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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들켜버린 거리, 숨길 수 없는 마음

Penulis: 윤미주
last update Tanggal publikasi: 2026-06-28 19:13:40

“…뭐야.”

낯선 남자의 시선이 내 손끝에 닿아 있었다.

강태준의 셔츠를 움켜쥔 내 손.

그리고 바로 앞에 선 태준.

나는 그제야 내가 아직도 그를 잡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놓아야 했다.

당연히.

그런데 한 박자 늦었다.

딱 그만큼.

들키기 충분할 만큼.

나는 급하게 손을 뗐다.

“아, 아니—”

말까지 꼬였다.

젠장.

왜 하필 지금.

현관 앞에 선 남자는 우리를 번갈아 봤다.

짧게 염색한 머리.

편한 후드 차림.

손에는 휴대폰 하나.

그리고 이 집이 낯설지 않은 사람처럼 서 있는 태도.

그는 천천히 눈을 깜빡이다가 태준을 봤다.

“형.”

남자가 피식 웃었다.

“나 방해했어?”

태준의 얼굴이 바로 차가워졌다.

“…최도혁.”

“와. 이름 부르는 목소리 봐.”

도혁이라 불린 남자는 전혀 당황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오히려 재밌는 장면을 발견한 사람처럼 입꼬리를 올렸다.

“아침부터 분위기 살벌하네.”

태준이 낮게 말했다.

“왜 갑자기 와.”

“형이 어제 관리 서류 가져가라며.”

도혁은 손에 든 휴대폰을 흔들었다.

“연락 안 받길래 왔지.”

그는 말을 끝내고 나를 봤다.

이번엔 제대로.

아까보다 조금 더 길게.

“…아.”

짧은 탄성이 나왔다.

“그 전여친?”

순간 복도와 현관 사이의 공기가 딱딱하게 굳었다.

나는 표정을 굳혔다.

태준의 눈빛도 바로 내려앉았다.

“말 조심해.”

“왜. 틀린 말 했어?”

도혁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이 기분 나빴다.

사람을 모르는 척하면서,

이미 다 알고 있는 사람의 웃음이었다.

나는 한 발 뒤로 물러났다.

태준은 여전히 문턱 안쪽에 서 있었다.

신발도 벗지 않은 채.

딱 내가 허락한 만큼만 들어온 거리.

그런데 도혁이 들어오면서 그 거리까지 전부 들켜버렸다.

도혁의 시선이 현관 바닥을 훑었다.

문 앞의 쇼핑백.

태준의 신발.

내가 서 있는 위치.

태준의 셔츠 주름.

그는 아무 말 없이도 너무 많은 걸 보고 있었다.

“근데 형.”

도혁이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둘 분위기 뭐냐.”

“최도혁.”

“아니, 내가 잘못 본 거야?”

그가 나를 보았다.

“아까 거의 키스 직전 같던데.”

나는 바로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너무 빨랐다.

나도 알았다.

부정이 빠르면 빠를수록 더 이상해 보인다는 걸.

도혁이 눈썹을 살짝 올렸다.

“오.”

“그런 거 아니에요.”

나는 다시 말했다.

이번엔 조금 천천히.

“잠깐 오해할 만한 상황이었을 뿐이에요.”

“오해할 만한 상황.”

도혁이 그 말을 천천히 따라 했다.

“보통 그런 말이 제일 수상하던데.”

태준이 한 걸음 움직였다.

아주 작게.

하지만 도혁은 바로 알아챘다.

“알았어. 농담 그만할게.”

그러면서도 웃음은 완전히 지우지 않았다.

“근데 형 원래 저런 표정 안 하잖아.”

나는 나도 모르게 태준을 봤다.

그리고 바로 후회했다.

강태준은 지금 정말 낯선 얼굴을 하고 있었다.

조용했다.

목소리도 내지 않고,

크게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 조용함이 더 날카로웠다.

누군가가 조금만 더 선을 넘으면,

그때는 정말 잡아낼 사람처럼.

도혁이 말했다.

“사람 잡아먹을 것 같은 표정.”

“나가.”

