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방문이 닫히는 순간, 시아는 온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그녀는 침대에 뻣뻣하게 앉아 손바닥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손톱이 손바닥에 희미한 초승달 모양의 자국을 남겼고 마음속은 뼛속까지 시리도록 차가웠다.시준은 점점 더 미쳐가고 있었다.전에는 명목상의 남매 관계라는 벽 때문에 어느 정도 자제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지금은...그녀를 향한 시선이 강렬하고 집착적이라 뼈가 으스러지도록 제 품에 끌어안고 집어삼킬 기세였다.가능한 한 빨리 떠날 계획을 실행에 옮겨야 했다.곧 해외 콩쿠르 출국 전날이 다가왔다.심성빈은 미리 일정을 정리해두고 송하나와 같은 국제선 항공편을 예약해 함께 떠나기로 했다.시씨 저택.시아는 방에서 몸을 숙이고 캐리어에 필요한 짐을 하나둘씩 챙겨 넣기 시작했다.바로 그때 방문이 열리고 시준이 느릿한 걸음으로 들어왔다.그는 시아의 뒤에 멈춰 서서 펼쳐진 캐리어에 시선을 고정하곤 덤덤하게 말했다.“내일 몇 시 비행기야? 나도 같이 가.”시아는 옷을 접다 말고 손길이 멈칫하며 등줄기가 미세하게 굳어버렸다.그녀는 뒤돌아보지 않고 필사적으로 침착함을 유지하며 최대한 태연하게 말했다.“괜찮아. 뭘 굳이... 학교에서 선생님이 인솔해 주시니까 나 혼자 가면 돼.”“왜?”시준은 그녀 앞으로 다가와 거만하게 내려다보며 언짢은 기색을 드러냈다.“내가 가주는 게 싫어?”시아는 심장이 쿵쾅거렸지만, 얼른 그럴싸한 변명을 찾아 둘러댔다.“아니야, 그런 거. 오빠가 이제 막 시우 그룹을 맡아서 회사 일이 산더미일 텐데 어떻게 일주일씩이나 자리를 비워?”“상관없어.”시준의 목소리는 담담했고 별다른 감정이 실려 있지 않았다.“마침 그쪽에 줄곧 관심을 가졌던 프로젝트가 있어서 가는 길에 겸사겸사 시찰한다 생각하면 돼.”시아의 마음은 순식간에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시준이 동행한다면 그녀가 오랫동안 계획했던 탈출 계획은 완전히 물거품이 될 터였다.하지만 억지로 막아서려 한다면 오히려 그의 의심만 키울 뿐이니 득보다 실이 많았다.시아
다음 날 오전, 송하나는 작성한 신청서를 들고 교무실로 향했다.복도 모퉁이를 막 돌아서는데 마침 시아와 마주쳤고 그녀도 똑같은 신청서를 들고 있었다.“시아 선배.”송하나는 눈을 반짝이며 나직이 물었다.“선배도 신청했어요?”“응.”“그럼 우리 같이 갈 수 있겠네요!”시아의 얼굴에는 기쁨의 기색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그저 입꼬리를 끌어올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 대회는 내가 떠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야.”해외 대회 참가를 명목으로 이 나라를 떠나 시준의 세력권에서 벗어나야만 도망칠 가능성이 더 커질 터였다.이 말을 듣자 송하나는 마음 한편이 저릿했다.그녀는 조심스럽게 시아의 손을 잡았다.“꼭 잘 풀릴 거예요.”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러길 바라야지.”며칠 후, 교내 선발 명단이 공지되었다.전교생 중 총 여섯 명이 선발되었는데 송하나와 시아가 나란히 명단에 올랐다.학교 행정실에서 모든 서류를 일괄적으로 수집하여 단체 비자 절차를 밟았다.밤이 깊어지고 시준이 접대를 마친 후 시씨 저택으로 돌아왔다.그는 곧장 2층으로 올라가 시아의 방으로 향했다.시아는 매일 밤 방문을 잠그지만, 이 남자가 마음만 먹으면 잠금장치 따위 장애가 되진 않았다.시아는 이미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시준은 소리 없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테이블 위에 놓인 여권과 비자를 발견했다.불안한 잠을 자고 있던 그녀는 갑자기 옆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깼다.눈을 뜨자 시준이 옆에 누워 뜨거운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시아는 놀라서 심장이 옥죄어들었고 비명을 지를 뻔했다.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나며 침대 가장자리에 반쯤 걸쳐졌고 이제 곧 떨어질 지경이었다.그때 시준이 긴 팔을 뻗어 그녀의 잘록한 허리를 감싸 안으며 품에 단단히 가두었다. 결국 시아는 꼼짝달싹하지 못했다.“이거 놔!”시아는 그의 품에서 격렬하게 몸부림치며 어깨를 계속 비틀었다.이에 시준이 서서히 속박을 풀고 무심코 여권과 비자를 집어 들었다. 손끝으로 종이
