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4화

Author: 소여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4-18 09:18:54

"아직도 속이 울렁거려…."

"나… 난 이제 채식할래…."

로테와 루카는 오크고기를 먹은 충격으로 저녁이 될 때까지 화장실을 번갈아 들락날락하고 있었다.

에리스는 그런 두 사람을 보며 키득 웃었다.

"그거 차별 아니냐? 돼지나 소는 잘만 먹으면서, 오크는 왜 그렇게 질색이야?"

창백한 얼굴의 루카가 벽을 짚은 채 말했다.

"차별이라면서 너는 왜 안 먹었는데?"

"무슨 소리야."

에리스가 당당하게 턱을 들었다.

"난 차별하는데?"

"와… 진짜 뻔뻔하다."

에리스는 피식 웃다가 문득 루카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바라봤다.

은은한 빛을 머금은, 어딘가 평범하지 않은 목걸이였다.

"야, 꼬맹이."

"왜."

"그 목걸이는 뭐야?"

에리스는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지만, 눈빛만큼은 날카로웠다.

루카는 목걸이를 손끝으로 만지작거리며 으스댔다.

"이쁘지? 이거 엄청 귀한 거야. 센티드 왕실 장인이 아다만티움을 정제해서 천 도 이상의 화염으로 가공하고, 거기에 다이아몬드와 루비를 박아 넣은 뒤…."

"아니 미친놈아."

에리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쓸데없는 설명 말고, 어디서 났냐고."

루카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센티드 놀러 갔을 때 바닥에 떨어져 있길래 주웠어."

삐끗.

에리스의 발이 헛디뎌졌다.

장황했던 설명 끝에 돌아온 너무 허무한 결론이었다.

"…아, 그래."

긴장이 한순간에 풀린 에리스는 하품을 하며 몸을 돌렸다.

"난 자러 간다."

"잘 자, 에리스!"

로테가 해맑게 손을 흔들었다.

에리스가 다락방으로 올라가고, 거실에는 두 사람만 남았다.

낮의 목욕탕 사건 때문인지 어딘가 어색한 공기가 감돌았다.

로테는 붉어진 얼굴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저기, 아까는 미안해."

"뭐가."

"남자를 처음 봐서… 이상한 소리 했잖아."

루카 역시 살짝 귀끝이 붉어진 채 헛기침했다.

"뭐… 그럴 수도 있지."

로테는 결심한 듯 주먹을 꽉 쥐었다.

"내가 책임지고 결혼해줄게."

콰당!

루카는 의자째로 뒤집어졌다.

"야!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들었어. 남자의 알몸을 보면 그 남자의 인생을 책임져야 한다고."

"대체 어느 미친놈이 그런 소릴 해!?"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가…."

루카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아."

잠시 침묵이 흐르고, 그는 황급히 헛기침했다.

"미친의 미는… 미적 감각이고."

"친은… 친하다의 친이야."

"그러니까 미적 감각과 친한 분 같다는 뜻이지."

"응? 갑자기 왜?"

"아무것도 아니다."

그는 헛기침하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아무튼 책임 안 져도 돼. 알몸 본다고 닳는 것도 아니고."

"그럼 어머니 말이 틀렸다는 거야?"

"아니, 틀린 건 아닌데… 제발 어머니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자. 내가 이상해지겠어."

"왜?"

"아무튼!"

루카가 목소리를 높였다.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이랑 하는 거야."

로테는 그 말을 듣고 잠시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사랑하는 사람…."

그녀는 조용히 웃었다.

"나는 아버지도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고, 남자도 오늘 처음 봤어. 사랑이 뭔지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데."

루카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언젠가는 좋은 사람이랑 결혼하겠지?"

로테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어딘가 외로웠다.

루카는 괜히 헛기침을 하고는 손을 내밀었다.

"크흠."

"응?"

"그럼… 나랑 산책이라도 할래?"

"밤인데? 위험하잖아."

"내가 지켜줄게."

