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5화

Author: 김하이
다음 날 오전.

현진 바이오테크 대표이사실.

인사팀 직원이 서류를 가져왔다.

“대표님, 오늘 면접 보러 온 지원자들 서류입니다.”

“거기 놔둬. 이따가 회의가 있으니 면접은 참석 못 할 것 같아.”

“네.”

서유준은 회의실로 향하려 몸을 일으키다가 무심코 가장 위에 놓인 이력서에 시선이 멈췄다.

[송하나.]

그 이름을 본 순간 그는 잠시 멈칫했다.

이력서를 건네받고 사진 속 익숙한 얼굴을 보자 서유준의 마음속에 복잡한 감정이 순식간에 밀려왔다. 심지어 약간의 놀라움까지 더해졌다.

그는 장현서의 자랑스러운 제자였고, 송하나보다 몇 살 더 많았다.

유학 시절, 이미 장현서한테서 똑똑하고 재능 있는 제자를 거뒀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녀는 그야말로 천재나 다름없다고 했다.

장현서는 그와의 전화 통화 중 학술적인 문제에 관해 이야기할 때마다 늘 이 후배에 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처음에는 단순히 그녀가 얼마나 대단하길래 교수님이 그토록 높이 평가하는지 알고 싶어서 그녀의 소식에 귀 기울였다.

그러다 점차 사진으로만 보았던 이 후배에게 마음을 빼앗기게 되었다.

유학을 마치고 서유준은 망설임 없이 귀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러나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가장 먼저 들린 소식은 그녀가 곧 결혼한다는 것이었다.

이번 생에 다시는 엮일 일이 없을 거로 생각했는데 예상치 못하게 그녀의 이력서를 받게 된 것이다.

서유준은 즉시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 오전 회의는 취소하라고 전달해!”

서유준은 면접실로 향했다.

인사팀 직원들은 그를 보고 잠시 놀랐다가 황급히 가운데 자리를 내주었다.

“대표님.”

서유준은 억누르기 힘든 설렘을 애써 참았다.

“시작하지.”

면접이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메인 석에 앉아 말없이 지켜보았고, 인사팀 직원이 지원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대표님, 아까 그 지원자...”

인사팀 직원이 서유준의 의견을 구했다.

“너희가 알아서 해.”

“네, 알겠습니다.”

“다음 지원자, 송하나 씨.”

마침내 송하나가 면접실 안으로 들어왔고 서유준의 시선은 온통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그녀의 안색이 썩 좋지 않아 보였다.

인사팀 직원이 몇 가지 공식적인 질문을 던졌다.

송하나는 4년간 전업주부로 지냈지만, 그 기간에도 꾸준히 책을 읽고 자기 계발을 해왔기에 질문에 막힘없이 답했고 별다른 실수가 없었다.

인사팀 직원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이제 그녀를 돌려보내고 결과를 기다리라고 말하려던 참인데 옆에 있던 서유준이 대뜸 입을 열었다.

“기혼자라고 적었는데.”

그는 왜 갑자기 일하고 싶은 건지 묻고 싶었지만, 인사팀 직원이 그의 의도를 오해하고 방금 질문에 덧붙여서 물었다.

“하나 씨, 저희는 장기적으로 근무할 직원을 찾고 있어요. 혹시 단기간 내에 출산 계획이 있으신가요?”

송하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저는 곧 이혼할 예정이라 출산 계획은 없습니다.”

이 대답을 들은 서유준은 잠시 멈칫했다. 그녀의 눈가에 스치는 희미한 쓸쓸함을 본 그는 왠지 모를 안타까움을 느꼈다.

4년간의 결혼 생활에서 그녀는 대체 무슨 일을 겪었던 것일까?

“하나 씨, 상황은 잘 알겠습니다. 돌아가서 연락 기다리세요.”

“네.”

송하나는 면접실을 나왔다.

서유준에게 있어서 그 뒤의 면접은 무의미한 시간이라 차라리 일찍 자리를 떠버렸다.

