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연천능은 백진아를 품에 꼭 안았고,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시체가 산처럼 쌓이고 피가 바다처럼 흐르는 전장에서도 조금의 두려움조차 보이지 않았던 그가, 지금은 간담이 서늘할 정도로 겁에 질려 있었다.“궁, 궁으로 가거라! 아니, 아니야! 고부로 가!”백진아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고, 연천능이 온몸을 떨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고, 그 안에 담긴 무력감과 공포가 가슴 아플 정도였다.그녀는 서둘러 그의 손을 잡았다.“진정하세요. 괜찮습니다.”백진아가 깨어난 것을 본 연천능은 기뻐하며 눈시울까지 붉어졌다. 그는 놀라면서도 기쁜 표정으로 물었다.“진아야, 몸은 어떠냐? 무서워하지 말거라. 조금 있으면 고부에 도착하니... 신의곡 곡주님의 의술이 뛰어나니…”“정말 괜찮습니다.”백진아는 웃으며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공간의 봉인이 풀렸습니다.”연천능은 잠시 멈칫하더니, 금세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화를 냈다.“대체 무슨 빌어먹을 공간이 이리 사람을 괴롭히는 것이냐? 정말 제멋대로인 놈이구나! 이런 건 그냥 버리거라!”백진아는 쓴웃음을 지었다.“저도 통제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다시 돌아왔으니 좋은 일이지요.”그동안 그녀는 공간의 존재조차 잊고 있었다. 공간이 없는 생활에도 이미 적응해서, 공간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렇게 기쁜 일이 생긴 것이다.연천능은 심호흡을 두 번 하고서야 방금 백진아가 갑자기 쓰러졌을 때 느꼈던 공포를 조금 가라앉힐 수 있었다. 그가 물었다.“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백진아는 그의 몸에 기대어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금화 목록을 확인해 볼게요… 아, 이거였네요. 제가 제안했던 도로와 다리 건설, 계단식 논, 군수 공방, 우편, 대중교통, 그리고 예전에 섬에 남겨 두었던 씨앗 덕분에 엄청난 양의 금화가 들어왔습니다. 물론 가장 결정적인 건 바로 방금 제안한 복리방입니다! 당신이 ‘상의해 보겠다’라고 했을 때, 이미 제 제안대로 운영하기로 결정했
연천능은 다정하게 웃으며 얇은 망토 하나를 집어 들어 팔에 걸친 뒤,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4월이라 날씨가 따뜻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망토 하나쯤은 챙겨 두는 게 좋다.”백진아는 그의 손을 잡고 천천히 대전 밖으로 걸어 나왔다. 눈앞에는 온갖 꽃이 비단처럼 화려하게 피어 있었다. 그녀는 살며시 웃으며 말했다.“역시 사월의 날씨만큼 아름다울 때는 없는 것 같아요.”연천능은 그녀를 조심스럽게 부축하며 말했다.“이 녀석이 다 크면 정무는 이 녀석에게 맡겨야겠구나. 그리고 당신과 함께 사방을 유람하며 강산의 웅장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실컷 구경하고 싶다.”백진아가 피식 웃었다.“아이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아들을 부려 먹을 생각부터 하는 겁니까?”마치 어머니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꼬맹이가 어머니의 배를 힘껏 걷어찼다.“어머!”백진아는 배를 감싸 안으며 웃었다.“보세요. 꼬맹이도 항의하잖아요.”연천능은 백진아의 배를 살짝 두드리며 꾸짖었다.“이 녀석, 계속 말썽을 부리면 나오자마자 엉덩이부터 맞을 것이다!”‘퍽!’꼬맹이는 아버지가 전혀 무섭지 않은 듯 발을 들어 연천능의 손을 한 번 걷어찼다.연천능의 얼굴이 시커멓게 굳었다.“이 못된 녀석! 나오자마자 열 대는 맞아야겠구나!”그러자 꼬맹이는 얌전해졌다.“하하하… 정말 유치하네요!”백진아는 배를 감싸 쥔 채 웃음을 터뜨렸다.연천능 역시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비록 보아를 키우고 있었지만, 아이를 어떻게 교육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직접 부딪치며 배우는 중이었다. 그 역시 자신이 없었다.두 사람이 웃고 떠드는 사이 가마가 도착했다.두 사람은 가마에 올라탄 뒤 곧장 궁문으로 향했다. 이후 다른 가마로 갈아타고 어림군을 거느린 채 그대로 고부를 향해 달려갔다.음력 사월의 바람은 무척 따뜻했다. 장난꾸러기 같은 바람이 가마 발을 살짝 들추더니, 안에서 서로 꼭 껴안고 있는 준수한 남녀의 모습을 몰래 한 번 엿보았다. 그러고는 얼른 가마 발을 내려놓고 달아났다.백진
