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6화

Author: 유젠
온서연이 시선을 내리깐 채 멈추지 않고 계속 차를 음미했다. 이 결과를 진작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그 모습에 배도현의 눈동자에 서늘한 한기가 서렸다.

“온서연.”

그가 그녀를 부르는 말투에 약간의 짜증이 묻어났다.

온서연이 찻잔을 내려놓자 정교한 도자기 잔이 테이블에 부딪히며 맑고 차가운 소리를 냈다.

“대표님은 절 위해 뭘 해주실 수 있죠?”

그녀는 고개를 들어 배도현의 눈에 서린 차가운 빛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 보았다.

1초 전까지만 해도 고혹적이던 다도인은 어느새 협상 테이블에 앉은 이성적이고 냉혹한 상대로 변해 있었다.

배도현이 눈을 가늘게 떴다. 검은 눈동자에 흥미롭다는 빛이 스쳤다.

그가 손을 뻗어 온서연의 야윈 턱을 쥐고 자신의 앞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말해 봐요. 날 이용해서 뭘 하고 싶은지.”

“육경찬이 모든 걸 잃게 만들어 주세요.”

배도현이 실소를 터뜨렸다.

“온서연 씨, 본인 남편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긴 해요?”

“무슨 뜻이죠?”

“내가 아무 이유 없이 내 밑의 유능한 직원을 내칠 리 없다는 건 둘째 치고 육경찬이라는 사람에 대해서만 얘기할게요. 올해 고작 스물여섯인데 곧 회사의 부사장 자리에 오를 가능성이 커요.”

“평범한 집안에 아무런 배경도 없는 대학생이 졸업한 지 불과 4년 만에 남들은 평생 오르지 못할 위치까지 올라갔단 말이에요. 왜 그런지 알아요?”

온서연이 추억으로 인해 숨길 수 없는 감정을 가리려 시선을 내리깔았다.

“경찬 씨는 내가 본 사람 중에 가장 똑똑하고 진취적인 사람이에요. 대학 4년 내내 장학금을 받았고 온갖 대회에서 우승을 휩쓸었죠. 독학으로 2개 국어까지 마스터해서 외교 쪽으로 나갈 뻔도 했고요.”

온서연은 캠퍼스에서 기세가 등등하던 육경찬의 모습을 떠올렸다. 머리카락 한 올까지 청춘의 패기로 가득했던 그는 오직 그녀에게만 다정하고 헌신적이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에요. 성격도 섬세해서 눈치도 빠르고 말이나 행동에 빈틈을 보이는 법이 없죠.”

배도현이 이어 말했다.

“만 명 중 하나 나올까 말까 한 인재예요. 배원 그룹이 아니더라도, 내가 끌어주지 않았더라도 경찬 씨가 실력을 펼칠 곳은 얼마든지 있다는 뜻이죠.”

“그런 남자를 빈털터리로 만들겠다? 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쓸 생각이에요? 그 근거도 없는 불륜 사건으로요?”

“하지만 사회는 남자의 성공 여부를 평가할 때 사생활을 잣대로 삼지 않아요. 오히려 그런 쪽의 경험을 공유하려는 고객들이 널렸어요.”

배도현의 말이 무거운 망치가 되어 온서연의 척추를 마디마디 짓눌러 꺾어놓는 듯했다.

기나긴 침묵 끝에 온서연의 목소리가 이른 봄의 눈처럼 조금의 온기도 없이 서늘해졌다.

“대표님 말씀은 절 도와주실 수 없다는 뜻이군요?”

온서연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정중하면서도 거리감 있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럼 더는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이만 가볼게요.”

나무로 된 룸 문이 드르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여자의 하이힐이 나무 바닥을 밟는 또각또각 소리가 냉정하고 무심하게 멀어져 갔다.

룸 안.

배도현이 기다란 손가락으로 찻잔을 꽉 쥐었다. 온서연의 가녀린 목을 조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는 것 같았다.

바로 그때 그가 찻잔을 테이블 위로 쾅 내려놓았다. 힘이 다소 실렸는지 찻물이 몇 방울 튀어 올랐다.

붉은빛 나무 테이블 위로 찻물 자국이 복숭아꽃처럼 번졌다.

...

차로 돌아온 온서연의 머릿속에 육경찬과 함께했던 지난 4년간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지극정성으로 그녀를 보살펴주었던 그였기에 결혼에 아무런 기대도 없었던 그녀의 마음을 따뜻하게 녹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남자는 한순간에 변해 버렸다.

