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고용된다고?’ 나는 눈앞의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어제, 내가 시간당 50만 원에 고용했다고 생각했던 남자. 나를 스위트룸에서 휘두르고 하룻밤을 함께 보낸 남자. 오늘 아침 내 직장에 찾아와 “약혼자 드레스를 고르러 왔다”고 말하며 나를 비참하게 만든 남자. 그 남자가 지금 나를 ‘약혼자 역할로 고용하고 싶다’고 한다.“……너, 이제 적당히 좀 해.” 관자놀이가 욱신거리는 걸 참으며 그를 노려봤다. 이 남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하나같이 내 상식을 훌쩍 넘어선다.“어제부터 계속 사람을 가지고 노는 게…… 그렇게 재미있어? 남의 마음도 몸도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마음과 몸을 가지고 놀았다고.” 민준은 내 말을 정정하기라도 하듯 되뇌며 진심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 목소리에는 죄책감이 한 조각도 없었다. 남은 것은 차가운 계산뿐이었다.“이건 비즈니스 얘기야. 어젯밤 일과는 별개로 생각해. 지금은 계약 조건만 보라는 뜻이야. 너한테도 이득은 있어.”“별개로…… 생각하라고?”‘……최악이야, 이 남자.’ 피가 끓는 듯한 분노가 치밀었다. 어젯밤의 뜨거운 입맞춤도, 맞닿았던 피부의 감촉도, 우리가 함께 나눴다고 믿었던 짧은 감정도. 이 남자는 그 모든 감정을 하룻밤 일로 접어 두고, 아무렇지 않게 계약 얘기를 할 수 있는 거야? 내가 느꼈던 죄책감과 희미한 설렘이 소리를 내며 무너졌다. 남은 건
“――너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걸로.” 조용한 살롱 안에 그의 낮은 목소리가 남았다.‘……뭐?’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 남자. 나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걸로? 그게 무슨 뜻인데? 약혼자 드레스를 고르러 온 거 아니었어? 설마――‘――나를 진심으로 놀리는 거야?’ 어젯밤 그 스위트룸에서 함께 있고 싶다고 말해 놓고, 이번에는 이런 식으로 가지고 놀겠다는 거야? 프로다운 미소를 얼굴에 붙인 채 손끝이 식어 가는 걸 느끼며 굳어 있던 나를 보고, 민준은 입가에 걸려 있던 웃음을 문득 지웠다. 그는 지금까지의 대화가 전부 장난이었다는 듯, 나에게만 들리도록 귀찮은 투로 중얼거렸다. 어젯밤 귓가에서 들었던 뜨거운 속삭임과는 전혀 다른 차가운 목소리가 신경을 긁었다.“……농담이야. 할 얘기가 있어.”“네……?”“여긴 곤란해. 잠깐 같이 가.” 그는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내 팔을 잡았다.“잠깐만요……! 고객님? 저 지금 근무 중인데……!” 뜨거웠다. 어젯밤 나를 가볍게 안아 올리고, 내 뜻을 확인한 뒤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던 그 손.“상관없어.” 나는 호기심과 당혹감이 뒤섞인 후배 직원들의 시선을 등에 받으며, 어제와 똑같이 그에게 억지로 끌려 살롱 밖으로 나가고 말았다.◇“잠깐! 놓으라니까! 대체 무슨 생각이야?” 살롱에서 멀지 않은 호텔 라운지 카페. 가장 안쪽, 사람들의 눈이 잘 닿지 않는
어젯밤, 나와 하룻밤을 보낸 남자.‘왜 네가 여기에……!’ 심장이 목구멍까지 뛰어올랐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내가 심하게 동요하는 모습을 후배 직원이 의아하게 바라보는 것이 시야 한쪽에 들어왔다.“팀장님? 무슨 일이세요?”“……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필사적으로 평정을 가장하며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다리가 떨리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발뒤꿈치를 바닥에 힘주어 눌렀다. 민준은 나를 보고도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그 눈에는 어제 침실에서 나를 원하던 열기도, 나를 몰아붙이던 냉혹함도 없었다. 처음 보는 매장 직원을 대하듯 무관심하게, 값을 매기듯 나를 살피는 차가운 시선이었다.‘……그 눈빛은 뭐야.’ 