루카의 말에 로테의 심장이 작게 두근거렸다.

그녀는 살짝 머뭇거리다 천천히 그의 손을 잡았다.

"…응."

두 사람은 함께 문밖으로 나섰다.

검은 숲 위, 밤 하늘에는 별들이 가득 떠 있었다.

차가운 밤공기 속에서 루카의 손끝에 은은한 빛이 피어올랐다.

작은 등불처럼 흔들리는 빛이 어두운 길을 밝혀 주었다.

로테는 바깥 풍경을 보고 눈을 반짝였다.

"이 숲에서 오래 살았지만… 밤에 밖에 나온 건 처음이야."

그리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작게 감탄했다.

"밤하늘이… 이렇게 예뻤구나."

루카는 피식 웃었다.

"그럼 나온김에 엘쉬온 시장에도 가볼래?"

"시장?"

"조금 멀긴 한데, 왕복 두 시간이면 충분해."

로테는 아이처럼 환하게 웃었다.

"갈래!"

그녀는 그의 손을 꼭 잡고 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다락방 창문 너머에서 에리스가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

별빛 아래 나란히 걷는 두 사람.

에리스는 창틀을 손끝으로 두드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아직은."

잠시 침묵이 흘렀다.

"조금 더 의심해 봐야겠어."

***

한참을 걸었을까.

검은 숲 너머로 희미한 불빛 하나가 보이기 시작했다.

로테는 눈을 반짝이며 루카의 팔을 붙잡았다.

“와! 저게 바로 시장 불빛이야?”

“아니.”

“그럼?”

루카는 잠시 침묵하더니 태연하게 말했다.

“미안한데, 길 잃었습니다.”

“뭐…?”

그 순간이었다.

멀리서 보이던 불빛이 스르륵 움직이더니, 점점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쿠에에에에엑!!!!!!!”

기괴한 괴성과 함께 정체불명의 무언가가 돌진해 왔다.

“뭔데 저게!?!!”

로테가 기겁하며 뒤로 물러서자, 루카가 담담하게 설명했다.

“아, 그거… 잭오랜턴.”

“뭐?”

“등불 몬스터.”

“몬스터!?!!?”

호박 머리에 시뻘건 불을 밝힌 괴물이 로테를 향해 달려들었다.

로테는 두 눈을 질끈 감고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아악!!!!!”

그리고 그대로 손을 휘둘렀다.

찰싹!

찰싹! 찰싹! 찰싹!

찰싹찰싹찰싹찰싹찰싹!!!!!

무서울 정도로 정확하고 빠른 손놀림이었다.

잭오랜턴은 반격 한 번 못 해보고 양쪽 뺨만 얻어맞았다.

찰싹! 찰싹!!

찰싹찰싹찰싹!!!!!

루카는 그 모습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와. 잘못 걸리면 얼굴 형체도 안 남겠는데.’

마침내 잭오랜턴의 머리 위 등불이 푸슈우우우— 소리를 내며 꺼졌다.

쿵!!!!

그리곤 그대로 털썩 쓰러졌다.

루카는 식은땀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저걸… 뺨 때려서 잡았네?”

로테는 눈을 슬쩍 뜨며 주변을 둘러봤다.

“어머! 어머! 내가 죽였어?!”

“네. 아주 깔끔하게요.”

잠시 후.

건너편 멀리서 피슈웅— 하는 소리와 함께 밤하늘에 불꽃이 터졌다.

펑!

펑! 펑!

처음 듣는 소리에 로테는 화들짝 놀라 루카 품으로 파고들었다.

“꺄악!! 뭐야!? 이번엔 또 무슨 몬스터야!?”

루카는 갑작스러운 포옹에 온몸이 굳은 채 대답했다.

“몬스터가 아니라… 불꽃놀이.”

“불꽃놀이?”

“아마 저기가 마을인 것 같네.”

루카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가보자.”

로테는 여전히 그의 옷자락을 꼭 붙든 채 고개를 끄덕였다.

“으… 응…!”