태준의 목소리가 낮게 떨어졌다.

도혁은 잠깐 그를 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나 서류 가지러 왔다니까.”

“나중에.”

“형이 가져가라며.”

“나중에 오라고.”

“무섭네.”

도혁은 작게 웃었다.

그러다 갑자기 표정을 조금 누그러뜨렸다.

“형.”

태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도혁이 나를 한 번 보고,

다시 태준을 봤다.

“진짜 아직 못 잊었구나.”

그 말이 떨어진 순간,

아까보다 더 깊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태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침묵이 이상하게 대답처럼 들렸다.

나는 손끝을 말아쥐었다.

이런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내 앞에서.

제3자의 입으로.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말이 완전히 틀린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서 더 불편했다.

도혁은 이번엔 나를 보았다.

아까의 장난스러운 얼굴과 조금 달랐다.

“누나.”

“…네?”

“조심해요.”

나는 눈을 깜빡였다.

태준의 눈빛이 바로 도혁 쪽으로 향했다.

“최도혁.”

도혁은 두 손을 들었다.

“알았어. 더 말 안 해.”

그러면서도 그는 결국 한마디를 더 했다.

“형 원래 한번 마음 쓰면 오래 가는 사람이라.”

그 말은 아까보다 조용했다.

장난처럼 던진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 오래 남았다.

태준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나는 그 침묵 속에서 문고리를 쥔 손을 다시 고쳐 잡았다.

내 집인데도,

내가 서 있을 자리를 못 찾는 기분이었다.

도혁은 결국 한숨처럼 웃었다.

“나 간다. 서류는 나중에 받으러 올게.”

그가 현관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다 문을 열기 전에 다시 태준을 봤다.

“근데 형.”

태준은 그를 보지 않았다.

도혁이 말했다.

“이번엔 놓치지 마.”

문이 닫혔다.

철컥.

소리가 지나치게 크게 들렸다.

그리고 다시,

우리 둘만 남았다.

복도와 현관 사이.

문턱 안쪽.

아직 치워지지 않은 쇼핑백.

그리고 조금 전까지 내가 잡고 있던 태준의 셔츠.

나는 일부러 시선을 돌렸다.

“친한 사람이야?”

말하고 나서 바로 후회했다.

왜 물었지.

태준은 나를 보고 있었다.

“후배.”

“집 비밀번호도 알아?”

“원래는 관리실에서 쓰던 카드 가지고 있어.”

“다들 이렇게 막 들어와?”

“아니.”

“근데 왜 들어왔대.”

“내가 오라고 했었으니까.”

“그럼 네 잘못이네.”

“응.”

이번엔 너무 쉽게 인정해서 할 말이 없어졌다.

나는 쇼핑백을 들고 식탁 쪽으로 걸어갔다.

태준은 따라 들어오지 않았다.

아직 문 앞에 서 있었다.

내가 말한 문 앞까지만.

그걸 지키고 있었다.

그게 또 신경 쓰였다.

나는 쇼핑백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토스트.

샌드위치.

커피.

이제 아침을 먹을 수 있는 분위기는 전혀 아니었다.

그런데 배는 고팠다.

사람은 이런 순간에도 배가 고프다.

그게 조금 짜증 났다.

“서윤아.”

낮은 목소리.

나는 식탁 앞에서 멈췄다.

“아까.”

“말하지 마.”

“아직 아무 말 안 했어.”

“하려는 말 알아.”

“키스하려던 거.”

나는 바로 고개를 돌렸다.

“미쳤어?”

태준은 여전히 문 앞에 서 있었다.

아까보다 더 들어오지도,

나가지도 않은 채.

“그럼 아니야?”

나는 웃었다.

웃음이 너무 날카롭게 나왔다.

“착각하지 마.”

“착각이면 좋겠는데.”

“그런 분위기 아니었거든.”

“넌 방금도 바로 부정하네.”

“그럼 뭐라고 해?”

“모르겠어.”

태준이 낮게 말했다.

“나도 그 순간 네가 날 잡을 줄은 몰랐으니까.”

나는 입을 다물었다.

