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수년간 적막한 검은 숲에 홀로 살던 로테는 이제 외롭지 않았다.
든든한 친구 에리스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 루카. 그리고 그녀의 배 속에는, 곧 세상에 태어날 작은 생명까지 함께였으니까. 창문 너머로 눈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던 로테는 조용히 생각했다. '마도서로 친구를 소환했던 일은... 정말 잘한 일이었어.' '어머니, 저는 이제 외롭지 않아요.' 감성에 젖어 있던 그때, 멀리서 익숙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야, 이 정신 나간 여자야! 아기 성별도 모르는데 드레스를 왜 벌써 사 ?!" "하! 내가 여신인데 그것도 모르겠냐? 내 조카는 여자애다." "조카는 무슨 조카야! 로테랑 내 아기거든?" 로테는 웃으며 문을 열었다. "루카, 에리스. 다녀왔어? 아기 옷 사 온 거야?" 로테가 나오려고 하자 에리스가 먼저 그녀한테 달려갔다. "야, 몸도 무거운데 왜 나와 멍청아! " "말 좀 예쁘게 해라. 임산부한테." 루카의 태클에 에리스가 헛기침을 했다. "흠... 이 아름다운 여성아. 몸이 무거우니 가만히 앉아 있지 왜 나온 거니?" 에리스의 이상한 말투에 루카가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너 지금 개그하냐?" "그럼 뭐 어쩌라고!" 두사람의 티키타카에 로테는 결국 배를 잡고 웃었다. "푸하하하! 너희 둘은 정말 잘 어울려!" "아니야!!" "그 말 기분 나쁘거든?!" 둘이 동시에 외치자 로테는 더 크게 웃었다. "아하하하하!!!" 에리스는 머쓱한 얼굴로 품 안의 옷을 펼쳤다. "자, 로테! 어때? 내 우아한 머리색과 같은 보라색 드레스야." "와, 예쁘다~ 근데 태어나기 전까진 성별 모르잖아?" 로테의 말에 에리스는 허리를 쫙펴고 당당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딸이라니까. 내 신성력이 그렇게 말하고 있어." 에리스의 말에 루카가 코웃음을 쳤다. "네 신성력은 몸에 구멍 나서 다 빠져나간 것 같은데." "닥쳐라." "푸흣... 고마워, 에리스. 아들이어도 입히면 되지." 로테의 생각지도 못한 말에 루카가 경악했다. "아들인데 왜 드레스를 입혀?!" 에리스는 피식 웃었다. "요즘 시대에 남녀 구분 없이 드레스 입는 거 몰라?" "어, 몰라! 너 내가 드레스 입으면 이쁘냐!?" " 혐오스러우니 상상하게 하지 말아줘." 하지만 로테는 해맑은 표정으로 말했다. "루카는 예뻐서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안 입어! 절대!" 에리스는 로테에게 다가가 배를 쓰다듬었다. "어디 보자.. 곧 터질 것 같네." "곧 태어날 것 같네, 라고 해야지. 터지긴 왜 터져." "이름은 정했어?" 루카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아들이면 애드리안. 딸이면 베로니카." 그의 대답에 로테는 낡은 일기장을 꺼냈다. "아니! 아들이면 데키스로 하자. 우리 어머니가 짓고 싶어 하던 이름이야." "애드리안." "데키스!" 두 사람이 팽팽히 맞서자, 에리스가 귀찮다는 듯 말했다. "그냥 섞어. 데키스 애드리안." "...어?" 티격태격 하던 두사람은 신기한 표정으로 에리스를 바라봤다. "너 천재냐?" 루카는 작게 이름을 되뇌었다. "데키스 애드리안 히페리온..." 그 이름을 들은 에리스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히페리온. 태양의 신의 후계자만이 쓸 수 있는 이름. 행복한 일상 속에서 잠시 잊고 있던 에레보스의 명령이 다시 떠올랐다. "...하아." 에리스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만 모른 척하면... 