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뭐야.”
낯선 남자의 시선이 내 손끝에 닿아 있었다.
강태준의 셔츠를 움켜쥔 내 손.
그리고 바로 앞에 선 태준.
나는 그제야 내가 아직도 그를 잡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놓아야 했다.
당연히.
그런데 한 박자 늦었다.
딱 그만큼.
들키기 충분할 만큼.
나는 급하게 손을 뗐다.
“아, 아니—”
말까지 꼬였다.
젠장.
왜 하필 지금.
현관 앞에 선 남자는 우리를 번갈아 봤다.
짧게 염색한 머리.
편한 후드 차림.
손에는 휴대폰 하나.
그리고 이 집이 낯설지 않은 사람처럼 서 있는 태도.
그는 천천히 눈을 깜빡이다가 태준을 봤다.
“형.”
남자가 피식 웃었다.
“나 방해했어?”
태준의 얼굴이 바로 차가워졌다.
“…최도혁.”
“와. 이름 부르는 목소리 봐.”
도혁이라 불린 남자는 전혀 당황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오히려 재밌는 장면을 발견한 사람처럼 입꼬리를 올렸다.
“아침부터 분위기 살벌하네.”
태준이 낮게 말했다.
“왜 갑자기 와.”
“형이 어제 관리 서류 가져가라며.”
도혁은 손에 든 휴대폰을 흔들었다.
“연락 안 받길래 왔지.”
그는 말을 끝내고 나를 봤다.
이번엔 제대로.
아까보다 조금 더 길게.
“…아.”
짧은 탄성이 나왔다.
“그 전여친?”
순간 복도와 현관 사이의 공기가 딱딱하게 굳었다.
나는 표정을 굳혔다.
태준의 눈빛도 바로 내려앉았다.
“말 조심해.”
“왜. 틀린 말 했어?”
도혁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이 기분 나빴다.
사람을 모르는 척하면서,
이미 다 알고 있는 사람의 웃음이었다.
나는 한 발 뒤로 물러났다.
태준은 여전히 문턱 안쪽에 서 있었다.
신발도 벗지 않은 채.
딱 내가 허락한 만큼만 들어온 거리.
그런데 도혁이 들어오면서 그 거리까지 전부 들켜버렸다.
도혁의 시선이 현관 바닥을 훑었다.
문 앞의 쇼핑백.
태준의 신발.
내가 서 있는 위치.
태준의 셔츠 주름.
그는 아무 말 없이도 너무 많은 걸 보고 있었다.
“근데 형.”
도혁이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둘 분위기 뭐냐.”
“최도혁.”
“아니, 내가 잘못 본 거야?”
그가 나를 보았다.
“아까 거의 키스 직전 같던데.”
나는 바로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너무 빨랐다.
나도 알았다.
부정이 빠르면 빠를수록 더 이상해 보인다는 걸.
도혁이 눈썹을 살짝 올렸다.
“오.”
“그런 거 아니에요.”
나는 다시 말했다.
이번엔 조금 천천히.
“잠깐 오해할 만한 상황이었을 뿐이에요.”
“오해할 만한 상황.”
도혁이 그 말을 천천히 따라 했다.
“보통 그런 말이 제일 수상하던데.”
태준이 한 걸음 움직였다.
아주 작게.
하지만 도혁은 바로 알아챘다.
“알았어. 농담 그만할게.”
그러면서도 웃음은 완전히 지우지 않았다.
“근데 형 원래 저런 표정 안 하잖아.”
나는 나도 모르게 태준을 봤다.
그리고 바로 후회했다.
강태준은 지금 정말 낯선 얼굴을 하고 있었다.
조용했다.
목소리도 내지 않고,
크게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 조용함이 더 날카로웠다.
누군가가 조금만 더 선을 넘으면,
그때는 정말 잡아낼 사람처럼.
도혁이 말했다.
“사람 잡아먹을 것 같은 표정.”
“나가.”
태준의 목소리가 낮게 떨어졌다.
도혁은 잠깐 그를 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나 서류 가지러 왔다니까.”
“나중에.”
“형이 가져가라며.”
“나중에 오라고.”
“무섭네.”
