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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Author: 유젠
배도현이 한참 동안 온서연을 빤히 쳐다보더니 그녀의 손에 술잔을 쥐여주었다.

“이게 부드러우니까 한번 맛봐요.”

온서연이 조명 아래서 잔을 유심히 살폈다가 잔의 방향을 살짝 돌렸다.

그러고는 배도현의 입술이 막 닿았던 자리에 자신의 붉은 입술을 포개어 가볍게 한 모금 마셨다.

그 모습에 그가 침을 꿀꺽 삼켰다.

온서연이 잔을 배도현에게 돌려주며 불쑥 말했다.

“경찬이가 잔을 가지러 간 지 한참이 지난 것 같은데.”

바로 그때 와인 셀러 안의 스피커를 통해 육경찬의 다정하고 비위 맞추는 듯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당연히 보고 싶지. 오늘 술자리가 있어서 그래. 좀 늦게 갈게, 응?”

“착하지? 지금은 정말 자리를 비울 수가 없어. 오늘 밤엔 꼭 갈게. 약속해.”

그와 내연녀의 통화 내용이 토씨 하나 빠지지 않고 스피커를 타고 연회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

통화 내용을 귀에 담는 온서연의 가슴은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했지만 눈빛은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녀가 빤히 쳐다보자 배도현이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온서연 씨가 확실히 흥미로운 여자이긴 하네요.”

온서연이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

“이 정도 흥미면 대표님께서 저 사람을 한동안 찬밥 신세로 만드시기엔 충분한가요?”

배도현이 와인을 한 모금 머금었으나 목울대가 움직이지 않았다. 그 한 모금을 입안에 머금고 삼키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눈치 빠른 온서연이 먼저 배도현의 목을 끌어안고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배도현은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어떻게 나오는지 기다리는 듯했다.

온서연은 남자의 입술 위를 맴돌며 부드럽게 빨아들이다가 새끼 고양이처럼 그의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면서 서서히 입술 사이를 파고들었다.

순간 배도현이 그녀의 목덜미를 거칠게 감싸 쥐더니 입안의 와인을 강압적으로 밀어 넣었다.

그런데 온서연이 미처 다 받아내지 못한 바람에 붉은 와인이 입가를 타고 턱을 지나 목덜미까지 흘러내렸다.

그녀의 입술 사이로 참기 힘든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배도현이 들고 있던 와인잔을 바닥에 던지자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났다.

그는 온서연의 허리를 끌어당겨 와인 진열대 뒤로 밀어붙이고는 그녀의 입술을 거칠게 집어삼켰다.

온서연은 그가 멋대로 헤집도록 내버려 두었다.

밖에서 발소리가 들려오고 나서야 배도현이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러고는 엄지손가락으로 입가에 번진 립스틱 자국을 닦아줬다.

배도현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

“안쪽에 화장실이 있으니까 가서 좀 정리해요.”

“그 사람은요...”

“남편의 프로젝트는 부사장한테 넘길게요.”

온서연이 재빨리 화장실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는 찰나 육경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표님, 우리 와이프 어디 있나요? 방금 그건 오해예요.”

순간 복수의 쾌감이 가슴 깊은 곳에서 끓어올랐다.

온서연이 거울 앞에 서서 떨리는 손가락으로 엉망이 된 입술을 닦았다.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새어 나왔다.

몇 초 뒤 화장실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육경찬이 당황한 목소리로 외쳤다.

“온서연, 문 좀 열어봐. 내 설명 좀 들어줘, 응? 아까 그거 진짜 오해야.”

온서연이 문을 열고 나왔을 때 배도현은 이미 와인 셀러를 떠나고 없었다.

“오해? 딴 여자 달래주는 소리를 내 귀로 똑똑히 들었는데 무슨 오해?”

육경찬이 다급하게 변명했다.

“아니야. 엄마랑 통화한 거라니까? 못 믿겠으면 통화 기록 봐봐. 우리 엄마 어떤 사람인지 너도 알잖아. 평생 혼자 사셔서 외로우면 술 드시는 거. 오늘 밤에도 취해서 전화로 울고불고 난리를 치셨어.”

그녀가 코웃음을 쳤다.

“어머님이라고? 육경찬,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할 수 있어? 부사장님하고 오늘 이 자리에 온 사람들한테 물어봐. 그 말을 믿을 수 있는지.”

온서연이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홀로 별장을 나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육경찬도 집으로 돌아왔다.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면서 손에 한정판 명품 가방을 들고 있었다.

그는 온서연을 껴안고 끊임없이 사과하며 구선재가 자신의 사생활을 문제 삼아 프로젝트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버렸다고 했다.

“여보, 회사에서 날 억울하게 오해하는 건 상관없어. 내가 제일 신경 쓰이는 건 너의 마음이야. 우리 이제 막 결혼했어. 널 사랑하기도 바쁜 내가 어떻게 바람을 피워? 내가 어떻게 해야 내 말을 믿어줄 건데?”

온서연은 육경찬에게서 나는 지독한 술 냄새에 눈이 다 시렸다. 절대 인정하지 않는 육경찬의 꼴을 보니 그저 가소로울 따름이었다.

‘내연녀 때문에 자기 핏줄까지 죽였으면서 이제 와서 이딴 순애보 연기는 누구 보라고 하는 짓인지, 참.’