이 행복은 깨지지 않을 거야.' ... ..... 잠시 후, 로테가 배를 움켜쥐며 불안한 얼굴을 했다. "저기... 배가 살짝 아파." 그 말에 루카와 에리스의 얼굴이 동시에 하얗게 질렸다. "어?" "진통이야?" "몰라... 싸르르 아픈데..." 두 사람은 곧장 집 안을 우왕좌왕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야, 어떡해?! 너 여신이라며! 뭐 좀 해봐!" "내가 출산의 여신이냐?! 나도 애 안 낳아봐서 몰라!" "로테! 괜찮아?! 숨 쉬어! 숨!" "의사를 불러야 하나?!" "지금 이 숲에 의사가 어딨어, 미친 인간아!" 오히려 둘이 더 난리를 치자, 로테는 가장 침착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둘 다 틀렸어." "왜?" "...똥 마려운 배야." "...뭐?" "요즘 배 부르면서 변비 왔거든." 로테의 대답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루카가 허탈하게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싸고 와라." 에리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게 먼저다." 두 사람은 로테를 조심스럽게 화장실까지 안내했다. 그리고 잠시 후. "꺄아아악!!" 화장실 안에서 비명이 터졌다. "뭐야?! 왜 그래?!" 루카와 에리스가 동시에 문을 벌컥 열었다. 바닥에는 맑은 물이 흥건히 퍼져 있었다. "...소변?" "아니." 로테가 울먹이며 대답했다. "...양수야." "...어?" "나... 진짜 곧 낳을 것 같아." ............ 세 사람은 나란히 굳은 얼굴로 서로를 바라봤다. 그리고 동시에 소리쳤다. "어떡해?!?!" “아악!!!” 로테의 고통스러운 비명소리에 에리스와 루카는 동시에 얼어붙었다. 하지만 그 순간뿐이었다. “일단 에리스! 바닥에 이불 깔아!” “어? 어, 알겠어!” “에리스! 뜨거운 물!” “어!! 어! 기다려 봐!” “에리스! 로테 땀 좀 닦아 줘!” “어!!! 수건 가져올게!” 이럴 때만큼은 둘의 호흡이 기막히게 맞았다. 그러다 문득 이상함을 느낀 에리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야, 잠깐. 넌 왜 가만히 서서 명령만 하냐?” 루카는 비장한 얼굴로 대답했다. “나는 아빠잖아. 마음의 준비를 해야지.” “이 미친 인간아!” “야! 니들 계속 장난칠 거면 둘 다 나가!!!” 진통에 날이 잔뜩 선 로테의 외침에 두 사람은 개미만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넵.” 잠시 후, 에리스가 식은땀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근데... 아기는 누가 받아?” 로테는 아픈 와중에도 희미하게 웃었다. “에리스, 네가 받아주면 좋겠어.” “뭐? 내가?” “넌 내 여동생 같은 존재니까...” “뭐래. 내가 너보다 더 언니거든?!” 툴툴대면서도 에리스의 얼굴은 조금 붉어졌다. “아무튼... 으악!! 또 진통이!!” 몽글한 분위기도 잠시, 다시 진통이 밀려왔다. 시간은 생각보다 길었다. 금방 태어날 줄 알았던 아이는 쉽게 나오지 않았고, 로테의 온몸엔 땀이 맺혔다. 루카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조금만 더 힘내, 로테.” “응...!” 얼마 후, 에리스가 다급히 외쳤다. “머리 보여! 로테, 조금만 더 힘 줘!” “으으... 으아아아악!!!” 로테는 온 힘을 다해 마지막 힘을 짜냈다. 그리고 눈 내리는 겨울밤. 우렁찬 울음소리와 함께, 작은 생명이 세상에 태어났다. “응애애앵! 응애앵!” 에리스가 얼떨떨한 얼굴로 아이를 받아 안았다. “...축하한다. 아들이네.” 루카가 넋 나간 얼굴로 물었다. “진짜..? 와.. 나 아빠 된 거야?” “지금 농담하냐? 면 이불이나 가져와!” “아, 그래!” 