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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Author: 유젠
바로 그때 배도현이 단호하게 손을 거두었다.

“하지만 전 남의 가정에 끼어드는 취미 같은 건 없어요.”

온서연의 치마 밑이 허전해졌다. 배도현이 그녀의 앞에서 보란 듯이 수도꼭지를 틀어 흐르는 물에 손을 꼼꼼하게 문질러 씻어냈다. 그리고 티슈를 뽑아 느릿느릿 물기를 닦았다.

구깃구깃해진 휴지를 쓰레기통에 툭 던져 넣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

다음 날.

온서연은 정오가 다 되어서야 일어났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배달 음식을 시킨 뒤 주방으로 가 꿀물을 한 잔 타 마셨다.

씻고 나온 그때 육경찬이 들어왔다. 손에 그녀가 시킨 배달 음식이 들려 있었다.

“이제 일어났어?”

“응. 어제 늦게 잤거든.”

온서연이 물었다.

“넌 어젯밤에 어디서 잤어?”

육경찬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회사. 어젯밤에 밤새워 야근했더니 엄청 피곤하네.”

예전이었더라면 온서연은 그를 걱정하면서 얼른 들어가 쉬라고 한 뒤 혼자 장을 봐서 밥을 차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육경찬을 힐끗 쳐다보기만 했다.

“아, 회사 나가면 피곤한 건 당연하지 뭐.”

육경찬이 미간을 찌푸렸다. 온서연에게서 어딘가 평소와 다른 분위기가 흘렀다.

“오늘 저녁에 부사장님 아들 돌잔치가 있어. 너도 같이 가자.”

온서연은 순간 마음이 아렸다.

“나 아이 잃은 지 얼마 안 됐는데 남의 애 돌잔치에 가라고?”

육경찬이 한숨을 내쉬며 다가가 온서연을 끌어안았다.

“이젠 한 달도 더 지났어. 계속 집에만 틀어박혀 있으면 안 돼. 삶은 계속되어야 하잖아. 서연아, 우리 앞으로 아이 또 가질 수 있을 거야. 내가 약속할게.”

온서연의 눈빛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예전에 육경찬의 이런 듣기 좋은 말들을 철석같이 믿은 바람에 이토록 비참한 꼴을 당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육경찬이 쳐놓은 다정함이라는 덫에서 빠져나오자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부사장 구선재는 가정적이기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구선재가 마련한 자리에는 다들 항상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참석하곤 했다.

연말에 회사의 부사장으로 승진하고 싶어 안달이 난 육경찬으로서는 당연히 온서연을 데리고 가서 금실 좋은 부부 행세를 하며 구선재의 앞에서 듬직하고 성실한 남편의 이미지를 심어주고 싶었을 것이다.

“같이 가자, 응? 그냥 기분 전환하러 간다고 생각해. 나도 다 널 생각해서 이러는 거야.”

온서연이 짧게 대답했다.

“알았어.”

‘못 갈 것도 없지. 어차피 망신당할 사람은 내가 아니니까.’

...

저녁.

온서연이 허리 라인을 강조하는 연하늘색 롱드레스로 갈아입고 육경찬과 함께 구선재의 별장으로 향했다.

역시 다들 부부 동반이었고 아이를 데리고 온 사람들도 있어 분위기가 무척 화기애애하고 시끌벅적했다.

아이들이 까르르 웃으며 뛰어가는 모습을 보던 온서연이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그때 육경찬의 휴대폰이 울렸다. 폰을 꺼내 확인하자마자 그의 눈빛이 살짝 흔들리더니 이내 온서연을 돌아보며 말했다.

“전화 좀 받고 올게.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온서연이 육경찬의 다정한 옆모습을 쳐다봤다. 물어보지 않아도 그 ‘공주님’일 게 틀림없었다.

2분 뒤 육경찬은 황급히 전화를 끊고는 온서연의 손을 잡고 구선재에게 다가갔다.

“부사장님, 축하드려요. 아이가 정말 예쁘더라고요. 눈매가 부사장님을 쏙 빼닮았어요.”

육경찬의 아부에 구선재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경찬 씨네 부부야말로 선남선녀던데? 두 사람의 아이가 태어나면 연예인을 시켜도 되겠어.”

