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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Author: 유젠
“대표님은 참 먹을 복도 많네요.”

온서연이 찬사를 보내더니 문득 이렇게 말했다.

“사실 방금 생각난 건데 우리 집에도 한 병 있거든요. 예전엔 잘 몰랐는데 오늘에서야 집에 있는 그 와인이 보르도 샤또 르 팽이라는 걸 알았네요. 이참에 따서 맛봐야겠어요.”

온서연이 서재로 걸어가 스피커폰을 켜고 휴대폰을 책상 위에 두었다. 그러고는 레드 와인을 꺼내 병을 따고 잔에 따랐다.

와인을 따르는 소리가 배도현의 귓가에 또렷하게 전해졌다.

곧이어 온서연이 한 모금 마시더니 의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밤에 마신 거랑 좀 다른 것 같네요.”

배도현의 목소리가 한결 가라앉았다.

“디캔팅해야 해요.”

그녀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 엄청 번거롭군요. 얼마나 디캔팅해야 오늘 밤과 같은 맛이 날까요?”

“20분이요.”

온서연이 아쉽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전 졸려서 20분이나 못 기다리겠어요. 만약 대표님께서 어느 날 이 와인이 드시고 싶어지시면 미리 말씀해 주세요. 제가 디캔팅하고 기다릴게요.”

“우리 집에도 있다고 분명히 말씀드렸는데요.”

온서연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들었어요. 그럼 제가 미리 말씀드릴게요. 대표님이 도착했는데 와인이 디캔팅이 덜 되어 있으면 안 되니까요.”

배도현의 숨결이 찰나의 순간 흐트러졌다.

“온서연 씨, 지금 본인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긴 해요?”

그녀가 되물었다.

“그럼 대표님은 오늘 밤 본인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아시나요?”

휴대폰 너머로 침묵이 흐르자 온서연이 웃음을 띤 목소리로 말했다.

“배도현 씨, 잘 자요.”

상대가 또 몇 초간 침묵하다가 말했다.

“다시는 육경찬 씨의 휴대폰으로 제게 전화하지 마세요.”

그러고는 온서연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온서연은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 배도현의 번호를 검색한 다음 친구 추가를 했다.

육경찬의 휴대폰에서 통화 기록을 지우고 휴대폰을 거실에 가져다 놓은 뒤에야 침실로 돌아와 잠을 청했다.

...

한밤중, 육경찬이 온서연을 깨웠다.

“여보, 나 위가 너무 아파.”

온서연은 눈도 뜨기 귀찮았다.

“따뜻한 물 좀 마셔, 그럼.”

“마셨는데도 계속 아파.”

온서연이 스탠드를 켜보니 육경찬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병원에 데려다줄게.”

그녀는 늑장을 부리며 치마를 골라 입고 머리까지 매만진 후에야 출발했다.

의사가 검사를 마친 뒤 말했다.

“급성 위장염입니다. 입원하셔야겠어요.”

온서연이 육경찬의 입원 절차를 밟아주었다.

“요 며칠 푹 쉬어. 일 생각은 하지 말고. 병이 더 심해지면 안 되니까.”

그녀의 다정한 얼굴을 본 육경찬은 그녀의 화가 다 풀렸다고 확신하고는 안심하며 눈을 감았다.

“여보, 앞으론 이혼하자는 말 다시는 하지 마. 난 너 잃고는 못 살아.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잘해줄게. 약속해.”

...

다음 날.

육경찬이 수액을 맞고 있는데 갑자기 회사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전화기 너머로 무언가 재촉하는 소리가 들렸고 전화를 끊은 육경찬이 도움을 구하는 눈빛으로 온서연을 바라보았다.

“여보, 서재에 서류가 하나 있는데 오늘 배 대표님이 고객 만날 때 쓰셔야 하거든. 대신 좀 가져다드릴 수 있을까?”

온서연이 고개를 들었다.

“나더러 가져다드리라고? 괜찮겠어?”

육경찬이 당장이라도 수액 바늘을 뽑아버릴 듯 초조해했다.

“대표님 지금 이미 고객을 만나러 가는 길이라 그쪽에서 왔다가 가져가면 늦어. 내가 만나는 장소 보내줄게. 네가 운전해서 가져다드리는 게 제일 빨라. 그냥 노크하고 들어가서 드리면 돼.”

“그래. 알았어.”

온서연이 가방을 들고 나섰다.

육경찬의 컴퓨터에서 원본 파일을 찾아 수치 몇 개를 수정한 뒤 다시 프린트해서 차를 몰고 출발했다.

...

육경찬이 보낸 주소는 전통 찻집이었다.

온서연이 룸을 찾아 노크했다.

“들어오세요.”

들어가자마자 배도현의 놀란 두 눈과 마주쳤다.

“대표님, 서류 가져왔습니다.”