송하나의 이혼은 그에게 있어 더 이상 망설일 여지가 없는 기회였다.

오랫동안 마음 깊은 곳에 억눌러왔던 감정들이 통제할 수 없이 솟구쳐 올랐다.

그날 오후.

송하나는 현진 바이오테크 인사팀으로부터 다음 주에 회사에 출근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그녀는 이 소식을 교수님께 알렸다.

장현서는 그녀 성격이 겉으로는 온화해 보여도 실은 강단이 있어 분명 자신의 능력으로 면접을 통과했을 것이라 믿었다.

차설아는 송하나가 직장을 구했다는 소식에 매우 기뻐했다. 어떻게든 그녀를 불러내서 제대로 축하해주리라 마음먹었다.

그날 밤.

송하나는 약속대로 미스트라는 바에 도착했다.

화려하게 눈부신 조명과 술렁이는 분위기에 그녀는 약간 어색함을 느꼈다.

“하나야, 여기야 여기!”

차설아가 룸 입구에서 송하나를 향해 손짓했다.

송하나가 막 자리에 앉았을 때, 매니저가 웃통을 깐 남자들을, 아니 호빠 선수들을 줄지어 데리고 들어왔다.

송하나는 이 광경에 깜짝 놀랐다.

“설아 너 지금 뭐한 거니?”

“네가 곧 이혼하는 걸 축하하고, 직장 구한 것도 축하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걸 기념해서 이 언니가 특별히 준비해봤어. 마음에 드는 애 있으면 술 마시는 동안 옆에 두고 놀아.”

송하나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이건 좀 아닌 것 같아.”

그녀는 노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유일한 연애 경험은 사춘기 시절 이강우를 좋아했던 것, 그리고 그와 결혼한 게 다였다.

“쟤로 하자.”

차설아는 맨 안쪽에 있는 가장 잘생긴 애를 가리키며 송하나 대신 결정을 내렸다.

그 남자가 송하나의 옆자리에 앉았다.

완벽한 초콜릿 복근이 눈앞에서 흔들거리니 그녀는 차마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며 어색함을 달랬다.

문득 그 남자가 적극적으로 송하나의 손을 잡으며 그녀에게 눈빛을 보냈다.

“누나, 내 위에 앉아서 마셔요. 복근은 마음대로 만져도 돼요.”

송하나는 깜짝 놀랐다.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그녀는 너무도 어색한 나머지 재빨리 핑계를 대고 자리를 피했다.

화장실에서 세수하며 정신을 가다듬었는데 나오다가 실수로 길을 잘못 들어서 자신도 모르게 VIP 구역에 발을 들였다.

그 시각, VIP 룸 안.

이강우가 송태리에게 자신의 소꿉친구들을 소개하고 있었다.

최로운과 심성빈은 어릴 적부터 이강우와 함께 자랐고, 집안 또한 부유하고 명망 있는 강현시의 유력 인사들이었다.

이강우는 팔을 소파에 걸치고 있었고 송태리는 그의 옆에 앉아 꼭 마치 자연스럽게 품에 안긴 듯한 모습이었다.

최로운이 술잔을 들었다.

“형수님, 한 잔 올리겠습니다.”

“우리 강우는 모임에 여자를 데려온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요. 태리 씨가 처음이라니까요.”

송태리는 이강우를 힐끔 쳐다보았다.

“자꾸 놀리지 말아요. 혹시 오는 여자들마다 이렇게 말해주는 건 아니겠죠?”

“제가 하는 말은 다 사실이에요. 못 믿겠으면 성빈이한테 물어봐요!”

심성빈이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강우는 여자한테 가까이하지 않기로 유명하잖아요. 하도 송하나가 수작 부려서 강우한테 결혼을 강요한 거지. 안 그러면 우리 강우 그딴 여자 쳐다도 안 봤을 거예요.”

이 말을 들은 송태리는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그녀는 신이 나서 손에 든 술을 단숨에 비웠다.

최로운이 또다시 한 잔을 따라주었다.