아까 내가 태준의 셔츠를 잡았다.

그 사실이 자꾸 손끝에 남았다.

잡힌 게 아니라,

내가 잡은 것.

붙잡힌 게 아니라,

내가 놓치지 않았던 것.

그게 제일 문제였다.

나는 물을 마시려고 주방 쪽으로 갔다.

냉장고 문을 열었다.

생수병을 꺼냈다.

차가운 물병을 쥐면 조금 나아질 줄 알았다.

손끝만 차가워졌다.

“너 왜 갑자기 이래.”

내 목소리는 생각보다 작게 나왔다.

태준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물병 뚜껑을 열었다.

“3년 동안 아무 말 없다가.”

“…….”

“그때는 한 번도 붙잡지 않았으면서.”

뚜껑을 닫는 소리가 주방에 작게 울렸다.

“이제 와서 왜 이러냐고.”

태준이 문 앞에서 천천히 나를 봤다.

“후회해서.”

단순한 대답이었다.

그래서 더 피할 데가 없었다.

나는 물병을 들고 그를 바라봤다.

“뭘.”

“너 놓친 거.”

가슴 안쪽이 이상하게 조용해졌다.

너무 큰 말을 들으면,

오히려 바로 반응이 나오지 않을 때가 있다.

나는 물을 마시지도 못하고 병만 쥐고 있었다.

태준이 말했다.

“그때 네가 끝이라고 했을 때.”

“…….”

“나는 네가 정말 끝내고 싶은 줄 알았어.”

“그럼 붙잡았어야지.”

말이 바로 튀어나왔다.

참지 못했다.

“끝내고 싶은 사람처럼 보였어도.”

나는 그를 봤다.

“한 번쯤은 물어봤어야지.”

태준의 눈이 가라앉았다.

“알아.”

“그 알아 하지 마.”

“…….”

“너는 항상 늦어.”

그 말은 4화에서 했던 말과 같았다.

그런데 이번엔 더 안쪽에서 나왔다.

태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예전 같으면 나를 미치게 했을 텐데,

오늘은 조금 달랐다.

그는 피하는 게 아니라 듣고 있었다.

나는 그걸 알아차리고 싶지 않았다.

태준이 천천히 말했다.

“그때는 네가 나 때문에 망가지는 줄 알았어.”

나는 그를 봤다.

“그래서.”

“…….”

“내가 안 붙잡으면 네가 살 수 있을 줄 알았어.”

너무 늦은 변명이었다.

그런데 완전히 거짓말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그게 더 아팠다.

나는 물병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럼 넌?”

태준의 시선이 내게 머물렀다.

“너는 괜찮았고?”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역시 그건 말 안 하네.”

“안 괜찮았어.”

이번엔 바로 왔다.

나는 멈췄다.

태준은 문 앞에 서 있었다.

나와 거리는 아직 있었다.

그런데 말은 가까웠다.

“네가 나간 뒤로.”

그는 아주 천천히 말했다.

“집에 들어가는 게 제일 싫었어.”

나는 입술을 다물었다.

“문 열면 네가 없었으니까.”

그 말은 조용했다.

크게 흔들지도 않았고,

울지도 않았고,

극적으로 말하지도 않았다.

그냥 사실처럼 말했다.

그래서 더 오래 박혔다.

나는 눈을 피했다.

“그런 말 너무 늦었어.”

“알아.”

“안다고 다 되는 거 아니야.”

“알아.”

“그 알아 진짜 싫어.”

태준은 이번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은 내가 멈추라고 한 말에 대한 대답처럼 느껴졌다.

나는 식탁 끝을 손끝으로 짚었다.

이 남자는 지금 내 말을 듣고 있다.

그게 자꾸 나를 더 헷갈리게 했다.

예전에는 듣지 않는 것 같아서 힘들었는데,

지금은 듣고 있어서 더 힘들다.

태준이 낮게 말했다.

“그래도 이번엔 안 놓칠 거야.”

나는 그를 봤다.

그 말은 후회한다는 말보다 더 위험했다.

