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모두가 잠든 새벽녘, 다락방.
에리스는 낮 동안 실패로 끝난 ‘루카 헬리오스 검증 계획’을 떠올리며 종이 위에 또 다른 작전을 적어 내려가고 있었다.
- 손바닥 위에 밀가루 반죽을 올려놓고 태양의 열기로 빵을 굽게 한다.
“......”
잠시 생각하던 에리스는 제 손으로 쓴 문장을 다시 읽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이건 나도 좀 아니다.”
구겨진 종이가 허공을 가르며 쓰레기통 안으로 날아갔다.
휙.
“하아...”
한숨과 함께 힘이 빠진 그녀는 등을 벽에 기대었다.
“어머님은 왜 스스로를 봉인하신 거람.”
문득 떠오른 어머니의 얼굴에 에리스는 옷 안쪽 주머니를 더듬었다.
손끝에 닿은 것은 낡은 팬던트였다.
가운데에는 은은한 빛을 머금은 태양석이 박혀 있었다.
밤의 여신 닉스가 평생 아끼던, 단 하나의 물건.
“밤의 여신이면서 이런 밝은 장신구를 좋아하다니... 이해할 수 없었지.”
에리스는 천천히 팬던트를 열었다.
딸깍.
안쪽에는 한 남자의 초상화가 들어 있었다.
찬란한 금발. 반듯한 눈매. 바다를 닮은 푸른 눈동자.
그 아래 희미하게 적힌 이름.
헬리오.
그 초상화를 바라보던 에리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 초상화를 보실 때만, 어머님은 웃으셨지.”
증오에 젖은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닉스가,
유일하게 미소를 지었던 순간.
그 대상이 이 남자였다.
“아버님과 어머님... 그리고 이 남자.”
“분명 무언가 있어.”
그녀는 다시 초상화를 내려다보다가 얼굴을 찌푸렸다.
자꾸만 저 남자의 얼굴 위로 루카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기분 나쁘네, 진짜.”
에리스는 복잡한 표정으로 팬던트를 품에 안았다.
어머니가 저 남자를 보며 지었던 미소와,
자신은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따뜻함을 떠올리자 눈가에는 눈물이 살짝 맺혀있었다.
그녀는 그대로 벽에 기대어, 조용히 잠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에리스는 다락방에서 내려오자마자 로테를 붙잡았다.
"야 로테, 밀가루 좀 찾아줘."
"...응? 갑자기? 밀가루가 필요해?"
"그렇다니까. 빨리."
"아...! 설마 빵이 먹고 싶은 거야? 미안한데 여긴 밀가루가 없어."
"사 오면 되잖아. 어서 사 와. 나 밀가루로 해야 할 일이 있어."
"돈이.. 없는데?"
"...넌 대체 평생 버섯만 먹고 어떻게 살아온 거니."
에리스는 무지성으로 밀가루를 요구하다가, 문득 로테의 생활 수준이 안쓰러워졌다.
로테는 에리스가 빵이 먹고 싶은 거라 생각했고, 잠시 고민하다 손뼉을 쳤다.
"아! 밀가루 대신할 게 있다!"
"뭔데?"
"요정나무 열매를 갈면 가루가 되는데, 그걸로 만든 빵이 엄청 별미래."
에리스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눈을 가늘게 뜨며 대답했다.
"하. 요정나무 열매? 그거 질겨서 신발 밑창도 만들겠다. 누가 그런 소릴 해?"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
"...빵의 명인이셨네."
"그치?"
"그래. 왠지 최고의 빵이 될 것 같아."
로테는 환하게 웃으며 두 손을 맞잡았다.
"그럼 요정나무 열매 따러 가자!"
"아 미안 로테."
에리스는 태연하게 손을 스르륵 빼고 몸을 돌렸다.
"너랑 저 꼬맹이 둘이 다녀와. 난 볼일이 좀 있어서."
루카가 비웃듯 콧방귀를 뀌었다.
"할 일 없는 잉여가 무슨 볼일."
"바쁘다면 바쁜 줄 알아, 이 망할 꼬맹아."
"알았어, 알았어."
