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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6화

작가: 임서아
주현우가 한참 동안 말없이 바라보기만 하자 허아연은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고 담담하게 웃으며 시원스레 말했다.

"인정해요. 그날 밤 주현우 씨 유혹을 버티지 못한 건 맞아요,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주현우 씨, 그건 사랑이 아니에요. 결혼 생활도 아니고요. 그날 밤 내가 오해를 살 만한 행동을 했다면 사과할게요."

방금 주현우의 솔직한 고백을 듣고 나니 문득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과거의 모든 일을 순식간에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비굴했던 것도, 냉대도, 주현우의 좋은 면도 나쁜 면도 이제 다 지나간 일이 되었다.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아름다웠던 것도, 힘들었던 것도 다 추억이 될 것이다.

허아연을 바라보던 주현우는 문득 그녀가 예전보다 훨씬 어른스러워진 것 같았다.

전보다 훨씬 의젓하고 단단해져 있었다.

예전과도 많이 달라져 있었다.

여전히 이혼을 고집하는 허아연을 바라보며 주현우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지금의 허아연은 유난히 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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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연이는 죽지 않았어, 아연이 여전히 잘 살아 있어.' ……잠시 후.허아연이 만찬장으로 돌아오자 권승준이 손을 흔들며 불렀다.당당하게 인사를 건네는 권승준에게 허아연은 여유롭게 걸어갔다.허아연이 다가가자 권승준은 자연스럽게 옆에 서서 가볍게 어깨를 감싸며 사람들에게 소개했다."여러 선배님들, 안녕하십니까. 이분은 동승 그룹의 안시연 선생님이에요. 산업 기술 분야의 떠오르는 인재입니다. 앞으로 선배님들을 따라 많은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겁니다." 권승준의 소개에 원로 전문가들이 웃으며 이름을 들어본 적 있다며 허아연에게 인사를 건넸다. 해외 유명 기업과 협력한 특허도 두 건이나 있다고 들었다며 앞으로 많이 협력해서 서로 많은 시너지를 낼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원로 전문가들의 칭찬에 허아연은 대범하게 감사 인사를 전하며 자연스럽게 권승준 옆에 서 있었다.원로 전문가들 소개를 마친 권승준은 어느새 직원에게 의자를 하나 더 가져오라고 시켜서 자신의 옆자리에 허아연을 앉혔다.허아연은 권승준의 배려를 어색해하거나 사양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가깝게 지내는 권승준과 허아연을 보며 안서준은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허아연이 즐거워하고 잘 지내기만 한다면 다 받아들일 수 있었다. 옆 테이블에서 허아연과 권승준의 다정한 모습을 지켜보던 전서진과 심유환은 주현우가 더 신경 쓰였다.특히 전서진은 이미 허아연의 정체를 알고 있었기에 더 그랬다.담담한 표정의 주현우는 사람들의 시선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고 권승준과 허아연도 크게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예전엔 주현우가 양지에 있었고 권승준이 음지에 있었다.하지만 이제 허아연은 안시연이고 더 이상 당당할 처지가 아니라는 걸 알았기에 이제는 음지에서 천천히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밤 10시가 넘어서야 만찬이 끝났다.허아연은 안서준과 함께 차를 타고 호텔로 돌아갔다.돌아가는 길, 허아연이 얘기를 꺼냈다."아까 호텔에서 주현우를 마주쳤는데 동승 그룹이 차세대 원격 조종 기술 협력에 관심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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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아연이 맞다는 사실이 떠오른 것이다.눈이 마주친 주현우는 또 허아연과의 지난날들이 떠올랐다. 우울증이 발병했던 순간과 화재를 틈타 떠나버렸던 허아연이 떠올랐다. 허아연을 오해했던 모든 순간과 저질렀던 모든 잘못들이 함께 떠올랐다.그 생각에 눈시울이 조금 붉어졌다.