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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hat ng Kabanata ng 봄 옷을 벗다: Kabanata 1 - Kabanata 10

30 Kabanata

제1화

“하진아, 내 아이를 낳아다오.”비단 이불 아래, 수 놓인 베개 사이에 사랑의 흔적이 가득했다. 손가락 아래로 뜨겁게 오르내리는 그의 등이 느껴졌다. 사준영은 하진의 아랫배를 연신 쓸어내렸다. 심하게 갈라진 목소리는 정욕이 극에 달하기 직전의 인내심이 서려 있었다.정신이 아득해지는 가운데, 그녀의 나른한 신음은 입술 사이에서 잘게 부서졌다. 그녀는 목을 젖혀 그의 입맞춤을 받아냈고, 하얀 팔로 자신도 모르게 땀에 젖은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검푸른 머리칼은 베개 위에서 뒤엉켰고, 묘한 감정은 몸의 구석구석을 조금씩 타올랐다. 가만히 여운이 온몸에 흐르도록 내버려 두었다. 사랑의 물결이 가장 짙어질 때쯤 따뜻한 기운이 조용히 뿌리를 내렸다. 그의 핏줄이 섞인 아이를 맺어주려는 듯이.바로 그때, 귓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 아버지께 드리려고 만든 필통입니다!” 맑고 또렷한 아이의 목소리는 하진을 기억에서 끌어냈다. 이어서 담장 밖에서 부드럽고 온화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손재주가 참 좋구나, 네 아버지도 틀림없이 좋아하실 거다.”그 목소리를 들으며 하진은 자신의 손끝을 바라보았다. 시퍼런 핏줄이 가득한 손가락은 앙상하고 거칠었다. 멍하니 있는 사이, 익숙하고 온화했던 남자의 목소리가 그녀의 심장을 저릿하게 만들었다. “정성이 갸륵하구나, 이 아비는 아주 마음에 든단다.”하진은 떨리는 손을 거두었다. 탕약을 들고 들어온 규안의 눈시울이 붉었다. “약이 다 되었습니다.” “저 아이는, 이 도령이냐?” 하진은 탕약을 보지 않고 담장에 시선을 고정했다. “네, 주인님과 큰마님의 막내 아드님입니다.”규안은 답답한 듯 탕약을 상에 내려놓았다. 사내의 마음은 차가운 쇠와 같다지만, 전에는 하진밖에 없었던 그는 지금 하진을 쇠보다 더 딱딱하게 대하고 있었다. 하진은 약사발을 움켜쥐고 무표정한 얼굴로 단숨에 들이켰다. 쓴맛이 목구멍 가득 퍼졌다. “나가 보아라.”규안은 그녀의 앙상한 뒷모습을 보며, 감히 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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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대하진은 두 모녀와 몇 마디 잡담을 나누고 물러났다. 안채를 나섰지만 떠나지 않고, 오히려 돌아 안채 옆으로 갔다. 방 안 모녀의 대화가 창문 너머로 들려왔다. “언니를 우리 집에 얼마나 더 둘 거예요? 왜 빨리 돌려보내지 않아요? 다른 규수들 앞에서 내가 얼굴을 들 수가 없잖아요.” 이어서 대만여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 아이를 너무 싫어하지 마라. 어차피 네 오라비의 첩이 될 몸이니.” “진짜로 오라버니께 시집보낼 생각이세요?” 사미정이 놀라 소리쳤다. 그녀의 오라버니는 젊은 나이에 벼슬길에 올라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아직 관직이 높지는 않았지만, 미래가 전망했기에, 하진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대만여는 사미정을 흘겨보았다. “그 아이의 신분으로 어찌 네 오라비의 정실부인이 될 수 있겠느냐. 네 오라비에게는 고귀한 사대부 집안의 여식이 어울린다.” “어머니의 말씀은...” “대씨 가문은 대대로 장사를 해왔고, 특히 내 오라버니, 하진의 아버지 손에서 더욱 번성하여, 돈이 산처럼 쌓여 있다. 게다가 그 집안에는 아들이 없어, 하진이 시집올 때 혼수가 엄청날 것이다. 그때 네 오라비에게 그 아이를 첩으로 들이게 하여, 그 혼수를 모두 우리 가문의 것으로 만들게 할 참이다.” 대하진은 대만여의 조카이기에, 첩이 되면 대씨 가문의 체면이 깎이지만, 대만여는 탐욕이 앞서, 자기 아들은 고귀한 집안의 여식을 부인으로 맞이하게 하면서, 하진을 첩으로 들여 하진의 풍족한 혼수까지 노릴 생각이었다. 