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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들켜버린 거리, 숨길 수 없는 마음

Author: 윤미주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6-28 19:13:40

“…뭐야.”

낯선 남자의 시선이 내 손끝에 닿아 있었다.

강태준의 셔츠를 움켜쥔 내 손.

그리고 바로 앞에 선 태준.

나는 그제야 내가 아직도 그를 잡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놓아야 했다.

당연히.

그런데 한 박자 늦었다.

딱 그만큼.

들키기 충분할 만큼.

나는 급하게 손을 뗐다.

“아, 아니—”

말까지 꼬였다.

젠장.

왜 하필 지금.

현관 앞에 선 남자는 우리를 번갈아 봤다.

짧게 염색한 머리.

편한 후드 차림.

손에는 휴대폰 하나.

그리고 이 집이 낯설지 않은 사람처럼 서 있는 태도.

그는 천천히 눈을 깜빡이다가 태준을 봤다.

“형.”

남자가 피식 웃었다.

“나 방해했어?”

태준의 얼굴이 바로 차가워졌다.

“…최도혁.”

“와. 이름 부르는 목소리 봐.”

도혁이라 불린 남자는 전혀 당황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오히려 재밌는 장면을 발견한 사람처럼 입꼬리를 올렸다.

“아침부터 분위기 살벌하네.”

태준이 낮게 말했다.

“왜 갑자기 와.”

“형이 어제 관리 서류 가져가라며.”

도혁은 손에 든 휴대폰을 흔들었다.

“연락 안 받길래 왔지.”

그는 말을 끝내고 나를 봤다.

이번엔 제대로.

아까보다 조금 더 길게.

“…아.”

짧은 탄성이 나왔다.

“그 전여친?”

순간 복도와 현관 사이의 공기가 딱딱하게 굳었다.

나는 표정을 굳혔다.

태준의 눈빛도 바로 내려앉았다.

“말 조심해.”

“왜. 틀린 말 했어?”

도혁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이 기분 나빴다.

사람을 모르는 척하면서,

이미 다 알고 있는 사람의 웃음이었다.

나는 한 발 뒤로 물러났다.

태준은 여전히 문턱 안쪽에 서 있었다.

신발도 벗지 않은 채.

딱 내가 허락한 만큼만 들어온 거리.

그런데 도혁이 들어오면서 그 거리까지 전부 들켜버렸다.

도혁의 시선이 현관 바닥을 훑었다.

문 앞의 쇼핑백.

태준의 신발.

내가 서 있는 위치.

태준의 셔츠 주름.

그는 아무 말 없이도 너무 많은 걸 보고 있었다.

“근데 형.”

도혁이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둘 분위기 뭐냐.”

“최도혁.”

“아니, 내가 잘못 본 거야?”

그가 나를 보았다.

“아까 거의 키스 직전 같던데.”

나는 바로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너무 빨랐다.

나도 알았다.

부정이 빠르면 빠를수록 더 이상해 보인다는 걸.

도혁이 눈썹을 살짝 올렸다.

“오.”

“그런 거 아니에요.”

나는 다시 말했다.

이번엔 조금 천천히.

“잠깐 오해할 만한 상황이었을 뿐이에요.”

“오해할 만한 상황.”

도혁이 그 말을 천천히 따라 했다.

“보통 그런 말이 제일 수상하던데.”

태준이 한 걸음 움직였다.

아주 작게.

하지만 도혁은 바로 알아챘다.

“알았어. 농담 그만할게.”

그러면서도 웃음은 완전히 지우지 않았다.

“근데 형 원래 저런 표정 안 하잖아.”

나는 나도 모르게 태준을 봤다.

그리고 바로 후회했다.

강태준은 지금 정말 낯선 얼굴을 하고 있었다.

조용했다.

목소리도 내지 않고,

크게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 조용함이 더 날카로웠다.

누군가가 조금만 더 선을 넘으면,

그때는 정말 잡아낼 사람처럼.

