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했어.
네가 못 들었어.
가지 말라고 했어.
출근길 내내 그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버스 창밖으로 익숙한 건물들이 지나갔다.
평소 같았으면 출근 시간의 소음에 묻혀버렸을 생각들이,
오늘은 이상하게 더 선명하게 남았다.
강태준의 목소리.
낮고 조용했던 눈.
문 앞에 서서 나를 보던 얼굴.
나는 휴대폰 화면을 껐다 켰다.
별다른 연락은 없었다.
그게 당연한데,
나는 자꾸 화면을 확인하고 있었다.
기다리는 것도 아닌데.
아니라고 생각할수록,
손은 더 자주 휴대폰을 찾았다.
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3년 전 그날.
비가 많이 왔다.
그건 기억난다.
현관 앞에 세워둔 젖은 우산.
내가 들고 있던 가방.
끝이라고 말하던 내 목소리.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던 강태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렇게 믿었다.
그래야 떠날 수 있었으니까.
그가 붙잡지 않았다고 믿어야,
내가 혼자 버려진 사람처럼 덜 초라해질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가지 말라고 했어.
나는 손끝에 힘을 줬다.
기억은 이상하다.
분명 내가 가진 것이라고 믿었는데,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갑자기 흔들린다.
그날 정말 내가 못 들은 걸까.
아니면.
듣고도 못 들은 척한 걸까.
회사 앞 정류장에 도착했을 때도,
머릿속은 정리되지 않았다.
나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천천히 걸었다.
아침 공기는 차가웠고,
건물 유리창에는 지친 얼굴 하나가 비쳤다.
내 얼굴이었다.
잠을 못 잔 얼굴.
그리고 아직도 흔들리는 얼굴.
“한서윤 대리님.”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정우진이었다.
같은 팀 선배.
늘 단정한 셔츠 차림에,
말투도 표정도 적당히 부드러운 사람.
그는 내 얼굴을 보더니 살짝 눈썹을 올렸다.
“괜찮아요?”
“네?”
“얼굴 안 좋아 보여서요.”
나는 급히 표정을 정리했다.
“잠을 좀 못 잤어요.”
“이사 때문에요?”
“네. 집이 아직 낯설어서.”
거짓말은 아니었다.
집이 낯선 건 맞았다.
다만 그 집 안에 너무 익숙한 사람이 자꾸 들어오는 게 문제였을 뿐.
우진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아침은 먹었어요?”
나는 순간 대답이 늦었다.
식탁 위에 놓여 있던 쇼핑백이 떠올랐다.
토스트.
샌드위치.
예전에 좋아하던 커피.
그리고 그걸 가져온 사람.
“대충요.”
“대충은 안 먹은 거랑 비슷한데.”
우진이 웃으며 종이컵을 내밀었다.
“회의 전에 커피라도 마셔요.”
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받아 들었다.
“감사합니다.”
따뜻한 커피였다.
손끝이 조금 풀렸다.
우진은 별말 없이 내 옆을 걸었다.
적당한 거리.
부담스럽지 않은 친절.
이 사람은 늘 그랬다.
선을 넘지 않고,
필요한 만큼만 다가왔다.
그래서 편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오늘은 그 편안함마저 어색했다.
강태준이 너무 많은 말을 남기고 갔기 때문이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우진이 가볍게 물었다.
“새 집은 괜찮아요?”
“네. 나쁘지 않아요.”
“회사랑도 가까워졌죠?”
“그건 좋아요.”
“그럼 다행이네요. 갑자기 이사한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나는 커피 컵을 내려다봤다.
걱정.
그 단어가 오늘 유난히 자주 걸렸다.
걱정하는 척하지 마.
내가 강태준에게 했던 말.
그런데 그는 정말 걱정했던 걸까.
아니면,
그냥 자기 방식대로 나를 붙잡고 있는 걸까.
나는 대답 대신 희미하게 웃었다.
“정신없긴 했는데, 이제 적응해야죠.”
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요. 박스 옮기는 거나, 뭐 그런 거.”
“아니에요. 거의 다 정리했어요.”
“그래도요.”
우진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한 발 물러서며 나를 먼저 들여보냈다.
“혼자 무리하지 말고요.”
그 말은 평범했다.
정말 평범한 말이었다.
그런데 나는 순간 강태준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넌 늘 괜찮은 척하다가,
꼭 제일 안 괜찮을 때 혼자 버티니까.
