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봄밤, 젖어들다
봄밤, 젖어들다
Author: 유젠

제1화

Author: 유젠
예기치 못한 사고로 아이를 잃고 한 달이 지난 후 온서연은 남편의 외도를 알게 되었다.

...

새벽 한 시.

온서연이 또다시 악몽에 시달리다가 깨어났다.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아이가 꿈속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화장실에 다녀오던 온서연의 눈에 침대 머리맡을 밝히는 빛이 들어왔다. 남편 육경찬의 휴대폰이었다.

온서연은 홀린 듯 휴대폰을 집어 들어 잠금을 풀었다.

‘공주는 잠꾸러기’라는 닉네임을 가진 이가 사진 몇 장을 보내왔다.

턱을 괸 채 울상 섞인 눈빛으로 바 구석에 앉아 있는 젊은 여자 사진이었다. 그 앞에 형형색색의 술병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뒤이어 메시지들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그 여자한테 다 털어놓겠다며? 유산한 지도 벌써 한 달이나 지났는데 언제까지 기분 맞춰줄 거야?]

온서연은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육경찬과 결혼한 지 이제 고작 석 달이었다.

서둘러 대화 기록을 훑어봤다. 일상적인 대화들 사이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화제가 다름 아닌 온서연이었다.

[나 사랑한다면서? 그럼 증명해 봐. 와이프 버리고 나랑 보름 동안 해외여행 갈 수 있어?]

이 메시지가 온 날짜가 마침 그들의 결혼식 당일이었다.

온서연은 그날을 생생히 기억했다. 육경찬이 미안한 얼굴로 그녀를 품에 안으며 회사에서 급한 해외 출장 명령이 떨어져 도저히 거절할 수 없다고 사과했었다.

그녀는 육경찬의 커리어를 위해 신혼여행까지 취소했다.

그 보름 동안 육경찬은 끼니때마다 연락을 거르지 않는 지극정성을 보였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시간 관리의 달인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여자 임신했다며? 이혼 안 할 생각이야?]

[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해? 설마 애 태어날 때까지 기다리라는 건 아니지?]

[미안해. 나 때문에 정말 그 여자를 유산시킬 줄은 몰랐어. 몸 좀 회복되면 그때 이혼 얘기해.]

[경찬아, 사랑해. 기다릴게...]

글자 하나하나가 보이지 않는 짐승이 되어 온서연의 살점을 뜯어내는 듯했다.

휴대폰을 쥐고 있던 온서연은 온몸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고 참을 수 없는 통증이 몰려왔다.

육경찬이 출장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온서연은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뻤다. 소식을 들은 육경찬 역시 곧장 달려와 함께 산부인과에 갔고 아기용품도 골랐다.

그런데 한 달 전, 산책하러 나갔던 길에 누군가와 부딪혔고 허망하게 아이를 잃었다.

온서연은 그저 비극적인 사고인 줄만 알았다.

육경찬이 몸을 뒤척이자 온서연은 황급히 휴대폰을 내려놓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2분 뒤 육경찬이 휴대폰을 확인하더니 옷을 챙겨 입는 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그 소리에 깬 척했다.

“이 밤에 어디 가?”

육경찬이 온서연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며 나직한 목소리로 달랬다.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겨서 가봐야 해. 기다리지 마.”

곧이어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온서연은 서둘러 일어나 겉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가 택시를 잡았다.

“기사님, 스파크 바로 가주세요.”

...

차가 바 입구에 도착했다.

온서연이 택시에서 내리기도 전에 육경찬이 한 젊은 여자를 잡아끌며 성큼성큼 걸어 나오는 걸 목격했다.

그가 여자를 차 옆으로 밀어붙이면서 다급하고도 고통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내가 유산까지 시켰어. 내 마음을 대체 어떻게 더 증명하라는 건데?”

그 순간 온서연은 둔기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녀의 남편은 아랑곳하지 않고 여자의 목덜미를 감싸 쥔 채 강렬하게 입을 맞췄다. 도로변에서 서로를 탐닉하는 모습은 영락없이 사랑에 미친 연인이었다.

온서연은 육경찬이 여자를 조수석에 태우고 멀어져가는 것을 멍하니 쳐다봤다.

“기사님, 저 차 좀 따라가 주세요.”