대만여는 사미정의 곁으로 가 손가락으로 그녀의 머리를 쿡 찔렀다. “어미가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하겠느냐? 너도 나이가 적지 않다. 저 아이가 우리 집안에 있으면 네가 시집갈 때도 풍족하게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사미정은 대만여의 소맷자락을 잡고 웃었다. “저를 아끼시는 것은 어머니뿐입니다. 오라버니의 첩이 될 수 있는 것을 오히려 영광으로 느껴야 할 것입니다.” 사미정은 멈칫하더니 말했다. “언니가 자존심이 강한데, 싫다고 하면 어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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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누군가 말했다. “이상합니다. 7품 짜리 집안에 이렇게 돈이 많을 줄이야. 우리에 못지않은 것 같습니다. 다만 이 재물이 어디서 났는지 궁금합니다.” 또 다른 사람이 픽하고 웃었다. “옛말에 현감이 현장에 있는 관리만 못 하다지요? 우리처럼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몸가짐을 깨끗이 해야 하지만, 낮은 계급의 사람들은 중요한 자리를 맡아 남모르는 수입이 많을 겁니다.” 사람들은 한마디씩 비웃듯이 말을 던졌고, 화살의 방향은 점점 이상하게 흘러갔다. 사미정은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이것은 그녀의 아버지와 오라버니의 명예가 달린 문제였다. 사미정은 황급히 손을 저으며 해명했다. “여러분 오해하셨어요. 이 목걸이는 제 것이 아니고, 빌린 것입니다.” 육완아는 이 상황을 보더니, 다시 미소를 지었다. 사미정의 오라버니인 사준영이 손해 입는 것을 원치 않았던 육완아는 넌지시 물었다. “그 목걸이는 어디서 빌린 겁니까?”사미정은 어머니의 당부를 떠올릴 겨를도 없이, 급히 하진을 언급했다. “이 목걸이는 사촌 언니에게 빌린 겁니다.”사미정은 말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이미 늦었다. 육완아의 미소가 옅어졌다. “언니요? 집에 언니가 있군요, 지금 어디에 계세요? 오늘 같이 왔나요?”이 질문은 사미정을 더욱 당황하게 하였고, 사미정은 더듬거리며 말했다. “같, 같이 오지 않았습니다.” 사미정이 숨기려고 할수록 육완아는 더욱 의아해하며 사미정의 얼굴을 자세히 살피더니, 이내 더 맑은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우리가 친한 것처럼, 그분도 내겐 사촌 언니와 마찬가지이니, 한번 데려와서 만나는 것이 어떤가요?”사미정은 비로소 사고 친 것을 알게 되었다. 육완아가 방금 자신을 보던 눈빛은 그녀의 심장을 오싹하게 하였다. 사미정이 답하기도 전에, 육완아가 다시 말했다. “며칠 후에 가족들과 함께 성 밖 절에 기도하러 가려던 참인데, 그때 그분과 같이 오는 것은 어떠합니까?”사미정은 응할 수밖에 없었다. 육완아는 사미정의 손을 다정하게 잡고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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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시랑 부인은 부군을 따라 경성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는 것이 없었다. 조정의 일은 시랑이 처리했지만, 조정 밖의 일 또한 나름의 가치가 있었다. 특히 경성 귀족 사회의 비밀은, 공식적으로는 입밖에 올릴 수 없으나, 사적으로 은밀히 퍼지는 이야기를 뜻한다. 시랑 부인은 아예 자주색 옷의 부인에게 마차에 함께 타자고 청하며 더 많은 이야기를 들으려 했다. “어째서 서른이 넘도록 독신이신가요? 그 댁 아가씨는 수양딸인가요?” 시랑 부인은 말을 마치더니, 무언가 생각난 듯 급히 입을 가리며 나지막이 외쳤다. “혹 나리께서 남색은 아니시겠죠?” 마차에 올라타자 자주색 옷의 부인은 더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런 말씀은 함부로 하시면 안 됩니다. 육 추밀사께서는 중요한 기밀을 다루시고 공무에 매우 근면하시며, 그 심성과 행동은 위엄 있는 분입니다.” 