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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가까워진 온도, 무너지는 선

Author: 윤미주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6-28 19:14:22

했어.

네가 못 들었어.

가지 말라고 했어.

출근길 내내 그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버스 창밖으로 익숙한 건물들이 지나갔다.

평소 같았으면 출근 시간의 소음에 묻혀버렸을 생각들이,

오늘은 이상하게 더 선명하게 남았다.

강태준의 목소리.

낮고 조용했던 눈.

문 앞에 서서 나를 보던 얼굴.

나는 휴대폰 화면을 껐다 켰다.

별다른 연락은 없었다.

그게 당연한데,

나는 자꾸 화면을 확인하고 있었다.

기다리는 것도 아닌데.

아니라고 생각할수록,

손은 더 자주 휴대폰을 찾았다.

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3년 전 그날.

비가 많이 왔다.

그건 기억난다.

현관 앞에 세워둔 젖은 우산.

내가 들고 있던 가방.

끝이라고 말하던 내 목소리.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던 강태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렇게 믿었다.

그래야 떠날 수 있었으니까.

그가 붙잡지 않았다고 믿어야,

내가 혼자 버려진 사람처럼 덜 초라해질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가지 말라고 했어.

나는 손끝에 힘을 줬다.

기억은 이상하다.

분명 내가 가진 것이라고 믿었는데,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갑자기 흔들린다.

그날 정말 내가 못 들은 걸까.

아니면.

듣고도 못 들은 척한 걸까.

회사 앞 정류장에 도착했을 때도,

머릿속은 정리되지 않았다.

나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천천히 걸었다.

아침 공기는 차가웠고,

건물 유리창에는 지친 얼굴 하나가 비쳤다.

내 얼굴이었다.

잠을 못 잔 얼굴.

그리고 아직도 흔들리는 얼굴.

“한서윤 대리님.”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정우진이었다.

같은 팀 선배.

늘 단정한 셔츠 차림에,

말투도 표정도 적당히 부드러운 사람.

그는 내 얼굴을 보더니 살짝 눈썹을 올렸다.

“괜찮아요?”

“네?”

“얼굴 안 좋아 보여서요.”

나는 급히 표정을 정리했다.

“잠을 좀 못 잤어요.”

“이사 때문에요?”

“네. 집이 아직 낯설어서.”

거짓말은 아니었다.

집이 낯선 건 맞았다.

다만 그 집 안에 너무 익숙한 사람이 자꾸 들어오는 게 문제였을 뿐.

우진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아침은 먹었어요?”

나는 순간 대답이 늦었다.

식탁 위에 놓여 있던 쇼핑백이 떠올랐다.

토스트.

샌드위치.

예전에 좋아하던 커피.

그리고 그걸 가져온 사람.

“대충요.”

“대충은 안 먹은 거랑 비슷한데.”

우진이 웃으며 종이컵을 내밀었다.

“회의 전에 커피라도 마셔요.”

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받아 들었다.

“감사합니다.”

따뜻한 커피였다.

손끝이 조금 풀렸다.

우진은 별말 없이 내 옆을 걸었다.

적당한 거리.

부담스럽지 않은 친절.

이 사람은 늘 그랬다.

선을 넘지 않고,

필요한 만큼만 다가왔다.

그래서 편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오늘은 그 편안함마저 어색했다.

강태준이 너무 많은 말을 남기고 갔기 때문이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우진이 가볍게 물었다.

“새 집은 괜찮아요?”

“네. 나쁘지 않아요.”

“회사랑도 가까워졌죠?”

“그건 좋아요.”

“그럼 다행이네요. 갑자기 이사한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나는 커피 컵을 내려다봤다.

걱정.

그 단어가 오늘 유난히 자주 걸렸다.

걱정하는 척하지 마.

내가 강태준에게 했던 말.

그런데 그는 정말 걱정했던 걸까.

아니면,

그냥 자기 방식대로 나를 붙잡고 있는 걸까.

나는 대답 대신 희미하게 웃었다.

“정신없긴 했는데, 이제 적응해야죠.”

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요. 박스 옮기는 거나, 뭐 그런 거.”

