 않던 여자였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사람을 시켜 찾아보기도 했지만, 여자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지금까지 찾지 못했다.

주환은 목깃을 가볍게 당겼다.

가희의 핸드폰을 받아 무언가를 입력했다.

다시 돌려받은 화면에는 새로운 전화번호 하나가 저장돼 있었다.

[저 바쁩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주환이 나가고 병실에 혼자 남자 가희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어릴 때 가희는 조금만 잘못해도 부모에게 집 밖으로 쫓겨나곤 했다.

추운 날에도 예외가 없었다.

그 탓에 몸이 크게 상했고, 예전부터 의사들은 임신을 유지하기 쉽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원우는 바로 그 점까지 계산했을 것이다.

가희를 모욕하면서도 실제로 남의 아이가 태어나는 꼴은 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겠지.

원우는 가희를 사랑하지 않아도,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도록 내버려둘 성격은 아니었다.

모든 일이 자기 손바닥 안에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나를 다른 남자와 엮을 수 있을 만큼 철저히 계산했잖아.’

‘그럼 이 아이가 태어났을 때도 지금처럼 웃을 수 있는지 보자, 부원우.’

중환자실에서 이틀을 더 보낸 뒤 셋째 날 일반 병실로 옮겼다.

가희가 겨우 침대에서 내려와 걸을 수 있게 됐을 무렵 핸드폰이 울렸다.

화면에는 ‘언니’라고 떠 있었다.

가희는 숨을 길게 들이마신 뒤 통화 버튼을 눌렀다.

[가희야, 언니가 메시지를 얼마나 많이 보냈는데 왜 답이 없어?]

남정희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다시 그 목소리를 듣자 핸드폰을 쥔 손이 떨렸다.

‘언니...’

어릴 때부터 가장 믿었고, 가장 의지했던 언니.

그런 언니가 끝내 가희를 가장 잔인하게 깊숙한 곳에서 찔렀다.

전화기 너머에서 정희가 한숨을 쉬었다.

[내가 일부러 원우를 뺏으려고 한 건 아니야. 부모님이 내가 외국에서 혼자 지내는 걸 걱정하셨고, 원우도 계속 나를 찾으니까 위치를 알려 주신 거야. 가희야, 네가 싫다면 언니가 원우가 돌려줄게.]

목소리에 울먹임까지 섞였다.

[사흘 뒤가 나은이 생일이야. 벨로아호텔에서 하기로 했어. 언니가 직접 만나서 다 설명할게. 와 줄 수 있지?]

가희는 속에서 들끓는 감정을 억누르고 차갑게 답했다.

“나 지금 병원에 있어. 참석 못 해.”

[핸드폰 줘.]

곧이어 부원우의 낮고 냉랭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은이 생일에 부르는 건 내가 너한테 최소한의 체면을 세워주는 거야. 좋게 말할 때 와.]

그 말이 묵직한 돌처럼 가슴을 짓눌렀다.

숨쉬기조차 아플 정도였다.

가희는 헛웃음을 흘렸다.

“남편이 바람피워 낳은 아이 생일 파티에 아내를 부르겠다고? 대체 누가 더 뻔뻔한 건데?”

[그래서?]

원우가 비웃었다.

[네 몸으로는 어차피 아이 못 지켜. 이제 나은이 내 유일한 자식이야.]

가희의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알고 있었구나.’

원우는 가희가 임신한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 가희가 남의 아이를 지키려고 필사적으로 버티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본 것이다.

마음속에 남아 있던 마지막 미련마저 끊어졌다.

가희는 화가 끝까지 치민 탓에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내가 아이를 못 지킬 거라는 건 어떻게 알았어?”

전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가희는 목소리를 낮췄다.

“내 뱃속 아이는 법적으로 당신과 혼인 중에 생긴 아이야.”

입가에 조소가 번졌다.

“아니면 TY그룹 대표님께서는 직접 아내를 다른 남자 침대에 보냈다고 사람들 앞에서 인정할 자신이라도 있나?”