오늘 그녀는 하얀 레이스 셔츠에 질감이 고급스러운 하늘색 미디스커트를 매치해 매끄러운 종아리를 적당히 드러냈다.

배도현의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온서연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웃으면서 말했다.

“배 대표님 비서들은 다방면으로 뛰어난 인재들이라던데 이 아가씨도 차를 좀 아는지 모르겠네요.”

남자가 찻잔을 테이블 한가운데로 밀며 그녀에게 차를 따르라는 눈치를 주었다.

온서연의 시선이 배도현에게 향했다. 그녀를 대신해 나설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녀가 가볍게 웃었다.

“조금 알긴 합니다. 어설프더라도 많이 이해해 주세요.”

온서연이 테이블로 다가가 찻잎 계량 용기에서 찻잎을 덜어내어 남자에게 찻잎의 형태와 빛깔을 감상하게 한 뒤 끓는 물로 찻잔을 데웠다.

길고 하얀 손가락으로 다기를 가볍게 돌리는 동작이 참 우아하고 여유로웠다.

찻잎을 넣은 뒤 온서연은 오른손으로 주전자를 들어 다관에 끓는 물을 부었다.

물 흐르는 소리가 어젯밤 술을 따르던 소리처럼 듣기 좋게 울려 퍼졌다.

“맛보세요.”

남자가 손을 뻗어 자연스럽게 온서연의 희고 보드라운 손등을 야릇하게 문질렀다.

“어딜 봐서 조금 안다는 거죠? 이 동작 몇 개만 해도 내 밑에 있는 애들은 6개월은 배워야 할 텐데.”

“과찬이십니다.”

온서연이 부드럽게 미소를 짓자 마음이 간질간질해진 남자는 자연스레 온서연을 자신의 곁으로 끌어당겼다.

“이 차 직접 먹여주면 더 향기롭겠죠?”

배도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변 대표님, 일단 사업 얘기부터 하시죠.”

“그래요, 그래요.”

변주환이 싱글벙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위에 있는 호텔 룸 카드 하나를 꺼내 온서연의 손바닥에 쥐여주었다. 온서연에 대한 흥미를 전혀 숨기지 않았다.

...

온서연이 병원으로 돌아와 병실 문 앞에 막 다다랐을 때 육경찬이 전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젯밤 일 나한테 타격이 커. 만약 지금 진짜 이혼이라도 하면 네가 내 결혼 생활을 망쳤다는 걸 인정하는 꼴밖에 더 돼? 난 네가 나 때문에 손가락질받는 거 원치 않아.”

“서연이야 당연히 날 믿지. 어젯밤에도 술에 잔뜩 취해서 나보고 떠나지 말라고 울며불며 매달리더라니까. 걔가 애를 잃어서 요즘 감정이 많이 예민해. 불쌍하니까 당분간은 좀 놔두려고.”

온서연이 문손잡이를 꽉 쥐었다. 당장이라도 뛰어 들어가 육경찬의 뺨을 후려치고 싶었다.

‘그 공주가 그렇게 안쓰럽고 지금 당장 나한테 잡힐 약점 하나 없다면서 왜 이혼하고 다시 결혼하지 않는 거야? 대체 무슨 꿍꿍이인 건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던 온서연은 저녁밥도 제대로 넘기지 못했다.

밤에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갈 때 온서연의 주머니에서 그 룸 카드가 떨어졌다.

변주환이 그녀에게 룸 카드를 건넬 당시 배도현이 그 모습을 전부 지켜본 게 틀림없었다.

배도현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무척 궁금해진 온서연은 차를 몰고 찻집으로 향했다.

밤이 깊어졌다.

찻집 밖에 걸린 등불이 어스름한 빛을 밝혔고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이 찻집은 가격대도 높고 환경도 일류인 데다 프라이버시가 잘 보장되어 많은 사람들이 사업 얘기를 나눌 때 즐겨 찾는 곳이었다. 예전에 육경찬도 온서연을 데리고 온 적이 있었다.

“손님, 예약하셨나요?”

온서연이 고개를 저으며 룸 카드를 내밀었다.

“오늘 여기서 이걸 주웠는데 여기 손님 물건인 것 같아서요.”

“가져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온서연이 찻집을 나오자마자 배도현을 발견했다.

그가 차 옆에 선 채 계단 위의 온서연을 빤히 보고 있었다. 짙은 눈망울에 속을 알 수 없는 감정이 일렁였다.

왠지 계속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온서연이 배도현에게 다가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대표님, 아침에 차 드셔놓고 밤에 또 오셨어요? 잠 못 주무시면 어쩌시려고요.”

“아침에 나한테 차를 안 내려줬어요.”

온서연이 미소를 잃지 않았다.

“변 대표님이 만진 이 손으로 우린 차는 굳이 드시고 싶지 않으실 텐데요.”

배도현의 표정이 무척이나 차분했다.

