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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옷을 벗다
봄 옷을 벗다
Autor: 수산월

제1화

Autor: 수산월
“하진아, 내 아이를 낳아다오.”

비단 이불 아래, 수 놓인 베개 사이에 사랑의 흔적이 가득했다.

손가락 아래로 뜨겁게 오르내리는 그의 등이 느껴졌다.

사준영은 하진의 아랫배를 연신 쓸어내렸다. 심하게 갈라진 목소리는 정욕이 극에 달하기 직전의 인내심이 서려 있었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가운데, 그녀의 나른한 신음은 입술 사이에서 잘게 부서졌다. 그녀는 목을 젖혀 그의 입맞춤을 받아냈고, 하얀 팔로 자신도 모르게 땀에 젖은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검푸른 머리칼은 베개 위에서 뒤엉켰고, 묘한 감정은 몸의 구석구석을 조금씩 타올랐다. 가만히 여운이 온몸에 흐르도록 내버려 두었다. 사랑의 물결이 가장 짙어질 때쯤 따뜻한 기운이 조용히 뿌리를 내렸다.

그의 핏줄이 섞인 아이를 맺어주려는 듯이.

바로 그때, 귓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 아버지께 드리려고 만든 필통입니다!”

맑고 또렷한 아이의 목소리는 하진을 기억에서 끌어냈다.

이어서 담장 밖에서 부드럽고 온화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손재주가 참 좋구나, 네 아버지도 틀림없이 좋아하실 거다.”

그 목소리를 들으며 하진은 자신의 손끝을 바라보았다. 시퍼런 핏줄이 가득한 손가락은 앙상하고 거칠었다.

멍하니 있는 사이, 익숙하고 온화했던 남자의 목소리가 그녀의 심장을 저릿하게 만들었다.

“정성이 갸륵하구나, 이 아비는 아주 마음에 든단다.”

하진은 떨리는 손을 거두었다.

탕약을 들고 들어온 규안의 눈시울이 붉었다.

“약이 다 되었습니다.”

“저 아이는, 이 도령이냐?”

하진은 탕약을 보지 않고 담장에 시선을 고정했다.

“네, 주인님과 큰마님의 막내 아드님입니다.”

규안은 답답한 듯 탕약을 상에 내려놓았다.

사내의 마음은 차가운 쇠와 같다지만, 전에는 하진밖에 없었던 그는 지금 하진을 쇠보다 더 딱딱하게 대하고 있었다.

하진은 약사발을 움켜쥐고 무표정한 얼굴로 단숨에 들이켰다. 쓴맛이 목구멍 가득 퍼졌다.

“나가 보아라.”

규안은 그녀의 앙상한 뒷모습을 보며, 감히 더 말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방문이 닫히자, 하진은 팔을 창틀에 걸쳤다. 햇빛 아래, 그녀의 피부가 투명하게 빛났다.

그녀는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것임을 알았다. 이 엉망진창인 삶에 더는 미련을 두지도 않았다. 죽음이 임박하자, 지난날의 일들이 눈앞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평곡, 대만창의 맏딸이었다. 대씨 가문은 비록 상인 집안이었으나, 한 지역을 부유하게 할 정도의 재력이 있었다.

그녀와 사준영의 혼약 또한 고모인 대만여 때문이었다.

오래전, 대만여는 고집스럽게 가난한 선비, 사백산에게 시집갔고, 사백산의 과거시험과 벼슬길은 모두 대만창의 돈으로 치러졌다. 훗날 대씨 가문의 지위를 높이는 데 도움을 받으려는 속셈이었다.

이후 사백산이 7품 도사(都事:중앙 각 관서의 사무를 주관하거나 지방의 관찰사를 보좌하던 관직) 벼슬을 하자, 대하진과 사준영은 어린 나이에 혼약을 맺었다.

열여섯 살이 되던 해, 하진과 사준영의 혼례를 논하려던 때, 하진의 어머니가 갑자기 병으로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그녀는 삼년상을 치렀고, 두 사람의 혼례는 열아홉 살로 미루어졌다.

