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너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걸로.”
조용한 살롱 안에 그의 낮은 목소리가 남았다.‘……뭐?’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 남자. 나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걸로? 그게 무슨 뜻인데? 약혼자 드레스를 고르러 온 거 아니었어? 설마――‘――나를 진심으로 놀리는 거야?’ 어젯밤 그 스위트룸에서 함께 있고 싶다고 말해 놓고, 이번에는 이런 식으로 가지고 놀겠다는 거야? 프로다운 미소를 얼굴에 붙인 채 손끝이 식어 가는 걸 느끼며 굳어 있던 나를 보고, 민준은 입가에 걸려 있던 웃음을 문득 지웠다. 그는 지금까지의 대화가 전부 장난이었다는 듯, 나에게만 들리도록 귀찮은 투로 중얼거렸다. 어젯밤 귓가에서 들었던 뜨거운 속삭임과는 전혀 다른 차가운 목소리가 신경을 긁었다.“누가 지킨다는 건데? 그 여자? 아니면 그 여자 눈치나 보면서 사는 사용인들? ……말도 안 돼! 전부 엄마를 잊었어. 그곳은…… 엄마의 무덤이라고.”“그래도 피어 있었잖아!” 나도 외쳤다.“어제 그렇게 예쁘게 피어 있었잖아! 누군가 사랑하지 않으면 피지 못할 꽃이야.”“그건…… 엄마의 집념이야.” 민준의 목소리가 떨렸다. 피를 토하듯 비통한 울림이었다.“엄마의 한이 장미를 살려 두는 거야. ……누군가의 ‘사랑’ 따위가 아니라고. 그런 달콤한 이야기로 내 상처를 멋대로 해석하지 마.”“민준 씨……”“……실망이야.” 그가 차갑게 말했다. 그 한마디가 가슴을 날카롭게 꿰뚫었다.“조금은 똑똑한 여자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머릿속이 꽃밭인 여자였나. 아니면 그 여자에게 잘 보이려고 그런 말을 지어내는 거야?”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지어내? 잘 보이려고? 내가 그럴 리 없잖아. 분해서 시야가 일그러졌다.“……나를 안 믿어?”“믿을 이유가 없어.” 민준이 등을 돌렸다. 강철 벽처럼 차갑고, 아득히 먼 등이었다.“……됐어. 준비 끝나면 차에 타. 한마디도 하지 마.” 그대로 성큼성큼 식당을 나갔다. 남은 것은 산산이 깨진 공기와 숨죽인 사용인들.
다음 날 아침. 본가를 감싼 공기는 어제까지와 감촉부터 달랐다. 창밖에서는 밤새 내린 비가 정원의 나무를 적셨고, 무거운 습기를 품은 바람이 작은 틈으로 저택에 스며드는 듯했다. 유리를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가 너무 넓은 식당의 정적을 더 선명하게 만들었다. 긴 테이블의 양 끝. 민준과 내 사이에는 대화는커녕 눈길도 오가지 않는 단절이 있었다. 달그락, 은제 나이프가 접시에 닿는 단단한 소리만 귀를 아프게 했다. 벽에 서 있는 사용인들도 벽지의 일부가 된 듯 숨을 죽였다. 그들도 피부로 느끼는 것이다. 이곳 공기가 당장 찢어질 만큼 차갑고 팽팽하다는 걸. 숨이 막혔다. 모래를 씹는 심정으로 아무 맛 없는 오믈렛을 목으로 넘겼다. 어제 온실에서 소리를 지른 뒤 민준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저녁에도 오지 않았고 밤에도 객실에 돌아오지 않은 채 서재에 틀어박혀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아침에 마주하고도 이 태도였다. 내가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행동했다.‘다시는 여기 들어오지 마. ……내 눈앞에서 사라져.’ 