도혁이 말했다.

“사람 잡아먹을 것 같은 표정.”

“나가.”

태준의 목소리가 낮게 떨어졌다.

도혁은 잠깐 그를 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나 서류 가지러 왔다니까.”

“나중에.”

“형이 가져가라며.”

“나중에 오라고.”

“무섭네.”

도혁은 작게 웃었다.

그러다 갑자기 표정을 조금 누그러뜨렸다.

“형.”

태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도혁이 나를 한 번 보고,

다시 태준을 봤다.

“진짜 아직 못 잊었구나.”

그 말이 떨어진 순간,

아까보다 더 깊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태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침묵이 이상하게 대답처럼 들렸다.

나는 손끝을 말아쥐었다.

이런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내 앞에서.

제3자의 입으로.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말이 완전히 틀린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서 더 불편했다.

도혁은 이번엔 나를 보았다.

아까의 장난스러운 얼굴과 조금 달랐다.

“누나.”

“…네?”

“조심해요.”

나는 눈을 깜빡였다.

태준의 눈빛이 바로 도혁 쪽으로 향했다.

“최도혁.”

도혁은 두 손을 들었다.

“알았어. 더 말 안 해.”

그러면서도 그는 결국 한마디를 더 했다.

“형 원래 한번 마음 쓰면 오래 가는 사람이라.”

그 말은 아까보다 조용했다.

장난처럼 던진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 오래 남았다.

태준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나는 그 침묵 속에서 문고리를 쥔 손을 다시 고쳐 잡았다.

내 집인데도,

내가 서 있을 자리를 못 찾는 기분이었다.

도혁은 결국 한숨처럼 웃었다.

“나 간다. 서류는 나중에 받으러 올게.”

그가 현관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다 문을 열기 전에 다시 태준을 봤다.

“근데 형.”

태준은 그를 보지 않았다.

도혁이 말했다.

“이번엔 놓치지 마.”

문이 닫혔다.

철컥.

소리가 지나치게 크게 들렸다.

그리고 다시,

우리 둘만 남았다.

복도와 현관 사이.

문턱 안쪽.

아직 치워지지 않은 쇼핑백.

그리고 조금 전까지 내가 잡고 있던 태준의 셔츠.

나는 일부러 시선을 돌렸다.

“친한 사람이야?”

말하고 나서 바로 후회했다.

왜 물었지.

태준은 나를 보고 있었다.

“후배.”

“집 비밀번호도 알아?”

“원래는 관리실에서 쓰던 카드 가지고 있어.”

“다들 이렇게 막 들어와?”

“아니.”

“근데 왜 들어왔대.”

“내가 오라고 했었으니까.”

“그럼 네 잘못이네.”

“응.”

이번엔 너무 쉽게 인정해서 할 말이 없어졌다.

나는 쇼핑백을 들고 식탁 쪽으로 걸어갔다.

태준은 따라 들어오지 않았다.

아직 문 앞에 서 있었다.

내가 말한 문 앞까지만.

그걸 지키고 있었다.

그게 또 신경 쓰였다.

나는 쇼핑백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토스트.

샌드위치.

커피.

이제 아침을 먹을 수 있는 분위기는 전혀 아니었다.

그런데 배는 고팠다.

사람은 이런 순간에도 배가 고프다.

그게 조금 짜증 났다.

“서윤아.”

낮은 목소리.

나는 식탁 앞에서 멈췄다.

“아까.”

“말하지 마.”

“아직 아무 말 안 했어.”

“하려는 말 알아.”

“키스하려던 거.”

나는 바로 고개를 돌렸다.

“미쳤어?”

태준은 여전히 문 앞에 서 있었다.

아까보다 더 들어오지도,

나가지도 않은 채.

“그럼 아니야?”

나는 웃었다.

웃음이 너무 날카롭게 나왔다.

“착각하지 마.”