로테가 루카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자, 루카. 에리스를 위한 열매 채집 출발!"
"...하, 진짜 귀찮아."
에리스를 째려보던 루카는 곧 체념한 얼굴로 로테와 함께 집 밖으로 나섰다.
혼자 남겨진 에리스는 품속에서 검은 씨앗 하나를 꺼냈다.
‘밀가루 작전이 실패했으니… 다음은 위기 상황에서 본성을 드러내게 만드는 작전이다.’
그녀는 두 사람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몰래 뒤를 따랐다.
저벅-저벅-
수풀 사이를 샤샥, 샤샥 헤치며 이동하던 에리스는 곧 거대한 폭포 앞에 도착했다.
햇빛을 받아 무지개빛으로 반짝이는 나무, 나뭇가지마다 형형색색의 열매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멀리서 로테의 감탄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와아! 루카, 이것 봐! 예쁘지?”
“예쁘긴 한데… 저걸 어떻게 따려고?”
“어…”
멀리서 들려온 루카의 말에 에리스도 슬쩍 고개를 들어 나무를 올려다봤다.
족히 사십 미터는 되어 보였다.
“…와. 나무 크기 미쳤네.”
잠시 감탄하던 그녀는 곧 정신을 차렸다.
“아, 나 할 일 있었지.”
에리스는 검은 씨앗을 땅에 묻고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일어나라. 대지의 괴물이여.”
쿠구구구궁!
땅이 크게 울리더니 갈라진 틈 사이로 거대한 트롤이 튀어올랐다.
“아, 잠깐…”
콰앙!
튀어오르던 트롤의 어깨에 에리스가 그대로 치여 멀리 날아갔다.
“꺄아아악!”
쿵!
멀리서 거대한 먼지가 피어올랐다.
“음? 무슨 소리지?”
루카가 고개를 돌린 순간, 반대편 숲에서 트롤이 미친 듯이 달려오는 게 보였다.
“미친, 저건 또 뭐야! 야, 로테! 내려와!”
나무를 기어오르던 로테가 트롤을 보고 얼어붙었다.
“뭔데 저거?!”
“내가 받아줄 테니까 뛰어내려!”
그 순간, 트롤의 거대한 주먹이 로테가 오르고있던 나무줄기를 후려쳤다.
콰지지지직!
부러진 나무가 크게 기울었고, 로테의 몸이 그대로 폭포수로 튕겨 나갔다.
"꺄아아아악!"
풍덩!
“로테!”
루카의 표정이 굳기 시작했다.
“이 하등 괴물이…!”
잔뜩 화난 그의 손끝에 황금빛이 모여 활의 형태를 이루었다.
슉!
빛의 화살이 트롤의 급소를 꿰뚫었다.
“구오오오오!”
트롤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쿵!
루카는 지체 없이 폭포 아래로 뛰어들었다.
거센 물살이 몸을 후려쳤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손을 뻗었다.
“로테…!”
흐릿한 물속에서 떠내려가는 로테의 옷자락이 보였다.
간신히 붙잡았지만, 어린 몸으로는 그녀를 끌어올릴 수 없었다.
“…아직 힘이 덜 돌아왔는데.”
루카는 눈을 감고 전신에 힘을 집중했다.
순간, 폭포 아래가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반짝이는 빛 속에서 작은 몸이 순식간에 자라나기 시작했다. 소년은 어느새 성인 남자의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이제 널 안고 헤엄치는게 가능하겠지.”
그는 로테를 안아 들고 폭포 아래 동굴로 헤엄쳐 들어갔다.
축축한 바닥 위에 로테를 눕힌 루카가 급히 그녀의 숨을 확인했다.
“ 숨을… 안 쉬어?”
루카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야. 일어나.”
루카가 로테를 아무리 불러도 반응이 없었다.
“로테!”
떨리는 손으로 심폐소생술을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안돼… 또 소중한 '인연'을 잃을 순 없어.”
루카는 이를 악물고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맞댔다.
숨을 불어넣는 순간, 희미한 빛이 번쩍였다.
“콜록! 콜록!”
로테가 물을 토하며 몸을 일으켰다.