잠시 후, 포근한 천에 싸인 아기가 에리스의 손가락을 꼭 움켜잡았다. “.....!” 생각보다 따뜻한 아기의 손끝에 에리스의 눈이 흔들렸다. 복잡한 감정을 감추려는 듯 그녀는 서둘러 아이를 로테에게 안겨주었다. “수고했어.” “고마워... 에리스...” 로테는 눈물 어린 미소로 아이를 품에 안았다. “루카... 우리 엄마 아빠가 됐어.” 루카는 떨리는 손으로 로테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고마워, 기쁘다 로테.” 세 사람을 바라보던 에리스는 문득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빛조차 들지 않던 차가운 성. 부모의 사랑을 갈구하던 어린 자신. 처음으로 어머니의 손을 잡고 싶다며 매달렸던 날, 닉스는 그녀를 밀어내며 차갑게 노려봤다. "........." 에리스는 시선을 내렸다. 엄마와 아빠 품에서 사랑받는 이 아이가, 조금 부러웠다. ‘나도... 저렇게 되고 싶었지.’ 그때 루카가 아기의 머리카락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야, 근데 이상하지 않냐?” “뭐가?” “나랑 로테는 금발인데... 왜 얘 머리는 보라색이야?” “.........” 그 말에 로테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그러네? 진짜 에리스 머리색이랑 똑같다!” 루카가 장난기 어린 얼굴로 에리스를 바라봤다. “설마... 이 아이는...” “이상한 생각 하지 마라? 나 여자다?” “누가 뭐라 했냐. 찔려?” “우와... 신기하다.” 에리스는 못마땅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돌연변이겠지.” 하지만 로테는 아이를 꼭 안은 채 웃었다. “아니야. 이 아이는 우리 세 사람을 이어주는 끈 아닐까?” “뭐...?” “몰라.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 잠시 침묵이 흘렀다. 루카가 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들이니까 이름은 데키스 애드리안 히페리온으로 하지.” “좋아! 애칭은 애드로 하자.” “...잘 부탁해, 애드.” 로테와 루카는 아이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에리스는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다락방으로 올라간 순간. 책상 위에, 분명 없던 쪽지 한 장이 놓여 있었다. “...뭐야?” 에리스는 천천히 쪽지를 펼쳤다. [누님. 어머님의 봉인석을 찾았어. 내일 만나러 갈게.] “.....!” “아파테...?” 기만의 신. 자신의 동생이 남긴 글씨였다. “어떻게 내 위치를...” 에리스의 손끝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겨우 새로운 가족을 얻은 친구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의 인정 같은 것보다, 이제는 자신도 행복해지고 싶었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을 애써 눌렀다. “...무슨 방법이 있을 거야.” “그래. 어떻게든 지킬 수 있어.” 에리스는 그렇게 굳게 믿었다. 그 믿음이 가장 먼저 무너질 사람도,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은 모른 채.애드는 카시안과의 이별 이후, 더이상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어딘가 홀가분해진 얼굴로 조용히 서 있었다.슬픔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그 슬픔마저 품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그때 아이테르가 카시안의 시신을 내려다보다 눈을 가늘게 떴다. “…음?”