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전화를 끊은 하지율은 심다희를 바라보며 말했다.“다희야, 큰오빠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는데 같이 가 볼래?”심다희는 예상하지 못한 소식에 눈을 깜빡였다.“교통사고? 재영 씨가 왜 사고를 당한 거야?”“나도 자세한 건 못 들었어. 가 봐야 알 것 같아.”심다희는 잠시 말이 없었다.몇 초 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심다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나도 같이 갈게.”...병원에 도착했을 때 수술실 앞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연태훈과 연상진, 연상준, 연정미가 나란히 있었고, 한쪽에는 마치 남의 일이라는 듯 무심한 표정의 소아린도 서 있었다.하지율을 발견한 소아린이 그제야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지율 씨, 오랜만이에요. 유소린 씨는 안 왔어요?”소아린과 유소린은 성격이 비슷했다.둘 다 직설적이고 뒤끝이 없는 편이라 금세 친해졌고, 만나기만 하면 이야기꽃이 끊이지 않았다.“소린이는 아직 처리할 일이 남아 있어서요. 아마 조금 더 지나야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아요.”얼마 전 유소린의 집안에 일이 생겼다. 공항에서 하지율을 배웅한 뒤 곧바로 돌아가 문제를 처리하고 있었기에 그 뒤로는 연락할 시간조차 많지 않았다.그래서 유소린은 함우민이 하지율을 일주일 동안 감금했던 일도 아직 알지 못했다.하지율이 M국으로 돌아오기 전 연락했을 때도 유소린은 당분간 함께할 수 없다고 말했었다.소아린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최근 유소린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잔뜩 생겼기 때문이었다.그때 연태훈의 시선이 하지율 옆에 있던 심다희에게 향했다.연태훈은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다희도 왔구나.”“네. 지율이랑 같이 있다가 재영 씨 사고 소식을 듣고 바로 왔어요.”심다희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아저씨, 재영 씨 상태는 어떤가요?”그 말을 들은 연태훈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아직 수술 중이다. 상태가... 좋지 않구나.”심다희는 곧바로 되물었다.“좋지 않다는 게 어느 정도인데요?”연상준이 담담한 목소리로 대신 답했다.“아직
주용화는 고윤택을 품에 안으며 아무도 듣지 못할 만큼 낮은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고맙다.”잠시 뜸을 들인 주용화가 나직이 말을 이었다.“그리고... 미안하다.”고윤택의 눈에 의아함이 스쳤다.주용화가 왜 갑자기 사과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하지만 무슨 뜻인지 물어보려던 순간, 주용화는 이미 몸을 일으킨 뒤였다.주용화는 고윤택의 머리를 한번 가볍게 쓰다듬고는 하지율의 손을 잡고 천천히 출국장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M국, 연씨 가문.손형원의 지분 이전 절차가 무산된 데다 해당 지분마저 동결됐다는 소식을 들은 연정미는 더 이상 평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연정미는 헛웃음을 흘렸다.“정말 예상도 못 했네. 손형원이 다른 여자를 위해 나를 상대로 수를 쓸 줄이야.”손형원이 미리 대비해 두지만 않았어도 이번 계획은 성공할 가능성이 높았다.하지만 지금은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것은 물론이고 훨씬 큰 손실까지 떠안게 됐다.연정미는 아무것도 손에 넣지 못했다. 게다가 함우민이라는 패도 사실상 쓸모를 잃었다.한때 연정미를 위해 온갖 악행도 서슴지 않았던 손형원이 이제는 오히려 가장 큰 걸림돌이 되어 버렸다.그런 아이러니한 현실은 연정미에게 큰 배신감과 괴리감을 안겼다.그 때문에 연정미는 주용화보다도 손형원을 더 증오하게 됐다.반면 연재영은 크게 실망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손형원은 한 가문의 가주였어. 