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하려고 결혼했는데 남편이 다 알고 있었다.

복수하려고 결혼했는데 남편이 다 알고 있었다.

last updateHuling Na-update : 2026-09-29
By:  8489In-update ngayon l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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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전, 강진그룹의 조작으로 아버지의 회사는 무너지고 아버지는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장에서 내게 우산을 씌워주던 강 회장의 미소를, 나는 단 하루도 잊은 적이 없다. 이름을 바꾸고 모든 것을 준비한 끝에, 나는 강 회장의 둘째 아들 강도현에게 계약 결혼을 제안했다. 술과 여자로 소문난 한량. 원수의 집 안으로 들어갈 가장 쉬운 문이었다. "좋아요. 대신 조항 하나만 추가하죠." 제5조, 을은 갑 앞에서 거짓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남자, 처음부터 내가 윤서하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역시 자기 아버지를 무너뜨리려 하고 있었다. 서로를 속이며 시작한 결혼, 같은 적을 겨눈 동맹. 계약서 제4조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끝까지 지켜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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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Kabanata
제1화. 원수의 집에 시집가는 법
7년 전.비가 내렸다.장례식장 입구에 걸린 근조 화환은 겨우 세 개였다. 서하건설 윤정호 회장의 빈소라고 하기에는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조문객보다 기자가 더 많았고, 기자보다 채권자가 더 많았다."따님 되시죠? 회사 부도 관련해서 한 말씀만…….""아버님이 비자금 조성한 거 알고 계셨습니까?"스물한 살의 윤서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검은 상복 소매 끝을 쥔 손가락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아버지는 사흘 전 검찰 조사를 받고 나오던 길에 쓰러졌다. 그리고 다시는 눈을 뜨지 못했다.마지막 통화는 쓰러지기 한 시간 전이었다.— 서하야. 아빠는 아무 잘못 없다. 이건 전부 강진이…….거기서 전화가 끊겼다.서하는 그 이름을 입속에서 천천히 굴렸다. 강진. 강진그룹.그때였다.빈소 입구가 술렁였다. 기자들이 일제히 카메라를 돌렸다. 검은 세단에서 내린 남자가 비서가 받쳐 든 우산 아래로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강진그룹 회장, 강태식.그는 영정 앞에 향을 꽂고, 오래 고개를 숙였다. 누가 보아도 오랜 친구를 잃은 사람의 얼굴이었다.조문을 마친 강 회장이 밖으로 나왔을 때, 서하는 처마 끝에 서서 비를 맞고 있었다."감기 들겠구나."머리 위로 검은 우산이 드리워졌다. 강 회장이 직접 우산을 들고 있었다."네 아버지는 좋은 사람이었다. 참 안타깝게 됐어."서하는 고개를 들었다.강태식은 웃고 있었다. 자애롭고, 온화하고, 한 점 흠잡을 데 없는 미소였다.그런데 이상하게도 서하는 그 미소를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이 사람이다.아버지를 죽인 사람이 지금 내게 우산을 씌워주고 있다."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렴."강 회장은 하얀 봉투 하나를 서하의 손에 쥐여 주고 돌아섰다. 그를 태운 세단이 빗속으로 사라졌다.서하는 봉투를 뜯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찢어 빗물 고인 바닥에 버렸다.그래서 서하는 보지 못했다.주차장 구석, 비를 그대로 맞으며 이쪽을 바라보고 서 있던 한 청년을.현재."한 회계사님, 이번 실사 보고서 오늘까지 가능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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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다섯 번째 조항
