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하지율의 실밥을 제거한 뒤, 안병철은 다시 한번 그녀의 손 상태를 꼼꼼히 살폈다.그러다가 안병철은 고개를 끄덕였다.“회복 상태는 좋아요. 하지만 앞으로 3개월 동안은 무거운 물건을 들지 마시고 1년 동안은 손을 과하게 사용하지 마세요.”잠시 말을 멈춘 안병철은 다시 입을 열었다.“앞으로 1년 동안은 제가 이곳에 머물 예정입니다. 회복 경과를 수시로 확인하기 위해서요. 수술한 손에 문제가 생기거나 다치면 언제든 저를 찾아오시면 됩니다.”안병철이 M국에 남아 하지율이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지켜보겠다고 한 것은 엄청난 호의였다.그러자 하지율이 대답했다.“치료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안 어르신, 혹시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저희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반드시...”말이 끝나기도 전에 안병철이 무뚝뚝하게 하지율의 말을 끊었다.“그럴 필요는 없어요. 이미 충분한 치료비를 받았는데 또 받을 이유가 없지요.”그러더니 안병철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주용화를 바라봤다.“더구나 제가 원하는 보상은 아무나 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저 젊은이도 마찬가지고요.”주용화의 눈빛이 깊어졌다.“실례가 안 된다면 무엇을 원하시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그때 옆에 있던 단종건이 헛기침을 했다.“별거 아니야. 약 처방일 뿐인데 저 자식이 괜히 허세 부리는 거지.”단종건은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됐어. 둘 다 볼일 없으면 가 봐. 나도 이 늙은이랑 처방을 연구해야 하니까.”그러자 안병철은 눈썹이 치켜 올라갔고 늘 무표정하던 얼굴에도 드물게 분노가 드러났다.“단 어르신이 오히려 저보다 두 살이나 더 많으면서 누굴 늙은이라 그래요? 이 늙은 거북이 같은 인간 말이죠!”두 사람을 합치면 백오십 살 가까이 되는 나이였지만 이어진 말다툼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단종건이 버럭했다.“네가 더 거북이 같은 인간이지!”그러자 안병철도 지지 않았다.“단 어르신은 곧 무덤 들어갈 늙은이잖아요!”“꺼져!”“꺼져야 할 쪽은 그쪽이라고요!”걷잡을 수 없이 싸우는 두
안병철은 주의 사항을 설명한 뒤 덧붙였다.“보름 뒤에 다시 오세요. 그때 실밥을 제거하겠습니다.”주용화는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감사합니다, 선생님.”그러자 안병철이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을 흘렸다.“저한테 감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그저 부탁을 받았을 뿐이니까요.”주용화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어딘가 석연치 않은 기색이 스쳤다.하지만 더 묻기도 전에 침대 위의 하지율이 천천히 눈을 떴다.주용화의 시선은 순식간에 하지율에게 향했다. 그리고 곧장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지율 씨, 괜찮아요?”하지율은 몽롱한 눈으로 몇 번 눈을 깜빡였다.마취가 완전히 깨지 않은 탓에 머릿속이 잠시 텅 빈 듯했다.꿈을 꾼 것 같았다.‘분명 손형원이 나오는 꿈이었는데...’왜 그런 꿈을 꾸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며칠 전 안병철을 만나고 돌아갈 때, 하지율은 손형원이 아직 살아 있는지 묻지 않았다.이제 손형원이 살아 있든 죽어 있든 하지율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손형원과의 인연도 악연도 이미 끝났고, 두 사람 사이의 모든 일 역시 오래전에 정리됐다고 생각했다.하지율은 눈을 몇 번 깜빡이며 초점을 맞췄다.이내 정신을 차린 하지율은 눈앞의 남자를 바라봤다.수려하고 단정한 이목구비가 시야에 들어오자, 하지율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화야 씨...”주용화는 하지율의 손을 잡아 주고 싶었다.하지만 수술한 손을 건드릴까 봐 선뜻 손을 뻗지 못했다.드물게도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었다.하지율은 그런 주용화의 마음을 알아차리고는 다치지 않은 손을 들어 주용화의 손을 가볍게 감쌌다.주용화의 손끝은 서늘하게 느껴질 정도로 차가웠다.하지율은 그 손끝에 밴 긴장감을 느낄 수 있었다.수술실 밖에서 기다린 몇 시간이 쉽지 않았던 모양이었다.지금 이 순간의 주용화는 평소와 달랐다.그저 사랑하는 사람을 걱정하는 평범한 남자일 뿐이었다.하지율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화야 씨, 그렇게 긴장 안 하셔도 돼요.”하지율은 살며시 손에 힘을 주었다.“보세