루카는 로테가 의식을 되찾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휴… 다행이야 로테..”
로테는 흐릿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엥? 누구세요?”
“루카.”
“…나 혹시 기절한 지 십 년 됐어?”
“아니, 3분정도?”
“거짓말. 최소 십 년은 지난 얼굴인데?”
“하핫, 내가 말했잖아. 원래 모습을 보면 네가 반할 거라고.”
루카는 가볍게 웃으며 태연한 척 말했지만, 그의 손끝은 아직도 떨리고 있었다.
로테는 그 손을 꼭 잡고서 수줍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구해줘서 고마워, 루카.”
“ … 응”
잠시 침묵하던 로테는 그의 얼굴을 살짝 올려다보다가,
갑자기 눈을 반짝였다.
“루카, 나랑 결혼하자.”
“…그 소린 질리지도 않냐.”
“나 네 말대로 진짜 반한 것 같아!”
“…하?”
“나 네가 떠나는거 싫어. 어제부터 계속 생각했는데, 네가 없으면 슬플것같아.”
루카는 한동안 그녀를 바라보다가 결국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졌다.”
그는 로테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결혼은 나중에 하고, 지금은 서로를 좀 더 알아가자.”
“진짜?!”
“그래.”
그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로테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자, 이제 열매 따고 집에 가자.”
“응!”
로테는 루카의 손을 잡고 다시 열매가 있는 숲으로 올라갔다.
몇 시간 뒤.
해가 붉게 기울 무렵,
두 사람은 생각보다 훨씬 가까워진 거리로 집 앞에 도착했다.
"에리스, 나 왔어~"
"왔냐..."
에리스는 빙결 마법으로 만든 얼음을 얼굴에 대고 냉찜질 중이었다.
"...너 어디서 맞고 왔어?"
"신경 쓰지 마."
그녀는 무심히 대답하다가 로테 뒤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넌 뭐냐."
"성장기라 급하게 컸어."
"미친놈. 이제 별로 놀랍지도 않다."
에리스는 멍하니 루카를 바라봤다.
닉스의 팬던트 속 초상화에 있던 남자.
'헬리오'
눈앞의 루카와 너무도 닮아 있었다.
'...결국 네가 헬리오스였구나.'
찾아야 했던 존재를 드디어 찾았는데,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가슴 한쪽이 서늘하게 식어 갔다.
입술을 꾹 깨문 에리스는 말없이 다락방으로 향했다.
"야, 어디 가."
루카가 그녀를 불러세웠다.
"열매 구해 왔으니 빵 만들어야지."
"...그럴 기분 아니야."
에리스는 그대로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 버렸다.
그 모습을 본 루카가 혀를 찼다.
"아오, 저 기집애 진짜..."
"참아, 루카."
로테가 싱긋 웃었다.
"에리스 지금 사춘기야."
"쟤는 사춘기가 백 년째 진행되고있냐?"
"우리 에리스를 위해 맛있는 빵 만들어 주자!"
"...너 진짜 착하다."
"나도 버섯 말고 다른 거 먹고 싶어."
"그건 솔직하네."
잠시 후,
1층에서는 두 사람이 반죽을 치대는 소리가 들렸다.
방 안에 홀로 남은 에리스는 멍하니 팬던트를 만지작거렸다.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 반드시 찾아야 했던 헬리오스.
하지만 그는 친구의 곁에 있었고,
자신 역시 그를 미워하기만 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진짜 어쩌라는 거야."
그때 아래층에서 로테의 밝은 목소리가 울렸다.
"에리스! 빵 반죽 다 됐는데 모양 좀 같이 만들자!"
에리스는 로테의 말에 눈을 질끈 감았다.
평소라면 가장 먼저 뛰어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웃을 자신이 없었다.
그럼에도 아무 일 없는 척 계단을 내려갔다.
"너희는 내가 없으면 빵도 못 만드니?"
에리스의 말에 루카가 바로 맞받아쳤다.
"야, 네가 먹고 싶다 해서 구해 온 거잖아!"
"흥... 특별히 도와주는 거야."