차가 어느 한 호텔 앞에 멈춰 섰다.

온서연은 육경찬이 여자를 품에 안고 호텔로 들어가 체크인을 하고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것까지 전부 지켜보았다.

휴대폰을 꺼내 육경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가기 무섭게 전화가 끊기더니 곧바로 두 글자의 답장이 왔다.

[바빠]

마침표조차 찍을 여유도 없는 듯했다.

순간 온서연은 살점 하나 없는 해골이 된 기분이었다. 내뱉는 목소리조차 바람 빠진 듯 무기력했다.

외도 사실은 명백했다. 그런데 ‘유산까지 시켰다’는 건 도대체 무슨 뜻일까?

...

집으로 돌아온 온서연은 굳게 닫혀 있던 아기방 문을 열었다. 임신 기간 먹다 남은 약과 영양제를 모조리 챙겨 병원으로 향했다.

한밤중의 찬 바람이 매섭게 불었지만 온서연은 병원 입구에 밤새도록 멍하니 앉아 있었다.

의사가 출근하자마자 곧장 물건들을 건네며 성분 검사를 의뢰했다.

“온서연 씨, 이 병에 든 건 지금은 국내에서 퇴출된 만성 낙태약입니다. 하지만 약효가 약해 깨끗하게 지워지지 않아 자궁 소파술을 또 받아야 합니다.”

“아이를 원치 않으셨다면 정상적인 유산 수술을 받으셨어야지, 이런 불법적인 약을 드시면 안 됩니다. 만에 하나 과다 출혈이라도 일어나면 고생하는 건 본인입니다.”

병원에서 걸어 나오는 온서연은 산송장이 따로 없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맨발로 칼날 위를 걷는 것처럼 너무도 아파 눈앞이 캄캄해졌다.

유산하던 그날의 상황이 눈앞에 생생하게 스쳐 지나갔다.

자신의 몸에서 따뜻한 피가 흘러나오는 것을 똑똑히 지켜보았고 의사는 아이가 이미 잘못되었으니 당장 수술해야 한다고 했다.

차가운 기계가 그녀의 몸속으로 파고들어 고기 분쇄기처럼 자궁 안을 헤집었다. 아직 형태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그녀의 아이를 부수어 끄집어냈다.

온서연은 수술실에서 고통에 몸부림치며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지옥이 따로 없었다.

그런데 이 지옥 같은 고통이 고작 육경찬이 ‘공주’에게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니.

온서연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억울함, 절망감, 그리고 원망이 한꺼번에 밀려와 몸을 부들부들 떨며 오열했다. 육경찬을 갈기갈기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심정이었다.

“사모님? 괜찮으세요?”

온서연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눈앞의 남자를 올려다봤다.

정장 차림에 소매를 살짝 걷어 올렸고 손목에는 명품 시계를 차고 있었다. 팔에 슈트 재킷을 걸친 모습이 나른하면서도 우아해 보였다.

그는 육경찬이 다니고 있는 회사 배원 그룹의 대표 배도현이었다.

6개월 전, 배도현이 유람선에서 생일파티를 열었을 때 육경찬이 온서연을 데려갔었다.

객실에서 화장을 고치고 있는데 술에 취한 배도현이 방을 잘못 들어온 적이 있었다.

사람을 착각한 배도현은 그녀를 벽으로 밀어붙인 채 독한 여자라며 강제로 입을 맞췄다.

온서연은 그 일을 감히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그리고 일주일 뒤 육경찬이 승진했다. 이 순간 온서연의 머릿속에 육경찬이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내가 배원 그룹 고위직에 올라갈 수 있는지 없는지는 전부 배 대표님 말 한마디에 달려있어.”

온서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극도로 어두운 생각 하나가 뇌리를 스쳤다.

‘쓰레기 같은 놈을 죽이려면 일단 내 손에 딱 맞는 칼이 필요해.’

“사모님?”

“괜찮아요. 요즘 잠을 통 못 자서 병원에 좀 와봤어요.”

그런데 자리에서 일어서려다 갑자기 발목을 삐끗한 바람에 몸이 앞으로 쏠렸다.

“조심해요!”

배도현이 재빠르게 그녀를 잡고 단단한 팔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은은한 우드 향이 그녀를 감쌌다.

“발목을 삐었어요?”