밤이 깊어졌다.그 시각 하지율은 이미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한편, 주용화는 휴대전화를 들고 병원 복도 창가에 서 있었다.“일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어?”전화기 너머로 유민재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연정미는 삼각지대에서 레일 국왕에게 납치된 일을 겪은 뒤부터 신변 안전에 극도로 민감해졌습니다.”유민재는 차분하게 보고를 이어 갔다.“현재 연씨 가문뿐 아니라 심씨 가문과 단씨 가문에서도 보호 인력을 붙여 놓은 상태입니다. 경호가 상당히 철저합니다. 특히 연재영 씨 사고 이후로는 더욱 조심하고 있어서 접근할 기회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여기는 어디까지나 M국이었다. 상대의 세력권 안에서 사람을 납치하는 일은 절대 쉽지 않았다.주용화는 그 보고를 듣고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미 예상하였다는 듯 담담하게 물었다.“조사하라고 했던 일은 어떻게 돼가?”유민재가 즉시 답했다.“대표님 예상대로였습니다. 그 사람은 죽지 않았습니다.”유민재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다만 화상을 심하게 입었습니다.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얼굴이 훼손됐다고 합니다.”주용화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연정미가 약혼한다는 소식을 그 형제들에게 흘리도록 해.”유민재는 순간 숨을 삼켰다.“알겠습니다.”통화가 끝났다.그러나 주용화는 곧바로 병실로 돌아가지 않았다. 주용화는 창가에 선 채 한동안 밤하늘을 바라봤다.주용화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지율 씨와 내 사이를 가로막으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상관없어. 단 한 사람도 예외는 없어!’...며칠 뒤, 하지율은 수술실로 들어갔다.하지율의 수술은 생명에 지장을 주는 위험한 수술은 아니었다.다만 고도의 정교함이 요구되는 수술이었다.평생 집도의로 살아온 단종건도 이번만큼은 안병철의 보조 역할을 맡았다.안병철과 단종건은 수술 기구와 의료 장비를 하나하나 점검했다.모든 준비가 끝나고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 마
손형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안병철은 그런 손형원을 보며 혀를 찼다.“원래 좋아하는 사람에게 호감을 그런 식으로 표현하세요?”안병철은 어이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몰래 지켜보기나 하고, 뒤에서 사람을 시켜 소식이나 알아보고, 틈만 나면 슬그머니 찾아가 말 몇 마디 나누는 게 맞는 건지 생각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건 구애가 아니라 염탐입니다.”안병철의 목소리에는 핀잔이 가득 담겨 있었다.“본인만 만족하면 다입니까? 정작 하지율 씨는 아무 감정도 없는데 말입니다. 상대가 받아주지 않는다고 납치부터 해 버리다니,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겁니까?”안병철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하지율 씨가 형원 씨를 싫어하지 않게 된 것만 해도 다행입니다. 그런데 좋아해 주기까지 바라십니까?”안병철은 손형원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혀를 찼다.“젊은 사람이면 낭만도 좀 알고 그래야 할 텐데, 어째 나 같은 늙은이보다도 연애에는 더 서툰지 모르겠군요.”손형원은 한동안 침묵하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선생님, 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안병철은 순간 말을 잃은 듯 손형원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터뜨렸다.“그걸 이제 와서 묻습니까?”안병철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일단 몸부터 추스르십시오. 지금처럼 죽어가는 얼굴로 누구 마음을 사로잡겠다는 겁니까? 그러다가 하지율 씨를 만나기도 전에 형원 씨가 먼저 죽겠습니다.”손형원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안병철은 이미 그런 손형원에게 익숙해져 있었다.워낙 말수가 적고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성격이라 이제는 놀랍지도 않았다.안병철은 답답하다는 듯 한동안 잔소리를 이어갔다.마음에 들지 않는 제자를 나무라는 스승처럼 몇 마디를 더 쏟아낸 뒤에야 안병철은 하지율의 수술 준비 자료를 펼쳐 들었다.그리고 곧 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했다....하지율의 수술 일정은 빠르게 확정됐다.그 무렵 하지율은 심다희와 따로 만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대화를 나누던 중 심다희가 연정미와 심수현의 약혼 소식을 꺼냈다.
