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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2화

作者: 정대천
“왕야 혼자서 괜찮으시겠습니까? 아니면 시녀들을 불러서 시중을 들게 할까요?”

“필요 없다.”

신수빈은 큰 수건과 향비누를 욕조 곁에 두고 밖으로 나와 화장대 앞에 앉았다.

시녀들은 이도현이 안에 있다는 것을 알고 감히 들어가지 못했다.

신수빈은 혼자 천으로 천천히 머리칼을 닦았다. 그녀의 머릿결은 풍성하고 길었다. 어릴 적부터 곱게 길러 온 검은 머리라 씻고 나면 쉽게 마르지 않았다.

그녀는 조심스레 닦으며 생각했다. 머지않아 백관들이 경성으로 돌아올 터이니 이제는 양회 염세의 일을 본격적으로 파고들 기회를 찾아야 했다.

셋째 오라버니의 일도 이제는 물고기가 걸려들기만을 기다리면 되었다.

그녀는 깊은 생각에 잠긴 나머지 이도현이 이미 몸을 씻고 밖으로 나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고 있는 것이냐?”

신수빈은 어깨에 무게가 실리며 따뜻한 기운이 전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가 이미 그녀의 뒤에 서 있었던 것이다.

신수빈은 아직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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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531화

    “좀 더 크면 이런 내실 여인들이랑 지내게 둘 수 없겠군. 안 그래도 멍청한데, 저 사람들 손에 길러져 더 멍청해지면 어쩌려고.”꼬마는 이제야 그를 본 탓에 기분이 한껏 좋아져 있었다.이도현의 목을 끌어안고 그의 얼굴에 뺨을 부비며 연신 까르르 웃었다.이제 아이는 막 백일을 넘긴 참이었다.관가든 평민 집안이든, 적자든 서자든 백일잔치는 크고 작게 몇 상쯤 차려 축하하는 법이었다.목욕 의식이나 만월연 같은 잔치도 빠지지 않았다.이도현은 아이를 바라봤다.신수빈과 꼭 한 틀에서 찍어 낸 듯 닮아 있었다.지금 이 모습 그대로 사람들 앞에 드러난다면, 분명 온갖 말들이 끊이지 않을 터였다.그러니 조금 더 자라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사내아이란 자라면서 이목구비가 점점 단단해지고, 여자아이 같은 부드러운 느낌도 차츰 옅어질 테니까.그때쯤이면 더는 누가 뭐라 하지 못할 것이다.꼬마는 아직 앵무새 놀이가 덜 끝난 모양이었다.앵무새를 방 안으로 들여오자, 이도현은 책상 곁에 앉아 책을 읽으며 아이를 반쯤 품에 안았다.아이는 가끔씩 앵무새를 향해 옹알거리듯 말을 걸었다.“바보 꼬맹이.”갑자기 앵무새가 한마디를 내뱉었다.이도현이 내려다보니 품 안의 꼬마는 신이 나서 까르르 웃고 있었다.그는 결국 웃음을 참지 못했다.“앵무새도 네가 바보인 줄 아는데, 혼자 좋다고 웃고 있네.”“바보 꼬맹이.”앵무새는 계속 같은 말을 반복했다.이도현은 웃으며 아이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속으로는 이제 더는 ‘바보 꼬맹이’라고 부르게 두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좀 더 크면 진짜 자기 이름이 바보 꼬맹이인 줄 알 테니까.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앵무새가 또다시 떠들기 시작했다.“바보 꼬맹이, 왕야 바보...”“왕야 바보...”발가락으로 생각해도 누가 가르쳤는지 뻔했다.시녀들에게 백 개의 간을 줘도 감히 저런 말을 가르칠 리가 없었다.이도현은 그 순간 열이 치밀어 올랐다.그러나 곧 신수빈이 앵무새를 가르치며 눈이 휘어지게 웃고 있었을 모습을 떠올리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530화

