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어진 태후라면, 병든 명부를 억지로 불러 문안을 올리게 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날 이후, 가장 화가 난 사람은 주서화였다. 본래 신수빈이 죽은 후 자신이 곧 정실로 봉해질 것이라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신수빈의 명은 끈질겼다. 그런 상황에서 살아남은 것도 모자라 겨우 태기만 흔들리고 놀란 정도라니!신수빈이 임신했다는 사실은 이미 모두가 아는 바였고 윤서원도 당연히 알게 되었다.그는 화가 나고 분해서 토하고 싶은 심정이었다.신수빈이 감히 다른 남자의 애를 가졌다니!주서화가 돌아와 울며 물었을 때 윤서원의 신경은 이미 한껏 곤두서 있었다. 게다가 그날 이도현이 자신을 도발하던 눈빛이 자꾸 떠올라 견딜 수 없을 만큼 화가 치밀었다. 그는 누구에게도 자신이 이도현에게 미치지 못한다는 걸 들키기 싫었다. 그래서 사건의 진상을 그녀에게 말하지 않고 대충 둘러댔다.그 아이는 주서화와 혼인하기 전에 가진 것이고 그녀를 집으로 들인 후에는 한 번도 신수빈에게 손을 대지 않았다고 변명했다.결국 주서화는 마지못해 받아들였고, 신수빈을 더욱 눈엣가시처럼 여기게 되었다. 특히 그녀가 장차 적자를 낳게 된다면 윤 가에서 그녀의 지위는 더더욱 견고해질 것이다. 그녀는 차라리 태후에게 또 한 번의 매복 살해를 꾸미라고 하고 싶을 정도였다.이때 춘진각 서행랑에 머무는 윤서령은 핑계를 대며 반 달 동안 방에서 나오지 않는 신수빈과 매일같이 태후에게만 들락거리는 주서화의 모습을 바라보며 자신을 완전히 잊은 것은 아닌가 싶어 괜히 마음이 조급해졌다.저녁에 주서화가 돌아오는 틈을 타 윤서령은 직접 만든 호랑이 머리 모자를 들고 본전으로 갔다.“마님 돌아오셨습니까? 제가 요 며칠 심심해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작은 조카를 위해 호랑이 머리 모자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장차 틀림없이 호랑이처럼 위풍당당한 장군이 될 수 있길 바라면서요.”윤서령의 말은 주서화를 기쁘게 해주려는 것이었다. 그녀는 호랑이 머리 모자를 받아들었다. 솜씨는 그저 그렇고 급히 만든 티가 났지만 뜻은 괜찮아 보여 마
“너를 암살하려 한 자는 이미 죽었다. 본왕이 사람을 시켜 계속 추적하게 할 것이니 안심하거라.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역시 신수빈이 예상한 그대로였다. 태후의 짓임을 알면서도 그는 끝내 못 본 척 한 것이다.신수빈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표정 속의 실망은 감출 수 없었다.그때, 태의가 들어왔다. 이도현이 소문을 두려워하지 않다고는 하나 여기는 신수빈의 방이었다. 그의 존재가 들키기라도 한다면 그녀의 명성에 해가 가기에 결국 측실 쪽으로 빠져나갔다.태의는 맥을 짚은 후, 처방을 내리며 당부했다.“마님의 태는 이미 안정되었고 큰 문제는 없사옵니다. 다만 다소 놀라신 것 같으니, 이틀 약을 복용하면 무사하실 것이옵니다.”신수빈은 자신이 멀쩡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방금 전의 창백한 얼굴은 모두 이도현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가 없으니 더는 연기할 필요도 없었다. 은보에게 태의를 보내드리라 하고 금자를 향해 말했다.“지금 먹을 만한 게 뭐가 있는지 보거라. 너희 자매도 하루 종일 굶지 않았느냐?”“왕야께서 이미 당부하셨으니 곧 음식을 가져올 것이옵니다.”신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도현이 다시 들어오지 않는 걸 보니, 이미 돌아간 듯했다. 그는 은보에게서 신수빈이 무사하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발길을 돌렸다. 어두운 표정을 지은 채 서난각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근처에 다다랐을 때, 그는 뭔가 떠오른 듯 걸음을 멈추었다. 그렇게 한참동안 멀리서 태후가 머무는 서난각을 바라보다가 자리를 떠났다.그는 거처에 도착하자마자 시위를 불렀다.“여인을 하나 찾거라. 출신은 상관없으니 본왕의 뜰로 들여보내면 된다.”시위는 잠시 멈칫했다. 왕야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이번이 두 번째였다.첫 번째는 다섯 달 전, 왕야가 궁에서 지독한 약을 맞고 돌아왔을 때였다. 돌아오자마자 그는 깨끗한 여인 하나를 찾으라 했는데 이번에도 또 필요해진 것일까?“왕야, 어떤 여인을 찾으시는 것이옵니까? 어떤 기준이시옵니까?”이도현은 한동안 침묵하