나는 입술 안쪽을 살짝 깨물었다.
싫다.
정말 싫다.
하루가 시작되기도 전에,
모든 말이 그 남자에게로 이어지는 게.
⸻
오전 회의는 길었다.
나는 자료를 넘기고,
메모를 하고,
필요한 부분에 대답했다.
평소처럼 일했다.
그런데 집중이 자꾸 끊겼다.
회의실 유리벽 너머로 사람이 지나갈 때마다,
괜히 시선이 갔다.
검은 셔츠가 보이면 더 그랬다.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강태준이 회사에 올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도 몸이 먼저 반응했다.
그게 싫었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오후 업무가 이어졌다.
메일을 쓰다가도 손이 멈췄다.
가지 말라고 했어.
그 말이 또 떠올랐다.
나는 결국 메모장 한쪽에 아무 의미 없는 단어를 적었다가 지웠다.
끝.
다시 썼다.
끝난 사이.
그리고 그 아래에,
나도 모르게 다른 문장이 남았다.
정말 끝난 걸까.
나는 바로 지웠다.
“한 대리님?”
우진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네.”
“오늘 컨디션 진짜 안 좋아 보이는데, 먼저 들어가도 돼요. 팀장님한테는 제가 말할게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괜찮다는 말이 제일 안 괜찮아 보일 때가 있잖아요.”
나는 순간 멈췄다.
우진은 별뜻 없이 한 말일 것이다.
그런데 그 말마저 또 누군가와 닮아 있었다.
나는 웃어 보였다.
“정말 괜찮아요.”
“그럼 퇴근할 때라도 같이 나가요. 택시 잡아드릴게요.”
“괜찮다니까요.”
내 대답이 조금 빠르게 나왔다.
우진은 나를 보다가 더 묻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부담 주려던 건 아니었어요.”
“아니에요. 제가 예민했어요.”
“이사하면 원래 그래요.”
우진은 부드럽게 웃었다.
편한 사람.
친절한 사람.
선을 넘지 않는 사람.
그런데 이상하게,
그런 사람 앞에서 나는 오히려 마음이 더 복잡해졌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모니터를 봤다.
⸻
퇴근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몸이 더 무거워졌다.
집에 가야 한다.
그 생각이 낯설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새 집은 그냥 새 집이었다.
오늘은 아니었다.
그 집에는 강태준의 말이 남아 있었다.
그의 손이 닿았던 자리.
그가 문턱을 넘지 않고 멈췄던 거리.
그가 놓고 간 아침.
그가 늦게 꺼낸 말.
전부 그대로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일부러 조금 늦게 회사를 나왔다.
사무실 불이 하나둘 꺼지고,
복도에 사람 소리가 줄어들 때까지 기다렸다.
혼자 엘리베이터를 타고,
건물 밖으로 나왔다.
밤공기가 얼굴에 닿았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집까지는 멀지 않았다.
버스를 탈 수도 있었고,
걸어갈 수도 있었다.
잠깐 고민하다가 나는 걸었다.
걷다 보면 생각이 조금은 정리될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걸을수록 오히려 더 선명해졌다.
태준이 했던 말.
네가 못 들었어.
그날.
가지 말라고 했어.
나는 신호등 앞에서 멈췄다.
빨간불이었다.
차들이 지나갔다.
그 사이로 휴대폰이 진동했다.
드르륵.
나는 무의식적으로 화면을 봤다.
정우진.
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
“네, 선배.”
— 한 대리님, 혹시 퇴근했어요?
“네. 방금 나왔어요.”
— 아, 제가 파일 하나 확인 부탁드리려고 했는데. 급한 건 아니고요.
“지금 볼까요?”
— 아니에요. 내일 봐도 됩니다. 목소리 들어보니까 더 피곤해 보이는데요.
나는 작게 웃었다.
“목소리로도 보여요?”
— 오늘 하루 종일 보였어요.
“죄송해요. 티 안 내려고 했는데.”
— 죄송할 일은 아니죠. 집 조심히 들어가요. 도착하면 연락해요.
나는 잠깐 대답이 늦었다.
도착하면 연락해요.
평범한 말이었다.
정말 아무 뜻 없는 말.
그런데 또 떠올랐다.
비밀번호 바꿔.
창문 잠금장치도 확인하고.
그런 말들.
나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네.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었다.
신호가 바뀌었다.
나는 횡단보도를 건넜다.
그때였다.