“아니에요. 거의 다 정리했어요.”

“그래도요.”

우진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한 발 물러서며 나를 먼저 들여보냈다.

“혼자 무리하지 말고요.”

그 말은 평범했다.

정말 평범한 말이었다.

그런데 나는 순간 강태준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넌 늘 괜찮은 척하다가,

꼭 제일 안 괜찮을 때 혼자 버티니까.

나는 입술 안쪽을 살짝 깨물었다.

싫다.

정말 싫다.

하루가 시작되기도 전에,

모든 말이 그 남자에게로 이어지는 게.

오전 회의는 길었다.

나는 자료를 넘기고,

메모를 하고,

필요한 부분에 대답했다.

평소처럼 일했다.

그런데 집중이 자꾸 끊겼다.

회의실 유리벽 너머로 사람이 지나갈 때마다,

괜히 시선이 갔다.

검은 셔츠가 보이면 더 그랬다.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강태준이 회사에 올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도 몸이 먼저 반응했다.

그게 싫었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오후 업무가 이어졌다.

메일을 쓰다가도 손이 멈췄다.

가지 말라고 했어.

그 말이 또 떠올랐다.

나는 결국 메모장 한쪽에 아무 의미 없는 단어를 적었다가 지웠다.

끝.

다시 썼다.

끝난 사이.

그리고 그 아래에,

나도 모르게 다른 문장이 남았다.

정말 끝난 걸까.

나는 바로 지웠다.

“한 대리님?”

우진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네.”

“오늘 컨디션 진짜 안 좋아 보이는데, 먼저 들어가도 돼요. 팀장님한테는 제가 말할게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괜찮다는 말이 제일 안 괜찮아 보일 때가 있잖아요.”

나는 순간 멈췄다.

우진은 별뜻 없이 한 말일 것이다.

그런데 그 말마저 또 누군가와 닮아 있었다.

나는 웃어 보였다.

“정말 괜찮아요.”

“그럼 퇴근할 때라도 같이 나가요. 택시 잡아드릴게요.”

“괜찮다니까요.”

내 대답이 조금 빠르게 나왔다.

우진은 나를 보다가 더 묻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부담 주려던 건 아니었어요.”

“아니에요. 제가 예민했어요.”

“이사하면 원래 그래요.”

우진은 부드럽게 웃었다.

편한 사람.

친절한 사람.

선을 넘지 않는 사람.

그런데 이상하게,

그런 사람 앞에서 나는 오히려 마음이 더 복잡해졌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모니터를 봤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몸이 더 무거워졌다.

집에 가야 한다.

그 생각이 낯설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새 집은 그냥 새 집이었다.

오늘은 아니었다.

그 집에는 강태준의 말이 남아 있었다.

그의 손이 닿았던 자리.

그가 문턱을 넘지 않고 멈췄던 거리.

그가 놓고 간 아침.

그가 늦게 꺼낸 말.

전부 그대로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일부러 조금 늦게 회사를 나왔다.

사무실 불이 하나둘 꺼지고,

복도에 사람 소리가 줄어들 때까지 기다렸다.

혼자 엘리베이터를 타고,

건물 밖으로 나왔다.

밤공기가 얼굴에 닿았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집까지는 멀지 않았다.

버스를 탈 수도 있었고,

걸어갈 수도 있었다.

잠깐 고민하다가 나는 걸었다.

걷다 보면 생각이 조금은 정리될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걸을수록 오히려 더 선명해졌다.

태준이 했던 말.

네가 못 들었어.

그날.

가지 말라고 했어.

나는 신호등 앞에서 멈췄다.

빨간불이었다.

차들이 지나갔다.

그 사이로 휴대폰이 진동했다.

드르륵.

나는 무의식적으로 화면을 봤다.

정우진.

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

“네, 선배.”

— 한 대리님, 혹시 퇴근했어요?

“네. 방금 나왔어요.”

— 아, 제가 파일 하나 확인 부탁드리려고 했는데. 급한 건 아니고요.

“지금 볼까요?”

— 아니에요. 내일 봐도 됩니다. 목소리 들어보니까 더 피곤해 보이는데요.