온서연은 휴대폰에 저장해둔 그 ‘공주’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린 뒤 나긋나긋하고 달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순간 온서연은 누군가 목을 조르기라도 한 것처럼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여보세요? 누구세요?”

온서연이 막 입을 열려던 찰나 전화기 너머에서 육경찬의 목소리가 불쑥 들려왔다.

“예린아, 누구야?”

여자가 콧소리를 내며 투정을 부리듯 말했다.

“누군지 몰라. 전화 잘못 걸었나 봐. 전화해 놓고 아무 말도 안 하네.”

“그럼 끊어. 이리 와서 내가 준비한 선물 좀 봐봐.”

전화가 끊겼다.

온서연의 휴대폰이 툭 떨어져 좌석 밑으로 굴러갔고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육경찬만 변한 게 아니었다.

그녀의 결혼 생활과 그녀의 삶까지 모조리 함께 변해 버렸다.

온서연이 차에 시동을 걸었다. 교차로에서 회전하려던 그때 차 한 대가 끼어들었다.

그녀가 백미러를 힐끗 보고 차를 피하려 핸들을 꺾은 순간 쾅 하는 굉음과 함께 길가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말았다.

짧은 몇 분 동안 그녀는 머릿속이 윙윙거렸고 밖에서는 누군가 다급하게 유리창을 두드리며 문손잡이를 힘껏 잡아당겼다.

온서연이 가슴을 부여잡은 채 핸들에 엎드려 거친 숨을 몰아쉬고 나서야 차 문 잠금을 해제했다.

차 문이 벌컥 열렸다.

온서연의 몸이 공중으로 들리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누군가의 품에 안겨 차 밖으로 빠져나왔다.

배도현의 칠흑 같은 눈동자에 거센 분노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죽고 싶어 환장했어요? 이건 또 무슨 수작이죠? 자해 계략이라도 되나요?”

“오해하지 마세요. 그냥 운전 실력이 형편없을 뿐이에요.”

온서연이 배도현의 품에서 내려오려 했다.

그런데 두 발이 땅에 닿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차 옆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배도현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눈빛이 갓 벼려낸 칼날처럼 서늘하고 날카로웠다.

“온서연 씨, 오늘 여기서 죽는다면 내일 육경찬이 장례를 치러준 뒤 모레면 새 장가를 갈 거예요. 이혼도 안 한 채 구정물 같은 결혼 생활에서 육경찬과 계속 뒹굴면 대체 무슨 이득을 얻을 수 있죠?”

온서연이 고개를 들어 배도현을 쳐다봤다. 이마 언저리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그 피가 그녀의 얼굴을 한층 더 처연하면서도 처절하게 보이게 했다.

“전 이혼 안 하겠다고 한 적 없어요. 그럼 만약 이혼하고 대표님에게 가면 전 무슨 이득을 얻을 수 있죠?”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배도현은 처음으로 여자의 눈 밑에 서린 지독한 고집을 똑똑히 봤다.

상냥하고 우아하고 이해심 많던 가면들을 하나하나 벗어던지고 만신창이가 된 채 이를 꽉 악문 지금의 얼굴이 온서연의 진짜 모습이었다.

누군가 자신을 저버렸다면 반드시 갚아줘야 직성이 풀리는 여자였고 제 살을 깎아 먹는 한이 있더라도 상대를 파멸시킬 수만 있다면 개의치 않는 여자였다.

온서연이 바퀴를 짚고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배도현 씨, 저의 음침한 목적, 더러운 속마음, 어설픈 유혹 수단까지 다 보여줬어요.”

“배도현 씨가 갑이라면 지금 당장 을과 계약서에 사인하든지, 아니면 여기서 미련 없이 돌아서든지 결정해요. 그래야 을도 다른 바이어를 찾을 테니까요. 장사의 이치는 저보다 배도현 씨가 더 잘 알지 않나요?”

간신히 몸을 가눈 그녀는 비틀거리며 운전석으로 돌아가 휴대폰을 찾으려 했다.

“세 번.”

뒤에서 차갑기 그지없는 배도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서연이 움찔했다가 물었다.

“뭐라고요?”

“배원 그룹과 나 개인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온서연 씨가 육경찬을 손봐주는 걸 내가 세 번 도울게요.”

“만약 온서연 씨한테 정말 그럴 능력이 있다면 이 세 번의 기회를 이용해 육경찬을 빈털터리로 만들어야 할 거예요.”

