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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화. 말하지 않은 것

Author: 8489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17 20:22:51

오후 3시. 평창동 저택 현관 앞.

백 실장이 승합차 문을 열고 기다리고 있었다. 한정숙은 군산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엄마, 하룻밤 자고 가지."

"가게 비워 두면 안 돼. 월요일에 찾으러 올 바지가 세 벌이야."

한정숙은 딸의 옷깃을 한 번 바로잡아 주었다. 그리고 귓가에 낮게 말했다.

"잘 버티고 있더라, 우리 딸."

서하의 눈가가 뜨거워졌다. 대답을 하면 울 것 같아서, 고개만 끄덕였다.

한정숙은 차에 오르기 전 도현을 돌아보았다. 도현이 허리를 숙였다.

"강 서방."

"네, 장모님."

"약속, 기억하지?"

"……네."

한정숙은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차 문이 닫히고, 승합차가 정원을 빠져나갔다.

서하는 철문이 닫힐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별채로 돌아가는 정원길. 서하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봤어요? 유라 얼굴."

"봤어요. 하얗게 질리던데."

"그리고 회장님이 '장가를 잘 갔군요' 할 때. 엄마가 '그 양반도 늘 그렇게 말했습니다' 하는데, 나 진짜 박수 칠 뻔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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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수하려고 결혼했는데 남편이 다 알고 있었다.   제52화. 세 개

    수요일 밤 9시. 평창동 별채.회사 차는 본채 현관 앞에 서하를 내려 주고 돌아갔다. 기사는 오늘도 친절했다. 사모님, 내일도 8시 10분에 모시겠습니다. 서하는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 웃음이 정명수에게 전해지리라는 걸 알면서.퇴근길 내내 기사는 말이 많았다. 정 실장님은 차에서 늘 서류만 보셨다고, 사모님은 창밖을 보시니 좋다고. 서하는 맞장구를 치며 하나도 흘리지 않았다. 정명수가 늘 문 쪽 손잡이를 잡고 앉는다는 것. 퇴근길엔 꼭 한 번 회장에게 전화를 건다는 것. 그런데 지난주부터는 그 전화를 걸지 않았다는 것.별채 2층은 불이 꺼져 있었다. 도현은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서하는 욕실로 들어가 세면대 물을 틀었다. 도청기가 있는 방에서 혼자 생각하려면 이 방법뿐이었다.거울 속의 자기 얼굴을 보았다. 박하사탕 껍질이 아직 코트 주머니에 있었다. 세면대 옆 컵에는 도현의 칫솔이 꽂혀 있었다. 사흘 동안 같은 욕실을 쓰면서, 둘은 한 번도 이 거울 앞에 같이 서지 않았다.— 늘 꼬박꼬박 지어 가셨지.약사 아저씨의 차가운 손. 너무 빨랐던 대답. 정명수와 똑같은 단어.말해야 했다. 도현에게. 이건 혼자 쥐고 있을 크기가 아니었다.서하는 입을 열어 보았다. 거울 속의 자신에게."도현 씨. 정 실장이 우리 아빠 약국에……."거기서 말이 끊겼다.말하면 도현은 내일 아침 그 약국으로 갈 것이다. 백 실장을 붙일 것이고, 약사를 조사할 것이다. 그러면 정명수는 알 것이다. 그리고 그 하얗게 센 머리의 노인이 제일 먼저 다칠 것이다. 열다섯 살 꼬맹이 손에 박하사탕을 쥐여 주던 사람이.아저씨가 뭘 했는지, 서하는 아직 몰랐다. 아무것도 안 했을 수도 있었다. 그냥 겁이 나서 시키는 말을 외웠을 수도 있었다.확실하지 않았다.확실하지 않은 걸로, 누군가를 무너뜨리고 싶지 않았다.물소리 속에서, 서하는 천천히 숨을 멈췄다.— 확실하지 않은 걸로 당신을 무너뜨리고 싶지 않아요.성수동에서 무릎을 꿇은 남자가 했던 말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자기