온서연이 먹물처럼 새까만 배도현의 눈동자를 올려다봤다.

“모르겠어요. 조금 아프네요.”

그녀는 배도현의 부축을 받아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발목을 살살 돌려보았다. 그때 배도현이 다시 물었다.

“육경찬 씨는요? 왜 같이 오지 않았나요?”

온서연이 가늘고 하얀 손으로 눈가에 맺힌 눈물을 훔치더니 차분한 말투로 대답했다.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겼다며 어젯밤에 야근하러 갔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어요.”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고 있던 남자의 손에 힘이 살짝 들어갔다. 깊고 검은 눈동자에 놀란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온서연이 도리어 물었다.

“대표님은 이렇게 아침 일찍 병원엔 어쩐 일이신가요? 병문안이신지 아니면...”

“개인적인 일이 좀 있어서요.”

“아... 그럼...”

배도현이 불쑥 한 마디를 덧붙였다.

“볼일 다 끝나서 막 가려던 참이었어요.”

온서연이 2초 정도 멈칫했다.

옆으로 늘어뜨린 손으로 치맛자락을 꽉 쥔 채 곧 내뱉을 말에 긴장하여 마른침을 삼켰다.

배도현이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두 눈에 스쳐 지나간 희미한 빛에 이유 모를 매혹적인 기운이 서려 있었다.

온서연이 흠칫했다가 입을 열었다.

“대표님, 실례가 안 된다면 저 좀 집에 데려다주실 수 있을까요? 택시를 타고 왔는데 출근 시간대라 다시 잡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서요. 그리고 발목도 좀 아프고...”

그녀는 쉼 없이 말을 쏟아냈다. 눈빛에 결연한 용기가 깃들어 있었고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쾅거렸다.

“그래요. 알았어요.”

정적이 감도는 공기 속 남자의 목소리가 뚜렷하고 부드러웠다. 깃털이 심장을 간지럽히는 것처럼.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봄밤, 젖어들다   제30화

    그런데 정작 그 사람만은 기억하지 못했다.참 우스운 일이었다....온서연이 집으로 돌아와 막 문을 열고 들어가자 육경찬이 곧장 달려와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서연아, 어디 갔었어? 한참 찾았잖아. 전화도 안 받고. 진짜 놀라 죽는 줄 알았어.”온서연은 담담하게 육경찬을 밀어내고 고개를 숙여 슬리퍼를 찾았다.10여 초쯤 찾다가 그녀는 어제 낡은 슬리퍼를 자신이 직접 버렸다는 사실이 떠올랐다.육경찬은 오늘 슬리퍼를 새로 사겠다고 했지만 결국 사 오지 않았다.온서연은 신발을 벗고 맨발로 거실 안으로 들어갔다.“뭐가 그렇게 무서워? 설마 네가 다른 여자랑 잤다고 내가 자살이라도 할까 봐?”“서연아, 내가 어떻게 설명해야 믿을 건데? 나 진짜 누군가한테 당한 거라니까.”온서연은 소파에 앉아 가방에서 미리 준비해 둔 이혼 합의서를 꺼냈다.“내 눈으로 네가 다른 여자랑 침대에 누워 있는 걸 봤어. 그 여자한테 줄 돈도 내가 냈고. 그것까지 기억 안 나는 건 아니지?”“남편이 그런 짓을 하는 걸 참고 넘어갈 아내는 없을 거야. 나도 마찬가지고.”온서연은 이혼 합의서를 테이블 위에 놓았다.“육경찬. 우리 결혼은 여기까지야.”육경찬의 시선이 테이블 위의 종이에 박혔다.이혼 합의서라는 글자가 눈을 찌르는 것 같았다.이혼?이혼하면 온서연은 다른 사람의 여자가 될 것이다.어쩌면 곧바로 그 남자에게 갈 수도 있었다.육경찬은 뒤의 조건은 읽어 보지도 않은 채 합의서를 집어 들고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난 절대 이혼 안 해. 너랑 결혼한 날부터 이혼 같은 건 생각해 본 적도 없어.”육경찬은 온서연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꼭 붙잡았다.“서연아, 난 너를 사랑해. 내 마음엔 너 하나뿐이야.”“내가 지난 몇 년 동안 너한테 얼마나 잘했는지 네가 잘 알잖아.”“이번에는 내가 방심해서 누군가한테 당한 거야. 다시는 이런 일 없게 할게.”“네가 얼마나 상처받았는지 알아. 때려도 되고 욕해도 돼. 뭐든 다 해도 돼.”“이혼만 하지 말자. 네가