백진아의 얼굴은 토마토처럼 새빨개졌다. 그리고 이내 전신거울을 바라보며 이를 악문 채 말했다.“나중에 이걸 팔아서 돈으로 바꿔야겠어요!”연천능은 그녀를 안아 들고 욕실로 향하며 말했다.“돈 걱정은 할 필요 없다고 몇 번이나 말했느냐? 이미 다 계획이 있다. 우선 경성, 강남, 람성 같은 부유한 지역에서 팔고, 한 달 정도는 높은 가격을 유지한 뒤 천천히 주변 지역과 바다의 섬들까지 판매 범위를 넓혀 나가는 것이다.”백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참, 그러고 보니 관도가 이미 이어지기 시작했으니… 각지의 객사를 기반으로 편지나 물건을 운송하는 부서를 만들면 좋겠어요. 집배원은 퇴역 군인들이 맡아도 되고요. 백성들은 객사에 보내고 싶은 편지나 물건을 맡기고, 무게와 크기에 따라 돈을 내면 됩니다. 그러면 집배원이 물건을 다음 객사까지 운반하고, 그곳의 객사 사람이 받을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이지요.”이것은 우체국이나 택배의 초기 형태와 비슷했다. 이 시대에는 백성이 다른 지역으로 물건이나 편지를 보내려면 표국이나 상단에 부탁해야 했다.비싼 돈을 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제때 받을 사람에게 도착한다는 보장도 없었다.도로가 차츰 정비되고 있으니, 우편 사업 역시 시작할 수 있었다.물론 대중교통도 마찬가지였다.“그리고 조정에서 퇴역한 말을 이용해 대중교통 체계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연천능은 그녀를 욕조 안에 내려놓고 자신도 욕조에 들어가며 말했다.“당신이 말한 우편 제도는 이해했다. 객사와 비슷하지만 백성들의 편지와 물건을 전달하는 일을 담당하는 것이겠지. 그런데 대중교통은 무엇이냐?”백진아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대중교통은 사람을 운송하는 것입니다. 단거리도 있고 장거리도 있지요. 누구나 탈 수 있고 중간에 내려도 됩니다. 이동한 거리에 따라 돈을 받는 것이고요. 예를 들면…”그녀는 물을 몸에 끼얹으며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했다.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은 아니었다. 연천능은 목욕을 마치자마자 사람을 불러 이 일을 논의하게 했다.교통이 편
“예. 배웅은 사양하겠습니다!”이유니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손을 휘휘 저었다. 커다란 배를 불쑥 내민 채 걸어가는 모습이 꽤나 호탕해 보였다. 백진아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웃었다. 역시 남자로 살아본 적이 있는 사람은 달랐다. 남자의 마음을 어떻게 사로잡아야 하는지 알았고, 다른 여자들처럼 남자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고 해서 그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해코지하지도 않았다.고대는 물론이고 현대에도 본처가 길거리에서 내연녀를 때리거나 ‘여우 같은 년’이라며 욕하는 경우가 수두룩하지 않은가.백진아는 사람을 시켜 거울을 세워 놓게 했다. 환하게 빛나는 거울을 바라보니, 마치 눈앞에 돈이 수북이 쌓여 있는 것만 같았다.연천능은 돌아오자마자 탈의실에 놓인 전신거울을 발견했다. 그는 거울 앞으로 다가가 한 번 들여다보더니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음. 꽤 잘생긴 것 같은데?’그는 용포를 벗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허리띠를 매던 그는 거울 속에 백진아가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이 유리거울은 동경보다 훨씬 선명하군. 눈썹이 몇 가닥인지까지 셀 수 있겠어.”그러면서 백진아를 곁으로 끌어당겼다.“보거라. 우리가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나는 용모가 늠름하고, 황후는 경국지색이니.”백진아가 피식 웃었다.“이렇게까지 자기 자랑을 하신다고요?”연천능은 백진아를 품에 안고 두 손으로 불룩 솟은 그녀의 배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카락에 살며시 입을 맞추며 말했다.“사실을 말했을 뿐이다.”백진아는 그의 가슴에 살짝 기대었다. 두툼하고 든든한 품에 안겨 있으니 마음이 한없이 편안해졌다.연천능은 품에 기대어 있는 부인을 바라보며, 마음이 순식간에 물처럼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그가 사랑하는 여자는 그를 위해 딸을 낳아 주었고, 지금은 그의 아들을 품고 있었다. 머지않아 그는 아들과 딸을 모두 얻게 될 터였다.그는 이제 더 바랄 것이 없었다.백진아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어딘가는 우희월을 닮았고, 또 어딘가는 백근당을