세 사람은 티격태격 떠들며 빵을 만들었다.
완성된 빵은 고무처럼 질겼고,
맛은 놀라울 정도로 형편없었다.
"...와. 진짜 멋진 맛이다."
에리스는 작게 웃었다.
조금만 더,
아주 조금만 더.
이 일상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바람을 품은 채,
계절은 몇 번이고 바뀌어 갔다.
애드는 카시안과의 이별 이후, 더이상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어딘가 홀가분해진 얼굴로 조용히 서 있었다.슬픔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그 슬픔마저 품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그때 아이테르가 카시안의 시신을 내려다보다 눈을 가늘게 떴다. “…음?”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잘려 나가 있었던 오른팔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온전히 이어져 있었다.온몸의 상처들 또한 깨끗하게 아물어, 마치 깊은 잠에 빠진 것처럼 평온한 모습이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아이테르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타나토스의 짓이군.”죽음의 신이 명계로 돌아가기 전, 모두가 카시안의 영혼에 정신이 팔려 있던 사이 말없이 그의 육신을 복원해 준 듯 보였다. 메티스 역시 카시안을 바라보며 마음 한구석이 복잡해졌다.자신에게는 유독 차갑기만 했던 타나토스가 카시안에게는 마지막 예의를 남겨 주고 떠났기 때문이다.그 묘한 감정이 그대로 눈빛에 드러났는지, 아이테르가 조용히 메티스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꼬옥- “응…?” 갑작스러운 아이테르의 포옹에 메티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그리고 그 미묘한 분위기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애드가 머리를 긁적이며 끼어들었다. “응?”“너희 사귀어?”“아니?!” 아이테르는 화들짝 놀라며 메티스를 옆으로 툭 밀어냈다.“쟤 어깨에 코딱지 묻힌 건데?”“뭣?!?!!” 메티스는 경악하며 자기 어깨를 내려다봤다.그 모습을 본 아이테르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뻥이야.”“…….” 메티스는 그런 아이테르를 잠시 바라봤다.장난스럽고 가벼운 말투 속에 자신을 위로하려는 마음이 섞여 있다는 걸 눈치챈 그녀가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부드럽고 조용한 미소에 아이테르의 심장이 괜히 쿵 내려앉았다. “…어?” 메티스가 천천히 다가오더니, 이번엔 그녀가 먼저 아이테르를 살포시
카시안은 지상에서의 마지막 행동으로, 늘 그래왔듯 애드의 헝클어진 머리를 따스하게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하지만 이미 육체가 죽어 영혼만 남은 자신은, 제자의 몸을 만지는 것조차 할 수 없어 손끝이 허공을 투명하게 통과할 뿐이었다.“….”바로 그때.타나토스의 무심한 시선이 허공에서 갈 곳을 잃고 쓸쓸하게 떨리는 카시안의 투명한 손끝으로 향했다.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딱 한 번만.”“체온을 느끼게 해 주마.”그순간, 조금 전 메티스에게 심장을 찢는 독설을 내뱉던 차가운 모습과는 다른 의외의 친절함에, 자리에 있던 동료들 모두가 놀란 눈으로 타나토스를 바라보았다.타나토스의 창백한 손끝에서 깊은 검은 안개의 마력이 잔잔하게 퍼져 나가 노인의 영혼을 감쌌다.그리고 잠시 후카시안 영혼이 아주 짧은 순간, 마치 살아 있는 인간처럼 형태를 되찾았다.“…!”애드는 떨리는 눈으로 카시안을 바라봤다.카시안 역시 잠시 자기 손을 내려다보다 피식 웃었다.“허.”“신기하군.”그리고 그는 망설이지 않고 애드를 끌어안았다.애드 역시 울음을 참지 못한 채 카시안을 꽉 붙잡았다.