이런 상황까지 대비해 뒀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지. 손형원이 훗날 우리에게 걸림돌이 될 줄 알았다면, 그때 그렇게 쉽게 놔주지는 않았을 거야.”연정미는 차갑게 웃었다.“소용없어. 손형원이 하지율에게 마음을 주기 시작한 순간부터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었으니까.”연재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그래도 손형원의 지분이 동결된 건 우리에게 꼭 나쁜 일만은 아니야. 적어도 하지율이 당장 그 지분을 상속받아 나를 밀어내는 일은 없다는 뜻이지. 반년이면 충분해. 그동안 판을 뒤집을 방법을 찾을 수 있어.”연정미는 연재영을 바라보며 옅게
하지율은 예상치 못한 말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좋은 소식이요?”단종건은 웃음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네 손이 다시 좋아질 수도 있을 것 같구나.”하지율은 순간 숨을 멈췄다.너무도 뜻밖의 이야기였다.자신이 잘못 들은 것은 아닌지 확인하듯 다시 물었다.“어르신,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단종건은 웃으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지율아, 네 손이 회복될 가능성이 있단다. 성공 확률은 60퍼센트 정도라고 하더구나.”60퍼센트는 낮은 수치는 아니었다.하지율은 휴대전화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도 잊은 채 입술을 깨물었다.“정말 확실한 건가요?”단종건은 코웃음을 치듯 말했다.“내가 언제 너한테 거짓말한 적 있더냐?”“새로운 치료법이 나온 건가요?”단종건은 헛기침을 한 번 했다.“흠, 그건 아니고... 너도 알다시피 손 수술 쪽은 내 전문 분야가 아니거든.”잠시 말을 고른 단종건이 다시 입을 열었다.“대신 이 분야에서 손꼽는 전문가를 찾았다. 네 상태를 검토해 본 뒤 성공 가능성이 60퍼센트 정도는 된다고 하더구나. 지율아, 시간 되면 이쪽으로 와서 정밀검사부터 받아 보자.”하지율은 잠시 말을 잃었다. 단종건이 직접 그런 전문가를 찾아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단종건 정도 되는 명의라면 자신보다 뛰어난 전문의를 알고 있어도 전혀 이상해할 것이 없었다.그런데도 이상하게도 손형원이 떠올랐다.손형원 역시 예전에 하지율에게 손을 치료할 수 있는 의사를 찾았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하지율은 복잡해진 머릿속을 정리하며 말했다.“지금은 M국에 있어요. 아마 다음 주쯤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그래. 돌아오면 바로 연락해라.”전화를 끊은 단종건은 서서히 표정을 굳히더니 뒤에 서 있던 젊은 남자를 돌아봤다.“이럴 거였으면 처음부터 그러지 말았어야지.”단종건의 목소리에는 차가운 기색이 서려 있었다.“지율이 손을 망가뜨릴 때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다. 결국 지율이에게 장애를 남기더니
하지율은 억지로 정신을 붙들고 고윤택과 함께 놀이기구를 탔다.하지만 점심을 먹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기 시작했다.당장 눈만 감아도 그대로 잠들 것 같은 상태였다.고윤택은 그런 하지율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엄마, 요즘 잠 잘 못 자요?”하지율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응... 조금.”고윤택은 제법 의젓한 목소리로 말했다.“피곤하면 먼저 가서 쉬어요. 중요한 일이 있으면 그것부터 하고 나중에 안 바쁠 때 또 만나면 되잖아요.”그 말을 들은 하지율은 더욱 미안해졌다.정말 중요한 일 때문이었다면 차라리 마음이라도 편했을 것이다.하지만 실제 이유는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조차 없는 것이었다.하지율은 최근 들어 주용화가 밤마다 유난히 집착하는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그럼에도 하지율은 주용화를 탓할 수 없었다.고윤택이 위험에 처할 때마다 목숨을 걸고 구해 낸 사람은 언제나 주용화였으니까.그런 주용화를 비난할 자격은 없다고 생각했다.