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7년 전, 강진그룹의 조작으로 아버지의 회사는 무너지고 아버지는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장에서 내게 우산을 씌워주던 강 회장의 미소를, 나는 단 하루도 잊은 적이 없다. 이름을 바꾸고 모든 것을 준비한 끝에, 나는 강 회장의 둘째 아들 강도현에게 계약 결혼을 제안했다. 술과 여자로 소문난 한량. 원수의 집 안으로 들어갈 가장 쉬운 문이었다. "좋아요. 대신 조항 하나만 추가하죠." 제5조, 을은 갑 앞에서 거짓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남자, 처음부터 내가 윤서하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역시 자기 아버지를 무너뜨리려 하고 있었다. 서로를 속이며 시작한 결혼, 같은 적을 겨눈 동맹. 계약서 제4조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끝까지 지켜질 수 있을까?
view more"가지 마요."서하가 코트를 걸치는 걸 보고 도현이 말했다."새벽 1시 반이에요. 그리고 차민재 변호사 아버지가…….""알아요."서하는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방금 찍어 둔 명단 사진이 떠 있었다. 마지막 줄, 차성훈."그래서 가는 거예요. 선배가 뭘 알고 있는지 확인해야 하니까."도현은 한참 서하를 보다가, 차 키를 집어 들었다."데려다줄게요. 차에서 기다릴 거예요.""당신이 오면 선배가…….""안 보이는 데 세울게요. 7년 동안 안 보이게 지켜보는 건 꽤 잘했어요."서하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평창동 언덕 아래, 불 켜진 편의점 앞.민재는 파라솔 의자에 앉아 캔커피를 쥐고 있었다. 서하를 보자 일어서려다 다시 앉았다. 며칠 사이에 얼굴이 몹시 수척해져 있었다."기사 봤어. 연회장 일."민재가 먼저 입을 열었다."강도현이 무대에서 네 이름을 밝혔다며. 괜찮아?""응. 오히려 잘됐어.""……그래."민재가 캔을 만지작거렸다. 무언가를 말하려다 삼키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선배, 할 얘기가 뭔데.""서하야."민재가 고개를 들었다."나, 잘못한 것 같아."서하의 손끝이 코트 주머니 속에서 굳었다."그 CCTV 사진. 너한테 보여 주기 전에 아버지한테 먼저 물어봤어. 이 사진 속 남자가 누군지 아시냐고. 아버지가 모르신다길래, 내가 말했어. 강도현 같다고. 네가 결혼한 사람이라고."민재가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그 순간 아버지 얼굴이 하얗게 질리셨어. 사진을 가져가시더니, 이 일에서 손 떼라고 하셨어. 다시는 서하건설 얘기 꺼내지 말라고.""…….""그 뒤로 아버지가 이상해. 나를 피하셔. 그리고 어젯밤에, 서재에서 통화하시는 걸 들었어."민재가 서하를 보았다.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회장님'이라고 하셨어. 그 사진 얘기를 하시면서."서하는 숨을 들이마셨다."서하야. 우리 아버지가 강진이랑 무슨 관계가 있는 것 같아. 내가 확인해 볼게. 아버지 사무실 파일을 전부 뒤져서라도…….""
"물어는 봤니?"강 회장의 목소리가 대기실의 정적 속에 가라앉았다.서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강 회장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7년 전 우산 아래에서 올려다보던 그 얼굴을, 이번에는 내려다보았다. 그는 앉아 있었고, 서하는 서 있었으니까."물어볼 필요 없어요."서하가 말했다."제 남편이니까요."강 회장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그리고 아버님."서하는 허리를 숙여 정중하게 인사했다. 며느리가 시아버지에게 하는 인사였다."앞으로는 제 이름, 그렇게 다정하게 부르지 마세요. 소름 돋으니까요."서하는 돌아서서 대기실을 나왔다.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등 뒤에서 강 회장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복도에 나서자마자 다리가 풀렸다. 서하는 벽을 짚었다.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엘리베이터 앞에 도현이 서 있었다. 정 실장에게 막혀 들어오지 못하고 내내 그 자리에서 기다린 듯했다."괜찮아요? 무슨 얘기를……."서하는 대답 대신 도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구두 굽으로 그의 발등을 꾹 밟았다."……아.""세 번째."서하가 그를 올려다보았다."8일째예요. 이틀 봐준 거예요."도현은 발등을 밟힌 채로 서하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눈가가 붉었다."강 회장이 알아요. 그날 당신이 아버지를 만났다는 거. 더는 못 기다려요."도현은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다."오늘 밤. 별채에서."새벽 1시, 별채 2층.도현은 책상 위에 걸린 액자 하나를 벽에서 내렸다. 서하가 이 방에 온 첫날부터 보았던 사진이었다. 바닷가에서 어린 소년을 안고 웃는 젊은 여자."어머니예요."도현이 액자 뒷면의 판을 조심스럽게 떼어 냈다. 사진 뒤, 얇은 종이에 싸인 작은 물건이 테이프로 붙어 있었다.은색 USB였다."7년 동안 여기 있었어요. 이 집에서 아버지가 절대 손대지 않는 게 딱 하나, 어머니 사진이었거든요. 쳐다보지도 않으니까."도현이 USB를 서하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손톱만 한 금속 조각이 이상하게 무거웠다."이제 말할게요. 그날 있었
