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 connecter한참의 침묵 끝에 영민은 마침내 문을 막고 있던 손을 천천히 거뒀다.그러나 남자의 얼굴에는 깊게 상처 입은 사람 같은 표정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영민은 거의 애원에 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잠깐만 들어가서 앉아 있으면 안 될까? 딱 5분만이라도.”그렇게까지 낮아진 부탁 앞에서도, 지설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차갑게 잘라 말했다.“안 돼.”영민은 쓸쓸하게 웃다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지설을 똑바로 바라봤다.“난 우리가 감정이 남아 있다고 생각했어, 오해가 아무리 많아도 다시 돌아갈 수 있다고 믿었고.”지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부영민, 정신 차려! 우리는 이미 끝났어! 그리고 너 주유연이랑 같이 있잖아. 이제 와서 두 마음 품지 좀 마.”그 순간, 영민의 눈이 번뜩였다.“너 주유연 신경 쓰여서 그러는 거지? 그래서 질투하는 거잖아. 그러니까 아직도 나 사랑하는 거 맞잖아. 네가 날 떠난 것도 사실은 복수하려고 그런 거고, 내가 너한테 무릎 꿇고 후회하게 만들려고 그런 거잖아.”지설의 시선이 완전히 식었다.“너 로맨스 소설 너무 많이 본 거 아니야? 지금 나한테 이런 감정을 호소하는 연극 펼치는 게 재밌어? 미안한데 난 쓰레기 같은 남자랑 눈물 흘리며 재결합하는 비련의 여주인공 아니야.” “난 떠난다고 말했으면 반드시 떠나. 지금 당장 안 나가면 진짜 빗자루로 쫓아낼 거야.”영민은 지설이 이런 말까지 할 거라고는 전혀 믿지 못했다.그는 갑자기 손을 뻗어 지설의 팔을 붙잡고, 그대로 자신의 품 쪽으로 끌어당겼다.그리고 고개를 숙여, 그대로 지설의 입술을 향해 다가왔다.그 순간, 지설은 거의 반사적으로 현관 수납장 쪽으로 손을 뻗었다.손끝에 닿은 건, 늘 그 자리에 두고 있던 호신용 스프레이였다.지설은 주저 없이 스프레이를 움켜쥐고, 그대로 영민의 얼굴을 향해 분사했다.자극적인 가스가 순간적으로 터져 나오며 영민의 눈을 정면으로 덮쳤다.영민은 참을 수 없는 통증에 비명을 지르듯 숨을 들이마시며, 지설을
도진과 지설은 식사를 마친 뒤, 나란히 걸으며 집 쪽으로 천천히 돌아갔다.대형 쇼핑몰 앞을 지나던 순간, 지설의 시선이 무심코 입구에 걸린 거대한 전광판으로 향했다.화면에는 막 바뀐 속보 뉴스가 떠 있었다.〈FH그룹 회장 부영민, 주신그룹 딸 주유연 씨와 오랜 연애 끝 결실 임박... 재계의 축복 속에 결혼 초읽기〉웅장한 배경음악과 함께 화면은 성대한 연회장 장면으로 전환됐다.정교하게 맞춘 수트를 입은 영민은 반듯하게 서 있었고, 유연은 화려한 드레스를 걸친 채 눈부시게 웃고 있었다.두 사람은 손을 맞잡은 채 나란히 입장했고, 그 모습은 화면 너머에서도 과할 정도로 달콤해 보였다.지설은 무의식적으로 발걸음을 멈췄다.전광판 속 두 사람을, 아무 말 없이 바라봤다.그 미세한 변화를 도진은 바로 알아챘다.“지설 씨, 아직도 부영민이 신경 쓰이세요?”지설은 잠시 멈칫했지만, 곧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전혀요, 저랑 부영민은 이미 오래전에 평행선이 됐어요. 이제는 다시 만날 일도 없고요. 부영민이 자기 인생을 사는 건 저한테도 나쁜 일이 아니에요.”적어도 이제는, 영민이 다시 나타나 자신을 흔들 일은 없을 것이다.그리고 이렇게 돌고 돌아 결국 유연과 함께하는 걸 보니, 두 사람이야말로 진짜 인연이었는지도 몰랐다.‘제발 둘이 꼭 붙어살아.’지설의 속마음이었다.도진은 그 말을 듣고 조용히 미소 지었다.봄바람처럼 부드러운 표정이었다.그는 지설을 집 앞까지 바래다주고 나서, 차분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저는 이따가 로펌에 다시 들러서 야근해야 해요. 지설 씨도 오늘 하루 많이 피곤하셨을 텐데 들어가서 푹 쉬세요. 좋은 밤 보내요.”출장에서 돌아온 도진의 책상 위에는 이미 처리해야 할 서류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지금 정리하지 않으면 다른 사건들까지 밀릴 상황이었다.이렇게 늦은 시간에도 다시 일하러 간다는 말에, 지설은 놀란 얼굴로 말했다.“이 시간에 또 일하러 가세요? 일도 중요하지만, 몸도 좀 챙기셔야 해요.”도
