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7화

Author: 해각
“뭐라고?”

봉현욱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설마 내가 그런 헛소리를 믿을 것 같으냐?”

유시연 역시 제 입을 틀어막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이를 악문 채 끝내 말을 이어 갔다.

“시간이 지나면 진심은 드러나는 법입니다!”

억울하게 모함당했다는 말도 믿지 않고, 그렇다고 자신을 연모한다는 말도 믿어 주지 않으니 유시연으로서는 참으로 난감한 노릇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진심을 알게 된다라…….”

봉현욱은 입술을 슬쩍 핥았다. 문득 이 앙큼한 것이 제법 흥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시간을 끌어 보려는 거라고 솔직히 말하는 게 어떠냐.”

유시연은 할 말을 잃었다.

단번에 속내를 꿰뚫린 셈이었다. 사실 그녀에게 그런 속셈이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수작 부릴 생각 마라. 네가 무슨 꿍꿍이를 품고 있든, 이곳은 네가 머물 곳이 아니다!”

봉현욱은 조금도 사정을 봐주지 않고 그녀를 거칠게 밀쳐 냈다. 다시 물속으로 쓰러진 유시연은 그가 자신을 두고 가 버릴까 봐 다급히 손을 뻗어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 순간 겨우 아물어 가던 상처가 다시 터지며 피가 번졌고, 순식간에 그의 옷소매를 붉게 물들였다.

봉현욱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지만, 그녀를 뿌리치지는 않았다.

“전하, 부디 이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저를 곁에 두어 주십시오. 저는 이 아이까지 저를 따라 이리저리 떠도는 신세로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유시연은 굳은 결심이라도 한 듯 아랫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정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면…… 아이가 태어난 뒤에는 전하의 곁을 떠나겠습니다.”

봉현욱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그녀의 눈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이내 자조 어린 웃음을 흘렸다.

“그 아이가 나를 따라 사는 것이, 너를 따라 사는 것보다 나을 것 같으냐?”

유시연은 그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애초에 그 아이가 생긴 것부터가 잘못이거늘, 어찌 굳이 그 잘못을 되풀이하려 하느냐?”

봉현욱은 그녀의 손을 뿌리치며 냉담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지워 버려라. 어차피 낳는다 해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제 목숨이 언제 끊어질지조차 알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런 자신이 어찌 아이 하나를 끝까지 지켜 낼 수 있겠는가.

약점은 하나면 충분했다. 더는 늘리고 싶지 않았다.

유시연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봉현욱이 냉담하게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려 하자, 그녀는 다급히 외쳤다.

“전하, 아무리 사나운 짐승이라도 제 새끼는 해치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이 아이는 전하의 혈육이 아닙니까!”

봉현욱의 발걸음이 문득 멈춰 섰다.

“그래도 하나의 생명입니다. 부디 이 아이만은 살려 주십시오. 아이가 태어나면 저는 결코 이곳에 눌러앉지 않겠습니다!”

유시연은 두 주먹을 힘껏 움켜쥐었다.

봉현욱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깊게 가라앉은 눈빛은 마치 그녀의 말이 진심인지 가늠하려는 듯했다. 잠시 후, 그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그 전에 옷부터 좀 걸치고 본왕과 이야기하는 게 어떻겠느냐?”

유시연은 순간 멍하니 굳었다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신이 여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였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극심한 두려움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이런 모습으로 봉현욱과 마주하고 있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했다.

그 사실을 깨닫자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개졌다. 그녀는 황급히 몸을 일으켜 곁에 둔 의복을 집어 들고 급히 걸쳤다.

하지만 이곳은 탕실이라 침의 외에는 달리 걸칠 만한 옷이 없었다.

유시연은 반쯤 비치는 붉은 비단 잠옷을 대충 걸친 채였다. 가슴 쪽으로는 새하얀 살결이 훤히 드러나 있었고, 한 줌에 잡힐 듯 가느다란 허리에는 붉은 비단 자락이 느슨하게 감겨 있었다. 애써 가리려 한 것이 오히려 그녀의 몸선을 더욱 도드라지게 해, 묘하게 사람의 시선을 끄는 자태를 자아냈다.