도혁은 작게 웃었다.
그러다 갑자기 표정을 조금 누그러뜨렸다.
“형.”
태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도혁이 나를 한 번 보고,
다시 태준을 봤다.
“진짜 아직 못 잊었구나.”
그 말이 떨어진 순간,
아까보다 더 깊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태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침묵이 이상하게 대답처럼 들렸다.
나는 손끝을 말아쥐었다.
이런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내 앞에서.
제3자의 입으로.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말이 완전히 틀린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서 더 불편했다.
도혁은 이번엔 나를 보았다.
아까의 장난스러운 얼굴과 조금 달랐다.
“누나.”
“…네?”
“조심해요.”
나는 눈을 깜빡였다.
태준의 눈빛이 바로 도혁 쪽으로 향했다.
“최도혁.”
도혁은 두 손을 들었다.
“알았어. 더 말 안 해.”
그러면서도 그는 결국 한마디를 더 했다.
“형 원래 한번 마음 쓰면 오래 가는 사람이라.”
그 말은 아까보다 조용했다.
장난처럼 던진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 오래 남았다.
태준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나는 그 침묵 속에서 문고리를 쥔 손을 다시 고쳐 잡았다.
내 집인데도,
내가 서 있을 자리를 못 찾는 기분이었다.
도혁은 결국 한숨처럼 웃었다.
“나 간다. 서류는 나중에 받으러 올게.”
그가 현관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다 문을 열기 전에 다시 태준을 봤다.
“근데 형.”
태준은 그를 보지 않았다.
도혁이 말했다.
“이번엔 놓치지 마.”
문이 닫혔다.
철컥.
소리가 지나치게 크게 들렸다.
그리고 다시,
우리 둘만 남았다.
복도와 현관 사이.
문턱 안쪽.
아직 치워지지 않은 쇼핑백.
그리고 조금 전까지 내가 잡고 있던 태준의 셔츠.
나는 일부러 시선을 돌렸다.
“친한 사람이야?”
말하고 나서 바로 후회했다.
왜 물었지.
태준은 나를 보고 있었다.
“후배.”
“집 비밀번호도 알아?”
“원래는 관리실에서 쓰던 카드 가지고 있어.”
“다들 이렇게 막 들어와?”
“아니.”
“근데 왜 들어왔대.”
“내가 오라고 했었으니까.”
“그럼 네 잘못이네.”
“응.”
이번엔 너무 쉽게 인정해서 할 말이 없어졌다.
나는 쇼핑백을 들고 식탁 쪽으로 걸어갔다.
태준은 따라 들어오지 않았다.
아직 문 앞에 서 있었다.
내가 말한 문 앞까지만.
그걸 지키고 있었다.
그게 또 신경 쓰였다.
나는 쇼핑백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토스트.
샌드위치.
커피.
이제 아침을 먹을 수 있는 분위기는 전혀 아니었다.
그런데 배는 고팠다.
사람은 이런 순간에도 배가 고프다.
그게 조금 짜증 났다.
“서윤아.”
낮은 목소리.
나는 식탁 앞에서 멈췄다.
“아까.”
“말하지 마.”
“아직 아무 말 안 했어.”
“하려는 말 알아.”
“키스하려던 거.”
나는 바로 고개를 돌렸다.
“미쳤어?”
태준은 여전히 문 앞에 서 있었다.
아까보다 더 들어오지도,
나가지도 않은 채.
“그럼 아니야?”
나는 웃었다.
웃음이 너무 날카롭게 나왔다.
“착각하지 마.”
“착각이면 좋겠는데.”
“그런 분위기 아니었거든.”
“넌 방금도 바로 부정하네.”
“그럼 뭐라고 해?”
“모르겠어.”
태준이 낮게 말했다.
“나도 그 순간 네가 날 잡을 줄은 몰랐으니까.”
나는 입을 다물었다.
아까 내가 태준의 셔츠를 잡았다.
그 사실이 자꾸 손끝에 남았다.
잡힌 게 아니라,
내가 잡은 것.
붙잡힌 게 아니라,
내가 놓치지 않았던 것.
그게 제일 문제였다.
나는 물을 마시려고 주방 쪽으로 갔다.