    이도현이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민 씨 뒤에 서 있던 초담은 끝내 고개를 들지 않았다. 섭정왕을 배웅할 때조차 시선은 계속 바닥에 있었다.이도현이 떠나자마자 민 씨는 손에 들고 있던 뜨거운 찻잔을 그대로 집어던졌다.찻잔은 초담의 이마 끝을 스치며 깨졌고, 뜨거운 차가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초담은 급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제가 무엇을 잘못해 어머니 심기를 거슬렀는지 모르겠습니다. 부디 노여움을 거두어 주세요.”민 씨는 안쪽 방으로 들어가 부드럽지만 질긴 얇은 대나무 자를 들고 나왔다.그러고는 손을 들어 그대로 초담의 뺨을 후려쳤다.초담은 고통에 짧게 신음했지만, 감히 몸 하나 움직이지 못했다.이런 부드러운 죽척은 가장 아프게 때리면서도 흔적은 남기지 않는 물건이었다.청루에서 기녀들을 길들일 때 흔히 쓰는 도구이기도 했다.“장안으로 오기 전에 내가 뭐라고 했느냐? 섭정왕을 만나면 네가 평소 배운 수법들을 전부 쓰라고 하지 않았더냐. 세상에 천진난만하고 교태 부리는 여자를 싫어하는 사내가 어디 있느냐. 헌데 넌? 내내 고개만 처박고 있었지! 차를 따르라 해도 못 들은 척이나 하고, 그분 눈에 띌까 겁이라도 난 사람처럼 굴더구나. 차라리 벽 틈에 숨어 버리지 그랬느냐?”초담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곧이어 두 번째 죽척이 날아들었다.양쪽 뺨이 화끈거리며 아팠지만, 그녀는 이를 악문 채 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입 다물고 버티겠다는 거냐? 좋아. 네 입이 센지, 내 수단이 센지 한번 보자꾸나!”민 씨의 손이 다시 연달아 내려쳤다.찰싹, 찰싹.결국 초담이 더는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엎드린 채 애원했다.“어머니, 제발 그만하세요. 제가 섭정왕 앞에서 교태를 부리기 싫었던 건... 지금은 예전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어머니와 제가 천한 신세라 스스로를 지킬 수 없었으니, 이 몸 하나로 권세가들 사이를 떠돌 수밖에 없었어요. 헌데 이제는 사촌 오라버니께서 황족이시고, 천하를 거느리는 섭정왕이십니다. 누가 감히 우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529화

    며칠 전부터 민 씨와 일행은 이미 경성에 들어와 있었다.하지만 이도현은 그동안 신수빈과 냉랭한 기류 속에 있었던 탓에 그 일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마침 며칠 숨 돌릴 틈이 생기자, 이제는 한번 찾아가 봐야겠다고 생각했다.무엇보다 생전의 모비께서 늘 그 여동생을 마음에 두고 계셨으니까.장녕이 마련한 저택은 선양방에 자리 잡고 있었다.권문세가들이 모여 사는 내성에서도 멀지 않았고, 일반 백성들이 사는 거리보다는 궁성과도 가까운 곳이었다.이도현이 도착했을 때, 저택 안에서는 맑고 서늘한 거문고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그는 걸음을 멈춘 채 잠시 귀를 기울였다.단단하고 맑은 음색이었다.규방 여인들의 애달프고 처연한 선율과는 전혀 달랐다.잠시 듣고 있던 그는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민 씨는 섭정왕이 왔다는 말을 듣고 딸과 함께 급히 나와 맞이했다.그 순간 거문고 소리도 멎었다.“섭정왕을 뵙습니다.”모녀는 함께 무릎을 꿇었다.이도현이 곁의 시종을 힐끗 바라보자, 시종은 곧장 앞으로 나가 두 사람을 일으켜 세웠다.이도현의 시선은 민 씨에게 머물렀다.모비가 세상을 떠난 지도 오래였다.그는 끝내 마지막 임종조차 지키지 못했다.그의 기억 속 모비는 아직도 열다섯 살 그해, 회하 전선으로 떠나던 자신을 붙잡고 조용히 당부를 건네던 모습 그대로였다.그런데 이 민 씨는 생각보다 훨씬 모비를 닮아 있었다.마흔을 넘긴 나이였지만 관리를 잘한 탓인지 삼십 대 초반처럼 보였다.마치 모비가 눈앞에 살아 돌아온 듯했다.다만 그녀 몸에 밴 풍진의 기운만큼은 숨길 수 없었다.단아하고 온화했던 모비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모비께서는 생전 내내 이모를 그리워하셨습니다. 폐하께서도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수소문하셨지만 끝내 찾지 못하셨지요. 모비께서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늘 마음에 담고 계셨습니다. 이제라도 이모를 찾게 되었으니, 모비께서도 하늘에서 편히 눈을 감으실 겁니다.”민 씨는 눈앞의 권세 높은 남자를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이윽고 눈가를 붉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528화