“착각이면 좋겠는데.”

“그런 분위기 아니었거든.”

“넌 방금도 바로 부정하네.”

“그럼 뭐라고 해?”

“모르겠어.”

태준이 낮게 말했다.

“나도 그 순간 네가 날 잡을 줄은 몰랐으니까.”

나는 입을 다물었다.

아까 내가 태준의 셔츠를 잡았다.

그 사실이 자꾸 손끝에 남았다.

잡힌 게 아니라,

내가 잡은 것.

붙잡힌 게 아니라,

내가 놓치지 않았던 것.

그게 제일 문제였다.

나는 물을 마시려고 주방 쪽으로 갔다.

냉장고 문을 열었다.

생수병을 꺼냈다.

차가운 물병을 쥐면 조금 나아질 줄 알았다.

손끝만 차가워졌다.

“너 왜 갑자기 이래.”

내 목소리는 생각보다 작게 나왔다.

태준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물병 뚜껑을 열었다.

“3년 동안 아무 말 없다가.”

“…….”

“그때는 한 번도 붙잡지 않았으면서.”

뚜껑을 닫는 소리가 주방에 작게 울렸다.

“이제 와서 왜 이러냐고.”

태준이 문 앞에서 천천히 나를 봤다.

“후회해서.”

단순한 대답이었다.

그래서 더 피할 데가 없었다.

나는 물병을 들고 그를 바라봤다.

“뭘.”

“너 놓친 거.”

가슴 안쪽이 이상하게 조용해졌다.

너무 큰 말을 들으면,

오히려 바로 반응이 나오지 않을 때가 있다.

나는 물을 마시지도 못하고 병만 쥐고 있었다.

태준이 말했다.

“그때 네가 끝이라고 했을 때.”

“…….”

“나는 네가 정말 끝내고 싶은 줄 알았어.”

“그럼 붙잡았어야지.”

말이 바로 튀어나왔다.

참지 못했다.

“끝내고 싶은 사람처럼 보였어도.”

나는 그를 봤다.

“한 번쯤은 물어봤어야지.”

태준의 눈이 가라앉았다.

“알아.”

“그 알아 하지 마.”

“…….”

“너는 항상 늦어.”

그 말은 4화에서 했던 말과 같았다.

그런데 이번엔 더 안쪽에서 나왔다.

태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예전 같으면 나를 미치게 했을 텐데,

오늘은 조금 달랐다.

그는 피하는 게 아니라 듣고 있었다.

나는 그걸 알아차리고 싶지 않았다.

태준이 천천히 말했다.

“그때는 네가 나 때문에 망가지는 줄 알았어.”

나는 그를 봤다.

“그래서.”

“…….”

“내가 안 붙잡으면 네가 살 수 있을 줄 알았어.”

너무 늦은 변명이었다.

그런데 완전히 거짓말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그게 더 아팠다.

나는 물병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럼 넌?”

태준의 시선이 내게 머물렀다.

“너는 괜찮았고?”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역시 그건 말 안 하네.”

“안 괜찮았어.”

이번엔 바로 왔다.

나는 멈췄다.

태준은 문 앞에 서 있었다.

나와 거리는 아직 있었다.

그런데 말은 가까웠다.

“네가 나간 뒤로.”

그는 아주 천천히 말했다.

“집에 들어가는 게 제일 싫었어.”

나는 입술을 다물었다.

“문 열면 네가 없었으니까.”

그 말은 조용했다.

크게 흔들지도 않았고,

울지도 않았고,

극적으로 말하지도 않았다.

그냥 사실처럼 말했다.

그래서 더 오래 박혔다.

나는 눈을 피했다.

“그런 말 너무 늦었어.”

“알아.”

“안다고 다 되는 거 아니야.”

“알아.”

“그 알아 진짜 싫어.”

태준은 이번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은 내가 멈추라고 한 말에 대한 대답처럼 느껴졌다.