  • 봄밤, 젖어들다   제29화

    배도현의 짙은 눈동자에 미세한 빛이 일렁였다.그는 수많은 감정이 뒤엉켜 출렁이는 듯한 눈빛으로 온서연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 뜨겁고 노골적인 시선은 마치 그녀를 유혹하는 것 같았다.온서연은 속으로 생각했다.‘남자 머릿속에 들어 있는 게 결국 거기서 거기 아닌가? 나와 배 대표님은 처음부터 거래 관계였으니 굳이 추측할 필요도 없어.’온서연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배도현의 귀 양옆을 손으로 짚고, 몸을 숙여 그에게 키스했다.배도현의 눈가에 웃음이 스쳤지만 곧 고개를 돌려 피했다.“감기 걸린 사람한테도 키스해? 옮을까 봐 안 무서워?”김이 빠진 온서연은 머쓱한 얼굴로 몸을 바로 세웠다.“정말 이상한 사람이네요. 키스하라는 것도 대표님이고, 막상 하려니까 피하는 것도 대표님이네요.”“내가 언제 키스하라고 했는데?”“그...”‘그 눈빛이 딱 그런 뜻이면서, 흥.’배도현은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 듯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밥 먹을래.”온서연은 죽그릇을 들어 그의 손 앞으로 내밀었다.하지만 배도현은 앉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온서연은 숟가락으로 죽을 한술 떠서 입으로 살짝 불어 식힌 뒤 그의 입가에 가져갔다.배도현은 그녀가 내민 숟가락으로 죽을 받아먹었다.그러면서도 그의 눈빛은 여전히 온서연을 향하고 있었다.“맛있네.”온서연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지만 일부러 당당한 척 말했다.“당연하죠. 제 비법 레시피예요. 밖에서는 못 사 먹어요.”배도현의 기분이 순식간에 다시 가라앉았다.“누구 먹이려고 개발한 비법인데?”온서연이 얼른 대답했다.“저요. 예전에 다른 사람이 해 준 걸 한 번 먹었는데 맛이 너무 인상 깊어서, 기억나는 맛대로 만들어 본 거예요.”그 맛은 어떻게 해도 잊을 수가 없었다.“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제가 입원했을 때 보내 주신 죽도 이거랑 맛이 꽤 비슷했어요.”“기 비서님한테 어디서 산 건지 물어본다는 걸 깜빡했네요. 다음에는 직접 가서 먹어 봐야겠어요.”배도현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반찬도 좀 줘.”“아,

  • 봄밤, 젖어들다   제28화

    온서연은 멈칫했다.“배 대표님이 아파요?”“네. 교통사고 후에 회복이 완전히 되지 않아서 원래도 몸이 조금 약한 편이었는데 요즘 수면도 식사도 전부 불규칙했고, 술자리에서 평소보다 술도 많이 드셨어요. 결국 오늘 아침부터 열이 났고요.”온서연은 기태윤을 따라 차 쪽으로 걸어가며 물었다.“병원에는 가셨어요?”“아니요. 대표님 성격이 워낙 고집스러워서 병원에 가시는 걸 거부합니다. 그래서 제가 서연 씨께 부탁드릴 수밖에 없었어요.”기태윤이 차 문을 열어 주었다.온서연은 멍하니 차에 올라탔다.‘내가 간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어? 의사도 아닌데.’...온서연은 차를 타고 부두까지 간 뒤 다시 배를 타고 시내로 돌아왔다.이동만 두 시간 가까이 한끝에 온서연은 마침내 로즈 하우스에 도착했다.그녀는 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두 번 눌렀지만 열리지 않았다.“기 비서님, 문이 잠긴 거예요? 안 열리는데요.”기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대표님이 잠그라고 하셨어요.”“왜요? 대표님은 안에 있잖아요.”“아마 이런 식으로라도 누군가의 관심을 끌고 싶으셨던 것 같네요. 그런데 지난 이틀 동안 저 말고는 하우스에 드나든 사람이 없었어요.”기태윤이 잠시 말을 멈췄다.“결국... 대표님 혼자 안에 갇혀 계신 셈입니다.”온서연은 기태윤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다 참지 못하고 물었다.“대표님은 늘 이렇게 신경질적이었나요?”기태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대표님은 침실에 계십니다. 약은 침대 옆 탁자에 있고요. 주방에 식재료도 넉넉합니다. 필요하신 게 있으면 저를 불러 주세요.”“알겠어요.”온서연은 2층으로 올라가 침실로 들어갔다.방 안은 고요했다.그녀는 발소리를 죽여 침대 옆으로 다가갔다.배도현은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는데 입술은 핏기 없이 하얬다.온서연이 손바닥을 그의 이마에 대 보았다. 놀랄 만큼 뜨거웠다.머리맡에 놓인 약은 한 알도 손대지 않은 상태였다.온서연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이 정도면 자학이 취미