사흘 뒤, 성수동.강도현이 약속 장소로 보낸 주소는 호텔도 레스토랑도 아니었다. 오래된 공장 건물을 개조한 빌딩의 꼭대기 층, 간판 하나 없는 사무실이었다."들어와요. 문 열려 있어요."서하는 문을 밀고 들어서다 잠깐 멈칫했다.예상과 달랐다. 술병이 굴러다니거나, 요란한 그림이 걸려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사무실은 지나치게 깔끔했다.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 넓은 원목 책상, 모니터 세 대.그리고 책상 위 서류들은 하나같이 뒤집혀 있었다."뭘 그렇게 봐요?"소파에 늘어져 있던 도현이 고개만 돌렸다. 셔츠 단추를 두 개쯤 풀어 헤친, 기사 사진 속 그대로의 모습이었다."생각보다 정리가 잘 돼 있어서요.""청소하는 분이 부지런하시거든요."도현은 하품을 하며 일어나 맞은편 소파를 가리켰다."앉아요. 계약서 가져왔죠?"서하는 서류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렸다. 지난번에는 쳐다보지도 않던 서류를, 이번에 도현은 한 줄 한 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그 모습이 이상하게 낯설었다. 조금 전까지 하품하던 남자와 같은 사람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눈빛이 가라앉아 있었다.[제1조. 계약 기간은 혼인신고일로부터 1년으로 하며, 만료 시 양측은 조용히 합의 이혼한다.][제2조. 공식 석상에서 양측은 금슬 좋은 부부를 연기한다.][제3조. 양측은 서로의 사생활과 과거를 묻지 않는다.][제4조. 양측은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3조."도현이 손가락으로 종이를 톡 두드렸다."과거를 묻지 않는다. 이건 누굴 위한 조항이에요?""양쪽 모두를 위한 거죠. 도현 씨도 묻는 거 싫어하실 것 같은데요. 기사 보니까 과거가 꽤 화려하시던데.""아, 그거."도현이 웃었다."좋아요. 그럼 4조.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문제 있나요?""아니, 굳이 쓸 필요가 있나 싶어서. 한서하 씨가 날 사랑할 리는 없잖아요.""제가 걱정하는 건 제 쪽이 아니에요."서하는 담담하게 말했다."도현 씨가 저를 사랑하게 될까 봐 넣은 거예요."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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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형님, 형수님
"우리, 어디서 뵌 적 있던가요?"유라의 손은 여전히 허공에 떠 있었다.서하는 그 손을 보았다. 7년 전, 수능 날 아침 떨리는 서하의 손을 잡아 주던 손이었다. 그리고 아버지 장례식장에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던 손.서하는 부드럽게 웃으며 그 손을 맞잡았다."글쎄요. 제가 워낙 흔한 얼굴이라서요. 그런 말 자주 들어요.""그래요? 이상하다. 분명히 어디서…….""형수님."도현이 서하의 허리에 가볍게 팔을 두르며 끼어들었다."제 약혼자를 그렇게 뚫어지게 보시면 제가 질투 나잖아요.""어머, 도련님도 참."유라가 손을 입가에 대고 웃었다. 하지만 서하는 보았다. 웃는 동안에도 유라의 눈이 자신에게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들어가요. 아버님이랑 재현 씨가 기다리세요."저택 안은 서하가 사진으로 외워 둔 것보다 훨씬 넓고, 훨씬 차가웠다.거실 벽에는 커다란 가족사진이 걸려 있었다. 중앙에 앉은 강태식, 그 옆에 선 장남 강재현, 그리고 몇 해 전 세상을 떠났다는 강 회장의 본처.그 사진 어디에도 강도현은 없었다.서하는 무심코 옆을 보았다. 도현은 사진을 보지 않았다. 마치 거기에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은 것처럼."왔냐."소파에 앉아 있던 남자가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서른다섯, 강진그룹 부회장 강재현이었다. 반듯하게 빗어 넘긴 머리에 값비싼 시계, 그리고 동생을 향한 노골적인 무시가 밴 얼굴."드디어 아버지 조건 맞추려고 아무나 데려왔구나. 이번엔 어디서 주웠어? 클럽? 아니면 요트?""형도 참. 회계사예요. 형 회사 장부 보면 기절할 만큼 똑똑한.""하."재현이 그제야 서하를 위아래로 훑었다. 물건의 값을 매기는 눈이었다."회계사라. 돈 냄새 잘 맡겠네."서하는 웃는 얼굴을 유지했다. 이런 시선쯤은 7년 동안 질리도록 받아 왔다."처음 뵙겠습니다. 한서하입니다."그때, 2층 계단 위에서 느릿한 발소리가 들렸다."손님 앞에서 말조심해라, 재현아."모두가 일어섰다.강태식이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7년 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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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찢어진 드레스