도진은 아무 표정 없이 지설이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깊은 눈동자는 겨울밤의 별처럼 차갑게 빛났고, 오뚝한 콧날 아래로 다문 입술에서는 쉽게 다가갈 수 없는 기운이 풍겼다.머리 위 조명이 도진의 몸을 비추며 또렷한 윤곽을 드러냈지만, 그를 감싸고 있는 냉랭한 분위기까지 누그러뜨리지는 못했다.도진은 지설 앞에 멈춰 서서 담담하게 말했다.“지설 씨, 예전에 말했죠. 제가 부씨 집안 남매 사건 도와드렸으니 밥 한 번 사신다고요?”지설은 그 사건이 바로 떠올라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네, 물론이죠. 도진 씨 시간만 괜찮으시면 언제든지요.”그동안 도진 덕분에 지설은 영민에게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옆에 서 있던 호안은 갑자기 끼어든 사람이 못마땅했지만, 상대가 도진이라는 걸 알아보는 순간 기세가 확 꺾였다.기도진 변호사.부모님조차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인물이었다.게다가 외모, 분위기, 능력까지 어느 하나 호안이 앞선다고 말할 수 없었다.지설이 도진을 대하는 태도 또한 분명히 달랐다.‘이건... 상대가 안 되잖아.’도진은 호안의 속내 따위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시선을 옮겨 민호안을 바라보며 바로 물었다.“민호안 씨죠, 백양그룹이 민호안 씨 댁 회사인가요?”호안은 자신도 모르게 기세가 눌린 채로 대답했다.“네, 맞습니다.”도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매우 실무적인 어조로 말을 이었다.“예전에 백양그룹에서 경제 사건 의뢰하셨을 때 제가 일정이 안 맞아서 못 맡았는데, 마침 지금 시간이 좀 생겨서요, 오늘 밤까지 자료 정리해 주시면 내일 로펌에서 자세히 이야기하죠.”‘뭐?’호안은 순간 귀를 의심했다.‘기도진 변호사가 우리 회사 사건을 맡아준다고?’‘이건 부모님이 들으셨으면 난리 날 일인데.’아무리 연애에 정신이 팔려 있어도, 회사 일이 더 중요하다는 건 분명했다.호안은 즉시 자세를 바로 하고 말했다.“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도진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강한 존재감 탓에 호안은 마치 도진의 비서처럼 보일 정도였다
민호안은 키가 크고 이목구비가 뚜렷했으며, 어딘가 혼혈처럼 보이는 깊은 윤곽을 지니고 있었다.거기에 재력 있는 집안에서 자란 덕분에 옷차림과 태도에서도 자연스럽게 여유와 센스가 묻어났다.학원에 있는 여자 강사들은 호안이 가져온 간식을 하나둘 받아 들고는, 눈에 별이라도 뜬 듯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하지만 호안의 시선은 처음부터 끝까지 지설에게만 가 있었다.은화를 보자마자 호안이 서둘러 물었다.“원장님, 부원장님 어디 계신지 아세요? 아무리 둘러봐도 안 보이시네요.”은화는 미소를 지으며 지설의 사무실 쪽을 가리켰다.“부원장님은 지금 업무 처리 중이세요. 간식 드실 시간도 없으신가 봐요.”말을 마친 은화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같이 일하는 저도 따라가기 힘들 정도예요.”호안의 얼굴에 즉각 걱정스러운 기색이 떠올랐다.“그럼 안 되죠. 일이 아무리 많아도 몸부터 챙기셔야죠. 제가 사무실로 들어가서 간식 전해드려도 될까요? 일은 끝이 없잖아요.”그 열성적인 모습에 은화는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이 정도면 거의 헌신하는 수준이네.’은화는 일부러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그럼요. 민호안 씨 마음이 정 그렇다면 한번 들어가 보세요. 부원장님이 받아주실지는 모르겠지만요.”은화는 슬쩍 핸드폰을 꺼내, 호안이 간식을 들고 지설의 사무실로 들어가는 모습을 몰래 찍었다.그리고 그 사진을 그대로 도진에게 전송했다....도진은 그 시각 공항에 있었다.무더운 Y시에서 K시로 돌아오자마자, 공기의 온도부터 확연히 다르다는 걸 느꼈다.핸드폰을 켜는 순간, 읽지 않은 메시지 알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보낸 사람은 은화였다.사진을 여는 순간, 도진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화면 속에는 낯선 남자가 간식을 들고 지설의 사무실로 들어가고 있었다.가슴 깊은 곳에서 묘한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불쾌함과 함께, 설명하기 어려운 질투가 한꺼번에 밀려왔다.도진은 곧바로 비서를 향해 말했다.“로펌으로 바로 갑시다.”비서는 놀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조
