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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담다
봄을 담다
Author: 딸기팝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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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딸기팝콘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7-28 18:45:56

봄이었다.

하필이면 거절하기 가장 어려운 계절이었다.

 

"이번 한번만 나가라"

조부의 말은 부탁이 아니라 명령에 가까웠다. 

그는 결국 넥타이를 고쳐 매며 한숨을 삼켰다.

관심도 없는 사람들, 의미도 없는 대화 그리고 뻔한 인연타령까지.

이런 자리는 늘 그랬다. 시간 낭비였다.

그녀를 보기 전까지는.

쿵.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향했다. 

한 중년 남자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순간 주변이 술렁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가 앞으로 나섰다.

하얀드레스

...여자였다.

또각

가느다란 굽이 바닥을 두드리다 멈췄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을 벗어 던졌다.

맨발.

망설임이 없었다.

"비켜 주세요"

짧고 낮은 목소리.

그 한마디에 사람들 사이가 갈라졌다.

이상하게도 그 말에는 거부할 수 없는 힘이 있었다.

그녀의 손이 남자의 턱을 들어올렸다. 고개를 젖히고 숨길을 열었다. 

그리고 곧바로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탁, 탁, 탁-

일정하고 강한 압박.

망설임 없는 리듬이었다.

하지만 이상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도 남자의 몸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숨이 돌아오지 않는다.

아주 미세하게 그녀의 눈이 달라졌다.

처음으로 조금 더 빠르게 움직였다.

"기도가 막혔어..."

낮게 흘러나온 목소리.

그 한마디에 주변의 공기가 더 무거워졌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뾰족한거 있어요?"

몇 초.

그 짧은 침묵이 길게 이어졌다.

그리고 누군가가 떨리는 손으로 작은 금속 장식을 건냈다.

설마 그녀의 손이 남자의 목으로 향했다.

위치를 짚는다.

망설임이 없다.

이상하게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푹.

짧은 소리.

그리고 하얀 드레스 위로 붉은 피가 번졌다.

누군가는 고개를 돌렸고, 누군가는 숨을 삼켰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오직 한곳 쓰러진 남자만 보고 있었다.

그 직후 미세하게 남자의 가슴이 들썩였다.

그는 그 장면을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방금 이 여자가 한 일을.

그리고 그걸 해낸 표정이 너무도 담담했다는 걸.

"119는요?"

여자의 단호한 목소리였다.

방금 전까지 들리던 안도의 기운이 순식간에 다시 조여졌다.

"부...불렀습니다!"

누군가 급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도착하면 바로 이쪽으로 안내하세요."

그리고 다시 시선을 내렸다.

남자의 호흡을 확인하고 가슴의 움직임을 끝까지 놓치지 않는다.

"완전히 안정된 거 아니니까 절대 움직이지 마세요."

조용하지만 분명한 말.

그 말은 환자에게 하는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주변 사람들에게 하는 경고 같았다.

드레스는 이미 피로 물들어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손은 여전히 남자의 상태를 확인하고 있었고, 눈은 단 한 번도 다른 곳으로 향하지 않았다.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고 점점 가까워졌다.

누군가가 외쳤다.

"구급차가 왔어요!"

들것을 든 구급대원들이 들어왔다.

"환자 상태는요?"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숨은 조금 가빠보였지만 말은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고, CPR시행했고 기도폐쇄 의심돼서 기본 기도 확보 시도했지만 안 됐고"

그녀의 시선이 환자의 목 쪽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덧붙였다.

"응급으로 윤상갑상막 절개해서 기도 확보했습니다."

구급대원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바뀌었다.

"지금은 자발순환 돌아온 상태고, 호흡은 아직 불안정합니다."

하얀 드레스 위에 번진 피, 맨 발, 아무 일도 아니라는 얼굴.

그 모든 게 이상하게 자연스러웠다.

구급대원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바로 이송하겠습니다."

그 말에 그녀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저 의사입니다. 같이 가겠습니다."

그건 선택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결론처럼 들렸다.

들것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녀는 그 옆을 놓치지 않았다. 한 걸음도 떨어지지 않고 따라붙었다. 시선은 끝까지 환자에게만 가 있었다. 

사람들은 길을 비켜섰고, 그 사이로 그녀가 지나갔다.

점점 가까워졌다.

손을 뻗으면 닿을거리.

맨발.

차가운 바닥 위를 그대로 밟고 있었지만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람 같았다.

하얀 드레스 위로 번진 피.

그 선명한 색조차 그녀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것처럼 보였다.

쾅.

구급차 문이 닫히고 사이렌이 울렸다.

위잉 위잉-

점점 멀어지는 소리.

그 소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상하게도 시선은 계속 그녀가 사라진 방향에 머물러 있었다.

이미 보이지 않는데도 눈을 감지 않아도 떠올랐다.

하얀 드레스 그리고 그 위에 번지던 붉은색, 맨발로 바닥을 딛고 서 있던 모습, 망설임 없이 무릎을 꿇던순간, 그리고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던 눈, 이상할 정도로 또렸했다. 

그는 원래 이런 걸 오래 기억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스쳐 지나가는 얼굴들, 이름도 남기지 않는 인연들, 그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은 달랐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그녀만 유독 선명했다. 마치 그날의 기억이 그녀를 중심으로 남아버린 것처럼.

이름도 모른다.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확신이 들었다.

저 여자를 잊지 못할 거라고  그리고 찾을 수 있을 거라고.

***

알람소리가 울리기 전 눈이 먼저 떠졌다. 몸이 무거웠다. 팔다리에 남아있는 묵직한 피로감, 어제 일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천장을 바라봤다. 파티장, 쓰러진 남자, 손에 닿던 감각.

더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익숙한 동작처럼 몸을 일으켰다.

세면대 앞에 멈춰 섰다. 

거울 속에 낯익은 얼굴이 비쳤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눈가에 아주 옅은 피로가 남아 있었지만 그조차 크게 티나지 않았다. 피부는 유난히 희었다. 

빛을 받은 듯 맑고 잡티 하나 없이 정리된 느낌 그리고 커다란 눈이 조용히 내려앉아 있었다. 

길게 내려온 속눈썹 아래로 피곤함이 살짝 스쳐 지나갔다. 

콧날은 단정하게 곧았다. 과하지 않게 오똑하게 올라간 선이 얼굴 전체를 또렷하게 잡아주고 있었다. 특별히 꾸민건 없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인데도 어딘가 정리된 인상이었다. 

누가봐도 쉽게 시선을 두 번쯤 머물게 할 얼굴.

하지만 그녀는 그 얼굴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아무 감정도 없이 그저 익숙한듯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머리를 묶었다. 거울속 여자는 이미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예쁜 얼굴이 아니라 일을 하러 가는 의사의 얼굴로.

숙직실 문을 밀고 나왔다.

복도는 이미 환하게 켜져 있었다.

밤과 아침의 경계가 흐릿한 공간.

병원은 늘 그렇듯 누군가의 하루가 끝나기도 전에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가운을 한 번 정리하고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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