냉장고 문을 열었다.
생수병을 꺼냈다.
차가운 물병을 쥐면 조금 나아질 줄 알았다.
손끝만 차가워졌다.
“너 왜 갑자기 이래.”
내 목소리는 생각보다 작게 나왔다.
태준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물병 뚜껑을 열었다.
“3년 동안 아무 말 없다가.”
“…….”
“그때는 한 번도 붙잡지 않았으면서.”
뚜껑을 닫는 소리가 주방에 작게 울렸다.
“이제 와서 왜 이러냐고.”
태준이 문 앞에서 천천히 나를 봤다.
“후회해서.”
단순한 대답이었다.
그래서 더 피할 데가 없었다.
나는 물병을 들고 그를 바라봤다.
“뭘.”
“너 놓친 거.”
가슴 안쪽이 이상하게 조용해졌다.
너무 큰 말을 들으면,
오히려 바로 반응이 나오지 않을 때가 있다.
나는 물을 마시지도 못하고 병만 쥐고 있었다.
태준이 말했다.
“그때 네가 끝이라고 했을 때.”
“…….”
“나는 네가 정말 끝내고 싶은 줄 알았어.”
“그럼 붙잡았어야지.”
말이 바로 튀어나왔다.
참지 못했다.
“끝내고 싶은 사람처럼 보였어도.”
나는 그를 봤다.
“한 번쯤은 물어봤어야지.”
태준의 눈이 가라앉았다.
“알아.”
“그 알아 하지 마.”
“…….”
“너는 항상 늦어.”
그 말은 4화에서 했던 말과 같았다.
그런데 이번엔 더 안쪽에서 나왔다.
태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예전 같으면 나를 미치게 했을 텐데,
오늘은 조금 달랐다.
그는 피하는 게 아니라 듣고 있었다.
나는 그걸 알아차리고 싶지 않았다.
태준이 천천히 말했다.
“그때는 네가 나 때문에 망가지는 줄 알았어.”
나는 그를 봤다.
“그래서.”
“…….”
“내가 안 붙잡으면 네가 살 수 있을 줄 알았어.”
너무 늦은 변명이었다.
그런데 완전히 거짓말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그게 더 아팠다.
나는 물병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럼 넌?”
태준의 시선이 내게 머물렀다.
“너는 괜찮았고?”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역시 그건 말 안 하네.”
“안 괜찮았어.”
이번엔 바로 왔다.
나는 멈췄다.
태준은 문 앞에 서 있었다.
나와 거리는 아직 있었다.
그런데 말은 가까웠다.
“네가 나간 뒤로.”
그는 아주 천천히 말했다.
“집에 들어가는 게 제일 싫었어.”
나는 입술을 다물었다.
“문 열면 네가 없었으니까.”
그 말은 조용했다.
크게 흔들지도 않았고,
울지도 않았고,
극적으로 말하지도 않았다.
그냥 사실처럼 말했다.
그래서 더 오래 박혔다.
나는 눈을 피했다.
“그런 말 너무 늦었어.”
“알아.”
“안다고 다 되는 거 아니야.”
“알아.”
“그 알아 진짜 싫어.”
태준은 이번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은 내가 멈추라고 한 말에 대한 대답처럼 느껴졌다.
나는 식탁 끝을 손끝으로 짚었다.
이 남자는 지금 내 말을 듣고 있다.
그게 자꾸 나를 더 헷갈리게 했다.
예전에는 듣지 않는 것 같아서 힘들었는데,
지금은 듣고 있어서 더 힘들다.
태준이 낮게 말했다.
“그래도 이번엔 안 놓칠 거야.”
나는 그를 봤다.
그 말은 후회한다는 말보다 더 위험했다.
왜냐면 강태준은 원래,
한 번 마음먹은 걸 쉽게 놓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웃기지 마.”
겨우 그렇게 말했다.
태준은 눈을 내리깔았다.
“안 웃겼는데.”
“너는 늘 네 하고 싶은 말만 해.”
“그럼 넌.”
그가 낮게 되물었다.
“왜 자꾸 도망가.”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 질문이 너무 정확한 곳에 닿아서.