왜냐면 강태준은 원래,

한 번 마음먹은 걸 쉽게 놓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웃기지 마.”

겨우 그렇게 말했다.

태준은 눈을 내리깔았다.

“안 웃겼는데.”

“너는 늘 네 하고 싶은 말만 해.”

“그럼 넌.”

그가 낮게 되물었다.

“왜 자꾸 도망가.”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 질문이 너무 정확한 곳에 닿아서.

“도망 안 갔어.”

“갔지.”

“…….”

“3년 전에.”

나는 손끝에 힘을 줬다.

그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정확히는 아직도 못 하겠다.

그날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내가 왜 떠났는지까지 전부 말해야 할 것 같았다.

“그 얘기 하지 마.”

나는 낮게 말했다.

태준은 잠시 조용했다.

하지만 물러나지는 않았다.

“넌 아직도 내가 널 안 붙잡았다고 생각해?”

나는 천천히 눈을 들었다.

태준의 눈빛은 이상할 만큼 차분했다.

그게 더 흔들렸다.

“아니야?”

“…….”

“그날 너 아무 말도 안 했잖아.”

“했어.”

짧은 말이었다.

나는 그대로 멈췄다.

“뭐?”

태준은 아주 천천히 말했다.

“했어.”

나는 그를 바라봤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바로 이해되지 않았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태준의 목소리가 낮게 이어졌다.

“네가 못 들었어.”

집 안이 조용해졌다.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도,

창밖 차 소리도,

순간 멀어졌다.

나는 물병을 잡은 손에 힘을 줬다.

“무슨 소리야.”

태준은 나를 보고 있었다.

그의 눈이 아주 조금 어두워졌다.

“그날.”

“…….”

“네가 문 닫고 나간 뒤에.”

나는 숨을 천천히 들이마셨다.

태준은 말했다.

“잡았어.”

그 말이 떨어졌다.

너무 늦게.

너무 조용하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3년 전 그 밤.

내가 문을 닫고 나간 뒤.

빗소리.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던 소리.

그리고 내가 듣지 못한 말.

나는 갑자기 그날의 모든 소리가 뒤섞이는 기분이 들었다.

“거짓말하지 마.”

겨우 나온 말은 그것뿐이었다.

태준은 눈을 피하지 않았다.

“거짓말 아니야.”

“그럼 왜 이제 말해.”

“말해도 네가 안 믿을 것 같아서.”

나는 웃었다.

이번엔 정말 기가 막혀서 웃었다.

“그래서 3년을 안 했어?”

태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대답이었다.

나는 물병을 내려놓았다.

손끝이 조금 떨렸다.

“너 진짜…”

말이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화가 났다.

그런데 그 아래에 다른 감정이 있었다.

억울함.

허탈함.

그리고 아주 잠깐,

내가 정말 못 들은 걸까 하는 생각.

그 생각이 제일 무서웠다.

태준이 한 걸음 다가오려 했다.

나는 바로 말했다.

“오지 마.”

그는 멈췄다.

“거기 있어.”

“응.”

“말해.”

“…….”

“그날 네가 뭘 했다는 건지.”

태준은 아주 오래 나를 봤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가지 말라고 했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문 앞에서.”

“…….”

“네가 엘리베이터 타기 전에.”

“…….”

“근데 네가 안 돌아봤어.”

그 말이 너무 아팠다.

믿고 싶지 않은데,

완전히 거짓말 같지도 않았다.

나는 그날을 떠올렸다.

비가 너무 많이 왔다.

내 귀에는 내 울음과 빗소리밖에 없었다.

뒤에서 무슨 소리가 났는지,

정말 기억나지 않았다.

나는 그냥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믿고 싶었던 걸지도 몰랐다.

그래야 떠날 수 있었으니까.

“왜.”

내 목소리가 갈라졌다.

“왜 더 크게 안 했어.”

태준은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눈을 들었다.

“왜 뛰어나오지 않았어.”

“…….”

“왜 엘리베이터 문을 잡지 않았어.”

태준의 얼굴이 조금 무너졌다.

아주 조금.

“겁났어.”

그가 말했다.

