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태준이 먼저 내릴 층이 가까워졌다.나는 바구니 안에 놓인 수건을 봤다.몇 장 사이에태준이 접어준 것이 섞여 있었다.어느 건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조금 덜 반듯했다.내가 수건을 보며 웃고 있는 게 보였는지태준은 궁금한 눈으로 나를 봤다.“아… 네가 접은 거 보고 있었어.”“티 나?”“조금. 그래도 잘 접은 것 같기도.”태준도 잠깐 웃었다.“그래.”엘리베이터가 멈췄다.문이 열렸다.“잘 자.”“너도.”태준이 내렸다.문이 닫히고나는 다시 수건을 내려다봤다.어제는내가 조금 더 같이 있고 싶다고 말했다.오늘은그때가 좋았다고 태준이 말했다.아직 꺼내지 않은 말은 많았다.나도 그랬고,태준도 그럴 것이다.그런데 이상하게그게 답답하지 않았다.말하지 않은 것들 사이에오늘은 이미 들은 말 하나가 있었으니까.나도 좋았어.나는 바구니 위에 놓인조금 삐뚤게 접힌 수건을 손끝으로 한번 눌렀다.반듯하게 만들지는 않았다.오늘은 이대로 두고 싶었다.말하지 않은 만큼까지억지로 채우지 않고.이미 꺼낸 마음 하나가사라지지 않을 만큼만.⸻【태준의 속마음 42】“빨래 많이 했네.”서윤이 말했다.나는 건조기 안을 한번 보고 대답했다.“미뤘어.”“며칠?”어제 분리수거장에서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그때 서윤은 내가 똑같이 묻자조금 웃으면서 말했다.그건 비밀.그래서 오늘은내가 먼저 그 말을 써보고 싶었다.“그건 비밀.”서윤이 나를 보더니 웃었다.“많이 미뤘네.”“그러니까 비밀이라고.”말을 돌려줬을 뿐인데생각보다 기분이 좋았다.어제 들었던 말이오늘도 자연스럽게 이어진 것 같아서.서윤이 웃는 것도 좋았다.그 뒤로도세탁실 안에서는 별말 아닌 이야기들이 오갔다.수건이 많다거나,건조기가 오래 걸린다거나,니트는 따로 빨아야 한다거나.예전 같았으면기억에도 남지 않았을 말들이었다.그런데 요즘은그런 말들이 더 오래 남았다.내가 수건을 접고 있을 때서윤이 한참 보고 있길래 물었다.수건을 보는 건지
내 세탁기가 멈춘 건태준이 침구를 건조기에 넣고 난 뒤였다.문을 열자젖은 빨래가 한꺼번에 아래로 처졌다.수건 몇 장을 꺼내 바구니에 넣는데생각보다 묵직했다.나는 셔츠가 엉키지 않게 하나씩 풀었다.그러다 수건 한 장이 바닥으로 떨어졌다.“아.”내가 허리를 숙이려는데태준이 먼저 주워 들었다.“내가 주워도 되는데.”“이미 주웠는데.”그 말에 웃음이 났다.“그러네.”태준이 수건을 바구니 위에 올려두었다.나는 남은 빨래를 꺼냈다.젖은 수건이 생각보다 많았다.몇 장을 건조기로 옮기는데태준이 옆에서 보고 있다가 물었다.“도와줄까?”나는 바구니 안을 한번 봤다.“응. 수건이 좀 많네.”태준이 수건 몇 장을 집어 들었다.“이쪽?”“응. 그냥 보이는 것부터 넣어.”“알았어.”나는 셔츠와 티셔츠를 옮기고,태준은 젖은 수건을 건조기 안에 넣었다.둘이 움직이니 금방 끝났다.건조기 문을 닫고버튼을 누르자빨래가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금방이네.”내가 말하자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러게.”나는 손에 묻은 물기를 털었다.혼자 했어도 됐을 일인데,같이 해서 싫지는 않았다.다시 의자에 앉자태준은 건조기 옆 벽에 가볍게 기대 섰다.조금 전보다세탁실 안이 조용해져 있었다.우리 말고 다른 사람은 없었다.건조기 두 대가 돌아가는 소리가낮게 이어졌다.나는 휴대폰을 손에 들고 있다가화면을 껐다.어제부터 하고 싶었던 말이 하나 있었다.분리수거가 다 끝난 뒤에도내가 먼저 조금 더 있다 가자고 했던 것.태준이 이유를 묻지 않고그냥 옆에 있어줬던 것.입술을 열었다가한번 닫았다.태준이 나를 봤다.“왜?”나는 손에 든 휴대폰을 내려다봤다.“어제.”“응.”말을 꺼내고 나니더 이상 미루고 싶지는 않았다.“같이 있어줘서 고마웠어.”태준은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사이에괜히 내가 먼저 말을 덧붙이고 싶어졌다.별거 아니었다거나,그냥 잠깐이었다거나.하지만 그러지 않았다.내가 먼저 같이 있고
