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혜숙의 말에 하린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차를 권하는 일이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름도 외웠고 어떤 차를 좋아하시는지도 적어 두었다.그녀는 찻잔이 놓인 테이블 앞으로 다가갔다.“윤정희…….”말을 시작하자 세 여자가 동시에 그녀를 바라보았다.하린은 멈췄다.누가 윤정희 여사님인지 몰랐다.회색 정장을 입은 여자일까.아니면 분홍색 재킷을 입은 여자일까.혜숙이 물었다.“왜 그러니? 아까 그렇게 열심히 외우더니 손님들 앞에서는 이름도 생각 안 나?”하린은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이름은 외웠어요. 근데…… 누가 누군지 모르겠어요. 어머니, 한 번만 알려 주세요. 응?”혜숙은 손님들을 향해 웃었다.“보셨죠? 제가 괜히 걱정하는 게 아니라니까요. 이름을 외우는 것과 사람을 알아보는 게 다르다는 것도 일일이 설명해 줘야 해요.”하린은 고개를 숙였다.“미안해요…….”“그럼 다시 해 보자. 이분이 누구시지?”혜숙은 회색 정장을 입은 여자를 가리켰다.하린은 아까 가장 먼저 들어온 사람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윤정희…… 맞아요?”“박명선 여사님이잖아. 그럼 이분은?”이번에는 분홍색 재킷을 입은 여자를 가리켰다.하린은 아까 틀린 이름을 제외하고 생각했다.“윤정희…….”“또 틀렸네. 최경애 여사님이야.”하린은 눈을 크게 떴다.두 번이나 틀렸다.그러면 남은 한 분이 윤정희 여사님일 것이다.그녀는 마지막 여자를 바라보았다.“그럼…… 윤정희 여사님?”“이번에는 맞았네. 셋 중에 마지막 하나는 맞힐 수밖에 없겠지.”혜숙의 말에 윤정희가 웃었다.“그래도 마지막은 맞혔네요. 혜숙 씨, 너무 다그치지는 마세요.”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희의 입가에는 여전히 웃음이 남아 있었다.박명선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하린 씨, 저 기억 안 나도 괜찮아요. 예전에 연구 발표회에서 만났었는데, 그때 정말 멋졌어요.”하린은 고개를 들었다.“내가요? 나 잘했어요?”“그럼요. 어려운 질문에도 막힘없이 대답했잖아요. 아
“박명선 여사님은 홍차, 최경애 여사님은 캐모마일. 이번에는 똑바로 외워. 손님들 앞에서 같은 질문을 몇 번씩 하면 내가 얼마나 창피하겠어.”하린은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응…… 아니, 네. 나 외울게요.”“그리고 그렇게 헤실헤실 웃지 마. 사람이 상황 파악도 못 하고 웃고 있으면 더 모자라 보여.”하린의 미소가 멈췄다.어머니가 자신을 며느리라고 불러 주셔서 기뻤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 말을 했다가 또 혼날까 봐 입술을 꼭 다물었다.***손님들이 도착하기 전까지 하린은 거실 한쪽에서 이름을 외웠다.윤정희는 녹차.박명선은 홍차.최경애는 캐모마일.처음에는 소리 내어 중얼거렸지만 지나가던 사용인이 쳐다보자 입술만 움직였다. 세 번쯤 반복했을 때는 모두 기억하는 것 같았는데, 혜숙이 꽃병 위치를 바꾸라고 지시하자 마지막 이름이 사라져 버렸다.하린은 꽃병을 내려놓고 다시 처음부터 외웠다.그러다가 주머니에 수첩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종이에 적어 두면 잊어버리지 않을 수 있었다.그녀는 복도 쪽으로 걸어가 작은 콘솔 테이블 위에 수첩을 펼쳤다. 펜을 쥐자 왼손 검지가 욱신거렸지만, 하린은 한 글자씩 천천히 적었다.'윤정희 — 녹차.''박명선 — 홍차.'세 번째 줄에서 손이 멈췄다.캐모마일은 기억났다.그런데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하린은 앞의 두 줄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마지막 이름을 생각하려 애썼다.그때 현관 쪽에서 자동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손님들이 오셨다.하린은 황급히 수첩을 덮었다.***가장 먼저 들어온 여자는 회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뒤이어 연분홍색 재킷을 입은 여자와 진한 갈색 코트를 걸친 여자가 들어왔는데, 하린은 세 사람을 보는 순간 아까 외웠던 이름들이 머릿속에서 뒤섞이는 것을 느꼈다.이름은 외웠다.그런데 누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혜숙은 익숙한 미소를 지으며 손님들을 맞았다.“어서 오세요. 길이 많이 막히셨죠? 날씨가 좋아서 다행이에요.”“괜찮았어요. 오히려 오랜만에 바람도 쐬고 좋았죠.
