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4화

Author: 김하이
이 광경을 본 송하나는 발끝부터 차가운 기운이 치밀어 오르고 사시나무 떨듯 몸이 파르르 떨렸다.

이강우가 뼛속까지 아끼고 사랑하는 여자가 바로 송태리였다니!

왜 하필 그녀인 건데? 왜 하필 원수의 딸이냐고?

“싫다면요?”

송하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가다듬었다.

“그럼 네 생활비를 일절 끊어버려야지.”

이강우의 목소리에는 차가움과 거리감이 느껴졌다.

“참나.”

송하나는 웃음을 터뜨리다가 눈물이 핑 돌 지경이었다.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송태리를 기쁘게 하려고 이 인간은 정말 못 하는 게 없었다.

“괜찮아요, 강우 씨.”

송태리가 애교를 부리며 이강우의 팔짱을 꼈다.

“얘는 내 사촌 동생이에요.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어릴 때부터 집에서 내 물건을 뺏는 걸 좋아했어요. 고작 옷 한 벌 뿐이니 그냥 얘 줘요.”

도저히 지켜볼 수 없던 차설아가 송태리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이런 뻔뻔한 세컨드 주제에 우리 하나가 먼저 찜한 옷을 뺏는 것도 모자라 사실까지 왜곡해? 아갈머리를 확 찢어버릴라!”

이강우의 안색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송하나는 차설아를 잡아당겼다.

자신과 이강우, 송태리 세 사람의 분쟁에 다른 이들까지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강우는 송하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짜증스러운 기색으로 그녀가 양보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송하나는 그대로 카드를 점원에게 건넸다.

“이 옷 제가 살게요. 카드 결제해 주세요!”

그녀가 노골적으로 거절하자 이강우는 미간을 찌푸렸고 얼굴에는 불쾌감이 역력했다.

다만 송하나는 그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비싸게 산 드레스를 들고 뒤돌아섰다.

그녀의 등 뒤에서 이강우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이거, 그리고 저것도. 매장에 들어온 신상들 싹 다 포장해서 태리 집으로 보내줘요.”

그 순간 송하나는 걸음을 멈칫했다.

모든 신상품이면 적어도 수억 원은 될 터였다.

송태리가 마음에 드는 옷을 득템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는 이토록 사치스럽게 보상해주고 있었다.

송태리를 뼛속까지 사랑해서 일말의 서러움도 겪지 않게 해줄 건가 보다.

이런 상황에 차설아는 욕설을 내뱉지 않을 수가 없었다.

“X발! 이강우 눈깔이 삐었나? 너 같이 현명한 아내를 옆에 두고도 몰라주다니. 송태리 저 여우 같은 년이 대체 뭐가 좋다는 거야?”

송하나는 가슴 한쪽이 찌릿했지만, 이내 다시 담담해졌다.

어차피 이혼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왜 굳이 또 이강우 때문에 괴로워해야 할까?

다음 날 오전.

송하나는 혼자 무료함을 달래며 거리를 거닐었다.

어슬렁거리다 보니 어느덧 모교 앞에 도착했다.

캠퍼스에서는 한창 채용 박람회가 열리고 있었다.

후배들의 맑고 생기 넘치는 얼굴을 보니 그녀의 마음도 잠시 아련해졌다.

만약 4년 전, 연애 호구가 되어 이강우에게 시집가지 않았더라면, 자신의 학업과 커리어를 포기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지금은 또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겠지...

“송하나?”

등 뒤에서 누군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뒤돌아보니 놀랍게도 대학 시절 지도교수 장현서가 서 있었다.

“교수님.”

장현서는 이전보다 조금 늙어 보였고 흰머리가 늘었지만, 여전히 독설을 내뱉던 영감탱이였다.

“많이 야위었어. 안색도 안 좋고. 사는 게 많이 힘들었니?”

“그게...”