"우리, 어디서 뵌 적 있던가요?"상견례 날 유라가 던진 그 한마디는, 그 뒤로도 오래 서하의 귓가를 맴돌았다.그리고 일주일 뒤, 강씨 집안에서 결혼 날짜가 정해졌다.3주 뒤. 재벌가 결혼으로는 말도 안 되게 빠른 일정이었다."아버지가 서두르시네요."통보를 전하는 도현의 목소리는 무심했다."아들 마음 바뀌기 전에 도장 찍고 싶으신가 봐요.""도현 씨 마음은 안 바뀌어요?""계약서에 1년이라고 써 놨잖아요. 나 계약은 잘 지켜요."그렇게 서하의 결혼 준비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준비를 가장 먼저, 가장 적극적으로 돕겠다고 나선 사람은 신유라였다.청담동, 한 달 전에 예약해도 자리가 없다는 웨딩드레스 숍."동서, 이거 입어 봐요. 이 라인이 요즘 제일 인기래요."유라는 마치 친자매라도 되는 것처럼 서하의 팔짱을 끼고 숍 안을 누볐다. 직원들은 강진그룹 장남의 며느리를 공주처럼 떠받들었다."형님이 이렇게까지 신경 써 주실 줄은 몰랐어요."서하는 거울 앞에서 순백의 드레스 자락을 정리하며 말했다. 이제 유라는 그녀에게 '형님'이었다. 입에 올릴 때마다 혀끝이 썼다."당연하죠. 이 집에 며느리라고는 우리 둘뿐인데. 서로 챙겨야죠."유라가 거울 너머로 서하를 보며 웃었다."그러고 보니까 나 고등학교 때 제일 친한 친구 이름도 서하였다? 윤서하."지퍼를 올리던 직원의 손이 서하의 등 뒤에서 잠깐 멈췄다. 서하는 거울 속 자기 얼굴을 보았다. 표정은 흔들리지 않았다."그래요? 흔한 이름이죠.""걔네 아빠가 건설회사 회장이었는데, 회사가 망하면서 아빠도 돌아가셨어. 그 뒤로 연락이 끊겼지. 어디서 뭘 하고 사는지, 살아는 있는지."유라가 한숨을 쉬었다. 슬퍼하는 얼굴이었다. 아주 잘 만들어진."불쌍한 애였어. 그렇게 무너질 줄 누가 알았겠어.""형님은 그 친구분 장례식에 가셨어요?"유라의 얼굴이 아주 짧게 굳었다."……응?""친한 친구 아버님이 돌아가셨다면서요. 당연히 가셨겠죠?"서하는 거울 속 유라를 향해 순진하게 웃어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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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첫날밤의 선
결혼식 날은 맑았다.강진그룹 둘째 아들의 결혼식이었다. 호텔 그랜드볼룸은 정재계 인사들로 가득했고, 입구에는 화환이 끝도 없이 늘어섰다.7년 전 아버지의 빈소에 놓였던 화환은 세 개였다. 서하는 그 숫자를 세다 그만두었다."신부 입장."문이 열렸다.원래는 신부의 아버지가 서야 할 자리였다. 강씨 집안에서는 사람을 붙여 주겠다고 했다. 강진그룹 임원 중 누구든 골라도 좋다고.서하는 거절했다.그래서 그녀는 혼자 걸었다. 하얀 드레스 자락을 끌며, 버진로드 위를 한 걸음씩.하객들이 수군거렸다. 신부 혼자 입장이라니. 아버지가 없다던데.어머니도 몸이 편찮으셔서 못 오셨다며. 그래도 친척 어른이라도 세우지.신부 측 혼주석은 비어 있었다.엄마를 부를 수 없었다. 강태식과 차성훈은 한정숙의 얼굴을 안다. 엄마가 저 자리에 앉는 순간, 모든 게 끝날 테니까.서하는 앞만 보았다. 수백 개의 시선 중 어느 것도 7년 전 빗속의 시선보다 차갑지 않았다.그때였다.버진로드 끝에서 기다리던 도현이 걸어 나왔다. 하객석이 술렁였다. 신랑이 신부를 마중 나가는 순서 같은 건 식순에 없었다.도현은 길 한가운데서 걸음을 멈추고 서하에게 팔을 내밀었다."혼자 걷기엔 좀 길잖아요, 이 길.""……식순에 없는 건데요.""계약서에도 없어요. 그러니까 이건 서비스."서하는 잠시 그 팔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그 팔에 손을 얹었다.남은 길은 둘이 함께 걸었다.하객석 맨 뒷줄, 차민재는 그 모습을 창백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앞줄의 유라는 부채로 입가를 가린 채 웃고 있었다.그리고 혼주석의 강태식은, 박수를 치며 온화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폐백이 끝난 뒤, 강 회장이 두 사람을 불렀다."신혼 1년은 본가에서 지내거라."도현의 얼굴이 굳었다."아버지, 그건 얘기가 다르잖아요. 신혼집은 따로…….""우리 집안 법도다. 재현이도 그렇게 했고."강 회장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서하를 보았다."새아기도 괜찮지?"서하는 고개를 숙였다. 입꼬리가 올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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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처음부터 알았어요