연천능의 강경한 태도 때문인지, 오랫동안 아무도 그에게 여인을 들이밀지 못했다.설마 또 죽음이 두렵지 않은 누군가가 궁에 들어와 백진아와 자리를 다투겠다고 나선 것일까?이유니는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연천능의 빈이 되고 싶은 게 아니라, 마마의 계모가 되고 싶다더군요.”백진아는 살짝 놀랐다.“뭐라고? 우리 아버지를 마음에 들어 했다고?”백근당은 외모와 분위기 모두 사람을 홀리는 매력이 있었다. 특히 촉촉하게 물기를 머금은 듯한 눈매는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보다도 더 매력적이었다.그 눈빛에는 마치 갈고리가 달린 것처럼, 한 번 흘끗 바라보기만 해도 어린 아가씨의 혼을 쏙 빼놓을 정도였다.어떤 중년 남자는 젊고 풋풋한 미남보다 더 매력적인 법이다. 백근당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우희월이 세상을 떠난 지도 벌써 3년이 지났다. 재혼을 생각한다고 해도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었다.하지만 황후의 계모가 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라니, 그 배짱만큼은 정말 대단했다.백진아가 물었다.“누구냐?”이유니가 대답했다.“호부시랑 소성동의 딸, 소춘영입니다.”백진아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소춘영이라? 이름이 어쩐지 정겹구나.”이유니가 어깨를 으쓱했다.“소성동은 가난한 집안 출신입니다. 서른 살에 과거에 급제했으니, 집안도 원래 농가였겠지요. 그래서 이름도 이렇게… 소박한 게 아닐까요?”백진아는 가난한 집안 출신이라고 해서 편견을 갖는 사람은 아니었다.“소춘영은 어떻게 생겼더냐? 나이는 몇 살이고? 어머니는 원래 월국의 공주였다. 외모도, 기품도 모두 뛰어났지. 너무 평범한 여인이라면 아버지 눈에 들어가기 어려울 것이다.”이유니가 말했다.“저도 모릅니다. 직접 본 적은 없지만, 공무 때문에 소 대감과는 몇 번 만난 적이 있습니다. 인품이 나쁘지 않아 대신 말을 전해주겠다고 한 것이지요. 소 대감의 말로는 딸의 자존심이 아주 강하다고 하더군요. 시골에서는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다며 혼처를 모두 거절하다 보니 어느새 스무 살이 되었고, 수도에 올라와서
그래서 백진아의 뱃속에 있는 황자가 대부분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백진아는 보름 동안 지켜본 끝에 별다른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더 이상 상서원에 가지 않았다.그녀는 현우와 현설을 보아의 곁에 붙여 두었고, 암중에는 호위무사 네 명도 배치했다.게다가 상서원에는 연천능이 암위와 어림군까지 배치해 전체의 안전을 철저히 지키고 있었다.며칠 뒤, 나른한 졸음이 밀려오는 어느 오후였다.백진아가 자신이 운영하는 사업들의 장부를 결산하고 있는데, 현빙이 들어와 아뢰었다.“마마, 이유니 이 대인께서 뵙기를 청하십니다.”백진아는 고개를 들고 장부를 덮었다.“들라 하라.”잠시 후, 이유니가 한 손으로 커다란 배를 받치고 다른 한 손으로는 시녀의 팔을 잡은 채 걸어 들어왔다.그런데 어찌나 성큼성큼 걷는지, 배가 전혀 무겁지 않은 사람처럼 보였다.백진아는 입꼬리를 씰룩이며 얼른 말했다.“천천히 좀 오너라. 너 지금…”그녀는 뒤에서 붉은 비단으로 덮인 무언가를 들고 따라오는 사람들을 보고 말을 삼켰다. 대강 짐작이 간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유니를 맞으러 갔다.그러면서 타이르듯 말했다.“배도 이제 일곱 달은 넘었지 않느냐? 그런데 어찌 또 나왔느냐? 고지행은 너를 말리지도 않고?”이유니가 웃으며 말했다.“괜찮습니다. 계속 집에만 누워 있는 것도 출산에 좋지 않으니까요.”백진아의 시선이 그녀 뒤에 있는 물건으로 향했다.“무슨 좋은 선물을 가져온 것이냐?”이유니가 웃었다.“마마께서 얼마나 총명하신데요. 설마 짐작도 못 하셨겠습니까?”백진아가 허허 웃었다.“네가 답을 말해 주지도 않았는데 내가 어떻게 아느냐? 맞혔는지 틀렸는지도 모르지.”이유니가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러자 궁녀와 태감들이 물건을 덮고 있던 붉은 비단을 걷어냈다.백진아의 눈이 반짝였다.“역시 거울이었구나!”크고 작은 전신거울 두 개에 거울이 달린 화장대, 화장 거울, 화장함까지.크고 작은 물건이 십여 점이나 되었는데, 하나같이 정교해 손에서 놓기 아까울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