그녀는 원피스의 치맛자락을 조심스럽게 펼쳤다. 손가락이 아파 단추를 채우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고 허리끈도 두 번이나 잘못 묶었지만, 소미가 매듭을 바로잡아 주는 동안 하린은 연신 거울을 들여다보았다.“어머니도 나 예쁘다고 할까요? 나 오늘은 칭찬받고 싶어요.”소미는 대답을 고르다가 하린의 머리카락을 한쪽 뺨으로 내려 주었다.“옷은 정말 잘 어울리세요. 그런데 얼굴에 화장할 때 조금 따가우실 수 있어요.”“괜찮아요. 나 참을게요. 여기 빨간 거 안 보이게 해 주세요.”“누가 그렇게 말씀하셨어요?”하린은 잠시 입술을 달싹였다.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다만 얼굴에 남은 자국을 사람들이 보면 이준이 자신을 때렸다는 사실까지 알게 될까 봐 두려웠다.남편이 곤란해지는 것은 싫었다.“그냥…… 이준 씨가 싫어할까 봐요.”소미는 더 묻지 않고 화장 도구를 집어 들었다.뺨에 퍼프가 닿을 때마다 하린의 어깨가 움찔했지만, 그녀는 거울을 보며 인사 연습을 시작했다.“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잠시 생각하던 하린이 소미를 돌아보았다.“이렇게 하면 돼요? 나 잘했어요?”“네. 그렇게 하시면 돼요. 그리고 꼭 긴 말씀 안 하셔도 괜찮아요.”“그럼 이것만 외울래요.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하린은 입술을 움직이며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했다.세 번째 연습에서 틀리지 않자 그녀가 환하게 웃었다.“소미 씨, 나 안 틀렸어요! 봤죠?”“네. 잘하셨어요.”그 짧은 칭찬에 하린은 한동안 거울 앞을 떠나지 못했다.***거실에는 꽃향기가 가득했다.긴 테이블 위에 놓인 꽃병마다 흰 장미와 연분홍색 작약이 꽂혀 있었고, 사용인들은 찻잔을 닦거나 접시를 나르느라 분주했다.하린은 계단 아래에서 잠시 멈췄다.결혼 전 이준이 연구소로 보내 주던 꽃다발이 생각났다. 중요한 발표가 있는 날이면 꽃 사이에 작은 카드를 꽂아 주었는데, 그중 하나에는 '오늘도 우리 하린이가 제일 멋질 거야'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그 문장은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하린은 꽃병
서하린은 베개 밑에 수첩을 밀어 넣다가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려오자 황급히 손을 뺐다.아침에 서재에서 나온 뒤로 남편을 보지 못했다. 이준은 같은 질문을 되풀이하지 말라고 했고, 자신이 무엇을 기억하든 함부로 믿지 말라는 말까지 남긴 채 휴대전화를 가져가 버렸다.왜 남편이 자신의 기억을 그렇게 싫어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하린은 그가 다시 돌아와 준다면 이번에는 아무것도 묻지 않을 생각이었다.문밖의 발소리가 가까워지자 하린은 손등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전날 남편에게 맞은 오른쪽 뺨은 아직 부어 있었고, 손끝이 조금만 스쳐도 욱신거렸지만 그녀는 거울을 향해 조심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웃고 있으면 이준이 덜 화낼지도 몰랐다.“사모님, 들어가도 될까요?”문밖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남편이 아니라 한소미의 것이었다.하린은 조금 실망했지만 곧 반가운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소미 씨! 들어와요. 나 안 잤어요. 이준 씨 오나 하고 기다렸어요.”소미가 방문을 열고 들어오다가 하린의 얼굴을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췄다.화장으로 가리지 않은 오른쪽 뺨에는 손가락 자국을 따라 붉은 기운이 남아 있었고, 입술 안쪽에도 상처가 생겨 있었다. 결혼기념일 케이크를 만들다가 다친 왼손 검지에는 오래된 반창고가 비뚤게 붙어 있었다.소미는 복도를 한 번 돌아본 뒤 방문을 조용히 닫았다.“사모님, 얼굴이 어쩌다가 이렇게 되셨어요? 어제보다 더 부으신 것 같은데, 혹시 많이 아프세요?”하린은 반사적으로 뺨을 가렸다.“조금요. 여기 만지면 아파요. 근데 안 만지면 괜찮아요.”“그건 아프신 거잖아요.”소미가 침대 곁에 앉아 손을 내밀자 하린은 잠시 망설이다가 왼손을 맡겼다. 반창고를 떼어 내는 동안 상처에 붙었던 피부가 당겨지자 어깨가 움찔했지만, 그녀는 소리 내지 않고 참았다.“상처가 다시 벌어졌어요. 이대로 두시면 덧날 수도 있는데…….”“소미 씨.”“네, 사모님.”“나 오늘 잘해야 해요?”갑작스러운 질문에 소미가 고개를 들었다.하린은 소미가 가져온 옷가지를