“태리 씨, 술 정말 잘 드시네요! 자, 한 잔 더 해요!”

이때 이강우가 손을 뻗어 그녀를 제지했다.

“얘 술 약해. 적당히 줘.”

최로운이 옆에서 헛웃음을 터뜨렸다.

“벌써 감싸고 도는 거야?”

“고작 두 잔 마셨어. 강우 너 너무 인색한 거 아니야?”

이강우가 송태리의 손에서 술잔을 건네받았다.

“내가 대신 마실게.”

“그건 안 되지!”

최로운이 이강우의 술잔을 다시 송태리에게 넘겼다.

“적어도 러브샷 정도는 해야잖아.”

송태리는 살짝 수줍은 듯 이강우를 바라보더니 먼저 입을 열었다.

“알았어요, 마실게요. 대신 이 잔까지 마시면 더 이상 권하지 않기예요.”

“역시 태리 씨가 통쾌하네요!”

송태리와 이강우가 술잔을 높이 들었다.

바로 그때, 송하나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고개를 들자마자 이강우와 송태리가 러브샷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강우는 그녀를 본 순간, 얼굴에 노골적인 혐오감이 떠올랐다.

“네가 여길 왜 와?”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별이 되어 빛나리   제1045화

    심용군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타이르듯 말했다.“넌 아직 젊어서 순간의 설렘을 너무 크게 보는 거야. 남녀 간 사랑에 영원한 게 어디 있어? 아무리 예쁜 여자도 매일 얼굴을 마주하다 보면 언젠가는 질리게 돼.”“강현의 재벌가 자제 중 결혼한 애들을 봐라. 젊을 때 연애 몇 번 안 해 본 사람이 어디 있어? 결국엔 집안끼리 혼인하고, 이해득실을 따져 가문 기반을 다지는 게 재벌가 후계자가 가야 할 길이야.”“반년은 시간을 주마. 그동안 충분히 만나 봐. 반년 뒤에는 미련 없이 끝내. 내가 그 여자에게 넉넉한 보상금을 주고 이 말도 안 되는 관계를 정리해 줄게. 그 뒤에는 마음 잡고 네가 가야 할 원래 자리로 돌아와.”겉으로는 양보처럼 들리는 그 제안이 심성빈에게는 한마디 한마디가 송하나를 깔보는 말이자 자신의 진심을 모욕하는 말로 들렸다.다른 사람들 눈에는 권력과 재산을 가진 재벌가 후계자가 밖에서 몇 번 연애하는 게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하지만 심성빈에게 송하나는 평생을 다 바쳐 지켜야 할 사람이었다.누구라도 그녀를 그렇게 모욕하게 둘 수 없었다. 친아버지라 해도 마찬가지였다.심성빈은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은 채 온몸에 냉기가 내려앉았다. 목소리는 침착했지만 불쾌함이 선명했다.“아버지, 저는 그 사람을 잠깐의 감정으로 만나는 게 아니에요. 진지하게, 평생 함께하고 싶어서 만나는 거예요. 그런 가벼운 말로 그 사람과 제 진심을 모욕하지 말아 주세요. 제 인생에서 아내가 될 사람은 오직 그 사람뿐이에요.”아무리 달래고 압박해도 심성빈이 꿈쩍하지 않자 심용군의 표정도 곧바로 굳었다.“심성빈, 나는 이미 충분히 양보했고 네 체면도 세워 줬다. 이렇게까지 고집부리며 분수를 모르면 안 돼. 내가 살아 있는 한 심씨 가문의 규칙은 바뀌지 않는다! 이혼 경력이 있는 여자가 심씨 가문 대문을 밟고 들어와 집안의 명예를 흐리는 일은 절대 허락하지 않아!”심성빈은 고개를 들어 아버지의 위압적인 눈빛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한마디 한마디 힘을 실어 대답했다.