시랑 부인은 의아했다. “권문세가 출신으로, 스무 살도 되기 전에 출세하셨고, 별다른 특이한 취향도 없으신데, 어째서 안채를 비우시는 겁니까? 첩을 두지 않더라도, 정신부인은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래야 아랫것들을 통솔하고 가규를 바로잡으며, 살림을 꾸려나가지요.” “그렇지요, 사대부 자제는 말할 것도 없고, 보통 명문가 자제들은 일찍이 혼약을 맺지요. 열네다섯에 부인을 맞는 것도 예사고, 첩 하나 두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지요.” “그러게요.” 자주색 옷의 부인이 이어 말했다. “젊으셨을 때 부인을 맞이했거나 첩을 두셨다면 지금쯤 자식들도 꽤 컸을 것입니다. 대체 무슨 일 때문에….” 자주색 옷의 부인은 잠시 멈췄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육 추밀사께서 스무 살이 채 안 되던 해에, 한창 혈기 왕성하던 시절, 집안에서 혼사를 정해주었습니다. 여자 쪽 집안도 괜찮았는데, 혼사가 정해진 지 얼마 안 되어, 죽었습니다.”“죽었다고요?” 시랑 부인은 한숨을 쉬었다. “박복한 명을 지녔군요. 살았더라면 얼마나 존귀했을까요.” 자주색 옷의 부인은 고개를 저었다.“제 말을 계속 들어보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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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정원의 화초에는 여전히 오색등이 걸려 있었다. 하인들은 이리저리 오가며 상을 치우고 있었다. 육완아는 서재에서 나와 자신의 방으로 가지 않고, 다른 쪽으로 향했다. 희자가 물었다. “아가씨, 날이 저물었는데, 방으로 돌아가 쉬지 않으시고 어디로 가십니까?”육완아는 희자를 흘겨보았고, 희자는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은 안채로 향했다. 안채는 여전히 불이 밝았고, 몇몇 아낙네들이 어린 하인에게 물을 담은 대야를 들고 다니라고 지시하고 있었다. 그때, 휘장이 걷히고 안에서 나이 든 부인이 걸어 나왔다. 그녀는 육완아와 눈이 마주치자 계단 아래로 내려와 웃으며 물었다.“아가씨, 이 시간에 어찌 오셨습니까?” 육완아는 부인의 어깨너머로 안을 살피며 물었다. “노부인께서는 주무시느냐?” 주씨는 노부인의 몸종으로, 줄곧 곁에서 노부인을 모셨다. “방금 염주를 다 돌리시고, 이제 막 주무시려던 참입니다.” 주씨는 말을 마친 후, 그녀가 여전히 서 있는 것을 보고 눈치껏 말했다. “아가씨, 잠시 기다리십시오. 들어가서 여쭙겠습니다.” 주씨는 방으로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나왔다. “들어오라고 하셨습니다.” 육완아는 방으로 들어가 휘장 뒤로 돌아서 들어 갔다. 안에 들어서자마자 평상 위에 단정하게 앉아 있는 비단옷을 입은 노부인이 보였다.그녀는 노부인의 곁에 기대어 애교를 부렸다. “할머니.” 육 노부인은 손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놀리듯이 말했다. “젊으니까 다르구나. 놀다가 심심하면 또 나를 괴롭히러 뛰어오고.” 육완아는 해맑게 웃었다. 노부인이 자신을 아끼는 것을 알았고, 젊은이들의 활기찬 모습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더욱 영리하게 말했다. “이제 한 살 더 먹어서, 다시는 할머니를 괴롭히지 않을 거예요. 그저 할머니 곁에서 더 오래 모시면서 즐겁게 해드리고 싶어요.” 육 노부인은 장난스럽게 주씨에게 말했다. “어느덧 열다섯이구나. 얼른 네 혼처를 찾아줘야겠구나.” 주씨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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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사준영의 말에, 무릎 위에 포개진 그녀의 두 손이 아주 떨려왔지만 얼굴은 평온을 가장했다.“오라버니는 무엇을 걱정하는 겁니까? 제가 가면 그 댁 아가씨가 오해할까 봐 그러는 겁니까? 아니면 정혼할 여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까 봐 두려운 겁니까?”사준영이 입을 열었다. “알고 있었구나.”