봉현욱은 그런 그녀를 슬쩍 훑어보다가, 까닭 모르게 심장이 순간 덜컥 내려앉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곧 시선을 거두고 그대로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유시연도 황급히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

봉현욱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침상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혼례 이불 위에 놓인 땅콩을 하나 집어 먹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유시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얌전히 그의 발치에 무릎을 꿇은 채,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전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딱 일 년만 이곳에 머물게 해 주시면, 그 뒤로는 절대 눌러앉지 않겠습니다. 얌전히 지내며 전하께서 시키시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결코 폐를 끼치지 않겠습니다!”

봉현욱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이토록 애를 써 제 침상에까지 기어든 여인이 고작 일 년 뒤 순순히 떠나겠다고?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리 없었다.

그는 불쑥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짓궂은 기색이 어린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되물었다.

“시키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겠다고?”

유시연은 떨리는 손으로 그의 옷자락을 붙잡은 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리고 애처로운 모습이 절로 연민을 자아냈다.

“예. 부디 전하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물기 어린 눈동자와 붉은 비단 아래로 은근히 드러나는 요염한 자태를 바라보던 봉현욱은 문득 정신이 아득해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오늘 술을 조금 과하게 마신 탓에 취기가 오른 모양이라 생각했다.

그러다 방금 전 손끝에 닿았던 감촉이 떠오르자, 온몸이 괜스레 불편해졌다.

어차피 그녀는 곁에 남겨 두어야 했다. 이미 부황과 거래를 마친 뒤였으니.

일 년쯤이야 상관없었다.

그때 가서 저 여인이 정말 약속을 지킬지는 두고 보면 될 일이었다.

봉현욱은 살짝 몸을 숙여 그녀의 턱끝을 잡아 올렸다.

“약속은 반드시 지켜라. 괜한 수작은 부리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갈기갈기 토막 내어 개밥으로 던져 줄 것이니!”

짙은 위협이 서린 말에 유시연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남몰래 안도했다.

이 말은 곧, 자신을 남겨 두겠다는 뜻이 아닌가.

“전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신첩이 어찌 감히 그러겠습니까!”

“명심하는 게 좋을 것이다.”

봉현욱이 손을 홱 놓자 유시연은 얼른 몸을 물려 거리를 벌렸다.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한 채 조용히 몸을 낮췄다.

그때 문밖에서 갑자기 소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옥세자님 일행이 오셨습니다! 혼례주를 함께 마시고 신방을 떠들썩하게 하겠다 하십니다!”

“신방을 떠들썩하게 해? 저놈들이 간덩이가 부었군.”

봉현욱은 냉소를 흘리며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의 발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나서야 유시연은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어찌 됐든 무사히 이곳에 남게 된 셈이었다.

적어도 이제는 몸 하나 편히 누일 곳이 생겼다.

일 년이면 충분했다.

유시연은 고개를 들어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다정해 보이는 눈동자 깊은 곳에는 서늘할 만큼 냉정한 빛이 어려 있었다.

반드시 봉현욱을 자신의 손에 쥔 가장 날카로운 칼로 만들어 낼 것이다.

한편, 봉현욱이 밖으로 나오자마자 순식간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저마다 한마디씩 축하를 건넸다.

“전하께서 이리 아름다운 색시를 맞으셨다니, 경하드립니다!”

“어찌 그동안 이리 꽁꽁 숨겨 두셨습니까? 대체 어느 댁 규수입니까?”

“필시 선녀 못지않은 절세미인일 겁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우리 전하의 마음을 움직였을 리 없지요!”

사람들이 일제히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봉현욱은 이 방탕한 무리의 우두머리였다. 온갖 유흥을 다 즐기면서도 이상하리만치 여인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아, 사람들은 그가 남색을 즐기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남몰래 절세미인을 숨겨 두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진옥이 웃으며 물었다.

“혼례도 치르기 전에 첩부터 들이는 겐가? 폐하께서 아시면 노하시지 않겠나!”

“누가 첩을 들인다더냐?”

봉현욱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 말에 좌중이 순간 조용해졌다.