  • 봄밤, 젖어들다   제27화

    방 안에 있던 여자가 비명을 지르며 이불을 끌어당겨 몸을 가렸다.육경찬은 여전히 그 여자의 손을 붙잡은 채 입으로 계속 한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서연아, 온서연.”탁.조명이 켜졌다.갑자기 쏟아진 밝은 빛에 육경찬이 눈을 가리며 얼굴을 찌푸렸다.윤예린은 지나가던 직원이 들고 있던 물컵을 낚아채 그대로 육경찬의 얼굴에 물을 끼얹었다.그제야 육경찬은 조금 정신을 차렸다.“너...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윤예린은 화가 나 온몸을 떨었다. 이를 악물자 눈가의 근육까지 파르르 떨렸다.“육경찬, 이제야 네 진심을 알겠네.”둘은 겨우 한 번 다퉜을 뿐인데 육경찬은 곧바로 다른 여자와 침대에 누웠다. 심지어 입으로 온서연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윤예린은 우스운 꼴이 되고 말았다.윤예린은 울음을 터뜨리며 밖으로 뛰쳐나갔다.육경찬은 황급히 일어나려 했지만, 온서연이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순간 그는 다시 침대 위로 주저앉아 허겁지겁 옷을 두어 벌 걸친 뒤, 온서연 앞으로 달려가 그녀를 붙잡으려 했다.온서연이 두 걸음 뒤로 물러서자 육경찬은 허공을 짚고 바닥에 넘어졌다.“서연아, 서연아, 제발 내 말 좀 들어 봐. 나 함정에 빠진 거야.”온서연은 고개를 숙여 그를 바라봤다. 그녀의 눈에는 아픔과 상처가 어린 듯했다.“함정이라고? 윤 팀장님은 방송국에서 수이도까지 널 찾아왔고, 네 침대에는 다른 여자가 누워 있었어.”“그전에는 구 부사장님 집에서 또 다른 여자랑 전화하는 것도 봤고. 육경찬, 밖에 여자가 대체 몇 명이나 있는 거야? 그 여자들도 전부 누가 널 함정에 빠뜨리려고 보낸 거야?”육경찬이 다급하게 말했다.“진짜 다른 여자는 없어. 내 마음에는 너 하나뿐이야. 난 이 여자가 누군지도 몰라. 분명 술에 취해서 널 기다리고 있었는데, 왜 이렇게 됐는지 나도 모르겠어.”그는 침대 위 여자를 노려봤다.“당신 대체 누구야? 누가 내 방에 들어오라고 했어?”여자는 느긋하게 옷을 챙겨 입으며 코웃음을 쳤다.“육경찬 씨, 볼일 다 봐 놓고 인