10분 뒤.

숲길 끝을 지나자, 수많은 불빛이 밤하늘 아래 반짝이고 있었다.

로테는 넋을 잃은 채 그 풍경을 바라봤다.

“……이게, 시장?”

루카는 그런 그녀의 얼굴을 보며 왠지 모르게 뿌듯해졌다.

“그래. 시장이지. 사람들이 물건을 사고팔고, 맛있는 것도 많고, 예쁜 것도 많은 곳.”

“나 어머니한테 들었어.”

“뭘?”

“사람들은 금속 조각으로 물건을 바꾼다고!”

로테는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근데… 그 금속 조각이 뭐야?”

“…….”

루카는 잠시 침묵하더니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이내 작은 은화 몇 개와 금화 한 닢을 꺼내 손바닥 위에 펼쳐 보였다.

“이런 거지.”

“와아….”

“이 은색 조각 하나면 저기 닭꼬치 두 개쯤 살 수 있고.”

루카는 금화를 들어 보였다.

“이 금색 조각 하나면… 저렴한 드레스 한 벌쯤은 살 수 있겠네.”

“신기하다….”

로테는 감탄하며 품속을 뒤적거리더니 작은 반지 하나를 꺼냈다.

낡았지만 정교한 세공이 새겨진, 작은 보석 한알이 박힌 반지였다.

“그럼 이건 뭐랑 바꿀 수 있어?”

루카는 힐끗 보더니 코웃음을 쳤다.

“야, 그런 낡은 반지로 뭘 사겠어.”

“우리 어머니 유품인데….”

“…….”

루카는 곧바로 표정을 고쳐 잡았다.

“오래된 물건일수록 가치가 높은 법이지.”

“정말?”

“아마… 이 나라 정도는 살 수 있을걸.”

“와아!”

“……아니, 그것보다 이제 어머니 이야긴 조금만 하자.”

“왜?”

“내가 자꾸 나쁜 사람이 되잖아.”

로테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곧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

“뭐?”

그녀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커다란 간판이 걸려 있었다.

[사랑이 가득한 수상한 술집]

“저기!”

“…….”

“사랑이 가득하대! 나 저기서 사랑 찾고 싶어!”

루카는 말없이 로테의 손을 꽉 잡았다.

“저 사랑은 네가 생각하는 사랑이 아니야.”

“응?”

“몰라도 되는 사랑이다.”

그리고 재빨리 방향을 틀었다.

“자, 저기 재미있는 거 하는 것 같네. 가보자.”

“오오! 기대된다!”

루카에게 이끌린 로테는 광장 한가운데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젊은 남녀들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고, 사람들은 둥글게 둘러서서 환호하고 있었다.

“와아….”

로테는 감탄하며 박수를 쳤다.

“예뻐….”

루카가 슬쩍 물었다.

“너도 춤춰 볼래?”

“아, 아니! 난 춤이라는 걸 춰 본 적도 없어.”

그때, 무대 위 사회자가 외쳤다.

“자아! 젊은이들이여!”

광장이 조용해졌다.

“오늘 최고의 댄싱 커플에게는 상금으로 금화 다섯 개를 드립니다!”

순간 로테의 눈이 번쩍 빛났다.

“저요!!”

번쩍!

그녀는 루카의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뭐!? 야! 잠깐!”

사회자가 환하게 웃었다.

“오오! 연하남과 누님 커플 등장!”

“네!!!”

“아니라고!!!”

주변에서 웃음이 터졌다.

“귀엽다!”

“저 꼬맹이 표정 봐!”

그렇게 참가 팀은 총 여섯 팀.

한 팀씩 무대에 올라 춤을 추고, 관객 점수로 순위를 정하는 방식이었다.

시간이 흘러 앞선 팀들이 3점, 4점을 받자 로테는 점점 긴장하기 시작했다.

“루카… 어쩌지? 나 진짜 춤 못 춰.”

루카는 담담하게 손을 내밀었다.

“나한테 몸을 맡겨.”