어제의 고함이 귓속에 되살아나 가슴이 욱신했다. 나는 그곳에서 필사적으로 피어나려는 장미를 도와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일기를 읽고 그와 어머니의 소중한 추억을 지키고 싶었을 뿐인데. 그에게는 아물지 않은 상처를 멋대로 헤집는 행동이었던 것이다. 살며시 눈을 들어 테이블 건너를 보았다. 민준은 미간에 깊은 주름을 새긴 채 태블릿으로 뉴스를 읽었다. 잘 재단된 정장을 빈틈없이 입었지만 내리뜬 눈 밑에는 옅은 그늘이 있었다. 그도 잠 못 드는 밤을 보낸 것이다.“……저기, 민준 씨.” 견디지 못하고 침묵을 깼다. 내 목소리에 사용인들 사이의 공기가 미세
어깨를 움찔하며 조심스럽게 돌아봤다. 빛을 등진 채 검은 실루엣이 서 있었다. 민준이었다. 하지만 평소처럼 여유롭게 사람을 약 올리는 웃음을 짓는 민준은 아니었다. 무표정했다. 그런데 눈 깊은 곳에는 본 적 없을 만큼 어둡고 거센 불길이 소용돌이쳤다.“미, 민준 씨……? 저기, 이건 이유가……” 가위를 든 채 허둥지둥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그가 천천히 한 발 내딛는 순간 본능적인 공포로 다리가 굳어 움직일 수 없었다. 그는 내가 알던 ‘사무적인 계약 상대’도 ‘심술궂은 새디스트’도 아니었다. 상처 입은 짐승이었다. 제 둥지를 침범당해 격노한 짐승의 눈이었다.“누가……” 그의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누가 여기에 들어와도 된다고 했어?”◇ 온실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은 듯했다. 습기를 머금어 따뜻해야 할 공기가 민준이 내뿜는 냉기로 바늘처럼 아팠다. 피부에 붙은 땀이 한꺼번에 식는 게 느껴졌다.“……미, 미안해. 하지만 장미가 죽을 것 같아서 그냥 둘 수가 없었어……” 나는 마른 목으로 필사적으로 변명할 말을 찾았다. 좋으라고 한 일이었다. 그의 어머니가 아끼던 장미라 지키고 싶었을 뿐인데.“봐, 민준 씨. 여기 가지를 자르면 햇빛이 다시 들어와서……”“손대지 마!!” 천둥 같은 고함이 유리 돔을 쩌렁쩌렁 울렸다. 짧게 비명을 지르며 가위를 떨어뜨렸다. 쨍그랑, 단단한 소리가
문득 화단 한쪽의 낡은 원예용 수레가 눈에 들어왔다. 녹슨 전지가위와 흙 묻은 장갑, 색바랜 원예 일지 같은 공책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누군가 손질하려고 했나? 도구가 흩어진 모양은 작업하다 갑자기 손을 놓은 듯한 인상을 주었다. 누가? 혜진 어머님? 아니, 얼음 같은 그분이 흙투성이가 되는 일을 하는 모습은 상상할 수 없었다. 사용인일까. 그러기에는 도구가 너무 고급이었다. 나무 손잡이에는 아름답게 새긴 이니셜이 있었다.‘S.L’ L은 성의 첫 글자일까. 그렇다면 S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했다. 이곳 장미들이 지금 도움을 청하고 있다는 것.“……조금만.” 나는 원피스 소매를 걷었다. 여기 있는 도구들은 녹이 심했지만 내 가방에는 업무용 개인 가위가 있었다. 풀린 실이나 꽃 장식의 세부를 정리할 때 쓰는 필수품이었다. 이걸로 가는 가지 정도는 자를 수 있을 것이다. 누구에게 변명하는 것도 아니면서 작게 중얼거렸다.“바람만 조금 통하게 해 줄게.” 가시덤불로 손을 뻗었다. 이 무심한 행동이 민준의 마음 가장 깊고 연약한 곳을 함부로 짓밟는 일이 될 줄은, 그때 조금도 알지 못했다.◇ 싹둑. 싹둑. 정적이 가득한 온실에 경쾌한 가위 소리가 울렸다. 일단 시작하자 의식은 완전히 ‘업무 모드’로 바뀌었다. 눈앞 식물의 상태를 살피고 필요한 조치를 취하는 일에 몰두했다.“여기 엇갈린 가지는 잘라 내고. ……이 마른 잎은 병의 원인이 되니까 떼자. ……미안해, 조금 아프겠지만 참아.” 아이에게 타이