어젯밤 일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아니, 아예 나를 모른다는 것처럼. 나만 그 스위트룸에서의 일과 살갗의 온기, 굴욕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나 혼자 바보가 된 것 같았다. 얼굴에 확 피가 몰렸다.“……어서 오세요. 오늘은 어떤 일로 오셨나요?” 목소리가 떨리려는 것을 어금니를 악물고 필사적으로 참았다. 수석 웨딩 플래너로서의 자존심. 프로로서 흐트러지지 않는 미소. 지금 나를 버티게 하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내 필사적인 미소를 보고서야 민준의 입가에 그 웃음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잔인한 말을 또렷하게 내뱉었다.“아, 약혼자 드레스를 고르러 왔어.”‘……약혼자?’ 숨이 막혔다. 약혼자. 그 말이 날카로운 칼처럼 가슴에 꽂혔다. 아, 그랬구나. 이 남자에게는 진짜 ‘약혼자’가 있었구나. 지난밤의 일은 나를 갖고 논 것뿐이었다. 아니, 그것도 모자라 진짜 약혼자를 두고 나를…… ‘불장난’ 상대로 삼은 것이다. 나는 어쩌면 이렇게 바보일까. 마음만 흔들린 게 아니었다. 몸도 자존심도 전부 그 남자에게 휘둘렸다. 분노와 절망으로 눈앞이 검붉게 물드는 것 같았다. 어제 나를 그렇게 흔들어 놓고 하룻밤을 함께 보낸 이 남자가, 오늘은 손님으로 찾아와 자기 약혼자의 드레스를 고르라고 하
멍하니 둘러본 넓은 스위트룸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어젯밤의 향이 희미하게 공기 속에 남아 있는 것 같아서 숨이 막혔다. 시트에 남았을 그의 체온은 이미 오래전에 식어 있었다. 지난밤의 모든 일이 술기운이 보여 준 나쁜 꿈 같았다. 하지만 침대 옆 테이블에는, 그 꿈이 현실이었다는 증거처럼 카드 키 한 장이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오늘 보수는 너로 하지.’ 그 남자는 그렇게 말했다. 차갑게 식은 어젯밤의 목소리가 귓속에서 되살아났다.‘……보수.’ 그 말의 의미를 곱씹자, 이번에는 굴욕으로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나는 어쩌면 이렇게 바보일까. 나는 그 남자를 시간당 50만 원짜리 복수의 도구로 고용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침에 눈을 뜨니 나만 남아 있었다. 그가 거둬들였던 ‘보수’라는 말이 다시 떠올랐다. 밤에 나눈 말과 손길에 나 혼자 의미를 둔 걸까. 그에게도 같은 밤이었기를 바랐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나는 도망치듯 침대에서 빠져나와 바닥에 벗어 놓은 어젯밤의 드레스를 거칠게 집었다. 구겨진 실크가 지금의 나처럼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때 침대 발치에 어젯밤에는 없던 새 쇼핑백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안에는 나도 아는 명품 브랜드의 원피스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짤막한 메모.‘급한 일이 생겨 먼저 나간다. 이건 네게 주는 선물이야.’ 선물. 마치 일한 대가로 주는 ‘수당’처럼. 구겨진 드레스 대신 입으라는 건가? 아니면 입막음 값? 이런 거 필요 없어. 하지만 저렇게 흐트러진 드레스를 입고 돌아갈 수는 없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굴욕감에 떨리는 손으로 원피스를 입었다. 놀랄 만큼 몸에 꼭 맞았다. 그것이 또 그의 익숙한 태도를 떠올리게 해서, 나는 더 비참해졌다. 다시는 저 남자를 만나지 않을 거야. 혼란 속에서 하룻밤을 보낸 나는, 아침 햇살이 눈부신 임페리얼 드래곤 호텔을 죄인처럼 몰래 빠져나왔다.◇ 도망치듯 집에 돌아와 욕실로 뛰어들었다. 수도꼭지를 끝까지 틀고 머리부터 뜨