그녀가 상복을 벗자마자 사씨 가문에서는 그녀를 맞이하러 사람을 보냈다.

처음 사씨 집안에 들어갔을 때, 고모 대만여는 그녀를 친근하게 대했고, 외사촌이었던 사미정은 그녀를 언니라 부르며 잘 따랐다. 누구보다 온화하고 자상했던 사준영은 많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어린 시절처럼 그녀에게 장난을 쳤다.

허나, 언제부터인가 모든 것이 변했다.

“오라버니, 혹 추밀사(樞密使:군사(軍事)에 관한 일을 관장한 정부기관의 장관) 댁 육 아가씨와 아는 사이세요?”

하진도 언젠가 사준영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라. 아랫것들이 헛소문을 퍼뜨리는 것이다.”

사준영은 단호하게 답했다. 만약 그때 사준영이 사실대로 말했다면, 하진은 그의 곁을 떠났을 것이고, 시집가려고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후 사준영은 험난한 벼슬길에는 육씨 가문의 권세로 길을 닦아야 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육완아를 성대히 정실 부인으로 맞이했고, 하진에게 달콤하면서도 강압적인 태도로 그녀를 첩으로 들였다.

“하진아, 나 말고는 너에게 다른 선택지가 없다. 그리고 난 너에게 다른 선택지를 주지도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은 그녀가 이 집안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이미 계획된 것이었다.

대하진은 결국 사준영의 첩이 되었다.

하진의 방은 항상 그를 위해 등불을 켜졌고, 붉은 휘장은 따뜻했으며, 그의 사랑을 받아 아이까지 품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육완아가 사람들을 이끌고 들이닥치더니, 두 명의 아낙이 그녀를 붙잡았다. 검고 걸쭉한 낙태약을 그녀에게 억지로 들이부어, 마시게 했다. 형체를 갖춘 남아는 그 일로 세상에 나오지 못했고, 그녀의 몸도 망가졌다.

그날 이후로, 사준영은 다시는 그녀의 방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 그를 잡아보기도 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싸늘한 외면뿐이었다.

얼마후, 육완아는 연이어 아이들을 낳았고, 하진은 차가운 방에 꼬박 십 년을 버려졌다.

“하진아, 대하진.”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 사준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떨림이 섞인 목소리였다.

그녀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두 눈이 새빨개진 사준영의 품에 안긴 뒤였다. 이전에 한 번도 본 적없는 모습으로, 온몸을 떨고 있었다.

‘오라버니, 왜 이러세요!’

그녀는 영문을 묻고 싶었으나, 이미 말할 힘조차 없었다.

햇살이 먼지 사이로 스며들었고, 그녀의 몸도 서서히 차가워져 갔다.

……

“평곡에서는 본 적없는 물건들이 여기 저잣거리에 많습니다!”

규안이 차를 들고 들어오며 재잘거렸다.

하진은 찻잔을 받아 들었다. 따뜻한 잔의 표면에 손끝이 닿자, 그녀는 자신이 꿈을 꾸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이틀 전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열아홉 살, 사씨 가문에 들어온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은 때로 돌아와 있었다.

고개를 숙여 손을 보니, 손가락 마디부터 끝까지 선이 매끄러웠고, 손톱은 봉긋하게 솟아 분홍빛 광택이 돌았다. 화장대 앞으로 가니, 구리거울 속에 고운 얼굴에 맑은 두 눈, 붉은 기가 도는 뺨을 가진 여인이 있었다. 병색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인 후, 그녀는 이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사준영과의 혼약을 파기하고 사씨 가문을 벗어날 궁리만 했다. 다시는 사준영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이 일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사준영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고, 고모인 대만여도 그럴 것이었다. 대만여는 그녀의 상인 신분을 깔보면서도, 그녀의 풍족한 혼수를 탐내고 있었다.