신부 수업을 명목으로 한 사실상의 가사 대행 업무, 혜진 어머님의 엄격한 검사를 겨우 통과한 지 며칠이 지났다. 나는 다시 강씨 일가의 본가에 와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머님이 부른 게 아니었다. 민준이 본가에서 자고 가겠다고 해서 ‘부속품’처럼 따라왔을 뿐이었다.“서재에서 끝내야 할 일이 있어. 저녁까지 편히 있어.” 그 말을 남기고 민준이 안으로 사라진 뒤 거의 세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지나치게 넓은 손님방에 나 혼자. 나무 냄새까지 선명하게 느껴지는 조용한 방에서, 나는 팔다리를 쭉 펴고 드러눕고 싶은 충동과 필사적으로 싸웠다. 할 일 없이 휴대폰을 보는 것도 이미 질렸다. 그렇다고 긴장감이 떠도는 이 집에서 태평하게 낮잠을 잘 배짱은 없었다. 가끔 복도를 지나는 사용인들은 나를 발견하면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도망치듯 사라졌다. 말동무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완전히 방치된 상태였다. 작게 한숨을 쉬고, 참다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잠깐 바람이나 쐬고 올까.” 누구에게 들려주려는 것도 아닌 말을 중얼거리며 툇마루에서 정원으로 내려갔다. 잘 가꾼 정원은 훌륭했다. 흰 자갈과 돌이 어우러진 정원 너머로 소나무와 단풍나무가 치밀하게 계산된 자리에 심겨 있었다. 그런데 예전에 여기에 서양식 구역도 있다는 말을 얼핏 들었다. 혜진 어머님의 감시가 없는 지금이라면 조금 탐험한다고 벌받지는 않겠지. 자갈을 밟는 자박자박한 소리가 고요한 가운데 기분 좋게 울렸다. 정성껏 다듬은 관목을 지나 저택 뒤편으로 갈수록 풍경은 조금씩 빛깔을 바꿨다. 반듯하게 정돈된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어딘가 울창한 숲이 나타났다. 그 안으로 사람 하나 겨우 지날 만한 좁은 길이 이어졌다. 발밑 잡초는 마구 자
“……끝났나요?”“네. 모든 항목을 마쳤습니다.” 가슴을 펴고 대답했다. 목소리에 피로는 배어 있어도 비굴함은 조금도 없을 터였다.“확인해 주시겠어요?”“……네. 둘러봤어요.” 혜진이 짧게 말했다. 나는 무심코 방금 씻은 손끝을 가지런히 모으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둘러봤다고? 언제? 내가 창고에 있는 동안 다른 곳을 확인한 걸까.“응접실 창문. ……닦은 자국 하나 없더군요. 창틀 모서리에 쌓였던 먼지까지 깨끗이 없어졌어요.”“네. 신문지로 마무리했으니까요.”“은식기도. ……뒷면 각인의 홈까지 닦였더군요.”“때는 작은 틈에 쌓이니까요.”“안뜰 낙엽도, 창고 정리도. ……허술한 곳은 없었어요.” 혜진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아침 같은 날카로움은 사라져 있었다. 그녀는 바인더를 덮고 나를 가만히 보았다. 이전처럼 깔보는 눈이 아니라 무언가를 가늠하고 평가하는 눈으로 변해 있었다.“……여기 일하는 사람들 중에도 이렇게 꼼꼼한 사람은 드물어요.” 그녀는 아주 조금 턱을 당기며 고개를 끄덕였다.“체력과 근성만큼은 있나 보군요.” 자존심 강한 이 여자 나름의 최대 찬사인지도 몰랐다.‘서민 출신’이라 깔보던 내가 터무니없는 과제를 불평 하나 없이, 속으로는 실컷 했지만, 완벽히 해낸 데 대한 패배 선언 같은 말이었다.“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