말을 끝낸 가희는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

한편, 원우는 통화가 끊어진 화면을 노려보다 핸드폰을 바닥에 내던졌다.

기기가 산산이 부서졌다.

“걔가 아이를 안 지웠다고?”

‘이미 자기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는데도...’

‘애초에 임신을 유지하기 힘든 몸이라는 것도 알고 있는데도...’

‘왜 없애지 않은 거지?’

정희는 원우의 격한 반응에 움찔했지만 금세 정신을 차렸다.

다가가 가엾은 표정으로 원우의 소매를 잡았다.

“가희가 일부러 네 관심을 끌려고 그러는 걸 거야. 네가 신경 써 주길 바라니까.”

원우의 분노가 조금씩 가라앉았다. 차갑게 웃었다.

“다른 남자 아이까지 품고 있으면서 나를 협박해? 내가 너무 봐줬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미련 없는 아내의 퇴장법   제30화

    가희의 온몸이 단단하게 긴장했다.아이 아버지가 없어도 괜찮다고 마음먹은 것과, 그 일을 다른 사람과 아무렇지 않게 공유할 수 있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주환은 가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차린 듯 먼저 말했다.“긴장하지 마세요. 남가희 씨한테 사람 하나만 보여주려는 겁니다.”가희는 그대로 자리에 남았다.그래도 몸에 들어간 긴장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CCTV 시각은 밤 9시가 조금 넘은 때였다.호텔 복도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몇 분 뒤 익숙한 남자가 화면에 나타났다.가희 맞은편 쪽에 있는 1811호로 들어갔다.가희의 미간이 좁아졌다.‘시아버지가 그날 밤 왜 이 호텔에 왔지?’화면 속 사람은 부병철이었다.하지만 주환이 보여주려는 내용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영상은 계속 재생됐다.몇 분 뒤 온몸을 꽁꽁 가린 또 다른 사람이 복도에 나타났다.그 사람 역시 1811호로 들어갔다.가희의 몸이 굳었다.믿기지 않는 눈으로 화면을 바라봤다.모자와 옷으로 모습을 가렸지만 가희는 알아볼 수 있었다.20년 넘게 한집에서 지낸 사람이다.모습을 아무리 바꿔도 못 알아볼 리 없었다.정희였다.그제야 주환이 CCTV 영상을 멈췄다.천천히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남가희 씨를 일부러 조사하려고 한 건 아닙니다. 다른 일을 확인하다 우연히 발견했습니다.”주환이 화면을 가볍게 가리켰다.“제가 알기로 저 두 사람 중 한 명은 남가희 씨 시아버지고, 다른 한 명은 언니 맞죠?”사실 주환은 가희와 알고 지낸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이미 그녀의 신상을 거의 전부 파악해 둔 상태였다.그렇지 않았다면 법적으로 남편이 있는 여자를 자기 집에서 안심하고 지내게 할 리도 없었다.가희는 오늘 부씨 집안 본가에서 부병철이 정희를 대하던 태도를 떠올렸다.이제야 여러 조각이 맞아떨어지는 느낌이었다.‘부원우가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그렇게 애지중지하는 여자가 자기 아버지와 내연의 관계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가희의