  • 복수하려고 결혼했는데 남편이 다 알고 있었다.   제51화. 꼬박꼬박

    수요일 오전 9시. 동부이촌동, 한빛약국.셔터가 반쯤 올라간 약국 안으로 정명수가 들어섰다. 이달에 두 번째 방문이었다. 7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약사가 약장 앞에서 돌아보았다. 손에 든 약통이 떨렸다."……실장님. 이번 달은 벌써…….""앉으시죠, 선생님."정명수는 의자에 앉지 않았다. 늘 그랬다."오늘이든 내일이든, 젊은 여자가 하나 찾아올 겁니다. 스물여덟. 키가 이만하고.""……누굽니까.""윤 회장 따님입니다."약사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약통이 유리 진열장에 부딪혀 달그락 소리를 냈다."서하가요? 그 애가 여길 왜…….""옛날 생각이 나서 오는 거겠죠. 아버지 약 받으러 다니던 데니까."정명수가 서류 가방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진열장 위에 올려놓았다. 이번 달 몫이었다. 열흘 일렀다."옛날 얘기만 하십시오. 윤 회장님은 약을 늘 꼬박꼬박 지어 가셨다. 마지막까지 성실한 분이셨다. 그게 전부입니다.""…….""선생님은 7년 동안 아무것도 모르셨습니다. 앞으로도 그러실 거고요."정명수가 돌아섰다. 문을 나서기 전, 그는 한 번 더 말했다."그 아이는 숫자를 외우는 아이입니다. 말을 바꾸시면 압니다."오후 2시. 서하는 약국 유리문 앞에 섰다.어제는 길 건너에서 보기만 했다. 오늘은 문을 밀었다. 문에 달린 종이 딸랑, 울렸다. 열다섯 살 때와 같은 소리였다.약사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한참 동안 서하를 보았다."……서하니?""아저씨."서하가 웃었다. 연습한 웃음이 아니었다."저 기억하세요?""기억하다마다. 아빠 약 찾으러 왔어요, 하고 문 열던 꼬맹이를."약사가 진열장 너머로 나와 서하의 손을 잡았다. 손이 차가웠다. 그리고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둘은 약국 구석의 낡은 의자에 마주 앉았다. 약사가 박하사탕 하나를 서하의 손에 쥐여 주었다. 옛날에도 그랬다."아빠 일은…… 신문에서 봤다. 미안하다. 장례식에도 못 가고.""괜찮아요."서하는 사탕을 쥔 채 물었다."아저씨. 아빠 마지막에도

  • 복수하려고 결혼했는데 남편이 다 알고 있었다.   제50화. 한빛약국

    차 안은 조용했다. 기사는 라디오를 켜지 않았다.서하는 창밖을 보다가, 문 쪽 수납칸에 손을 넣었다. 휴대폰을 꽂아 두려던 참이었다. 손끝에 바스락, 종이가 닿았다.접힌 약국 봉투였다. 오래 접혀 있어서 모서리가 하얗게 닳아 있었다. 안은 비어 있었다. 겉면에 초록색 글씨가 인쇄되어 있었다.[한빛약국]서하의 손이 멈췄다.열다섯 살이었다. 학교가 끝나면 아파트 상가 1층 약국에 들렀다. 아빠 약 찾으러 왔어요. 흰 가운을 입은 약사 아저씨가 웃으며 갈색 유리병 하나를 봉투에 넣어 주었다. 이거 꼭 가슴에 넣고 다니시라고 해라. 아빠는 그 봉투를 받을 때마다 서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초록색 글씨. 한빛약국."기사님."서하는 봉투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이거, 정 실장님 거예요?"백미러 속에서 기사의 눈이 봉투로 내려왔다. 예순 가까워 보이는 얼굴이었다."아, 네. 실장님 거예요. 버리신다는 걸 깜빡하셨나 보네요.""정 실장님이 어디 편찮으세요?""아뇨, 정정하세요."기사가 웃었다."그 약국은 약 사러 가시는 데가 아니에요. 한 달에 한 번씩 들르시거든요. 들어가셔서 약사님이랑 한 30분 얘기만 하시고 나오세요. 제가 15년을 모셨는데, 그건 한 7년 됐나."기사가 핸들을 꺾으며 덧붙였다."나오실 때마다 그 봉투를 하나씩 들고 나오세요. 약은 안 들어 있고, 납작하게요. 차에서 안에 든 걸 꺼내 가방에 넣으시고, 빈 봉투는 거기 꽂아 두시면 주말에 제가 버리고요. 이번엔 차가 갑자기 바뀌는 바람에 그대로 남았네요."7년.서하는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무릎 위의 봉투가 갑자기 무거웠다."그 약국, 어디 있어요?""동부이촌동이요. 오래된 아파트 상가 1층."103동 1204호. 서하가 여섯 살 때 불꽃놀이를 보던 집이 있던 동네였다."……그렇구나."서하는 봉투를 원래대로 접어 수납칸에 넣었다. 그리고 다시 창밖을 보았다. 손가락이 무릎 위에서 떨리고 있었다. 기사가 보지 못하게 주먹을 쥐었다.