송하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이걸 대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그때 멀리서 그 녀석 얼굴을 한번 본 적이 있는데 널 진심으로 대하는 것 같지 않더라. 하나 너는 꼭 직접 겪어보고 넘어져 봐야 정신을 차리는 애였지. 이제 드디어 상처도 받고 아픈 줄 알겠어?”

장현서는 안타까움과 답답함을 담아 그녀를 타박했다.

이에 송하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게요. 직접 부딪혀 보니 얼마나 아픈지 알겠더라고요.”

“교수님, 그 약품 특허 건은 정말 감사했습니다.”

“원래 네 것이었으니 당연한 거야. 돈을 손에 쥐고 있어야 막다른 길에 섰을 때 탈출구라도 있지.”

이제야 송하나는 교수님의 깊은 배려를 깨달았다.

그녀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던 것은 스승과 제자의 인연을 끊어서가 아니었다. 그저 눈앞의 길이 불바다임을 뻔히 알기에 그녀가 그곳으로 뛰어드는 모습을 차마 직접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점심 무렵.

송하나는 장현서와 함께 학교 식당에서 식사했다.

“직장은 구했어?”

송하나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도 일자리를 찾아볼 생각이 있었다. 4년 동안 전업주부로 살아오면서 거의 세상과 단절된 채 오로지 이강우만을 바라봤었다. 그러다 보니 갑자기 사회생활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장현서가 명함 한 장을 건넸다.

“이 회사 대표가 내 제자인데 너만 원한다면 언제든지 출근할 수 있을 거야.”

송하나는 명함을 쓱 훑어보았다.

[현진 바이오테크.]

이곳은 근 2년 사이에 급성장한 기업으로 암 치료제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그녀의 전공과도 정확히 일치했고 회사 규모도 비교적 단순해 직장 경력이 거의 없는 신입인 그녀에게 안성맞춤이었다.

하지만 송하나는 스승의 인맥을 이용해 손쉽게 취직하고 싶지 않았다.

그날 오후, 장현서는 수업에 들어갔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와 이력서를 작성하여 현진 바이오테크 HR에게 전송했다.

곧바로 HR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는데 다음 날 오전 관련 서류를 지참하여 면접에 응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송하나는 서류를 정리하다가 졸업증명서가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성수 빌리지에 두고 온 모양이다.

그녀는 급히 저택으로 달려가 증명서를 찾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서민경이 통화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련님, 이번 달에 보내주신 금액이 혹시 잘못된 거 아니에요?”

전화기 너머로 이강우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돈은 저택 유지비용으로 쓰세요. 이달부터 송하나 생활비는 전부 중단시킬 겁니다!”

송하나를 본 서민경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강우는 매달 서민경의 계좌를 통해 송하나에게 생활비를 보내왔다.

그녀는 송하나가 사랑받지 못하는 것을 알고 몰래 그 돈을 횡령하고는 상징적으로 몇십만 원만 쥐여주었다.

무덤덤한 표정인 걸 봐서 송하나는 아직 아무런 낌새도 눈치채지 못한 듯싶었다. 이에 서민경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송하나를 뒤따라 오며 끊임없이 설득하려 애썼다.

“사모님, 혹시 또 도련님 화나게 하셨어요?”

“도련님과 결혼한 건 사모님 인생에 최대의 행운이에요. 도련님이 밖에 여자가 있으면 어때서요? 사모님 의식주는 아무 문제 없잖아요. 대체 왜 이런 사소한 일로 심술을 부려요?”

“제 말 듣고 얼른 도련님께 전화해서 잘못했다고 사과하고 빌어요. 그럼 아마 도련님도 용서해주실 거예요.”

“저도 다 사모님 위해서 하는 말이니 쓸데없는 고집은 부리지 말아요.”

서민경은 송하나의 뒤에서 끊임없이 잔소리를 늘어놓으며 그녀를 따라 침실까지 들어왔다.

송하나는 뒤돌아보며 눈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게 과연 나를 위해서일까 아니면 본인 주머니나 채우려는 수작일까? 나보단 본인이 더 잘 알겠지?”