나는 작게 웃었다.

“목소리로도 보여요?”

— 오늘 하루 종일 보였어요.

“죄송해요. 티 안 내려고 했는데.”

— 죄송할 일은 아니죠. 집 조심히 들어가요. 도착하면 연락해요.

나는 잠깐 대답이 늦었다.

도착하면 연락해요.

평범한 말이었다.

정말 아무 뜻 없는 말.

그런데 또 떠올랐다.

비밀번호 바꿔.

창문 잠금장치도 확인하고.

그런 말들.

나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네.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었다.

신호가 바뀌었다.

나는 횡단보도를 건넜다.

그때였다.

조금 떨어진 건물 입구 쪽에 선 사람이 보였다.

검은 코트.

긴 그림자.

낯설지 않은 자세.

나는 걸음을 멈췄다.

강태준이었다.

그는 내 집 건물 앞에 서 있었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처럼.

아니.

정말 기다리고 있었겠지.

그는 나를 보자 천천히 몸을 돌렸다.

시선이 먼저 내 손에 닿았다.

정확히는,

방금 전화를 끊은 내 휴대폰에.

나는 괜히 손을 내렸다.

태준은 아무 말 없이 나를 보고 있었다.

밤이 그의 얼굴 위로 내려앉아 있었다.

조용하고,

낮고,

조금 위험한 얼굴.

나는 먼저 입을 열었다.

“…왜 여기 있어.”

“기다렸어.”

“왜.”

“네가 늦길래.”

“내가 언제 들어오는지 네가 왜 신경 써.”

태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더 답답했다.

나는 휴대폰을 가방 안에 넣으려 했다.

그때 다시 진동이 울렸다.

드르륵.

아까 끊었던 전화가 다시 오는 건 아니었다.

메시지였다.

화면 위에 이름이 떴다.

정우진.

태준의 시선이 그 이름에 멈췄다.

공기가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나는 바로 화면을 껐다.

“회사 사람이야.”

“안 물었어.”

“근데 보는 눈이 물어보던데.”

태준의 턱선이 천천히 굳었다.

아.

나는 그 표정을 알고 있었다.

강태준이 질투할 때 나오는 얼굴.

문제는,

저 남자는 화가 날수록 더 조용해진다는 거였다.

“받아.”

그가 말했다.

“뭐?”

“연락.”

“메시지야.”

“그럼 봐.”

“나중에 보면 돼.”

“왜.”

태준이 천천히 내 쪽으로 가까워졌다.

“나 때문에 눈치 보여?”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가 그걸 봤다.

늘 그렇듯.

태준은 아주 낮게 웃었다.

그런데 전혀 웃는 얼굴이 아니었다.

“한서윤.”

“…왜.”

“나 지금 되게 별로인 생각 중인데.”

숨이 잠깐 멎었다.

그는 내 가방 쪽,

그러니까 휴대폰이 들어간 곳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남자 이름.”

그의 시선이 다시 내게 닿았다.

“계속 보이니까 짜증 나.”

심장이 세게 흔들렸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위험했다.

지금 강태준은.

정말로.

[작가후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늦게 도착한 말은 하루를 흔들고,

말하지 못한 질투는 더 조용하게 번집니다.