대하진의 아버지인 대만창도 믿을 수 없었다. 그는 오직 그녀의 혼사가 대씨 가문에 가져다줄 많은 이익에만 관심이 있었다. 전생에 그녀가 곤경에 처했을 때도, 대만창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오늘 산 비녀와 귀걸이를 챙겨서, 고모님과 미정에게 주거라.”

하진은 몸종에게 분부했다.

“여기에 머물고 있으니, 체면을 차려야 한다.”

규안은 고개를 끄덕이고, 장신구 상자와 향분을 챙겼다. 규안의 시선은 하진의 목에 머물렀다.

“왜 그것을 착용하셨습니까?”

금실로 엮은 청옥 목걸이는 하진이 평소에 아까워서 잘 착용하지 않는 것이다.

“이건 미끼다.”

하진은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녀의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내일은 바로 육완아의 생일이었다.

육씨 가문의 육부는 벽돌 한 장, 기와 한 조각까지 권세의 차가움이 스며 있었다. 그곳에 우뚝 서서, 숨만 내쉬어도, 하진처럼 아무런 기반 없는 여인을 산산조각낼 수 있는 곳이었다.

안채에서 대만여는 차를 마시며 앉아 있었고, 외사촌 미정은 옆에서 손수건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하진이 들어오자, 대만여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며칠 전에 아프다더니, 오늘은 안색이 그나마 좋구나.”

“고모님께서 염려해 주신 덕분입니다. 별다른 탈은 없습니다.”

하진이 무릎을 굽혀 예를 갖추자, 규안은 장신구 상자를 내밀었다. 눈치 빠른 사미정은 상자를 획 열어젖히더니, 보석을 확인하고 눈을 번쩍였다.

“언니, 이 비녀 정말 예쁘네요!”

대만여는 상자를 힐끗 쳐다보더니, 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여기 온 지 얼마 되지 않았거늘, 어찌 이리 낭비하느냐.”

말은 그리하였으나, 거절하는 기색은 없었다.

“두 분이 좋아하는 걸로 되었습니다.”

하진은 눈을 내리깔아 싸늘한 감정을 감추었다. 사미정은 상자 속 보석들에 눈이 팔려, 저도 모르게 말했다.

“내일 육부에 가서 체면을 잃을까 봐 걱정했는데, 마침 잘되었네요.”

사미정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황급히 입을 가렸다.

내일은 육씨 가문 규수의 생일잔치였다.

사미정이 이 일을 계속 숨겼던 것은, 하진이 따라가려고 할까 봐서였다. 사미정은 하진의 상인 신분을 깔보았고, 그녀 때문에 다른 귀족 규수들이 자신까지 가볍게 여길까 봐 걱정해서였다.

그러나 하진이 사미정의 속셈을 모를 리 없었다.

사미정이 말을 돌리려고 애쓰는 사이, 상석의 대만여가 입을 열었다.

“네가 오기 전에 이 아이가 계속 고민하더구나. 초대장이 한 장뿐이라 두 사람은 가지 못하는데, 선뜻 언니인 네게 양보하겠다고 하더구나. 이 마음이 얼마나 가상하느냐.”

대만여의 여식은 영리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어, 장신구 상자 하나에 이성을 잃고 입을 놀릴 정도였다. 관료 집안의 규수라고 할 수 없었다.

이 점을 생각하자 대만여도 어쩔 수 없었다. 사백산이 벼슬길에 오른 지 오래되었으나, 여전히 직급은 낮고 권력은 미미하여 매달 봉급이 그리 많지 않았다.

대만여는 집안의 안주인으로서 집 안팎의 모든 일에 돈을 써야 했고, 수년간 오직 친정에서 가져온 혼수품에 의지하고 있었다. 겉으로는 번지르르하나 늘 살림이 빠듯했다.

“그 댁 규수께서는 틀림없이 미정이와 친분이 깊어 청첩장을 내린 것이겠지요. 호의로 양보한다 해도, 염치없이 받을 수는 없습니다.”

하진은 웃으며 말했다.