  • 미련 없는 아내의 퇴장법   제29화

    남영수가 차갑게 말했다.“내가 가희를 입양한 건 나중에 우리 집안 사업에 혼인 카드로 써서 도움이 되게 하려고 한 거야. 그런데 그 둘을 엮어 준 건 너희잖아. 이제 와서 누구를 탓해?”“그때는 어쩔 수 없었잖아.”장미애가 남편을 노려봤다.하지만 목소리에는 확신이 없었다.당시 정희에게 그 일이 생기지만 않았어도 그런 방법까지 생각해 낼 이유는 없었다.정희가 다급하게 말했다.“엄마, 방법 좀 생각해 봐요.”정희는 식탁에서 가희 뱃속 아이가 원우의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공개하려 했다.하지만 원우가 막고 난 뒤 다시 생각해 보니 오히려 말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부씨 집안이 혈연 문제를 의심하기 시작하면 언젠가는 나은에게까지 검사를 요구할 수 있었다.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가희 뱃속의 아이에 대한 진실은 함부로 꺼낼 수 없었다.장미애가 미간을 좁혔다.“저 뱃속 아이가 벌써 8개월 가까이 됐어. 지금 사고가 나도 아이는 살아날 가능성이 있어. 그러니까...”눈에 독한 기색이 스쳤다.목소리를 아주 낮췄다.“사고가 난 뒤 바로 살리지 못하게 시간을 끌면 돼. 살아날 가능성이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정희의 눈이 빛났다.“엄마, 방법 있어요?”장미애가 정희 귀 가까이 얼굴을 가져가 낮게 속삭였다.조금 전까지 거칠던 정희의 표정은 금세 흥분과 기대감으로 바뀌었다....가희는 오는 길에 예약 전송해 둔 문자를 삭제했다.아르덴 힐스에 돌아온 때는 밤 9시가 넘어서였다.집 안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문을 열자 홈웨어 차림의 주환이 식탁에 앉아 컴퓨터로 일을 하고 있었다.화면 빛이 반듯한 얼굴 위에 비쳐 평소보다 더 또렷하고 잘생겨 보였다.가희는 남자를 볼 때 외모를 꽤 중시하는 편이었다.그렇지 않았다면 처음 보자마자 원우에게 그렇게 빠졌을 리도 없었다.주환을 처음 본 날에도 심장이 한 박자 빠뜨린 것처럼 느껴졌던 건 인정해야 했다.아마 이 얼굴을 보고 아무 감정도 들지 않을 여자는 많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왔어요?”

  • 미련 없는 아내의 퇴장법   제28화

    “가희야, 너도 참 철이 없다. 부부 사이 일은 둘이 해결하면 되지 왜 시어머니까지 걱정시키니?”장미애는 속으로 딸을 실컷 욕하고 있었다. 하필 지금 돈 이야기를 꺼냈다.자기 귀한 큰딸 주머니에서 돈을 빼앗아 가희에게 주라고 만든 꼴이었다.가희는 소명혜가 잡고 있던 손을 천천히 빼냈다.“다 제 잘못이에요. 저 때문에 다들 난처해졌네요. 아이의 운명은... 그냥 하늘에 맡길게요.”“왜 그렇게 재수 없는 소리를 해!”소명혜는 자기 아들을 잘 알았다.가족카드가 정희 손에 있다는 걸 바로 짐작했다.정희를 직접 바라봤다. 목소리에는 불만이 섞였다.“앞으로 볼 날이 많잖니. 어른 난처하게 만들지는 말자.”여기까지 말했는데 정희가 더 숨길 수는 없었다. 속으로 끓어오르는 화를 참고 가방에서 원우의 가족카드를 꺼냈다.가사도우미가 곧바로 카드를 받아 가희에게 전달했다.가희는 결혼한 3년 동안 단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는 카드를 내려다봤다.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사랑을 얻을 수 없는 결혼이라면 돈이라도 제대로 챙겨야지.’끝까지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나오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었다.가희는 진심으로 원우를 사랑했지만, 이제는 끝까지 이기적으로 자기 몫을 챙길 생각이었다.그날 식사 자리는 끝까지 편하지 않았다.식사를 마친 뒤 소명혜는 남씨 집안 사람들과 정희의 표정은 신경도 쓰지 않고 원우에게 가희를 데려다주라고 했다.“가희는 배가 저렇게 불러서 혼자 다니기 힘들잖아. 원우야, 네가 차로 데려다줘.”정희가 어떻게 돌아갈지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원우는 집안의 장남이었고 부모의 말에 매우 순종하는 편이었다.가희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그래서 예전에는 소명혜와 부병철 마음을 얻으려고 그렇게 애썼다.이제 대상이 정희로 바뀌어도 결과는 똑같았다.가희는 거절하지 않았다.집을 나서기 전 정희의 새파랗게 굳은 표정과 친정 부모의 원망스러운 눈을 봤다.통쾌하기보다는 묘한 허탈함이 남았다.가희는 뒷좌석에 앉았다.조수석에는 새 명품 가방 하