서민경은 그 자리에서 완전히 얼어붙었다.

그녀는 손에 쥔 물티슈로 탁자를 닦는 척하며 말을 얼버무렸다.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네요.”

서민경의 어색한 행동을 보고 송하나는 자신의 추측이 맞았음을 확신했다.

이강우가 전에 달마다 그녀에게 생활비를 얼마만큼 주었는지 더 이상 알고 싶지도 않았다.

어차피 이제 아무 의미도 없으니까.

서랍에서 졸업증명서를 찾아낸 송하나는 곧장 집 밖을 나섰다.

한편 서민경은 탁자 위에 놓인 이혼 서류를 보고 잠시 멍해졌다.

그녀는 서둘러 송하나를 뒤쫓았다.

“도련님과 이혼하시려고요?”

송하나는 고개를 살짝 돌렸다.

“이왕 본 김에 나 대신 강우 씨한테 좀 전달해줘.”

떠나가는 송하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서민경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처음엔 그녀가 죽자사자 매달려서 결혼한 건데 겨우 이씨 가문에 발을 들였더니 선뜻 사모님 자리를 내놓겠다고? 과연 그럴 수 있을까?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별이 되어 빛나리   제1139화

    천경미는 심성빈의 뻔뻔한 태도에 말문이 막혔다. 이내 그녀는 더욱 격분해하며 차갑게 웃었다.“좋아, 아주 좋아. 지금 나한테 말장난하겠다는 거지?”“그래, 어디 네가 무슨 대답을 내놓으려는지 한번 보자.”심성빈은 손을 뻗어 옆에 놓인 두툼한 갈색 서류 봉투를 책상 위로 밀었다.“숙모, 화부터 내지 마시고 이걸 먼저 보세요. 이야기는 그다음에 하시죠.”천경미는 여전히 분을 삭이지 못해 가슴이 거칠게 오르내리고 있었다.그녀는 서류 봉투를 거칠게 낚아챘다. 동작이 너무 거칠어 봉투를 봉한 끈이 끊어질 뻔했다.심성빈이 대체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지 확인할 생각이었다.하지만 서류를 꺼내 펼쳐 들고 내용을 확인하는 순간, 천경미는 그대로 얼어붙었다.그녀의 눈앞에 선명한 사진들이 한 장씩 펼쳐졌다.심명재가 젊고 아름다운 여자와 나란히 쇼핑을 하고, 다정하게 여행을 다니며, 해외에서 휴가를 즐기는 모습이었다.두 사람은 누가 봐도 연인 사이처럼 가까워 보였다.뒤이어 나온 사진들은 훨씬 더 충격적이었다.심명재가 그 여자를 데리고 고급 병원에 산전 검사를 받으러 간 사진이었다. 여자의 배는 불룩하게 나와 있었고, 심명재는 몸을 숙여 그 배에 귀를 대고 있었다.천경미는 그 여자가 낯익었다.예전에 심명재의 비서로 일했던 여자 같았다.나중에 퇴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그 뒤로는 본 적이 없었다.그런데 심명재가 몰래 살림까지 차려 놓고, 이제는 아이까지 가진 것이었다.사진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심명재가 그 여자에게 집과 자동차를 사 준 증거, 거액의 계좌이체 내역과 명품 구매 기록까지 들어 있었다.천경미는 손을 부들부들 떨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이게, 이게 대체...”심성빈은 천경미가 충격에 빠진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다가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작은아버지가 오랫동안 비밀을 잘 지키셨나 보네요. 몇 년씩 밖에서 여자를 만나고 곧 사생아까지 태어나는데, 숙모는 전혀 모르셨네요.”천경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그녀는 사진들이

