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유소영은 확신에 차 있었다.“제가 아는 세자께서는 그런 짓을 하실 분이 아닙니다.”복양 군주는 낙담한 기색이 역력했다.“그러게 말이에요. 제가 어쩌다 멍청하게 고 세자를 의심했을까요.”“그분은 정직하신 분이시니 그런 비열한 짓을 하실 리가 없지요.”비열이라는 단어를 듣자, 유소영은 문득 세자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비열한 자들을 상대하려면 그들보다 더 비열해져야 한다고 했던 그 말이.순간, 의심의 씨앗이 조용히 뿌리내렸다.군주의 곁을 반 시진 정도 지키던 유소영은 이만 물러나겠다고 고했다.초왕부를 나서는 길, 어느 외진 별채를 지나칠 때였다.문득 하늘하늘 떠다니는 연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유소영은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저 별채에 사는 아이가 띄운 것이려니 했다.그러나 다시 한번 쳐다본 순간, 그녀는 우뚝 멈춰 서서 연을 뚫어지게 응시했다.“아씨, 왜 그러세요?”아민도 따라 멈춰 섰다.그녀는 아씨의 시선을 좇아 연을 올려다보았다.딱히 이상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굳이 특이한 점을 찾자면, 연에 글씨가 빼곡히 적혀 있다는 것 정도였다.시 구절인가 보다 싶었다.아민은 별생각 없이 넘기려다, 아씨가 넋이 나간 사람처럼 눈도 깜빡이지 않고 연을 노려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아씨?”유소영은 아민에게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배웅하던 몸종에게 다급히 물었다.“이 별채에는 누가 머물고 있느냐?”몸종은 무미건조한 어조로 답했다.“운 측비 마마이십니다.”유소영은 태연한 척 가장하며 물었다. “측비 마마를 뵙고 문안을 여쭈어도 되겠느냐?”몸종이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이치대로라면 세자 부인이 누굴 만나든 일개 몸종인 자신에게 물을 필요가 없었다.그러나 운 측비는 달랐다.몸종이 즉시 귀띔했다.“운 측비 마마께서는 괴이한 병을 앓고 계십니다. 부인께서는 들어가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것입니다.”유소영이 연을 가리켰다.“저 연은 누구의 것이냐? 운 측비 마마의 것이냐?”몸종이 고개를 저었다. “소인은 모르옵니다
고준형은 젓가락을 들었다 놓으며 담담히 유소영을 응시했다.“왜 그런걸 묻소?”유소영은 자신의 의문을 있는 그대로 털어놓았다.“고장훈이 임유정을 맞이한 건 진심으로 좋아해서이기도 하지만, 그 뒤에 있는 재상부를 중히 여겼기 때문이지요.”“영국공부가 군주를 며느리로 들이는 건 초왕부의 지지를 얻기 위함이고요.”“그러나 세자께서 저와 혼인하여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이런 의문이 들 수밖에요.”“도대체 세자께서 남들과 다르신 건지, 아니면…… 세자께서 꾸미시는 일을 제가 모르는 것인지요?”고준형은 흥미롭다는 듯 옅은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부인은 어느 쪽이라 생각하오?”“모르겠기에 세자께 직접 여쭙는 것입니다.”유소영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게다가 지난번 왕세자께서도 말씀하시길, 세자께서는 혼인을 집안끼리의 결합이자 이해득실을 따져 계산하는 것이라 여기신다 들었습니다. 그러니 저도 궁금할 수밖에요…….”그녀는 말을 아꼈다.고준형은 웃음기를 거두고 그녀를 뚫어지게 응시했다.“내가 부인을 맞이한 건 은사님의 부탁 때문이기도 하지만, 부인에게 세자 부인의 자리를 감당할 능력이 있기 때문이오.”유소영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능력이 있다?세자 부인이 무슨 관직이라도 된단 말인가?유소영은 한참 동안 침묵했으나, 얼굴에는 기쁜 기색이라곤 조금도 없었다.고준형이 이 무의미한 대화를 끝맺었다.“우선 탕부터 드시오.”유소영은 별로 입맛이 없었다.그녀는 숟가락을 쥔 채 물었다. “군주를 뵈러 가고 싶습니다.”고준형은 온화한 태도로 답했다.“내가 같이 가주길 바라오?”유소영은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세자께선 공무로 바쁘시니 석심과 함께 가면 됩니다.”고준형은 이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그것도 좋겠군. 석심은 일 처리가 확실하니 그가 있으면 나도 안심이오.”……초왕부로 향하는 마차 안.아민은 아씨의 수심이 깊은 것을 눈치챘다.“아씨, 아직도 군주가 걱정되세요?”유소영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초왕
