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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거리에서 길을 잃다

Author: 안나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6-30 20:46:17

마닐라 공항의 무더운 공기는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무거웠다. 혜진은 한 손에는 대형 캐리어를, 다른 한 손으로는 민지의 작은 손을 꼭 쥔 채 공항 밖으로 걸어 나왔다. 한국에서 인터넷을 뒤져 급하게 구해둔 마닐라 외곽의 단기 임대 아파트로 가기 위해 택시를 잡아야 했다. 주변을 가득 채운 호객꾼들이 낯선 언어로 소리를 지르며 혜진을 에워쌌다.

​“택시? 마담, 택시 필요해요?”

시끄러운 소음과 사방에서 쏘아져 오는 시선에 민지가 무서운 듯 혜진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뒤로 숨었다. 혜진은 애써 대담한 척 가방을 꽉 움켜쥐며 한 호객꾼의 안내에 따라 낡은 승용차에 올라탔다. 목적지가 적힌 종이를 보여주자 운전기사는 알겠다는 듯 씨익 웃으며 가속페달을 밟았다.

​하지만 차가 도심을 벗어나 어둡고 한적한 골목으로 들어서기 시작할 때쯤, 혜진은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인터넷에서 보았던 안전한 주거 단지가 아니었다. 낡은 슬럼가와 깨진 가로등, 그리고 알 수 없는 낙서가 가득한 거리가 이어졌다.

​“기사님, 여기 제 목적지 맞아요? 길이 이상한 것 같은데요.”

혜진의 다급한 영어 질문에 기사는 백미러로 혜진을 힐끔 보더니 냉랭하게 대꾸했다.

“트래픽 때문이야. 지름길로 가는 거니까 가만히 있어.”

​그리고 잠시 후, 차는 으슥한 공터 앞에 완전히 멈춰 섰다. 기사는 차문을 잠그더니 혜진을 돌아보며 터무니없는 금액을 요구했다. 한국 돈으로 치면 고작 몇만 원의 거리였지만, 그가 요구한 것은 혜진이 가진 페소화의 상당 부분이었다. 미터기는 켜져 있지도 않았다.

​“사기 치지 마세요! 당장 문 열어요! 경찰 부를 거예요!”

혜진이 소리치며 차 손잡이를 흔들었지만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민지는 결국 겁에 질려 울음을 터뜨렸다. 기사는 덩치 큰 몸으로 위협하듯 운전석에서 일어나 혜진의 가방을 강제로 빼앗으려 손을 뻗었다.

​“돈 내놔, 마담! 안 그러면 여기서 못 내려!”

남편에게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겨우 명품 가방 몇 개를 팔아 마련한, 자신과 민지의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돈이었다. 이걸 빼앗기면 타국 땅에서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혜진의 전신을 지배했다. 혜진은 온 힘을 다해 가방을 품에 안고 비명을 질렀다.

​“도와주세요! Help me! 누구 없어요?!”

기사의 거친 손길에 혜진의 옷깃이 찢어지고 뺨이 긁혔다. 혜진이 악을 쓰며 저항하자 기사는 짜증 섞인 욕설을 뱉으며 혜진의 머리채를 잡으려 했다. 막다른 골목, 기댈 곳 하나 없는 절망의 순간이었다.

​그때, 차창 밖으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쾅, 쾅!

​차 유리가 깨질 듯한 강한 타격음과 함께 묵직하고 차가운 남성의 목소리가 어둠을 뚫고 내리꽂혔다.

“당장 문 열어, 이 자식아. 죽고 싶지 않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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