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잘려 나가 있었던 오른팔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온전히 이어져 있었다.온몸의 상처들 또한 깨끗하게 아물어, 마치 깊은 잠에 빠진 것처럼 평온한 모습이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아이테르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타나토스의 짓이군.”죽음의 신이 명계로 돌아가기 전, 모두가 카시안의 영혼에 정신이 팔려 있던 사이 말없이 그의 육신을 복원해 준 듯 보였다. 메티스 역시 카시안을 바라보며 마음 한구석이 복잡해졌다.자신에게는 유독 차갑기만 했던 타나토스가 카시안에게는 마지막 예의를 남겨 주고 떠났기 때문이다.그 묘한 감정이 그대로 눈빛에 드러났는지, 아이테르가 조용히 메티스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꼬옥- “응…?” 갑작스러운 아이테르의 포옹에 메티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그리고 그 미묘한 분위기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애드가 머리를 긁적이며 끼어들었다. “응?”“너희 사귀어?”“아니?!” 아이테르는 화들짝 놀라며 메티스를 옆으로 툭 밀어냈다.“쟤 어깨에 코딱지 묻힌 건데?”“뭣?!?!!” 메티스는 경악하며 자기 어깨를 내려다봤다.그 모습을 본 아이테르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뻥이야.”“…….” 메티스는 그런 아이테르를 잠시 바라봤다.장난스럽고 가벼운 말투 속에 자신을 위로하려는 마음이 섞여 있다는 걸 눈치챈 그녀가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부드럽고 조용한 미소에 아이테르의 심장이 괜히 쿵 내려앉았다. “…어?” 메티스가 천천히 다가오더니, 이번엔 그녀가 먼저 아이테르를 살포시
카시안은 지상에서의 마지막 행동으로, 늘 그래왔듯 애드의 헝클어진 머리를 따스하게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하지만 이미 육체가 죽어 영혼만 남은 자신은, 제자의 몸을 만지는 것조차 할 수 없어 손끝이 허공을 투명하게 통과할 뿐이었다.“….”바로 그때.타나토스의 무심한 시선이 허공에서 갈 곳을 잃고 쓸쓸하게 떨리는 카시안의 투명한 손끝으로 향했다.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딱 한 번만.”“체온을 느끼게 해 주마.”그순간, 조금 전 메티스에게 심장을 찢는 독설을 내뱉던 차가운 모습과는 다른 의외의 친절함에, 자리에 있던 동료들 모두가 놀란 눈으로 타나토스를 바라보았다.타나토스의 창백한 손끝에서 깊은 검은 안개의 마력이 잔잔하게 퍼져 나가 노인의 영혼을 감쌌다.그리고 잠시 후카시안 영혼이 아주 짧은 순간, 마치 살아 있는 인간처럼 형태를 되찾았다.“…!”애드는 떨리는 눈으로 카시안을 바라봤다.카시안 역시 잠시 자기 손을 내려다보다 피식 웃었다.“허.”“신기하군.”그리고 그는 망설이지 않고 애드를 끌어안았다.애드 역시 울음을 참지 못한 채 카시안을 꽉 붙잡았다.두 사람은 마지막으로 서로의 체온을 느꼈다.“감사했습니다…”“…스승님.”카시안은 무덤덤하게 웃으며 애드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그래.”그 한마디에는 수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그리고 카시안 주변에서 따뜻한 빛이 천천히 피어올랐다.마치 하늘로 승천하는 은하수의 별가루처럼 찬란하게 반짝이며, 황량한 평야 위로 스르륵 부드럽게 흩어지기 시작했다.사방으로 퍼져나가는 영혼의 파편들은 따스하고 아늑했다.『애드.』『내 삶의 끝자락에 나타난 너는 내게 완벽한 아들 같은 존재였다.』『…그러니 내 몫까지, 부디 행복하게 웃으며 살아가다오.』검성 카시안의 영혼은 그가 휘두르던 올곧은 검처럼, 그리고 태양신 헬리오스의 자비처럼 그 누구보다 눈부시고 따뜻한 빛을 품은 위대