  • 미련 없는 아내의 퇴장법   제27화

    가희는 은주를 향해 입술만 살짝 올려 웃었다.다시 사람들을 바라봤을 때 눈에 남아 있던 온기는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지금 다들 뭐 하시는 거예요?”가희가 먼저 말을 끊을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목소리까지 몹시 차가웠다.식탁이 조용해졌다.가희는 사람들을 한 명씩 바라보다 원우와 정희에게 시선을 멈췄다.“아직 나랑 이혼도 안 했는데 불륜 상대를 대놓고 본가에 데려와서 부모님께 인사시키는 거야? 나를 대체 뭐로 보는 건데?”소명혜가 남영수 부부를 싸늘하게 바라봤다.“아까부터 무슨 말을 그렇게 오래 하나 했더니, 자기 딸하고는 말도 안 맞춰 놓고 와서 우리 아들 아내를 바꾸자고 한 거예요? 우리 집안을 뭘로 보는 거예요?”“사부인, 화내지 마세요. 가희가 아직 마음 정리를 못 해서 그래요. 제가 잘 타이를게요...”“타일러?”소명혜가 코웃음을 쳤다.“지금 가희 뱃속에는 우리 집안 아이가 있어요. 설마 우리 손주를 밖으로 내쫓고 큰딸이 데리고 온 여자아이를 대신 들이라는 거예요?”말에는 조금의 배려도 없었다.식탁에서 가희와 은주를 제외한 사람들의 표정이 전부 변했다.하지만 소명혜는 원래부터 말이 날카로운 사람이었다.예전에는 똑같은 식으로 가희를 깎아내렸다.이번에는 그 화살이 다른 사람에게 향했을 뿐이었다.가희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곧 눈가가 붉어졌다.가희는 입술을 세게 깨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원우 씨랑 언니가 서로 좋아하는 건 알아요. 저도 둘 사이를 억지로 갈라놓고 싶지 않아요. 다만 제 뱃속 아이는...”가희는 눈을 내리깔았다. 놓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목소리를 떨었다.“아빠가 애초에 사랑하지도 않는 아이예요. 태어나 봐야 힘들기만 하겠죠. 차라리 지금 없애는 게 나을지도 몰라요.”말을 끝낸 가희는 의자를 밀고 나가려 했다.늘 여리고 말을 잘 듣던 가희가 이런 행동을 할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가희가 정말 문 쪽으로 걸어가자 소명혜가 다급해졌다.“원우야, 뭐 해! 얼른