온서연이 행여나 말실수라도 할까 봐 육경찬이 재빨리 선수를 쳤다.

“덕담 감사합니다. 어쩌면 올해 안에 좋은 소식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녀가 육경찬의 손을 쓱 뿌리쳤다.

“화장실 좀 다녀올게.”

그러고는 사람들을 피해 방송실로 걸어갔다. 그녀를 본 직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물었다.

“여사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온서연이 웃으며 말했다.

“이따가 특별 이벤트가 하나 있어서 소형 무선 마이크 좀 가지러 왔어요.”

“아, 네. 여기 있어요. 한 번 확인해 보세요. 이쪽이 전원이고 켜시면 자동으로 스피커랑 연결됩니다.”

“고마워요.”

온서연이 자그마한 마이크를 손에 쥐고 연회장으로 돌아갔다. 구선재가 육경찬의 어깨를 두드리며 한창 열띤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내가 배 대표님께 이미 경찬 씨 얘기 잘 드려놨어. 열심히 해봐. 연말에 좋은 일이 있을 거니까.”

육경찬의 두 눈이 번쩍 빛났다.

“배 대표님도 오셨어요?”

구선재가 웃으며 말했다.

“대표님도 방금 경찬 씨 얘기를 하시더라고. 경찬 씨가 술에 대해 좀 안다면서. 마침 제수씨도 왔네. 가자, 내가 인사시켜 줄게.”

구선재가 육경찬과 온서연을 데리고 지하 와인 셀러로 향했다.

어둑한 와인 셀러 안.

은은한 조명이 셀러 깊숙한 곳에 서 있는 배도현의 옆모습을 비춰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배도현이 와인 진열장 앞에 홀로 서서 와인잔에 담긴 검붉은 와인을 여유롭게 음미하고 있었다.

“대표님, 저희도 안 기다리시고 벌써 혼자 드시고 계셨어요?”

배도현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온서연을 쓱 훑고 지나갔다가 이내 거두어졌다.

“부사장님이 소장하신 술이 워낙 훌륭해서 참을 수가 없더군요.”

구선재가 웃으며 말했다.

“경찬 씨가 예전에 와이너리 프로젝트를 담당해서 저보다 아는 게 훨씬 많아요. 대표님 말동무가 되어드릴 수 있을 거예요.”

육경찬이 즉시 다가가 깍듯하게 인사했다.

“대표님과 와인을 음미할 수 있다니. 정말 영광입니다.”

구선재가 덧붙였다.

“그럼 천천히 마시세요. 전 손님들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요. 대표님, 필요하신 게 있으면 언제든 부르세요.”

그때 육경찬의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이 또다시 진동했다. 황급히 전화를 끊어버렸지만 5초도 지나지 않아 다시 진동했다.

육경찬의 안색이 눈에 띄게 굳어지더니 허둥지둥 답장을 보내기 시작했다.

배도현이 육경찬을 보며 말했다.

“여기엔 여분의 잔이 없군요.”

육경찬이 구세주라도 만난 듯 재빨리 대답했다.

“제가 금방 가져올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가 온서연의 손을 놓자 온서연이 그를 덥석 붙잡았다.

“넥타이가 비뚤어졌어.”

답장 보내기에 정신이 팔린 육경찬은 온서연이 넥타이를 매만지도록 놔두다가 이내 다급하게 그녀의 손을 떼어냈다.

“됐어, 됐어. 잔 가져올게. 대표님 오래 기다리시게 하면 안 돼.”

육경찬이 서둘러 자리를 떴다.

온서연이 돌아선 그때 그녀를 샅샅이 뜯어보는 배도현의 눈빛과 마주쳤다.

“방금 그 사람 주머니에 뭘 쑤셔 넣은 거죠?”

그녀가 새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방긋 웃었다.

“좋은 거요.”

배도현이 더 이상 캐묻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오늘은 머리 안 아파요?”

온서연이 2초간 멈칫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파요.”

“그 술이 독하다고 어제 분명히 말했는데. 너무 급하게 마셔서 그래요.”

그녀가 자연스럽게 맞받아쳤다.

“그럼 오늘은 좀 부드러운 와인으로 골라 마셔야겠어요.”

배도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술 고를 줄 알아요?”

“몰라요.”

온서연의 솔직한 대답에 배도현이 실소를 터뜨렸다.