육완아의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은 모두 최고의 권세와 부귀를 가진 이들이었다. 일정한 관직이 없으면 그 댁의 대문조차 들어갈 수 없었다. 한낱 벼슬아치의 여식인 사미정에게 초대장을 보낸 것은 필시 사준영 때문이었다.

“그런 고귀한 집안에 언니가 가면 오히려 푸대접받을 수도...”

사미정은 말을 채 끝내지 못하고, 하진의 목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것은 아주 희귀한 장신구였다. 굳이 만져보지 않고 보기만 해도 그 특별함을 알 수 있었다.

“그 목걸이를 착용하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요?”

하진은 고개를 숙여 가슴에 걸린 목걸이를 바라보았다.

“너무 무거워서, 평소에 잘 착용하지 않아.”

사미정은 눈을 반짝이며, 상자 속 보석들을 제쳐놓고 물었다.

“하루만 빌려주면 안 될까요?”

하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마음에 든다는데 하루 빌려주는 게 대수겠니? 다만, 이것을 절대로 집 밖으로 가져나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하거라.”

사미정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든 듣지 않았다. 마냥 좋다고 답하며, 하진 눈가의 차가운 기색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사실 혼약을 물릴 수 있는지는 이 목걸이에 달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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Último capítulo

  • 봄 옷을 벗다   제30화

    조씨의 말에, 옆방의 휘장에 한 줄기 틈이 생겼고, 곧이어 작은 그림자 하나가 걸어 나왔다.어린아이는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움츠리고 있었으며, 두 손은 앞으로 모으고 있었다. 아이는 육명천 앞으로 걸어오지 않고,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발을 모아 섰는데, 잔뜩 겁을 먹고 위축된 모습이었다.육명천의 눈썹이 찡그려졌다. ‘어찌 이렇게 큰 것인가?’아이의 이름은 육승호로, 육명천과 죽은 부인 사이의 유일한 아들이었다. 그가 지방으로 좌천되었을 때만 해도 아이는 아직 어렸다.2년이 지난 지금, 아이는 대여섯 살 정도로 컸다.육명천은 모친 앞에서 차마 속의 말을 다 꺼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아들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사실이었다. 육희아도 그 나이 때는 이렇지 않았다.그해 둘째 형님과 형수님이 불의의 사고를 당하고, 혼자 남겨진 육희아는 늘 안채에서 뛰어다녔고, 육 노부인께서는 어린 손주들이 곁에 있는 것을 좋아했기에 그녀를 곁에 두고 키웠다.그때 그의 어머니는 뒤에서 몇 마디 험담을 했을 뿐,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육명천이 경성을 떠나기 전까지, 아이는 줄곧 그의 곁에 있었다. 지방으로 간 후에는 쭉 어머니인 조씨의 손에서 자랐다.노부인은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경을 외고, 그 후에는 비스듬히 누워 몸종에게 어깨를 주무르게 하거나, 눈을 감고 선잠을 잤다. 그 외에는 할 일이 없었다.아이는 본래 천성이 활발하고 한창 놀기 좋아할 나이였으나, 억지로 방 안에 갇혀 조 노부인과 함께 앉아 있어야 했다. 노부인이 경을 외면, 아이는 옆방에서 경서를 베껴 썼고, 노부인이 눈을 감고 선잠을 자도, 여전히 경서를 베껴 썼다. 오직 노부인이 내원을 거닐 때만, 같이 밖에 나가 잠시 걸을 수 있었다.별채의 몸종들과 아낙네들은 명령을 받아 아이를 매우 엄하게 감시했고, 심지어 마당 문밖으로도 나가지 못하게 했다.아이뿐 아니라, 어른도 이처럼 억압적인 생활을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오래도록 갇힌 생활을 한 아이는 말수가 점점 줄어들었고, 맑은 눈빛도 사라