두 사람은 마지막으로 서로의 체온을 느꼈다.“감사했습니다…”“…스승님.”카시안은 무덤덤하게 웃으며 애드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그래.”그 한마디에는 수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그리고 카시안 주변에서 따뜻한 빛이 천천히 피어올랐다.마치 하늘로 승천하는 은하수의 별가루처럼 찬란하게 반짝이며, 황량한 평야 위로 스르륵 부드럽게 흩어지기 시작했다.사방으로 퍼져나가는 영혼의 파편들은 따스하고 아늑했다.『애드.』『내 삶의 끝자락에 나타난 너는 내게 완벽한 아들 같은 존재였다.』『…그러니 내 몫까지, 부디 행복하게 웃으며 살아가다오.』검성 카시안의 영혼은 그가 휘두르던 올곧은 검처럼, 그리고 태양신 헬리오스의 자비처럼 그 누구보다 눈부시고 따뜻한 빛을 품은 위대
카시안은 자기 얼굴을 만져 보더니 감탄했다.“오오… 내 잘생긴 얼굴을 구현해 주다니.”“자네 혹시 신인가?”오드아이 남자는 카시안의 반응을 보더니 짧게 한숨을 쉬었다.“…작별 인사는 짧게 허락해 주지, 그게 마지막 내 친절이다.”그의 말에 카시안은 씨익 웃었다.“고맙네!”그리고 전성기 검성의 위풍당당한 걸음걸이로 걸어와,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애드의 바로 앞에 섰다.애드는 떨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스승님?”카시안은 평소처럼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수업료는 최소 100년 뒤 저승에서 받을 테니.”“그전에 지불하러 오면 쫓아낼 거다.”“…네?”“오래 살아라.”카시안 목소리는 놀라울 정도로 담담했다.마치 자신의 죽음을 이미 받아들인 사람처럼.오드아이 남자는 그 인위적인 시간 동안 아무런 재촉도 하지 않았다.그는 그저 팔짱을 낀 채 묵묵히 서서, 고독한 검성이 지상에서의 마지막 인사를 온전히 끝마칠 때까지 조용히 침묵을 지키며 기다려 주었다.바로 그때.메티스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휘청거리는 발걸음으로 걸어가 오드아이 남자를 애처롭게 바라보았다.“…타나토스.”그리움과 원망이 섞인 그녀의 가느다란 손이, 천천히 그의 옷깃을 향해 뻗어 나갔다.하지만 그 손이 닿기 직전, 아이테르가 매서운 손짓으로 메티스의 손목을 휙 낚아채 뒤로 당겼다.휙-!“…그러지 마.”메티스의 흔들리는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무너질듯 깊은 슬픔과 원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왜?”아이테르는 그녀를 자기 뒤로 살짝 감추며, 타나토스를 똑바로 노려봤다.“…이미 널 한 번 버린 녀석이야.”“붙잡으려 하지 마.”그 말이 떨어진 순간.평야 위 공기가 싸늘하게 식어 내렸다.머리 위의 검은 뿔.이질적인 오드아이.그리고 압도적인 신격의 위압감.그의 진짜 정체는 바로 모든 생명의 죽음을 관장하는 명계의 절대 군주, 죽음의 신 ‘타나토
세 사람이 무거운 발걸음으로 간신히 도착한 거친 평야의 중심그곳에는, 마지막 순간까지 왼손에 쥔 검을 결코 놓지 않은 채 꼿꼿하게 무릎을 꿇고 있는 검성 카시안의 모습이 있었다.온몸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찢긴 상처투성이였지만, 세상을 떠난 노인의 얼굴은 그 어떤 날보다 평온하게 가라앉아 있었다.마치 자신에게 다가온 가혹한 운명의 마지막을 기꺼이 받아들인 사람처럼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채 영원한 잠에 빠져 있었다.그 처참한 광경을 본 순간 애드의 절규가 넓은 평야를 뒤흔들었다.“아아아아아아!!!!!!!”“스승님!!!!!!!!”애드는 미친 사람처럼 앞으로 고꾸라지며 카시안의 차가운 시신을 터질 듯이 끌어안았다.마지막 숨이 끊어지는 찰나까지 대륙의 검성으로 당당하게 남은 노인의 마지막 뒷모습은, 너무나도 서글플 정도로 카시안다웠기에 메티스와 아이테르 역시 밀려오는 슬픔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메티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영감님…”아이테르도 씁쓸하게 두눈을 질끈 감았다.