다음 날 저녁,세탁 바구니를 들고 집을 나왔다.며칠 미뤄둔 빨래가 제법 쌓여 있었다.흰 셔츠 두 장.수건 몇 장.집에서 입는 티셔츠.그리고 검은 니트 하나.바구니를 한번 고쳐 안고세탁실이 있는 공용층으로 내려갔다.문을 열자세탁기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따뜻한 세제 냄새가 났다.안쪽에서 태준이 고개를 들었다.편한 티셔츠에 바지 차림이었다.그 앞의 건조기 한 대가 돌아가고 있었다.“빨래?”태준이 물었다.“응.”나는 바구니를 내려놓았다.“너도?”“응. 거의 다 됐어.”어제는 분리수거장이었고오늘은 세탁실이었다.같은 건물에 살다 보면이런 식으로 마주칠 수도 있었다.그런데 예전처럼그걸 우연이라는 말로 넘기고 싶지는 않았다.마주쳐서 반가웠다.그 정도는 이제내 안에서도 알아볼 수 있었다.나는 빈 세탁기 앞에 앉아빨래를 하나씩 꺼냈다.셔츠와 티셔츠,수건을 안에 넣고검은 니트는 잠깐 손에 들고 있었다.세탁 표시를 확인했다.이건 다른 것들과 같이 돌리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았다.나는 니트를 접이식 테이블 한쪽에 올려두었다.태준이 그걸 보고 물었다.“그건 따로 해?”“응. 잘못 돌리면 늘어날 것 같아서.”“아.”“한 번 늘어나면 이상해져.”“좋아하는 거야?”나는 검은 니트를 한번 봤다.“그냥 자주 입어.”“그럼 좋아하는 거네.”“그런가.”세제를 넣고세탁기를 돌렸다.물이 들어가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할 일이 끝나자갑자기 손이 비었다.나는 벽 쪽 의자에 앉았다.태준은 건조기 앞에 서서남은 시간을 확인했다.우리는 각자 휴대폰을 보다가,가끔 기계 쪽을 봤다.말이 없는 시간이생각보다 편했다.어제도 그랬다.조금만 더 같이 있다 들어가자고 해놓고막상 우리는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오늘도 비슷했다.같이 있는 데꼭 할 말이 필요한 건 아니었다.잠시 뒤 태준이 물었다.“손은 괜찮아?”나는 휴대폰에서 눈을 들었다.“손?”“어제 테이프 붙었던 데.”그제야 검지 옆을 봤다.“씻
집에 들어와가장 먼저 손을 씻었다.비누를 묻혀검지 옆을 몇 번 문지르자남아 있던 끈적임은 금방 없어졌다.물기를 닦고욕실을 나오다가 다시 손을 봤다.깨끗했다.테이프가 붙어 있었던 자리도이제는 잘 보이지 않았다.그런데 떠오른 건그 자국이 아니었다.“조금만 있다 들어갈래?”내가 했던 말이었다.분리수거는 이미 끝난 뒤였다.더 부탁할 일도,같이 해야 할 것도 없었다.그래도 나는 태준을 불렀다.몇 분만 더옆에 있었으면 했다.그 마음을 다시 떠올리는데이번에는 이상하게 피하고 싶지 않았다.그냥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었다.그걸 인정하자가슴 안쪽이 조용해졌다.나는 식탁 앞에 앉아손바닥을 펴놓았다.아무것도 없었다.어젯밤의 젤리 봉지도,오늘 붙었던 테이프도.버릴 건 다 버렸다.그런데 오늘 내가 먼저 붙잡은 몇 분은쉽게 없어질 것 같지 않았다.조금만 있다 들어갈래?나는 그 말을마음속으로 한 번 더 읽었다.오늘은 지우지 않았다.그 정도는남겨둬도 될 것 같았다.⸻【서윤의 기억 29】우리가 한창 사랑하던 때가 있었다.만나기 위해 약속을 잡고,서로의 집을 오가고,헤어질 시간이 되면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으려고괜히 시간을 끌던 때.그날도 그랬다.퇴근하고 태준의 집에 갔는데현관 앞에 택배 상자가 네 개나 쌓여 있었다.“뭘 이렇게 많이 샀어?”내가 상자 하나를 발끝으로 살짝 밀어보며 묻자태준이 커터칼을 가져왔다.“생활용품.”“생활용품을 네 박스씩 사?”“한꺼번에 시켰어.”“혼자 사는 사람이?”“두고 쓰면 되니까.”상자를 열어보니 정말 별것 없었다.세제.샴푸.휴지.생수.그중 제일 큰 상자에는휴지가 가득 들어 있었다.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이게 네가 말한 생활용품?”“맞잖아.”“틀린 말은 아닌데.”태준도 웃었다.우리는 거실 바닥에 앉아상자에서 물건을 하나씩 꺼냈다.태준은 꺼낸 것들을 안쪽으로 옮기고,나는 빈 상자를 접었다.테이프가 생각보다 질겨서손톱으로 몇 번 긁어