“도망 안 갔어.”
“갔지.”
“…….”
“3년 전에.”
나는 손끝에 힘을 줬다.
그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정확히는 아직도 못 하겠다.
그날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내가 왜 떠났는지까지 전부 말해야 할 것 같았다.
“그 얘기 하지 마.”
나는 낮게 말했다.
태준은 잠시 조용했다.
하지만 물러나지는 않았다.
“넌 아직도 내가 널 안 붙잡았다고 생각해?”
나는 천천히 눈을 들었다.
태준의 눈빛은 이상할 만큼 차분했다.
그게 더 흔들렸다.
“아니야?”
“…….”
“그날 너 아무 말도 안 했잖아.”
“했어.”
짧은 말이었다.
나는 그대로 멈췄다.
“뭐?”
태준은 아주 천천히 말했다.
“했어.”
나는 그를 바라봤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바로 이해되지 않았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태준의 목소리가 낮게 이어졌다.
“네가 못 들었어.”
집 안이 조용해졌다.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도,
창밖 차 소리도,
순간 멀어졌다.
나는 물병을 잡은 손에 힘을 줬다.
“무슨 소리야.”
태준은 나를 보고 있었다.
그의 눈이 아주 조금 어두워졌다.
“그날.”
“…….”
“네가 문 닫고 나간 뒤에.”
나는 숨을 천천히 들이마셨다.
태준은 말했다.
“잡았어.”
그 말이 떨어졌다.
너무 늦게.
너무 조용하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3년 전 그 밤.
내가 문을 닫고 나간 뒤.
빗소리.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던 소리.
그리고 내가 듣지 못한 말.
나는 갑자기 그날의 모든 소리가 뒤섞이는 기분이 들었다.
“거짓말하지 마.”
겨우 나온 말은 그것뿐이었다.
태준은 눈을 피하지 않았다.
“거짓말 아니야.”
“그럼 왜 이제 말해.”
“말해도 네가 안 믿을 것 같아서.”
나는 웃었다.
이번엔 정말 기가 막혀서 웃었다.
“그래서 3년을 안 했어?”
태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대답이었다.
나는 물병을 내려놓았다.
손끝이 조금 떨렸다.
“너 진짜…”
말이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화가 났다.
그런데 그 아래에 다른 감정이 있었다.
억울함.
허탈함.
그리고 아주 잠깐,
내가 정말 못 들은 걸까 하는 생각.
그 생각이 제일 무서웠다.
태준이 한 걸음 다가오려 했다.
나는 바로 말했다.
“오지 마.”
그는 멈췄다.
“거기 있어.”
“응.”
“말해.”
“…….”
“그날 네가 뭘 했다는 건지.”
태준은 아주 오래 나를 봤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가지 말라고 했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문 앞에서.”
“…….”
“네가 엘리베이터 타기 전에.”
“…….”
“근데 네가 안 돌아봤어.”
그 말이 너무 아팠다.
믿고 싶지 않은데,
완전히 거짓말 같지도 않았다.
나는 그날을 떠올렸다.
비가 너무 많이 왔다.
내 귀에는 내 울음과 빗소리밖에 없었다.
뒤에서 무슨 소리가 났는지,
정말 기억나지 않았다.
나는 그냥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믿고 싶었던 걸지도 몰랐다.
그래야 떠날 수 있었으니까.
“왜.”
내 목소리가 갈라졌다.
“왜 더 크게 안 했어.”
태준은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눈을 들었다.
“왜 뛰어나오지 않았어.”
“…….”
“왜 엘리베이터 문을 잡지 않았어.”
태준의 얼굴이 조금 무너졌다.
아주 조금.
“겁났어.”
그가 말했다.
나는 숨을 멈췄다.
“네가 정말 끝내고 싶어 하는 걸까 봐.”
“…….”
“내가 잡으면, 네가 더 힘들까 봐.”
나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 말도 너무 늦었다.
다 늦었다.
그런데 늦었다고 해서,
아무 의미도 없는 건 아니었다.
그게 더 싫었다.
태준은 낮게 말했다.
“그래서 이번엔.”
“…….”
“늦더라도 말하려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만해.”