하지율은 잠시 말없이 안병철을 바라보다가 이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당연히 치료받아야죠.”안병철의 눈에 미묘한 흥미가 스쳤다.“하지율 씨는 젊은 나이치고 꽤 현실적인 분이군요.”안병철은 콧등에 걸친 안경을 밀어 올리며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저는 흔히 말하는 인술을 베푸는 의사가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 사는 이야기에 더 관심이 많은 편이지요.”안병철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천천히 말했다.“그래서 저만의 기준도 조금 다릅니다. 치료를 부탁하는 이유가 제 마음을 움직이면 수술을 맡고 그렇지 않으면 거절합니다.”안병철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그런 기준이 있다 보니 평생 수많은 환자를 만났고, 저를 찾아와 사정하는 사람도 많이 봤습니다. 서로 깊은 원한이 얽힌 경우도 적지 않았고요.”안병철의 시선이 하지율에게 머물렀다.“그런데 의외로 많은 사람이 자신이 미워하던 사람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못하더군요. 병을 고칠 수 있는데도 거부하더라고요. 차라리 평생 치료받지 않겠다고 버티면서까지 상대를 용서하지 않으려 했습니다.”하지율의 표정은 끝까지 덤덤했다.“그 사람의 잘못 때문에 제 인생까지 망칠 필요는 없으니까요.”안병철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손이 완전히 회복된다면 손형원 씨를 더는 원망하지 않으실 겁니까?”“네.”짧고 단호한 대답이었다.안병철은 이유를 묻지 않았다. 대신 하지율을 바라보는 눈빛에 옅은 호감과 감탄이 더해졌다.“정말 보기 드물 만큼 영리한 아가씨군요. 손형원 씨가 그토록 큰 대가를 치른 보람이 있네요.”하지율의 눈빛이 가볍게 흔들렸다.하지만 하지율은 끝내 어떤 대가를 치렀는지 묻지 않았다.안병철 역시 굳이 설명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안병철은 진단서에 몇 가지 내용을 적어 넣은 뒤 검사 결과지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그리고 하지율을 향해 말했다.“수술 전에 준비해야 할 것들이 있어서 일정은 다음 주 월요일로 잡겠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네, 괜찮습니다.”“좋습니다. 그렇게 하죠.”하지율은 자리에서
안병철은 주용화를 한번 바라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그저 제 원칙일 뿐입니다. 받아들이기 어려우시면 진료를 거절하셔도 됩니다.”분위기가 팽팽하게 얼어붙으려는 순간, 단종건이 먼저 입을 열었다.“화야, 여기는 내 집이나 다름없어. 나를 못 믿겠느냐?”하지율도 곧바로 거들었다.“화야 씨, 괜찮아요.”하지율의 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주용화 역시 잘 알고 있었다.주용화는 더 이상 고집하지 않고 발걸음을 멈췄다.“알겠습니다.”하지율과 안병철이 진료실로 사라지자, 단종건이 말했다.“어차피 기다릴 거면 나랑 바둑이나 한 판 두자.”주용화는 거절하지 않았다.“좋습니다.”...30분 뒤.단종건은 몇 번이나 수를 무르며 버텼지만 결국 대국에서 패하고 말았다.단종건은 희끗희끗한 수염을 쓸어내리며 바둑판을 내려다봤다.“평생 바둑을 두고 살아온 내가 너 같은 후배한테 이렇게 맥없이 질 줄은 몰랐구나. 역시 주씨 가문은 인재가 끊이지 않는군.”주용화는 담담하게 답했다.“어르신께서 봐주신 덕분입니다.”단종건은 눈을 들어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주용화를 바라봤다.