  • 봄 옷을 벗다   제29화

    “됐다, 가서 준비하거라.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어머님도 자주 뵙거라.”육명장은 한마디 덧붙였다. “저 계집에게는 마음 두지 마라. 친척으로 연결된 사이다.”그의 아우는 성정이 자유분방하고 통제하기 어려웠으며, 타고난 다정한 눈빛으로 풍류를 즐기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전에 집안에서 그에게 부인을 얻어주었으나, 그 여인이 아이를 낳다가 산후 출혈로 아이만 남기고 세상을 떴다. 지금은 조씨 부인 손에서 크고 있었다.육명천은 살짝 당황했다. 말을 아끼는 형님께서 오늘따라 어찌 된 일인지, 같은 말을 두 번이나 반복했기 때문이다.“형님께서는 염려하지 마십시오. 제아무리 제멋대로 굴어도, 친척에게까지 손을 대지 않습니다.”육명장은 말없이 발걸음을 옮겼고, 육명천은 몸을 돌려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육명천은 곧장 별채로 돌아왔다. 정원 안의 배치가 정교하였고 산과 물이 있고, 정자와 누각이 있었다. 그럼에도 별채라 불린 것은 안채와 다르게 불러야 했기 때문이었다. 하여 육 노부인이 거처하는 곳은 안채, 조 노부인이 거처하는 마당은 별채라 불리게 되었다.육명천을 마주한 몸종들은 미소를 지으며 무릎을 굽혀 절했다. 별채 안으로 들어선 육명천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몸종은 그를 발견하자마자 문의 휘장을 걷어 올렸고, 육명천은 곧장 방 안으로 들어갔다. 코를 찌르는 듯한 무겁고 질식할 것 같은 느낌이 밀려왔다. 마치 문발 하나가 바깥공기를 차단하여 방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 같았다. 바깥의 빛도 잘 들지 않아, 오직 창문 앞에 가늘게 비치는 빛줄기만이 눈부시게 밝을 뿐이었다. 방 안에는 몇 명의 여종이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고, 다른 두 명은 평상 앞에서 시중을 들고 있었다.평상에는 부인 한 명이 기대어 누워 있었는데, 나이가 좀 들어 보였지만, 관리를 잘해서 피부는 아직 윤기가 있었다. 다만 눈가에 몇 줄의 불규칙한 주름이 세월의 흔적을 나타내고 있었다. 바로 조씨였다.“어머니.” 육명천이 조씨에게 인사했다.조씨는 금방이라도 탁

  • 봄 옷을 벗다   제28화

    남자는 육명천에게 권력을 가진 형님이 있기에 지금 같은 권세를 누리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에 비해 자신은 온갖 고생을 하며 기어 올라왔음에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는 모습에 화가 났다.“나를 왜 끌어당기느냐? 내 말이 틀렸느냐? 친형제끼리도 틈이 생기거늘, 하물며 한 어머니에게서 나오지도 않았으니. 그저 육재상이 마음이 넓어, 너를 용납해 준 것뿐이다. 만약 나라면….”남자는 코웃음을 쳤다. “네 어미와 같이 쫓아낼 것이다. 네가 죽든 살든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무거운 주먹이 그의 머리를 강타했고, 그 남자는 즉사했다.손이 빨랐던 탓에, 옆에 있던 사람들도 말릴 틈이 없었다.육명천은 일부러 살인을 저지르려 한 것은 아니었다. 주먹 한 방에 사람을 죽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이후 술이 깨자,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관아로 가서 자수했다.인명 피해가 발생하자, 육명장의 정적들은 이 기회를, 구실을 삼았고, 저잣거리에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대개 육명천이 그 형님의 명성을 빌려, 법도 없이 날뛰고 있다는 것이었다.백성들은 분노했고, 심지어 대연의 군정을 장악하는 육명장의 덕이 지위에 미치지 못한다고 공언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외부에서 아무리 육명장에게 불리한 소문이 돌아도, 그는 평소처럼 궁에 들어 정무를 봤고,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조정의 목소리는 민간보다 더욱 흥미진진했다. 세 가지 목소리로 나뉘었는데, 육명장이 정의로운 척하니, 추밀사 직위를 파면하고, 결백이 증명된 후에 다시 관직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관직에서 한 번 파면되면, 복직은 고사하고, 목숨조차 보전하기 어렵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를 함정에 빠뜨리려 했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의 목숨을 노리고 있는지 모른다.그들은 육명장이 다시 일어설 기회를 주지 않으려고 했다.다른 무리는 육명장을 지지하는 무리로, 문관과 무장들이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육명장의 휘하 사람들이었다.마지막 한