눈을 떴을 때 방은 조용했다. 소파에 기대 잠든 모양이었다. 어깨에는 얇은 담요가 덮여 있었고, 탁자 위 물잔에는 물이 새로 채워져 있었다. 나는 상체를 일으켰다. 머리는 조금 무거웠지만 아까처럼 시야가 흔들리지는 않았다. 맞은편 의자는 비어 있었다.“……민준 씨?” 창가에 서 있던 그가 돌아봤다. 휴대폰 화면을 끄고 천천히 다가왔다.“한숨 잤네. 속은 괜찮아?”“응. ……지금 몇 시야?” 그가 시간을 알려 주었다. 눈을 감은 뒤로 몇 시간이 지나 있었다. 나는 물을 마시고 가방을 찾아 무릎 위에 올렸다. 집에 가야 한다. 씻고, 잠들고, 내일은 아무 일 없었다는 얼굴로 출근해야 한다. 생각만으로도 텅 빈 집의 공기가 목을 눌렀다. 민준은 방문 쪽을 가리켰다.“차를 부를까? 아니면 안쪽 방에서 자고 가도 돼. 난 여기 있을 테니까.”“……너는 안 들어와?” 말이 먼저 나갔다. 민준의 시선이 내 얼굴에 머물렀다. 나는 가방 끈을 쥐었다가 놓았다.“혼자 있고 싶지 않아.” 그 말을 인정하자 오히려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복수에 성공한 여자인 척할 필요도, 아무렇지 않은 척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곁에 앉았지만 나를 안지는 않았다. 한참 동안 창밖만 보았다. 유리에 비친 두 사람 사이에는 손 하나쯤 들어갈 틈이 있었다. 나는 그 틈에 손을 내려놓았다.“아까 보수라고 한 말.”“미안해. 네가 화낼 만했어.”“그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지금 갈 거야.” 민준이 고개를 돌렸다. 장난스러운 웃음은 없었다.“그런 뜻으로 널 붙잡진 않아.” 쉽게 믿을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이 남자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이름과, 오늘 내 편에 서 주었다는 사실뿐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가 가까이 있기를 바랐다. 그의 손등에 손가락을 얹었다. 따뜻했다.“……입 맞춰도 돼?” 내가 묻자 그의 눈이 잠깐 흔들렸다.“아린아. 오늘 많이 힘들었잖아.”“알아. 그래서 네가 전부 해결해 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야.” 목소리가 떨렸다.
“……뭐?” 계약 연장? 나는 그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얼빠진 소리를 냈다. 호텔 입구로 불어오는 차가운 밤바람이 갑자기 생생하게 느껴졌다.“계약…… 연장이라니, 무슨 말이야? 저 둘은 이제 없어. 내 복수는 끝났다고. 네 일도 여기까지야.”“과연 그럴까?” 민준은 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사람을 놀리는 듯한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도시의 네온을 비추는 눈빛은 속을 알 수 없이 빛났다.“그냥 돌아갈 생각이었어? 저 두 사람…… 태오라고 했던가. 우리가 정말 사귀는 건지 아직 의심하고 있다면?”“……!” 차가운 손이 심장을 움켜쥔 것 같았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오늘은 완벽하게 물리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중에 ‘그 남자 누구야?’, ‘정말 사귀는 거 맞아?’ 하고 공통 지인들에게 캐물을지도 모른다. 두 사람의 성격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거짓말이라는 게 들통나면 오늘의 승리는 순식간에 비참한 광대의 허세로 전락한다.“어설픈 복수는 오히려 자기 목을 조이는 법이지. ……아닌가?” 한마디도 반박할 수 없었다. 이 남자는 내 얄팍한 자존심과 그 뒤에 숨은 나약함까지 처음부터 꿰뚫어 보고 있었다. 분하지만 그의 말이 맞았다.“……그래서. 연장하면 얼마인데? 미리 말해 두지만, 나 돈 그렇게 많지 않아!” 마지막 남은 자존심으로 지갑을 움켜쥐고 노려보자, 민준은 정말 우습다는 듯 짧게 웃음을 흘렸다.“요금 얘기는 자리를 옮겨서 하지. 따라와.” 그는 그렇게 말하더니 다짜고짜 내 손목을 잡았다. 뼈마디가 도드라진, 힘 있는 손가락이었다. 높은 체온에 어깨가 움찔했다.“잠깐, 어디 가는 건데!”“내 일터.” 저항할 틈도 없었다. 그가 향한 곳은 놀랍게도 방금 결혼식이 열린 호텔의 상층부로 이어지는 전용 엘리베이터였다. 육중한 문이 소리 없이 열려 우리를 삼켰다. 버튼에는 ‘Executive Floor’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도착한 곳은.“……말도 안 돼.” 숨이 멎는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