나는 식탁 끝을 손끝으로 짚었다.

이 남자는 지금 내 말을 듣고 있다.

그게 자꾸 나를 더 헷갈리게 했다.

예전에는 듣지 않는 것 같아서 힘들었는데,

지금은 듣고 있어서 더 힘들다.

태준이 낮게 말했다.

“그래도 이번엔 안 놓칠 거야.”

나는 그를 봤다.

그 말은 후회한다는 말보다 더 위험했다.

왜냐면 강태준은 원래,

한 번 마음먹은 걸 쉽게 놓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웃기지 마.”

겨우 그렇게 말했다.

태준은 눈을 내리깔았다.

“안 웃겼는데.”

“너는 늘 네 하고 싶은 말만 해.”

“그럼 넌.”

그가 낮게 되물었다.

“왜 자꾸 도망가.”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 질문이 너무 정확한 곳에 닿아서.

“도망 안 갔어.”

“갔지.”

“…….”

“3년 전에.”

나는 손끝에 힘을 줬다.

그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정확히는 아직도 못 하겠다.

그날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내가 왜 떠났는지까지 전부 말해야 할 것 같았다.

“그 얘기 하지 마.”

나는 낮게 말했다.

태준은 잠시 조용했다.

하지만 물러나지는 않았다.

“넌 아직도 내가 널 안 붙잡았다고 생각해?”

나는 천천히 눈을 들었다.

태준의 눈빛은 이상할 만큼 차분했다.

그게 더 흔들렸다.

“아니야?”

“…….”

“그날 너 아무 말도 안 했잖아.”

“했어.”

짧은 말이었다.

나는 그대로 멈췄다.

“뭐?”

태준은 아주 천천히 말했다.

“했어.”

나는 그를 바라봤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바로 이해되지 않았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태준의 목소리가 낮게 이어졌다.

“네가 못 들었어.”

집 안이 조용해졌다.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도,

창밖 차 소리도,

순간 멀어졌다.

나는 물병을 잡은 손에 힘을 줬다.

“무슨 소리야.”

태준은 나를 보고 있었다.

그의 눈이 아주 조금 어두워졌다.

“그날.”

“…….”

“네가 문 닫고 나간 뒤에.”

나는 숨을 천천히 들이마셨다.

태준은 말했다.

“잡았어.”

그 말이 떨어졌다.

너무 늦게.

너무 조용하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3년 전 그 밤.

내가 문을 닫고 나간 뒤.

빗소리.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던 소리.

그리고 내가 듣지 못한 말.

나는 갑자기 그날의 모든 소리가 뒤섞이는 기분이 들었다.

“거짓말하지 마.”

겨우 나온 말은 그것뿐이었다.

태준은 눈을 피하지 않았다.

“거짓말 아니야.”

“그럼 왜 이제 말해.”

“말해도 네가 안 믿을 것 같아서.”

나는 웃었다.

이번엔 정말 기가 막혀서 웃었다.

“그래서 3년을 안 했어?”

태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대답이었다.

나는 물병을 내려놓았다.

손끝이 조금 떨렸다.

“너 진짜…”

말이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화가 났다.

그런데 그 아래에 다른 감정이 있었다.

억울함.

허탈함.

그리고 아주 잠깐,

내가 정말 못 들은 걸까 하는 생각.

그 생각이 제일 무서웠다.

태준이 한 걸음 다가오려 했다.

나는 바로 말했다.

“오지 마.”

그는 멈췄다.

“거기 있어.”

“응.”

“말해.”

“…….”

“그날 네가 뭘 했다는 건지.”

태준은 아주 오래 나를 봤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가지 말라고 했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문 앞에서.”

“…….”

“네가 엘리베이터 타기 전에.”

“…….”

“근데 네가 안 돌아봤어.”

그 말이 너무 아팠다.

믿고 싶지 않은데,

완전히 거짓말 같지도 않았다.

나는 그날을 떠올렸다.