  • 봄 옷을 벗다   제27화

    후끈한 열기 속에 호수의 시원함이 섞인 바람이 불어왔다.정자 주위는 무성한 나무들로 둘러싸여 있었고, 가지들은 자유롭게 흩어져 정자 안에 푸른 그림자를 드리웠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잎이 뒤집히며 사각거리는 소리를 냈다.정자 안에는 두 남자가 있었는데, 한 명은 서 있고 한 명은 앉아 있었다.서 있는 남자는 뒷짐을 지고 있었는데, 스무 살이 훌쩍 넘어 보였다.초록색 둥근 깃 도포를 입었는데, 깃 가장자리로 손가락 반 마디 너비의 새하얀 속옷이 보였고, 허리에는 검은 가죽띠를 묶고 있었다. 양지옥으로 만든 속이 빈 향낭을 차고 작은 은장도를 매달았으며, 검은 가죽 장화를 신고 있었다. 신발 코는 살짝 들려 있었고, 여의 무늬가 은은하게 수놓여 있었다.남자는 나지막이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집에 언제 저렇게 재미있는 사람이 들어온 것입니까? 싸움을 말린 것이 아니라, 분명히 불을 지핀 것인데, 미안해합니다. 꽤 흥미롭군요.”젊은 남자가 몸을 돌려 탁자 옆에 앉아 있는 다른 사람을 보며 말했다. “큰형님께서는 어찌 말씀이 없으십니까?”탁자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이 바로 육씨 가문의 첫째, 육명장이고, 말을 건넨 사람은 그보다 몇 살 어려 보이는 육씨 가문의 셋째, 육명천이었다.육명장은 두 눈을 감고, 손가락 끝으로 맑은 물빛의 넓은 입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그 찻잔은 선이 깔끔하고 군더더기가 없었으며, 전체적으로 윤기 나는 푸른빛을 띠고 있어, 광택이 은은하게 속으로 스며들어 있었다. 탁자 옆의 두 겹으로 조각된 배꽃 무늬 나무 상자 안에는 똑같은 모양의 입 넓은 찻잔 세 개가 있었다.육명장은 푸른 찻잔에서 시선을 떼고 조금 더 먼 곳을 바라보았다.“집안의 관계를 따지면 너를 삼촌이라고 불러야 한다.”육명천은 말문이 막혀 물었다. “친척입니까?” 그의 말투에는 아쉬움이 섞여 있었다.“사씨 가문의 외척이다.” 육명장이 말했다.육명천은 한참을 생각한 후에야 사씨 가문을 떠올렸고, 무심하게 웃었다.“이번에 가져온 다기가 마음에 드시는

