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주현우의 물음에 허아연이 여유롭게 바라보며 냉정하게 말했다."당신이 잘 지내든 못 지내든 그건 당신 탓이지 나랑은 상관없어요.""주현우 씨, 이제 와서 나한테 정이 남아 있다는 그런 말하지 마요. 그건 당신 자신이나 속일 핑계니까요." "그렇게까지 애써서 내 정체를 증명한 것도 결국 당신 마음 편하자고 한 거잖아요. 좋아요, 이제 뜻대로 됐네요. 나 안 죽고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으니까 이제 마음 편하겠네요.""하지만 주현우 씨, 나는 이미 오래전에 당신을 내려놨어요. 당신도 이만 나를 내려놓고 우리 각자 잘 지냈으면 해요."허아연 눈에 주현우가 하는 모든 행동은 결국 자기 마음 편하기 위해 죄책감을 덜려는 것에 불과했다.허아연의 죽음과 깔끔하게 선을 긋고 싶을 뿐이었다.혹시 다른 감정이 남아 있다 해도 허아연은 믿지 않았다. 3년의 결혼 생활을 겪으며 이미 모든 걸 다 꿰뚫어 봤으니까.말없이 바라보기만 하는 주현우를 보며 허아연이 다시 차분히 입을 열었다."주현우 씨, 원래는 정체를 인정하거나 당신이랑 다투거나 지난 일을 다시 언급할 생각 자체가 없었어요.""그런데 당신이 적당히 할 줄 몰라서 나를 이렇게까지 난처하게 만든 거예요."허아연의 목소리는 아주 낮았지만 큰 감정 변화는 없었다.사실 주현우 혼자 마음속으로만 알고 있으면 그만인 일들도 있었다. 굳이 허아연에게 다 밝히려 하거나 확인받을 필요는 없었다.허아연의 선택을 존중하고 지금 삶을 존중해주면 그걸로 충분했다.그런데도 주현우는 여전히 예전처럼 자기감정만 신경 쓸 뿐 다른 사람 마음은 헤아릴 줄 몰랐다.난처하게 만들었다는 말에 주현우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전에 허아연의 DNA 검사 결과를 들고 유건희를 찾아갔을 때도 허아연을 난처하게 만들지 말라고 한 적 있었다. 주현우가 아무 대꾸도 못 하자 허아연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차분하게 말했다."앞으로는 마주치는 일이 적었으면 좋겠네요.""먼저 갈게요."멀어지는 허아연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주현우는 얼굴이
그때는 허아연도 자주 꾸벅꾸벅 졸곤 했었다.그러다 침대에 가서 자라고 하면 순순히 주현우의 침대로 가서 잠들곤 했다.그때는 두 사람 사이가 더없이 좋았었다.허아연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새하얀 피부와 짙은 눈썹, 미동도 없는 속눈썹을 바라보던 주현우는 후회가 밀려왔다.그때는 왜 그렇게 눈치도 없이 허아연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몰랐을까?사실 눈치는 챘었다. 다만 일기장을 본 순간, 질투심에 미쳐버렸을 뿐이었다. 지난 기억들이 밀려오자 주현우는 오른손을 들어 허아연의 얼굴을 살며시 어루만졌다.섬세하고 다정한 손길이었다.다만 너무 늦게 찾아온 다정함이었다. 아주 가벼운 손길이었지만 허아연은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고 말았다. 두 손으로 좌석을 짚고 몸을 일으킨 허아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주변을 둘러보다가 눈을 비비며 나긋하게 말했다."호텔 도착했네요."허아연이 깨어나자 주현우는 천천히 손을 거두며 부드럽게 답했다."응, 호텔 도착했어."주현우의 말에 잠에서 깬 허아연도 안전벨트를 풀고 차 문을 열며 말했다."고마워요, 주 대표님."허아연이 또 주 대표님이라고 부르자 주현우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특히 정체가 밝혀지고 서로 속마음을 다 터놓은 뒤로도 허아연이 주 대표님이라고 부를 때마다 주현우는 너무 어색하고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잠시 허아연을 담담하게 바라보던 주현우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꼭 이렇게 선을 그어야 해? 꼭 이렇게 남처럼 굴어야겠어?"허아연은 받아들이지 못하는 주현우를 조용히 바라보았다.잠시 바라보기만 하던 허아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방을 챙겨 차에서 내려버렸다.허아연이 말없이 차에서 내리자 주현우도 차 문을 열고 곧장 뒤따라 내렸다.허아연을 따라잡은 주현우가 손을 뻗어 팔을 잡으며 불렀다."허아연."주현우가 팔을 잡아당긴 탓에 흘러내린 가방끈을 다시 어깨에 걸친 허아연이 돌아섰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자 허아연이 차분하게 말했다."주현우 씨, 당신이 오해하는 것도 싫고 당신한테 어떤 희