조금 떨어진 건물 입구 쪽에 선 사람이 보였다.
검은 코트.
긴 그림자.
낯설지 않은 자세.
나는 걸음을 멈췄다.
강태준이었다.
그는 내 집 건물 앞에 서 있었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처럼.
아니.
정말 기다리고 있었겠지.
그는 나를 보자 천천히 몸을 돌렸다.
시선이 먼저 내 손에 닿았다.
정확히는,
방금 전화를 끊은 내 휴대폰에.
나는 괜히 손을 내렸다.
태준은 아무 말 없이 나를 보고 있었다.
밤이 그의 얼굴 위로 내려앉아 있었다.
조용하고,
낮고,
조금 위험한 얼굴.
나는 먼저 입을 열었다.
“…왜 여기 있어.”
“기다렸어.”
“왜.”
“네가 늦길래.”
“내가 언제 들어오는지 네가 왜 신경 써.”
태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더 답답했다.
나는 휴대폰을 가방 안에 넣으려 했다.
그때 다시 진동이 울렸다.
드르륵.
아까 끊었던 전화가 다시 오는 건 아니었다.
메시지였다.
화면 위에 이름이 떴다.
정우진.
태준의 시선이 그 이름에 멈췄다.
공기가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나는 바로 화면을 껐다.
“회사 사람이야.”
“안 물었어.”
“근데 보는 눈이 물어보던데.”
태준의 턱선이 천천히 굳었다.
아.
나는 그 표정을 알고 있었다.
강태준이 질투할 때 나오는 얼굴.
문제는,
저 남자는 화가 날수록 더 조용해진다는 거였다.
“받아.”
그가 말했다.
“뭐?”
“연락.”
“메시지야.”
“그럼 봐.”
“나중에 보면 돼.”
“왜.”
태준이 천천히 내 쪽으로 가까워졌다.
“나 때문에 눈치 보여?”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가 그걸 봤다.
늘 그렇듯.
태준은 아주 낮게 웃었다.
그런데 전혀 웃는 얼굴이 아니었다.
“한서윤.”
“…왜.”
“나 지금 되게 별로인 생각 중인데.”
숨이 잠깐 멎었다.
그는 내 가방 쪽,
그러니까 휴대폰이 들어간 곳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남자 이름.”
그의 시선이 다시 내게 닿았다.
“계속 보이니까 짜증 나.”
심장이 세게 흔들렸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위험했다.
지금 강태준은.
정말로.
⸻
[작가후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늦게 도착한 말은 하루를 흔들고,
말하지 못한 질투는 더 조용하게 번집니다.
《미열주의》는 다음 화에서 이어집니다.
집에 들어와가방을 소파 위에 내려놓았다.옷을 갈아입고 냉장고를 열어봤다.계란이 있었고,며칠 전에 사둔 반찬도 조금 남아 있었다.간단하게 밥을 데우고계란 하나를 부쳤다.식탁에 앉아 몇 숟갈 먹다가문득 태준이 생각났다.뭐라도 챙겨 먹으라고는 했는데.태준도 지금쯤뭔가 먹고 있으려나.잠깐 그런 생각을 하다가나는 남은 밥을 마저 먹었다.밥을 다 먹고그릇을 싱크대에 가져다 놓았다.물을 틀고 접시를 씻고 있는데거실 쪽에서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손에 묻은 물을 털고수건에 대충 닦은 뒤 화면을 봤다.태준이었다.[저녁 먹었어.]나는 메시지를 보고 웃었다.[편의점?]답장은 금방 왔다.[아니.][그럼 뭐 먹었어?]조금 있다가사진 한 장이 도착했다.뚝배기에 담긴 순두부찌개였다.밥그릇은 이미 반쯤 비어 있었다.사진을 한동안 보다가 답장을 썼다.[제대로 먹었네.][그러는 너는?]나는 싱크대 쪽을 한번 봤다.아직 씻지 않은 프라이팬이 남아 있었다.[나도 먹었어.][뭐 먹었는데?][계란.]잠시 뒤 답장이 왔다.[그게 다야?]나는 웃었다.[밥이랑 반찬도 먹었거든.][그럼 됐네.]아까 내가 했던 말이랑 비슷해서조금 웃음이 났다.