  • 별이 되어 빛나리   제1044화

    비서의 등이 순간 굳었다. 그는 곧바로 다급히 말했다.“심 대표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목숨을 걸고라도 송하나 씨를 지키겠습니다. 절대 그 누구도 해치지 못하게 하겠습니다!”긴 비행 끝에 비행기는 마침내 강현에 착륙했다.심성빈의 얼굴에는 먼 길을 달려온 피로가 역력했다. 먹빛 정장에도 긴 여정의 흔적이 묻어 있었지만, 그는 잠시도 쉬지 않은 채 곧장 심씨 가문 저택으로 향했다.넓은 거실.심용군은 소파에 앉아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미 차를 마실 기분조차 아닌 듯했다.고여진은 옆에 비스듬히 앉아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눈빛에는 초조함과 걱정이 가득했다.마당 쪽에서 인기척이 들리자 고용인이 서둘러 마중 나왔다.“도련님, 오셨어요?”“네.”심성빈은 담담히 대답하며 정장 재킷을 벗어 고용인에게 건넸다. 동작은 여전히 침착하고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고여진은 그를 보자 며칠 동안 꾹 눌러 참아왔던 감정이 한순간에 터져 나왔다.비꼬는 투와 분노가 뒤섞인 목소리로 먼저 날을 세웠다.“참 빨리도 왔구나! 왜? 그렇게 급하게 달려온 걸 보니, 우리가 직접 그 여우 같은 여자한테 찾아가 망신이라도 줄까 봐 겁났니?”날카로운 말이 귀를 찔렀다.심성빈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새까만 눈동자 깊숙한 곳으로 싸늘한 기색이 스쳤지만 표정은 차분했다.그는 한 마디 한 마디 진지하게 말했다.“엄마, 저 왔잖아요. 저한테 불만이 있으시면 전부 저한테 말씀하세요. 하나까지 끌어들이지 마시고.”그토록 노골적으로 송하나를 감싸는 모습은 고여진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찔렀다.“네 꼴을 좀 봐! 대체 그 여자가 무슨 약을 먹였길래, 내가 걔 욕 한마디만 해도 이렇게 바로 감싸고 도는 거니?”“그만해. 쓸데없는 말로 화내지 말고 본론부터 하지.”소파에 앉아 있던 심용군이 묵직한 목소리로 끼어들며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한 상황을 눌렀다.그는 손짓으로 심성빈에게 앉으라는 뜻을 보였다.심성빈이 자리에 앉자, 심용군의 깊은 눈빛이 아들을

  • 별이 되어 빛나리   제1043화

    앞길이 아무리 험하고 압박이 아무리 거세도 절대 그녀의 손을 놓지 않을 것이다.담배를 입에서 뺀 심성빈은 쓰레기통에 버리고 내선 전화를 들었다.“들어와.”비서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사무실에 발을 들이자마자 안을 짓누르는 무거운 분위기와 쓰레기통 속 담배를 눈치챘다.심 대표는 원래 절제력이 강하고 자기 관리가 철저해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정말 골치 아픈 일이 생겼을 때만 한 개비씩 입에 물곤 했다.송하나와 만나기 시작한 뒤에는 그녀가 담배 냄새를 싫어할까 봐 거의 손도 대지 않았다.그런데 지금 사무실 쓰레기통 속 담배와 그의 어두운 눈빛은 일이 심상치 않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비서는 불안한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대표님,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요?”심성빈이 고개를 들었다. 짙은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집안에 일이 생겼어. 가장 빠른 귀국편을 예약해. 당장.”비서는 급히 대답한 뒤 다시 물었다.“제가 함께 들어가서 처리할까요?”“아니.”심성빈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목소리는 무겁고 진지했다.“넌 여기에 남아서 모든 걸 지켜. 내가 없는 동안 송하나의 안전을 책임져. 누구도 그 사람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해.”비서는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는 몰랐지만, 심성빈의 엄숙한 표정을 보고 송하나의 안전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건 알아들었다.그는 고개를 끄덕였다.“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지킬게요.”얼마 지나지 않아 비서가 항공권을 예약했다.“대표님, 가장 빠른 항공편으로 예약했어요. 오후 한 시 십 분 출발이에요.”심성빈은 시간을 확인했다. 비행기 출발까지 두 시간이 남아 있었다.“차 준비해. 학교에 들렀다 갈 거야.”이번 귀국은 너무 갑작스러웠다. 집안일을 언제 해결하고 다시 그녀의 곁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아무 말 없이 떠날 수는 없었다.떠나기 전에 반드시 한 번은 만나야 했다.곧 비서가 차를 몰아 심성빈을 학교까지 데려다주었다.심성빈은 이미 송하나의 시간표를 전부 외우고 있었다.그는 강의동 밖에