날카로운 가위 날 위로 복양 군주의 얼굴이 흐릿하게 비쳤다.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이었다.그녀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고 손은 걷잡을 수 없이 떨려왔다.화친혼도 싫고, 여승이 되는 것도 싫었다!서걱.머리카락 한 올이 잘려 바닥으로 떨어졌다.그와 동시에 소녀의 눈에서도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그녀는 체념한 듯 두 눈을 질끈 감았다.결국 득실을 따져 부왕과 모비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머리카락이야 다시 자라면 그만이다.여승이 되어 절에 들어간다 한들 환속할 기회는 있다.혼인이 몇 년 늦어지거나 시집을 잘 못 가는 것쯤이야 감내할 수 있었다.그러나 타국으로 화친을 떠나게 된다면, 제 인생은 송두리째 망가지는 것이었다…….“부왕! 모비! 이게 무슨 짓입니까!!”조담이 뜰 밖에서 뛰어 들어와 노파의 손목을 낚아채더니 가위를 빼앗았다.복양 군주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려 오라버니를 바라보았다.울다가 웃다가, 그녀의 심경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복잡했다.누군가 말려주기를 바랐으면서도 결말은 바뀌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러나 곧바로 한 부인이 뒤따라 들어와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녀를 끌어안으며 소리쳤다.“군주를 며느리로 삼겠다는 제 마음은 확고합니다. 남들이 뭐라 하든 전 군주가 순결하고 결백하다는 걸 믿습니다!”나타난 이는 영국공 부인 변씨였다.초왕비의 안색이 미묘하게 변했다.변씨는 복양 군주를 부축해 일으키고는 초왕 부부를 향해 사죄의 예를 올렸다.“다 못난 제 아들 녀석 탓입니다. 헛소문에 휘둘려 홧김에 파혼이라는 망언을 내뱉다니요. 제가 놈을 끌고 왔습니다. 지금 밖에서 무릎을 꿇고 있습니다!”“멀쩡한 혼사를 하인 놈의 헛소리 때문에 망칠 수는 없지 않습니까.”“맑은 물은 절로 맑은 법이라 믿습니다. 하물며 군주께서 어리석은 분도 아니신데, 어찌 가난한 서생 따위에게 눈길을 주셨겠습니까.”초왕과 초왕비는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이 변씨는 그래도 사리 분별을 할 줄 아는 사람이군.복양
고준형은 침착하고 여유로웠다.“폐하께서 내 견해를 물으셨지만 사건에 연루된 이들 중에 장인어른도 계시니, 내가 나서는 건 부적절하다고 말씀드렸소. 그래서 조정에서는 내 생각을 밝히지 않았지.”“찬성하는 이가 극히 적어 폐하께서도 고민이 많으신 듯하오. 아직 결론은 나지 않았소.”유소영은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고준형이 그녀를 달랬다.“좋게 생각하시오. 장인어른께서 대리시에 계시니 오히려 마음은 놓이지 않소.”유소영이 눈을 들어 물었다. “세자께서는 속죄금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고준형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수많은 상인이 연루된 일이오. 겉으로는 자발적이라 하나, 실상은 강요받은 이들도 적지 않지. 한마디로 흙탕물 싸움이나 다름없소.”거기까지 말하던 그가 돌연 화제를 돌렸다. “부인은 속죄금을 냈소?”유소영은 단호했다.“아니요. 저는 처음부터 이 일이 부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은전 한 닢도 내놓을 생각이 없어요.”고준형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장인어른의 일에서도 부인이 그처럼 냉철함을 잃지 않길 바라오.”그리고는 무심한 듯 물었다. “조정의 일은 복양 군주에게 들은 것이오?”유소영이 고개를 끄덕였다.