“…카시안.”하지만 바로 그 순간“시끄럽다 이놈아!!!!!!!”평야의 대기를 찢고 날카롭게 울려 퍼진 고함소리.그것은 분명 방금 숨이 끊어진 카시안의 걸걸한 목소리였다.“……….”“…엥?”애드는 시신을 붙잡고 울다 말고, 눈물이 맺힌 눈을 끔빡였다.“…스승님?”그는 황급히 품 안 카시안을 내려다봤다.분명 숨은 끊겨 있었다.눈도 감겨 있었다.누가 봐도 완벽한 사망 상태.그런데 바로 그들의 등 뒤에서, 카시안의 카랑카랑한 잔소리가 또다시 마술처럼 들려왔다.“아오 귀청 떨어지겠네 진짜!”아이테르 눈동자가 슬슬 공포로 떨려오기 시작했다.“…뭐야?”“설마 살아 있는 건가?”그 순간 그의 뒤쪽 허공에서 카시안의 우렁찬 고함이 터졌다.“니 눈엔 저게 살아 있는 걸로 보이냐!!!!!”“으악!!!!!!”아이테르가 화
-엘쉬온 인근 해안가-강제로 발동된 전이 마법의 빛이 가라앉자마자, 애드는 마력이 소진되어 금이 간 텔레포트석을 거칠게 바닥에 내던졌다. 쨍그랑-!!깨져버린 마법석 파편들이 차가운 모래사장 사방으로 쓸쓸하게 흩어졌다. “하아… 하아…!”애드는 모래바닥 위에서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뜨거운 눈물이 봇물 터지듯 차올라서 시야가 엉망으로 흐려졌다.그의 귓가에는 여전히 카시안의 마지막 목소리가 이명처럼 맴돌고 있었다.『넌 언제나 내 자랑스러운 제자란다.』“흐윽…”결국 애드는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카시안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이 싸움의 끝에서 자신이 확실하게 죽는다는 것을.그럼에도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웃었다.끝까지 비명조차 지르지 않고 검을 놓지 않았다.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스승으로서 애드에게 ‘복수의 진정한 의미’를 가르치고 있었던 것이다.그 잔인한 진실이 애드의 심장을 더 무참하게 가루로 만들었다.“…왜.”울음 섞인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왜 그런 식으로…”애드는 이를 악물었다.언젠가는 이별이 올 거라 생각했다.카시안은 이미 늙은 몸이었고, 검사란 원래 죽음을 가까이 두고 사는 존재였으니까.하지만 결코 이런 방식의 처절한 이별은 원치 않았다.애드는 결국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그대로 엎드렸다.마치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길잡이를 잃어버린 어린아이처럼, 어깨를 가련하게 들썩이며 대성통곡했다.“아아…! 스승님…” 애드의 통곡 소리 주변으로는 오직 쓸쓸한 파도 소리와 서늘한 바람 소리만이 조용히 감돌 뿐이었다.얼마나 그렇게 지옥 같은 시간이 흘렀을까.저 멀리 모래사장 너머에서 서둘러 달려오는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왔다.사박.사박.그리고 익숙한 목소리.“어…?”“…애드?”익숙한 목소리에 애드의 만신창이가 된 몸이 순간 움찔하며 굳어졌다.그리고 그는
저 정도의 심연을 정면으로 뚫고 살아 나온 인간은, 그 조차도 본 적이 거의 없었다.반면 애드는 안도와 극심한 불안이 뒤섞인 얼굴로 스승을 바라봤다.그런 제자를 향해, 카시안이 다시 검을 비스듬히 들어 올렸다.챙-!!남자의 검은 마력과 카시안의 태양빛 검기가 다시 한번 정면으로 격돌했다.콰아앙-!!!!주변을 찢는 폭음 속에서도, 카시안의 목소리는 이상할 정도로 애드의 귀에 또렷하게 박혔다.“애드.”“…네?”애드는 불길함에 떨리는 눈으로 스승의 뒷모습을 바라봤다.카시안은 계속해서 몰아치는 심연의 공격을 쳐내며 담담하게 말했다.“너와 지낸 시간 동안 나는 네가 아들 같고 좋았다.”챙-!!!!카앙-!!!!그 순간 애드의 눈동자가 천천히 흔들렸다.“…스승님?”불안했다.가슴이 미칠 것처럼 조여왔다. 마치 지금 이 순간의 대화가, 다가올 영원한 끝을 향해 흘러가는 전조처럼 느껴졌기에.