“비밀도 아니지 않습니까.”“나는 육씨 가문의 힘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느냐?”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그렇다면, 곤란한 내 처지를 반드시 이해해 주리라 믿어도 되겠느냐?”하진은 그의 물음에 답하는 대신 화제를 돌렸다. “평소 그리 현명하시던 오라버니가, 어찌 지금 혼미해졌습니까? 저를 숨긴다면 육씨 가문에서 더욱 수상히 여길 것이고, 오히려 일을 그르치게 될 것입니다.”사준영은 하진의 말에 뼈가 있음을 알아차리고 물었다. “네 생각은 어떠하냐?”하진은 미소 지으며 옆에 놓인 찻잔을 들어 가볍게 한 모금 마셨다. “이미 고모님께 타이름을 받았고, 그 가르침을 깊이 새겼습니다. 피는 물보다 진한 법, 우리 두 집안이 인척으로 이어져 있지요. 사씨 가문이 잘 되어야 대씨 가문에게도 좋은 일입니다.”사준영은 하진의 얼굴을 응시하며 그녀의 속마음을 읽어내려 했으나, 끝내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이것이 너의 진심이더냐?”“진심입니다. 저는 질투나 부리고 사리 분별 못 하는 이가 아닙니다. 저는 이미 오라버니와 한배를 탔고, 오라버니가 잘 되어야만 저도 편안하게 살 수 있습니다.”사준영은 가슴 한쪽에 설명하기 어려운, 기쁨인지 번민인지 모를 복잡한 심경이 감돌았다.하진이 보여준 너그러움과 이해심을 생각하면 기뻐해야 마땅하지만, 돌이켜보면 자신이 원했던 반응은 아니었다. 자신에게 눈물로 호소하고, 확고한 약속을 요구했어야 했다. 그는 필시 그녀를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녀를 향한 그의 마음은 거짓이 아니었으며, 두 사람은 어릴 적부터 함께 자라 그녀를 자신의 일부로 여겼다. 중간에 몇 년을 떨어져 지냈더라도, 그는 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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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육명장은 조회가 끝난 후, 복흥 주점에 들러 반나절쯤 앉아 쉬는 것이 습관이었다. 그가 오기만 하면 2층은 그의 차지였다. 매일 오는 것은 아니었고, 사흘에 한 번꼴로 들렀다. 복흥 주점은 늘 미리 자리를 비워두고 그를 맞이했다.그가 바깥에서 술을 마시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 그저 마음 편히 조용하게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기 위함이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그 흥취가 더욱 깊어졌다. 1층 객실의 웃음소리가 그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보살이라.’보살이라는 여인은 창가에 앉아 팔꿈치를 탁자 위에 괴고 있었다. 소매가 팔꿈치까지 걷어 올려져 희고 통통한 팔목이 드러났고, 팔목에는 투명한 옥 팔찌와 소박한 은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손바닥으로 턱을 받치고, 뾰족한 손가락 끝으로 뺨을 건드렸다 멈추기를 반복했다.비가 거세지자 바람을 타고 들이쳐 도포 자락이 젖었다. 아마도 호기심 때문인지, 그녀는 고개를 들어 눈을 크게 뜨고 그가 있는 쪽을 향해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를 보지 못했으나, 그녀의 그 움직임 때문에 그는 그녀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육명장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앳된 계집아이였다.그는 술잔을 들어 홀짝이며 정신을 빗속에 담갔다가 다시 비워냈다.조용한 빗소리 속에서 다시 움직임이 있었다. 그녀는 치마를 여미고 쪼그리고 앉아 아낙에게 날씨를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느릿했으며, 외지 억양이 섞여 있어 다소 특별했다. 육명장은 문득, 저 음색으로는 화를 내도 거칠지 못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어느새 비가 잦아들었다. 