“불길이 너무 거세면 남을 태우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결국 자신마저 집어삼키고 말지. 원래 너는 이토록 살기가 짙고 험한 기운을 품은 아이가 아니었는데.”주용화는 바둑판 위에 놓인 대마를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지켜야 할 것이 생기면 누구든 달라지는 법입니다. 무엇이든 감수하게 되고, 어떤 대가도 마다하지 않게 되죠.”주용화는 문득 화제를 돌렸다.“단아 그룹을 지금의 규모로 키워 오신 걸 보면 어르신 역시 평범한 분이 아니십니다. 오래전부터 꼭 한번 여쭤보고 싶었던 게 있습니다.”단종건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말해 봐라.”“후계자를 바꿀 생각은 없으십니까?”그 순간 단종건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조금 전까지 여유를 담고 있던 눈빛이 순식간에 매서워졌다.“너 이 자식, 이제는 본심을 숨길 생각조차 안 하는구나?”주용화는
최근 하지율과 정기석의 사이가 점점 가까워졌다.지내다 보니 뜻밖에도 정기석에게 그녀와 비슷한 취미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정기석도 음악회에 가는 걸 좋아했고 대학교 시절에는 바이올린을 부전공하기도 했다. 하지만 회사를 물려받아야 했기 때문에 나중에 흐지부지되었다.바이올린 실력이 뛰어나진 않았지만 음악에 대해 얘기할 땐 독특한 견해를 많이 가지고 있어 하지율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예전에 정기석은 하지율을 돕기 위해 일부러 고지후 앞에서 더욱 다정하게 얘기했다. 이제 두 사람은 친구가 되었고 정기석도 적응되어 계속해서 다정하게
하지율 팀이 못해서가 아니라, 문제는 따로 있었다.“하지율, 진짜 너무 대단하네. 해리랑 같은 급인 거야?”“현성 대가가 일부러 해리를 불러 임채아를 받쳐 준 건데... 이런 상황에서는 둘 다 만점이라고 해도 결국 임채아는 하지율을 못 이긴 거야.”“현성 대가는 무슨 생각일까? 임채아랑 하지율 사이에서, 하필 임채아를 제자로 받다니.”“그러게. 실력, 외모, 기품, 재능. 다 봐도 하지율이랑 비교가 안 되잖아?”심사 위원이 말했다. “우리는 공정, 공평의 원칙으로 채점했습니다. 이번은 팀전이고, 하지율 씨와 강병주 씨는
유소린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화야를 바라보며 물었다. “움직여요? 뭘요?”주용화는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담담히 대답했다. “당연히 해리의 손을 못 쓰게 만들어 무대에 오르지 못하게 하는 거죠. 그렇게 하면 오늘의 추가 대결 자체가 성립되지 않으니까요.”유소린이 멍하니 되뇌었다.“해리의 손을 망가뜨려서... 그러면 해리가 아예 경기에 나갈 수 없게 만들겠다는 뜻인가요?”주용화가 미간을 올리며 되물었다.“그럼 설마 정말로 다시는 바이올린을 켤 수 없게 만들자는 그 사람의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이란 말인가요?”유소린이 고개를
함우민은 하지율이 무엇을 가장 신경 쓰는지 알고 있었다.임채아. 그 이름은 언제나 하지율 마음에 박힌 가시였다.하지율이 임채아 때문에 누명을 썼을 때 증거를 내보이지 않았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하지율에게, 하지율의 남편이 어떻게 다른 여자를 어떻게 감싸고 도는지를 직접 보게 하고 싶었다.그래야 하지율이 고지후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접을 테니까 말이다.하지율은 천천히 기억을 더듬었다.“둘이 아는 사인지는 모르겠어요. 다만... 내 쪽에서 새어나간 일은 없고, 화야 씨는 오히려 여러 번 날 구해줬어요.”“그게 둘이 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