“첩이 아니라니…… 설마 정실로 맞았단 말인가?”

“그렇다.”

봉현욱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가슴 앞으로 늘어진 머리 장식끈을 뒤로 넘겼다.

“오늘 본왕이 아내를 맞았는데, 다들 빈손으로 온 것이냐? 낯짝도 두껍군.”

사람들은 일제히 할 말을 잃었다.

순식간에 좌중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진심인가, 농담인가?”

아무리 봐도 장난처럼 들렸다. 그래도 명색이 현왕인데 정실을 맞으면서 이토록 조용히 치를 수가 있단 말인가. 폭죽 한 발 터뜨리지 않았고, 혼례 소식조차 전혀 들은 바가 없었다.

봉현욱이 코웃음을 쳤다.

“왜, 성지라도 보여 줘야 믿겠느냐?”

“아닙니다, 아닙니다!”

그러자 사람들의 궁금증은 오히려 더욱 커졌다.

“대체 어느 댁 규수가 이리도 재수가 없…… 아니, 이리도 복이 많아 현왕부로 시집온 것인가?”

진옥이 히죽거리며 물었다.

“왜, 다들 내 색시에게 관심이 많은 모양이군. 아예 불러내 함께 술이나 한잔하게 할까?”

낮에는 남의 색시를 두고 음흉한 생각이나 품더니, 밤에는 아예 얼굴까지 보겠다고 들다니. 간덩이가 어지간히 큰 자들이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더는 말해 줄 생각이 없어 보이자, 사람들은 얼른 입을 다물었다.

신방을 소란스럽게 하지는 못하더라도 혼례주만큼은 마셔야 했다.

하나같이 술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자들이라, 한번 술자리가 벌어지자 그대로 한밤중까지 이어졌다.

유시연은 봉현욱이 오늘 밤에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한밤중이 되어서야 갑자기 문이 쾅 하고 걷어차이며 벌컥 열렸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미친 폭군 길들이기   제30화

    소진은 그 말에 깜짝 놀라 털썩 무릎을 꿇었다.“장공주 전하, 부디 너그러이 봐주십시오. 저희 마마께서는……”“소진!”유시연이 황급히 그녀의 말을 끊었다.“장공주 전하께서 그저 나와 농을 하시는 것뿐인데, 무엇을 그리 겁내느냐?”“본궁이 농을 하는 것처럼 보이느냐?”봉은희가 차갑게 웃었다.유시연은 봉현욱과 닮은 서늘한 웃음이 봉은희의 눈가에 스치는 것을 보고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전하께서는 이 목 때문에 벌써 오래 고생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궁의 태의들도 아직 고치지 못했고요. 소녀를 믿지 못하시겠다면 다른 명의를 찾아가셔도 좋습니다.”유시연은 바닥에 주저앉은 소진을 일으켜 세운 뒤, 더는 뒤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거기 서라.”봉은희가 눈썹을 치켜올렸다.“유씨 가문 아씨는 몸집은 작아도 제법 강단이 있구나.”“소녀는 좋은 뜻으로 말씀드린 것인데, 전하께서 나쁘게 받아들이시니 어찌 마음이 편하겠습니까.”유시연은 기죽지 않고 담담하게 그녀를 마주 보았다.“무엄하다! 감히 장공주 전하께 불경을 저지르느냐!”곁에 서 있던 자색 옷의 소년이 매섭게 호통쳤다.“물러서라.”봉은희가 손을 들어 소년을 제지했다.“아씨께 지필묵을 가져다드려라.”소년은 순간 멈칫했다. 장공주가 정말 유시연의 말을 받아들일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유시연도 더는 사양하지 않고 자리에 앉아 막힘없이 처방을 써 내려갔다. 다 쓴 종이를 장공주에게 건네며 말했다.“궁의 태의에게 먼저 보여 보신 뒤 약을 지으시길 바랍니다.”봉은희는 처방을 받아 곁의 소년에게 건넸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사람을 시켜 처방에 문제가 없는지 확인한 뒤 약을 지을 생각이었다. 이 정도 경계심조차 없었다면 진작 몇 번이고 목숨을 잃었을 터였다.“본궁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드문데, 너는 제법 특이하구나.”봉은희가 문득 흥미롭다는 듯 유시연을 바라보았다.유시연은 순간 봉현욱을 떠올리고 옅게 웃었다.“아마 전하보다 더 무서운 분을 뵌 적이 있어서겠지요.”변덕스럽고 종잡