  • 미련 없는 아내의 퇴장법   제26화

    “늦어서 죄송해요, 남정희입니다.”원우와 정희가 현관으로 들어왔다.두 사람 손에는 선물 꾸러미가 가득했다.이 시간에 온 걸 보면 누군가 방금 상황을 알려 준 모양이었다.원우는 선물을 내려놓았다.가희를 한 번 보고 시선을 아버지 부병철과 어머니 소명혜에게 옮겼다.“아버지, 어머니. R&D센터 신제품 준비 때문에 정희가 오늘도 이 시간까지 일했어요. 이 선물도 미리 준비해 둔 겁니다.”부병철이 활짝 웃으며 손짓했다.“정희가 왔구나. 얼른 원우랑 앉아서 밥부터 먹어.”가희가 왔을 때 부병철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눈길조차 제대로 주지 않았다.그런데 정희가 나타나자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굳어 있던 얼굴까지 부드럽게 풀렸다.가희는 조금 의아했다.시아버지 부병철은 예전에 조직의 중간관리자로 오래 일했던 사람이라 누구를 만나도 늘 무뚝뚝했다.가희가 처음 인사하러 왔을 때도 ‘그래’라는 말 한마디가 전부였다.대화를 나눈 문장을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였다.양가가 처음 만났을 때는 정희가 이미 해외로 떠난 뒤였다.최근에야 돌아왔다.그런데 부병철이 정희를 대하는 모습은 훨씬 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처럼 자연스러웠다.‘설마 부원우가 예전부터 남정희를 본가에 데리고 왔던 건가?’가희는 본능적으로 원우를 봤다.뜻밖에도 원우의 얼굴에도 같은 의문이 떠 있었다.자기 말이 이상하게 들렸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는지 부병철이 어색하게 웃었다.“생각해 보니까 네 언니는 너희가 학교 다닐 때 본 게 마지막이구나. 그때 같은 학교였지?”원우와 정희가 학창 시절부터 알던 사이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원우와 정희가 자리에 앉자 식탁 분위기는 더 기묘해졌다.양가 부모가 함께 식사하는 자리였다.그런데 남편은 다른 여자와 함께 선물을 들고 와 부모에게 인사를 했다.법적인 아내인 가희는 부른 배를 안고 혼자 멀찍이 떨어져 앉아 있었다.더 이상한 건 가희의 친부모조차 가희가 아니라 정희를 살갑게 챙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정희야, 나은이는

  • 미련 없는 아내의 퇴장법   제25화

    “언니, 오늘 진짜 조심해야 해요. 언니 친정 부모님 분위기가 이상해요. 뭔가 안 좋은 생각하는 것 같아요.”“알았어요.”가희는 이미 마음속으로 짐작하고 있었다. 세상 물정에 아직 익숙하지 않은 은주조차 알아차릴 정도라면 실제로 무언가 있는 게 분명했다.은주는 올해 막 대학을 졸업했다. 집에 자주 머무르지 않아서인지 부씨 집안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까다롭고 불편한 성격이 없었다.오히려 순하고 활달했다.가희가 처음 부씨 집안에 인사하러 왔던 날도 그랬다.시부모는 차가운 표정으로 앉아 있었지만 은주만 볼을 붉힌 채 몰래 작은 조각 작품 하나를 선물로 건넸다.“언니, 처음 봬서 뭘 좋아하시는지 몰라요. 이거 학교 공모전에서 상 받은 제 작품인데... 혹시 별로여도 받아 주세요.”작품은 정성스럽게 포장돼 있었고 작은 리본까지 묶여 있었다.가희는 그 조각을 지금도 침실 협탁에 올려 두고 있었다.그 뒤로 가희도 은주에게 여러 번 선물을 했고 둘은 자주 연락했다.원우와 이혼하게 되더라도 은주에게까지 차갑게 굴고 싶지는 않았다.잠시 뒤 누군가 문을 두드리며 식사하러 나오라고 했다.두 사람은 함께 손님방을 나왔다.양가 부모가 무슨 이야기를 끝낸 건지 식탁에 앉은 모습은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들 같았다.가희를 본 친정아버지가 보기 드물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먼저 불렀다.“가희야, 이리 와서 아빠 옆에 앉아.”그 말에 부병철과 소명혜도 가희를 바라봤다.소명혜의 표정이 바로 바뀌었다.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너... 배가 왜 이렇게 많이 나왔어?”가희는 태연하게 걸어갔다.은주와 함께 식탁 맨 아래쪽 두 자리에 앉았다.누구 옆에도 가까이 붙지 않았다.배를 쓰다듬으며 웃었다.“곧 8개월이에요.”소명혜는 속으로 원우를 욕했다.‘이 녀석은 가희가 임신했으면 집에 말해야지!’그러면서 겉으로는 가희에게 좀처럼 보이지 않던 웃음을 지었다.“가희야, 엄마가 네가 원우가 아이 가진 줄 진작 알았으면 당연히 우리가 가서 널 돌봤을 텐데.”가희가 웃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