“서윤아.”
“오늘은 그만하라고.”
태준은 입을 다물었다.
나는 물병을 들고 식탁 위에 세게 내려놓았다.
크게 소리가 난 건 아니었지만,
집 안에는 충분히 크게 울렸다.
“나 출근해야 돼.”
“응.”
“너도 가.”
“응.”
“그리고.”
나는 그를 보았다.
“아침 이런 거 다시 가져오지 마.”
태준의 시선이 쇼핑백 쪽으로 갔다.
“알았어.”
“거짓말이면 진짜 화낼 거야.”
“거짓말 아니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현관 쪽으로 몸을 돌렸다.
문을 열기 전,
아주 잠깐 멈췄다.
나는 그가 또 무슨 말을 할까 봐 긴장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나갔다.
문이 닫혔다.
철컥.
집 안에는 나 혼자 남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머릿속에 태준의 말이 계속 남았다.
했어.
네가 못 들었어.
가지 말라고 했어.
나는 식탁 위의 쇼핑백을 봤다.
토스트.
샌드위치.
예전에 좋아했던 커피.
먹지 않으려고 했다.
정말로.
그런데 출근 준비를 마친 뒤,
결국 커피 뚜껑을 열었다.
아직 미지근했다.
나는 한 모금 마셨다.
맛은 그대로였다.
너무 익숙해서,
더 짜증 나는 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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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후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숨기고 싶던 마음보다
때로는 늦게 도착한 말이 더 오래 흔듭니다.
《미열주의》는 다음 화에서 이어집니다.
집에 들어와가방을 소파 위에 내려놓았다.옷을 갈아입고 냉장고를 열어봤다.계란이 있었고,며칠 전에 사둔 반찬도 조금 남아 있었다.간단하게 밥을 데우고계란 하나를 부쳤다.식탁에 앉아 몇 숟갈 먹다가문득 태준이 생각났다.뭐라도 챙겨 먹으라고는 했는데.태준도 지금쯤뭔가 먹고 있으려나.잠깐 그런 생각을 하다가나는 남은 밥을 마저 먹었다.밥을 다 먹고그릇을 싱크대에 가져다 놓았다.물을 틀고 접시를 씻고 있는데거실 쪽에서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손에 묻은 물을 털고수건에 대충 닦은 뒤 화면을 봤다.태준이었다.[저녁 먹었어.]나는 메시지를 보고 웃었다.[편의점?]답장은 금방 왔다.[아니.][그럼 뭐 먹었어?]조금 있다가사진 한 장이 도착했다.뚝배기에 담긴 순두부찌개였다.밥그릇은 이미 반쯤 비어 있었다.사진을 한동안 보다가 답장을 썼다.[제대로 먹었네.][그러는 너는?]나는 싱크대 쪽을 한번 봤다.아직 씻지 않은 프라이팬이 남아 있었다.[나도 먹었어.][뭐 먹었는데?][계란.]잠시 뒤 답장이 왔다.[그게 다야?]나는 웃었다.[밥이랑 반찬도 먹었거든.][그럼 됐네.]아까 내가 했던 말이랑 비슷해서조금 웃음이 났다.[너 지금 내 말 따라 하지.][아닌데.][맞는데.]이번에는 답장이 조금 늦었다.[들켰네.]나는 화면을 보다가작게 웃었다.별것 아닌 이야기를 몇 마디 더 나누고휴대폰을 내려놓았다.남은 설거지를 마저 하고샤워를 했다.머리를 말린 뒤 침대에 누우니하루 종일 쌓였던 피로가 그제야 느껴졌다.알람을 맞추려고 휴대폰을 들었다.태준과 나눈 대화창이 그대로 열려 있었다.마지막 메시지는내가 보낸 웃는 이모티콘이었다.화면을 끄려다가아까 엘리베이터 앞이 다시 떠올랐다.“뭐라도 챙겨 먹어.”그 말을 듣고 돌아봤던 태준.오늘은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그런데도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돌아봤다.나는 잠깐 화면을 바라보다가휴대폰을 옆에 내려놓았다.불을 끄고 눈을 감았는데도조