온서연이 대답하기도 전에 배도현이 또 덧붙였다.

“석 달 뒤에 이혼할 때 내가 유부녀의 외도에 장단 맞춰줄 거라는 기대는 하지 말아요.”

온서연이 고개를 저었다.

“3개월로는 부족해요. 적어도 6개월은 주셔야죠.”

배도현이 그녀에게 바짝 다가가 손으로 차 문을 짚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압박감을 뿜어내는 검은 눈동자가 거대한 그물이 되어 그녀를 옭아매고 도망칠 곳 하나 없이 가둬버리는 듯했다.

“그럼 넉 달. 이 기간 동안 온서연 씨는 내가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와야 해요. 그리고 육경찬과는 관계를 가져서도 안 되고요. 이게 내 마지노선이에요. 합의할 수 없다면 다른 바이어를 찾아보도록 해요.”

“그렇게 할게요.”

온서연은 담담하게 대답하고는 다시 몸을 휘청였다.

배도현이 한 손으로 그녀를 안아 부축하고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휴대폰을 쥐었다. 화면에 마침 통화 기록이 켜져 있었다.

“10분 전에 이미 구급차를 불렀군요.”

그가 눈을 가늘게 뜨더니 차갑게 웃었다.

“차 사고가 난 지 5분도 안 된 것 같은데. 온서연 씨, 이래도 자해 계략이 아니라고요?”

온서연이 그의 품에 기댄 채 다시금 다정하고 연약한 가면을 썼다.

“밀당한 거예요. 절 향한 배도현 씨의 흥미가 그저 차 한 잔 마시는 데서 끝나지 않았을 거란 사실에 걸어본 거죠.”

그녀가 백미러를 가리키며 덧붙였다.

“배도현 씨 차가 뒤따라오는 걸 봤거든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온서연이 배도현의 품에 완전히 쓰러졌지만 입가에는 여전히 의기양양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배도현이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렸다. 팔뚝에 힘이 잔뜩 들어갔고 목소리가 약간 잠겨 있었다.

“서연 씨가 지금 가야 할 곳이 병원인 걸 다행이라 생각해요.”

“병원이 아니었으면요?”

“아니었으면 오늘 밤이 서연 씨의 첫 외도가 되었을 테고 내일 침대에서 한 발짝도 내려오지 못하게 만들었을 거예요.”

노골적이고도 강압적인 소유욕 선언에 온서연의 볼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안심하고 배도현의 품에 파고들어 두 눈을 감았다.

손에 딱 맞는 칼이 마침내 온서연의 손에 들어왔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봄밤, 젖어들다   제30화

    그런데 정작 그 사람만은 기억하지 못했다.참 우스운 일이었다....온서연이 집으로 돌아와 막 문을 열고 들어가자 육경찬이 곧장 달려와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서연아, 어디 갔었어? 한참 찾았잖아. 전화도 안 받고. 진짜 놀라 죽는 줄 알았어.”온서연은 담담하게 육경찬을 밀어내고 고개를 숙여 슬리퍼를 찾았다.10여 초쯤 찾다가 그녀는 어제 낡은 슬리퍼를 자신이 직접 버렸다는 사실이 떠올랐다.육경찬은 오늘 슬리퍼를 새로 사겠다고 했지만 결국 사 오지 않았다.온서연은 신발을 벗고 맨발로 거실 안으로 들어갔다.“뭐가 그렇게 무서워? 설마 네가 다른 여자랑 잤다고 내가 자살이라도 할까 봐?”“서연아, 내가 어떻게 설명해야 믿을 건데? 나 진짜 누군가한테 당한 거라니까.”온서연은 소파에 앉아 가방에서 미리 준비해 둔 이혼 합의서를 꺼냈다.“내 눈으로 네가 다른 여자랑 침대에 누워 있는 걸 봤어. 그 여자한테 줄 돈도 내가 냈고. 그것까지 기억 안 나는 건 아니지?”“남편이 그런 짓을 하는 걸 참고 넘어갈 아내는 없을 거야. 나도 마찬가지고.”온서연은 이혼 합의서를 테이블 위에 놓았다.“육경찬. 우리 결혼은 여기까지야.”육경찬의 시선이 테이블 위의 종이에 박혔다.이혼 합의서라는 글자가 눈을 찌르는 것 같았다.이혼?이혼하면 온서연은 다른 사람의 여자가 될 것이다.어쩌면 곧바로 그 남자에게 갈 수도 있었다.육경찬은 뒤의 조건은 읽어 보지도 않은 채 합의서를 집어 들고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난 절대 이혼 안 해. 너랑 결혼한 날부터 이혼 같은 건 생각해 본 적도 없어.”육경찬은 온서연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꼭 붙잡았다.“서연아, 난 너를 사랑해. 내 마음엔 너 하나뿐이야.”“내가 지난 몇 년 동안 너한테 얼마나 잘했는지 네가 잘 알잖아.”“이번에는 내가 방심해서 누군가한테 당한 거야. 다시는 이런 일 없게 할게.”“네가 얼마나 상처받았는지 알아. 때려도 되고 욕해도 돼. 뭐든 다 해도 돼.”“이혼만 하지 말자. 네가