그는 층계를 내려와 주점 밖으로 나가 처마 아래에 서서 한참 동안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하진이 옆을 돌아보았을 때, 그와 시선과 마주쳤고, 순간 멈칫했다. 예의를 갖추면서 미소를 짓더니 그리고 치마를 여며 절을 올렸다.맞은편 남자가 무표정한 얼굴에 얕은 눈빛을 하고 있을 뿐, 고개를 숙이는 인사조차 없이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하진은 마주 선 문인이 붙임성이 없다고 여겼다. 냉정하고 인정없는 분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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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대하진이 막 입을 열어 대답하려는 순간, 육완아의 목소리가 곁에서 튀어나왔다.“하진 아가씨처럼 이리 빼어난 분이 정혼이 있을 리가 있겠습니까? 만약 있다면, 그 집안에서는 벌써 데려가서 받들고 싶어 안달이 났을 것입니다.”육완아는 눈꼬리가 휘게 하진에게 미소를 짓더니, 일부러 앳된 투로 말했다. “제 말이 맞지요?”순진한 어조에는 위협이 숨어 있었다. 하진은 육완아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육완아가 탐내는 것은 사람이든 물건이든 반드시 손에 넣어야 했으며, 육씨 가문의 권세는 그녀가 거리낌 없이 휘두르는 버팀목이었다.‘자식 교육을 못 한 것은 아비의 잘못이다.’ 하진은 갑자기 육씨 가문의 가주에게 화풀이하고 싶었다.그녀는 속으로 냉소했다. ‘네가 그리 사준영을 탐내니, 네 뜻대로 해 주마.’ 하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몇 걸음 뒤로 물러나 방 한가운데에 서서, 치마를 여미고 무릎을 꿇었다.“노부인께서 물으시니, 거짓을 고하지 못하겠습니다.”하진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제게는 혼약이 있습니다.”이 한마디에 방 안 사람들의 표정이 제각각으로 변했다. 휘장 밖의 사씨 가문 부자의 얼굴은 틀림없이 굳었을 것이다. 대만여와 사미정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외인이 없었다면, 그들은 당장 하진의 입을 찢었을 것이다.육완아는 하진을 독기를 품은 눈으로 바라보았고, 소맷자락 아래로 주먹을 꽉 쥐었다.육씨 가문의 여인 중 한 명, 화려한 차림에 영특해 보이는 이름 모를 부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 속에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비아냥이 섞여 있었다. “이거 참 재미있군요. 혼약이 있다는데, 어찌 사씨 가문 마님께서는 없다고 하셨는지요?”그녀는 눈초리를 대만여에게 돌렸고, 대만여의 얼굴은 순식간에 붉어졌다.“본디 외가 오라버니와 혼약이 있었습니다. 이 혼약은 어릴 적 정해진 것이었습니다. 이번에 경성에 온 것은 그 혼약을 물리기 위함입니다.” 하진은 말을 이었다. “고모님의 말씀이 정확하지는 않으나,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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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뿐만 아니라, 대하진은 아버지인 대만창까지 끌어들여 아예 돌이킬 뒷길조차 모조리 끊어버렸다. 아무도 말을 바꾸지 못할 것이다.사준영의 앞날이 걸린 벼슬길, 사씨 가문의 명예, 그리고 가문을 빛낼 현판까지. 이 말들이 켜켜이 쌓여 사씨 집안사람들을 한껏 의기양양하게 만들었기에, 그들은 절대 포기하지 못할 것이다.대만여가 제아무리 하진의 혼수를 탐낸다 한들, 하진의 계략을 벗어날 수 없었고, 사준영이 대하진을 첩으로 삼으려는 생각 또한 단념하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사씨 가문이 육씨 가문에게 얕은수를 부린 꼴이 된다.그때는 하진이 나서지 않아도, 육씨 집안사람들이 먼저 묵과하지 않을 것이다.대만여는 이를 악물었다. 이제야 깨달은 눈치였다. 그들이 하진의 계략에 빠져 뜨거운 불 위에 올려진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저 아이의 말이 정녕 사실인가?” 