카시안은 자기 얼굴을 만져 보더니 감탄했다.“오오… 내 잘생긴 얼굴을 구현해 주다니.”“자네 혹시 신인가?”오드아이 남자는 카시안의 반응을 보더니 짧게 한숨을 쉬었다.“…작별 인사는 짧게 허락해 주지, 그게 마지막 내 친절이다.”그의 말에 카시안은 씨익 웃었다.“고맙네!”그리고 전성기 검성의 위풍당당한 걸음걸이로 걸어와,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애드의 바로 앞에 섰다.애드는 떨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스승님?”카시안은 평소처럼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수업료는 최소 100년 뒤 저승에서 받을 테니.”“그전에 지불하러 오면 쫓아낼 거다.”“…네?”“오래 살아라.”카시안 목소리는 놀라울 정도로 담담했다.마치 자신의 죽음을 이미 받아들인 사람처럼.오드아이 남자는 그 인위적인 시간 동안 아무런 재촉도 하지 않았다.그는 그저 팔짱을 낀 채 묵묵히 서서, 고독한 검성이 지상에서의 마지막 인사를 온전히 끝마칠 때까지 조용히 침묵을 지키며 기다려 주었다.바로 그때.메티스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휘청거리는 발걸음으로 걸어가 오드아이 남자를 애처롭게 바라보았다.“…타나토스.”그리움과 원망이 섞인 그녀의 가느다란 손이, 천천히 그의 옷깃을 향해 뻗어 나갔다.하지만 그 손이 닿기 직전, 아이테르가 매서운 손짓으로 메티스의 손목을 휙 낚아채 뒤로 당겼다.휙-!“…그러지 마.”메티스의 흔들리는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무너질듯 깊은 슬픔과 원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왜?”아이테르는 그녀를 자기 뒤로 살짝 감추며, 타나토스를 똑바로 노려봤다.“…이미 널 한 번 버린 녀석이야.”“붙잡으려 하지 마.”그 말이 떨어진 순간.평야 위 공기가 싸늘하게 식어 내렸다.머리 위의 검은 뿔.이질적인 오드아이.그리고 압도적인 신격의 위압감.그의 진짜 정체는 바로 모든 생명의 죽음을 관장하는 명계의 절대 군주, 죽음의 신 ‘타나토
세 사람이 무거운 발걸음으로 간신히 도착한 거친 평야의 중심그곳에는, 마지막 순간까지 왼손에 쥔 검을 결코 놓지 않은 채 꼿꼿하게 무릎을 꿇고 있는 검성 카시안의 모습이 있었다.온몸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찢긴 상처투성이였지만, 세상을 떠난 노인의 얼굴은 그 어떤 날보다 평온하게 가라앉아 있었다.마치 자신에게 다가온 가혹한 운명의 마지막을 기꺼이 받아들인 사람처럼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채 영원한 잠에 빠져 있었다.그 처참한 광경을 본 순간 애드의 절규가 넓은 평야를 뒤흔들었다.“아아아아아아!!!!!!!”“스승님!!!!!!!!”애드는 미친 사람처럼 앞으로 고꾸라지며 카시안의 차가운 시신을 터질 듯이 끌어안았다.마지막 숨이 끊어지는 찰나까지 대륙의 검성으로 당당하게 남은 노인의 마지막 뒷모습은, 너무나도 서글플 정도로 카시안다웠기에 메티스와 아이테르 역시 밀려오는 슬픔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메티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영감님…”아이테르도 씁쓸하게 두눈을 질끈 감았다.“…카시안.”하지만 바로 그 순간“시끄럽다 이놈아!!!!!!!”평야의 대기를 찢고 날카롭게 울려 퍼진 고함소리.