  • 별이 되어 빛나리   제1138화

    그날 오후.심하 그룹 본사, 대표이사실.심성빈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몸에 딱 맞는 정장은 그의 어깨 라인을 차갑고 날렵하게 돋보이게 했다.그는 고개를 숙이고 손끝으로 수북하게 쌓인 그룹 서류를 넘기고 있었다.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공수현이 문을 열고 들어와 낮은 목소리로 보고했다.“심 대표님, 둘째 사모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밖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심성빈은 서류에서 눈도 떼지 않은 채 무심하게 말했다.“응접실에서 기다리시라고 해.”“네.”공수현은 밖으로 나가 천경미를 응접실로 정중히 안내했다.“둘째 사모님, 죄송합니다. 대표님께서 아직 업무 중이셔서요. 응접실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천경미는 애타는 속을 꾹 누르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괜찮아요. 일이 먼저죠. 기다리면 되지요.”그렇게 말했지만 응접실에 앉은 뒤부터 천경미의 속에서는 시간이 흐를수록 화가 치밀었다.자신은 엄연히 심성빈의 숙모이자 집안 어른이었다.남편을 구하려고 직접 찾아와 부탁하는 건데, 한참 어린 조카에게 무시당한 채 기다리고 있다니.차를 몇 잔이나 마셔 배는 더부룩하고 신경은 곤두섰지만 심성빈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천경미는 화가 나면서도 서러웠다.‘어린놈이 갈수록 거드름만 늘어서네.’하지만 불만이 아무리 커도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심명재의 운명과 앞으로 천경미 모자가 살아갈 길이 모두 심성빈의 손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심성빈이 끝내 뜻을 굽히지 않으면 심명재는 평생 감옥에서 나오지 못할지도 몰랐다.기다림은 꼬박 한 시간이나 이어졌다.천경미의 인내심이 바닥날 무렵, 마침내 공수현이 다시 문을 열고 들어왔다.“둘째 사모님, 대표님께서 일을 마치셨어요. 대표이사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천경미는 순식간에 얼굴에서 불쾌한 기색을 지우고 벌떡 일어나 공수현을 따라갔다.노크하고 들어서자 심성빈이 때맞춰 고개를 들었다.“죄송합니다. 숙모, 업무가 밀려서 오래 기다리시게 했네요.”말은 예의 바르게 했지만 차분하고 서늘한

  • 별이 되어 빛나리   제1137화

    심성빈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는 그대로 아래층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가정부가 당황해 앞을 막아서려 했다.“도련님.”하지만 심성빈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야. 내가 나서서 해결하지 않으면 저 사람들은 앞으로도 수시로 본가에 찾아와 소란을 피울 거야. 부모님은 연세도 있으신데 이런 일로 계속 시달리게 할 수는 없어.”말을 마친 심성빈은 망설임 없이 계단을 내려갔다.차가운 색감의 정장은 그의 곧고 반듯한 체형을 더욱 돋보이게 했고, 온몸에서 서늘하고 날카로운 기운이 풍겨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위압감마저 느껴졌다.아직 젊은 나이인데도 심성빈은 모든 상황을 장악한 듯한 침착하고 위엄있는 분위기를 풍겼다.심성빈이 한 계단씩 내려오자 거실에 있던 사람들이 그를 발견하고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떠들썩하던 거실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사람은 천경미였다.천경미도 심용군이 경영권을 내려놓은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이제 결정권이 없다는 사실쯤은 알고 있었다.지금 이 집안에서 실질적인 권한을 쥔 사람은 바로 눈앞의 조카였다.천경미는 더는 심용군을 붙잡지 않고 심성빈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모두가 미처 말릴 새도 없이 무릎을 꿇고 털썩 주저앉았다.“성빈아. 숙모가 이렇게 빌게. 이번 한 번만 네 작은아버지를 봐주렴.”그녀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비굴할 만큼 낮은 자세로 애원했다.“네 작은아버지도 이제 나이가 많아서 이런 일을 견디기 힘들어해. 한집안 식구인 걸 생각해서 한 번만 용서해 줘. 숙모가 평생 네 은혜를 잊지 않을게.”어른이 여러 사람 앞에서 조카에게 무릎을 꿇었다는 건 강력한 압박이었다. 심성빈이 거절할 수 없게 만들겠다는 속셈이었다.친척들은 놀라면서도 앞다퉈 설득에 나섰다.“성빈아, 숙모가 무릎까지 꿇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모질게 굴 수 있어?”“그래, 이 정도면 한 번쯤 봐줄 만도 하잖아. 다 가족인데 끝까지 몰아붙이지 말고 체면은 남겨 둬야지. 앞으로도 얼굴 보고