나는 숨을 멈췄다.

“네가 정말 끝내고 싶어 하는 걸까 봐.”

“…….”

“내가 잡으면, 네가 더 힘들까 봐.”

나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 말도 너무 늦었다.

다 늦었다.

그런데 늦었다고 해서,

아무 의미도 없는 건 아니었다.

그게 더 싫었다.

태준은 낮게 말했다.

“그래서 이번엔.”

“…….”

“늦더라도 말하려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만해.”

“서윤아.”

“오늘은 그만하라고.”

태준은 입을 다물었다.

나는 물병을 들고 식탁 위에 세게 내려놓았다.

크게 소리가 난 건 아니었지만,

집 안에는 충분히 크게 울렸다.

“나 출근해야 돼.”

“응.”

“너도 가.”

“응.”

“그리고.”

나는 그를 보았다.

“아침 이런 거 다시 가져오지 마.”

태준의 시선이 쇼핑백 쪽으로 갔다.

“알았어.”

“거짓말이면 진짜 화낼 거야.”

“거짓말 아니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현관 쪽으로 몸을 돌렸다.

문을 열기 전,

아주 잠깐 멈췄다.

나는 그가 또 무슨 말을 할까 봐 긴장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나갔다.

문이 닫혔다.

철컥.

집 안에는 나 혼자 남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머릿속에 태준의 말이 계속 남았다.

했어.

네가 못 들었어.

가지 말라고 했어.

나는 식탁 위의 쇼핑백을 봤다.

토스트.

샌드위치.

예전에 좋아했던 커피.

먹지 않으려고 했다.

정말로.

그런데 출근 준비를 마친 뒤,

결국 커피 뚜껑을 열었다.

아직 미지근했다.

나는 한 모금 마셨다.

맛은 그대로였다.

너무 익숙해서,

더 짜증 나는 맛이었다.

[작가후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숨기고 싶던 마음보다

때로는 늦게 도착한 말이 더 오래 흔듭니다.

《미열주의》는 다음 화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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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열주의   30화. 묻어둔 밤, 다시 열린 이유