[너 지금 내 말 따라 하지.][아닌데.][맞는데.]이번에는 답장이 조금 늦었다.[들켰네.]나는 화면을 보다가작게 웃었다.별것 아닌 이야기를 몇 마디 더 나누고휴대폰을 내려놓았다.남은 설거지를 마저 하고샤워를 했다.머리를 말린 뒤 침대에 누우니하루 종일 쌓였던 피로가 그제야 느껴졌다.알람을 맞추려고 휴대폰을 들었다.태준과 나눈 대화창이 그대로 열려 있었다.마지막 메시지는내가 보낸 웃는 이모티콘이었다.화면을 끄려다가아까 엘리베이터 앞이 다시 떠올랐다.“뭐라도 챙겨 먹어.”그 말을 듣고 돌아봤던 태준.오늘은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그런데도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돌아봤다.나는 잠깐 화면을 바라보다가휴대폰을 옆에 내려놓았다.불을 끄고 눈을 감았는데도조
아침에 눈을 떴을 때어젯밤 일이 먼저 떠올랐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전,태준을 불러 세웠던 순간.태준아.그리고 그 뒤에 어렵게 꺼낸 말.나는 베개 옆에 놓인 휴대폰을 집었다.새 메시지는 없었다.화면을 끄려다가한 번 더 봤다.없네.화면을 보다가어젯밤 태준 얼굴이 잠깐 떠올랐다.나도 좋았어.그 말을 듣고조금 늦게 웃던 얼굴.문이 닫히기 직전까지그 자리에 서 있던 태준의 모습도.어젯밤에는 내가 먼저 올라와 놓고도한동안 그 얼굴이 계속 떠올랐다.그 생각까지 하고 나니괜히 웃음이 났다.나는 휴대폰을 내려놓고이불을 걷었다.그리고 다시 한 번휴대폰을 바라보다가침대에서 일어났다.세수를 하고 나와건조대 위에 펼쳐 둔 검은 니트를 만져봤다.다 말라 있었다.나는 니트를 걷어옷걸이에 걸었다.어제부터 거실 한쪽에 있던 옷이다시 옷장으로 들어갔다.나는 잠깐 옷장 안을 바라보다가문을 닫았다.거울 앞에 서서 머리를 정리하고가방을 챙겼다.⸻오전에는 휴대폰을 볼 틈이 거의 없었다.회의가 하나 길어졌고,자리로 돌아오자 바로 수정 요청이 들어왔다.한동안 모니터만 보고 있다가점심시간이 가까워져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휴대폰을 챙기려고 화면을 켰다.메시지가 몇 개 와 있었다.회사 단체방 하나,광고 두 개.알림을 지우다가태준과의 대화창이 눈에 들어왔다.마지막 메시지는 어제 그대로였다.그런데 이상하게화면보다 먼저 떠오른 건어젯밤 내가 직접 했던 말이었다.나도 좋았어.그리고 그 말을 듣던 태준의 얼굴.나는 잠깐 화면을 보다가휴대폰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밥 먹으러 안 가요?”옆자리에서 부르는 소리에고개를 들었다.“가요.”휴대폰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점심을 먹고 돌아온 뒤에는다시 일이 몰렸다.오후가 지나면서는아침부터 자꾸 눈에 들어오던 휴대폰도한동안 잊고 있었다.그러다 퇴근 직전,파일을 전송하고 의자에 등을 기대는 순간문득 생각났다.오늘은 연락이 없네.아침부터 몇 번이나
그 뒤로는잠깐 말이 없었다.어색하지는 않았다.조금 전까지 했던 얘기가그냥 우리 사이에 남아 있었다.엘리베이터가 멈췄다.태준이 먼저 내릴 층이었다.문이 열리자태준이 한 걸음 나갔다.“들어가.”“응.”태준이 돌아서려 했다.그 순간어젯밤부터 계속 남아 있던 말이 떠올랐다.생각할 틈도 없이입이 먼저 열렸다.“태준아.”태준이 멈췄다.뒤를 돌아봤다.“응?”막상 불러놓고 나니말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문이 닫히기 전까지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았다.나는 열림 버튼을 눌렀다.태준이 그걸 보고가만히 기다렸다.“그날.”“응.”“분리수거하고.”