“군주께선 그저 왕세자께서 그 문제를 거론하실 거라고만 했어요.”고준형은 차분한 시선으로 유소영을 가만히 응시했다.“군주와 그렇게 가까이 지내는 게 혹시 내키지 않는 건 아니오?”유소영이 솔직하게 답했다. “군주께선 천진난만하신 분이에요. 신분을 떠나 친구로서 사귀고 싶습니다.”고준형이 찻잔을 들어 올렸다.“부인이 군주의 청을 거절하지 않거나, 혹은 못하는 게 아닐까 싶었소. 본인이 원해서 하는 일이라면 더는 관여치 않겠소.”말을 마친 그는 가볍게 차를 한 모금 마셨다.……다음 날.이른 아침, 유소영이 미처 잠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아민이 휘장을 걷고 뛰어들었다.“아씨, 군주께 큰일이 났어요!”유소영은 아직 잠이 덜 깬 탓에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누구?”“군주요,
유소영은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왕세자께서…….”복양 군주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결과가 어찌 되든 오라버니께서 이리 하신 건 다 세자 부인을 위해서예요. 그러니 오라버니의 그 마음을 꼭 기억해 주셔야 해요.”유소영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왕세자의 마음은 그녀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복양 군주는 쉬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고 세자는 믿을 만한 분이 아니에요. 유 대감께 일이 생긴 뒤로 고 세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잖아요. 제 오라버니야말로 진정으로 사람을 아낄 줄 아는 분이라고요.”유소영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군주가 은연중에 왕세자를 치켜세우며 자신과 세자 사이를 이간질하려 한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그녀는 결국 군주의 말을 끊었다.“군주, 왕세자와 저는 결코 이어질 수 없는 사이입니다. 그러니 말씀을 삼가 주십시오. 제가 구설에 휘말리지 않게 해 주셨으면 합니다.”그녀가 이토록 직설적으로 나오자 복양 군주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그렇군요…… 알았어요. 하지만 전 그저 농담을 좀 한 것뿐이에요. 오라버니를 선택하라고 강요한 것도 아니고요. 너무 정색하시는 거 아니에요?”하지만 유소영은 이를 가벼운 농담으로 넘길 생각이 없었다.그녀가 정색하며 말했다.“장차 정혼을 앞둔 시기에 외간 남자와 얽혀서는 안 된다는 걸 군주께서도 아시는데, 제 명예도 생각해 주셔야지요. 자신이 원치 않는 일을 남에게 강요해서는 안 되는 법입니다.”복양 군주는 말문이 막혔다.마차 안에는 한동안 정적만이 감돌았다.한참 뒤에야 복양 군주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어쩜 그리 속이 좁으세요? 이 일로 저랑 절교라도 하시겠다는 건가요?”“알겠어요, 무슨 걱정을 하시는지 알겠으니 앞으론 오라버니 얘기를 꺼내지 않을게요.”그러면서 유소영의 손을 잡고 흔들며 애교 섞인 표정을 지어 보였다.유소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군주께서 그 약속을 지켜 주시길 바랍니다.”……영씨 가문.지난 이틀간 왕씨는 줄곧 딸의 곁을 지켰다.지
오후. 월하각.복양 군주가 또다시 찾아왔다.어제는 장신구를 고르더니, 오늘은 옷감을 골라야 한다며 또 유소영을 붙들고 늘어졌다.유소영이 대놓고 물었다.“군주의 규방 벗들은 다 어디 가셨습니까? 왜 그들과 함께하지 않으십니까?”“그 애들이 뭘 알겠어요! 당연히 혼인해 본 세자 부인이 더 경험이 많을 테니 그렇죠.”그러고는 곧장 유소영을 이끌고 저택을 나섰다.옷감의 문양을 고를 때 복양 군주는 무척이나 들뜬 모습이었다. 이번 혼사가 꽤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하지만 한 젊은 사내가 들어오면서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찰나, 복양 군주의 미소가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그녀는 쥐고 있던 물건을 내팽개치듯 내려놓고는 고개를 돌려 유소영을 이끌고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유소영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그녀는 멍하니 서 있는 젊은 서생을 바라보았다.