  • 봄밤, 젖어들다   제29화

    배도현의 짙은 눈동자에 미세한 빛이 일렁였다.그는 수많은 감정이 뒤엉켜 출렁이는 듯한 눈빛으로 온서연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 뜨겁고 노골적인 시선은 마치 그녀를 유혹하는 것 같았다.온서연은 속으로 생각했다.‘남자 머릿속에 들어 있는 게 결국 거기서 거기 아닌가? 나와 배 대표님은 처음부터 거래 관계였으니 굳이 추측할 필요도 없어.’온서연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배도현의 귀 양옆을 손으로 짚고, 몸을 숙여 그에게 키스했다.배도현의 눈가에 웃음이 스쳤지만 곧 고개를 돌려 피했다.“감기 걸린 사람한테도 키스해? 옮을까 봐 안 무서워?”김이 빠진 온서연은 머쓱한 얼굴로 몸을 바로 세웠다.“정말 이상한 사람이네요. 키스하라는 것도 대표님이고, 막상 하려니까 피하는 것도 대표님이네요.”“내가 언제 키스하라고 했는데?”“그...”‘그 눈빛이 딱 그런 뜻이면서, 흥.’배도현은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 듯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밥 먹을래.”온서연은 죽그릇을 들어 그의 손 앞으로 내밀었다.하지만 배도현은 앉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온서연은 숟가락으로 죽을 한술 떠서 입으로 살짝 불어 식힌 뒤 그의 입가에 가져갔다.배도현은 그녀가 내민 숟가락으로 죽을 받아먹었다.그러면서도 그의 눈빛은 여전히 온서연을 향하고 있었다.“맛있네.”온서연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지만 일부러 당당한 척 말했다.“당연하죠. 제 비법 레시피예요. 밖에서는 못 사 먹어요.”배도현의 기분이 순식간에 다시 가라앉았다.“누구 먹이려고 개발한 비법인데?”온서연이 얼른 대답했다.“저요. 예전에 다른 사람이 해 준 걸 한 번 먹었는데 맛이 너무 인상 깊어서, 기억나는 맛대로 만들어 본 거예요.”그 맛은 어떻게 해도 잊을 수가 없었다.“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제가 입원했을 때 보내 주신 죽도 이거랑 맛이 꽤 비슷했어요.”“기 비서님한테 어디서 산 건지 물어본다는 걸 깜빡했네요. 다음에는 직접 가서 먹어 봐야겠어요.”배도현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반찬도 좀 줘.”“아,

  • 봄밤, 젖어들다   제28화

    온서연은 멈칫했다.“배 대표님이 아파요?”“네. 교통사고 후에 회복이 완전히 되지 않아서 원래도 몸이 조금 약한 편이었는데 요즘 수면도 식사도 전부 불규칙했고, 술자리에서 평소보다 술도 많이 드셨어요. 결국 오늘 아침부터 열이 났고요.”온서연은 기태윤을 따라 차 쪽으로 걸어가며 물었다.“병원에는 가셨어요?”“아니요. 대표님 성격이 워낙 고집스러워서 병원에 가시는 걸 거부합니다. 그래서 제가 서연 씨께 부탁드릴 수밖에 없었어요.”기태윤이 차 문을 열어 주었다.온서연은 멍하니 차에 올라탔다.‘내가 간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어? 의사도 아닌데.’...온서연은 차를 타고 부두까지 간 뒤 다시 배를 타고 시내로 돌아왔다.이동만 두 시간 가까이 한끝에 온서연은 마침내 로즈 하우스에 도착했다.그녀는 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두 번 눌렀지만 열리지 않았다.“기 비서님, 문이 잠긴 거예요? 안 열리는데요.”기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대표님이 잠그라고 하셨어요.”“왜요? 대표님은 안에 있잖아요.”“아마 이런 식으로라도 누군가의 관심을 끌고 싶으셨던 것 같네요. 그런데 지난 이틀 동안 저 말고는 하우스에 드나든 사람이 없었어요.”기태윤이 잠시 말을 멈췄다.“결국... 대표님 혼자 안에 갇혀 계신 셈입니다.”온서연은 기태윤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다 참지 못하고 물었다.“대표님은 늘 이렇게 신경질적이었나요?”기태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대표님은 침실에 계십니다. 약은 침대 옆 탁자에 있고요. 주방에 식재료도 넉넉합니다. 필요하신 게 있으면 저를 불러 주세요.”“알겠어요.”온서연은 2층으로 올라가 침실로 들어갔다.방 안은 고요했다.그녀는 발소리를 죽여 침대 옆으로 다가갔다.배도현은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는데 입술은 핏기 없이 하얬다.온서연이 손바닥을 그의 이마에 대 보았다. 놀랄 만큼 뜨거웠다.머리맡에 놓인 약은 한 알도 손대지 않은 상태였다.온서연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이 정도면 자학이 취미