관사 환관은 머리의 땀을 훔치며 말했다.“윤씨 부인은 죽지 않았사옵니다. 물에 들어간 그 시녀가 구해서 지금 춘진각에 있사옵니다.”태후의 손에 들린 옥빗이 무심결에 떨어져 바닥에 부딪히며 두 동강이 났다.“그 시녀가 물에 들어갔을 때, 호수 바닥은 이미 피로 물들어 있었다! 한데 어째서 아직도 죽지 않았다는 것이냐?”“죽은 것은 자객 환관이랍니다. 이미 섭정왕께서 건져 올려 뼛가루까지 흩뿌리셨사옵니다.”태후는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그녀는 호수 바닥에 사람을 더 배치해두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신수빈 같은 연약한 여자가 물속에서 반항할 힘이 어디 있다고!“그는? 그는 지금 어디 있느냐?”관사 환관은 태후가 묻는 대상이 섭정왕이라는 것을 알고 그대로 아뢰었다.“섭정왕께서는 지금 춘진각에 계시옵니다.”태후는 이 말을 듣자 분노가 극에 달했다. 거울 속 일그러진 자신의 얼굴을 보고는 소매를 휘둘러 화장대 위의 것들을 모조리 쓸어 떨어뜨렸다.그 시각, 이도현이 급히 걸음을 옮겨 춘진각에 도착했을 때, 신수빈은 침상에 기대어 창백한 얼굴로 눈을 감고 있었다.촛불 아래 그녀의 피부는 거의 투명할 만큼 하얬고 길게 드리워진 속눈썹과 매끄럽게 이어지는 눈선이 부서질 듯한 비감함을 더욱 더해주고 있었다.이도현은 그녀를 놀라게 할까 두려워 발걸음을 조심스레 낮추었다.신수빈은 들려오는 발소리에 속눈썹을 미세하게 떨며 그대로 눈을 떴다. 이도현을 보자 평소에 봄샘 같은 그 두 눈에 물빛이 일더니 은은한 눈물기가 맺혔다.그의 마음은 그 순간 온갖 감정이 뒤섞였다. 기쁨인지, 두려움이 가신 후의 허탈인지, 혹은 마음 저미는 아픔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는 침상 앞으로 성큼 다가가 위아래로 그녀를 살폈다. 그의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은 단 한 문장으로만 흘러나왔다.“다친 곳은 없느냐?”신수빈은 수영을 잘해 다친 곳은 없고 단지 놀랐을 뿐이라고 금자가 이미 알려줬지만 그는 꼭 그녀의 입을 통해 듣고 싶었다.신수빈은 눈을 내리깔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서원은 유난히 넓었기에 끝내 금자가 신수빈을 업고 돌아왔다.그들이 춘진각에 당도했을 때는 이미 해시 말이 되어 있었다. 신수빈은 조용히 동쪽 행랑에서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금자에게 당부했다.“도련님께서는 어디까지나 외간 남자이시다. 만약 다른 사람들이 그가 물속에서 나를 구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온갖 험담을 해댈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지금부터 누가 묻는다면 네가 나를 물에서 구했고 밀림에서 길을 잃어 지금에서야 돌아왔다고 말하거라.”금자는 고개를 끄덕였다.“은보는?”신수빈이 묻자 금자는 그제야 동행랑에 그녀가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지금쯤 그 아이는 틀림없이 왕야에게 알리러 간 것일 터.“아마 왕야께 알리러 갔을 것이옵니다. 지금쯤이면 호숫가에 있겠지요.”“호숫가에 가서 한마디만 전하거라. 나는 무사하다고. 그리고 태의원으로 가 심신을 안정시키고 원기를 보하는 약 두 첩만 받아오거라.”금자는 신수빈이 혼자 동행랑에 남는 것을 걱정했다. 그러자 그녀는 웃으며 금자를 달랬다.“괜찮다. 주서화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니 지금 내가 살아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가보거라.”금자는 그제야 안심하고 호숫가로 향했다.한편 그 시각, 호숫가에는 수영에 능한 모든 금군이 거의 다 불려 와 있었다. 이도현은 검은 안색으로 호수 한가운데 배 위에 서서 불을 들고 계속 건져 올리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태후는 이미 궁으로 돌아갔고 관원들의 가족들도 모두 흩어졌다.잠시 후, 누군가 와서 아뢰었다.“왕야, 호수에서는 금비녀 한 가닥만 건져 올렸사옵니다. 죽은 환관 하나 외에는 아무것도 찾지 못했사옵니다. 당연히 윤씨 부인께서도 보이지 않았고요.”이도현은 그들이 바친 금비녀를 바라보았다. 바로 그날 밤, 시냇가에서 자신이 뽑아준 바로 그 비녀였다. 이렇게 큰 호수에서 누군가가 한마음으로 그녀의 목숨을 노렸는데 지금 그녀가 있을 곳은 어디란 말인가?“찾거라. 계속 찾아! 본왕은 시신이라도 봐야겠다!”지금의 이도현의 눈빛은 한겨울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저는 젊었을 적 세상과 운명을 원망한 적도 있었습니다. 하나 훗날 한 사람을 만났고, 그는 제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지요. 