  • 별이 되어 빛나리   제1042화

    “인제 와서 설명한다고 해결될 문제인 줄 알아?”고여진은 심성빈의 태연한 태도에 화가 치밀어 가슴이 답답해졌다.그녀의 말투는 조금도 물러설 기색이 없이 단호하고 강경했다.“내가 오늘 분명히 말해 두는데, 나랑 네 아버지는 절대로, 절대로 네가 송하나라는 그 여자와 만나는 걸 허락하지 않을 거야!”“우리가 직접 나서게 하고 싶지 않으면 네가 먼저 그 여자와 깨끗이 끝내. 그리고 직접 백씨 가문에 찾아가 사과하고, 지유에게도 잘못을 빌어서 이 혼사를 다시 살려 놔!”명령이나 다름없는 압박에도 심성빈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그는 얇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차가운 목소리로 한 글자 한 글자 또렷이 말했다.“헤어지지 않을 거예요. 평생 그 사람 하나만 선택할 거예요. 결혼도 그 사람과만 할 거고요.”전화기 너머의 고여진은 순간 숨이 턱 막혔다. 가슴에 화가 치밀어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화도 나고 다급하기도 해서 목소리까지 떨렸다.“심성빈! 기어이 네 엄마를 화병으로 죽여야 속이 시원하겠니?”심성빈은 잠시 눈을 감았다. 다시 입을 열었을 때는 목소리에 한층 진지함이 묻어 있었다.“처음부터 끝까지 제가 먼저 그 사람을 붙잡았어요. 그 사람은 아무것도 몰랐고, 이 일과는 아무 상관도 없어요. 탓하시려면 저를 탓하세요. 그 사람은 건드리지 마세요.”“아직 저를 아들로 생각하신다면 제 말을 들어 주세요. 모든 일은 제가 귀국한 뒤에 처리할게요.”이토록 철저하게 감싸는 모습이 오히려 고여진의 가슴을 깊이 찔렀다.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쉰 목소리로 따져 물었다.“심성빈, 지금 고작 남인 여자 하나 때문에 도리어 우리를 협박하는 거니?”“어머니를 협박하려는 뜻은 아니에요.”심성빈의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태도만큼은 완강했다.“그저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무 잘못도 없이 피해를 보는 건 원하지 않을 뿐이에요.”전화기 너머에서 줄곧 침묵하던 심용군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낮고 엄숙한 목소리에 집안 어른의 위엄이 실려 있었다.“됐다. 전화로