가장 괴로운 건 단연 윌리엄 본인이었다.겨우 첫눈에 반한 사람을 만나 결혼을 앞두고 품에 안을 준비를 하는데 하룻밤 사이에 모든 꿈이 산산조각이 났다.그는 포기할 수 없어 아버지를 찾아가 매달렸다. 어떻게든 시씨 가문 사람들의 마음을 되돌려서 이 혼사를 성사시켜 달라고 애원했다.“아버지, 시아만 얻을 수 있다면 무슨 대가라도 치를게요!”윌리엄 어르신은 요즘 매일 시씨 가문에 찾아가 사과하고 문전박대만 당하던 터라 마음속에 쌓여 있던 화가 완전히 폭발해버렸다.탁자를 쾅 내리치자 찻잔들이 요란하게 흔들렸다.“아직도 정신 못 차렸어? 사진에 영상까지 쫙 깔렸는데, 약혼식 전날 밤에 클럽 가서 여자나 끼고 놀았다는 걸 온 동네 사람들이 다 아는데 대체 무슨 면목으로 시씨 가문에 다시 찾아가란 거냐?”“시준이 그나마 협력할 여지를 남겨둔 건 다 내 체면을 봐서야. 넌 그냥 쥐죽은 듯이 있어! 여기서 더 소란 피우면 협력 관계마저도 유지 못 할 줄 알아!”윌리엄은 처참하게 욕사발을 먹고 목을 길게 빼며 반박하려 했으나 결국 아버지의 격노에 눌려 단 한마디도 내뱉지 못했다.한편 시씨 저택.식탁에 둘러앉은 가족들은 저녁 식사가 한창이었다.시경운은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으며 옅은 한숨을 내쉬고 목소리에도 아쉬움이 묻어났다.“윌리엄 가문과 혼사를 맺을 줄 알았는데 결국 이렇게 됐네.”사실 시준은 윌리엄 가문과의 파혼을 마친 후에야 비로소 모든 일을 시경운에게 알렸다.“그래도 이번 일은 시준이 네가 잘했어.”“지만, 자네가 잘못한 건 없어.”“어영부영 시아를 시집보냈더라면 사람들은 우리 가문이 밑바닥 없는 집안이라 누구든 함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거야.”시경운이 고려하는 것은 시아가 결혼 후 행복할지 여부 따위가 아니었다. 그녀가 품행이 경박한 남자에게 시집가서 어떤 고통을 받을지에도 관심 없었다.오직 시씨 가문의 체면과 이익만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시경운은 시준을 올려다보며 담담하게 말했다.“이 혼사가 틀어졌으니 앞으로 네가 좀 더 신경
다음 날 이른 아침.윌리엄은 숙취로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소파에서 번쩍 정신을 차렸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밤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아버지가 불같이 화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당장 집으로 돌아오라는 명령이었다.윌리엄은 가슴이 철렁하며 큰일이 생겼음을 직감하고 급히 저택으로 돌아왔다.거실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윌리엄 어르신이 던져버린 신문들이 바닥에 흩뿌려졌다. 헤드라인은 온통 어젯밤 나이트클럽에서 몰래 찍힌 사진들로 가득했다.사진 속 윌리엄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양옆으로 유흥업소 여자들에게 기대어 있었다. 그야말로 꼴사나운 모습이었다.온라인에는 이미 관련 기사가 걷잡을 수 없이 퍼지고 있었다.시우 그룹과 윌리엄 가문의 약혼 소식이 얼마 전 막 발표되었는데 곧바로 예비 신랑의 이런 스캔들이 터진 것이다.여론은 순식간에 들끓었고 온갖 매체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자극적인 헤드라인을 뽑아내며 소식을 막을 수 없었다.윌리엄 어르신은 분통이 터져 온몸을 덜덜 떨며 윌리엄을 손가락질했다. 목소리는 통제할 수 없는 포효처럼 터져 나왔다.“네가 한 짓 좀 봐! 약혼식 하루 앞두고 나이트클럽에서 이런 스캔들이 나? 가문의 평판을 이딴 식으로 구길 거야? 망할 자식!”윌리엄은 신문 사진들을 보며 완전히 얼어붙은 채 넋 놓고 중얼거렸다.“아니... 어젯밤에 본 건 분명 시아인데 어떻게 다른 사람이...”“또 헛소리를 지껄여?”윌리엄 어르신은 버럭 화를 냈다.“시아가 시씨 저택에 안 있고 왜 한밤중에 나이트클럽에 가서 너를 찾아? 술에 취해 정신 못 차리고 사고를 쳐놓고 이제 와서 이런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려놓는 거니?”윌리엄은 꾸짖음을 듣고 고개를 숙였다. 억울한 심정을 말할 길이 없었다.정말 너무 많이 마셔서 많은 세부 사항이 기억나지 않았다. 억울함만 가득할 뿐 어떠한 반박도 내놓지 못했다.윌리엄 어르신이 한창 아들 녀석을 나무라고 있을 때, 집사가 황급히 들어와 보고했다.“어르신, 시우 그룹