    신수빈은 윤수혁의 이름을 듣고나서 잠시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윤수혁은 여러 번 그녀를 구해 준 사람이었으니, 그녀 역시 그에게 악감정은 없었다.그러나 행궁에서 벌어졌던 암살 사건만큼은 여전히 마음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윤수혁과 이도현 사이에 원한은 없었지만, 그의 친구는 분명 이도현의 목숨을 노리고 있었다.그때 그녀는 윤수혁이 자신을 구해 준 은혜를 생각해 그를 도와주었다.하지만 이제 윤수혁이 점점 이도현의 중용을 받게 될수록, 그녀는 어쩐지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중상을 입은 사내가 들것째 마차에 실렸다.잠시 후 윤수혁이 앞으로 나와 두 손을 모아, 호국사 입구에 서 있는 신수빈에게 예를 올리며 말했다.“바람이 거세니 호국부인께서는 안으로 드시지요.”이제 그녀는 윤 가로 돌아가지 않을 터였다.그러니 제수씨라는 호칭은 아무래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설령 부른다 한들, 이미 너무 어울리지 않는 말이 되어 버렸으니까.호국부인.그 호칭은 오직 만인 위에 선 권신만이 곁에 둘 수 있는 여인에게 어울렸다.신수빈은 잠시 마차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윤수혁에게 옮겼다.“아주버님, 저 사람은 상처가 너무 깊습니다. 제게도 아주 중요한 사람이고요. 부디 무사히 데려다주십시오.”“염려 마십시오. 왕야께서도 이미 당부하셨습니다.”윤수혁은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그렇지 않았다면 이도현이 그를 중용할 리 없었다.윤수혁이 몸을 돌려 떠나려던 순간, 신수빈이 조용히 그를 불러 세웠다.“아주버님, 그 친구분은 지금 어떻게 지내십니까?”윤수혁의 걸음이 멈췄다.그는 신수빈을 바라봤다.구름 사이에 숨은 달빛처럼, 그의 표정은 어딘가 복잡해져 보였다.한참이 지나서야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아직 경성에 있습니다. 헌데 뜻이 다르면 함께 갈 수 없는 법이지요. 갚아야 할 은혜는 이미 다 갚았습니다. 이제는 그 사람의 인생까지 책임질 수는 없습니다.”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낮게 덧붙였다.“만약 또다시 일을 그르친다면... 그땐 저도 더는 관여하지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527화