그는 수수한 차림새였는데, 소매 안쪽으로 천을 덧댄 자국이 보였다.그러나 수려한 외모만큼은 남루한 행색조차 잊게 만들 정도였다.그는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군주를 응시했으나, 차마 다가서지는 못한 채 주저하고 있었다.복양 군주는 금세 표정을 정돈하고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그를 철저히 무시했다.“세자 부인, 여긴 싸구려 물건들뿐이네요. 다른 곳으로 가요!”그 말에 젊은 사내의 얼굴에 고통스러운 기색이 스쳤다.유소영은 그를 한 번 쳐다보고는 군주를 따라나섰다.마차 안.복양 군주가 냉소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눈치채셨죠?”유소영이 솔직하게 답했다. “군주와 그분의 반응을 보고 모른 척하기가 더 어렵더군요. 그분이 예전에 군주께서 마음에 두셨던 분입니까?”복양 군주가 입꼬리를 비틀었다.“그래요.”유소영이 나직이 말했다. “어차피 이루어질 수 없다는 걸 아셨으면서 어찌하여 마음을 주셨습니까.”“훈계는 사양할게요. 그 사람을 좋아했을 땐 정말로 함께할 생각이었어요. 그가 공명을 세우면 황 백부께 청을 드릴 작정이었죠. 하지만 그 사람이 그토록 무능할 줄 누가 알았겠어요
민심자는 오늘에서야 자신에게 넘어온 장부에 어마어마한 금액의 결손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그 결손은 유난히도 교묘하게 숨겨져 있었다. 분명 이중 장부가 따로 존재할 것이었다.그동안 그녀가 보아 온 것은 전부 겉으로 드러난 장부뿐이었다.실제로 후작부의 몇몇 점포들이 이미 몇 달째 이리저리 메워 가며 연명하는 형편이었고, 심지어는 수입보다 지출이 더 큰 상태였다!즉, 민심자는 안살림 권한을 손에 넣고도 이득은 커녕 제 돈을 쏟아부어야 할 처지라는 뜻이었다. 이게 말이 되는 소린가?!그녀는 당장 고 부인을 찾아갔다.“사람을
고준형의 수척하면서도 훤칠한 그림자가 유소영의 눈길에 닿았다. 그녀가 한 걸음 다가서며 불렀다.“세자……”남자의 온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누가 부인을 데려다준 것이오?”그녀가 눈을 들자, 그는 어느덧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거리가 너무 가까워 그녀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그것은……”이상했다. 왜 그런 것을 묻는 것일까?유소영은 문득 무언가를 깨닫고 의아해하며 물었다.“설마 세자께서는 모르고 계셨던 것입니까?”고준형은 그녀를 가만히 응시했다. “상관없소. 부인이 무사하기만 하면 되었지. 내가 너무 오래
아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다른 처소는 그렇다 쳐도 서원 노부인의 월급까지 깎았답니다. 날이 더워서 각 처소에서 얼음도 사야 하는데…”유소영은 아민의 불평을 끊으며 명했다. “은자를 좀 챙겨서 조용히 이씨 어멈에게 전달하거라. 조모님의 건강이 우선이다.” “네, 아씨.”월급 삭감 소동은 각 처소의 공분을 샀다. 난향원.임유정의 눈에서 불길이 솟구쳤다. “겨우 이만큼을 줘? 누굴 거지로 보는 것도 아니고!” ‘안살림 권한을 쥐었다고 아주 대놓고 재물을 긁어모으기 시작했구나.’ 임유정은 당장 고장훈을 찾아가 하소
유소영은 조담과 이미 안면이 있었다.지난번 강지영이 습격을 당했을 때, 조담이 그녀와 아민을 데리고 도망친 적이 있었기에 그가 군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세자를 기다릴 수 없었던 유소영은 곧장 방을 나섰다.“조 대인!”조담은 마침 사람을 찾고 있던 중이었다. 유소영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즉시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그 순간, 그의 얼굴에 안도의 기색이 스쳤다.곧바로 성큼성큼 다가오며 말했다.“어젯밤 석심을 우연히 만났소. 당주와 세자가 습격을 당했다는 말을 듣고……”그가 더 묻기도 전에 유소영이 먼저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