그것은 분명 방금 숨이 끊어진 카시안의 걸걸한 목소리였다.“……….”“…엥?”애드는 시신을 붙잡고 울다 말고, 눈물이 맺힌 눈을 끔빡였다.“…스승님?”그는 황급히 품 안 카시안을 내려다봤다.분명 숨은 끊겨 있었다.눈도 감겨 있었다.누가 봐도 완벽한 사망 상태.그런데 바로 그들의 등 뒤에서, 카시안의 카랑카랑한 잔소리가 또다시 마술처럼 들려왔다.“아오 귀청 떨어지겠네 진짜!”아이테르 눈동자가 슬슬 공포로 떨려오기 시작했다.“…뭐야?”“설마 살아 있는 건가?”그 순간 그의 뒤쪽 허공에서 카시안의 우렁찬 고함이 터졌다.“니 눈엔 저게 살아 있는 걸로 보이냐!!!!!”“으악!!!!!!”아이테르가 화
-엘쉬온 인근 해안가-강제로 발동된 전이 마법의 빛이 가라앉자마자, 애드는 마력이 소진되어 금이 간 텔레포트석을 거칠게 바닥에 내던졌다. 쨍그랑-!!깨져버린 마법석 파편들이 차가운 모래사장 사방으로 쓸쓸하게 흩어졌다. “하아… 하아…!”애드는 모래바닥 위에서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뜨거운 눈물이 봇물 터지듯 차올라서 시야가 엉망으로 흐려졌다.그의 귓가에는 여전히 카시안의 마지막 목소리가 이명처럼 맴돌고 있었다.『넌 언제나 내 자랑스러운 제자란다.』“흐윽…”결국 애드는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카시안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이 싸움의 끝에서 자신이 확실하게 죽는다는 것을.그럼에도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웃었다.끝까지 비명조차 지르지 않고 검을 놓지 않았다.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스승으로서 애드에게 ‘복수의 진정한 의미’를 가르치고 있었던 것이다.그 잔인한 진실이 애드의 심장을 더 무참하게 가루로 만들었다.“…왜.”울음 섞인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왜 그런 식으로…”애드는 이를 악물었다.언젠가는 이별이 올 거라 생각했다.카시안은 이미 늙은 몸이었고, 검사란 원래 죽음을 가까이 두고 사는 존재였으니까.하지만 결코 이런 방식의 처절한 이별은 원치 않았다.애드는 결국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그대로 엎드렸다.마치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길잡이를 잃어버린 어린아이처럼, 어깨를 가련하게 들썩이며 대성통곡했다.“아아…! 스승님…” 애드의 통곡 소리 주변으로는 오직 쓸쓸한 파도 소리와 서늘한 바람 소리만이 조용히 감돌 뿐이었다.얼마나 그렇게 지옥 같은 시간이 흘렀을까.저 멀리 모래사장 너머에서 서둘러 달려오는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왔다.사박.사박.그리고 익숙한 목소리.“어…?”“…애드?”익숙한 목소리에 애드의 만신창이가 된 몸이 순간 움찔하며 굳어졌다.그리고 그는
저 정도의 심연을 정면으로 뚫고 살아 나온 인간은, 그 조차도 본 적이 거의 없었다.반면 애드는 안도와 극심한 불안이 뒤섞인 얼굴로 스승을 바라봤다.그런 제자를 향해, 카시안이 다시 검을 비스듬히 들어 올렸다.챙-!!남자의 검은 마력과 카시안의 태양빛 검기가 다시 한번 정면으로 격돌했다.콰아앙-!!!!주변을 찢는 폭음 속에서도, 카시안의 목소리는 이상할 정도로 애드의 귀에 또렷하게 박혔다.“애드.”“…네?”애드는 불길함에 떨리는 눈으로 스승의 뒷모습을 바라봤다.카시안은 계속해서 몰아치는 심연의 공격을 쳐내며 담담하게 말했다.“너와 지낸 시간 동안 나는 네가 아들 같고 좋았다.”챙-!!!!카앙-!!!!그 순간 애드의 눈동자가 천천히 흔들렸다.“…스승님?”불안했다.가슴이 미칠 것처럼 조여왔다. 마치 지금 이 순간의 대화가, 다가올 영원한 끝을 향해 흘러가는 전조처럼 느껴졌기에.