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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Author: 유젠
배도현이 온서연을 부축해 차에 태웠다.

검은색 벤틀리가 외부의 모든 소음을 차단했고 차 안이 따뜻하고 고요했다.

온서연이 주변을 슬쩍 살폈다. 차 안에 그 어떤 여자의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사모님은 무슨 일을 하세요?”

배도현의 덤덤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졸업 전에 방송국 뉴스 앵커 제안을 받았어요.”

“강영 방송국 말인가요?”

“네. 하지만 연말에야 정규직으로 전환되어서 카메라 앞에 설 기회가 거의 없거든요. 그래서 주로 인터뷰 취재를 하고 있어요. 최근에는 몸이 좀 안 좋아서 며칠 휴가를 냈고요.”

“취재라...”

배도현이 그 단어를 곱씹었다.

“몸은 좀 어떠세요?”

온서연이 대답했다.

“거의 다 나았어요. 다음 주엔 휴가를 끝내고 출근할 생각이에요.”

배도현이 더 이상 묻지 않자 차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그때 온서연의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다. 절친 문나영의 전화인 것을 확인하고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서연아, 저녁에 시간 있어? 나랑 술자리 하나만 같이 가자. 나 취하면 네가 흑기사 좀 해줘.”

온서연이 웃으며 말했다.

“또 너희 아빠 회사 핑계 대고 네 짝사랑남한테 스폰서 붙여주려는 거지?”

문나영이 투덜거렸다.

“아니거든? 나 오늘 밤에 걔가 나오는 드라마 투자자들 싹 다 불렀어. 뭐 한울 그룹이니, 조안 그룹이니... 아휴, 만나서 얘기해. 얼른 준비하고 있어. 저녁에 데리러 갈게.”

온서연은 배도현을 힐끗 돌아보고는 다시 한번 물었다.

“장소는 어디야? 더 템포?”

“응, 맞아. VIP 룸이야.”

“알았어.”

온서연은 승낙한 뒤 전화를 끊었다.

“솔빛 아파트에 도착했어요.”

배도현이 차를 세우고 온서연에게 시선을 돌렸다.

“감사합니다, 대표님.”

딸깍 소리와 함께 안전벨트가 풀렸다.

온서연이 속을 알 수 없는 배도현의 눈빛에 넌지시 던지려던 미끼를 거두어들였다.

“집 안으로 모시지는 않을게요. 좀 쉬고 싶기도 하고 저녁에 또 나가봐야 해서요. 다음에 제가 커피 한잔 대접할게요.”

배도현이 눈썹을 살짝 치켜세우며 대답했다.

“그래요.”

...

온서연이 집으로 들어갔다.

현관문에 아직 떼지 않은 결혼 축하 장식이 눈에 띄게 거슬렸다.

그녀는 자신이 정성껏 가꿔온 아늑한 방 3개짜리 집 안을 둘러보았다. 육경찬의 옷이 반듯하게 다려져 있었고 집 안 구석구석에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육경찬이 프러포즈하던 날 너무 벅차서 밤을 꼬박 새웠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4년이라는 긴 연애의 끝은 거울 속에 비친 상처투성이에 두 눈이 퉁퉁 부은 여자의 모습뿐이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증오가 덩굴처럼 미친 듯이 뻗어 나갔다. 당장 오늘이라도 그 쓰레기보다도 못한 자식을 죽여버리고 싶었다.

그리고 손에 딱 맞는 그 칼이 과연 그녀의 미끼를 물어줄지 안 물어줄지는 오늘 밤이면 알게 될 것이다.

...

저녁.

온서연은 샤워를 마친 뒤 몇 달 동안 손대지 않았던 화장품을 꺼내 연하게 화장했다. 그리고 옷장에서 무릎까지 오는 연보라색 원피스를 골라 입었다.

온서연을 본 문나영이 눈을 반짝이며 그녀의 허리를 살짝 꼬집었다.

“역시 우리 과 여신이야. 너 뉴스 앵커가 되면 시청률 두 배는 거뜬히 뛸걸?”

“네 말대로 연말에 무사히 정규직으로 전환됐으면 좋겠어.”

...

차가 클럽 더 템포에 도착했다.