  • 복수하려고 결혼했는데 남편이 다 알고 있었다.   제49화. 발끝

    화요일 아침 7시 반. 본채 식당.서하는 도현보다 10분 먼저 별채를 나섰다. 결혼하고 처음이었다.식탁에는 이미 강 회장과 재현, 유라가 앉아 있었다. 서하가 자리에 앉고 한참 뒤에야 도현이 들어왔다. 머리가 덜 말라 있었다. 눈 밑이 거뭇했다.도현은 서하 옆자리에 앉았다. 서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국이 나왔다. 수저 소리만 이어졌다.아침마다 식탁 밑으로 먼저 발을 툭 차는 건 서하 쪽이었다. 도현이 한마디라도 얄밉게 굴면 어김없이 구두 끝이 날아왔고, 째려보는 눈이 따라왔다.오늘은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국그릇이 반쯤 비었을 때, 도현이 먼저 구두 끝을 서하의 발목 쪽으로 내밀었다. 차 주면 좋겠다는 듯이, 아주 조심스럽게.구두 끝이 닿기 전에, 서하가 발을 의자 밑으로 거두었다.도현의 구두 끝이 허공에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제자리로 돌아갔다.맞은편에서 유라가 찻잔을 들다 말고 눈을 가늘게 떴다."동서, 얼굴이 안 좋네. 어젯밤에 못 잤어?""일이 좀 많아서요.""그래? 도련님도 못 잔 얼굴인데."유라가 웃었다. 다정하고 조용한 웃음이었다. 서하가 열여덟 살 때부터 알던 웃음이었다."두 사람, 싸웠구나."수저 소리가 멈췄다. 재현이 유라를 흘끗 보았다. 그리고 도현을 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부부가 싸울 수도 있지."강 회장이 신문을 접으며 말했다. 온화한 목소리였다."새아기.""네, 아버님.""요즘 도현이 차로 출퇴근한다지.""……네.""재무 총괄이 남편 차를 얻어 타고 다니는 것도 모양이 안 좋다. 오늘부터는 회사 차를 쓰거라."강 회장이 찻잔을 들었다."정 실장 차를 내주마. 기사가 운전을 잘한다. 정 실장은 당분간 내 차를 같이 타면 되고."서하의 손이 수저 위에서 멈췄다.12가 7841. 그날 밤 0시 40분, 기사 없이 B게이트로 들어온 차.도현이 입을 열었다."아버지, 서하 씨는 제가…….""네가 뭘."강 회장이 도현을 보았다. 웃고 있었다."아내 출근시키는 게 무슨 대단한 일