게다가 진소현의 말처럼 하지율은 아직도 주용화가 보여 주는 마음만큼 온전히 돌려주지 못하고 있었으니까.결국 하지율이 할 수 있는 일은 지금처럼 아무 말 없이 받아주는 것뿐이었다.고지후는 한동안 하지율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지율아, 많이 피곤해 보인다. 오늘은 먼저 들어가. Z국 떠나기 전에 시간 맞춰서 다시 만나자.”하지율의 목소리는 작게 가라앉아 있었다.“미안.”“그만 신경 쓰고 가서 쉬어.”고지후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누군가 뒤에서 지켜주고 있으니까... 굳이 데려다주지는 않을게.”하지율은 순간 눈을 깜빡였다.곧바로 고지후가 말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차렸다.주용화가 붙여 둔 경호 인력이었다.최근 벌어진 두 번의 사건 이후로 주용화는 아주 작은 위험까지도 용납하지 않았다.하지율은 몸을 숙여 고윤택을 가볍게 안아 주었다.“엄마 먼저 갈게...”놀이공원을 나온 하지율은 택시를 부르려다 걸음을 멈췄다.입구 근처에서
스카프 아래로는 희미하게 가려진 붉은 자국들이 군데군데 드러나 있었다.고지후는 가슴 한가운데가 거대한 손에 움켜쥔 듯 답답하게 조여 오는 감각을 느꼈다.숨이 막힐 만큼 괴로웠고 동시에 아릿한 통증이 가슴 깊은 곳을 파고들었다.이미 각오했던 일이었다.하지만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견디기 힘들었다.그제야 고지후는 하지율을 정말로 잃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했다.아직 시간은 이른 편이었다. 하지율은 약속을 지키지 못한 미안한 마음에 고윤택에게 영화를 보러 가자고 제안했다.고윤택은 하지율과 함께하는 시간이라면 단 1초라도 더 갖고 싶었다.고윤택은 두 손을 마주 잡으며 환하게 웃었다.“좋아요! 아빠랑 엄마랑 같이 영화관에 가는 건 처음이에요!”예전에도 하지율은 고윤택과 함께 영화를 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고지후는 바쁜 일정 때문에 한 번도 함께하지 못했다.고지후 역시 고윤택과 시간을 보내고 싶었고, 하지율과도 조금이라도 더 함께 있고 싶었다.마침 하루 일정을 비워 둔 상태였기에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영화관에 도착하자 고지후는 자연스럽게 영화표를 예매했다.상영관 안에서는 고윤택을 가운데에 두고 하지율과 고지후가 양옆에 자리를 잡았다.아빠와 엄마가 함께하는 영화 관람이 처음인 고윤택은 내내 들뜬 모습이었다.하지만 영화가 시작된 지 십여 분도 지나지 않아 하지율은 잠들고 말았다.영화가 끝난 뒤에야 고지후가 조심스럽게 하지율을 깨웠다.“지율아, 영화 끝났어. 이제 가자.”하지율은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봤다.상영관의 불은 이미 모두 켜져 있었고 관객들도 대부분 자리를 떠난 뒤였다.하지율은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영화 내용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잠들어 버린 모양이었다.고윤택과 영화를 보러 왔지만 정작 영화 한 편을 통째로 자고 만 셈이었다.하지율은 민망한 표정으로 시간을 확인한 뒤 말했다.“윤택아, 저녁은 뭐 먹고 싶어? 엄마가 사 줄게.”고윤택이 입을 열기도 전에 고
주용화는 거실 탁자 위에 놓인 건강 식이요법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누가 봐도 하지율이 읽던 책이었다.그때 현관 쪽에서 낮고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여기까지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주용화가 고개를 돌리자, 문 앞에 선 고지후가 눈에 들어왔다.고윤택은 고지후를 발견하자 곧장 달려갔다.“아빠, 언제 오셨어요?”고지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말했다.“윤택아, 엄마한테 먼저 가 있어. 아빠는 화야 삼촌이랑 잠깐 이야기 좀 할게.”고윤택은 두 사람의 분위기를 살피더니 순순히 자리를 비켜 주었다.고윤택이 방을 나가고 나서야 고지후가 안으로 들어왔다.잠시 주변을 둘러본 고지후가 먼저 입을 열었다.“둘러보시니 어떻습니까?”주용화는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담담하게 답했다.