그 모습에 로테의 심장이 또 한 번 크게 뛰었다.

“…응.”

드디어 두 사람의 차례.

음악이 흐르기 시작했다.

루카는 로테의 손을 잡고 천천히 이끌었다.

한 걸음.

두 걸음.

처음엔 어색하던 로테의 발끝도 어느새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루카는 자연스럽게 그녀를 돌리고, 다시 끌어당겼다.

밤하늘 아래, 등불 사이를 누비는 두 사람의 움직임은 생각보다 훨씬 우아했다.

관객들이 숨을 죽이며 두사람의 춤을 바라봤다.

“오오….”

루카는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할 만하지?”

로테는 붉어진 얼굴로 작게 웃었다.

“응….”

그리고 마지막 동작.

루카는 로테의 허리를 끌어당겨 품 안에 안으며 완벽하게 마무리하려 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로테가 무거웠다.

우드득.

루카의 손목이 꺾였다.

“으아아아악!!!!!!!”

그대로 균형을 잃은 두 사람은 무대 위로 와르르 넘어졌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곧 광장 가득 웃음이 터졌다.

“괜찮아!”

“다시 해!”

“둘 다 귀엽다!”

박수와 응원이 쏟아졌다.

루카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일어났다.

“……가자.”

로테 역시 얼굴을 감싸 쥔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황급히 무대를 내려왔다.

결과는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딱 중간 순위, 3등.

상금은 은화 세 닢.

로테는 그 돈으로 루카와 함께 시장 곳곳을 돌아다녔다.

닭꼬치를 나눠 먹고,

머리 장식을 구경하고,

이상한 향수 냄새에 재채기를 하고,

거리 공연에 웃음을 터뜨렸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두 사람에게는 처음 만들어 본 추억이었다.

어느새 시장의 불빛도 하나둘 잦아들 무렵.

루카가 말했다.

“돌아갈까.”

“응!”

“또 오자.”

로테는 환하게 웃었다.

“응! 좋아!”

루카는 잠시 머뭇거리다 덧붙였다.

“…그런데 다음엔 춤은 추지 말고.”

“……응.”

로테가 작게 웃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다시 검은 숲을 향해 걸어갔다.

손을 잡은 채.

아름다운 추억 하나를 남긴 채.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복수는 사랑보다 늦게온다.   59화

    애드는 카시안과의 이별 이후, 더이상 무너지지 않았다. ​ 오히려 어딘가 홀가분해진 얼굴로 조용히 서 있었다.​슬픔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그 슬픔마저 품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그때 아이테르가 카시안의 시신을 내려다보다 눈을 가늘게 떴다.​​ “…음?”​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잘려 나가 있었던 오른팔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온전히 이어져 있었다.​온몸의 상처들 또한 깨끗하게 아물어, 마치 깊은 잠에 빠진 것처럼 평온한 모습이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아이테르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타나토스의 짓이군.”​죽음의 신이 명계로 돌아가기 전, 모두가 카시안의 영혼에 정신이 팔려 있던 사이 말없이 그의 육신을 복원해 준 듯 보였다.​​ 메티스 역시 카시안을 바라보며 마음 한구석이 복잡해졌다.​자신에게는 유독 차갑기만 했던 타나토스가 카시안에게는 마지막 예의를 남겨 주고 떠났기 때문이다.​그 묘한 감정이 그대로 눈빛에 드러났는지, 아이테르가 조용히 메티스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꼬옥-​​ “응…?”​​ 갑작스러운 아이테르의 포옹에 메티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그리고 그 미묘한 분위기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애드가 머리를 긁적이며 끼어들었다.​​ “응?”​“너희 사귀어?”“아니?!”​​ 아이테르는 화들짝 놀라며 메티스를 옆으로 툭 밀어냈다.​​“쟤 어깨에 코딱지 묻힌 건데?”​“뭣?!?!!”​​ 메티스는 경악하며 자기 어깨를 내려다봤다.​그 모습을 본 아이테르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뻥이야.”​“…….”​​ 메티스는 그런 아이테르를 잠시 바라봤다.​장난스럽고 가벼운 말투 속에 자신을 위로하려는 마음이 섞여 있다는 걸 눈치챈 그녀가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부드럽고 조용한 미소에 아이테르의 심장이 괜히 쿵 내려앉았다.​​ “…어?” ​​메티스가 천천히 다가오더니, 이번엔 그녀가 먼저 아이테르를 살포시

