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하지만 지금은 집사람 친정 쪽 형편이 예전 같지 않아. 오히려 내 사정보다도 못한 수준이야.”“이번 위기에서 집사람은 나에게 아무런 도움도 못 됐어. 평소에는 내 돈 쓰는 것 말고는 하는 게 없어. 이혼은 언젠가 하게 될 일이야.”오양천의 말을 들은 구윤은 가슴 깊숙이 눌려 있던 숨을 그제야 내쉴 수 있었다. ‘다행이다. 적어도 마음은 이미 내 쪽으로 기울어져 있어서.’그때,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구윤은 흠칫 놀라 오양천의 품에서 급히 몸을 떼고, 머리와 옷매무새를 서둘러 정리했다.“들어와.”오양천의 말이 떨어지자 객실부 매니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얼굴에는 다급함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사장님, VIP 고객 한 분이 직접 뵙고 싶다고 하십니다.”VIP 고객은 호텔에서 가장 신경 써야 할 존재였다.게다가 최근 호텔이 위기에 처해 있는 상황에서, 오양천은 그 존재를 더욱 가볍게 볼 수 없었다.오양천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내가 직접 갈게.”...지설과 도진은 15분 정도를 기다린 끝에 오양천을 마주하게 됐다.오양천은 지설을 보자마자 눈빛이 흔들렸다.사진으로 이미 본 얼굴이었다.아내와 함께 확인했던 그 사진 속 인물, 심지설이었다.그 옆에 서 있던 객실부 매니저는 난처함과 분노가 뒤섞인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심지설이 설마 VIP로 가장해서 들어온 건가?’오양천은 매니저를 날카롭게 바라봤다.“일 처리를 도대체 어떻게 하고 있는 거야? 정말 우리 호텔 VIP 고객 맞아?”객실부 매니저는 식은땀을 흘리며 서둘러 설명했다.“이분은 아니고요, 옆에 계신 남성분이 VIP 고객이십니다.”그 말에 오양천의 시선이 도진에게로 옮겨갔다.그리고 그 순간, 얼굴이 굳어졌다.K시에서 사업을 하는 사람이라면, 도진을 모를 리 없었다.‘법무법인 도진’의 대표변호사.한 번도 패소한 적 없는, 업계에서 이름만으로도 통하는 인물.오양천은 두 사람이 함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믿기지 않았다. ‘심지설이..
지설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가슴 한편이 따뜻해지면서도 말로 옮기기 어려운 감정이 함께 올라왔다.그리고 입술을 가볍게 깨문 뒤,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실은요... 매번 모든 일을 도진 씨께 맡기고 싶지 않았어요. 제 문제는 제가 직접 해결하고 싶었고, 그때마다 도진 씨 도움에만 기대고 싶진 않았어요.”그 말을 듣자 도진의 미간이 자연스레 좁혀졌다.도진은 한숨에 가까운 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런 생각은 안 하셔도 돼요. 지설 씨가 의지하는 건 제가 원해서 하는 일이에요. 부담으로 느낄 필요도 없어요. 지설 씨와 관련된 일이라면 크고 작은 걸 따질 이유도 없어요. 제게는 다 중요해요.”지설은 그 말을 듣고 그대로 멈춰 섰다. 머릿속이 잠시 비어버린 듯, 어떤 대답도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이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어.’도진은 지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일단 같이 가요.”말을 마치자 도진은 지설의 가느다란 손을 잡았다.두 사람은 천천히 호텔 로비 쪽으로 걸어갔다.로비 매니저는 이미 자리를 비운 뒤였다.도진은 프런트 데스크로 가서 VIP 카드를 발급받았다.그는 카드가 발급되자 호텔 직원들도 더 이상 두 사람을 내보내려 하지 못했다.도진은 지설에게 낮게 말했다.“가요.”지설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도진의 뒤를 따라 걸었다.객실에 도착하자 지설은 무엇을 하려는 건지 물으려 했다.그러나 도진은 말 대신 곧바로 객실 전화기를 들어 고객센터로 전화를 걸었다.VIP 고객이라는 점 때문인지, 호텔 측의 반응은 빠르고 조심스러웠다.잠시 후, 한 직원이 공손한 태도로 객실 안으로 들어와 조심스럽게 물었다.“고객님, 이 객실에서 어떤 점이 불편하신지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도진은 직원을 내려다보듯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전부 마음에 안 들어요.”직원은 말문이 막힌 듯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도진은 차갑게 말을 이었다.“지금 바로 사장 불러요. 직접 항의할