비가 너무 많이 왔다.

내 귀에는 내 울음과 빗소리밖에 없었다.

뒤에서 무슨 소리가 났는지,

정말 기억나지 않았다.

나는 그냥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믿고 싶었던 걸지도 몰랐다.

그래야 떠날 수 있었으니까.

“왜.”

내 목소리가 갈라졌다.

“왜 더 크게 안 했어.”

태준은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눈을 들었다.

“왜 뛰어나오지 않았어.”

“…….”

“왜 엘리베이터 문을 잡지 않았어.”

태준의 얼굴이 조금 무너졌다.

아주 조금.

“겁났어.”

그가 말했다.

나는 숨을 멈췄다.

“네가 정말 끝내고 싶어 하는 걸까 봐.”

“…….”

“내가 잡으면, 네가 더 힘들까 봐.”

나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 말도 너무 늦었다.

다 늦었다.

그런데 늦었다고 해서,

아무 의미도 없는 건 아니었다.

그게 더 싫었다.

태준은 낮게 말했다.

“그래서 이번엔.”

“…….”

“늦더라도 말하려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만해.”

“서윤아.”

“오늘은 그만하라고.”

태준은 입을 다물었다.

나는 물병을 들고 식탁 위에 세게 내려놓았다.

크게 소리가 난 건 아니었지만,

집 안에는 충분히 크게 울렸다.

“나 출근해야 돼.”

“응.”

“너도 가.”

“응.”

“그리고.”

나는 그를 보았다.

“아침 이런 거 다시 가져오지 마.”

태준의 시선이 쇼핑백 쪽으로 갔다.

“알았어.”

“거짓말이면 진짜 화낼 거야.”

“거짓말 아니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현관 쪽으로 몸을 돌렸다.

문을 열기 전,

아주 잠깐 멈췄다.

나는 그가 또 무슨 말을 할까 봐 긴장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나갔다.

문이 닫혔다.

철컥.

집 안에는 나 혼자 남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머릿속에 태준의 말이 계속 남았다.

했어.

네가 못 들었어.

가지 말라고 했어.

나는 식탁 위의 쇼핑백을 봤다.

토스트.

샌드위치.

예전에 좋아했던 커피.

먹지 않으려고 했다.

정말로.

그런데 출근 준비를 마친 뒤,

결국 커피 뚜껑을 열었다.

아직 미지근했다.

나는 한 모금 마셨다.

맛은 그대로였다.

너무 익숙해서,

더 짜증 나는 맛이었다.

[작가후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숨기고 싶던 마음보다

때로는 늦게 도착한 말이 더 오래 흔듭니다.

《미열주의》는 다음 화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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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열주의   255화. 달지 않은 말, 남겨진 봉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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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열주의   254화. 달지 않은 말, 남겨진 봉지 (2)