  • 복수는 사랑보다 늦게온다.   58화

    카시안은 지상에서의 마지막 행동으로, 늘 그래왔듯 애드의 헝클어진 머리를 따스하게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하지만 이미 육체가 죽어 영혼만 남은 자신은, 제자의 몸을 만지는 것조차 할 수 없어 손끝이 허공을 투명하게 통과할 뿐이었다.​“….”​바로 그때.​타나토스의 무심한 시선이 허공에서 갈 곳을 잃고 쓸쓸하게 떨리는 카시안의 투명한 손끝으로 향했다.​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딱 한 번만.”“체온을 느끼게 해 주마.”​그순간, 조금 전 메티스에게 심장을 찢는 독설을 내뱉던 차가운 모습과는 다른 의외의 친절함에, 자리에 있던 동료들 모두가 놀란 눈으로 타나토스를 바라보았다.​타나토스의 창백한 손끝에서 깊은 검은 안개의 마력이 잔잔하게 퍼져 나가 노인의 영혼을 감쌌다.​그리고 잠시 후​카시안 영혼이 아주 짧은 순간, 마치 살아 있는 인간처럼 형태를 되찾았다.​“…!”​애드는 떨리는 눈으로 카시안을 바라봤다.​카시안 역시 잠시 자기 손을 내려다보다 피식 웃었다.​“허.”“신기하군.”​그리고 그는 망설이지 않고 애드를 끌어안았다.​애드 역시 울음을 참지 못한 채 카시안을 꽉 붙잡았다.​두 사람은 마지막으로 서로의 체온을 느꼈다.​“감사했습니다…”“…스승님.”​카시안은 무덤덤하게 웃으며 애드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그래.”​그 한마디에는 수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그리고 카시안 주변에서 따뜻한 빛이 천천히 피어올랐다.​마치 하늘로 승천하는 은하수의 별가루처럼 찬란하게 반짝이며, 황량한 평야 위로 스르륵 부드럽게 흩어지기 시작했다.​사방으로 퍼져나가는 영혼의 파편들은 따스하고 아늑했다.​『애드.』​​『내 삶의 끝자락에 나타난 너는 내게 완벽한 아들 같은 존재였다.』​『…그러니 내 몫까지, 부디 행복하게 웃으며 살아가다오.』​검성 카시안의 영혼은 그가 휘두르던 올곧은 검처럼, 그리고 태양신 헬리오스의 자비처럼 그 누구보다 눈부시고 따뜻한 빛을 품은 위대