하지만 지설의 탄탄한 피아노 실력과 과거 악단에서 활동했던 이력은, 자연스럽게 학원의 간판으로 이어졌다.실력과 경력이 곧 신뢰가 되었고, 그 신뢰는 학원의 경쟁력이 되었다.시간이 흘러 6월에 접어들자, 학원의 수강생 수는 점차 안정세에 들어섰다.지설은 단정하면서도 눈에 띄는 외모와 차분한 분위기, 거기에 확실한 전문성까지 갖추고 있어서 특히 인기가 많았다.학생들은 쉬는 시간만 되면 지설 주변으로 몰려들어 이것저것 질문을 쏟아냈고, 학부모들 역시 지설을 향해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노골적으로 신뢰를 표현했다.최근에는 한 학생의 오빠라는 남자가 눈에 띄게 지설을 따라다니고 있었다.이름은 민호안.열흘이 넘도록, 지설의 책상 위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꽃다발이 놓였다.호안은 종종 고급 세단을 몰고 학원 앞에 나타나 지설의 퇴근 시간을 기다렸고, 식사 초대를 건네곤 했다.하지만 지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하며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거절했다.그런데도, 호안은 포기할 기색이 없었다.그날도 호안은 간식을 들고 학원을 찾았다.지설은 일부러 사무실에 머무르며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그때, 사무실 문이 천천히 열리며 은화가 들어왔다.은화는 입가에 장난기 어린 미소를 띠운 채 말했다.“지설아, 그 민호안이라는 사람 진짜 멀끔하지 않냐? 사람도 훤칠하고 성의도 넘치고, 그렇게까지 쫓아다니는데... 너 진짜 아무 감정도 안 들어?”은화는 숨 돌릴 틈도 없이 말을 이었다.“아, 그리고 집안도 꽤 괜찮다더라. 부모님이 무역회사 하시고 K시에 부동산도 많다던데, 완전 금수저야. 그 조건이면 한 번쯤 만나 봐도 되는 거 아니야?”은화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에도, 지설은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마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조용히 페이지를 넘기고 있을 뿐이었다.은화가 다시 한번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지설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선배, 저는 지금 연애할 마음이 없어요.”은화의 눈이 반짝였다.“오, 그럼 아예 연애 자체가 싫은 거야
도진 덕분에 부영민과 부라희는 그렇게 쉽게 법의 심판을 받을 수 있었다.‘도진 씨한테 진 빚이 너무 많아.’지설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영민은 꼬박 한 달을 유치장에서 보내고 나서야, 보석으로 풀려났다.그를 데리러 온 사람은 주유연이었다.유연은 수척해진 영민의 얼굴을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헝클어진 머리, 정리되지 않은 옷차림, 예전의 자신만만하고 여유 넘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지금의 영민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유연은 한순간 마음이 아파졌다.반대로 유연을 본 영민의 마음은 복잡했다.영민은 유연이 아직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았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그런데도, 유연을 향한 영민의 감정은 여전히 거부감이 먼저였다.사람의 마음이란 원래 그런 것이었다.한때는 목숨까지 바치고 싶을 만큼 사랑했던 사람도, 사랑이 사라지고 나면 얼굴만 봐도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게 된다.유연은 빠르게 다가와 영민의 두 손을 꼭 붙잡았다.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 결국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리며 말했다.“오빠, 나 밀어내지 마, 지금 FH그룹 상황이 얼마나 힘든지 나도 다 알아, 제발 나 오빠 곁에 있게 해 줘, 내가 도울게, 같이 버텨보자!”그 말을 듣자마자 영민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는 원치 않아도 지설의 얼굴이 떠올랐다.비록 자신을 유치장으로 보낸 사람이 지설이었음에도, 영민은 여전히 그녀를 완전히 놓지 못하고 있었다.그러나 현실은 냉정했다.FH그룹은 전례 없는 위기에 빠져 있었고, 유연의 집안 도움 없이는 부씨 가문 전체가 무너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치열한 갈등 끝에, 영민은 결국 타협을 선택했다.지금은 감정이 아니라 권력이 먼저였다.힘을 되찾아야,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영민은 애원하듯 자신을 바라보는 유연을 보며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고, 끝내 그녀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그 반응만으로도, 유연의 가슴에는 기쁨이 밀려들었다.유연은 급히 눈물을 닦으며 환하게 말했다.“그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