    “그날 내가 왜 아무 말도 못 했는지.”철컥.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나는 그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출근해야 했다.사람들은 로비를 지나가고 있었고,어딘가에선 자동문 열리는 소리가 났고,밖은 아직 덜 마른 비 냄새가 났다.근데 나는 그 자리에서 한 발도 움직이지 못했다.3년 전 그날.비가 오던 밤.내가 끝내고 싶다고 말했던 밤.아니.정확히는,끝내고 싶지 않아서 끝내자고 말했던 밤.그 밤을 강태준 입에서 다시 듣게 될 줄은 몰랐다.나는 손끝에 힘을 줬다.괜찮은 척하려고 했는데,손이 먼저 들키고 있었다.떨렸다.아주 조금.근데 내 눈엔 너무 잘 보일 만큼.“아, 진짜…”작게 중얼거리고 나서야겨우 몸이 움직였다.출근길 내내 아무 생각도 안 하려고 했다.근데 그게 더 안 됐다.생각하지 말자고 하면 할수록,기억은 더 선명하게 들러붙었다.비 오는 현관.젖은 구두 앞코.숨을 삼키던 나.끝까지 아무 말도 안 하던 강태준.그때 나는 정말 많이 기다렸다.한 번만.딱 한 번만.“가지 마.”그 말 하나면 됐다.그 말이면 나는 아마못 간 척,화를 내는 척,끝내는 척하면서도결국 그 자리에 주저앉았을 거다.근데 강태준은 끝까지 조용했다.그래서 나는 갔다.내가 먼저 버린 사람처럼.내가 먼저 끝낸 사람처럼.그런데 이제 와서,그가 그날을 꺼내겠다고 했다.나는 웃음이 나올 뻔했다.왜 이제 와서.왜 하필 지금.왜 내가 겨우 다 덮었다고 생각한 뒤에.⸻회사에 도착했을 때,정우진은 이미 자리에 있었다.나는 그를 보는 순간반사적으로 걸음을 늦췄다.우진은 모니터를 보다가내 쪽으로 시선을 올렸다.“…좋은 아침입니다.”평소랑 같은 말투였다.조심스럽고,정중하고,선을 넘지 않는.그런데 이상하게 오늘은 그게 더 불편했다.나는 괜히 가방끈을 고쳐 잡았다.“네. 좋은 아침이에요.”내 목소리는 생각보다 멀쩡했다.다행인지 아닌지 모르겠다.자리에 앉자마자 노트북을 켰다.메일함을 열고,자료를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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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복도는 다시 조용해졌다.나는 그 자리에 서서차갑게 식어가는 커피를 쥐고 있었다.그리고 그제야 알았다.정말 위험한 건,강태준이 나를 붙잡는 순간이 아니었다.아무 말 없이 물러서는 순간.그때 내가,따라가고 싶어진다는 거였다.나는 한참 동안 문 앞에 서 있었다.복도 불빛은 하얗게 내려앉아 있었고,엘리베이터 표시등은 천천히 바뀌고 있었다.21에서 20으로.20에서 19로.숫자가 하나씩 낮아질 때마다,이상하게 가슴 한쪽도 같이 내려앉았다.멍청했다.정말 멍청했다.방금 전까지는 들어가라고 했다.밀어냈고,피했고,문을 닫으려고 했다.그런데 막상 그가 사라지니까나는 문 하나도 제대로 닫지 못하고 있었다.손에 든 커피는 이미 식어가고 있었다.아까는 따뜻했는데.조금 전까지만 해도강태준 손처럼 뜨겁게 느껴졌는데.나는 결국 문을 닫았다.철컥.도어락 소리가 났다.그 소리를 듣고 나서야겨우 숨이 나왔다.집 안은 어두웠다.나는 불을 켜지 않았다.커피를 식탁 위에 올려놓고한참 바라봤다.편의점 컵커피.정말 별것도 아니었다.가격도 얼마 안 할 거고,맛도 그저 그럴 거고,내일이면 쓰레기통에 들어갈 물건.그런데 나는 그걸 쉽게 버리지 못했다.뚜껑 위에 끼워져 있던 영수증을 다시 펼쳤다.[ 마시고 자. ]짧고 못된 글씨.대충 쓴 것 같은데이상하게 강태준 같았다.말은 거칠고,행동은 엉망이고,사람 마음을 자꾸 제멋대로 흔들어놓는 사람.나는 그 종이를 손끝으로 꾹 눌렀다.접힌 자국이 깊었다.아마 급하게 썼을 거다.편의점 계산대 앞에서펜 하나 빌려서,무슨 말을 써야 할지 몰라서한참 망설이다가.결국 이런 말밖에 못 썼겠지.마시고 자.겨우 그 한마디가왜 이렇게 사람을 흔드는지 모르겠다.나는 의자에 앉았다.커피 뚜껑을 열었다.김은 거의 사라졌지만아직 미지근했다.한 모금 마셨다.달았다.평소 같으면 너무 달아서한 모금 마시고 내려놨을 맛이었다.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