태준의 표정이 아주 조금 달라졌다.무슨 말인지 알아들은 것 같았다.나는 버튼을 누른 손에조금 힘을 줬다.“나도 좋았어.”말하고 나니생각보다 별것 아닌 문장처럼 들렸다.어젯밤에는몇 번이나 쓰고 지웠는데.태준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입술이 조금 벌어졌다가다시 닫혔다.짧게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났다.그리고 조금 늦게 말했다.“응.”나는 태준을 봤다.태준도 나를 보고 있었다.“그 말 하려고 불렀어?”“응.”이번에는 내가 먼저 대답했다.태준의 입가가아주 조금 올라갔다.“알았어.”나는 열림 버튼에서 손을 뗐다.“가.”“응.”문이 천천히 닫혔다.마지막까지태준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집에 들어오자마자거실에 있는 건조대부터 봤다.검은 니트는거의 다 말라 있었다.소매 끝을 만져봤다.아침의 축축한 느낌은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나는 니트를 조금 더 펴놓고손을 뗐다.씻고 나와 침대에 앉았다.휴대폰은 조용했다.나는 화면을 켜지 않았다.어젯밤에는입력창에 썼다가 지웠던 말이었다.[어제 나도 좋았어.]오늘은 문자로 보내지 않았다.그냥 말해버렸다.태준이 잠깐 숨을 삼키던 얼굴이뒤늦게 떠올랐다.나도 좋았어.입 밖으로 나온 말이생각보다 오래 남았다.⸻【태준의 속마음 43】문이 닫힌 뒤에도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엘리
오후 3시 17분.휴대폰 화면이 켜졌다.[강태준]하던 일을 멈추고메시지를 열었다.[니트는 다 말랐어?]검은 니트.어젯밤 손빨래를 하고건조대 위에 펼쳐둔 채 나왔다.아침에 만져봤을 때도소매 끝은 아직 조금 축축했다.[아침엔 아직 좀 축축했어.]잠시 뒤 답장이 왔다.[저녁이면 마르겠다.][아마.]나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짧은 대화였다.다시 모니터를 보려다가어젯밤 쓰다 지운 문장이 잠깐 떠올랐다.[어제 나도 좋았어.]나는 화면을 끄고다시 하던 일을 했다.⸻퇴근하고 역을 나왔을 때는이미 밖이 어두워져 있었다.비는 오지 않았지만공기가 조금 눅눅했다.나는 가방끈을 고쳐 잡고오피스텔 쪽으로 걸었다.하루 종일 앉아 있었더니어깨가 뻐근했다.횡단보도를 건너골목으로 들어섰을 때였다.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사람이 보였다.멀리서는 몰랐는데가까워지자 태준이었다.태준도 나를 봤다.“이제 와?”“응. 조금 늦었어.”우리는 자연스럽게같은 방향으로 걸었다.“어디 갔다 와?”“저녁 먹고. 집에 먹을 게 없어서.”“장 봐.”“귀찮아.”“그러다 또 편의점 가지.”태준이 웃었다.“오늘은 안 갔어.”“잘했네.”말하고 나서둘 다 잠깐 웃었다.내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그 말 이제 네 거 됐네.”“원래 내 말 아니었어?”“아닌데. 내 건데.”“언제부터?”“몰라.”그런 얘기를 하면서골목을 천천히 걸었다.별것 아닌 말들이었다.그래서 편했다.오피스텔 건물이 보일 때쯤태준이 나를 한번 봤다.“피곤해?”나는 그를 돌아봤다.“티 나?”“조금. 많이 피곤해 보이는 건 아니고.”나는 앞을 보며 걸었다.“너는 그런 거 진짜 잘 본다.”태준이 나를 한번 봤다.“사람 피곤한 거.”“얼굴 보면 보이잖아.”“나는 잘 모르겠던데.”“너는 네 얼굴을 못 보니까.”“그런가.”몇 걸음 더 갔다.그러다 문득예전 생각이 났다.“예전에도 그랬잖아. 내가 피곤한 거 먼저 알고, 기분 안 좋은 것도 알아보고