은화에게서 온 메시지를 읽는 순간, 지설의 얼굴이 굳었다.[지설아, 오늘은 절대 출근하지 마. 밖에 기자들이 잔뜩 와 있어 전부 너 보러 온 사람들이야.][이번에 널 노린 사람은 정말 돈을 제대로 쓴 것 같아. 사람 고용해서 연기시키고 실검까지 사더니 이제는 기자들까지 붙였어. 원한이 정말 큰가 봐...][경찰 쪽도 아직 진전 없어. 잘 생각해 봐. 너랑 그렇게 깊은 원한 가진 사람이 누가 있어?]지설의 머릿속에 몇 개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주유연, 구예린, 그리고 부영민...‘부영민은 어젯밤에 와서 끝까지 자기가 한 일이 아니라고 했어.’‘주유연은 바로 얼마 전에 나랑 얘기까지 했는데 이렇게 바로 돌아서서 날 치겠어?’‘그럼... 구예린?’지설은 그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느꼈다.도진이 예린에게 유독 차갑게 굴었고, 최근 들어 예린이 자신을 계속 찾아왔던 것도 떠올랐다.‘사랑이 집착으로 바뀌면, 사람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지설은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이전에 자신을 내연녀로 폭로했던 계정들을 하나씩 눌러 보기 시작했다.게시물의 분위기, 말투, 일상 사진들.그중 하나는 분명히 기억에 남아 있던 계정이었다.학원에 찾아와 난리를 쳤던 바로 그 여자였다.이름은 예하경.프로필과 게시물을 보니 전형적인 명문가 사모님이었다.아이들 사진, 남편, 명품 가방과 주얼리, 고급 레스토랑.지설은 게시물을 끝까지 훑어보다가 중요한 정보를 하나 얻었다.예하경의 남편 이름은 오양천, 그리고 그는 5성급 호텔을 운영하는 대표였다.‘이 정도 재력이면, 쉽게 돈에 넘어갈 사람들은 아닐 텐데.’‘그러면 누군가에게 잘못된 정보를 받은 걸까?’지설의 머릿속에 하나의 결론이 떠올랐다.직접 오양천을 만나 확인하는 수밖에 없었다.지설은 곧장 오양천 명의의 호텔로 향했다. 프런트를 지나 로비에서 대표를 찾겠다고 하자, 로비 매니저가 급히 나와 그녀를 막아섰다.“죄송하지만 대표님께는 외부인의 면담이 불가합니다.”지설은 핸드폰을 꺼내 로비 매니저에
영민의 동공이 순간 수축했고, 주먹을 꽉 쥐었다.“네가 보기엔 내가 그런 인간이야? 네 마음속에서 난 그런 사람인 거야?”지설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되물었다.“아니라고 생각해?”영민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예전에 내가 너한테 상처 준 건 인정해. 하지만 이번 일은 정말 내가 한 게 아니야.”지설은 고개를 끄덕였을 뿐, 더 따지지 않았다.“네가 아니라면 아닌 거겠지.”어차피 이미 신고는 해 두었다.경찰이 알아서 밝혀 줄 일이다.지설이 문을 닫으려 하자, 영민이 문을 밀어 막았다.“넌 날 믿지 않는구나.”지설은 피식 웃었다.“내가 널 믿든 말든, 그게 그렇게 중요해?”영민의 얼굴에 처음 보는 무력감이 스쳤다.“이렇게 굴지 마, 지설아, 네가 나한테 이렇게 차갑게 대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우리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거야?”지설은 눈썹을 찌푸리더니 가차 없이 쏘아붙였다.“네가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이유는 분명하지. 내가 돌아가면 너는 말 잘 듣는 가사도우미 하나를 다시 얻게 되니까...”“나는 너를 위해 모든 걸 바치고 너는 푼돈 같은 생활비만 내면 되잖아. 그것도 집에 쓰는 가사도우미 월급보다 적은 돈으로 말이야. 아이가 생기면 양육은 전부 내 몫이고 너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 아빠가 되겠지.”“그 와중에 밖에서는 여자들 여럿 만나고 그 여자들은 아무 때나 집에 와서 내 자존심을 밟아도 되고, 이런 삶이 눈에 훤히 보이는데 내가 왜 돌아가야 하는데, 그건 나더러 다시 똥을 먹으라는 말이야.”지설은 너무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결혼이 여자의 권리를 지켜 주지 않는다는 걸.운 좋게 책임감 있는 남자를 만나면 그럭저럭 살 수는 있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여자는 끝없는 가난과 절망으로 떨어진다.지설은 남자에게 기대느니, 차라리 남자처럼 살기를 택했다.일을 하고, 돈을 벌고, 자기 삶을 스스로 책임지는 쪽을 선택했다.지설이 결혼에서 도망쳐 나온 이유도 단 하나였다.태어나자마자 대부분의 남자가 아무 노력 없이 누리