우리는 다시 각자 가져온 것들을 정리했다.종이와 플라스틱이각각의 통 안으로 들어갔다.내가 마지막 상자를 밀어 넣을 때쯤태준도 접은 박스를 다 버렸다.태준이 손을 털고건물 쪽으로 몸을 돌렸다.나도 종이봉투를 접어마지막으로 버렸다.이제 돌아가면 됐다.태준이 먼저 몇 걸음 걸었다.나는 뒤따라 한 걸음 움직이다가 멈췄다.“태준아.”그가 돌아봤다.“응?”입을 열어놓고잠깐 망설였다.부탁할 건 없었다.더 버릴 것도 없고,같이 들고 갈 것도 없었다.그런데 바로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다.조금 전까지 옆에 있던 사람이벌써 자기 층으로 돌아가는 게조금 아쉬웠다.“조금만 있다 들어갈래?”내가 말해놓고도잠깐 낯설었다.태준의 표정이 아주 조금 달라졌다.놀란 건지,기쁜 건지금방 지나가서 정확히는 알 수 없었다.“그래.”왜냐고 묻지 않았다.나는 먼저 건물 옆쪽으로 걸었다.태준이 따라왔다.⸻건물 옆에는 낮은 화단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우리는 화단 끝에 서서잠깐 골목 쪽을 바라봤다.퇴근 시간이 조금 지난 거리에는사람이 많지 않았다.차 한 대가 천천히 지나가고,멀리서 배달 오토바이 소리가 들렸다.“오늘 일은 어땠어?”내가 먼저 물었다.태준이 나를 봤다.“현장 갔다 왔어.”“어디?”“성수 쪽.”“멀진 않았네.”“응. 대신 오래 있었어.”“피곤하겠다.”“조금.”태준이 물었다.“너는?”“수정 하나가 계속 안 끝났어.”“끝났어?”“퇴근 직전에.”“다행이네.”“그러니까.”대화가 잠깐 멈췄다.나는 앞을 봤다.말이 끊겼는데도불편하지 않았다.굳이 다음 말을 찾아내지 않아도 됐다.그냥 같은 곳에 서 있었다.내가 그러자고 했으니까.그게 조금 신기했다.라떼를 건넬 것도 없고,우산을 같이 쓸 일도 없었다.젤리도 이미 다 먹었고,분리수거도 끝났다.그런데도 태준은 옆에 있었고,나는 먼저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바람이 한 번 지나갔다.나는 손을 가볍게 맞잡았다.아까 테이프가 붙었던 검지
퇴근해서 집에 들어오자현관 한쪽에 모아둔 재활용품이 눈에 들어왔다.택배 상자 몇 개와다 마신 생수병,배달 음식에 딸려온 작은 종이 포장들.주말에 한꺼번에 버리려고 했는데종이봉투 옆이 벌써 조금 벌어져 있었다.나는 가방을 내려놓고재활용품부터 정리했다.생수병은 한쪽으로,종이는 다른 쪽으로.상자를 눌러 접다가손바닥을 내려다봤다.어젯밤에는 이 손으로태준에게 작은 젤리 봉지를 건넸다.마지막 하나가 들어 있던 봉지.태준은 그 안의 젤리를 먹고빈 봉지를 버렸다.이제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은 봉지였다.나는 접은 상자를 종이봉투에 넣고그걸 들고 다시 집을 나섰다.⸻분리수거장에는종이 상자가 몇 개 쌓여 있었다.나는 가져온 봉투를 바닥에 내려놓고생수병부터 꺼냈다.라벨을 떼고,뚜껑을 따로 모으고,병을 플라스틱 통에 넣었다.남은 상자를 펼치려는데옆에서 종이 눌리는 소리가 났다.고개를 들었다.태준이었다.편한 티셔츠 차림으로택배 상자 두 개를 들고 있었다.“너도 버리러 왔어?”“응.”태준이 내가 펼쳐둔 상자들을 한번 보고자기 손에 든 것도 내려놓았다.“많네.”“미뤘어.”“며칠?”“그건 비밀.”태준이 작게 웃었다.“많이 미뤘네.”“그러니까 비밀이라고.”나도 조금 웃으며다시 상자 쪽으로 몸을 돌렸다.태준도 옆에서 자기 상자를 접기 시작했다.나는 남은 생수병을 버리고종이 상자를 눌렀다.두꺼운 상자 하나가 잘 접히지 않아모서리에 손가락을 걸고 힘을 줬다.그때 태준이 말했다.“서윤아.”“응?”“손에 뭐 붙었어.”나는 손을 멈췄다.“어디?”태준이 시선으로 내 오른손을 가리켰다.“검지 옆.”손을 뒤집어보니투명한 테이프 조각 하나가 붙어 있었다.아까 상자를 접다가 묻은 모양이었다.“아.”손톱으로 끝을 잡아 떼었다.테이프가 손가락 끝에서 작게 말렸다.나는 그걸 쓰레기통에 버렸다.손에는 끈적한 자국만 조금 남았다.태준은 그동안자기 상자를 마저 접고 있었다.내 손을 봤지만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