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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화 연기라는 핑계

Penulis: 花柳響
last update Tanggal publikasi: 2026-10-11 05:00:17

 처음으로 그에게서 말을 빼앗은 기분이었다. 나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민준이 이불 위에 손을 내려놓았다. 손등이 닿을 듯 가까웠지만 아까처럼 먼저 잡지는 않았다.

“시작해도 돼?”

 나는 닫힌 문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아린아. 오늘 힘들었지?”

 다정한 말투였다. 조금 전까지 방 안의 기척을 살피던 사람과는 딴판이었다.

“……조금.”

“잘했어. 할머님도 마음에 들어 하시더라.”

 그 말은 굳이 연기할 필요가 없는 말이었다. 그래서 대답도 조금 편해졌다.

“아까는 네가 도와줬잖아.”

“차 이름 맞힌 건 너였어.”

 어둠 속에서 웃음이 났다. 그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몸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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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일까지 한 발도 밖에 못 나가.” 차가운 통보였다.“일도, 살롱 연락도 금지야. ……내가 허락할 때까지 외부 접촉은 전부 끊어.”“민준 씨, 그건……!”“네가 그렇게 만들었어. ……나를 속이고 GPS를 두고 사라졌잖아. 대가라고 생각해.” 초고층 레지던스 최상층. 그곳은 다정함과 두려움이 뒤엉킨, 도망칠 곳 없는 우리가 되었다. 나는 그의 시야 안에서만 살도록 허락받은 죄수였다. 하지만 목적이 있었다. 가방 밑에 숨긴 어머님의 공책. 이것만은 절대 들켜서는 안 된다. 고요한 새벽 두 시. 옆에서 자는 민준의 숨이 깊고 일정해진 걸 확인하고 조심스레 침대에서 나왔다. 팔을 푸는 데는 폭탄 해체 같은 신중함이 필요했다. 조금만 움직여도 반사적으로 안아 왔다. 나 대신 긴 베개를 안겨 주고 소리 없이 침실을 나섰다. 넓은 거실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발소리를 죽이고 주방으로 향했다. 손에는 공책 사본과, 낮에 온라인 마트로 주문해 무인 택배함에서 몰래 가져온 재료가 있었다. 원본은 가방 깊숙이 숨겨 두었다.“……좋아.” 환풍기를 가장 세게 틀고 작업등만 켠 채 요리를 시작했다. 데미글라스 소스 만들기. 가장 어려운 관문이었다. 시판 통조림을 쓰는 게 아니었다. 양파를 캐러멜색이 될 때까지 볶고 소 힘줄과 향채를 끓여 레드와인으로 농도를 맞춘다. 마지막에는 ‘핫초 미소’를 더한다.‘……냄새가 문제야.’ 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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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일?’“응. ……깜짝 선물을 하고 싶었어. 그래서 위치를 알리고 싶지 않아서…… 미안해.” 궁색한 변명이었다. 하지만 이것밖에는 없었다. 어머님께 받은 공책을 끝까지 감추려면 이 거짓말을 진실로 만들어야 했다.“바로 돌아갈게. ……제발 믿어 줘.” 전화 너머에 긴 침묵이 흘렀다. 아프게 뛰는 내 심장 소리만 들렸다.‘……기다릴게.’ 짧게 말하고 전화가 끊겼다. 뚝, 짧은 신호음만 귀에 남았다.“……서둘러야 해.” 떨리는 손으로 폰을 가방에 넣고 거리로 뛰어나가 택시를 잡았다. 가방 밑에는 어머님이 맡긴 공책이 있었다. 이것만은 절대 들켜서는 안 된다. 그냥 레시피 공책이 아니라 민준과 어머니를 이어 주는 마지막 희망이니까. 차창 밖 풍경을 보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가슴을 눌렀다.‘제발, 민준 씨. ……나를 믿어 줘.’ 살롱 앞에 도착하니 이상한 공기가 감돌았다. 검은 고급 승용차가 위압적으로 길가에 서 있었다. 창 너머로 익숙한 간판이 보였다. 늘 저 간판만 보면 일할 준비가 됐는데, 오늘은 살롱까지의 짧은 거리도 멀게 느껴졌다. 무릎 위 가방의 모서리가 꽉 쥔 손바닥에 파고들었다. 그 옆에는 민준이 조각상처럼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비범한 외모와 얼어붙는 기운에 눌려 멀찍이 돌아갔다.“……민준 씨.” 택시에서 내려 달려가자 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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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민준 씨가 GPS 앱을 깔아 놨어요.”“어머. ……그 아이답네요.” 어머님은 기막히면서도 어딘가 그리워하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어릴 때부터 소유욕이 강했지요. ……아끼는 장난감 숨긴 곳을 아무에게도 안 알려 주던 아이였어요.” 장난감. 지금의 나는 그에게 유일한 ‘망가뜨리고 싶지 않은 장난감’일까. 아니면 없어서는 안 될 생명줄일까.“그럼…… 레시피는요?”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어머님이 가방에서 낡은 공책 한 권을 꺼냈다. 그날 온실에서 본 것과 같은 색바랜 원예 일지……는 아니었다. 더 얇은 요리 공책이었다.“이거예요.” 내민 공책을 받았다. 표지에는 ‘Minjun's Favorite’라고 유려한 필기체가 적혀 있었다. 이서영의 글씨일까. 혜진 어머님의 글씨일까. 장을 넘기자 손으로 쓴 레시피가 빽빽했다.‘함박스테이크(양파는 캐러멜색이 될 때까지)’‘옥수수 수프(체에 두 번 거를 것)’‘푸딩(캐러멜은 쌉쌀하게)’ 시간과 사랑이 듬뿍 들어간 요리뿐이었다. 그 안에 있었다.‘특제 데미글라스 오므라이스’“……이거군요.”“네. ……생일이면 꼭 만들어 달라고 하던 메뉴예요.” 어머님의 목소리에 물기가 어렸다.“핵심은 데미글라스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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