아침에 눈을 떴을 때어젯밤 일이 먼저 떠올랐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전,태준을 불러 세웠던 순간.태준아.그리고 그 뒤에 어렵게 꺼낸 말.나는 베개 옆에 놓인 휴대폰을 집었다.새 메시지는 없었다.화면을 끄려다가한 번 더 봤다.없네.화면을 보다가어젯밤 태준 얼굴이 잠깐 떠올랐다.나도 좋았어.그 말을 듣고조금 늦게 웃던 얼굴.문이 닫히기 직전까지그 자리에 서 있던 태준의 모습도.어젯밤에는 내가 먼저 올라와 놓고도한동안 그 얼굴이 계속 떠올랐다.그 생각까지 하고 나니괜히 웃음이 났다.나는 휴대폰을 내려놓고이불을 걷었다.그리고 다시 한 번휴대폰을 바라보다가침대에서 일어났다.세수를 하고 나와건조대 위에 펼쳐 둔 검은 니트를 만져봤다.다 말라 있었다.나는 니트를 걷어옷걸이에 걸었다.어제부터 거실 한쪽에 있던 옷이다시 옷장으로 들어갔다.나는 잠깐 옷장 안을 바라보다가문을 닫았다.거울 앞에 서서 머리를 정리하고가방을 챙겼다.⸻오전에는 휴대폰을 볼 틈이 거의 없었다.회의가 하나 길어졌고,자리로 돌아오자 바로 수정 요청이 들어왔다.한동안 모니터만 보고 있다가점심시간이 가까워져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휴대폰을 챙기려고 화면을 켰다.메시지가 몇 개 와 있었다.회사 단체방 하나,광고 두 개.알림을 지우다가태준과의 대화창이 눈에 들어왔다.마지막 메시지는 어제 그대로였다.그런데 이상하게화면보다 먼저 떠오른 건어젯밤 내가 직접 했던 말이었다.나도 좋았어.그리고 그 말을 듣던 태준의 얼굴.나는 잠깐 화면을 보다가휴대폰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밥 먹으러 안 가요?”옆자리에서 부르는 소리에고개를 들었다.“가요.”휴대폰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점심을 먹고 돌아온 뒤에는다시 일이 몰렸다.오후가 지나면서는아침부터 자꾸 눈에 들어오던 휴대폰도한동안 잊고 있었다.그러다 퇴근 직전,파일을 전송하고 의자에 등을 기대는 순간문득 생각났다.오늘은 연락이 없네.아침부터 몇 번이나
그 뒤로는잠깐 말이 없었다.어색하지는 않았다.조금 전까지 했던 얘기가그냥 우리 사이에 남아 있었다.엘리베이터가 멈췄다.태준이 먼저 내릴 층이었다.문이 열리자태준이 한 걸음 나갔다.“들어가.”“응.”태준이 돌아서려 했다.그 순간어젯밤부터 계속 남아 있던 말이 떠올랐다.생각할 틈도 없이입이 먼저 열렸다.“태준아.”태준이 멈췄다.뒤를 돌아봤다.“응?”막상 불러놓고 나니말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문이 닫히기 전까지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았다.나는 열림 버튼을 눌렀다.태준이 그걸 보고가만히 기다렸다.“그날.”“응.”“분리수거하고.”태준의 표정이 아주 조금 달라졌다.무슨 말인지 알아들은 것 같았다.나는 버튼을 누른 손에조금 힘을 줬다.“나도 좋았어.”말하고 나니생각보다 별것 아닌 문장처럼 들렸다.어젯밤에는몇 번이나 쓰고 지웠는데.태준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입술이 조금 벌어졌다가다시 닫혔다.