오늘 밤 벌어진 일로 온서연의 짐작은 확신이 되었다.

무슨 이유에서든 육경찬은 당장 그녀와 이혼할 생각이 없었고 양다리를 걸치며 상황을 모면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온서연이 눈가에 맺히지도 않은 눈물을 닦아내는 척하며 손을 내밀었다.

“네가 결혼 전에 모아뒀던 카드에 10억쯤 있지?”

육경찬이 곧바로 양손으로 은행 카드를 갖다 바쳤다.

“있어. 네가 사고 싶은 거 다 사도 돼.”

“부부 재산 합의서 쓰자.”

“뭐?”

육경찬은 술이 확 깨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그건 왜?”

“결혼 전엔 간도 쓸개도 다 빼줄 것처럼 굴었잖아. 그런데 지금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집, 차, 적금까지 전부 네 명의야. 네가 마음이라도 바뀌면 난 빈털터리로 쫓겨나게 생겼어.”

“나한테 충성 맹세라도 하겠다며? 그럼 합의서 쓰고 재산을 내 명의로 돌려. 앞으로 자산 관리를 나한테 맡기면 네 말 이번 한 번은 믿어줄게.”

육경찬이 얼굴을 확 찌푸렸고 말투에도 불쾌함이 묻어났다.

“온서연, 우리 이제 막 결혼했는데 이만한 믿음도 없으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 넌 지금 내가 바람피웠다고 단정 짓고 있어. 내가 동의한다고 해도 내 마음을 진심으로 믿어주지 않을 거야.”

“이건 내 명의로 된 재산을 다 가로채겠다는 수작이잖아. 예전엔 이렇게 잔머리 굴리는 성격이 아니었는데 대체 누가 가르쳐 줬어? 문나영이야?”

온서연이 육경찬의 손을 매몰차게 쳐냈다.

“여기서 나영이가 왜 나와? 싫으면 관둬. 어차피 애도 잃었고 우리 사이에 믿음도 사라졌는데 뭐. 네 마음에 진짜로 딴 여자가 있는 거면 내일 당장 법원 가서 이혼해.”

“무슨 헛소리야? 네가 뭔데 이혼을 입에 올려?”

육경찬의 눈빛이 갑자기 날카로워지더니 온서연을 거칠게 끌어당겨 소파에 짓눌렀다.

“온서연, 넌 내 거야. 절대 이혼 안 해. 내가 너랑 어떻게 결혼했는데. 심지어 아이까지...”

처음 보는 육경찬의 모습에 온서연이 흠칫 놀랐다.

오랜 시간 알아 온 육경찬은 늘 다정했고 단 한 번도 이런 표정을 지은 적이 없었다.

온서연이 미간을 찌푸리고 그를 노려보았다.

“방금 뭐라고 했어? 아이까지 뭐?”

육경찬도 자신이 너무 흥분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다시 온서연의 손을 꽉 잡고 애원했다.

“네가 우리 아이를 가졌다가 유산까지 했잖아. 요새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잘 알아. 하지만 난 너랑 이혼할 생각 단 한 번도 한 적 없어. 널 처음 본 순간부터 평생을 함께하겠다고 다짐했단 말이야.”

온서연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육경찬이 결국 한발 물러섰다.

“이 집도 4억 정도 할 거야. 당장 내일 변호사 만나서 네 명의로 해줄게. 이러면 됐지?”

온서연도 단번에 모든 자산을 다 손에 넣을 수 있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기에 못 이기는 척 육경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

온서연이 샤워를 마치고 침실로 돌아왔을 때 술에 취한 육경찬은 이미 곯아떨어져 있었다.

그때 그의 휴대폰 화면이 갑자기 켜졌다.

‘공주’가 보낸 메시지였다.

[오늘 밤엔 안 오는 거야?]

온서연은 ‘공주’의 번호를 휴대폰에 저장한 뒤 다시 욕실로 들어갔다.

마스크팩을 붙이고 나와보니 탁자 위의 휴대폰이 번쩍거리며 새 메시지들이 연달아 도착하고 있었다.

[와이프 잠들었어? 빨리 나한테 와.]

[새 잠옷 샀단 말이야. 오늘 밤에 입고 보여줄게.]

징징 울려대는 진동 소리에 온서연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한 어둠이 바이러스처럼 미친 듯이 퍼져나갔다.

그녀는 육경찬의 휴대폰을 집어 들고 배도현의 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두 번 울리자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차갑고 무심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저예요.”

휴대폰 너머로 2초간의 정적이 흘렀다.

“무슨 일이죠?”

온서연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늘 밤 마셨던 그 와인, 이름이 뭔지 깜빡해서요.”

배도현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보르도 샤또 르 팽이에요. 올해 생산량이 적어서 드시고 싶어도 아마 구하기 어려우실 거예요.”

온서연이 자연스럽게 되물었다.

“그럼 대표님은 그 와인이 드시고 싶으실 때 주로 어디로 가세요?”

휴대폰 너머로 고요함이 흘렀고 그저 미세한 숨소리만 들려왔다.

이대로 배도현이 전화를 끊어버릴 거라고 생각하던 찰나 그의 의미심장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우리 집에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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