    나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대화는 거기서 끝난 것 같았다.젤리를 하나 더 먹었다.달았다.그런데 이상하게 지금 마음에 남아 있는 건포도맛보다 태준이 보낸 짧은 말들이었다.네가 골랐잖아.또 사면 돼.그래.전부 별것 없는 말이었다.나는 봉지 안에 손을 넣다가 멈췄다.휴대폰을 다시 집었다.보낼 말이 있어서 든 건 아니었다.그런데 화면을 켜자아까부터 하나 궁금했던 게 떠올랐다.젤리와는 아무 상관없는 것.나는 입력창에 문장을 썼다.[오늘은 일 어땠어?]쓰고도 바로 보내지 않았다.태준의 일이 어땠는지내가 알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오늘 어디에 있었는지,무슨 일을 했는지,몇 시에 끝났는지.그런 걸 확인할 사이도 아니었다.그런데 궁금했다.이유라고 할 만한 건 그것뿐이었다.나는 전송 버튼을 눌렀다.[오늘은 일 어땠어?]젤리 맛을 물었을 때보다답장을 기다리는 시간이 더 길게 느껴졌다.조금 뒤 화면이 켜졌다.[괜찮았어.]곧 한 줄이 더 왔다.[오후 회의가 좀 길었고.]나는 그 문장을 읽었다.태준의 오늘 오후에회의 하나가 있었다.조금 전까지는 몰랐던 일.이제는 알게 된 일.잠시 후 다시 메시지가 왔다.[너는?]나는 식탁에 팔꿈치를 올리고 답장을 썼다.[나도 그냥.]보내려다가 멈추고 한 줄을 더 붙였다.[수정하던 문구 하나 오늘 끝냈어.]답장은 금방 왔다.[잘됐네.]나는 웃었다.[계속 마음에 안 들었거든.][끝났으면 됐지.]짧은 답을 보며오늘 오후 내내 붙들고 있던 문장을 떠올렸다.정말 별것 아닌 일이었는데,누군가에게 말하고 나니 하루의 한 부분이 되는 기분이었다.나는 다시 물었다.[너 회의는 잘 끝났어?][응.]그리고,[생각보다 오래 걸렸는데 끝나긴 했어.][그럼 다행이네.]보내고 휴대폰을 내려놓았다.서로 다른 곳에서각자 다른 하루를 보냈다.나는 문구 하나를 붙잡고 있었고,태준은 긴 회의실에 있었을 것이다.아침부터 저녁까지그걸 서로 몰랐다.그리고 지금은 조금 알았다

  • 미열주의   253화. 달지 않은 말, 남겨진 봉지 (1)

    아침에 집을 나서기 전,식탁 위의 포도맛 젤리 봉지를 한 번 봤다.어젯밤 태준에게 받아온 것.몇 개 먹고 입구를 대충 접어둔 채그대로 놓여 있었다.가방을 챙기다가 잠깐 손이 갔다.회사에 가져갈까.봉지를 집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굳이 그럴 이유는 없었다.저녁에 돌아와 먹으면 됐다.나는 현관으로 가 신발을 신었다.문을 열기 직전,괜히 한 번 더 뒤를 돌아봤다.식탁 위에 작은 보라색 봉지가 보였다.그대로 두고 나왔다.⸻저녁에 돌아왔을 때도젤리는 같은 자리에 있었다.외투를 벗고 가방을 내려놓은 뒤손을 씻었다.냉장고에 있던 반찬을 꺼내간단히 저녁을 먹었다.식탁 한쪽에는 계속 젤리 봉지가 있었다.밥을 먹는 동안에는 건드리지 않았다.그릇을 싱크대에 가져다 놓고 돌아와서야봉지를 가까이 끌어왔다.바스락.작은 소리가 났다.어제 로비에서 태준에게 처음 받았을 때도이런 소리가 났다.열린 택배 상자.여러 색으로 섞여 있던 봉지들.뭐가 제일 맛있냐고 물었을 때태준은 포도라고 했다.그래서 나는 별 고민 없이 포도를 골랐다.봉지에서 젤리 하나를 꺼내 입에 넣었다.어제와 같은 맛이었다.포도 향이 먼저 나고,조금 뒤 단맛이 퍼졌다.씹으면서 휴대폰을 집었다.메신저를 열자 태준의 이름이 위쪽에 있었다.강태준.어젯밤 마지막 대화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포도맛 맛있네.][다행이네.]그게 끝이었다.나는 화면을 보다가 입력창을 눌렀다.[너는 뭐 먹었어?]보내고 나서 젤리 하나를 더 꺼냈다.정말 별것 아닌 질문이었다.어제 산 젤리 중무슨 맛을 먹었냐는 말.그래서인지 보내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답장이 왔다.[레몬.]나는 봉지 안을 내려다봤다.[포도는?]이번에는 답이 조금 늦었다.[포도맛은 하나뿐이었어.]씹고 있던 젤리가 멈췄다.나는 화면을 다시 봤다.[하나뿐이었어?][응.]그리고 한 줄이 더 왔다.[네가 가져간 게 그거야.]나는 손에 들고 있던 봉지를 내려다봤다.보라색 작은 봉지.어