짧게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났다.그리고 조금 늦게 말했다.“응.”나는 태준을 봤다.태준도 나를 보고 있었다.“그 말 하려고 불렀어?”“응.”이번에는 내가 먼저 대답했다.태준의 입가가아주 조금 올라갔다.“알았어.”나는 열림 버튼에서 손을 뗐다.“가.”“응.”문이 천천히 닫혔다.마지막까지태준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집에 들어오자마자거실에 있는 건조대부터 봤다.검은 니트는거의 다 말라 있었다.소매 끝을 만져봤다.아침의 축축한 느낌은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나는 니트를 조금 더 펴놓고손을 뗐다.씻고 나와 침대에 앉았다.휴대폰은 조용했다.나는 화면을 켜지 않았다.어젯밤에는입력창에 썼다가 지웠던 말이었다.[어제 나도 좋았어.]오늘은 문자로 보내지 않았다.그냥 말해버렸다.태준이 잠깐 숨을 삼키던 얼굴이뒤늦게 떠올랐다.나도 좋았어.입 밖으로 나온 말이생각보다 오래 남았다.⸻【태준의 속마음 43】문이 닫힌 뒤에도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엘리
오후 3시 17분.휴대폰 화면이 켜졌다.[강태준]하던 일을 멈추고메시지를 열었다.[니트는 다 말랐어?]검은 니트.어젯밤 손빨래를 하고건조대 위에 펼쳐둔 채 나왔다.아침에 만져봤을 때도소매 끝은 아직 조금 축축했다.[아침엔 아직 좀 축축했어.]잠시 뒤 답장이 왔다.[저녁이면 마르겠다.][아마.]나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짧은 대화였다.다시 모니터를 보려다가어젯밤 쓰다 지운 문장이 잠깐 떠올랐다.[어제 나도 좋았어.]나는 화면을 끄고다시 하던 일을 했다.⸻퇴근하고 역을 나왔을 때는이미 밖이 어두워져 있었다.비는 오지 않았지만공기가 조금 눅눅했다.나는 가방끈을 고쳐 잡고오피스텔 쪽으로 걸었다.하루 종일 앉아 있었더니어깨가 뻐근했다.횡단보도를 건너골목으로 들어섰을 때였다.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사람이 보였다.멀리서는 몰랐는데가까워지자 태준이었다.태준도 나를 봤다.“이제 와?”“응. 조금 늦었어.”우리는 자연스럽게같은 방향으로 걸었다.“어디 갔다 와?”“저녁 먹고. 집에 먹을 게 없어서.”“장 봐.”“귀찮아.”“그러다 또 편의점 가지.”태준이 웃었다.“오늘은 안 갔어.”“잘했네.”말하고 나서둘 다 잠깐 웃었다.내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그 말 이제 네 거 됐네.”“원래 내 말 아니었어?”“아닌데. 내 건데.”“언제부터?”“몰라.”그런 얘기를 하면서골목을 천천히 걸었다.별것 아닌 말들이었다.그래서 편했다.오피스텔 건물이 보일 때쯤태준이 나를 한번 봤다.“피곤해?”나는 그를 돌아봤다.“티 나?”“조금. 많이 피곤해 보이는 건 아니고.”나는 앞을 보며 걸었다.“너는 그런 거 진짜 잘 본다.”태준이 나를 한번 봤다.“사람 피곤한 거.”“얼굴 보면 보이잖아.”“나는 잘 모르겠던데.”“너는 네 얼굴을 못 보니까.”“그런가.”몇 걸음 더 갔다.그러다 문득예전 생각이 났다.“예전에도 그랬잖아. 내가 피곤한 거 먼저 알고, 기분 안 좋은 것도 알아보고