  • 미친 폭군 길들이기   제29화

    봉은희가 몸을 돌려 별실로 들어가려던 순간, 유시연이 문득 그녀를 불러 세웠다.“장공주 전하!”“무슨 일이냐?”봉은희가 돌아보았다.“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한 말씀 여쭙고 싶습니다. 목이 다소 불편해 보이십니다. 소녀가 몇 해 동안 의술을 배운 적이 있어, 비슷한 증상을 보이는 분들을 여러 번 뵈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한번 살펴봐 드리고 싶습니다.”“네가 의술까지 할 줄 아느냐?”봉은희가 다소 놀란 표정을 지었다. 국공부의 큰아씨가 도성 제일의 규수라는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거문고와 바둑, 서화와 시문에 두루 능하다는 말은 들었지만, 의술까지 익혔을 줄은 몰랐다.“그저 조금 배운 것뿐입니다.”유시연이 겸손하게 답했다.봉은희의 날카로운 눈빛에 순간 서늘한 기색이 스쳤다. 그녀는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며 말했다.“좋다. 그럼 한번 해보아라.”목이 이렇게 된 지도 벌써 보름 가까이 되었다. 궁의 태의들을 모조리 불러 진찰하게 했지만, 누구 하나 정확한 원인을 짚어내지 못했다.과연 이 어린 아씨에게 무슨 재주가 있는지 한번 지켜볼 생각이었다.소진은 자기네 왕비마마가 장공주 전하를 따라 추월각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어리둥절해졌다. 마음이 급해 이마에 식은땀까지 배어났다.왕비마마가 의술까지 할 줄 아신다니, 자신은 어째서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걸까.도성에서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될 사람을 꼽으라면, 봉현욱 다음이 바로 장공주 전하였다. 두 사람이 한배에서 난 것도 아닌데 성정은 어찌 그리 닮았는지, 오만하고 제멋대로인 데서는 서로 조금도 뒤지지 않았다.왕비마마가 이 까다로운 분의 병을 고쳐 준다고 해서 반드시 상을 받는다는 보장도 없었다. 하물며 고치지 못한다면 무슨 트집을 잡힐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이를 어쩌면 좋을까.소진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유시연의 소매를 살짝 잡아당겼다.“왕비마마…….”그러고는 고개를 저으며 괜히 이 일에 나서지 말라는 뜻을 눈짓으로 전했다.유시연은 그런 소진에게 안심하라는 듯 미소

  • 미친 폭군 길들이기   제28화

    봉현욱은 온몸에 흰 비단옷을 걸치고 있었지만, 소맷자락에는 핏자국이 선명하게 튀어 있었다. 손에 쥔 삼밧줄 역시 피에 흠뻑 젖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두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고, 차갑고 섬뜩한 기운이 감돌았다.유시연의 곁을 스쳐 지나가던 순간, 봉현욱은 문득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입가에는 음산하면서도 어딘가 광기 어린 웃음이 걸려 있었다.말들이 휘몰아치듯 지나가며 찬바람과 먼지를 일으키자, 소진이 얼른 유시연의 앞을 막아섰다.“마마, 많이 놀라셨어요?”유시연은 멍하니 봉현욱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등골을 타고 서늘한 기운이 번지는 듯했다.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린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소진은 어색하게 웃으며 조심스럽게 그녀를 달랬다.“마마, 너무 무서워하지 마세요. 저 사람들은 모두 큰 죄를 지은 자들이라고 들었답니다. 아무리 그래도 제 자식까지 해치는 부모는 없잖아요. 마마 뱃속의 아이는 전하의 핏줄이니, 전하께서도 분명 귀하게 여기실 거예요. 마마께도 함부로 하시지는 않을 거예요.” “알아.”유시연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봉현욱이 잔혹하고 피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직접 눈앞에서 보고 나니 역시 적잖은 충격이 남았다.큰 죄를 지은 자들이라니.방금 끌려가던 사람은 분명 호부상서 방진명이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적, 그를 두고 보기 드문 충신이라고 말한 적도 있었다.그런 사람을 봉현욱이 저토록 가혹하게 다뤘다면……유시연은 가슴 한구석이 답답하게 조여드는 듯했다.하지만 이제 와 그런 생각을 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을까. 지금은 자신의 앞날조차 알 수 없는 처지였다. 남의 집안일까지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유시연은 나직이 한숨을 내쉰 뒤 소진의 손을 잡고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안에 들어서자 청색 옷을 입은 소년 하나가 곧장 다가와 반갑게 맞았다.“두 분, 미리 잡아 두신 방이 있으십니까?”“있어요. 춘화각이에요.”소진이 대답했다.“알겠습니다.