  • 미열주의   28화. 밀어낼수록, 더 깊어지는 밤

    “…근데 이제.”숨이 막혔다.“진짜 못 멈출 것 같아.”태준은 끝내 돌아보지 않았다.그 말만 남긴 채천천히 복도 끝으로 걸어갔다.나는 그대로 현관 앞에 서 있었다.문은 반쯤 열려 있었고,젖은 공기가 안쪽으로 스며들었다.한참 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방금 전까지내 허리 가까이에 닿아 있던 손.내 뺨 위에 머물던 온도.숨이 섞이던 거리.전부 아직 몸에 남아 있었다.나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문을 닫았다.탁.문 닫히는 소리가이상하게 크게 들렸다.집 안은 조용했다.너무 조용해서,오히려 방금 태준 목소리가 더 선명하게 남았다.‘진짜 못 멈출 것 같아.’나는 신발도 제대로 벗지 못한 채현관에 기대섰다.심장이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다.미친 것 같았다.분명 밀어냈는데.분명 들어가라고 했는데.왜 나는,그가 멀어지는 뒷모습을 붙잡고 싶었던 걸까.나는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그러면 안 됐다.이러면 안 됐다.우리는 이미 한 번 끝난 사이였다.끝났다고 믿었고,끝났기에 버텼고,끝났으니까 살아낼 수 있었다.그런데 강태준은자꾸 그 모든 시간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만들었다.하나도 안 끝난 사람처럼.아직도 내 안에 남아 있는 사람처럼.나는 천천히 거실로 들어갔다.불도 켜지 않았다.창밖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젖은 유리창 위로도시 불빛이 흐릿하게 번졌다.나는 소파에 앉아휴대폰을 손에 쥐었다.아무 알림도 없었다.그게 다행인지,아닌지 모르겠어서 더 답답했다.태준은 연락하지 않았다.늘 그랬다.무너질 것처럼 다가와 놓고,어느 순간엔 너무 조용해졌다.그 침묵이 더 사람을 미치게 했다.차라리 화를 내면 나았다.차라리 붙잡으면 나았다.근데 강태준이 조용해지면,나는 늘 불안했다.그 사람이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어서.그리고 내가무슨 마음인지 더 들킬 것 같아서.나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그런데 손끝이 자꾸 떨렸다.방금 밀어낸 건 태준이었는데,밀려난 건 나 같았다.⸻샤워를 하고

  • 미열주의   27화. 멈추지 못한 숨, 가까워지는 현실

    “…그러니까.”숨이 멎었다.“이제 그만 피해.”심장이 그대로 무너졌다.나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태준 손끝이 아직도 내 뺨 위에 닿아 있었다.뜨거운 손.숨이 가까웠다.도망쳐야 하는데.이상하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태준은 그런 나를 한참 바라봤다.흔들리는 눈빛.처음 보는 얼굴이었다.나는 괜히 입술을 깨물었다.“…왜 이렇게까지 해.”겨우 꺼낸 목소리.태준이 아주 천천히 웃었다.이번엔 비웃는 웃음도,여유 있는 웃음도 아니었다.그냥—지친 사람 같은 얼굴.“나도 모르겠어.”갈라진 낮은 목소리.“근데 네가 자꾸 멀어지려고 하면.”심장이 세게 흔들렸다.태준 시선이 천천히 내 얼굴을 훑었다.그리고 아주 늦게,낮은 목소리가 떨어졌다.“…진짜 미칠 것 같아.”숨이 막혔다.나는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태준은 한동안 나를 바라보다가천천히 손을 내렸다.닿아 있던 온기가 사라졌다.이상하게,그게 더 불안했다.나는 무의식적으로 손끝을 움켜쥐었다.태준은 그런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그리고 아주 조용히 물었다.“…아직도 나 밀어낼 수 있을 것 같아?”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아니.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강태준이 다시 내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는 걸.그리고 내가 그걸점점 막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정적이 길어졌다.현관 앞 공기마저숨 막힐 만큼 조용했다.태준이 아주 천천히 다시 가까워졌다.숨이 섞일 만큼 가까운 거리.나는 본능처럼 숨을 멈췄다.태준 시선이 천천히 내 입술 아래로 내려왔다.그리고 아주 낮게 말했다.“…한서윤.”심장이 세게 흔들렸다.“나 더 착한 척 못 하겠다.”숨이 멎었다.그 순간.태준 손이 아주 천천히 내 허리 가까이를 붙잡았다.깜짝 놀란 내가 숨을 삼켰다.하지만 밀어내지 못했다.태준 눈빛이 흔들렸다.참고 있던 감정이전부 무너지고 있는 얼굴이었다.그리고 바로 그때.띵.조용한 복도 안으로엘리베이터 도착 소리가 짧게 울렸다.