  • 복수는 사랑보다 늦게온다.   57화

    카시안은 자기 얼굴을 만져 보더니 감탄했다.​“오오… 내 잘생긴 얼굴을 구현해 주다니.”“자네 혹시 신인가?”​오드아이 남자는 카시안의 반응을 보더니 짧게 한숨을 쉬었다.​“…작별 인사는 짧게 허락해 주지, 그게 마지막 내 친절이다.”​그의 말에 카시안은 씨익 웃었다.​“고맙네!”​그리고 전성기 검성의 위풍당당한 걸음걸이로 걸어와,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애드의 바로 앞에 섰다.​애드는 떨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스승님?”​카시안은 평소처럼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수업료는 최소 100년 뒤 저승에서 받을 테니.”“그전에 지불하러 오면 쫓아낼 거다.”“…네?”“오래 살아라.”​카시안 목소리는 놀라울 정도로 담담했다.​마치 자신의 죽음을 이미 받아들인 사람처럼.​오드아이 남자는 그 인위적인 시간 동안 아무런 재촉도 하지 않았다.​그는 그저 팔짱을 낀 채 묵묵히 서서, 고독한 검성이 지상에서의 마지막 인사를 온전히 끝마칠 때까지 조용히 침묵을 지키며 기다려 주었다.​바로 그때.​메티스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휘청거리는 발걸음으로 걸어가 오드아이 남자를 애처롭게 바라보았다.​“…타나토스.”​그리움과 원망이 섞인 그녀의 가느다란 손이, 천천히 그의 옷깃을 향해 뻗어 나갔다.​하지만 그 손이 닿기 직전, 아이테르가 매서운 손짓으로 메티스의 손목을 휙 낚아채 뒤로 당겼다.​휙-!​“…그러지 마.”​메티스의 흔들리는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무너질듯 깊은 슬픔과 원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왜?”​아이테르는 그녀를 자기 뒤로 살짝 감추며, 타나토스를 똑바로 노려봤다.​“…이미 널 한 번 버린 녀석이야.”“붙잡으려 하지 마.”​그 말이 떨어진 순간.​평야 위 공기가 싸늘하게 식어 내렸다.​머리 위의 검은 뿔.​이질적인 오드아이.​그리고 압도적인 신격의 위압감.​그의 진짜 정체는 바로 모든 생명의 죽음을 관장하는 명계의 절대 군주, 죽음의 신 ‘타나토

  • 복수는 사랑보다 늦게온다.   56화

    세 사람이 무거운 발걸음으로 간신히 도착한 거친 평야의 중심​그곳에는, 마지막 순간까지 왼손에 쥔 검을 결코 놓지 않은 채 꼿꼿하게 무릎을 꿇고 있는 검성 카시안의 모습이 있었다.​​온몸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찢긴 상처투성이였지만, 세상을 떠난 노인의 얼굴은 그 어떤 날보다 평온하게 가라앉아 있었다.​​마치 자신에게 다가온 가혹한 운명의 마지막을 기꺼이 받아들인 사람처럼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채 영원한 잠에 빠져 있었다.​그 처참한 광경을 본 순간 애드의 절규가 넓은 평야를 뒤흔들었다.​“아아아아아아!!!!!!!”“스승님!!!!!!!!”​애드는 미친 사람처럼 앞으로 고꾸라지며 카시안의 차가운 시신을 터질 듯이 끌어안았다.​마지막 숨이 끊어지는 찰나까지 대륙의 검성으로 당당하게 남은 노인의 마지막 뒷모습은, 너무나도 서글플 정도로 카시안다웠기에 메티스와 아이테르 역시 밀려오는 슬픔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메티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영감님…”​아이테르도 씁쓸하게 두눈을 질끈 감았다.​“…카시안.”​하지만 바로 그 순간​“시끄럽다 이놈아!!!!!!!”​평야의 대기를 찢고 날카롭게 울려 퍼진 고함소리.​그것은 분명 방금 숨이 끊어진 카시안의 걸걸한 목소리였다.​“……….”“…엥?”​애드는 시신을 붙잡고 울다 말고, 눈물이 맺힌 눈을 끔빡였다.​“…스승님?”​그는 황급히 품 안 카시안을 내려다봤다.​분명 숨은 끊겨 있었다.​눈도 감겨 있었다.​누가 봐도 완벽한 사망 상태.​그런데 바로 그들의 등 뒤에서, 카시안의 카랑카랑한 잔소리가 또다시 마술처럼 들려왔다.​“아오 귀청 떨어지겠네 진짜!”​아이테르 눈동자가 슬슬 공포로 떨려오기 시작했다.​“…뭐야?”“설마 살아 있는 건가?”​그 순간 그의 뒤쪽 허공에서 카시안의 우렁찬 고함이 터졌다.​“니 눈엔 저게 살아 있는 걸로 보이냐!!!!!”“으악!!!!!!”​아이테르가 화