룸 문을 열고 들어선 온서연이 안을 쓱 훑어보다 소파 한가운데 앉아 있는 배도현을 발견했다.

이 남자의 외모는 정말이지 너무나도 빼어났다. 어두운 룸 안에서도 그의 얼굴 윤곽이 조각처럼 뚜렷했다.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고 있는 그의 미간에 약간의 짜증이 묻어났다. 주변 사람들이 아부하며 연신 술을 권했고 건배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짙은 담배 연기에 사레가 들린 온서연이 기침하자 배도현이 갑자기 고개를 들어 문 쪽을 쳐다봤다. 기침 탓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온서연과 두 눈이 딱 마주쳤다.

배도현의 입가에 미소가 살짝 새어 나왔다.

문나영이 온서연을 끌어당겨 배도현의 옆에 털썩 앉아 웃으면서 인사했다.

“대표님이 안 오시는 줄 알았어요. 비서님이 저녁엔 시간 없으시다면서 엄청 단호하게 거절하셨거든요.”

배도현이 두어 모금 피운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는 손을 들어 담배 연기를 휘휘 젓고 나서야 잔을 들고 문나영에게 시선을 향했다.

“원래 시간이 없었긴 했어요.”

그는 말을 마치고 2초가량 뜸을 들였다.

온서연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그때 배도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앞으로 자주 뵙도록 해요. 아버님께 안부 전해주세요, 문나영 씨.”

“알겠어요. 제가 먼저 한잔 올릴게요.”

문나영은 배도현과 잔을 부딪친 뒤 단숨에 들이켜고는 다른 사람들에게 술을 권하러 갔다.

배도현과 가까운 거리의 소파에 앉아 있던 온서연이 말했다.

“대표님, 또 뵙네요.”

배도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경찬 씨 말로는 술을 못 하신다던데 주스 어떠세요?”

육경찬의 이름을 들은 순간 온서연은 불쾌감이 확 밀려왔다.

“술 마실게요.”

배도현이 눈썹을 살짝 치켜세우더니 술을 한 잔 따라 그녀에게 건넸다.

“위스키예요.”

온서연이 한 모금 마시자마자 캑캑거리며 기침했다.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서 묵직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가 다시 물었다.

“주스로 바꿔 드릴까요?”

그녀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이거 마실 거예요.”

그때 손바닥이 허전해졌다.

배도현이 온서연의 손에서 술잔을 빼앗아 다른 잔으로 바꿔주었다.

“취향을 바꾸더라도 천천히 하셔야죠. 이건 너무 독해서 사모님한테 안 맞아요.”

술잔을 쥐고 있던 온서연의 손이 굳어졌다. 시선이 속을 알 수 없는 배도현의 짙은 눈동자와 부딪힌 순간 그의 암시를 알아차렸다.

거의 노골적인 암시라 모르는 게 더 이상했다.

온서연의 눈빛이 살짝 흔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배도현의 곁으로 더 바짝 다가앉았다.

한 손으로 소파를 짚고 다른 한 손으로 방금 빼앗겼던 테이블 위의 독주를 집으려 했다.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마셔본 적도 없는데 저한테 안 맞는지 대표님이 어떻게 아시죠? 제가 독한 걸 더 좋아할 수도 있잖아요.”

온서연은 잔을 다시 가져와서는 지지 않겠다는 듯 배도현을 똑바로 쳐다보며 잔에 담긴 독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목구멍부터 위장까지 불타는 듯한 작열감이 번져갔다.

그녀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가 이내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심장이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미친 듯이 뛰었다.

그때 손에 불쑥 뜨거운 온기가 닿았다.

배도현이 손으로 소파를 짚고 있던 온서연의 손을 누른 채 약간 몽롱해진 그녀의 두 눈을 응시했다.

“취했어요?”

온서연이 손을 빼내지 않고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아니요. 말짱해요.”

“제가 보기엔 아닌 것 같은데.”

오기가 발동한 온서연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럼 대표님은 어떻게 해야 말짱하다고 생각하시나요?”

배도현이 조금 더 다가갔다. 거의 입을 맞출 정도로 가까워졌다.