그가 천천히 돌아섰다.“네가 뭘 잘하든 못하든 이제 나한테 기대하지 마.”하린은 멍하니 남편을 바라보았다.“나는 네가 잃어버린 기억을 대신 채워 주려고 사는 사람이 아니야. 네가 예전처럼 돌아오지도 못할 거면서 자꾸 옛날의 나를 찾는 것도 그만해.”그녀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이준 씨…….”“그렇게 부르지 마.”하린의 입술이 멈췄다.그는 차갑게 덧붙였다.“네가 그 목소리로 나를 부를 때마다 내가 얼마나 지긋지긋한지 알아?”하린은 고개를 숙였다.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이름이었다.사고 전에도, 사고 후에도 수없이 불렀던 이름이었다.그런데 이제 남편은 그 이름으로 자신을 부르는 것조차 싫어했다.“미안해요…….”이준은 더는 대답하지 않고 문을 닫았다.하린은 그 자리에 선 채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한참 뒤 하린은 침대에 앉아 수첩을 다시 펼쳤다.종이에는 피가 묻어 있었고, 조금 전 떨어뜨린 충격으로 모서리가 구겨져 있었다. 그녀는 손바닥으로 종이를 조심스럽게 펴면서 남편이 했던 말을 떠올리려 애썼다.'기대하지 마.''옛날의 나를 찾지 마.''그렇게 부르지 마.'세 문장을 한꺼번에 기억하기 어려워지자 하린은 하나씩 적어 내려갔다. 하지만 마지막 문장을 쓰려는 순간 손이 멈췄다.남편을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다.그렇다면 앞으로는 뭐라고 불러야 할까.하린은 한참 동안 펜을 쥔 채 앉아 있었다.'여보'라고 불러도 될까.결혼식 날 남편은 그녀의 손을 잡고 앞으로 평생 그렇게 불러 달라고 했었다.'당신이 여보라고 부르면 내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남자 같거든.'하린은 그때 웃으며 몇 번이나 불러 주었다.'여보.''한 번만 더.''여보.''한 번만 더.'그는 하린을 끌어안고 웃었다.'평생 들어도 안 질릴 것 같아.'하린은 그 장면을 떠올리다가 입술을 떨었다.지금의 남편에게 그 말을 했다가는 또 화를 낼 것 같았다.그녀는 수첩의 빈칸에 조심스럽게 적었다.'이준 씨라고 부르지 않기.'그러고 나서 펜을 내
어젯밤 사진을 봤다는 사실은 기억했다. 손목시계와 흉터도 분명히 보았던 것 같은데, 남편이 자신의 기억은 믿을 수 없다고 말하자 이제는 무엇이 진짜였는지 자신이 없어졌다.그래도 남편이 틀렸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그녀는 자신이 잘못 본 것이라고 믿기로 했다.그러면 남편이 화내지 않을 테니까.하린은 다음 줄에 남편이 새로 정해 준 일을 적으려 했다.전화.메모.약.세 단어를 적은 뒤 무엇을 해야 하는지까지 쓰려니 문장이 길어졌다. 몇 번이나 지우고 다시 쓴 끝에 겨우 짧은 문장들을 완성했다.'전화는 이준 씨한테.''메모도 이준 씨한테.'마지막 줄을 쓰려다가 멈췄다.약은 어떻게 하라고 했더라.남편이 확인해 준다고 했다.그런데 언제 확인해 준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하린은 펜 끝으로 종이를 톡톡 두드렸다.약을 먹었는지 아직도 기억나지 않았다.그녀는 협탁 위의 약통을 바라보았다.뚜껑을 열고 알약을 세어 보려다가 손을 거두었다.남편이 멋대로 건드리지 말라고 했다.하린은 수첩에 적었다.'약은 기다리기.'글씨를 쓰고 나자 조금 안심이 되었다.이제 잊어버려도 종이를 보면 될 것이다.***잠시 후 침실 문이 열렸다.하린은 고개를 들었다.이준이었다.그녀는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남편이 돌아왔다는 사실이 반가웠지만, 조금 전 서재에서 맞았던 뺨이 다시 화끈거리는 것 같아 선뜻 다가가지는 못했다.“뭐 하고 있어?”이준의 시선이 그녀의 손에 들린 수첩으로 향했다.“나…… 적고 있었어요.”하린은 조심스럽게 수첩을 들어 보였다.“안 잊어버리려고요.”이준은 아무 말 없이 다가와 수첩을 빼앗았다.첫 줄을 읽던 그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내가 잘못 봤을 수도 있어요.'그다음 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이준 씨한테 자꾸 물어보지 않기.'하린은 그의 표정을 살폈다.“나 이제 안 물어볼게요.”그녀는 서둘러 덧붙였다.“어제 사진도 안 물어봐요. 내가 잘못 봤을 수도 있으니까…….”이준은 수첩을 넘겼다.'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