    발길질이 몇 번이나 신수빈의 몸에 닿았다.그녀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겨우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가 다시 감고는, 잠에 취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내일 다시 놀아 줄게...”정말 지칠 대로 지쳐 있다는 게 느껴졌다.이도현은 꼬마를 슬쩍 끌어안아 바깥쪽으로 옮긴 뒤 낮은 목소리로 으름장을 놓았다.“이 녀석, 좋게 해 주니까 분수를 모르네. 안 자면 혼자 재워 버린다?”하지만 아이는 이도현이 자기와 놀아 준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까르르 웃으며 그의 손가락을 붙잡고는 옹알거리며 한참 말을 걸었다.잠시 후, 놀다 지쳤는지 이도현이 다시 아이를 두 사람 사이에 눕혀 놓자 금세 잠이 들었다.이도현 역시 몹시 피곤한 상태였다.어제부터 지금까지 한숨도 자지 못한 탓이었다.다음 날 아침, 이도현은 일찍 눈을 떴다.곁에 놓인 손그림 지도와 위조 은화를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던 그는 눈빛을 깊게 가라앉혔다.그리고 모자를 위해 이불을 다시 잘 덮어 준 뒤,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갔다.신수빈이 눈을 뜬 건 해가 중천에 오른 뒤였다.오랜만에 몸도 마음도 개운했다.하지만 방 안에는 이준우도, 그 남자도 보이지 않았다.그러다 마당에서 이준우의 웃음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곧바로 겉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복도 아래에는 앵무새 한 마리가 걸려 있었다.시녀들은 재미있다는 듯 먹이를 내밀며 말을 따라 하라고 놀려 대고 있었다.“앵무새는 어디서 난 것이냐?”청하가 웃으며 답했다.“마님, 전에 왕야께서 도련님께 보내 주신 겁니다. 어제 오후에 도련님께서 계속 기운이 없으셔서, 제가 왕부에 들러 가져왔습니다.”다만 청하는 차마 진짜 이유는 말하지 못했다.‘저 녀석 말이 너무 많으니까 앵무새라도 하나 붙여 두거라.’그게 이도현이 원래 했던 말이었다.신수빈은 빛깔 고운 앵무새를 보며 흥미롭다는 듯 웃었다.“무슨 말까지 할 줄 아는데?”앵무새를 키우던 어린 시녀가 얼른 앞으로 나와 공손히 답했다.“마님께 아룁니다. 이 앵무새는 제가 직접 길렀는데, 할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526화

    신수빈은 한참 동안 아무말도 하지 않다가, 울다 지쳐 잠든 아이를 유모에게 넘긴 뒤, 조용히 입을 열었다.“물 좀 준비해 주거라. 씻고 나갈 것이다.”그녀가 정원에 도착했을 때, 정자 안에는 두 손을 뒤로 한 채 서 있는 이도현의 뒷모습이 보였다.신수빈은 마음 한쪽이 저릿해지는 걸 느끼며 천천히 걸어갔다.그의 뒤 몇 걸음쯤 떨어진 곳에 멈춰 선 그녀는 잠긴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며칠 전, 성 밖에서 크게 다친 사람 하나를 구한 적이 있습니다. 그날 함께 있던 낭화 언니께서 그러더군요. 그 사람을 쫓던 자들이 장씨 가문 사람들 같다고요. 그 말을 듣고 저도 이 일이 장씨와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고 짐작했어요.”그녀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다시 말을 이었다.“그 사람은 상처가 너무 깊어서 계속 의식을 찾지 못했습니다. 몸에 지니고 있던 주머니 안에서는 위조 은화 몇 닢과 손으로 그린 지도가 나왔고요. 치료받는 동안 정신이 들락날락할 때마다 사광이며 은 주조 이야기들을 중얼거렸어요. 그래서 감히 짐작했죠. 이 일이 장씨 가문과 무관하지 않다고.”“처음엔 곧바로 왕야께 편지를 쓰려고 했습니다. 헌데 곧 왕야께서 제게 하셨던 말씀이 떠올랐어요. 여 귀비 마마께서 장씨 가문에 큰 은혜를 입었고, 왕야께서는 여 귀비 마마의 유언 때문에 장씨 자손들의 평안과 부귀를 지켜 주기로 했다던 말이.”그녀는 눈을 내리깔았다.“그래서 망설였지만, 제가 직접 끝까지 확인해 보고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말 장씨 가문과 관련이 있다면... 반드시 일을 크게 만들겠다고요. 온 세상이 다 알게 해서, 왕야께서도 더는 그들을 감싸지 못하게 만들겠다고 생각했습니다.”신수빈은 두 걸음 앞으로 다가가 바로 그의 뒤에 섰다.“제멋대로 행동한 거 맞습니다. 어젯밤엔 이곳에서, 왕야 앞에서까지 속셈을 부렸습니다. 제가 왕야를 실망시켜 드렸네요. 벌을 내리셔도, 꾸짖으셔도... 저는 다 받겠습니다.”그녀가 치맛자락을 걷어 죄를 청하려던 순간, 이도현이 돌아서며 그녀를 그대로 끌어안았다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73화