숨결이 오가는 사이 온서연은 배도현의 입에서 나는 술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이혼하고 싶으면 변호사를 찾아가고 복수하고 싶으면 심부름센터를 찾아가요. 유부녀라면 다른 남자와 거리를 두는 게 그게 말짱한 행동이죠.”

온서연이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혼해 봤자 그 인간이 빈털터리로 쫓겨나지도 않을 거고 사람을 써봤자 그 인간의 목숨을 뺏지는 못하잖아요.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말짱한 행동은 오늘 밤 여기서 저랑 바람피울 남자를 한 명 고르는 거예요.”

배도현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온서연은 배도현의 눈동자에 맺힌 감정을 포착해 내고는 아주 고혹적인 미소를 지어 보인 뒤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차가운 물로 손을 씻은 그녀는 세면대 앞에 잠시 서서 마음을 진정시킨 뒤 밖으로 나갔다.

문나영에게 얘기하고 먼저 돌아갈 생각이었다.

오늘 밤의 성과로도 그녀는 이미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여기서 더 자극했다가는 역효과가 날 것 같았다.

문을 열었을 때 밖에 배도현이 서 있었다.

“대표님, 여긴 여자 화장실인데요.”

“알아요.”

배도현이 한 걸음씩 다가오더니 온서연을 다시 화장실 안으로 몰아넣고는 문을 닫아 잠가버렸다.

뒷걸음질을 치던 온서연은 허리가 차갑고 딱딱한 세면대에 닿자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대... 대표님, 지금... 뭐 하시는 거죠?”

배도현이 두 손으로 온서연의 양옆을 짚고 눈썹을 치켜세운 채 약간 비웃는 듯한 눈빛으로 말했다.

“사모님이 절 유혹했을 때 이미 이 정도 각오는 했을 줄 알았는데 설마 제 착각이었나요? 저를 유혹하려던 게... 아니었어요?”

“그게...”

그렇게 생각하긴 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진도가 빠를 줄은 몰랐다.

“여기서 해도 상관없겠죠?”

그의 오른손이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타고 미끄러져 내려갔다. 따뜻한 손바닥이 그녀의 치맛자락 안으로 파고들었다.

배도현이 깊고 검은 눈동자로 온서연의 두 눈을 옭아매듯 빤히 응시하며 피할 틈을 주지 않았다.

긴장한 온서연이 마른침을 삼켰다.

남자의 손가락이 온서연의 허벅지에 닿은 순간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 깜빡거리는 남편이라는 두 글자가 유독 눈에 거슬렸다.

“사모님, 지금 후회해도 늦지 않았어요.”

온서연이 고개를 들어 배도현의 조롱 섞인 눈빛을 마주했다. 물기를 머금은 그녀의 두 눈에 깊은 원망이 서려 있었다.

“저한테도 이름이 있어요.”

그녀는 미친 듯이 울려대는 휴대폰을 세면대 위에 올려두고는 그냥 내버려 두었다.

배도현이 장난스럽게 입꼬리를 올리며 그녀의 이름을 또박또박 불렀다.

“온서연.”

온서연도 지지 않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배도현.”

칠흑처럼 어두운 배도현의 눈빛에 위험한 기운이 감돌았고 목소리마저 한층 잠겨 있었다.

“방금 뭐라고 했어요?”

“배도현.”