지설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은화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이건 분명 나를 겨냥한 사람이 뒤에서 판을 짜고 있는 거예요. 제가 사직을 선언하면 학원에 더 큰 피해는 가지 않을 거예요.”은화는 얼굴이 확 굳어 버럭 소리쳤다.“아직 네 억울함도 제대로 풀어주지 못했는데 네가 나가면 사람들이 이게 사실이라고 믿어 버리잖아.”지설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지금으로선 다른 방법이 없어요.”은화는 단호했다.“같이 창업하기로 했잖아. 잘될 때만 같이 가고 어려우면 혼자 떠안으라는 게 말이 돼. 네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나가. 그 얘긴 꺼내지도 마. 대신 또 누가 찾아와서 너한테 해코지 할까 걱정되니까 당분간 며칠 집에서 쉬어.”지설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 무슨 일 있으면 꼭 말씀 주세요.”지설은 학원을 나섰다.그때 요란한 엔진 소리와 함께 눈에 띄게 튀는 오토바이 한 대가 지설 쪽으로 빠르게 달려왔다.뒷좌석에는 비주류 스타일의 여자 하나가 타고 있었다.지설이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그 여자는 지설을 향해 달걀 하나를 던졌다.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욕설이 터져 나왔다.“내연녀! 죽어 버려!”지설은 반사적으로 몸을 틀었지만 완전히 피하지는 못했고, 달걀은 외투에 부딪혀 노란 자국을 남겼다.오토바이는 이미 시야에서 사라진 뒤였다.지설은 한숨을 삼키며 젖은 외투를 내려다봤다.‘이렇게까지 해야 하나?’지설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을 향해 걸었다.지나가는 사람들은 수군거리거나 힐끗힐끗 쳐다봤지만, 지설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묵묵히 걸었다.집에 도착하자 예연숙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지설아, 뉴스 봤어. 괜찮니?]지설은 일부러 밝은 목소리를 냈다.“괜찮아, 엄마 걱정하지 마.”예연숙은 한숨을 쉬었다.[엄마는 네가 혼자서 사업하는 게 너무 힘들다고 생각해. 이런 일까지 생기고 널 지켜 줄 사람도 없잖아. 부 서방이 잘못한 건 맞지만 그래도 너한테 나쁘게만 대하진 않았잖니? 다시 들어가서 합치면 이렇게까지 고생 안 해도 될
지설은 이를 악물고 눈앞의 여자를 차갑게 노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여사님, 말씀 조심하세요. 근거 없이 제 명예를 훼손하고 허위 사실을 퍼뜨린 행위는 이미 저와 제 일에 심각한 피해를 줬고 저는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예요. 전문 변호사를 선임해서 명예훼손으로 정식 고소하겠습니다.”그 말을 듣자 여자는 조금도 겁먹지 않은 채 턱을 치켜들고 비웃듯 받아쳤다.“흥, 고소할 테면 고소해 그게 뭐 대수라고? 누가 누구를 겁줘? 네가 그 정도로 나를 겁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그게 더 웃긴 거지.”여자는 일부러 지설을 향해 눈을 굴리며 노골적으로 도발했고, 그 태도는 보는 사람의 신경을 충분히 긁어 놓았다.이어 여자는 목소리를 더 높이며 쏘아붙였다.“심지설, 똑똑히 들어! 지금 당장 내 남편한테서 받아 간 돈 한 푼도 빠짐없이 돌려줘! 그리고 오늘부로 내 남편한테서 완전히 손 떼, 다시는 엮일 생각도 하지 마.”“내가 너희 사이에 뭐라도 더 있다는 걸 알게 되면 그땐 진짜 가만두지 않을 거야! 다시 와서 이 일 더 크게 만들어도 후회하지 마.”그 말을 끝으로 여자는 하이힐 소리를 요란하게 울리며 거만하게 돌아섰다.지설은 분노에 온몸이 떨렸다.은화는 주변에서 웅성대는 시선들을 보고는 급히 직원들과 학부모들에게 각자 자리로 돌아가 달라고 정리한 뒤 지설의 손을 잡고 곧장 사무실로 들어갔다.문을 닫자마자 은화가 숨도 고르지 않고 물었다.“지설아, 너 진짜 저 여자 아는 사람 아니지?”지설은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차분히 대답했다.“전혀 모르는 사람이에요. 학원 학부모일 가능성도 거의 없어요.”그 말에 은화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그러면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인간이야? 경쟁 학원에서 일부러 보낸 거 아니야. 진짜 너무 악질이네! 나 절대 그냥 안 넘어가! 고소할 거야! 우리가 만만한 줄 알았나 봐.”그때 은화의 핸드폰에서 알림음이 울렸다.은화는 화면을 확인하더니 표정이 급격히 굳었다.동료가 보낸 메시지였고, 그 안에는 한 기사 링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