  • 미열주의   26화. 멀어질수록, 더 선명해지는 감정

    정말 위험한 건,강태준이 가까워지는 순간이 아니라—내가 그를 피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었다.차 안 공기가 조용히 가라앉아 있었다.나는 끝까지 창밖만 바라봤다.태준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침묵이 이상하게 더 숨 막혔다.차는 어느새 집 앞 골목으로 들어서고 있었다.익숙한 거리.익숙한 불빛.그런데 이상하게,오늘은 전부 낯설게 느껴졌다.차가 천천히 멈춰 섰다.나는 바로 문을 열려고 했다.하지만 그 순간.철컥.손목이 붙잡혔다.심장이 세게 내려앉았다.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태준이었다.낮게 가라앉은 눈빛.그런데 이상하게,붙잡고 있는 손끝엔 힘이 거의 없었다.그게 더 위험했다.“…또 도망가려고.”갈라진 낮은 목소리.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손목을 빼내려 했다.“…안 도망가.”“근데 왜 자꾸 피해.”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태준은 그런 나를 한참 바라봤다.마치 끝까지 확인하려는 사람처럼.그리고 아주 늦게,낮은 목소리가 떨어졌다.“…그 남자 때문이야?”숨이 멎었다.나는 본능처럼 시선을 피했다.그 순간.태준이 짧게 숨을 내쉬었다.낮고 거친 숨.그게 이상하게 더 불안했다.“한서윤.”갈라진 목소리.“너 지금 흔들리고 있잖아.”심장이 세게 흔들렸다.나는 애써 차갑게 말했다.“…그만해.”태준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대신 한동안 나만 바라봤다.조용한 눈.그런데 이상하게,그 시선이 더 숨 막혔다.나는 결국 먼저 시선을 피했다.그리고 바로 그 순간.태준 손이 아주 천천히 내 손목을 놓았다.나는 순간 이상하게 더 불안해졌다.태준은 고개를 숙인 채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젖은 머리칼 아래로흐트러진 숨만 조용히 들렸다.그리고 아주 늦게,낮은 목소리가 떨어졌다.“…나 진짜 끝난 줄 알았거든.”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태준은 여전히 나를 보지 않은 채낮게 웃었다.그 웃음이 이상하게 더 아팠다.“근데 너 다

  • 미열주의   25화. 들켜버린 질투, 무너지는 거리

    “…한서윤 씨.”정우진의 목소리가 조용히 내려앉았다.나는 그대로 굳은 채휴대폰만 세게 움켜쥐었다.창밖엔 아직도 강태준이 서 있었다.비를 그대로 맞은 채,천천히 이쪽만 바라보고 있었다.숨이 막혔다.우진은 그런 내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아주 조용히 다시 물었다.“…남자친구예요?”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나는 급하게 시선을 피했다.“…아니에요.”하지만 이상하게,변명처럼 들렸다.우진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조용함이 오히려 더 불편했다.마치 다 알고 있으면서도끝까지 묻지 않는 사람 같아서.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가방을 움켜쥐었다.“…먼저 들어가볼게요.”우진은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조심히 들어가세요.”짧은 인사.그런데 이상하게그 말이 오래 남았다.나는 급하게 몸을 돌렸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도,정우진 시선이 계속 느껴졌다.⸻1층 로비로 내려오자차가운 밤공기가 피부를 스쳤다.비 냄새.젖은 아스팔트.그리고—강태준.검은 셔츠 차림의 그가차에 기대선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나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태준은 그런 나를 보더니천천히 몸을 일으켰다.“…왜 그렇게 늦게 내려와.”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나는 괜히 시선을 피했다.“…일하고 있었어.”태준은 잠시 말이 없었다.대신 아주 천천히내 뒤쪽 회사 건물을 바라봤다.그 시선 끝이 이상하게 불안했다.그리고 잠시 후.태준이 낮게 물었다.“…아까 그 남자.”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회사 사람이야?”나는 천천히 입술을 눌렀다.“…응.”짧은 대답.하지만 태준은 바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마치 무언가를 계속 떠올리는 사람처럼.나는 괜히 불편해졌다.“…왜.”그제야 태준 시선이 다시 내 쪽으로 돌아왔다.가라앉은 눈빛.그런데 이상하게,아까처럼 날카롭지는 않았다.오히려 더 조용했다.“계속 너 보고 있길래.”숨이 막혔다.나는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태준은 그런 나를 잠시 바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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