"찾는 게 그거예요? 블루하버 캐피탈."스탠드 불빛이 도현의 얼굴을 반쯤만 비추고 있었다. 나머지 절반은 어둠에 잠겨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서하는 파란 서류철을 쥔 채 그대로 굳어 있었다.머릿속에서 수십 개의 변명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잠이 안 와서 책을 찾으러 왔다고. 화장실을 찾다 길을 잃었다고. 금고 문이 열려 있어서 닫으려던 것뿐이라고."……잠이 안 와서요. 책을 좀 빌리려고…….""5조."도현의 목소리는 낮고 조용했다. 화가 난 것도, 비웃는 것도 아니었다.서하는 입술을 깨물었다.거짓말은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대답하지 않을 권리는 있었다."3조로 할게요. 대답하지 않겠습니다.""그래요."도현이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났다."그럼 내가 먼저 말할게요. 갑은 대답하지 않을 권리가 있지만, 말할 권리도 있으니까."그가 책상을 돌아 서하 쪽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그리고 무언가 말하려고 입을 여는 순간.쿨럭, 쿨럭.복도 끝에서 마른기침 소리가 들렸다.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문으로 향했다. 슬리퍼가 대리석 바닥을 끄는 소리. 느리고 무거운 발걸음. 이 집에서 새벽 3시에 저렇게 걷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강태식.서하의 온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금고는 열려 있었다. 그림 액자도 열려 있었다. 손에는 대외비 서류가 들려 있었다.도현의 움직임은 빨랐다.그는 서하의 손에서 서류철을 낚아채 금고 안에 던져 넣고, 금고 문을 닫고, 산수화 액자를 벽으로 밀어 넣었다. 딸깍, 스탠드 불이 꺼졌다. 모든 것이 3초 안에 끝났다.그리고 그는 서하의 손목을 잡아 창가로 끌었다. 바닥까지 늘어진 두꺼운 벨벳 커튼 뒤, 창틀과 벽 사이의 좁은 틈.두 사람이 들어서기엔 턱없이 좁은 공간이었다.도현이 서하를 벽에 붙이듯 밀어 넣고, 그 앞을 자기 몸으로 막아섰다. 커튼이 두 사람을 감싸며 내려앉았다.끼익.서재 문이 열렸다.서하는 숨을 참았다. 도현의 가슴이 코앞에 있었다. 그의 심장 소리가 들렸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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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두 번째 계약
서하는 쿠션 벽 위에 멈춰 있는 그 손을 오래 바라보았다.원수의 아들. 원수의 집. 원수의 피가 흐르는 손.그런데 이 손은 오늘 밤 세 번이나 그녀를 붙잡아 주었다. 금고 앞에서, 커튼 뒤에서, 그리고 이름을 말하던 순간에.서하는 그 손을 잡았다."조건이 있어요.""역시."도현이 웃었다."말해 봐요. 이번엔 을이 조항 추가할 차례니까."다음 날 아침, 서하는 계약서 뒷면에 새로 조항을 적었다.[두 번째 계약] [제1조. 목표는 강태식이다.] [제2조. 얻은 정보는 모두 공유한다.] [제3조. 상대의 복수를 방해하지 않는다.]그리고 펜을 잠깐 멈췄다가, 마지막 줄을 또박또박 적었다.[제4조. 갑도 을 앞에서 거짓말하지 않는다.]도현이 그 문장을 내려다보았다. 아주 짧은 순간,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서하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싫어요?""아뇨."도현이 펜을 받아 들었다."대신 대답하지 않을 권리는 그대로죠?""……그건 그대로예요.""그럼 좋아요."그는 서명란에 이름을 적었다. 망설임 없는 필체였다. 서하는 그 이름을 보며 생각했다.방금 그 흔들림은 뭐였을까.