카시안은 검을 비틀어 자신을 향해 쇄도하던 심연의 창을 거칠게 튕겨냈다.콰직-!!!!그리고는 피비린내를 풍기며 피식 웃었다.“내 검사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도 널 가르쳤을 때였단다.”애드의 심장이 불길한 예감에 완전히 난도질당했다.카시안은 거칠게 붉은 숨을 몰아쉬면서도, 유언을 남기듯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애드 언제나 내가 늘 말했듯…”카시안의 주변에서 검은 마력이 역류하며 폭발했다.그의 몸이 뒤로 무참히 밀려났다.하지만 기사로서의 자세만큼은 끝끝내 무너지지 않았다.“‘복수’란 건 죽음을 선사하는 게 아니라…”카시안의 깊은 눈빛이 마침내 뒤를 돌아보며 애드를 똑바로 향했다.“그자에게는 가장 고통스럽게, 네게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찾는 거란다.” 콰앙-!!!!또다시 카시안의 검과 심연이 충돌했다.카시안의 입가에서 피가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하지만 그는 소년처럼 활짝 웃고 있었다.“…그리고.”“네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은 애드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지만, 억지로 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이모… 이게 무슨 상황이야?”“설마… 그놈이 또 습격한 거야?”애드는 비틀거리며 로테에게 다가가려 했다.그 순간.에리스가 검은 창끝으로 애드의 목을 겨눴다.“아니.” 에리스는 싸늘하게 말했다.“내가 죽였어.”“……뭐?”애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거짓말하지 마!”“이모가 왜 엄마를 죽여?”“엄마 안 죽었잖아… 또 둘이서 장난치는 거지?”쉬이익-!!!!에리스의 창이
세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침을 맞았지만, 애드의 세계만은 여전히 멈춰 있었다.세 사람은 절벽 끝에 버려진 낡은 오두막을 거처 삼아 잠시 몸을 숨기고 있었다.애드는 헬리오스가 죽기 하루 전 자신에게 선물해 준 목걸이를 내려다보며 작게 중얼거렸다.“태양의 신이라더니… 신은 원래 강한 거 아니었어…?”애드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그 순간.조용히 버섯을 손질하던 에리스가 애드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후려쳤다.퍽-!“아야악!!!”“나이도 어린 게 무슨 늙은이처럼 한숨만 쉬고 있어.”에리스는
“으흑... 에리스... 갑자기 왜 이런 일이...”“…울지 마”낡은 오두막 안에는 로테의 흐느낌과, 낮게 가라앉은 에리스의 목소리가 번갈아 울리고 있었다.아빠를 뜻하는 단어가 들릴 때마다 애드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아니겠지.잘못 들은 거겠지.애드는 떨리는 손으로 문을 조금 밀었다.끼이익-문이 열리고, 멍한 얼굴의 애드가 안으로 들어섰다.로테는 황급히 눈물을 훔친 뒤,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애드, 왜 벌써 들어와? 놀만한게 없어?”애드는 잠시 로테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헉... 헉...!”에리스는 의식을 잃은 로테를 업은 채, 숨이 찢어질 듯 숲을 달리고 있었다.등에 느껴지는 로테의 체온은 점점 식어 가고 있었다.달리는 와중에도 그녀의 머릿속은 애드의 행방으로 가득했다.“그 꼬맹이는 대체 어디까지 간 거야...!”그때였다.맞은편 수풀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에리스는 즉시 걸음을 멈추고 소리가 난 방향을 노려보았다.혹시 놈이 다시 쫓아온 건 아닐까.긴장한 채 조심스럽게 뒷걸음질 치려던 순간.“와악-! 이모!”수풀을 헤치고 애드가 튀어나왔다.장난기 가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