시아는 고개를 저었다. 두 눈에는 막막함이 가득했다.“아직은 딱히 정해둔 곳 없어.”“시씨 가문을 벗어나고 시준만 떠날 수 있다면 어디든 상관없어.”송하나는 그녀의 쓸쓸하고 무력한 모습을 보며 가슴 한편이 저릿했다.위로의 말들이 맴돌았지만, 그 어떤 것도 힘없이 느껴졌다.시야를 돕고 싶은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너무 한정적이라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이 답답했다.그저 신중하게 입을 여는 수밖에...“선배, 앞으로 제 도움 필요하면 언제든 얘기해요. 꼭이요.”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눈가가 살짝 붉어졌다가도 금세 눈물을 감추며 평정심을 되찾으려 애썼다.“이만 돌아가자.”너무 오래 나와 있으면 시준의 의심을 살까 봐 걱정되었다.송하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시아를 따라 불빛 찬란한 연회장으로 다시 들어갔다.만찬이 끝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윌리엄 가문의 사람들이 특별히 시씨 가문을 방문했다.시아와 윌리엄의 약혼 날짜를 확정하고 결혼을 추진하기 위함이었다.윌리엄 본인은 시아를 무척 좋아했고 정략결혼에 대해 매우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윌리엄 가문 또한 시우 그룹과의 깊은 협력을 중요하게 생각했기에 모두가 순조로운 진행을 바랐다.가문의 중대한 혼사 문제였으므로 이미 은퇴한 시경운은 시준을 본가로 불러 함께 이 일을 논의했다.윌리엄 가문은 충분한 성의를 보이며 약혼식을 일주일 뒤로 정하자고 제안했다.제안을 들은 시경운도 매우 만족스러워하며 즉시 응하려 했다. 그러다 옆에 앉은 시준을 돌아보며 그의 의견을 물었다.“시준이 네 생각은 어때?”시준은 찻잔을 들고 겉으로는 평온한 표정이었지만 마음속에서는 차가운 기운이 일렁였다.그는 두 사람의 결혼을 결코 원치 않았지만, 양가 간의 혼사는 이미 오래전부터 약속된 일이었다.시우 그룹을 막 인수한 시준은 아직 기반이 확고하지 않은 상황이다. 아무런 이유 없이 일방적으로 파혼한다면 윌리엄 가문의 심기를 거스를 뿐만 아니라 아버지 시경운마저도 감당하기 어려울 터였다.게다가 시우 그룹의 미래
송하나는 고개를 돌려 심성빈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속삭였다.“성빈 씨, 저 그럼 시아한테 다녀올게요.”“그래, 가봐.”심성빈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뒷모습을 주시했다. 인파를 헤치고 시아에게 다다를 때까지 눈길을 떼지 않았다.“시아 선배.”송하나의 부름에 시아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그녀의 등장에 시아는 침울했던 눈빛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마치 먹구름 속에서 한 줄기 빛이 새어 나오는 듯했다.그녀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서며 놀라움과 기쁨이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하나야! 네가 여긴 웬일이야?”이 성대한 만찬에서 시아는 시종일관 가면을 쓰고 주위 사람들을 상대해 왔다.오직 송하나를 본 지금 이 순간에야 비로소 얼굴에 진심 어린 생기가 돌았다.“성빈 씨랑 함께 왔어요.”송하나가 나지막이 대답했다.옆에 있던 윌리엄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로 향했다.시아를 처음 봤을 때 이미 그녀의 미모에 충분히 감탄했었는데 또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날 줄이야.서구적인 마스크로 화려하고 매혹적인 시아와 동양적인 이목구비로 단아하고 온화한 송하나.두 여자가 함께 서 있는 모습은 그야말로 눈이 호강하는 한 폭의 그림 같았다.시아는 송하나의 손목을 덥석 잡고는 윌리엄을 돌아보며 담담하게 말했다.“윌리엄, 저는 친구랑 할 이야기가 있어서 먼저 실례하겠습니다.”윌리엄은 아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본능적으로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섰다.“저도 끼워주면 안 돼요?”시아는 여전히 담담한 표정이었지만 상대방에게 협상할 여지를 주지 않는 단호한 어조로 일축했다.“여자들끼리 나누는 사적인 대화라 남자분이 계시면 곤란할 것 같아요. 양해 부탁드릴게요, 윌리엄.”이렇게까지 말한 이상 아무리 뻔뻔한 윌리엄이라도 더는 들러붙기 어려웠다. 그는 멋쩍은 듯 대답했다.“알겠어요. 그럼 천천히들 이야기해요. 이따가 또 올게요.”그는 아쉬운 기색을 뚝뚝 흘리며 뒤돌아 떠났다.한편 시아는 송하나의 손을 잡고 시끌벅적한 메인 홀을 빠르게 지나쳐 옆문을 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