  • 복수는 사랑보다 늦게온다.   55화

    -엘쉬온 인근 해안가-​강제로 발동된 전이 마법의 빛이 가라앉자마자, 애드는 마력이 소진되어 금이 간 텔레포트석을 거칠게 바닥에 내던졌다. ​​쨍그랑-!!​깨져버린 마법석 파편들이 차가운 모래사장 사방으로 쓸쓸하게 흩어졌다. ​​“하아… 하아…!”​애드는 모래바닥 위에서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뜨거운 눈물이 봇물 터지듯 차올라서 시야가 엉망으로 흐려졌다.​그의 귓가에는 여전히 카시안의 마지막 목소리가 이명처럼 맴돌고 있었다.​『넌 언제나 내 자랑스러운 제자란다.』​“흐윽…”​결국 애드는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카시안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이 싸움의 끝에서 자신이 확실하게 죽는다는 것을.​그럼에도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웃었다.​끝까지 비명조차 지르지 않고 검을 놓지 않았다.​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스승으로서 애드에게 ‘복수의 진정한 의미’를 가르치고 있었던 것이다.​그 잔인한 진실이 애드의 심장을 더 무참하게 가루로 만들었다.​“…왜.”​울음 섞인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왜 그런 식으로…”​애드는 이를 악물었다.​언젠가는 이별이 올 거라 생각했다.​카시안은 이미 늙은 몸이었고, 검사란 원래 죽음을 가까이 두고 사는 존재였으니까.​하지만 결코 이런 방식의 처절한 이별은 원치 않았다.​애드는 결국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그대로 엎드렸다.​마치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길잡이를 잃어버린 어린아이처럼, 어깨를 가련하게 들썩이며 대성통곡했다.​“아아…! 스승님…”​​ 애드의 통곡 소리 주변으로는 오직 쓸쓸한 파도 소리와 서늘한 바람 소리만이 조용히 감돌 뿐이었다.​얼마나 그렇게 지옥 같은 시간이 흘렀을까.​저 멀리 모래사장 너머에서 서둘러 달려오는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왔다.​사박.​사박.​그리고 익숙한 목소리.​“어…?”“…애드?”​익숙한 목소리에 애드의 만신창이가 된 몸이 순간 움찔하며 굳어졌다.​그리고 그는

  • 복수는 사랑보다 늦게온다.   54화

    저 정도의 심연을 정면으로 뚫고 살아 나온 인간은, 그 조차도 본 적이 거의 없었다.​반면 애드는 안도와 극심한 불안이 뒤섞인 얼굴로 스승을 바라봤다.​그런 제자를 향해, 카시안이 다시 검을 비스듬히 들어 올렸다.​챙-!!​남자의 검은 마력과 카시안의 태양빛 검기가 다시 한번 정면으로 격돌했다.​콰아앙-!!!!​주변을 찢는 폭음 속에서도, 카시안의 목소리는 이상할 정도로 애드의 귀에 또렷하게 박혔다.​“애드.”“…네?”​애드는 불길함에 떨리는 눈으로 스승의 뒷모습을 바라봤다.​카시안은 계속해서 몰아치는 심연의 공격을 쳐내며 담담하게 말했다.​“너와 지낸 시간 동안 나는 네가 아들 같고 좋았다.”​챙-!!!!​카앙-!!!!​그 순간 애드의 눈동자가 천천히 흔들렸다.​“…스승님?”​불안했다.​가슴이 미칠 것처럼 조여왔다. 마치 지금 이 순간의 대화가, 다가올 영원한 끝을 향해 흘러가는 전조처럼 느껴졌기에.​카시안은 검을 비틀어 자신을 향해 쇄도하던 심연의 창을 거칠게 튕겨냈다.​콰직-!!!!​그리고는 피비린내를 풍기며 피식 웃었다.​“내 검사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도 널 가르쳤을 때였단다.”​애드의 심장이 불길한 예감에 완전히 난도질당했다.​카시안은 거칠게 붉은 숨을 몰아쉬면서도, 유언을 남기듯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애드 언제나 내가 늘 말했듯…”​카시안의 주변에서 검은 마력이 역류하며 폭발했다.​그의 몸이 뒤로 무참히 밀려났다.​하지만 기사로서의 자세만큼은 끝끝내 무너지지 않았다.​“‘복수’란 건 죽음을 선사하는 게 아니라…”​카시안의 깊은 눈빛이 마침내 뒤를 돌아보며 애드를 똑바로 향했다.​“그자에게는 가장 고통스럽게, 네게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찾는 거란다.” ​​콰앙-!!!!​또다시 카시안의 검과 심연이 충돌했다.​카시안의 입가에서 피가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하지만 그는 소년처럼 활짝 웃고 있었다.​“…그리고.”“네