  • 봄 옷을 벗다   제26화

    마지막에는 한마디 덧붙였다. “상인의 집안 출신이니, 셈이 빠르기는 하나, 수포로 될까 봐 두렵습니다.”육완아가 사미정의 말을 이어받았다. “할머니께서는 예의와 규범을 가장 중시하시는 분입니다. 아무리 그분의 마음을 얻는다 해도, 문벌에 맞지 않는 집안에 시집보내지는 않으실 겁니다. 일찌감치 그 마음을 접고, 남들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바로 얼마 전에 사씨 가문과 파혼하고, 곧이어 육부로 들어와 할머니의 명성을 빌려 자신의 배경을 바꾸려 하다니. 야망이 크기도 하지.’이때,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염치도 없나 보군.”하진은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고, 이 말을 한 당사자는 다름 아닌 육희아였다.육완아의 얼굴을 붉히고 육희아에게 따졌다. “무슨 뜻이냐?”더 이상 나서지 않을 줄 알았던 육희하가 계속 말했다. “낯짝이 두껍기도 하지. 네 출신 배경을 잊은 것이냐? 감히 남의 흉을 보다니. 하진 아가씨는 적어도 이름있는 가문 출신이다. 그런데 근본도 없이 의기양양해서 지껄여? 어느 진흙 구멍에서 굴러 나왔는지 알지도 못하면서.”흥분한 육희아의 양 볼이 붉어졌다. 서글서글한 인상을 가져 말이 잘 통할 줄 알았던 그녀는 의외로 입담이 매서운 사람이었다. 육완아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곧장 되받아쳤다. “너는 뭐라도 되는 줄 알았느냐? 적자도 서자도 아닌 주제에, 이 집안에서 널 눈여겨보는 사람이 있긴 하느냐? 네 할머니조차 우리 할머니 덕을 보는데.”육완아가 다시 말했다. “만약 그해 할아버지께서 보호해 주시지 않았다면, 지금 첫째 댁에 너희가 발 디딜 곳이나 있었겠느냐.”육 대감은 젊은 시절, 세상 구경을 나갔던 중 조 노부인과 먼저 인연을 맺었다. 가족들에게 숨기고 남몰래 조 노부인을 부인으로 맞이했다. 훗날 집안에서는 반대하며 조 노부인을 집에 들이지 못하게 했으며, 육 대감에게 다른 명문가의 여식을 혼처로 정해주었다. 육 대감은 어쩔 수 없이 가족의 주선에 따라 명문가의 여식과 혼례를

  • 봄 옷을 벗다   제25화

    다만 하진은 조금 이상했다. 그날 육희아의 말처럼 상황이 그토록 급박하여 마차가 뒤집힐 지경이었다면, 함께 있던 호위 무사들이 육완아를 에워싸고 먼저 보내야 했다. 마차는 지키지 못하더라도, 사람은 지킬 수 있었다. 이 정도는 할 수 있는 일이었다.‘어찌하여 마차 안에 꼼짝하지 않고 있었을까? 만약 그 마차 안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작년의 화등절이라?’ 하진은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오래전부터 몰래 정을 통하고 있었던 모양이구나.’육희아는 하진의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 못하고, 여전히 화등절이 얼마나 시끌벅적하고 재미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두 사람은 이야기하며 내원으로 들어섰다. 공교롭게도 그곳을 거닐던 육완아와 사미정과 정면으로 마주쳤다.육완아는 앞섶이 맞닿는 덧옷을 입고 있었는데, 옷감이 가볍고 얇았으며, 안에는 노란색 저고리를 입었다. 길이는 발목까지 닿았고, 치마 끝에 찬 장식에서 쟁강거리는 소리가 났다.사미정은 수행원처럼 육완아의 곁에 반 걸음 뒤처져 따랐고, 비위를 맞추려는 듯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네 사람은 이렇게 정면으로 마주쳤다.육완아는 턱을 살짝 치켜들고, 하진을 바라보았다. 비록 하진이 유씨와의 혼약을 먼저 파기했고, 그 제안도 하진 쪽에서 먼저 나온 것이었지만, 육완아에게 하진은 여전히 눈엣가시였다. 그녀는 하진이 사준영과 혼약을 물리기를 바랐지만, 하진이 먼저 제안한 것이 싫었다. 대하진 같은 미천한 상인의 여식이 감히 사대부 자제와의 혼약을 먼저 물리고자 한 것에 화가 났다. 마치 하진이 버린 것을 주워 가는 것처럼 느껴졌다.물론 사준영을 향한 육완아의 마음이 변하지 않았고, 그 간절함이 더해졌다. 사준영이 그녀에게 애매모호한 태도를 보일수록, 그녀의 마음을 쥐락펴락하기에 좋았다. 육완아는 사씨 가문의 문제라 생각지 않고, 마음속의 모든 불만을 하진의 탓으로 돌렸다.‘혼약은 마땅히 물려야 하지만, 너 같은 상인의 여식이 먼저 제안해서는 안 되었다.’하진은 마땅히 버림받아야지만, 육완아는 마음 편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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