지금 주현우는 허아연에게 다가가서 안아주고 몇 년 동안 자신이 오해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사과하고 싶었다.하지만…… 허아연에게서 느껴지는 거리감과 서먹함에 도무지 다가갈 수가 없었다.하고 싶은 말은 산더미인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깊게 가라앉은 주현우의 눈빛에서 허아연도 뭔가를 읽어낸 듯했다. 아마 허아연의 정체를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허아연은 여유롭게 주현우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인사했다."주 대표님.""주 대표님"이라는 한마디에 주현우는 만감이 교차했다. 허아연과 이렇게까지 서먹해지는 날이 올 줄은, 허아연이 자신을 피하려고 죽음을 위장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주현우가 정체를 알아냈다는 사실을 유건희는 허아연에게 알리지 않았다.말하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굳이 감추고 있는 관계를 까발려서 더 복잡하게 엮이게 할 필요는 없었다.주현우가 꼼짝 않고 말도 없이 한참을 쳐다보기만 하자 허아연은 만찬장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허아연이 곁을 스쳐 지나가려는 순간, 주현우가 불쑥 손을 뻗더니 팔을 잡았다.주현우가 팔을 잡자 허아연이 돌아서며 고개를 들고 물었다."주 대표님, 무슨 일이세요?""허……" 주현우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안 선생님, 경주 그룹에 최근 안 선생님 연구 방향과 딱 맞는 프로젝트가 하나 있는데 시간 될 때 얘기 좀 나눠볼 수 있을까요."허아연이 바로 거절할까 걱정된 주현우는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이어 말했다. "차세대 원격 조종 기술이에요, 동승 그룹도 이 기술 연구에 관심이 많을 거라 생각해요."주현우의 말이 끝나자 허아연이 고개를 들었다.주현우가 말한 프로젝트는 경주 그룹이 작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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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만 아직 관계를 확정짓지는 않았기에 여전히 친구처럼 지내고 있었다.권승준은 주현우가 허아연의 정체를 알아내고 DNA 검사까지 했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마음을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그날 저녁, 허아연이 스타라이트 테크에서 호텔로 돌아오자 진 부장이 불러 세웠다."시연 씨."허아연은 돌아서서 웃으며 인사했다."진 부장님."허아연의 인사에 진 부장이 말했다."오후에 몇 번이나 전화했는데 계속 꺼져 있길래 호텔에서 기다리고 있었어요."허아연이 말을 하기도 전에 진 부장이 이어서 말했다."오늘 저녁 정부 만찬이 있어요. 여러 첨단 기술 기업들이 다 모이는 자리라 서준 씨는 벌써 갔고 시연 씨 기다렸다가 같이 가려고 기다리는 중이었어요." 하루 종일 실험실에 있느라 좀 피곤했던 허아연이 말했다."진 부장님, 저 오늘은 안 갈게요. 이런 자리는 저희 오빠만 참석하면 되잖아요." 하지만 진 부장은 여전히 물러서지 않았다."지금 시연 씨는 교진시 정부와 기업들이 다 탐내는 인재예요. 우리보다 훨씬 중요한 사람인데 안 가면 오늘 밤 만찬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게다가 다들 시연 씨한테 전문 지식 가르침 받고 싶어 해요. 조금만 힘내서 얼굴만 비추고 바로 돌아와서 쉬면 되잖아요, 어때요?"정부 관계자인 진 부장이 이렇게까지 부탁하는지라 허아연도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는 지친 몸을 이끌고 함께 따라나섰다.만찬은 교진시 경찰서 근처의 한 영빈관에서 열렸는데 참석 인원은 주로 첨단 기술 기업들과 견학차 방문한 타지 기업들이었다.만찬장에 도착한 허아연은 옆 사람들 얘기를 듣고서야 내일 있을 간담회 전에 오늘 미리 서로 인사를 나누는 자리라는 걸 알게 되었다. 진 부장과 함께 만찬장에 들어선 허아연은 자연스럽게 스타라이트 테크 동료들과 함께 앉았다. 요즘 가장 많이 함께 일한 사람들이었다.권승준은 메인 테이블 쪽에, 주현우도 앞쪽 테이블에서 정부 관계자들과 함께 앉아 있었다.오늘 자리는 나름 편안한 분위기라 다들 자유롭게 얘기를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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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뒤에 새언니가 큰 화재로 변을 당하고 오빠가 도무지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고 1년 만에 새까맣던 머리가 하얗게 세어버렸어요.""