유라의 엄지가 리모컨 버튼 위에 멈춰 있었다.연회장의 삼백 명이 숨을 죽이고 무대를 바라보았다. 앞줄에는 재단 행사를 취재하러 온 기자들이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서하는 움직일 수 없었다.알 수 있었다. 저 버튼이 눌리면 스크린에 무엇이 뜰지. 3학년 2반, 두 번째 줄. 단정하게 묶은 머리의 열여덟 살 윤서하.그리고 그다음에 유라가 할 말도.— 신분을 속이고 강진가에 들어온 여자. 비리 기업인의 딸.7년의 준비가 3초 만에 무너질 것이었다.그때, 서하의 손을 쥐고 있던 도현의 손이 풀렸다."잠깐만요."도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느긋한 걸음으로 무대를 향해 걸어갔다.연회장이 술렁였다. 강진가 둘째 아들이 또 무슨 사고를 치려나. 누군가 작게 웃었다. 재현이 인상을 쓰며 일어서려 했다.도현은 계단을 올라 유라 옆에 섰다. 그리고 유라의 손에서 마이크를 부드럽게 받아 들었다."도련님, 지금 뭐 하시는…….""형수님이 소개하시려던 분, 제가 소개하는 게 맞을 것 같아서요."도현이 웃었다. 유라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제 아내잖아요."유라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도현은 마이크를 들고 연회장을 향해 돌아섰다. 조명이 그의 얼굴을 비췄다. 셔츠 단추를 끝까지 채운, 술기운이라곤 없는 얼굴이었다."안녕하세요. 강진그룹 강태식 회장의 둘째 아들, 강도현입니다."연회장이 조용해졌다."방금 형수님께서 재단의 새 사업을 소개해 주셨죠. 억울하게 무너진 기업인의 가족들을 돕는 일이라고요. 그 첫 번째 주인공으로 제 아내를 골라 주셨습니다. 형수님, 감사합니다."도현이 유라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유라는 리모컨을 쥔 채 굳어 있었다."제 아내의 이름은 한서하입니다."도현이 연회장 한가운데, 서하가 앉은 테이블을 바라보았다."그리고 윤서하이기도 합니다."웅성거림이 파도처럼 번졌다."7년 전 부도로 무너진 서하건설, 故 윤정호 회장님의 따님입니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뒤, 세상의 손가락질을 피해 어머님 성으로 이름을 바
사진 속 청년은 스물네 살이었다.지금보다 앳되고 마른 얼굴이었지만, 서하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아침마다 식탁 아래로 발끝을 건드리는 남자. 커튼 뒤에서 손을 잡아 주던 남자."선배, 이거 어디서 났다고 했지?""말했잖아. 아버지 사무실에서…….""7년 전 CCTV를 왜 선배 아버지가 갖고 계셨는데?"민재가 잠깐 말을 멈췄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자문하던 사건 자료에 섞여 있었어. 아버지도 기억 못 하시더라.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서하야."민재가 서하의 어깨를 잡았다."강도현은 너한테 이 얘기 한 적 있어? 너희 아버지를 만났다고. 뭔가를 받았다고."서하는 대답하지 못했다.없었다. 단 한 번도.그날 밤, 별채 2층.도현이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서하는 침대 끝에 앉아 있었다. 쿠션 벽 위에 사진 한 장이 놓여 있었다.도현의 걸음이 멈췄다. 그는 수건으로 머리를 닦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이거, 당신이죠?""…….""7년 전, 아버지가 쓰러진 날. 쓰러지기 40분 전이에요. 아버지가 당신한테 뭘 건네고 있어요."서하의 목소리는 이상할 만큼 차분했다. 너무 차분해서, 스스로도 무서웠다."두 번째 계약 4조. 갑도 을 앞에서 거짓말하지 않는다. 기억하죠?""기억해요.""그럼 말해요. 아버지가 당신한테 뭘 줬어요? 그날 무슨 얘기를 했어요?"도현은 사진을 내려다보았다. 오래, 아주 오래. 그러고는 고개를 들었다."대답하지 않을게요."서하가 웃었다. 웃음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소리였다."그래서, 거짓말은 안 했다는 거예요?""…….""라운지에서 처음 만난 날부터 오늘까지, 당신은 거짓말은 한 번도 안 했네요. 말을 안 했을 뿐이지. 대단해요. 계약 조항을 이렇게 잘 지키는 사람은 처음 봐요.""서하 씨.""두 번째 계약서에 사인할 때, 당신 눈빛이 흔들렸어요. 난 그게 뭔지 몰랐어요. 이제 알겠네요."서하는 일어섰다. 베개 하나를 집어 들고, 침대 아래 바닥에 내려놓았다."2조 때문에 같은 방은 쓸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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