  • 미친 폭군 길들이기   제27화

    “이걸 이렇게 많이 만들었으니, 꽤 힘들었겠구나.”봉현욱은 왕부의 오랜 사람들을 제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애쓴 일을 은근히 비꼰 것이었다.유시연은 그 말에 담긴 놀림을 알아채고 얼른 해명했다.“염려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전하께서 기뻐하신다면 이 정도 수고쯤은 아무것도 아니지요. 게다가 재료는 모두 주방에서 손질했고, 완자만 제가 직접 만들었어요. 그러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하나도 힘들지 않았어요.”봉현욱은 그저 웃었다.이 여인이 정말 제 뜻을 알아듣지 못한 건지, 아니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말만 들으면 어찌나 그럴듯한지. 자신이 갑자기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애초에 제 몫 따위는 준비되어 있지도 않았을 터였다.“다 먹은 것 같은데, 언제까지 거기 앉아 있을 셈이냐?”봉현욱이 그녀의 엉덩이를 가볍게 두드렸다.틈만 나면 어떻게든 자신에게 들러붙으려는 게 분명했다.유시연은 그제야 아직도 그의 품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화들짝 몸을 일으켰다.“괜한 수작 부리지 말고, 배나 조심해라.”봉현욱은 아직 티도 나지 않는 그녀의 배를 힐끗 내려다본 뒤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어둠 속에 숨어 있던 소칠이 얼른 그의 뒤를 따랐다.“저 작은 것은 하루가 멀다 하고 잔꾀를 부리는군.”봉현욱이 못마땅한 듯 코웃음을 쳤다.소칠은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신이 보기에는 그렇지도 않습니다. 왕비마마께서 요즘은 꽤 얌전히 지내시는 듯한데요.”아예 대문 밖으로 나가지도 않으실 정도인데, 대체 뭘 더 바라시는 건지 소칠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얌전하긴 뭐가 얌전해. 기루도 겁 없이 드나들고, 틈만 나면 본왕 품에 앉으려 드는데 그게 얌전한 사람이냐?”봉현욱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소칠을 바라보았다. 마치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시선이었다.소칠은 할 말을 잃었다.소칠이 보기에는 분명 전하께서 먼저 억지로 왕비마마를 제 무릎에 앉힌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 도리어 상대를 탓하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게다가 그렇게