카시안은 검을 비틀어 자신을 향해 쇄도하던 심연의 창을 거칠게 튕겨냈다.콰직-!!!!그리고는 피비린내를 풍기며 피식 웃었다.“내 검사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도 널 가르쳤을 때였단다.”애드의 심장이 불길한 예감에 완전히 난도질당했다.카시안은 거칠게 붉은 숨을 몰아쉬면서도, 유언을 남기듯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애드 언제나 내가 늘 말했듯…”카시안의 주변에서 검은 마력이 역류하며 폭발했다.그의 몸이 뒤로 무참히 밀려났다.하지만 기사로서의 자세만큼은 끝끝내 무너지지 않았다.“‘복수’란 건 죽음을 선사하는 게 아니라…”카시안의 깊은 눈빛이 마침내 뒤를 돌아보며 애드를 똑바로 향했다.“그자에게는 가장 고통스럽게, 네게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찾는 거란다.” 콰앙-!!!!또다시 카시안의 검과 심연이 충돌했다.카시안의 입가에서 피가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하지만 그는 소년처럼 활짝 웃고 있었다.“…그리고.”“네
"네놈이...에레보스냐?"남자는 애드의 절박한 질문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그저 가면 너머로 기분 나쁜 웃음소리만 흘려보낼 뿐이었다.그 기괴한 모습을 지켜보던 에리스가 남자 뒤편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가 날카롭게 몰아세웠다. “그래, 대답해! 어째서 네놈이 우리 아버님의 고유한 힘을 멋대로 쓰고 있는 거지?!”그 순간, 남자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려 에리스를 바라보았다. “……에리스.”나직하고 부드러운 목소리. 하지만 그 안에는 영혼을 짓개어버릴 듯한 소름 끼치는 압박감이 담겨 있었다.
거대한 신성을 지닌 여신과 세월에 마모되어 늙어버린 검성의 대결.누가 보아도 결과는 진작 정해져 있어야만 했다.하지만 지금 전장을 완벽하게 지배하고 있는 쪽은, 신이 아니라 인간 카시안이었다. 챙-! 카아앙──!! 검과 창이 허공에서 맞부딪칠 때마다 고막을 찢는 폭음이 사방으로 터져 나왔다.불화의 여신, 에리스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뭐야……?!’‘왜 힘에서 밀리지 않는 거지?’아니, 밀리지 않는 수준이 아니었다. 명백히 카시안 쪽이 그녀를 힘으로 찍어누르며 우세를 점하고
엘쉬온의 수도 루엘애드가 헬리오스와 함께 수련을 시작할 무렵,아이테르와 메티스는 애드의 간식을 사기위해 엘쉬온의 수도 루엘 시장거리에서 쇼핑을 하고있었다. 아이테르는 양손에 간식 봉투를 가득 들고 메티스를 졸졸 따라다녔다. “어? 아이테르, 저기도 가보자!” “또 어딜 가…” 메티스의 무한 쇼핑에 아이테르는 완전히 짐꾼이 된 기분이었다. 애드를 위해 구매한 간식 봉투들이 산처럼 쌓여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때, 앞에서 메티스가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콰당! “야, 괜찮아?
네 사람은 엘쉬온 수도 루엘의 식당가에 도착했다.거리는 사람들로 북적였고, 사방에는 온갖 음식 냄새가 흘러넘쳤다.기름 냄새.달콤한 디저트 향.갓 구운 빵 냄새까지.메티스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식당 간판들을 두리번거리며 걸었다.“우와… 다 맛있어 보인다…”반면 애드와 아이테르는 두 사람보다 조금 뒤에서 천천히 따라오고 있었다.그때였다.애드의 코끝이 움찔했다.스읍—어딘가 홀린 듯 냄새를 들이마시는 모습.아이테르는 그런 애드를 힐끔 바라보더니 말없이 어디론가 사라졌다.잠시 후.아이테르가 씨익 웃으며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