육 노부인의 물음에 대만여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사실입니다. 마침 혼약을 물리려던 참이었습니다.”휘장 밖에 있던 사준영은 하진과의 혼약을 물린다는 말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안으로 돌진하려던 사준영을 사백산 덥석 붙잡았다. “어딜 가려는 게냐!”“혼약을 물릴 수는 없습니다.” 급한 마음에 사준영의 눈가가 떨렸다.사백산이 낮은 소리로 꾸짖었다. “망할 놈! 당장 앉아라! 지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마음대로 구는 것이냐!”안채의 사람 소리가 들려왔다.먼저 말을 꺼냈던 그 부인은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물린다고는 하나, 아직 물린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게다가 혼약은 본디 사사로운 약속이니, 입으로만 하는 빈말을 어찌 믿겠습니까?”대만여는 치미는 화를 억누르며 침착하게 대응했다. “신물이 있으니, 각자 신물을 돌려주면 이 일은 마무리되는 것입니다.”허나 대만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하진이 끼어들었다. “고모님께선 잊으셨습니까? 어젯밤에 신물을 이미 잃어버려 찾을 수 없다 하지 않으셨습니까?”이 말에 사람들은 어리둥절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고, 대만여는 하진의 꿍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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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대하진의 손에 혼인 파기 단자가 다시 들어왔고, 그녀의 가슴을 짓누르던 돌덩이가 말끔히 사라졌다.육완아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여기서 하진을 제외하고 가장 기쁜 이가 그녀일 것이다. 육 노부인은 예법을 중시했고, 하진이 겸손하게 물러서는 태도에 크게 만족했다. 비록 법으로 정해진 규정은 없으나, 관료 집안과 상인 집안이 혼인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었다.하진은 육 노부인의 마음속에 의리 있는 좋은 인상을 남겼을 뿐 아니라, 오히려 노부인의 연민을 사게 되었다. ‘출신이 조금 아쉬운 것을 제외하면, 참으로 좋은 아이인데.’이어지는 담소 속에서 육 노부인은 집안의 어린 손녀들을 밀어내면서, 내내 하진의 손을 잡고 있었다.이때, 하인 한 명이 들어와 노부인 곁의 주씨에게 말을 전하였고, 주씨는 이를 다시 육 노부인께 전했다. 가까이 있었던 하진도 그 말을 모두 들을 수 있었다.“나리께서 노부인께 더 앉아 계실지, 아니면 돌아가실지 여쭙니다.”육 노부인이 밖을 내다보다가 말했다. “사씨 가문의 대감과 도령이 밖에서 기다리니, 안으로 들여 잠시 이야기를 나누어야겠다.”주씨는 이에 응하고 아래로 내려가 일을 처리하였다.육 노부인은 육완아를 비롯한 어린 손녀들에게는 나가 놀라고 했다. 그들은 물러나기 전에 인사를 올리고 방을 나섰다.하진도 그들 틈에 섞여 나왔다. 방을 나서자, 금쪽같은 규수들은 홀로 또는 짝을 지어 몸종들을 데리고 주변으로 흩어졌다. 어떤 이는 뒷산 계단을 오르고, 어떤 이는 절 앞을 한가로이 거닐었다. 혼인 파기 단자를 손에 넣은 하진은 기분이 좋았다. 집으로 돌아가면 짐을 정리하여 당장 평곡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평곡으로 돌아가면 아버지에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 다시 자신을 위한 거처를 마련할 것이다. 그녀는 허황한 것을 바라지 않을 것이고, 분수를 모르고 행동하지도 않을 것이다.그녀는 경성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녀는 이곳 사람들을 감당할 수 없었고, 시비가 너무 잦아 견딜 수 없었다. “하진 아가씨.”맑은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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