옷을 갈아입고검은 니트를 들고 욕실로 갔다.세면대에 미지근한 물을 받고세제를 조금 풀었다.니트를 물에 담갔다가손바닥으로 천천히 눌렀다.세탁기에 넣지 않은 건괜히 늘어날까 봐서였다.몇 번 헹군 뒤마른 수건 사이에 넣고 눌러 물기를 뺐다.젖은 니트는 생각보다 무거웠다.나는 거실에 작은 건조대를 펴고그 위에 니트를 평평하게 올려두었다.소매를 펴고,목 부분도 한번 만졌다.아까까지 세탁실에 놓여 있던 옷이이제 내 집 안에 있었다.별일 아닌데하루가 조금 길게 이어지는 기분이 들었다.씻고 나오다욕실에 걸린 수건이 눈에 들어왔다.태준이 접었던 수건.이미 한번 펼쳐 썼으니모양은 더 흐트러져 있었다.나는 그걸 보다가조금 웃었다.수건 하나가 뭐라고.그런데도 태준이 접던 손이 떠올랐다.모서리가 조금 안 맞던 것까지.나는 수건을 욕실에 걸어두고식탁으로 돌아왔다.휴대폰이 놓여 있었다.태준과의 대화창을 열었다.[찾았어.][다행이네.]그 아래에는 아무것도 없었다.나는 입력창을 눌렀다.한참 빈칸만 보고 있다가문장을 썼다.[어제 나도 좋았어.]손가락이 보내기 버튼 가까이 갔다가 멈췄다.문장을 다시 읽었다.틀린 말은 아니었다.오히려 너무 맞는 말이었다.그래서 쉽게 보내지 못했다.나는 화면을 그대로 둔 채잠깐 식탁에 앉아 있었다.어제 태준이 했던 말은이미 내 쪽으로 왔다.나도 좋았어.나는 그걸 들었고,오늘까지 몇 번이나 떠올렸다.내 대답은 아직내 안에만 있었다.그렇다고 없는 말은 아니었다.나는 결국 문장을 지웠다.휴대폰을 내려놓고거실 쪽을 봤다.건조대 위의 검은 니트가조용히 펼쳐져 있었다.아직 물기가 남아 있었다.내일 아침에도덜 말라 있을 것 같았다.나는 소매 끝을 한번 만져보고손을 뗐다.조금 더 두면 된다.다 마를 때까지.말도 그랬다.나도 좋았어.오늘은 보내지 않았다.그렇다고모른 척하지도 않았다.그 말은 여전히내 안에 남아 있었다.⸻【서윤의 기억 30】예전에
다음 날 아침,세수를 하고 욕실 선반에 손을 뻗었다.수건 몇 장이 쌓여 있었다.그중 하나가 덜 반듯했다.조금.손이 먼저 그쪽으로 갔다.어젯밤 태준이 접었던 수건이었다.집에 와서 다시 펴지 않고그대로 올려둔 것.나는 수건으로 얼굴의 물기를 눌러 닦았다.평소 쓰던 것과 다를 것도 없었다.그런데 어젯밤의 세탁실이잠깐 같이 떠올랐다.건조기 돌아가는 소리.따뜻한 세제 냄새.나란히 서서 수건을 접던 손.그리고,나도 좋았어.나는 수건을 얼굴에서 내렸다.태준이 그렇게 말했을 때나는 겨우 한마디 했다.응.그때는 그게 전부였다.말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나도 좋다고 말할 수 있었다.분리수거가 끝난 뒤에도조금 더 같이 있고 싶었던 것도 나였고,그 몇 분이 다음 날까지 남아 있었던 것도나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그런데 입 밖으로 나온 건응, 하나였다.지금 와서 생각하니조금 아쉬웠다.나는 수건을 다시 걸어두고가방을 챙겼다.옷장을 열었다가손이 잠깐 멈췄다.검은 니트.나는 옷장 안을 한번 더 봤다.없었다.의자 위에도,세탁 바구니 안에도 없었다.그제야 어젯밤 세탁실이 떠올랐다.셔츠와 수건을 세탁기에 넣으면서따로 빼두었던 검은 니트.접이식 테이블 한쪽.그리고 그대로 나왔다.“아.”시간을 확인했다.다시 내려가기에는 조금 애매했다.퇴근하고 찾으면 되겠지.태준이 접어준 수건은 챙겨왔으면서정작 내 옷을 두고 왔다.나는 옷장 문을 닫았다.그때 휴대폰이 울렸다.[강태준]화면을 열었다.[나 어제 세탁실에 세탁망 두고 온 것 같아서 내려왔는데.]잠시 뒤메시지가 하나 더 왔다.[검은 니트 하나 있더라.][네 거 맞지?]나는 화면을 보다가아침부터 찾던 니트를 떠올렸다.[맞아.][나도 방금 생각났어.]태준의 답장이 왔다.[챙겨둘까?]잠깐 고민하다 답했다.[아니. 그냥 둬.][퇴근하고 찾아서 집에서 빨게.][응.]거기서 대화는 끝났다.나는 휴대폰을 가방에 넣으려다가다시 한번 화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