“모르면서 뭘 고른다고.”

온서연이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진지한 말투로 말했다.

“그럼 대표님이 골라주실래요?”

그 말에 배도현이 가볍게 웃었다. 기분이 좋아서 웃는 건지, 비웃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사모님, 어제 제가 분명히 말씀드렸을 텐데요.”

“분명하진 않아요.”

온서연이 한 걸음 다가가 배도현의 짙게 가라앉은 눈동자를 빤히 올려다봤다.

“제가 어제 확실히 묻는 걸 깜빡했거든요. 대표님은 남의 결혼 생활에 끼어드는 것에 흥미가 없으신 건가요, 아니면 저한테 흥미가 없으신 건가요?”

배도현이 어두운 눈빛으로 온서연의 도발적인 두 눈을 응시했다.

“사모님이 제 눈에 들 거라고 자신하는 근거가 뭐죠?”

“왜 제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말을 돌리세요?”

그의 입가에 다소 불량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뭐, 약간의 흥미는 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세상에 널리고 널린 게 여자인데 제가 굳이 유부녀와 엮여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배도현이 검은 눈동자로 그녀를 옭아매며 눈썹을 치켜세웠다.

“자신을 추천하려면 뭔가 남다른 구석이라도 있어야 할 텐데.”

온서연의 두 눈이 별빛처럼 찬란하게 반짝이더니 온화한 미소를 띤 채 순해 빠진 표정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예쁘잖아요...”

“사모님보다 예쁜 여자는 많고도 많아요.”

“저보다 예쁜 여자가 저보다 똑똑하다는 보장은 없죠. 저보다 똑똑한 여자가 저처럼 나설 때와 물러설 때를 알고 분수를 지킨다는 보장도 없고요.”

“예쁘면서 말도 잘 듣는 여자를 만나면 대표님이 책임져야 할 일이 생기겠지만 가장 중요한 건...”

온서연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배도현의 넥타이에 닿았다. 손가락이 셔츠 깃에서부터 그의 가슴팍으로 천천히 미끄러져 내려갔고 목소리가 나긋나긋하기 그지없었다.

“전 대표님의 그 틀에 박힌 일상에 생각지도 못한 짜릿한 자극을 더해드릴 수 있다는 거예요.”

배도현의 말투는 서늘했지만 눈 밑에 깔린 어둠은 갈수록 짙어지고 있었다.

“이런 유혹, 저한테는 안 통해요.”

온서연의 가늘고 고운 손이 마침 배도현의 심장에 다다랐다.

“그런데 대표님의 심장 소리가 천둥이 치는 것처럼 엄청 크게 들리는데요? 게다가 빠르게 뛰기도 하고요.”

배도현이 온서연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악력이 너무 센 탓에 온서연이 아파서 미간을 찌푸렸다.

“온서연 씨, 지금 이러는 거 엄청 위험한 거 알아요? 전 온서연 씨 때문에 인생 망칠 생각 없어요.”

“그럼 대표님이 알려주세요. 어떻게 하면 인생을 망치지 않고 대표님을 꼬실 수 있는지.”

배도현의 살짝 잠긴 목소리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묘한 야릇함이 묻어났다.

“안 가르쳐 주면 하나하나 다 시험해 볼 작정인가요?”

온서연의 입술 사이로 달콤한 숨결이 흘러나왔다.

“저더러 시험해 보라는 뜻인가요? 배도현 씨?”