  • 별이 되어 빛나리   제1136화

    다음 날 이른 아침, 심씨 본가의 거실에는 따스한 햇살이 가득했다.심용군은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며 신문을 읽고 있었고, 곁에서는 고여진이 꽃병에 꽂힌 꽃가지를 다듬고 있었다. 가위가 사각사각 움직이는 소리만 들니는 평화로운 아침이었다.그때 갑자기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고여진은 가위질을 멈추고 의아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아침부터 밖이 왜 이렇게 시끄럽죠? 대체 누가 저러는 거예요?”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가정부 한 명이 허겁지겁 뛰어 들어왔다.“회장님, 사모님. 둘째 사모님께서 오셨어요. 심씨 가문의 방계 친척들과 어른들도 잔뜩 데리고 오셨는데, 벌써 문 앞까지 와 계십니다.”두 사람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거실로 우르르 밀려들었다.맨 앞에 선 천경미는 눈이 퉁퉁 부어 있고 머리도 흐트러져 있었다. 평소 빈틈없이 꾸미고 다니던 귀부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심용군과 고여진은 안색이 굳어지며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천경미는 심용군을 발견하자 구세주라도 만난 듯 비틀거리며 달려들었다.“아주버님, 제발요. 명재 좀 살려 주세요. 제가 부탁드릴게요.”천경미는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고,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명재가 아무리 잘못했어도 아주버님의 친동생이잖아요. 정말 감옥에 가기라도 하면 저희 모자는 어떻게 살아요? 앞으로 무슨 낯으로 사람들을 만나겠어요?”함께 들어온 친척들도 기다렸다는 듯 한마디씩 거들었다.“그러게 말이야, 용군아. 피를 나눈 가족인데 정말 제 식구를 감옥에 보내서야 되겠어?”“성빈이가 아직 젊어서 혈기가 넘치는 거야. 일을 너무 성급하게 처리하니 네가 잘 타일러 봐.”“명재가 아무리 그래도 성빈이 작은아버지잖아. 삼촌과 조카 사이에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네가 집안의 맏형이고 심씨 가문에서 영향력이 제일 크잖아. 이 일은 네가 나서야 해.”친척들은 저마다 혈육의 정과 집안의 도리를 내세우며 심용군을 몰아붙였다.한가운데 둘러싸인 심용군은 사방