  • 별이 되어 빛나리   제1041화

    심성빈은 그 순간 고여진이 백지유에게 전화한 이유를 깨달았다. 고여진은 두 사람이 정말 연인 사이가 맞는지를 확인하려 했던 것이다.몇 초간 침묵이 이어지며 숨이 막힐 듯한 분위기가 감돌았다.백지유는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황급히 물었다.“왜 그래요? 혹시... 제가 무슨 실수라도 한 거예요?”심성빈은 덤덤히 말했다.“어머니는 저한테 아무것도 보낸 적이 없어요.”“뭐라고요?”백지유는 순간 당황한 듯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그러면 어떡해요? 제가 거짓말한 걸 어머님께서 눈치채신 걸까요? 우리 들킨 거예요? 미안해요, 성빈 씨. 저는 상황을 몰라서... 이럴 줄 알았다면 애초에 전화를 받지 않았을 거예요.”“지유 씨 잘못이 아니에요.”심성빈은 마음속에서 거세게 일렁이는 감정을 억누르며 말했다.“이 일은 지유 씨랑 아무 상관 없어요. 제가 해결할게요.”심성빈은 이 일을 백지유의 탓으로 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아마도 부모님이 의심을 품고 일부러 백지유를 떠보았을 것이다.백지유가 전화를 받았든 받지 않았든, 부모님은 어떻게든 진상을 알아내려 했을 것이다.전화를 끊은 뒤 심성빈은 휴대폰을 손에 쥔 채 널찍한 가죽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고개를 뒤로 살짝 젖혔다. 그리고 손을 들어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눈동자 깊은 곳에는 미처 감추지 못한 피로감이 어려 있었다.매 순간 신중하게 움직이며 최선을 다해 진실을 숨겼고, 스스로는 빈틈없이 처리했다고 생각했다.그러나 결국 모든 것이 수면 위로 드러났고 부모님에게 들키고 말았다.사실 심성빈도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당장은 거짓말로 넘길 수 있다고 해도 송하나와의 관계를 평생 숨길 수는 없었고, 언젠가는 반드시 마주해야 할 문제였다.평정심을 되찾은 뒤 심성빈은 곧바로 고여진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는 금방 연결되었다.심성빈이 먼저 평소와 다름없는 덤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어머니, 지유 씨가 그러던데 저한테 전화하셨다면서요. 무

  • 별이 되어 빛나리   제1040화

    연극은 무려 반년 넘게 이어졌다.심성빈은 자신의 부모뿐만 아니라 백씨 가문 사람들까지 속였다. 모든 사람이 감쪽같이 속아 넘어간 것이다.심용군의 눈빛이 서늘해졌다.“그러고 보니 설 무렵에 갑자기 열렸던 그 경매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겠네. 그 녀석이 일부러 소문을 흘린 거야. 우리가 그곳에 너무 오래 머물다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챌까 봐 걱정됐겠지. 그렇다고 대놓고 우리에게 돌아가라고 할 수는 없으니 가품을 구해 경매를 핑계로 우리를 돌려보낸 거야.”고여진은 잠시 당황하더니 이내 깨달았다.30년 동안 자취를 감추었던 작품이 어느 날 갑자기 아무런 징조도 없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리가 없었다.당시에는 그저 우연히 찾아온 기회라고만 생각하며 기쁜 마음으로 경매에 달려갔지만, 결국에는 실망만 느끼고 아쉬움만 가득 남았다.그런데 알고 보니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친아들이 꾸민 일이었다.고여진은 친아들의 손바닥에 놀아난 셈이었다.다른 사람을 상대할 때 쓰던 수법을 자신의 부모에게까지 써먹다니.엄청난 허탈감과 배신감, 그리고 분노가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고여진은 울화통이 치밀어올라 가슴이 거칠게 들썩였고, 손끝은 자신도 모르게 바들바들 떨렸다.“내가 쓸데없이 그 녀석을 걱정했네요!”고여진은 씁쓸한 기분을 느끼며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평소에 얼마나 걱정을 했는데... 해외에서 사업 확장하는 게 힘들까 봐, 몸이라도 상할까 봐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데, 지금 보니 고생은커녕 누구보다 행복하게 지내고 있겠네요.”고여진은 말할수록 화가 치밀어 목소리에서 분노가 가득 느껴졌다.“날마다 사랑하는 사람 곁에 붙어 지냈으니 누구보다 편하고 행복했겠어요. 정작 고생은 아무것도 모른 채 속아 넘어가서 매일 그 녀석을 걱정했던 우리뿐이네요.”한편, 해외.심성빈은 조금 전 장시간 이어진 화상 회의를 끝낸 참이었다.회의실을 나서는 심성빈에게는 아직 가시지 않은 날카로운 기세가 감돌고 있었고, 차가운 눈매와 서늘한 분위기에서는 강한 압박감이 느껴졌다.대표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