  • 미열주의   252화. 빈 칸 하나, 남겨진 이름 (4)

    나는 전송 버튼을 눌렀다.[포도맛 맛있네.]답장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다행이네.]나는 웃었다.그 뒤에 더 오는 말은 없었다.나도 더 쓰지 않았다.휴대폰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화면이 꺼지기 직전까지강태준이라는 이름이 보였다.나는 옆에 놓인 젤리 봉지를 한번 건드렸다.바스락.아침의 빈 칸은 그대로였다.그런데 오늘 하루에는새로 남은 것들이 있었다.내가 먼저 눌러본 이름.태준의 손에서 받아온 작은 봉지.그리고 그 안에 아직 남아 있는 포도맛 젤리 몇 개.나는 봉지를 치우지 않았다.내일 아침에도아마 식탁 위에서 보게 될 것 같았다.⸻【태준의 속마음 40】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서윤에게서 메시지가 왔다.[혹시 너 출근했어?]화면을 한 번 더 봤다.서윤이 먼저 물었다.내가 어디 있는지.그 사실 하나만으로대답을 쓰는 손이 조금 느려졌다.[아직. 지금 엘리베이터 앞이야.]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싶어한 줄을 더 보냈다.[왜? 무슨 일 있어?]답장은 금방 왔다.[아니. 편의점 들렀는데 저당 라떼가 1+1이더라.]그리고 잠시 뒤.[나 두 개는 많아서. 너 마실래?]나는 그 문장을 오래 봤다.1+1.예전에는 이런 일이 많았다.하나를 사면 하나가 더 생기는 날.두 개 묶음이 더 싼 날.같은 걸 두 개 사야 하는 날.그럴 때마다 굳이 묻지 않았다.하나는 서윤 것.하나는 내 것.누가 먼저 집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두 개가 생기면자연스럽게 하나씩 나눠 들었다.그게 너무 당연했던 때가 있었다.나는 답장을 보냈다.[응. 마실게.]편의점 앞에 서 있는 서윤을 봤을 때손에는 정말 같은 라떼가 두 병 있었다.그중 하나가 내 손으로 왔다.1+1이라서 생긴 한 병이라고 했다.그래도 좋았다.많은 사람 중에그 한 병을 줄 사람으로 내가 떠올랐다는 게.그래서 바로 마시지 않았다.아까워서라기보다는조금 더 들고 있고 싶었다.서윤이 물었다.“안 마셔?”“좀 있다가.”“왜?”나는 손에

  • 미열주의   251화. 빈 칸 하나, 남겨진 이름 (3)