  • 미친 폭군 길들이기   제26화

    유시연이 좀처럼 움직이지 않자, 봉현욱이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본왕이 못마땅한 게냐?”“어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유시연은 어색하게 웃으며 짐짓 수줍은 표정을 지었다. 젓가락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 탓에 양념 한 방울이 봉현욱의 옷자락 위로 떨어졌다. 유시연은 슬쩍 그것을 내려다보다가 닦아 주려 손을 뻗으려 했지만, 차마 손을 대지는 못했다.“뭘 그리 보고 있느냐?”봉현욱이 그녀의 시선을 따라 내려다보더니, 눈빛이 묘하게 깊어졌다.“여기 앉고 싶은 게냐?”그는 느긋하게 몸을 뒤로 기대며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 역시 이 여인이 얌전히만 있을 리 없었다. 이번에는 또 무슨 꿍꿍이인지 지켜볼 생각이었다.유시연은 입꼬리를 씰룩였다. 맹세코 그런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다.“전하, 정말 왜 이러십니까. 보는 눈도 이렇게 많은데…….”유시연이 짐짓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사람들이 있어서 부끄러웠던 것이냐?”봉현욱이 왕 집사에게 손짓하자, 그는 곧바로 뜻을 알아듣고 조 어멈과 소진을 데리고 자리를 비웠다.“이리 오너라.”봉현욱이 제 무릎을 가볍게 두드렸다.유시연은 순진한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유시연은 그 뜻을 바로 알아듣지 못한 채, 정말 제 무릎에 앉으라는 말인지 의아해했다.봉현욱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이제 아무도 없는데 뭘 그리 부끄러워하느냐? 여기 앉고 싶어 한 게 뻔히 보이는데.”유시연은 말문이 막혔다.대체 무엇을 보고 자신이 그의 무릎에 앉고 싶어 한다고 생각한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래도 결국 마지못해 그의 무릎 위로 옮겨 앉았다. 봉현욱의 무릎에 앉는 게 처음은 아니었지만, 그럴 때마다 가시방석에 앉은 듯 불편하기만 했다.워낙 성정이 변덕스러운 사람이라, 언제 갑자기 심기가 틀어져 자신을 밀쳐낼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유시연이 조심스럽게 자리를 잡자, 가벼운 몸이 봉현욱의 무릎 위에 살며시 내려앉았다. 봉현욱이 웃으며 일부러 다리를 살짝 움직이자, 유시연은 화들짝 놀라 본능적으로 그의 목을

  • 미친 폭군 길들이기   제25화

    “전하, 앉으십시오!”유시연이 얼른 의자를 끌어와 그의 곁에 놓았다.“전하, 오해하신 겁니다.”“내가 오해를 했다고?”봉현욱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는 그녀를 바라보다 자리에 앉아 느긋하게 다리를 꼬았다. 이번에는 또 무슨 핑계를 댈지 들어볼 참이었다.유시연은 슬쩍 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전하, 신첩이 오늘 이렇게 한 것은 사실 모두 전하를 위해서였습니다.”“나를 위해서?”봉현욱은 기가 막혀 웃음이 나올 뻔했다. 그는 다른 상 위에 남은 국물과 음식 찌꺼기를 훑어본 뒤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설마 이렇게 사람들을 불러 모아 잔치를 벌인 게, 전부 나한테 네 솜씨를 보여 주려고 한 짓이라는 말이냐?”“역시 전하는 총명하십니다. 신첩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단번에 알아보셨네요.”유시연이 짐짓 놀란 표정을 지었는데, 제법 그럴듯해 보였다.“하!”봉현욱이 차갑게 웃었다.“본왕이 그렇게 만만해 보이느냐? 결국 남은 국물이나 맛보게 하려던 것 아니냐?”“아닙니다!”유시연이 서러운 표정을 지었다.“이건 제가 새로 배운 요리입니다. 전골이라고 하는데, 아직 제대로 만들어 본 적이 없어서 맛이 어떨지 저도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감히 전하께 바로 올릴 수가 없었어요. 전하께서 안 계신 틈에 다른 사람들에게 먼저 맛을 보게 하고, 어떤지 의견도 들어보려 했습니다. 저녁에는 다시 제대로 준비해서 전하께 올리려고 했고요.”사실 전골은 유시연이 직접 만들어 낸 음식이 아니었다. 사부에게서 배운 것이었다. 사부는 늘 별난 음식을 이것저것 만들어 내곤 했는데, 하나같이 그녀로서는 듣도 보도 못한 것들이었다.봉현욱은 속으로 기가 막혔다. 말만 들으면 그럴듯하기 짝이 없었다. 저렇게 능청스럽게 둘러대는 솜씨만큼은 정말 타고난 모양이었다.그뿐만이 아니었다. 곁에 있던 조 어멈과 소진, 왕 집사까지도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유시연을 바라보았다. 자기네 왕비마마가 이렇게 뻔한 거짓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늘어놓을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