“씻었어요?”

그녀가 하얀 손을 내밀었다.

“손 세정제로 세 번이나 씻었어요.”

배도현의 눈가에 알아차리기 힘든 기쁨이 스쳐 지나가더니 찻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다시 한 잔 우려줘요.”

온서연은 그를 따라 위층으로 올라가 찻집 룸으로 들어갔다.

룸 안에 좌식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두 사람은 신발을 벗고 들어가 방석 위에 앉았다.

배도현이 한쪽 무릎만 세운 채 테이블 모서리에 비스듬히 기대어 나른한 표정으로 온서연이 여유롭게 차를 우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두컴컴한 방 안, 다기가 부딪히며 풍경 소리처럼 맑고 듣기 좋은 소리를 냈다.

고소한 차향이 피어오르고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온서연이 고개를 숙이자 옆머리에서 잔머리가 흘러내렸다.

창밖에서 밤바람이 불어온 순간 머리카락이 가볍게 흔들리며 바람결을 따라 그녀의 예쁜 얼굴에 달라붙었다가 다시 떨어졌다.

“서연 씨, 그 서류에 중요한 수치가 몇 개 틀려 있어서 육경찬 씨는 그것 때문에 강등될 거예요. 원래 연말쯤 회사 부사장으로 승진할 가능성이 있었는데 이젠 본부장 자리도 지키기 어려울 것 같아요.”

온서연이 조용히 차를 우려내어 배도현의 앞으로 찻잔을 밀어주었다.

“이 소식을 들으면 엄청 괴로워하겠네요.”

배도현이 차갑게 웃었다. 끝소리가 살짝 올라간 그의 목소리에 나른한 기운이 묻어났다.

“서연 씨는 어때요?”

“전 무척 기쁜데요.”

그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빤히 보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물은 건 어젯밤 그 키스 이후 어땠냐는 거예요.”

차를 마시려던 온서연이 멈칫하더니 고개를 들어 배도현을 바라봤다.

남자의 눈빛이 뜨겁게 달아올랐지만 목소리는 지극히 담담했다. 야릇한 말투라기보다는 명령에 가까웠다.

“이혼하고 나랑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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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봄밤, 젖어들다   제25화

    온서연이 방송국으로 돌아오자마자 고준우와 민하린이 그녀를 옆으로 끌고 갔다.“오늘 윤 팀장님, 기분이 완전 안 좋아. 조심해.”온서연이 웃으며 물었다.“왜?”민하린이 두 손으로 턱을 감싸며 연달아 한숨을 쉬었다.“화연 푸드 사건이 이제는 도저히 숨길 수 없게 됐잖아. 그래서 난리 난 거지.”“나만 그런 게 아니라 준우도 돌아오자마자 엄청 깨졌어.”고준우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깨지면 뭐 해. 오늘 식품 안전 보도가 나가고 인터넷이 뒤집혔는데.”“화연 푸드 뒤에 누가 있어서 이렇게 오랫동안 걸리지 않았냐는 말도 나오더라.”“뒤에 누가 있겠어? 그 사람이겠지.”세 사람이 소곤거리고 있을 때 양서희가 온서연을 사무실로 불렀다.“식품 안전 보도 잘 봤어. 다음에는 이걸 아예 연속 기획으로 만들어 보고 싶어. 네가 맡아.”“이틀 정도는 쉬면서 몸도 좀 추스르고, 자료도 모아서 기획 기사 초안 하나 써 와.”“네, 국장님. 알겠습니다.”온서연이 밖으로 나가려 하자 양서희가 다시 불렀다.“배 대표님 인터뷰 준비는 어떻게 돼 가?”“그게...”“배 대표님은 웬만해서 인터뷰 안 받는 분이야. 제대로 준비해야 해. 네가 잘해 내면 정규직 전환을 앞당기는 것도 생각해 볼게.”온서연의 눈빛이 반짝였다.그녀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감사합니다. 국장님.”온서연은 사무실을 나왔다가 표정이 잔뜩 굳은 윤예린과 마주쳤다.윤예린은 정성껏 화장으로 가리려 했지만, 눈에 가득 선 핏발은 감출 수 없었다.어젯밤 육경찬의 말이 꽤 큰 충격이었던 모양이다.예전의 조연희처럼 말이다.윤예린이 차갑게 말했다.“온서연, 축하해. 양 국장님한테 칭찬받았나 봐?”온서연이 공손하게 답했다.“윤 팀장님께서 이 취재를 맡겨 주신 덕분이에요. 아니었으면 제가 이렇게 처음부터 화면에 나갈 기회도 없었을 테니까요.”“윤 팀장님처럼 젊은 나이에 방송국 팀장까지 올라오신 분이면, 나중에 제일 먼저 메인 앵커 자리에 앉으실 수도 있겠네요.”윤예린이 차갑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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