《미열주의》는 다음 화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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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장 확인은 생각보다 길어졌다.벽면 조명 밝기,패널 높이,동선 안내 사인,관람객이 처음 마주하는 시야.확인해야 할 게 많았다.나는 설치팀과 이야기를 나눴고,태준은 조금 떨어져서 도면을 확인했다.가끔 시선이 마주쳤다.그럴 때마다 태준은 먼저 뭔가 말하려다가 멈췄다.나는 그걸 봤다.너무 잘 보였다.말하고 싶은데 참는 사람.다가오고 싶은데 멈추는 사람.그걸 보니 속이 이상했다.편해야 하는데,편하지만은 않았다.왜냐하면 태준이 참고 있다는 걸내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그게 나를 안심시키면서도조금 아프게 했다.내가 저 사람을 저렇게 만들었나.아니다.그건 아니다.우리가 그렇게 만든 거다.그와 나,둘 다.나는 괜히 자료를 고쳐 잡았다.그때 태준이 가까이 다가왔다.아까보다 조금 가까웠다.그래도 너무 가깝지는 않았다.“이쪽 조명, 너무 세지 않아?”그가 물었다.나는 벽을 봤다.내가 쓴 서브 카피 위로 빛이 조금 날카롭게 떨어지고 있었다.“세네.”“낮출까?”“응. 이 문장은 너무 밝으면 이상해.”“왜.”“너무 설명하는 것 같아 보여.”태준은 내 말을 듣고 벽을 봤다.“설명하는 것.”“응.”“그럼 어느 쪽이 나아?”나는 잠깐 생각했다.“조금 덜 보이게.”“…”“근데 안 보이면 안 되고.”태준이 아주 작게 웃었다.“어렵네.”“원래 그래.”“문장이?”나는 그를 봤다.“사람이.”말하고 나서또 후회가 왔다.왜 자꾸 이런 식으로 말이 나가는지 모르겠다.업무 얘기를 하다가갑자기 사람 얘기처럼 들리는 말.정확히는,태준과 나 얘기처럼 들리는 말.태준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그냥 나를 보았다.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으려고 했지만결국 먼저 벽을 봤다.“조명 낮추자.”“응.”그가 설치팀에 손짓했다.조명이 조금 어두워졌다.문장은 훨씬 나아졌다.사라진 줄 알았던 온도.오래 머문 감각은, 다시 돌아온다.두 문장이 벽 위에서 조금 숨을 쉬는 것처럼 보였다.나는 낮게 말했다.“이제

  • 미열주의   146화. 조금만, 허락된 마음 (2)

    전시장에 도착했을 때,안쪽은 아직 반쯤 어두웠다.정식 조명이 다 켜지지 않아공간 전체가 조금 푸르게 가라앉아 있었다.설치팀 사람들이 패널 위치를 맞추고 있었고,한쪽 벽에는 메인 카피가 걸려 있었다.사라진 줄 알았던 온도나는 그 앞에서 잠깐 멈췄다.그 아래에는 내가 쓴 서브 카피가 출력물로 붙어 있었다.오래 머문 감각은, 다시 돌아온다.내 문장인데볼 때마다 남의 비밀을 훔쳐보는 기분이 들었다.사라진 줄 알았던 온도.오래 머문 감각.다시 돌아온다.나는 정말일을 하고 있는 걸까.아니면 자꾸 내 마음을 벽에 붙이고 있는 걸까.그때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일찍 왔네.”태준이었다.나는 바로 돌아보지 못했다.먼저 심장이 반응했다.정말 짜증 난다.목소리 하나에 이렇게 되는 게.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태준은 검은 셔츠 위에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손에는 도면이 들려 있었고,머리는 평소보다 조금 흐트러져 있었다.밤에 잠을 잘 못 잤나.그 생각이 먼저 들었다.그러고는 바로 지웠다.내가 왜 그걸 신경 쓰는데.“너도 일찍 왔네.”내 목소리는 다행히 멀쩡했다.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응.”나는 그를 봤다.“또 응.”태준이 아주 작게 웃었다.“다른 말 생각 중이었어.”“뭔데.”“안녕.”나는 어이가 없어서 그를 봤다.“그걸 생각해야 나와?”“요즘은 그래.”“진짜 이상해졌네.”“알아.”그 대답이 너무 태준 같아서나는 웃을 뻔했다.웃으면 안 될 것 같아서벽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웃으면 너무 티 날 것 같았다.태준은 내 옆으로 다가오지 않았다.조금 떨어진 자리에 섰다.딱 한 사람 정도 들어갈 수 있는 거리.그 거리가 보였다.너무 또렷하게.예전의 태준은 이런 거리를 몰랐다.가까워지고 싶으면 가까워졌고,내가 물러나면 따라왔다.그게 나를 더 불안하게 했다.그런데 지금은다가오고 싶은 사람처럼 서 있으면서도멈춰 있었다.나는 그게 고맙기도 하고,이상하게 서운하기도 했다.정말 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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