  • 봄밤, 젖어들다   제26화

    육경찬은 윤예린이 근처에서 몰래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지금 윤예린은 육경찬을 손에 넣으려고 작정했으니 예전처럼 살살 달래 가며 비위를 맞출 필요도 없었다.말을 돌려서 해도 알아듣지 못한다면 이참에 육경찬과 온서연이 함께 있는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게 하면 됐다.자신에게는 윤예린이 없어도 온서연이 있다는 걸 알게 하면 그만이니까.그래도 윤예린이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그런데 분위기가 달아오르자 사람들이 연달아 술을 권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육경찬에게 취기가 올랐다.온서연은 그를 부축해 밖으로 데리고 나가 바람을 쐬게 했다.“직원한테 꿀물 한 잔 달라고 해 올게.”“나 안 취했어.”육경찬은 온서연을 다시 끌어당겨 품에 안고, 턱을 그녀의 목덜미에 묻고 가볍게 비볐다.“서연아, 가지 마. 나 두고 가지 마.”온서연이 육경찬의 손을 떼어 내고 그를 의자에 앉혔다.“여기서 기다려.”온서연이 밖으로 나오자 조연희가 물 한 잔을 건넸다.“정말 이렇게까지 할 거야? 이제 시작하면 되돌릴 수 없어.”온서연이 나지막이 말했다.“선배님. 그 사람은 선배님을 속이고 망가뜨렸고, 저도 속이고 해쳤어요. 그런데도 우리가 마음 약해져야 해요?”조연희가 한숨을 쉬었다.“온서연, 걱정하지 마. 난 오늘 일 한마디도 밖에 안 할 테니까.”온서연은 꿀물을 들고 돌아가 육경찬에게 건네며, 반 잔 정도 마시게 했다.그리고 그를 2층 객실까지 부축해 데려간 뒤에야 조연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객실 안.시간이 조금 지나자 육경찬은 온몸이 점점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그는 넥타이를 풀어 던지고 정장 재킷도 바닥에 벗어 던졌다.육경찬은 비틀거리며 일어나 물을 마시러 나가려 했다.그런데 문을 여는 순간 부드러운 여자의 몸이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육경찬은 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서연아.”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온서연의 아리따운 모습만 가득했다.대학교 교정을 함께 걷던 온서연, 그를 보며 환하게 웃던 온서연, 결혼식에서 영원을 맹세하던

  • 봄밤, 젖어들다   제25화

    온서연이 방송국으로 돌아오자마자 고준우와 민하린이 그녀를 옆으로 끌고 갔다.“오늘 윤 팀장님, 기분이 완전 안 좋아. 조심해.”온서연이 웃으며 물었다.“왜?”민하린이 두 손으로 턱을 감싸며 연달아 한숨을 쉬었다.“화연 푸드 사건이 이제는 도저히 숨길 수 없게 됐잖아. 그래서 난리 난 거지.”“나만 그런 게 아니라 준우도 돌아오자마자 엄청 깨졌어.”고준우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깨지면 뭐 해. 오늘 식품 안전 보도가 나가고 인터넷이 뒤집혔는데.”“화연 푸드 뒤에 누가 있어서 이렇게 오랫동안 걸리지 않았냐는 말도 나오더라.”“뒤에 누가 있겠어? 그 사람이겠지.”세 사람이 소곤거리고 있을 때 양서희가 온서연을 사무실로 불렀다.“식품 안전 보도 잘 봤어. 다음에는 이걸 아예 연속 기획으로 만들어 보고 싶어. 네가 맡아.”“이틀 정도는 쉬면서 몸도 좀 추스르고, 자료도 모아서 기획 기사 초안 하나 써 와.”“네, 국장님. 알겠습니다.”온서연이 밖으로 나가려 하자 양서희가 다시 불렀다.“배 대표님 인터뷰 준비는 어떻게 돼 가?”“그게...”“배 대표님은 웬만해서 인터뷰 안 받는 분이야. 제대로 준비해야 해. 네가 잘해 내면 정규직 전환을 앞당기는 것도 생각해 볼게.”온서연의 눈빛이 반짝였다.그녀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감사합니다. 국장님.”온서연은 사무실을 나왔다가 표정이 잔뜩 굳은 윤예린과 마주쳤다.윤예린은 정성껏 화장으로 가리려 했지만, 눈에 가득 선 핏발은 감출 수 없었다.어젯밤 육경찬의 말이 꽤 큰 충격이었던 모양이다.예전의 조연희처럼 말이다.윤예린이 차갑게 말했다.“온서연, 축하해. 양 국장님한테 칭찬받았나 봐?”온서연이 공손하게 답했다.“윤 팀장님께서 이 취재를 맡겨 주신 덕분이에요. 아니었으면 제가 이렇게 처음부터 화면에 나갈 기회도 없었을 테니까요.”“윤 팀장님처럼 젊은 나이에 방송국 팀장까지 올라오신 분이면, 나중에 제일 먼저 메인 앵커 자리에 앉으실 수도 있겠네요.”윤예린이 차갑게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