마음속의 악마를 이겨낼 수 있게 도와준 덕분에 다른 시선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게 되면서 이제는 그 소년 시절의 일들을 더 이상 마음에 두지 않게 되었지요.”신수빈은 그의 눈썹과 눈매 사이에서 번지는 그 온화하고 여유로운 기운을 바라보았다. 여러 강이 모이는 곳인 만천을 품고도 바다처럼 넉넉한 포용이 있는 듯한 모습은 윤서원과 하나도 닮지 않았다.“만약 세상 사람들이 모두 도련님과 같다면 얼마나 좋을까요?”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윤수혁은 고개를 옆으로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달빛이 나뭇잎 사이로 스며들며 어른거리는 사이, 그는 마치 그녀에게 한 겹 부드럽고 온화한 빛이 씌워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한마디 속에 담긴 인정과 칭찬이 말라 있던 그의 마음에 서서히 따스한 물길을 뿌려주는 것만 같았다.누구나 평양 후부에 쓸모없는 대공자가 하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문무도 제대로 못 하고 출신마저 좋지 않다는 말은 그가 어릴 적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것이었다.그런데 그녀의 입에서 이런 칭찬을 듣게 될 줄이야.윤수혁은 그렇게 멍하니 신수빈을 바라보다가, 사람의 인기척을 느끼자 즉시 정신을 바짝 차리고 경계를 세워 신수빈을 보호했다. 다가오는 이는 매우 조심스러워 보였다. 금자가 이쪽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따라온 것 같았다.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의 그림자를 본 금자가 조심스럽게 불렀다.“마님이시옵니까?”신수빈은 금자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기쁨에 벅차 경계하는 윤수혁을 급히 끌어당겨 물러서게 했다.“제 시녀입니다.”금자는 눈앞의 사람이 정말 신수빈인 것을 확인하자 곧장 달려와 그녀의 다리에 매달리며 엉엉 울었다.“마님, 저는 정말 죽은 줄 알았사옵니다. 호수 바닥에서 한참을 찾아도 마님께서는 보이지 않으시더군요. 한데 연꽃 숲 쪽에 사람이 지나간 흔적이 있
“그들이 호수에서 마님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틀림없이 이쪽으로 수색해 올 것입니다. 그러니 제가 먼저 마님을 데리고 빠져나가겠습니다.”윤수혁은 옷을 비틀어 물을 짜고는 고개를 돌려 신수빈에게 말했다. 그녀는 얇디얇은 여름 옷을 입고 있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물에 젖어 몸에 찰싹 달라붙었다. 원래부터 자태가 요염하고 굴곡이 뚜렷한지라 그 눈길을 끄는 가슴은 도무지 외면할 수 없을 만큼 도드라져 보였다. 윤수혁은 급히 고개를 돌려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신수빈은 지금 쉬어야 할 때가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윤수혁의 말에 짧게 응하고는 비틀거리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그의 뒤를 따라갔다.그들이 밀림 속으로 들어서자, 신수빈은 뒤에 바짝 따라붙으며 물었다.“큰 도련님께서는 제가 위험하다는 걸 어찌 아셨습니까?”윤수혁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간결하게 말했다.“이곳에 볼 일이 있어 왔다가 우연히 태후 곁의 관사가 금위군과 환관을 시켜 매복 살해를 꾸민다는 걸 들었습니다. 그때 마님의 이름을 언급하는 걸 듣고 미리 연꽃 숲에 숨어 있었지요.”신수빈의 얼굴은 그 순간 새하얗게 질렸다.윤수혁의 짧은 몇 마디 속에서 그녀는 이미 한 번 황천길을 다녀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지금 생각해도 오싹한 두려움이 밀려오는 것 같았다.“목숨을 구해주신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훗날 필요하신 일이 있다면 제가 반드시 온 힘을 다해 도울 것입니다.”“저한테까지 굳이 예를 차릴 필요는 없습니다.”윤수혁은 원래의 보폭으로 앞서 나가다가 그녀의 발걸음 소리가 점점 뒤처지는 것을 듣고는, 자신도 함께 속도를 늦추었다.“이 밀림을 지나고 앞에서 서원 쪽으로 돌아가면 곧 춘진각에 도착합니다.”신수빈은 그가 자신이 머무는 곳까지 알고 있다는 사실에 문득 의문이 들었다.“도련님께서는 이 행궁에 대해 아주 잘 아시나 봅니다?”윤수혁은 잠시 침묵하다 이내 입을 열었다.“두 번 정도 온 적 있지요.”윤수혁은 백신, 즉 지체는 높으나 벼슬을 얻지 못한 자일 뿐, 관직도 없기에 설령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