본채 식당의 아침 식탁은 조용했다."잠은 잘 잤느냐, 새아기."강 회장이 신문을 넘기며 물었다. 서하는 수저를 내려놓고 웃었다."네, 아버님. 푹 잤어요.""그래. 첫날이라 낯설었을 텐데."강 회장도 웃었다. 새벽 3시에 서재에서 위스키를 마시던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식탁 맞은편에서 유라가 서하를 보고 있었다. 서하의 눈 밑에 옅게 내려앉은 그늘을, 유라는 오래 바라보았다."그러고 보니 다음 주가 강진건설 창립 30주년이지?"강 회장이 재현을 보았다."본사에서 기념 파티를 한다고 들었다. 도현이 내외도 참석하거라. 새아기 인사도 시킬 겸."재현이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도현은 태연하게 커피를 마셨다.그리고 식탁 아래에서, 서하의 발끝을 가볍게 톡 건드렸다.기회라는 뜻이었다."강진건설 신도시 수주. 기억나죠?"그날 밤, 별채 2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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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금슬 좋은 부부의 가면
사진 속 청년은 스물네 살이었다.지금보다 앳되고 마른 얼굴이었지만, 서하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아침마다 식탁 아래로 발끝을 건드리는 남자. 커튼 뒤에서 손을 잡아 주던 남자."선배, 이거 어디서 났다고 했지?""말했잖아. 아버지 사무실에서…….""7년 전 CCTV를 왜 선배 아버지가 갖고 계셨는데?"민재가 잠깐 말을 멈췄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자문하던 사건 자료에 섞여 있었어. 아버지도 기억 못 하시더라.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서하야."민재가 서하의 어깨를 잡았다."강도현은 너한테 이 얘기 한 적 있어? 너희 아버지를 만났다고. 뭔가를 받았다고."서하는 대답하지 못했다.없었다. 단 한 번도.그날 밤, 별채 2층.도현이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서하는 침대 끝에 앉아 있었다. 쿠션 벽 위에 사진 한 장이 놓여 있었다.도현의 걸음이 멈췄다. 그는 수건으로 머리를 닦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이거, 당신이죠?""…….""7년 전, 아버지가 쓰러진 날. 쓰러지기 40분 전이에요. 아버지가 당신한테 뭘 건네고 있어요."서하의 목소리는 이상할 만큼 차분했다. 너무 차분해서, 스스로도 무서웠다."두 번째 계약 4조. 갑도 을 앞에서 거짓말하지 않는다. 기억하죠?""기억해요.""그럼 말해요. 아버지가 당신한테 뭘 줬어요? 그날 무슨 얘기를 했어요?"도현은 사진을 내려다보았다. 오래, 아주 오래. 그러고는 고개를 들었다."대답하지 않을게요."서하가 웃었다. 웃음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소리였다."그래서, 거짓말은 안 했다는 거예요?""…….""라운지에서 처음 만난 날부터 오늘까지, 당신은 거짓말은 한 번도 안 했네요. 말을 안 했을 뿐이지. 대단해요. 계약 조항을 이렇게 잘 지키는 사람은 처음 봐요.""서하 씨.""두 번째 계약서에 사인할 때, 당신 눈빛이 흔들렸어요. 난 그게 뭔지 몰랐어요. 이제 알겠네요."서하는 일어섰다. 베개 하나를 집어 들고, 침대 아래 바닥에 내려놓았다."2조 때문에 같은 방은 쓸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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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제 아내는 윤서하입니다
유라의 엄지가 리모컨 버튼 위에 멈춰 있었다.연회장의 삼백 명이 숨을 죽이고 무대를 바라보았다. 앞줄에는 재단 행사를 취재하러 온 기자들이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서하는 움직일 수 없었다.알 수 있었다. 저 버튼이 눌리면 스크린에 무엇이 뜰지. 3학년 2반, 두 번째 줄. 단정하게 묶은 머리의 열여덟 살 윤서하.그리고 그다음에 유라가 할 말도.— 신분을 속이고 강진가에 들어온 여자. 비리 기업인의 딸.7년의 준비가 3초 만에 무너질 것이었다.그때, 서하의 손을 쥐고 있던 도현의 손이 풀렸다."잠깐만요."도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느긋한 걸음으로 무대를 향해 걸어갔다.