허아연이 답을 마치자 차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주현우는 허아연과 무슨 얘기라도 더 하고 싶었지만 2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은 서로 나눌 만한 화제조차 얼마 없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주현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뇌진탕은 다 회복됐어? 머리 아픈 거나 하지는 않아?"주현우가 그날의 교통사고를 언급하자 허아연이 답했다."괜찮아요, 별다른 후유증은 없어요.""나 때문에 그 사고에 휘말리게 해서 미안해요."허아연 때문에 휘말린 건 사실이었기에 마침 주현우의 차를 타고 가는 지금이 사과하기 적당한 기회인 듯 싶었다. 허아연의 예의 바른 태도에 두 손으로 핸들을 잡은 주현우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주현우는 웃다가 한참 만에야 말했다."허아연, 설령 우리가 앞으로 다시 합칠 가능성이 없다 해도 나한테 이렇게까지 예의 차릴 필요는 없어. 어쨌든 알고 지낸 세월이 얼만데, 다 같이 자란 사이잖아."허아연이 매번 예의를 차릴 때마다 주현우는 너무 마음이 아팠다.주현우의 말에 허아연은 고개를 돌리고 다시 앞쪽 도로를 바라볼 뿐이었다.교진시는 여전히 너무 작아서 문만 나서도 주현우와 마주치기 일쑤였다.조용한 차 안, 주현우는 계속 화제를 찾아 얘기를 나누려 했지만 허아연이 계속 입을 닫고 있어서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차가 시내 중심에 들어설 때쯤, 앞에서 연쇄 추돌 사고가 난 탓에 두 사람은 길 한복판에 갇히고 말았다.꽉 막힌 도로를 보던 허아연이 손을 들어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그 모습을 본 주현우가 고개를 돌려 허아연에게 물었다."시간이 급해?"주현우의 물음에 허아연은 손을 내리며 조용히 답했다."급한 건 아니에요, 그냥 습관적으로 시간 확인한 거예요."사실 급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주현우와 오래 함께 있고 싶은 마음도 딱히 없었다.다만 아직 교진시를 떠나지 않았고 주현우도 이미 정체를 알아버린 이상 이제는 모든 걸 의연하게 마주할 필요가 있었다.차가 꼼짝없이 막혀 있는 동안 곁눈질로 허아연을 바라보던 주현우는
그래서 더는 설득하지 않고 다른 얘기를 나누며 함께 밥을 먹었다. ……같은 시각, 안쪽 룸.방금 밖에서 허아연과 마주친 뒤로 주현우는 약간 넋이 나간 채 이따금 고개를 돌려 밖을 바라봤다.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도 말이다. 그런 주현우의 감정 변화를 전서진은 다 지켜보고 있었다.전서진이 주현우를 보며 말했다."허아연이 아직 결혼만 안 했으면 너한테도 희망은 있어, 다만 너무 서두르면 안 돼."주현우가 입을 열기도 전에 전서진이 또 이어 말했다."권씨 집안에서는 권승준이 할아버지 문턱을 넘기가 쉽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너도 아예 희망이 없는 건 아니야."권씨 집안이라면 두 사람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에 짐작할 수 있었다.전서진의 위로에 주현우는 시선을 거두며 무심하게 말했다."됐어, 나 그런 위로까지 필요한 정도는 아니야."하지만 허아연이 그리운 건 사실이었다. 다시 잘해보고 싶은 것도 진심이었다.주현우가 여전히 고집을 부리자 전서진도 맞장구를 쳤다."그래그래, 안 할게. 대신 다음에 또 나한테 같이 술 마시자고 하지 마."전서진의 말에 주현우가 심드렁하게 눈을 흘겼다. 그 뒤 두 사람이 룸에서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쯤 허아연과 주민경도 마침 식사를 마치고 일어났다.주현우는 자연스레 두 사람의 비용까지 계산했다.레스토랑 입구에서 주현우가 계산한 걸 본 주민경은 자연스럽게 말했다."고마워요, 주 대표님."허아연이 주현우를 주 대표님이라 부르자 주민경도 따라 불렀다. 주현우는 그런 주민경을 바보 보듯 쳐다보았다.식당 앞에 서 있는 네 사람. 전서진이 주머니에서 오른손을 꺼내 주현우의 속도 모르고 계속 방해만 하는 주민경의 목덜미를 잡으며 말했다."민경아, 3구역 공사 현장에 문제가 좀 있어서 네가 가서 봐줘야겠어." "지금 나랑 같이 현장 가자."말을 마친 전서진은 주민경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그대로 끌고 나갔다.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던 주민경이 전서진을 돌아보며 말했다."무슨 문제인데, 난 왜 통