  • 봄밤, 젖어들다   제27화

    방 안에 있던 여자가 비명을 지르며 이불을 끌어당겨 몸을 가렸다.육경찬은 여전히 그 여자의 손을 붙잡은 채 입으로 계속 한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서연아, 온서연.”탁.조명이 켜졌다.갑자기 쏟아진 밝은 빛에 육경찬이 눈을 가리며 얼굴을 찌푸렸다.윤예린은 지나가던 직원이 들고 있던 물컵을 낚아채 그대로 육경찬의 얼굴에 물을 끼얹었다.그제야 육경찬은 조금 정신을 차렸다.“너...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윤예린은 화가 나 온몸을 떨었다. 이를 악물자 눈가의 근육까지 파르르 떨렸다.“육경찬, 이제야 네 진심을 알겠네.”둘은 겨우 한 번 다퉜을 뿐인데 육경찬은 곧바로 다른 여자와 침대에 누웠다. 심지어 입으로 온서연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윤예린은 우스운 꼴이 되고 말았다.윤예린은 울음을 터뜨리며 밖으로 뛰쳐나갔다.육경찬은 황급히 일어나려 했지만, 온서연이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순간 그는 다시 침대 위로 주저앉아 허겁지겁 옷을 두어 벌 걸친 뒤, 온서연 앞으로 달려가 그녀를 붙잡으려 했다.온서연이 두 걸음 뒤로 물러서자 육경찬은 허공을 짚고 바닥에 넘어졌다.“서연아, 서연아, 제발 내 말 좀 들어 봐. 나 함정에 빠진 거야.”온서연은 고개를 숙여 그를 바라봤다. 그녀의 눈에는 아픔과 상처가 어린 듯했다.“함정이라고? 윤 팀장님은 방송국에서 수이도까지 널 찾아왔고, 네 침대에는 다른 여자가 누워 있었어.”“그전에는 구 부사장님 집에서 또 다른 여자랑 전화하는 것도 봤고. 육경찬, 밖에 여자가 대체 몇 명이나 있는 거야? 그 여자들도 전부 누가 널 함정에 빠뜨리려고 보낸 거야?”육경찬이 다급하게 말했다.“진짜 다른 여자는 없어. 내 마음에는 너 하나뿐이야. 난 이 여자가 누군지도 몰라. 분명 술에 취해서 널 기다리고 있었는데, 왜 이렇게 됐는지 나도 모르겠어.”그는 침대 위 여자를 노려봤다.“당신 대체 누구야? 누가 내 방에 들어오라고 했어?”여자는 느긋하게 옷을 챙겨 입으며 코웃음을 쳤다.“육경찬 씨, 볼일 다 봐 놓고 인