그녀가 그의 이름을 부른 순간 그의 숨결이 어지럽게 얽혀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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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경찬은 윤예린이 근처에서 몰래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지금 윤예린은 육경찬을 손에 넣으려고 작정했으니 예전처럼 살살 달래 가며 비위를 맞출 필요도 없었다.말을 돌려서 해도 알아듣지 못한다면 이참에 육경찬과 온서연이 함께 있는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게 하면 됐다.자신에게는 윤예린이 없어도 온서연이 있다는 걸 알게 하면 그만이니까.그래도 윤예린이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그런데 분위기가 달아오르자 사람들이 연달아 술을 권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육경찬에게 취기가 올랐다.온서연은 그를 부축해 밖으로 데리고 나가 바람을 쐬게 했다.“직원한테 꿀물 한 잔 달라고 해 올게.”“나 안 취했어.”육경찬은 온서연을 다시 끌어당겨 품에 안고, 턱을 그녀의 목덜미에 묻고 가볍게 비볐다.“서연아, 가지 마. 나 두고 가지 마.”온서연이 육경찬의 손을 떼어 내고 그를 의자에 앉혔다.“여기서 기다려.”온서연이 밖으로 나오자 조연희가 물 한 잔을 건넸다.“정말 이렇게까지 할 거야? 이제 시작하면 되돌릴 수 없어.”온서연이 나지막이 말했다.“선배님. 그 사람은 선배님을 속이고 망가뜨렸고, 저도 속이고 해쳤어요. 그런데도 우리가 마음 약해져야 해요?”조연희가 한숨을 쉬었다.“온서연, 걱정하지 마. 난 오늘 일 한마디도 밖에 안 할 테니까.”온서연은 꿀물을 들고 돌아가 육경찬에게 건네며, 반 잔 정도 마시게 했다.그리고 그를 2층 객실까지 부축해 데려간 뒤에야 조연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객실 안.시간이 조금 지나자 육경찬은 온몸이 점점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그는 넥타이를 풀어 던지고 정장 재킷도 바닥에 벗어 던졌다.육경찬은 비틀거리며 일어나 물을 마시러 나가려 했다.그런데 문을 여는 순간 부드러운 여자의 몸이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육경찬은 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서연아.”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온서연의 아리따운 모습만 가득했다.대학교 교정을 함께 걷던 온서연, 그를 보며 환하게 웃던 온서연, 결혼식에서 영원을 맹세하던

  • 봄밤, 젖어들다   제25화

    온서연이 방송국으로 돌아오자마자 고준우와 민하린이 그녀를 옆으로 끌고 갔다.“오늘 윤 팀장님, 기분이 완전 안 좋아. 조심해.”온서연이 웃으며 물었다.“왜?”민하린이 두 손으로 턱을 감싸며 연달아 한숨을 쉬었다.“화연 푸드 사건이 이제는 도저히 숨길 수 없게 됐잖아. 그래서 난리 난 거지.”“나만 그런 게 아니라 준우도 돌아오자마자 엄청 깨졌어.”고준우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깨지면 뭐 해. 오늘 식품 안전 보도가 나가고 인터넷이 뒤집혔는데.”“화연 푸드 뒤에 누가 있어서 이렇게 오랫동안 걸리지 않았냐는 말도 나오더라.”“뒤에 누가 있겠어? 그 사람이겠지.”세 사람이 소곤거리고 있을 때 양서희가 온서연을 사무실로 불렀다.“식품 안전 보도 잘 봤어. 다음에는 이걸 아예 연속 기획으로 만들어 보고 싶어. 네가 맡아.”“이틀 정도는 쉬면서 몸도 좀 추스르고, 자료도 모아서 기획 기사 초안 하나 써 와.”“네, 국장님. 알겠습니다.”온서연이 밖으로 나가려 하자 양서희가 다시 불렀다.“배 대표님 인터뷰 준비는 어떻게 돼 가?”“그게...”“배 대표님은 웬만해서 인터뷰 안 받는 분이야. 제대로 준비해야 해. 네가 잘해 내면 정규직 전환을 앞당기는 것도 생각해 볼게.”온서연의 눈빛이 반짝였다.그녀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감사합니다. 국장님.”온서연은 사무실을 나왔다가 표정이 잔뜩 굳은 윤예린과 마주쳤다.윤예린은 정성껏 화장으로 가리려 했지만, 눈에 가득 선 핏발은 감출 수 없었다.어젯밤 육경찬의 말이 꽤 큰 충격이었던 모양이다.예전의 조연희처럼 말이다.윤예린이 차갑게 말했다.“온서연, 축하해. 양 국장님한테 칭찬받았나 봐?”온서연이 공손하게 답했다.“윤 팀장님께서 이 취재를 맡겨 주신 덕분이에요. 아니었으면 제가 이렇게 처음부터 화면에 나갈 기회도 없었을 테니까요.”“윤 팀장님처럼 젊은 나이에 방송국 팀장까지 올라오신 분이면, 나중에 제일 먼저 메인 앵커 자리에 앉으실 수도 있겠네요.”윤예린이 차갑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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