연회장이 술렁였다. 강진가 둘째 아들이 또 무슨 사고를 치려나. 누군가 작게 웃었다. 재현이 인상을 쓰며 일어서려 했다.도현은 계단을 올라 유라 옆에 섰다. 그리고 유라의 손에서 마이크를 부드럽게 받아 들었다."도련님, 지금 뭐 하시는…….""형수님이 소개하시려던 분, 제가 소개하는 게 맞을 것 같아서요."도현이 웃었다. 유라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제 아내잖아요."유라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도현은 마이크를 들고 연회장을 향해 돌아섰다. 조명이 그의 얼굴을 비췄다. 셔츠 단추를 끝까지 채운, 술기운이라곤 없는 얼굴이었다."안녕하세요. 강진그룹 강태식 회장의 둘째 아들, 강도현입니다."연회장이 조용해졌다."방금 형수님께서 재단의 새 사업을 소개해 주셨죠. 억울하게 무너진 기업인의 가족들을 돕는 일이라고요. 그 첫 번째 주인공으로 제 아내를 골라 주셨습니다. 형수님, 감사합니다."도현이 유라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유라는 리모컨을 쥔 채 굳어 있었다."제 아내의 이름은 한서하입니다."도현이 연회장 한가운데, 서하가 앉은 테이블을 바라보았다."그리고 윤서하이기도 합니다."웅성거림이 파도처럼 번졌다."7년 전 부도로 무너진 서하건설, 故 윤정호 회장님의 따님입니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뒤, 세상의 손가락질을 피해 어머님 성으로 이름을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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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아버지의 USB
"물어는 봤니?"강 회장의 목소리가 대기실의 정적 속에 가라앉았다.서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강 회장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7년 전 우산 아래에서 올려다보던 그 얼굴을, 이번에는 내려다보았다. 그는 앉아 있었고, 서하는 서 있었으니까."물어볼 필요 없어요."서하가 말했다."제 남편이니까요."강 회장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그리고 아버님."서하는 허리를 숙여 정중하게 인사했다. 며느리가 시아버지에게 하는 인사였다."앞으로는 제 이름, 그렇게 다정하게 부르지 마세요. 소름 돋으니까요."서하는 돌아서서 대기실을 나왔다.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등 뒤에서 강 회장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복도에 나서자마자 다리가 풀렸다. 서하는 벽을 짚었다.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엘리베이터 앞에 도현이 서 있었다. 정 실장에게 막혀 들어오지 못하고 내내 그 자리에서 기다린 듯했다."괜찮아요? 무슨 얘기를……."서하는 대답 대신 도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구두 굽으로 그의 발등을 꾹 밟았다."……아.""세 번째."서하가 그를 올려다보았다."8일째예요. 이틀 봐준 거예요."도현은 발등을 밟힌 채로 서하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눈가가 붉었다."강 회장이 알아요. 그날 당신이 아버지를 만났다는 거. 더는 못 기다려요."도현은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다."오늘 밤. 별채에서."새벽 1시, 별채 2층.도현은 책상 위에 걸린 액자 하나를 벽에서 내렸다. 서하가 이 방에 온 첫날부터 보았던 사진이었다. 바닷가에서 어린 소년을 안고 웃는 젊은 여자."어머니예요."도현이 액자 뒷면의 판을 조심스럽게 떼어 냈다. 사진 뒤, 얇은 종이에 싸인 작은 물건이 테이프로 붙어 있었다.은색 USB였다."7년 동안 여기 있었어요. 이 집에서 아버지가 절대 손대지 않는 게 딱 하나, 어머니 사진이었거든요. 쳐다보지도 않으니까."도현이 USB를 서하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손톱만 한 금속 조각이 이상하게 무거웠다."이제 말할게요. 그날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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