  • 복수는 사랑보다 늦게온다.   6화

    모두가 잠든 새벽녘, 다락방.에리스는 낮 동안 실패로 끝난 ‘루카 헬리오스 검증 계획’을 떠올리며 종이 위에 또 다른 작전을 적어 내려가고 있었다.- 손바닥 위에 밀가루 반죽을 올려놓고 태양의 열기로 빵을 굽게 한다.“......”잠시 생각하던 에리스는 제 손으로 쓴 문장을 다시 읽고는 얼굴을 찌푸렸다.“이건 나도 좀 아니다.”구겨진 종이가 허공을 가르며 쓰레기통 안으로 날아갔다. 휙.“하아...”한숨과 함께 힘이 빠진 그녀는 등을 벽에 기대었다.“어머님은 왜 스스로를 봉인하신 거람.”문득 떠오른 어머니의 얼굴

  • 복수는 사랑보다 늦게온다.   3화

    “로테, 저거 맛있어 보이지 않아?”“어디? 어디?”로테와 루카는 수풀 사이에 몸을 숨긴 채, 풀을 뜯어먹고 있는 토끼 한 마리를 바라보고 있었다.로테는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루카에게 말했다.“저 귀여운 녀석을 어떻게 먹어… 다른 거 찾아보자.”루카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침 좀 닦아라.”로테의 입가에서는 말과 달리 침이 주르륵 흐르고 있었다.“스읍—”그녀는 침을 꿀꺽 삼키고 다시 토끼를 바라봤다.“토끼가 풀을 먹고 있으니까… 저걸 먹으면 채식이랑 육식 둘 다 하는 거지?”“뭔 논리냐 그건.”“아무튼

  • 복수는 사랑보다 늦게온다.   7화

    수년간 적막한 검은 숲에 홀로 살던 로테는 이제 외롭지 않았다.든든한 친구 에리스와,자신이 사랑하는 사람 루카.그리고 그녀의 배 속에는,곧 세상에 태어날 작은 생명까지 함께였으니까.창문 너머로 눈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던 로테는 조용히 생각했다.'마도서로 친구를 소환했던 일은... 정말 잘한 일이었어.''어머니, 저는 이제 외롭지 않아요.'감성에 젖어 있던 그때,멀리서 익숙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야, 이 정신 나간 여자야! 아기 성별도 모르는데 드레스를 왜 벌써 사 ?!""하! 내가 여신인데 그것도 모르겠냐?

  • 복수는 사랑보다 늦게온다.   5화

    "...어디 갔다 왔냐?"늦은 밤, 두 사람만의 외출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자,문 앞에는 팔짱을 낀 에리스가 단단히 삐진 얼굴로 서 있었다."어…? 자는 줄 알았는데. 루카랑 시장 구경 좀 다녀왔지."로테가 어깨를 툭 건드리자, 에리스는 손등을 찰싹 때려냈다."흥."그 모습에 루카가 피식 웃었다."너 질투하냐? 먼저 잔다며.""아니."에리스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대답했다."내가 화난 건, 둘이 시장 다녀와 놓고 내 거 하나도 안 사 왔다는 거야.""…. 그거였어?""그래! 닭꼬치 하나라도 '아, 이건 에리스 줘야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