“여자 보는 눈이 없는 고지후 씨한테 감사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순간 공기마저 싸늘하게 식어 버렸다.짧은 침묵 끝에 고지후가 다시 입을 열었다.“지율이가 떠난 뒤에도 이 집만큼은 손대지 않았습니다. 지율이가 돌아오고 싶어지는 날이 온다면 언제든 돌아올 수 있도록요.”주용화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가정을 지키지 못한 원흉이 이제 와서 떠난 조강지처가 돌아올 자리를 남겨뒀다는 어처구니없는 말을 하는 겁니까?”주용화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더욱 또렷한 목소리로 덧붙였다.“헛수고일 겁니다. 제가 있는 한 지율 씨는 절대로 고지후 씨한테 돌아가지 않을 테니까요.”말을 마친 주용화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그 순간 뒤에서 고지후의 차갑고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두 분 사이를 방해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포기할 생각도 없고요.”고지후는 천천히 방 안을 둘러봤다.“이 집을 보셨다면 아실 겁니다. 모든 흔적이 쉽게 지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저에게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죠.”주용화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그건 두고 봐야 알겠군요.”주용화는 그 말만 남긴 채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방을
“아무리 권세가 대단하다고 해도 해외에서 나댈 수는 없으니까요.”그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임채아가 조심스레 말을 보탰다.“다른 건 참을 수 있지만... 선생님을 공경하지 않는 건... 전 정말 용납이 안 됩니다.”그러면서 지난번 대회장에서 하지율을 마주쳤을 때, 하지율이 현성 대가에게 눈곱만큼도 예의를 보이지 않았던 일을 들려주었다.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의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곧이어 하지율에 대한 남은 호감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레이나가 콧방귀를 뀌었다.“저런 인물이 무대에서 활개를 치다니, 음악가의 수치와 다름없
함우민이 한숨을 내쉬었다.“하준이가 성격이 급한 건 맞지만, 의리 하나는 확실해. 그렇지 않으면 널 위해 사람들을 유인하지 않았을 거잖아. 임채아 씨가 제때 도와주지 않았으면 하준이는 지금 살아 있지도 못했을 거고. 하준이는 우리랑 같이 큰 애야. 우리가 안 챙기면 누가 챙기겠어? 단보현 씨한테 제대로 밟혀서 집안 무너지는 걸 눈 뜨고 지켜보라고?”고지후는 말이 없었다.함우민이 이어서 말했다.“하지만 네 말도 맞아. 하준이가 너무 제멋대로인 건 사실이니까, 이번에 좀 크게 혼나 보고 정신 차리는 것도 나쁘진 않지. 하지만..
“소린아, 그냥 그렇게 해 줘. 나도 다 계획이 있어.”유소린이 잠깐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음악회가 코앞이니까 화제성 올리는 건 나쁘지 않지. 다만 온라인에는 걸핏하면 유언비어를 퍼 나르는 사람들이 있잖아. 그리고 바이올린 대회, 내일부터 본선이야. 결승 가려고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는 애들도 많다던데... 지율아, 난 사실 네가 좀 걱정돼.”하지율이 대답하려는 찰나, 주용화가 먼저 입을 열었다.“그 기간에 제가 하지율 씨 곁을 지키겠습니다. 경호까지 제가 맡을게요.”유소린이 하지율을 쳐다보았다. “지율아, 어때?
하지율 손목이 부어서, 당분간 바이올린은 어렵겠다.며칠 연습을 비워도 큰 타격은 없으니, 그 사이 유소린과 음악회 준비를 맞춰 보기로 했다.주용화는 하지율이 이틀쯤 연습을 못 한다는 말을 듣고, 눈에 띄게 속상해했다.유소린이 그걸 보고 웃었다.“지율이 바이올린 연주가 그렇게나 잠이 잘 와요? 하루만 못 들어도 밤새 뒤척이게?”농담이었는데, 주용화가 의외로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지율 씨 연주는 몸과 마음을 풀어 주는 힘이 있어요. 하루만 못 들어도 밤새 잠이 오지 않아요.”유소린이 잠깐 멍해졌다가 감탄했다.“화야