  • 별이 되어 빛나리   제1135화

    심성빈은 느긋하게 반찬을 집어 들며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룹 내부의 문제를 은밀히 조사 중이라 얼굴을 비추기가 마땅치 않았어요.”이에 심용군이 미간을 찌푸렸다.“그 조사 결과가 고작 네 삼촌을 경찰에 넘기는 것이었어?”“명재가 탐욕에 눈이 멀어 잘못을 저질렀고 그룹에 손해를 끼친 건 사실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네 친삼촌이야. 회사에서 해임하고 내보내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겠니? 왜 굳이 이 지경까지 만든 거야?”“경찰서에 연락해서 원만하게 마무리 지으렴. 합의하는 쪽으로 해서 며칠 가두었다가 따끔하게 혼만 내고 풀어주란 말이다. 어차피 다 한 가족인데 끝까지 파고들어 남은 인생 망칠 필요가 있겠니?”심성빈은 오늘 저녁 식사 자리에서 아버지가 분명 이런 질문과 설득을 쏟아낼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그도 그럴 것이 심용군은 평생 가문의 체면과 혈연의 정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분이었다.한때 그가 회사를 이끌 때 심명재를 항상 오냐오냐하며 감쌌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바로 그 끝없는 묵인이 심명재를 더 탐욕스럽고 오만방자하게 만든 근본적인 원인이었는데 말이다.심성빈은 고개를 들어 차분한 표정으로 말했다.“아버지, 경찰 측에는 이미 사건이 접수되었고 모든 증거도 제출했습니다. 이제 와서 철회할 수도 없고 합의할 수도 없습니다.”“제가 만약 사적인 감정에 치우쳐 작은아버지를 봐준다면 앞으로 그룹의 모든 임원과 주주들이 똑같이 행동할 겁니다. 너도나도 사리사욕을 채우려 들고 잘못을 저질러도 감정 호소만 하면 면죄부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요. 그것은 그룹의 미래에 돌이킬 수 없는 화근을 심는 꼴입니다.”심성빈의 말은 이치에 어긋남이 없었다.심용군 역시 아들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지만 여전히 미간을 펴지 못했다.“말은 그렇지만 피는 물보다 진한 법이야. 명재는 네 친삼촌이자 나와 한배에서 난 동생이야. 평생을 쌓아온 정이 있는데 정말로 감옥에 보내버리면 남들이 우릴 뭐라고 하겠어?”“심씨 가문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들이라며 형제끼리

  • 별이 되어 빛나리   제1134화

    “성빈아, 내가 잠시 눈이 멀어서 어리석은 실수를 저질렀어. 횡령한 돈은 전부 다 채워 넣을게. 단 한 푼도 빼놓지 않고 회사에 돌려놓을 테니까 제발 한 번만 반성하고 새롭게 시작할 기회를 줘...”조금 전까지 기세등등하던 심명재는 온데간데없었다. 그는 비굴한 태도로 자세를 낮추며 애원했고 눈동자에는 걷잡을 수 없는 공포가 득실거렸다.하지만 심성빈은 처음부터 끝까지 무미건조한 표정을 유지했다. 눈썹 사이에는 어떠한 동요의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처참하게 망가진 심명재의 모습을 태연하게 훑어볼 뿐 용서의 여지는 단 한 치도 없어 보였다.경찰관 두 명이 다가와 소환 절차를 밟았고 망연자실한 심명재를 좌우에서 붙들어 회의실 밖으로 끌고 나갔다.문이 닫히자 회의실에는 적막이 흘렀다.심성빈은 자리에 앉은 이사들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에 거역할 수 없는 위압감이 실려 있었다.“여러분들은 심하 그룹의 근간이자 오늘날까지 그룹을 함께 지켜온 원로들이십니다. 그러나 심하 그룹은 사리사욕을 채우고 그룹의 이익을 갉아먹는 좀벌레를 결코 용납하지 않습니다.”“오늘 같은 일이 두 번 다시 심하 그룹 안에서 벌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이전에는 많은 이사들이 연륜과 경험을 앞세우거나 심명재의 꼼수에 넘어가 어린 심성빈을 대놓고 무시하곤 했다.심성빈은 그동안 일부러 참으며 사소한 일들은 적당히 눈감아주었다.하지만 오늘은 심명재를 처단하는 것을 계기 삼아 자신의 권위를 확고히 세우기로 결심했다.말이 끝나자 오랫동안 심명재의 뒤에 붙어 호가호위하던 이사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들은 책상 아래로 덜덜 떨리는 손을 꽉 쥐며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그들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친삼촌마저 경찰에 넘기는 심성빈이 그까짓 이사진의 체면 따위를 봐줄 리 없다는 사실을 명확히 인지했다.지난 몇 년간 심명재 곁에서 적지 않은 이득을 챙겼고 손을 뻗은 프로젝트 중 대다수가 불투명한 뒷거래로 얼룩져 있었다.심성빈이 마음먹고 파헤치기 시작한다면 어느 하나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