배도현이 달싹이는 온서연의 연분홍빛 입술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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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경찬은 윤예린이 근처에서 몰래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지금 윤예린은 육경찬을 손에 넣으려고 작정했으니 예전처럼 살살 달래 가며 비위를 맞출 필요도 없었다.말을 돌려서 해도 알아듣지 못한다면 이참에 육경찬과 온서연이 함께 있는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게 하면 됐다.자신에게는 윤예린이 없어도 온서연이 있다는 걸 알게 하면 그만이니까.그래도 윤예린이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그런데 분위기가 달아오르자 사람들이 연달아 술을 권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육경찬에게 취기가 올랐다.온서연은 그를 부축해 밖으로 데리고 나가 바람을 쐬게 했다.“직원한테 꿀물 한 잔 달라고 해 올게.”“나 안 취했어.”육경찬은 온서연을 다시 끌어당겨 품에 안고, 턱을 그녀의 목덜미에 묻고 가볍게 비볐다.“서연아, 가지 마. 나 두고 가지 마.”온서연이 육경찬의 손을 떼어 내고 그를 의자에 앉혔다.“여기서 기다려.”온서연이 밖으로 나오자 조연희가 물 한 잔을 건넸다.“정말 이렇게까지 할 거야? 이제 시작하면 되돌릴 수 없어.”온서연이 나지막이 말했다.“선배님. 그 사람은 선배님을 속이고 망가뜨렸고, 저도 속이고 해쳤어요. 그런데도 우리가 마음 약해져야 해요?”조연희가 한숨을 쉬었다.“온서연, 걱정하지 마. 난 오늘 일 한마디도 밖에 안 할 테니까.”온서연은 꿀물을 들고 돌아가 육경찬에게 건네며, 반 잔 정도 마시게 했다.그리고 그를 2층 객실까지 부축해 데려간 뒤에야 조연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객실 안.시간이 조금 지나자 육경찬은 온몸이 점점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그는 넥타이를 풀어 던지고 정장 재킷도 바닥에 벗어 던졌다.육경찬은 비틀거리며 일어나 물을 마시러 나가려 했다.그런데 문을 여는 순간 부드러운 여자의 몸이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육경찬은 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서연아.”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온서연의 아리따운 모습만 가득했다.대학교 교정을 함께 걷던 온서연, 그를 보며 환하게 웃던 온서연, 결혼식에서 영원을 맹세하던

  • 봄밤, 젖어들다   제25화

    온서연이 방송국으로 돌아오자마자 고준우와 민하린이 그녀를 옆으로 끌고 갔다.“오늘 윤 팀장님, 기분이 완전 안 좋아. 조심해.”온서연이 웃으며 물었다.“왜?”민하린이 두 손으로 턱을 감싸며 연달아 한숨을 쉬었다.“화연 푸드 사건이 이제는 도저히 숨길 수 없게 됐잖아. 그래서 난리 난 거지.”“나만 그런 게 아니라 준우도 돌아오자마자 엄청 깨졌어.”고준우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깨지면 뭐 해. 오늘 식품 안전 보도가 나가고 인터넷이 뒤집혔는데.”“화연 푸드 뒤에 누가 있어서 이렇게 오랫동안 걸리지 않았냐는 말도 나오더라.”“뒤에 누가 있겠어? 그 사람이겠지.”세 사람이 소곤거리고 있을 때 양서희가 온서연을 사무실로 불렀다.“식품 안전 보도 잘 봤어. 다음에는 이걸 아예 연속 기획으로 만들어 보고 싶어. 네가 맡아.”“이틀 정도는 쉬면서 몸도 좀 추스르고, 자료도 모아서 기획 기사 초안 하나 써 와.”“네, 국장님. 알겠습니다.”온서연이 밖으로 나가려 하자 양서희가 다시 불렀다.“배 대표님 인터뷰 준비는 어떻게 돼 가?”“그게...”“배 대표님은 웬만해서 인터뷰 안 받는 분이야. 제대로 준비해야 해. 네가 잘해 내면 정규직 전환을 앞당기는 것도 생각해 볼게.”온서연의 눈빛이 반짝였다.그녀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감사합니다. 국장님.”온서연은 사무실을 나왔다가 표정이 잔뜩 굳은 윤예린과 마주쳤다.윤예린은 정성껏 화장으로 가리려 했지만, 눈에 가득 선 핏발은 감출 수 없었다.어젯밤 육경찬의 말이 꽤 큰 충격이었던 모양이다.예전의 조연희처럼 말이다.윤예린이 차갑게 말했다.“온서연, 축하해. 양 국장님한테 칭찬받았나 봐?”온서연이 공손하게 답했다.“윤 팀장님께서 이 취재를 맡겨 주신 덕분이에요. 아니었으면 제가 이렇게 처음부터 화면에 나갈 기회도 없었을 테니까요.”“윤 팀장님처럼 젊은 나이에 방송국 팀장까지 올라오신 분이면, 나중에 제일 먼저 메인 앵커 자리에 앉으실 수도 있겠네요.”윤예린이 차갑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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