  • 복수하려고 결혼했는데 남편이 다 알고 있었다.   제48화. 네 개

    서하는 뒷좌석 문을 열고 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컸다.백미러 속에서 세 사람의 눈이 엇갈렸다. 아무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출발 안 해요?"서하가 말했다. 도현이 시동을 걸었다. 차가 천천히 강진 본사 앞을 빠져나갔다."선배.""응.""선배가 이 사람 차에 왜 있는지는 안 물을게. 대신 하나만 물을게."서하가 조수석 등받이를 보았다."쌈지공원에서 그랬잖아. 확실해지면 말해 준다고. 확실해진 거야?"민재는 앞만 보았다.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었다. 차가 멈췄다."……아직."서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참 동안 민재의 뒤통수를 보다가, 작게 말했다."선배, 거짓말할 때 왼쪽 귀 만지는 거 알아?"민재의 손이 귓가에서 멈췄다. 자기도 모르게 올라가 있던 손이었다."7년이야. 모를 리가 없잖아."신호가 바뀌었다. 차가 다시 움직였다. 민재는 손을 무릎 위로 내렸다. 그리고 다음 신호에서 차 문을 열었다."여기서 내릴게요."민재가 내리기 전에 뒤를 돌아보았다."서하야. 미안. 근데 이번 건, 네가 다치는 게 싫어서야."문이 닫혔다. 민재는 인도로 올라가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차 안에는 두 사람만 남았다."당신도요?"서하가 물었다. 목소리는 조용했다."선배가 당신한테 뭘 보여 줬어요. 선배 얼굴이 하얬어요. 당신도 하얬고."도현은 운전대를 쥔 채 앞만 보았다. 계약서 4조. 갑도 을 앞에서 거짓말하지 않는다. 거짓말은 할 수 없었다. 남은 건 하나뿐이었다."……대답하지 않을게요."서하가 웃었다. 웃음이 아니었다."이번만이라고 했잖아요.""…….""그날 성수동에서. 당신이 무릎 꿇고 부탁했을 때. 내가 그랬잖아요. 이번만이에요. 대신 확실해지면 제일 먼저 나한테 말하기로."서하가 창밖을 보았다. 가로등 불빛이 차창 위로 길게 미끄러졌다."근데 오늘 보니까, 제일 먼저 아는 사람이 내가 아니네요."도현의 손등에 핏줄이 섰다. 반박할 말이 없었다. 사실이었다."서하 씨. 이건…….""알아요. 나 지키려

  • 복수하려고 결혼했는데 남편이 다 알고 있었다.   제47화. 조수석

    월요일 저녁 6시 40분. 강진건설 본사 앞.도현은 건물 맞은편 길가에 차를 세워 두고 있었다. 일주일째였다. 퇴근 시간이면 여기서 서하를 기다렸다. 남편이 아내를 데리러 오는 것, 그게 경호라는 걸 아는 사람은 없었다.조수석 창문을 누군가 두드렸다.도현이 고개를 돌렸다. 차민재였다. 코트 깃을 세운 채, 주위를 한 번 살피고 있었다.도현이 잠금을 풀자 민재가 조수석에 올라탔다. 문이 닫혔다."서하는 7시에 내려와요. 20분 있어요."민재는 대답 대신 휴대폰을 꺼냈다. 손이 떨리지 않게 애쓰는 게 보였다."이거 보세요. 서하한테 보여 주기 전에."화면에 사진 한 장이 떠 있었다. 누렇게 바랜 라벨. 손바닥만 한 갈색 유리병.[한빛약국 / 니트로글리세린 설하정 0.6mg / 조제일: 7년 전 3월 / 환자명: 윤정호]도현의 숨이 멈췄다."우리 아버지 서재에 있었어요. 맨 아래 서랍에. 손수건에 싸여서."민재의 목소리가 갈라졌다."비어 있었어요. 아버지가 밤마다 그걸 꺼내서 들여다봐요. 기도하는 사람처럼."도현은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약통 1개. 빈 통. 동행인에게 인계. — 인계자 서명 첫 글자, '차'.7년 동안 찾던 조각이었다. 이름 없는 서명 하나와, 이름이 적힌 병 하나. 그게 지금 한 화면 위에서 맞물리고 있었다."……왜 저한테 가져왔어요.""서하한테 보여 주면, 그 자리에서 우리 집으로 달려갈 거니까요. 아버지 서재 문을 열고, 아버지 앞에서 이걸 내밀 거예요."민재가 창밖을 보았다."그럼 아버지는 그날 밤 회장님한테 전화하겠죠. 서하가 저한테 그랬어요. 쌈지공원에서.""그래도 저는 아니잖아요. 차 변호사님 아드님이 제일 싫어할 사람이 저일 텐데.""맞아요. 싫어요."민재가 도현을 돌아보았다."근데 서하가 그랬거든요. 자기보다 더 아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을 믿기로 했다고. 그게 당신이죠?"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그러니까 저도 한 번만 믿어 볼게요. 서하가 믿는 사람이니까."긴 침묵이 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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