    지난번 책봉을 받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궁에 들어가 감사의 예를 올려야 했다.다음 날 이른 새벽, 궁중에서 이미 전갈이 내려왔다. 신수빈은 서둘러 일어나 청하의 시중을 받아 고명복을 단정히 입고 마차에 올라 궁궐로 향했다. 이번에는 청하를 데리고 가지 않고 은보만 동행시켰다. 궁문 안으로 들어서면서 은보의 침착한 얼굴빛과 신중한 거동을 살펴보던 신수빈은 자신의 추측이 점점 더 확신으로 굳어가는 것을 느꼈다. 궁 안으로 들어가자 작은 가마가 준비되어 있었고 그녀는 그 위에 앉아 느릿느릿 영수궁을 향해 나아갔다.그 시각 바깥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67화

    후부 내의 장부들은 모두 창란원에 모여 있었으나 신수빈은 책을 뒤적이지도 않고 손가락으로 가볍게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저쪽이 바로 분가 이후, 이십 해 가까이 이방과 삼방의 점포와 전답에서 들어온 수지 기장입니다. 옛 평양후께서 세상을 떠난 지도 십 해가 되어가죠. 그 십 해 동안은 조모님 곁을 지키던 배필 관사들이 매달, 매해의 출납을 빠짐없이 적어 두었습니다. 그중 몇몇 의복 가게들은 천하가 평정되면서 남쪽에서 진상된 촉비단과 소주 자수가 경중을 휩쓸자 진부한 양식만 내놓던 가게들은 매해 적자를 면치 못했습니다. 거기에 세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33화

    금자는 주먹을 쥐고 남자에게 다가갔다. 불과 몇 번의 동작만에 남자는 땅에 나가떨어졌고 청하는 재빨리 여자를 부축했다. 신수빈은 다가가 두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키고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주며 얼굴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여인은 신수빈이 분명 어느 대가의 귀한 부인임을 알아차리고 두 아이를 데리고 얼른 무릎을 꿇어 절을 했다. 신수빈은 그녀들을 일으켜 세웠다."어찌하여 그자와 이혼하지 않으시고 이리도 그에게 휘둘리며 고생만 하십니까?"여자는 목이 메어 답하였다. "이혼이 말이 쉽지, 친정에서도 저를 받아주지 않을 터이고 무엇보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18화

    그의 손은 왼손 호구 자리에 희미하게 남은 이자국을 천천히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것은 어젯밤, 신수빈이 자해하지 못하도록 막다가 그녀에게 물린 자국이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보니 감히 그와 눈을 마주치는 자는 없었고 모두가 저절로 머리를 떨구었다.이제서야 모두는 깨달았다. 소위 고명대신, 삼족정립의 형세는 모두 허상일 뿐, 실로 생사대권을 손에 쥐고 있는 자는 줄곧 이도현 한 사람뿐이었다.검시관이 계속 시신을 살폈고 조정에는 감히 다시 입을 여는 자가 없었다.동각대학사, 내각차보라 할지라도, 그가 죽이라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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