  • 봄밤, 젖어들다   제26화

    육경찬은 윤예린이 근처에서 몰래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지금 윤예린은 육경찬을 손에 넣으려고 작정했으니 예전처럼 살살 달래 가며 비위를 맞출 필요도 없었다.말을 돌려서 해도 알아듣지 못한다면 이참에 육경찬과 온서연이 함께 있는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게 하면 됐다.자신에게는 윤예린이 없어도 온서연이 있다는 걸 알게 하면 그만이니까.그래도 윤예린이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그런데 분위기가 달아오르자 사람들이 연달아 술을 권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육경찬에게 취기가 올랐다.온서연은 그를 부축해 밖으로 데리고 나가 바람을 쐬게 했다.“직원한테 꿀물 한 잔 달라고 해 올게.”“나 안 취했어.”육경찬은 온서연을 다시 끌어당겨 품에 안고, 턱을 그녀의 목덜미에 묻고 가볍게 비볐다.“서연아, 가지 마. 나 두고 가지 마.”온서연이 육경찬의 손을 떼어 내고 그를 의자에 앉혔다.“여기서 기다려.”온서연이 밖으로 나오자 조연희가 물 한 잔을 건넸다.“정말 이렇게까지 할 거야? 이제 시작하면 되돌릴 수 없어.”온서연이 나지막이 말했다.“선배님. 그 사람은 선배님을 속이고 망가뜨렸고, 저도 속이고 해쳤어요. 그런데도 우리가 마음 약해져야 해요?”조연희가 한숨을 쉬었다.“온서연, 걱정하지 마. 난 오늘 일 한마디도 밖에 안 할 테니까.”온서연은 꿀물을 들고 돌아가 육경찬에게 건네며, 반 잔 정도 마시게 했다.그리고 그를 2층 객실까지 부축해 데려간 뒤에야 조연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객실 안.시간이 조금 지나자 육경찬은 온몸이 점점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그는 넥타이를 풀어 던지고 정장 재킷도 바닥에 벗어 던졌다.육경찬은 비틀거리며 일어나 물을 마시러 나가려 했다.그런데 문을 여는 순간 부드러운 여자의 몸이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육경찬은 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서연아.”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온서연의 아리따운 모습만 가득했다.대학교 교정을 함께 걷던 온서연, 그를 보며 환하게 웃던 온서연, 결혼식에서 영원을 맹세하던

  • 봄밤, 젖어들다   제25화

    온서연이 방송국으로 돌아오자마자 고준우와 민하린이 그녀를 옆으로 끌고 갔다.“오늘 윤 팀장님, 기분이 완전 안 좋아. 조심해.”온서연이 웃으며 물었다.“왜?”민하린이 두 손으로 턱을 감싸며 연달아 한숨을 쉬었다.“화연 푸드 사건이 이제는 도저히 숨길 수 없게 됐잖아. 그래서 난리 난 거지.”“나만 그런 게 아니라 준우도 돌아오자마자 엄청 깨졌어.”고준우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깨지면 뭐 해. 오늘 식품 안전 보도가 나가고 인터넷이 뒤집혔는데.”“화연 푸드 뒤에 누가 있어서 이렇게 오랫동안 걸리지 않았냐는 말도 나오더라.”“뒤에 누가 있겠어? 그 사람이겠지.”세 사람이 소곤거리고 있을 때 양서희가 온서연을 사무실로 불렀다.“식품 안전 보도 잘 봤어. 다음에는 이걸 아예 연속 기획으로 만들어 보고 싶어. 네가 맡아.”“이틀 정도는 쉬면서 몸도 좀 추스르고, 자료도 모아서 기획 기사 초안 하나 써 와.”“네, 국장님. 알겠습니다.”온서연이 밖으로 나가려 하자 양서희가 다시 불렀다.“배 대표님 인터뷰 준비는 어떻게 돼 가?”“그게...”“배 대표님은 웬만해서 인터뷰 안 받는 분이야. 제대로 준비해야 해. 네가 잘해 내면 정규직 전환을 앞당기는 것도 생각해 볼게.”온서연의 눈빛이 반짝였다.그녀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감사합니다. 국장님.”온서연은 사무실을 나왔다가 표정이 잔뜩 굳은 윤예린과 마주쳤다.윤예린은 정성껏 화장으로 가리려 했지만, 눈에 가득 선 핏발은 감출 수 없었다.어젯밤 육경찬의 말이 꽤 큰 충격이었던 모양이다.예전의 조연희처럼 말이다.윤예린이 차갑게 말했다.“온서연, 축하해. 양 국장님한테 칭찬받았나 봐?”온서연이 공손하게 답했다.“윤 팀장님께서 이 취재를 맡겨 주신 덕분이에요. 아니었으면 제가 이렇게 처음부터 화면에 나갈 기회도 없었을 테니까요.”“윤 팀장님처럼 젊은 나이에 방송국 팀장까지 올라오신 분이면, 나중에 제일 먼저 메인 앵커 자리에 앉으실 수도 있겠네요.”윤예린이 차갑게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