그 순간 주민경이 허둥지둥 허아연을 보며 해명했다."아연아, 맹세하는데 진짜 내가 오빠 부른 거 아니야. 여기 온다는 것도 전혀 몰랐어. 미리 알았으면 여기 너 데려오지도 않았을 거야."허아연이 주현우를 싫어하고 지금까지 모든 일이 다 주현우를 피하기 위해서라는 걸 아는 주민경도 눈치껏 두 사람을 부추기지 않았다.오늘 오전 내내 함께 있으면서도 주민경은 주현우 얘기를 하거나 재결합을 언급한 적이 없었다. 허아연의 결정이라면 무조건적으로 지지하고 난처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주민경의 해명에 전서진이 손에 든 서류로 머리를 가볍게 톡 치며 말했다."됐어, 나와 네 오빠도 두 사람 여기 있는 줄 몰랐어. 그렇게 허겁지겁 해명 안 해도 돼."말을 마친 전서진이 허아연을 향해 웃으며 인사했다."아연아."전서진의 아연이라는 부름에 허아연이 부드럽게 웃으며 답했다."서진 씨."그리고 주현우를 보며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주 대표님."주 대표님이라는 호칭에 주현우는 마음이 욱신거렸다. 다른 사람한테는 다 살갑게 굴면서 유독 주현우한테만 거리를 두고 있었다. 주현우는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허아연을 바라볼 뿐이었다. 허아연은 주현우의 아픈 곳을 콕콕 찌르는 재주가 있었다.허아연과 주현우가 어색하게 대치하고 있는 걸 본 전서진이 분위기를 풀기 위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연아, 이렇게 만났는데 같이 밥 먹자. 우리가 룸 예약해뒀어."전서진의 말이 끝나자마자 주민경이 곧바로 거절했다."그건 됐어, 나 아연이랑 단둘이 할 얘기가 많아서 같이 밥 먹는 건 사양할게. 두 사람 얼른 가서 밥 먹어."주민경의 말에 전서진은 할 말을 잃은 채 바라보기만 했다.자기 오빠의 속마음은 전혀 모르고 도와줄 생각도 하지 않다니, 정말 답 없는 팀원이었다.전서진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자 주민경이 얼른 등을 떠밀며 말했다."두 사람 얼른 들어가, 나랑 아연이 얘기 나누는 데 방해하지 말고."그러자 허아연도 웃으며 말했다."서진 씨 마음은 고
잠시 뒤.허아연이 준비를 마치고 내려오자 주민경은 벌써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저 멀리서 걸어오는 허아연을 본 주민경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바로 달려가 두 팔을 벌려 끌어안았다.그 순간 눈시울이 붉어지며 서러움도 함께 밀려왔다.두 팔로 주민경을 안고 오랜만에 느끼는 품에 허아연도 금세 눈시울이 붉어졌다.지금 이 순간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모든 걸 다 알 수 있었다. 서로 다 알고 다 이해하고 있었다.한 손으로는 주민경의 껴안고 다른 손으로는 가볍게 등을 토닥이던 허아연이 붉어진 눈으로 말했다."민경아, 널 속여서 미안해."주민경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이미 자신의 정체를 눈치챘다는 걸 허아연은 이미 알고 있었다. 주민경에게 사과하던 허아연은 문득 자신이 떠나던 그날 밤이 떠올랐다. 유건희와 함께 조금 떨어진 화단에 서 있던 그때, 불길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울다가 끝내 정신을 잃고 쓰러지던 주민경의 모습이 보였다. 그 기억을 떠올리자 허아연은 너무 미안해졌다.주민경을 속이고 싶지 않았지만 주현우에게서 벗어나고 싶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주민경은 사과하는 허아연을 안은 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아연아,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는 거 알아. 네 나름의 사정이 있었던 것도 알아. 무사하면 됐어, 살아있기만 하면 됐어."허아연이 말을 하기도 전에 주민경은 팔을 풀고 쫑알쫑알 보고했다."참, 아연아. 허씨 본가와 네 아파트 내가 계속 사람 시켜서 제때 청소했어, 할아버지가 너한테 남겨주신 물건들도 다 잘 챙겨뒀어.""내가 한 일들이 헛되지 않을 줄 알았어, 꼭 의미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주민경의 말에 감동이 밀려온 허아연은 다시 꼭 끌어안았다.허아연이 다시 안자 주민경도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목이 메어 말했다."아연아, 이제 안 떠날 거지? 우리 이제 헤어지지 말자."주민경의 만류에 허아연은 고개를 세게 끄덕이며 약속했다.이전까지는 교진시에 계속 머물 생각이 없었지만 주민경의 헤어지지 말자는 말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