지금은 집에서 누구도 오빠한테 감히 뭘 묻거나 무슨 얘기를 꺼내지도 못해요."주민경이 말을 하며 다시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허아연을 빤히 쳐다보았다.눈이 마주쳤지만 허아연은 대꾸하지 않고 그저 웃기만 했다.그 모습에 주민경이 정색하며 말했다."시연 씨, 그거 알아요? 우리 새언니 허아연이랑 진짜 거의 똑같이 생겼어요. 시연 씨가 진짜 우리 아연이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라니까요." "나는 시연 씨가 우리 오빠랑 잘되길 바라는 게 아니에요. 설령 시연 씨가 진짜 어릴 때부터 알던 우리 아연이라 해도 다시 만나라고 설득할 생각은 없어요. 그냥 오빠가 영혼 나간 사람처럼 지내는 게 너무 답답해서 그래요.""그러니까 시연 씨, 우리한테 진실을 말해줄 수 없어요? 오빠 만나서 얘기라도 좀 나눠서 그만 정신 차리게 하면 안 될까요?""안 그러면 오빠 조만간 폐인 될 것 같아요."주민경의 부탁에 허아연은 고개를 숙이고 계속 식사를 이어갔다.아침 식사를 다 마치고 차를 한 모금 마신 뒤에야 고개를 들어 주민경을 보며 말했다."민경 씨, 나를 친구로 생각해서 이런 얘기까지 숨기지 않고 다 얘기해줘서 사실 좀 감동이에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민경 씨 새언니 허아연 씨가 아니에요.""그리고 새언니가 떠나기로 결심한 가장 큰 이유는 더 이상 민경 씨 오빠랑 엮이고 싶지 않아서였을 거예요. 죽어서도 다시 보고 싶지 않았던 거죠.""사실 전이나 지금이나 민경 씨 오빠의 문제는 본인한테 있는 거지, 다른 사람 탓이 아니에요. 이런 말 좀 그렇지만 설령 내가 민경 씨 체면 봐서 민경 씨 오빠를 다독여준다 한들 마음속 응어리가 절대 풀리지 않을 거예요." "바꿔놓고 내가 예전의 허아연 씨라 쳐도 민경 씨 오빠를 용서하는 건 너무 너그럽게 봐주는 거잖아요. 하물며 허아연 씨도 아닌데요."주민경이 아무리 진심을 담아 명확하게 말을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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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래도 주현우에게 완전히 실망한 모양이었다. 허아연을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나중에 반드시 후회할 거라고 전서진도 말한 적이 있었다. 결국 인과응보로 그 업보를 맞은 셈이었다.두 사람이 다시 잘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전서진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런 말로 주현우를 위로하지도 않았다. 현실적이지 않으니까. 몇 년간의 결혼 생활 동안 주현우는 여지를 남기지 않았다.전서진의 위로에 주현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계속 3년 전 일들이 떠올랐다. 허아연에게 못되게 굴었던 일들, 예전에 자신을 좋아했던 허아연이, 허아연의 일기장에 적혀 있던 글귀들이 자꾸만 생각났다.잠시 침묵하던 주현우가 전서진을 보며 말했다."늦었다, 이제 가서 쉬어."전서진이 미덥지 않다는 듯 물었다."진짜 내가 여기 없어도 돼? 괜찮겠어?"그 말에 웃음이 터진 주현우가 힘없이 말했다."나 그렇게 나약하지 않아. 게다가 마지막이 오기 전까지는 나랑 권승준 중에 누가 이길지 모르는 일이야." 그 말에 마음이 놓인 전서진이 말했다."그래, 그렇게 생각하면 됐어. 그럼 나 먼저 갈게."말을 마친 전서진은 소파에 걸쳐둔 겉옷을 챙겨 자리를 떴다.전서진이 떠나자 원래도 조용하던 병실이 더 조용해졌다.혼자 병상에 남은 주현우는 여전히 잠이 오지 않았고 머릿속엔 온통 허아연 생각뿐이었다."주현우, 나 이제 아빠 없어.""주현우, 나 계속 너와 친구 하면서 같이 놀아도 돼?""주현우……"예전 일들을 떠올릴수록, 허아연이 전에 자신과 주씨 가문에 얼마나 의지했는지 떠올릴수록, 허아연을 오해했던 일들을 떠올릴수록 주현우는 죄책감이 점점 커져만 갔다.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니 쟁반처럼 둥근 달이 떠 있었다. 얼핏 허아연의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지만 이제 영영 돌아갈 수 없는 사이가 되어버렸다. ……다음 날 오전.허아연이 호텔 레스토랑에서 조식을 먹고 있을 때 주민경이 찾아왔다.의자를 당겨 허아연 맞은편에 앉은 주민경은 바람 빠진 공처럼 테이블 끝에 힘없이 턱을 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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