    태준이 상자 안을 보며 물었다.“하나 가져갈래?”“그래도 돼?”“많아.”나는 다시 상자 안을 봤다.“그럼 포도.”태준이 작은 포도맛 봉지 하나를 꺼내 내게 건넸다.나는 손바닥을 펴서 받았다.가벼웠다.안에서 젤리가 움직이며 바스락 소리가 났다.“고마워.”“응.”아침에는 내가 라떼를 건넸고,저녁에는 태준이 젤리를 건넸다.계산해서 맞춘 것도 아닌데하루의 양쪽 끝에 하나씩 놓인 게 조금 웃겼다.나는 봉지를 손에 쥔 채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문이 열리고 우리는 함께 탔다.태준은 상자를 들고,나는 작은 젤리 봉지를 들고 있었다.거울 같은 문에 그 모습이 비쳤다.나는 입가에 웃음이 나는 걸 느꼈다.태준이 물었다.“왜 웃어?”“그냥.”“뭔데?”나는 손에 든 봉지를 한번 들어 보였다.“아침에는 라떼였는데.”태준이 내 손을 봤다.“그러네.”“저녁에는 젤리네.”“응.”그걸로 됐다.굳이 뜻을 더 붙이지 않아도오늘 하루가 조금 재미있어진 것 같았다.엘리베이터가 태준의 층에서 멈췄다.문이 열렸다.태준이 내리다가 돌아봤다.“포도맛 괜찮을 거야.”“먹어보고.”“그래.”“너도 잘 들어가.”“응. 너도.”태준이 내렸다.문이 닫혔다.조금 전까지 그가 서 있던 자리가 비었다.나는 그 자리를 잠깐 보다가손에 든 젤리를 내려다봤다.사람은 내려갔는데그가 건넨 건 내 손에 남아 있었다.엘리베이터가 다시 움직였다.작은 봉지 안에서 젤리가 한 번 흔들렸다.바스락.그 소리가 유난히 또렷하게 들렸다.⸻집에 들어가자 센서등이 켜졌다.나는 신발을 벗고 가방을 내려놓은 뒤젤리 봉지를 식탁 위에 올려두었다.외투를 벗고 손을 씻으러 갔다가주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냉장고를 열었다.아침에 봤던 문쪽 칸이 그대로 비어 있었다.라떼를 두 병 샀지만하나는 내가 마셨고,하나는 태준에게 줬다.결국 그 자리는 그대로였다.나는 물병을 꺼내고 문을 닫았다.아침에는 이상하게 눈에 걸렸던 빈 칸이지금은 별로 허전해 보

  • 미열주의   250화. 빈 칸 하나, 남겨진 이름 (2)

    나는 손에 든 병을 한번 흔들었다.“나도 해보는 중이야.”말하고 나서야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았다.태준이 나를 봤다.“뭘?”나는 잠시 생각했다.정확히 설명하려면 너무 길어질 것 같았다.내가 먼저 연락하는 것.생각났다고 해서 모른 척하지 않는 것.주고 싶은 게 있으면 괜히 이유부터 찾지 않는 것.그런 것들.“그냥.”나는 앞을 보며 말했다.“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보는 거.”태준은 잠깐 말이 없었다.“그래.”조금 뒤에 그가 덧붙였다.“그랬으면 좋겠어.”나는 옆을 봤다.태준은 여전히 앞을 보고 있었다.그 말을 하고도 나를 살피지 않았다.나는 다시 길을 봤다.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다.내가 무엇을 해보는 중인지전부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게 좋았다.오늘 아침에는 라떼 하나를 건넸고,태준의 이름을 먼저 눌렀고,지금은 같이 걷고 있었다.그 정도면 충분했다.횡단보도 앞에서 멈췄다.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는 동안태준이 들고 있던 라떼 병을 봤다.내가 조금 전에 건넨 것.별것 아닌데그의 손에 들려 있으니 괜히 한 번 더 보게 됐다.신호가 초록색으로 바뀌었다.사람들이 움직였다.우리도 함께 길을 건넜다.역 입구가 가까워질수록아침의 짧은 시간이 끝나가는 게 느껴졌다.매번 비슷한 곳에서 헤어지는데도오늘은 조금 달랐다.우연히 만난 아침이 아니어서 그런 것 같았다.내가 먼저 태준에게 연락했고,그는 내가 있는 곳으로 내려왔고,그렇게 여기까지 같이 걸었다.역 입구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태준도 따라 멈췄다.“여기서 가면 되지?”“응.”나는 태준의 손에 든 라떼를 다시 한번 봤다.“진짜 천천히 마시겠네.”태준이 웃었다.“그러려고.”나도 웃음이 났다.몇 초쯤 그대로 서 있었다.아까 했던 말이 다시 마음에 남았다.나도 해보는 중이야.괜히 너무 많은 걸 말한 건 아닐까 싶다가도,이번에는 지우고 싶지 않았다.태준이 그 말을 크게 만들지 않았으니까.나는 계단 쪽으로 몸을 돌렸다.“다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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