옷을 갈아입고검은 니트를 들고 욕실로 갔다.세면대에 미지근한 물을 받고세제를 조금 풀었다.니트를 물에 담갔다가손바닥으로 천천히 눌렀다.세탁기에 넣지 않은 건괜히 늘어날까 봐서였다.몇 번 헹군 뒤마른 수건 사이에 넣고 눌러 물기를 뺐다.젖은 니트는 생각보다 무거웠다.나는 거실에 작은 건조대를 펴고그 위에 니트를 평평하게 올려두었다.소매를 펴고,목 부분도 한번 만졌다.아까까지 세탁실에 놓여 있던 옷이이제 내 집 안에 있었다.별일 아닌데하루가 조금 길게 이어지는 기분이 들었다.씻고 나오다욕실에 걸린 수건이 눈에 들어왔다.태준이 접었던 수건.이미 한번 펼쳐 썼으니모양은 더 흐트러져 있었다.나는 그걸 보다가조금 웃었다.수건 하나가 뭐라고.그런데도 태준이 접던 손이 떠올랐다.모서리가 조금 안 맞던 것까지.나는 수건을 욕실에 걸어두고식탁으로 돌아왔다.휴대폰이 놓여 있었다.태준과의 대화창을 열었다.[찾았어.][다행이네.]그 아래에는 아무것도 없었다.나는 입력창을 눌렀다.한참 빈칸만 보고 있다가문장을 썼다.[어제 나도 좋았어.]손가락이 보내기 버튼 가까이 갔다가 멈췄다.문장을 다시 읽었다.틀린 말은 아니었다.오히려 너무 맞는 말이었다.그래서 쉽게 보내지 못했다.나는 화면을 그대로 둔 채잠깐 식탁에 앉아 있었다.어제 태준이 했던 말은이미 내 쪽으로 왔다.나도 좋았어.나는 그걸 들었고,오늘까지 몇 번이나 떠올렸다.내 대답은 아직내 안에만 있었다.그렇다고 없는 말은 아니었다.나는 결국 문장을 지웠다.휴대폰을 내려놓고거실 쪽을 봤다.건조대 위의 검은 니트가조용히 펼쳐져 있었다.아직 물기가 남아 있었다.내일 아침에도덜 말라 있을 것 같았다.나는 소매 끝을 한번 만져보고손을 뗐다.조금 더 두면 된다.다 마를 때까지.말도 그랬다.나도 좋았어.오늘은 보내지 않았다.그렇다고모른 척하지도 않았다.그 말은 여전히내 안에 남아 있었다.⸻【서윤의 기억 30】예전에
다음 날 아침,세수를 하고 욕실 선반에 손을 뻗었다.수건 몇 장이 쌓여 있었다.그중 하나가 덜 반듯했다.조금.손이 먼저 그쪽으로 갔다.어젯밤 태준이 접었던 수건이었다.집에 와서 다시 펴지 않고그대로 올려둔 것.나는 수건으로 얼굴의 물기를 눌러 닦았다.평소 쓰던 것과 다를 것도 없었다.그런데 어젯밤의 세탁실이잠깐 같이 떠올랐다.건조기 돌아가는 소리.따뜻한 세제 냄새.나란히 서서 수건을 접던 손.그리고,나도 좋았어.나는 수건을 얼굴에서 내렸다.태준이 그렇게 말했을 때나는 겨우 한마디 했다.응.그때는 그게 전부였다.말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나도 좋다고 말할 수 있었다.분리수거가 끝난 뒤에도조금 더 같이 있고 싶었던 것도 나였고,그 몇 분이 다음 날까지 남아 있었던 것도나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그런데 입 밖으로 나온 건응, 하나였다.지금 와서 생각하니조금 아쉬웠다.나는 수건을 다시 걸어두고가방을 챙겼다.옷장을 열었다가손이 잠깐 멈췄다.검은 니트.나는 옷장 안을 한번 더 봤다.없었다.의자 위에도,세탁 바구니 안에도 없었다.그제야 어젯밤 세탁실이 떠올랐다.셔츠와 수건을 세탁기에 넣으면서따로 빼두었던 검은 니트.접이식 테이블 한쪽.그리고 그대로 나왔다.“아.”시간을 확인했다.다시 내려가기에는 조금 애매했다.퇴근하고 찾으면 되겠지.태준이 접어준 수건은 챙겨왔으면서정작 내 옷을 두고 왔다.나는 옷장 문을 닫았다.그때 휴대폰이 울렸다.[강태준]화면을 열었다.[나 어제 세탁실에 세탁망 두고 온 것 같아서 내려왔는데.]잠시 뒤메시지가 하나 더 왔다.[검은 니트 하나 있더라.][네 거 맞지?]나는 화면을 보다가아침부터 찾던 니트를 떠올렸다.[맞아.][나도 방금 생각났어.]태준의 답장이 왔다.[챙겨둘까?]잠깐 고민하다 답했다.[아니. 그냥 둬.][퇴근하고 찾아서 집에서 빨게.][응.]거기서 대화는 끝났다.나는 휴대폰을 가방에 넣으려다가다시 한번 화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